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7

“부모 물건, 대신 버리지 마세요” 생전정리 핵심은 ‘결정권’

입력 2026-10-27 07:00

[기획] 유품 너머 삶을 정리하는, 스웨덴식 생전 정리의 지혜 #2 - 속도와 주도권 존중해야

인터뷰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

켈리 브라스크

초고령사회 한국에서 ‘생전 정리’는 더 이상 낯선 화두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죽음을 앞둔 쓸쓸한 의식이나, 평생 모은 물건을 무작정 버리는 유품 정리로 오해하는 시선이 많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스웨덴식 생전 정리인 ‘데스 클리닝’의 본질을 짚어보기 위해 두 전문가를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주-

켈리 브라스크(Kelly Brask·58)는?

미국 시카고에서 활동하는 공인 전문 정리사(CPO)이자 켈리 브라스크 오거나이징 대표. 스웨덴에서 22년간 거주한 뒤 2012년 미국으로 돌아와 전문 정리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데스클리닝과 다운사이징을 주요 전문 분야로 삼고 있으며, 2019년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식 죽음 청소’의 저자 고(故) 마르가레타 망누손을 직접 만나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현재 전문정리사 인증기관 BCPO 회장을 맡고 있다.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 켈리 브라스크가 마르가레타 망누손의 저서 ‘스웨덴식 죽음 청소’를 읽고 있다. 브라스크는 스웨덴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미국에서 생전 정리와 다운사이징을 돕고 있다.(켈리 브라스크 제공)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 켈리 브라스크가 마르가레타 망누손의 저서 ‘스웨덴식 죽음 청소’를 읽고 있다. 브라스크는 스웨덴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미국에서 생전 정리와 다운사이징을 돕고 있다.(켈리 브라스크 제공)

오래된 물건을 정리하자는 말 앞에서 노년의 마음이 먼저 닫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쟁과 가난, 혹은 격동의 산업화 시기를 맨몸으로 건너온 세대에게 물건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시작해 일궈낸 삶의 성취이자,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에서 나와 가족을 지켜줄 심리적 안전망에 가깝다.

최근 한국에서도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가 맞물려 ‘생전 정리’나 ‘유품 정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지만, 현장의 풍경은 때로 거칠다. 효율과 속도를 앞세운 정리 방식이나 마음 급한 자녀들이 노인의 삶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갈등과 상처가 남는다.

지난 2016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로 이주해 4년간 거주하며 현지 문화를 체득하고, 현재 미국에서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켈리 브라스크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다. 당시 스웨덴어를 몰라 현지 취업이 막막했던 그는 자신의 강점인 ‘정리’를 살려 그해 가을 정리 컨설팅 회사를 창업했고, 이듬해 출간된 마가레타 망누손(Margareta Magnusson)의 저서 ‘스웨덴식 죽음 청소’를 접하며 본격적으로 시니어 생전 정리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는 “데스 클리닝은 집 안을 텅 비우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노년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을 지키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서면을 통해 그에게 시니어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실천의 기술과, 최근 90세 일기로 타계한 데스 클리닝의 창시자 고(故) 마가레타 망누손의 스톡홀름 자택을 직접 방문했던 특별한 기억을 물었다.

결핍을 견뎌낸 세대, 왜 물건 앞에서 주저하는가

스웨덴에서는 데스 클리닝이 노년기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통한다. 브라스크는 그 배경에 스웨덴 특유의 삶의 철학인 ‘라곰(Lagom·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함)’과 성숙한 중고 거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물건을 쉽게 사지도 않지만, 일단 사면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품질을 고릅니다. 그러다 삶이 복잡해지거나 공간이 부족해지면 미련 없이 중고 가게에 기부하거나 되팔죠. 스웨덴의 세컨드핸드(중고) 매장은 언제나 물건을 기부하려는 이들과 새로운 주인을 찾는 이들로 붐빕니다. 내가 아끼던 물건이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의 삶에서 다시 쓰인다는 확신이 있기에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서 놓을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스웨덴에서도, 그리고 그가 현재 만나는 미국의 시니어들 사이에서도 막상 정리를 시작하려면 강한 주저함과 저항감이 나타난다. 브라스크는 시니어들이 정리를 미루거나 거부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고, 둘째는 ‘아직 쓸 만한 물건을 버리는 데 대한 죄책감’이다. 특히 경제적 결핍이나 역사적 격변기를 겪은 세대에게 물건을 보관하는 행위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자 책임감의 표현이기에 죄책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셋째는 선물 받은 물건을 처분할 때 느끼는 미안함, 넷째는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의 금전적 가치를 회수하지 못한다는 본전 생각, 다섯째는 누군가 내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갈지 모른다는 통제력 상실의 두려움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는 물건을 정리하는 행위 자체가 곧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정하는 것’ 같아 회피하고 싶은 심리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무시한 채 다짜고짜 ‘안 쓰는 물건을 버리라’고 다그치는 건 그분들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물건이 정체성과 역사 그 자체인 분들에게 정리는 기억을 지우는 공포로 다가올 수 있어요. 이럴 때는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오히려 덜 중요한 물건을 걷어낸다’고 관점을 바꿔드려야 합니다. 당장 실물 상자를 떠나보내기 힘들다면, 물건의 사진을 찍어 사진첩으로 남기거나 그 물건에 얽힌 이야기를 글과 음성으로 기록해 두는 것만으로도 상실감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 켈리 브라스크.(켈리 브라스크 제공)
▲데스 클리닝 전문 정리 컨설턴트 켈리 브라스크.(켈리 브라스크 제공)

‘사진’ 맨 마지막에… 작은 결정으로 키우는 정리 근육

그렇다면 막막한 집 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까. 브라스크는 데스 클리닝의 창시자 마가레타 망누손의 조언을 인용하며 “절대 사진이나 편지부터 건드리지 말라”고 강조했다. 추억이 짙게 배어 있는 사진첩을 펼치는 순간, 옛 기억에 빠져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리는 시작도 못 하고 끝나버리기 일쑤다.

“가장 좋은 출발점은 감정의 소모가 전혀 없는 크고 명확한 물건, 혹은 누가 봐도 수명이 다한 물건입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품이나 식료품, 잉크가 마른 펜, 짝이 맞지 않는 양말, 깨진 플라스틱 용기나 오래된 잡지부터 덜어내세요. 이런 작은 결정을 반복하다 보면 ‘비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근육이 단단해집니다.”

결정 근육이 붙었다면, 다음은 남길 것과 보낼 것을 가르는 기준을 세울 차례다. 브라스크가 제시하는 기준은 ‘유용함’과 ‘의미 있음’ 두 가지다. 현재 내 일상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는가, 아니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기쁨과 의미를 주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아니오’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물건, 즉 오직 ‘언젠가 쓸지 몰라서’ 혹은 ‘버리기 아까워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물건들이 정리의 대상이다.

이 과정에서 자녀와의 마찰을 줄이는 대화의 기술도 중요하다. 부모가 아끼는 고급 식기 세트를 자녀에게 물려주려다 “요즘 누가 이런 무거운 그릇을 써요, 필요 없어요”라는 거절을 당하면, 부모는 자신의 삶 전체를 거부당한 듯한 상처를 입는다.

“자녀들은 부모의 물건을 거절할 때 ‘그건 엄마한테나 소중하지 나한텐 짐이에요’라고 말하기보다, 부모가 그 물건을 왜 아꼈는지 먼저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머니에게 정말 소중한 그릇이네요. 이 그릇과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먼저 물어봐 주세요. 충분히 이야기를 들은 뒤에 ‘우리 집엔 둘 공간이 부족하니 가장 의미 있는 접시 한두 개만 간직하고, 나머지는 이 가치를 잘 알아줄 다른 분께 보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면 부모님도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이십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꺼려하는 가정이라면 굳이 ‘데스 클리닝’이나 ‘사후’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대신 ‘지금 당장 부모님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집 안 동선을 넓히자’는 식으로 현재의 안전과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현명하다.

주인의 속도를 존중하는 것, 가족이 지켜야 할 윤리

브라스크는 생전 정리의 주도권이 철저히 ‘물건의 주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가족이 개입할 때 흔히 벌어지는 비극은 자녀가 효율성을 앞세워 부모를 재촉하거나, 부모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임의로 물건을 내다 버리는 일이다. 이는 노년에게 깊은 배신감과 무력감을 안긴다.

“전문 정리 컨설턴트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족은 감정적으로 너무 깊이 얽혀 있어서 객관적인 조력자가 되기 어렵거든요. 전문가의 역할은 대형 트럭을 불러 단숨에 집을 비워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무런 판단이나 편견 없이 시니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스스로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서적 안전지대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특히 건강이 좋지 않거나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 인지 기능이 저하된 경우, 혹은 최근 배우자와 사별한 이들에게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한 번에 서너 시간씩 몰아붙이는 방식은 금물이다. 브라스크는 자신의 고령의 시어머니가 실천했던 방식을 좋은 본보기로 소개했다. 거창하게 날을 잡아 집을 뒤집는 대신, 매일 딱 세 가지 물건만 골라 비우거나 제자리를 찾아주는 ‘하루 세 개’ 원칙을 꾸준히 이어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과 집중력이 빨리 소진됩니다. 때로는 물건의 주인이 의자에 앉아 입으로만 지시하고, 실제로 물건을 나르고 분류하는 육체노동은 가족이나 전문가가 대신해야 할 때도 있죠. 무엇보다 어르신이 피로감을 느끼며 ‘오늘은 그만하고 싶다’고 할 때 즉시 멈추는 존중이 필요합니다.”

▲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 자택에서 만난 켈리 브라스크(왼쪽)와 ‘스웨덴식 죽음 청소’ 저자 마르가레타 망누손. 브라스크는 당시 망누손의 집을 직접 방문해 데스 클리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켈리 브라스크 제공)
▲2019년 스웨덴 스톡홀름 자택에서 만난 켈리 브라스크(왼쪽)와 ‘스웨덴식 죽음 청소’ 저자 마르가레타 망누손. 브라스크는 당시 망누손의 집을 직접 방문해 데스 클리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켈리 브라스크 제공)

故 마가레타 망누손이 보여준 ‘비움과 채움의 균형’

인터뷰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준 대목은 브라스크가 스웨덴 거주 시절, 마가레타 망누손 여사의 스톡홀름 아파트를 직접 방문해 나눈 대화였다. 한국에서 흔히 ‘살아생전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것’만을 생전 정리로 여기는 것과 달리, 정작 데스 클리닝의 창시자가 살아가던 공간은 차가운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망누손 여사님의 집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참 따뜻하고 아름답다’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텅 빈 집이 아니었어요. 벽에는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과 평생 모은 예술품들이 걸려 있었고, 곳곳에 자녀와 손주들의 사진, 정갈하고 안락한 가구들이 자리하고 있었죠. 다만 그 모든 소중한 물건이 불필요한 잡동사니에 가려지지 않고, 정돈된 공간 속에서 온전히 빛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당시 브라스크는 망누손 여사에게 많은 시니어가 고민하는 질문을 직접 던졌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물건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지만, 내가 죽은 뒤 이 물건들을 각각 누구에게 줄지 미리 정해두기만 해도 데스 클리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었다.

“망누손 여사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물론이죠! 물건 바닥이나 뒷면에 누구에게 줄지 이름표(라벨)를 붙여두거나 목록을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데스 클리닝입니다’라고 답하셨죠. 생전에 물건을 당장 치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사랑하는 물건을 마음껏 누리되, 사후에 그 물건이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지침을 남겨두는 것. 그것만으로도 남겨진 가족에게는 엄청난 선물과 안도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데스 클리닝은 언제 시작해서 언제 멈춰야 할까. 브라스크는 특정한 나이를 정해두기보다 은퇴를 앞두거나, 자녀가 독립해 빈방이 생겼을 때, 혹은 집 안을 관리하고 청소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시작할 신호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멈춰야 할 시점 역시 명확하다.

“데스 클리닝의 끝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내 집이 더 이상 나를 압박하거나 피로하게 만들지 않고 온전한 평온과 기쁨을 주는 순간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며 수십 년 남은 노년의 삶을 삭막한 빈방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불필요한 무게를 내려놓고, 오늘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가장 나답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 올해 초 세상을 떠나신 망누손 여사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데스 클리닝의 진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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