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고령화를 바라보는 기업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고령자를 위한 상품과 서비스를 별도로 개발하는 특화된 ‘시니어 비즈니스’에서 벗어나, 고객과 직원 모두가 오래 사는 사회를 전제로 기존 사업과 조직을 다시 설계하려는 움직임이다.
일본종합연구소는 지난 27일 발표한 백서 ‘장수사회의 도래, 기업에 요구되는 변화와 성장전략’에서 이를 ‘론제비티 트랜스포메이션(Longevity Transformation, LX)’이라고 규정했다. 디지털화가 기업의 DX를 촉발했듯 장수화 역시 고객과 시장, 인재, 조직을 바꾸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장수사회, 더 이상 복지의 문제 아냐”
보고서는 일본 사회를 설명할 때 익숙하게 사용해 온 ‘초고령사회’와 ‘장수사회’를 구분했다. 초고령사회가 65세 이상 인구 증가와 사회보장비, 돌봄 수요, 노동력 부족 등에 주목한다면 장수사회는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면서 일하고 배우고 소비하고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나타나는 경제·사회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령자를 ‘지원받는 존재’에서 생산·소비·투자와 가치 창출의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제안했다.
장수사회가 고령화를 핑크빛으로 바라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고서가 인용한 장래인구 추계에 따르면 2040년 일본에서는 국민 3명 중 1명 이상이 65세 이상이 된다. 고령인구는 3929만 명, 고령화율은 34.8%에 이를 전망이다. 이 가운데 치매나 경도인지장애(MCI)가 있는 사람도 1197만 명으로, 전체 고령자의 약 30%에 달한다. 고령자 10명 중 3명꼴이다. 혼자 사는 고령자 가구 역시 1041만 가구로 늘어난다.
이러한 장수화는 소비와 노동의 기간을 늘리는 동시에 의료와 돌봄, 가족의 부담을 키운다. ‘장수사회’는 이런 현실을 낙관적으로 포장하는 개념이 아니라, 복지 문제로만 다뤄온 고령화를 기업과 시장까지 대응해야 할 구조적 변화로 보자는 접근이다.
반면 건강하고 활동하는 고령기도 길어진다. 일본의 65세 이상 노동력 인구는 2025년 960만 명에서 2040년 1261만 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고령자가 주요 고객인 동시에 주요 인력이 되는 셈이다.
경제적 영향력도 크다. 가구주가 65세 이상인 가구의 소비는 일본 전체의 약 40%를 차지한다. 이들 가구가 보유한 금융자산 비중은 2019년 51.0%에서 2040년 57.5%로 높아질 것으로 추산됐다.

장수사회 속 시니어, 8개 부류로 나눠
일본 기업들이 움직이는 배경에는 커지는 시장도 있다. 일본종합연구소가 정리한 건강증진·고령화 관련 산업 시장은 2020년 24조9000억 엔(약 216조원)에서 2050년 76조8000억 엔(약 667조원)으로 3배 이상 커질 전망이다. 의료·돌봄뿐 아니라 생활지원 서비스와 케어테크, 시니어테크 등이 새로운 시장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됐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기업이 상대해야 할 ‘시니어’의 모습도 달라진다. 보고서는 고령층을 프리시니어, 일하는 시니어, 즐기는 시니어, 배우는 시니어, 관계를 만드는 시니어, 사회를 지원하는 시니어, 노후에 대비하는 시니어, 지원받는 시니어 등 8가지 모습으로 나눴다.
같은 고령자라도 건강 상태와 취업 여부, 가족 구성, 인간관계, 자산 등에 따라 생활과 가치관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일하면서 배우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등 여러 유형에 동시에 해당할 수도 있다. 기업이 봐야 할 것은 ‘고령자 시장’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건강, 취업, 학습, 사회참여, 자산관리, 주거, 이동, 돌봄 등 각자의 삶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은퇴를 앞둔 프리시니어에 대한 분석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은 직장생활과 자녀, 주택대출, 부모 돌봄 문제를 겪으면서 자신의 노후도 준비하기 시작하지만 건강과 자산, 경력, 주거, 돌봄 문제를 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시니어라고 인식하지 않아 ‘고령자용’이라고 이름 붙인 서비스에 거부감을 느끼기 쉽다는 점도 지적했다.
모든 직원이 노화와 돌봄에 대해 숙지해야
이 보고서가 사례로 든 일본 기업들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SOMPO홀딩스는 보험업의 영역을 돌봄과 가족 지원까지 확장했다. 그룹의 보험사업과 돌봄사업을 결합해 무료 돌봄 상담 서비스 ‘웰비오’를 운영한다. 돌봄 상담부터 시설 소개, 치매 상담, 향후 돌봄비용 계산, 돌봄과 자산에 관한 상담을 한 곳에서 제공한다. 보험 가입자가 아니어도 이용할 수 있다.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는 일과 가족 돌봄의 양립을 지원하는 ‘웰비오 Biz’도 운영한다. 일본종합연구소는 이를 보험회사가 단순히 ‘보험금을 지급하는 존재’에서 고객의 생애 위험에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존재로 사업 범위를 확장한 사례로 평가했다.
고령 고객을 상대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특히 금융과 부동산, 의료, 돌봄, 통신 등에서는 고객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 돌봄 관계자, 성년후견인 등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에 따라 기업도 고객 한 사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의사결정 네트워크’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동석을 전제로 한 설명이나 대리인 대응, 고객의 이해 여부 확인 등을 계약 과정에 포함하고 직원도 고령 고객과의 의사소통이나 치매·노쇠에 관한 기본 지식을 갖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령 인력과 인공지능의 적극적인 협업 유도
장수사회는 기업 내부도 바꾼다. 보고서는 시니어 고용의 목표가 단순히 고용 인원을 늘리는 ‘양적 활용’에서 이들이 가진 전문성과 경험을 기업 가치로 바꾸는 ‘질적 활용’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요한 것은 몇 명을 재고용했느냐가 아니라 시니어의 경험과 지식을 얼마나 기업의 경쟁력으로 전환했느냐는 것이라고 보고서는 설명한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은 재고용 제도에 ‘시니어 잡 코스’를 두고 전문성과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직무에 고령 직원을 배치하고 있다. NEC는 연령에 따른 일률적인 보직 해제를 폐지하고, 고령 직원도 자신의 경력 계획에 따라 사내 공모 직무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리코와 오므론은 직무형 인사제도를 도입해 고령 직원에게도 역할과 성과에 따른 처우를 적용하고 있다. 정년 이후에도 관리직이나 전문직으로 일할 기회를 열어두고 ‘몇 살인가’보다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중시하는 방향이다.
제조업에서는 인공지능(AI)과 고령 인력의 경험을 결합하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도요타자동차의 ‘초대 크라운 복원 프로젝트’에서는 시니어 숙련 기술자와 젊은 기술자가 협업했다. 베테랑이 가진 제조 노하우와 젊은 기술자의 3D CAD·3D 프린터 기술을 결합해 차량을 복원했다. 젊은 직원은 베테랑의 노하우를 디지털 기술로 가시화하고, 베테랑은 젊은 직원이 만든 설계 데이터를 경험을 토대로 보완했다.
가와사키중공업은 NTT데이터와 생성형 AI를 활용해 숙련 기술자가 가진 ‘암묵지’, 즉 경험과 직감에 축적된 노하우를 기업 자산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AI가 숙련 기술자와 대화하며 판단 기준과 경험칙을 추출해 지식으로 축적하고, 젊은 기술자가 필요할 때 이를 활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일본종합연구소가 제시한 LX는 크게 네 방향이다. 장수화에서 새로운 시장을 찾는 성장 전략, 고령 고객에 맞춰 기존 사업을 바꾸는 전략, 시니어 인재를 가치 창출에 활용하는 전략, 직원 고령화에 맞춰 조직을 개혁하는 전략이다.
새로운 사업 영역도 초고령사회가 주목했던 의료·돌봄에 한정되지 않는다. 보고서는 ‘론제비티 비즈니스’를 건강·웰빙, 금융·자산관리, 취업·교육, 일상생활 지원, 주거·생활환경, 사회참여·보람, 가족 지원·돌봄 지원, 의료·돌봄 산업 지원 등 8개 영역으로 제시했다. 식품·제약에서 금융·보험·부동산, 교육·인재, 유통·택배·통신, 건축·교통·여행·IT까지 대상 산업도 광범위하다. 보도자료 역시 기존 시니어 비즈니스가 고령자가 된 이후의 지원과 돌봄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더 오래, 더 건강하게, 더 풍요롭게 사는 것’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치 제공 영역이 넓어진다고 설명했다.
이는 시니어 비즈니스의 무게중심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령자를 대상으로 무엇을 팔 것인가’라는 질문만으로는 장수사회의 시장을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시니어 비즈니스라는 하나의 별도 산업이 커지는 것을 넘어 금융·유통·제조·IT·주거 등 기존 산업 전체가 장수사회에 맞춰 사업과 고객 서비스, 인재 활용 방식을 바꾸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이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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