
한국은 부유해졌다. 그런데 그 성공은 노년의 삶 어디까지 도착했을까. ‘선진국의 역설’은 돈·일·관계·생활환경을 따라 한국인이 잘 늙어갈 수 있는 조건을 살펴본다. 두 번째 질문은 일이다. 오래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기회다. 그러나 원해서 오래 일하는 것과 그만둘 수 없어 오래 일하는 것은 같은 노후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70대 초반 10명 중 4명이 일한다. OECD가 2026년 펴낸 한국 웰빙 보고서를 보면 2023년 한국의 65~69세 고용률은 51%, 70~74세는 40%였다. OECD 평균은 각각 29%, 17%다. 70대 초반까지 일하는 비율이 OECD 평균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55~64세도 마찬가지다. 2024년 고용률은 69.9%로 OECD 평균 64.6%보다 높았다. OECD가 실제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는 나이와 정상 은퇴연령을 비교했더니 한국은 남성이 3.4년, 여성은 5.4년 더 늦게까지 일했다. 일본·멕시코를 포함한 세 나라 가운데 격차가 가장 컸다.
숫자만 보면 한국은 고령자가 오래 일할 수 있는 나라처럼 보인다. 그런데 주된 직장만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장면이 나타난다. KDI가 2024년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 61~64세 남성 가운데 50세 때 다니던 생애 주직장에서 정년 전에 퇴직한 비율은 41.8%였다. 정년퇴직은 32.0%, 60세를 넘겨 계속 다닌 사람은 26.2%였다. 조기퇴직 비율이 2019년 46.3%보다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장 큰 집단이다.
한국 노년 노동의 역설은 여기에 있다. 주된 직장에서는 일찍 나가는데, 노동시장에서는 늦게 떠난다. 조기퇴직했다고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조기퇴직자의 77.7%가 계속 일하기를 원했고, 희망 근로연령은 평균 72.4세였다. 정년퇴직자도 78.4%가 계속근로를 희망했다.
그렇다면 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직장에서 일찍 나왔을까.
정년 이전 조기퇴직 사유 1위는 ‘퇴직유도·해고’로 35.3%였다. 건강 17.8%, 계약종료 17.2%, 휴·폐업 12.7%가 뒤를 이었다. 여가를 위해 그만뒀다는 응답은 0.1%에 불과했다. 직종별로 보면 차이는 더 극적이다. 사무직 조기퇴직자의 70.8%가 권고사직·명예퇴직·정리해고 등 퇴직유도나 해고를 이유로 꼽았다. 전문직도 54.1%, 관리직은 43.5%였다. 반면 서비스직이나 판매직에서는 계약종료, 농림어업과 단순노무직에서는 건강 문제의 비중이 컸다.

[인포그래픽]
‘퇴직은 빠른데 은퇴는 늦다’-한국 노년의 긴 은퇴
주된 직장을 오래 다니는 것과 노동시장에 오래 남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61~64세 남성
→ 생애 주직장 정년 전 퇴직 41.8%
조기퇴직자
→ 계속 일하고 싶다 77.7%
65~69세 고용률
→ 한국 51% / OECD 29%
70~74세 고용률
→ 한국 40% / OECD 17%
문제는 주된 직장을 나온 뒤다. KDI 분석에서 퇴직 후 재취업한 사람의 51.4%가 1~9인 사업장에서 일했다. 기존에 하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다’는 비율은 13.7%,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응답은 22.6%였다. 합치면 36.3%다. 오래 쌓은 경력이 다음 일자리에서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셈이다.
OECD도 한국의 은퇴 과정을 한 번의 퇴직으로 끝나는 구조가 아니라 ‘분절된 은퇴 경로’로 본다. 주된 직장에서 일찍 나온 뒤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하고, 이때 비정규직이나 낮은 임금의 일자리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 다시 일을 하는지도 숫자는 분명하다. 2023년도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39.0%가 현재 일을 하고 있었다. 65~69세는 59.4%, 70~74세 38.9%, 75~79세도 29.0%였다. 80~84세에서도 21.9%가 일했다.
현재 일하는 이유로는 생계비 마련이 77.9%를 차지했다. 용돈 마련 6.9%, 건강 유지 6.2%, 능력이나 경력 발휘 3.6%와 큰 차이다. 그렇다고 고령자의 노동을 모두 ‘어쩔 수 없는 노동’으로 묶어서도 안 된다. 현재 일하는 노인의 67.1%는 자신의 일자리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같은 ‘일하는 노인’ 안에서도 일의 의미가 다르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의 고령 자영업자 연구가 이 차이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구는 60세 이상이면서, 가장 오래 다닌 임금 일자리에서 50세 이후 퇴직한 뒤 자영업으로 옮긴 사람들을 근로시간과 연금 수준에 따라 네 집단으로 나눴다.
가장 큰 집단은 저연금·고근로의 ‘생계형’으로 46%였다. 이들이 받는 공적·사적연금은 월평균 79만 3000원, 근로시간은 주 45.6시간이었다. 반면 연금이 상대적으로 많고 근로시간이 짧은 ‘여가추구형’은 월평균 연금 236만 8000원을 받으며 주 19.8시간 일했다.
두 집단 모두 통계에서는 ‘일하는 고령자’다. 하지만 한쪽은 주 20시간 안팎을 일하고, 다른 한쪽은 주 45시간 넘게 일한다. 고용률 하나에는 ‘일하고 싶은 노년’과 ‘일해야 하는 노년’이 함께 들어 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질문이 생긴다. 왜 주된 직장에서 나온 고령자가 다시 자영업으로 향할까. 한국은행 분석에서는 생계형 고령 자영업자가 일자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본 조건이 높은 임금이 아니라 ‘계속근로 가능성’이었다. 이들은 다른 유형보다 재취업 뒤 실제로 더 오래 일하는 경향도 보였다.
기대소득을 계산한 결과는 더 뜻밖이다. 폐업이나 퇴직으로 다시 무직이 될 가능성을 빼고 계산하면 상용근로의 기대소득이 자영업보다 높았다. 그런데 앞으로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까지 반영하자 순서가 뒤집혔다. 자영업의 기대소득이 상용근로보다 높아졌다. 더 많이 벌 수 있어서가 아니라, 더 오래 일할 수 있다고 판단해 자영업을 택하는 노년이 있다는 뜻이다. 연구진도 고령층의 자영업 선택이 임금근로보다 ‘계속근로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과 관련 있다고 정리했다.
자영업의 안정성이 높다는 뜻은 아니다. 60대 신규 자영업자가 폐업한 뒤에는 상용직으로 이동하는 비율이 낮고 임시·일용직으로 옮기는 비율이 높았다. 연구는 이를 고령층이 자영업에서 실패했을 때 경제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신호로 봤다.
결국 한국 노년의 노동을 고용률만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몇 살까지 일하는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주된 직장에서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는가. 퇴직한 뒤 쌓아온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가. 건강에 맞춰 일의 양과 시간을 줄일 수 있는가. 그리고 생활비가 충분하다면 일을 그만둘 수도 있는가.
오래 일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래 일할 수 있는 것과 오래 일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KDI 한요셉 연구위원은 고령 노동시장에 필요한 변화를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문제는 일하는 사람의 고령화가 아니라 일하는 방식의 고령화”라는 것이다. 고령자가 늘어나는 것 자체보다 그들이 일할 수 있는 방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다. 한국의 높은 고령자 고용률이 정말 반가운 숫자가 되려면 ‘몇 살까지 일했는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는가. 노년의 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그 선택권이다. 그리고 일을 멈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아플 때 전화할 사람,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는지도 노후의 안전을 좌우한다. ‘선진국의 역설’ 세 번째 편에서는 한국 노년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아는 사람은 있는데, 정작 의지할 사람은 있을까.
[이 기사에 활용한 주요 자료]OECD, Inclusive and Sustainable Well-being in Korea: 30 Years of OECD Membership and Future Policy Opportunities, 2026
→ 65~74세 고용률과 조기퇴직 이후 재취업 등 한국의 분절된 은퇴 경로를 분석.
OECD, OECD Employment Outlook 2025: Korea, 2025
→ 55~64세 고용률과 실제 노동시장 이탈연령을 OECD 국가와 비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3년도 노인실태조사」
→ 65세 이상 경제활동 참여율과 현재 일을 하는 이유, 일자리 만족도를 분석.
한요셉 KDI 연구위원, 「새로운 고령 인구, 이에 대응하는 노동시장의 변화」, KDI·한국은행 공동 심포지엄
→ 생애 주직장 조기퇴직, 퇴직 사유와 재취업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향 이동을 분석.
이재호, 「늘어나는 고령 자영업자」, KDI·한국은행 공동 심포지엄
→ 고령 재취업 자영업자를 유형별로 나누고 생계형 노동과 ‘계속근로 가능성’을 중심으로 자영업 진입 동기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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