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도 나는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동에서 소문난 양반가 장남이었고, 어머니 역시 경북여고를 졸업한, 그 시절엔 드물었던 엘리트였다. 두 분 모두 항상 당차고 당당했다. 나는 어릴 때 돈 걱정이 뭔지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 당당함은 한편으론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무거운 갑옷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언제나 “괜찮다”는 말을 먼저 꺼냈고, “힘들다”는 말은 괜히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미국 미시간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시절만 해도 미국 친구 중에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인종차별도 지금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말 한마디, 피부색 하나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어떤 날은 ‘내가 정말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장남이면 끝까지 견뎌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집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 ‘부도를 세 번 넘기지 못했다’는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내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손에 쥔 종이가 낯설게 떨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짐을 허둥지둥 챙겨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주한 건 전쟁터였다. 당당하던 아버지·어머니는 한순간에 늙고 고단한 얼굴이 돼 있었다. 집 안은 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 눈을 피했고,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집 안 살림살이는 여기저기 망가져 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 사업 잘 될 때 돈을 빌려준 친척들이 죄다 집기까지 가져가 버렸다고 했다. 밥은 먹으라고 냄비 하나와 휴대용 가스버너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다 가져가 버린 거였다.
그때의 배신감과 분노는 정말 말로 다 못 할 정도였다. 화가 나 소리치고 싶다가도, 소리치면 더 초라해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아버지 앞에서 울고 싶었지만, 울면 나 자신이 다 허물어질 것 같아 결국 입술만 꼭 깨물었다.
나는 순식간에 집안의 가장이 됐다.
그 후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부모님 챙기고, 밥 마련하고, 이불과 난방까지 다 신경 써야 했다. 하루가 끝나면 몸이 먼저 뻗었고, 마음은 잠들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소개로 상가 분양 영업을 알게 됐다. 큰돈을 벌 기회라는 말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안산으로 올라갔다.
처음엔 정말 참담했다. 좁은 원룸에서 여덟 명이 모여 등 돌리고 자며,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보냈다. 그래도 버텼다. 누군가 ‘영업사원’이라는 딱지로 나를 깎아내리는 시선을 이겨내야만 했다. 가난해진 집안을 생각할수록 더 악착같이 살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키가 크고 인상이 좋다는 얘기, 외국에서 얻은 자신감과 말솜씨, 이런 것들이 내 무기가 됐다. 나는 상대방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고, 계약서에 사인받을 때마다 ‘내가 결국 우리 집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에 내 안에서 이상한 용기가 자라났다.
수수료가 나오는 날만 되면, 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날 나는 돈보다 더 중요한 신뢰를 잃었다. 땀 흘린 만큼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정의가 참 쉽게 무너지는 걸 직접 봤다. 그래서 동생들과 마음을 모았다. “차라리 우리가 직접 하자. 수수료도 정확하게 나누자.”
그렇게 내가 대표가 돼 분양대행사를 차렸다. 돈보다 사람을 더 챙겼고, 약속도 반드시 지켰다. 처음에는 동생 세 명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스무 명까지 늘었다. 사람이 늘어나니 일도 많아졌다. 전국의 택지개발지구를 다니면서 상가를 완판시키는 팀으로 성장했다. 그때 나는 ‘사람을 속이지 않는 판’을 직접 만들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그 마음이 나를 더 열심히 뛰게 했다.
그러던 중 의정부 금오지구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시행 사업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분양대행만 하지 말고, 직접 시행에도 도전해봐. 큰돈이 아니어도 좋으니, 지분투자 한번 해봐.” 나는 가진 돈 전부를 투자했다. 내 돈이 들어간 건물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분양에도 더 열정을 쏟았다. 결국 완판에 성공했고, 내 몫으로 5억 원을 벌었다. ‘아버지처럼 나도 해낼 수 있다’는, 오랫동안 품고 있던 열등감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그때부터 일이 쏟아졌다. 어떤 현장에선 저층은 잘 팔리는데 위층이 남았다. 그 현장을 책임지고 싶다는 생각에 위층을 직접 분양받기도 했다. 그때 함께했던 종합건설사 대표님께서 내 모습을 좋게 봐주셨고, 그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중에는 더 큰 도전도 했다. 동탄 1기 신도시에서 상가 두 동을 전부 내 자금으로 직접 추진했다. 매일 출근하는 직원만 50명이 넘었던 시기도 있었다. 수수료도 정해진 날에 한 푼도 빠짐없이 지급했더니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영업사원이 자기 지인을 또 영업사원으로 데려오는 일이 계속된 것이다.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느꼈다. 점점 겸손함은 멀어지고 자만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동탄에서 성공하자마자 부모님을 모시고 용인 수지에 좋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가구며 가전도 그때 최고로 꾸몄다. 내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내리막은 언제나 자만이 고개를 들 무렵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나는 향남 신도시에서 가장 큰 상가 부지를 샀다. 그러던 중 미국발 리먼 사태가 갑자기 터졌다. 내 현장이 그 폭풍에 그대로 휩쓸렸다. 결국 사업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100% 미분양이라는 현실을 맞이했다. 준공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건축비와 투자금 상환이 숨통을 조여왔다. 전 재산을 잃고 거리로 나앉기까지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타들어가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돈이 사라지는 속도는 상상보다 훨씬 빨랐고, 사람들과의 거리는 그보다 더 빨리 멀어졌다. 무엇보다 무서웠던 건, 내 목소리가 내가 들어도 낯설게만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여보려 해도, 내 안에서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가족같이 함께하던 직원들도 하나둘 떠났다. 명절은 물론 우리 부부 생일이나 아이들 생일까지 챙겨주던 협력업체들이 가장 먼저 건물에 가압류를 걸었다. 그 공문을 보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 ‘딱’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에 담배만 네 갑씩 피웠다. 결국엔 담배 살 돈도 없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친정에 보내고 나는 고시원에 들어갔다. 내 이름이 적힌 명함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사라지고, 고시원 방 번호만이 내 이름이 됐다.
고시원 복도에서 들려오던 라면 끓는 소리, 누군가의 기침, 싸구려 세제 냄새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도 내 현실을 더 또렷이 느끼게 해줬다. 그 냄새 속에서 내 실패를 곱씹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울었다. 바닥에 떨어진다는 건 단순히 가진 걸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거였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내일도 믿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내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
어느 날 밤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원 작은 방에서 TV를 켜놓고 막걸리 한 병을 꺼내놓았다. 그리고… 쥐약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손을 움직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안엔 ‘체면’만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쓸쓸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내 인생이 남는 게 너무 싫었다.
쥐약을 입에 가져가려고 할 때, 갑자기 아이들이 불러주던 노래가 떠올랐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어린 목소리와 그 멜로디 한 소절이 뼛속까지 울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맥이 풀려 주저앉았고, 쥐약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아이들 목소리뿐이었다. 그 목소리는 내 실패를 비웃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어 달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그 말에 결국 졌다. 그리고 그 패배 덕분에 살 수 있었다.
밖으로 나와 잠깐 바람을 쐬었다. 고시원 앞에 성당 십자가가 희미하게 보였다. 괜스레 그 십자가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이끌리듯 걸음이 닿은 성당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컨테이너처럼 생긴 임시 건물 안에 신자들이 모여 막걸리에 수육을 나눠 먹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서 있었는데, 수염이 덥수룩한 신부님이 활짝 웃으며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하세요, 형제님” 하고 불러줬다.
아무도 내게 직업을 묻지 않았다. 내 사정을 캐묻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말없이 잔을 채워줬다. 며칠 동안 제대로 밥 한 끼 못 챙긴 나에게 막걸리와 수육 한 점은 진짜 꿈처럼 달콤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고 싶었는데, ‘맛있다’는 감정이 되살아나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날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혀끝에서도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였다. 시설 담당 형제님이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넸다.
“지금 당장 일 없으면, 저랑 같이 성당 시설 고치고 유지보수 한번 해보실래요? 오늘처럼 고기랑 막걸리도 자주 먹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도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구나 싶었다.
나는 목수 형제님들을 따라다니며 처음으로 막노동을 시작했다. 몸이 너무 힘드니까 오히려 나쁜 생각이 덜 들었다. 망치를 잡고 못을 박을 때마다, 내 마음도 어디엔가 다시 단단히 고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노동’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됐다. ‘돈을 벌기 위해’가 아니라, 진짜 ‘살기 위해’ 움직이는 몸이 얼마나 정직하고 소박한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땅이 나왔다’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래 알고 지낸 토지 매매 전문 부동산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난 이제 개발사업 안 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계속 “그래도 한 번만 보시죠. 토지주가 저랑 아주 가까운 분인데, 지금 바로 활용하기 힘든 땅이라 사장님의 아이디어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라고 이야기했다.
다음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땅은 평택 미군기지 근처였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봤던 주택들과 그곳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토지주가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묻자,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미군기지가 있으니, 미군들을 위한 임대주택 사업이 잘 맞을 것 같습니다.”
토지주는 내 눈을 오랜 시간 바라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사장님이 직접 해보실 생각 있으신가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는 땅 살 돈도 없고, 건물 지을 자금도, 전문 인력도 없습니다.”
그랬더니 토지주는 예상치 못한 제안을 꺼냈다. “토지값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사장님 눈을 보니 믿음이 갑니다. 한번 해보세요.”
계약금도 없이 땅을 맡기겠다는데,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신기하게도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믿음이 돈보다 훨씬 큰 선물로 다가왔다. 그 믿음을 저버리면 다시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장남이라는 책임을 떠올렸다.
나는 오래전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게 연락을 해봤다. 그중 한 명이 찾아와 줬는데, 동생처럼 지내던 친구였다. 나이 차이도 꽤 났지만, 내 사정을 듣고는 술 한잔을 건네며 말했다.
“사장님, 다시 시작하죠.”
한 달쯤 뒤에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월급조차 줄 수 없는 나를 따라와 줬다. 설계부터 시장조사, 시공 준비까지 온 힘을 다해 뛰어다녔다.
만약 혼자였다면 두려움에 쉽게 움츠러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함께 움직여주니, 덕분에 한 발 한 발 다시 내디딜 수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예전에는 내가 사람을 이끈다고 믿었는데, 막상 바닥에서는 사람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게 인생의 순서구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고민은 돈이었다. 건물을 올릴 자금도 없고, 시공해줄 사람도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오래전 인연이 있던 의정부의 종합건설사 대표님께 전화를 드렸다. 대표님은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의정부 이후로 한 번도 잊은 적 없어요. 우리가 먼저 돈 들여서 지어드릴 테니, 건물이 준공되면 담보대출로 공사비만 갚으세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는구나.’ 그리고 그 빚이 결국은 나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두 번째 막이 열렸다. 지금 나는 다시 여러 채의 건물을 짓고, 미군들에게 임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넉넉하다고는 못 하지만, 예전처럼 허세에 기대어 살진 않는다. ‘내 손이 황금손’이라는 헛된 착각도 내려놓았다. 대신 이제야 알게 됐다. 진짜 황금은 손끝이 아니라,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마음과 그 마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란 걸.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고시원 작은 방에서 쥐약을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걸 내려놓고 방을 나섰을 때, 성당에서 마신 막걸리 한잔이 나를 살렸다. 내 사정은 묻지 않고 조용히 잔을 채워주던 그 밤, 나는 아주 천천히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는 다시는 그 심해로 혼자 가라앉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 내 앞에서 무너질 때, 나 역시 꼭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일단 앉아. 밥부터 먹자. 오늘만 넘기자, 오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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