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에서는 유명 연예인들이 배낭여행에 도전하는 TV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이 인기를 모으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또한 지난 2월 중학교 동창생 7명이 나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뜻하지 않게 첫 ‘도쿄번개’(이태문 객원기자는 현재 도쿄에 거주하고 있다)의 행복을 맛본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 9월에는 고등학교 동창생 4명이 어려운 시간을 만들어 도쿄를 찾아와 2박3일간 구석구석을 함께 누비며 추억 만들기에 성공했다.
평소 차를 타고 다니던 친구들은 내가 짜 놓은 코스를 열심히 걷느라 지치고 힘들어하면서도 다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 그냥 떠나면 됐는데 왜 그리 망설이고 힘들었는지”라며 한결같이 여행이 주는 색다른 재미에 새롭게 눈을 뜬 것 같았다.
곧잘 인생은 연극, 혹은 여행에 비유되는데 리허설 없는 본 공연인 인생은 일상의 연속이면서도 종착점을 향해 떠나는 기나긴 여행인 셈이다. 여기가 서울인지 도쿄인지 내 자신이 분간하지 못한 채 함께 웃고 울고 떠들다가 공항까지 배웅한 뒤 돌아설 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는 ‘논어’의 첫머리 학이편(學而篇)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친구들의 방문을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새삼 되새겼는데, 특히 청춘(靑春)이 무엇인지, 여행(旅行)은 무엇이고, 삶(人生)은 뭘까 다시금 생각해 봤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어느새 ‘기성세대’로 불리게 된 요즘, 그때 ‘청춘’의 한 복판에서 비판했던 부모님과 지금의 나 뭐가 다를까 곰곰이 따져 보니 아직 철없는 ‘철부지’ 아저씨가 거울 앞에 서 있다.
대학 수업에서 곧잘 ‘호기심을 잃은 사람은 청춘을 포기하는 것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 앞서 주위에 끊임없는 관심으로 ‘알고 싶은 욕망’을 충족하라”고 전하는데, 맥없는 젊은이 이른바 ‘애 늙은이’가 늘어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또 익히는’ 정신이 바로 늘 푸른 봄 ‘청춘’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든 50대라고 하는데, 추수가 끝난 텅 빈 들판과 낙엽 진 앙상한 가지를 떠올리지 말고 풍성한 결실과 값진 수확만을 생각하자.
무한긍정의 힘이야말로 청춘의 밑거름일텐데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첫 50대이기에 설레고, 다시 오지 못할 ‘청춘’이니 더욱 알차게 보내고 아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용필 형님의 노래처럼 ‘푸른 언덕에 배낭을 메고/도시의 소음 수많은 사람 빌딩 숲속을 벗어나’ 보자. 그 길에서 알몸의 자신과 만날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우물 안 개구리’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것이다. 단 뛰지 말고 걷자. 쉴새없이 듣고 만지고 맛보는 거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의 시대를 거쳐 자동차, 고속철도, 비행기의 속도전 속에 일상을 소비하고 있는데, 그런 현대인들이 여행이랍시고 무서운 스피드로 관광지를 돌며 수천 장의 추억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아 컴퓨터로 복사한다.
이전 아놀로그 시절에는 한 장씩 앨범에 넣으며 그때 그곳의 향기까지 되새김질했지만, 대량 생산 및 대량 복사의 디지털 시대에는 하드디스크가 인간의 수고로운 ‘감수성’까지 저장해 버렸다.
걸으면 자세히 보인다. 아니 꼼꼼하게 보게 되고,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뛰면 풍경도 뛰고, 달리면 세상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다. 다 털고 인간의 오감까지 모두 열어 놓은 채 떠나는 여행의 묘미, 물결마다 향기가 다르고 바람결마다 색깔이 있다는 걸 느껴보자.
내 속에 잠들어 있던 ‘감수성’이 기지개를 켜고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여행은 결국 내 ‘감수성’과 세상의 만남인 셈이다.
지난 10월 23일은 결혼기념일로 올해 2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프랑스를 시작으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도는 여행에 나섰다. 출발 전날까지 허둥지둥 쫓겼던 성적 처리를 유럽미술사 책을 다 섭렵하지 못한 좋은 핑계거리로 삼고서 떠난 첫 유럽여행은 한 마디로 ‘청산별곡’이었다.
유토피아는 이상으로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라고 하는데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도 갖고 있다. 유럽 도시를 돌며 그곳의 자연과 유적들을 직접 보면서 놀란 것은 고대와 중세의 흔적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 속에 숨쉬는 고대와 중세라는 점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상(理想)사회가 아니라 공존하는 청산(靑山), 그렇기에 다가갈 수 있고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은 200년이 훨씬 넘은 아파트라고 밝힌 로마 가이드의 말처럼 실제로 이상 사회를 구현시키고자 1000 여년 전에 세운 건물 속에 현대인이 살고 있으며, 가장 이상적인 황금비율의 조각상들이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가 아니라 지금도 건재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비롯해 루브르박물관, 로댕갤러리, 퐁피두센터 등에서 크고 작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눈높이’의 즐거움도 함께 느꼈다. 미리 유명 작품을 체크해 잰걸음으로 달려 기념사진을 담은 뒤 다음 작품을 찾아 서둘러 자리를 뜨는 분주한 동양인들 틈에서 손주의 손을 잡고서 차근차근 그림을 함께 맛보는 여유가 참으로 부러웠다.
정작 ‘눈높이’ 교육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닐까 뼈저리게 느꼈다. 까놓고 말해 난 세계사에 자신이 없는데다가 중세미술은 문외한(門外漢)이다. 가이드의 설명이 어쩌면 그렇게 쏘옥쏙 귀에 들어오던지 저게 바로 명강의구나 싶어 고개가 숙여졌다. 그 눈높이 덕분에 그림들이 내게 말을 걸었고, 조각들이 움직여서 내게로 다가왔다.
또 한 가지, 파리, 인터라켄, 루체른, 밀라노, 베네치아, 로마 등을 돌며 내 눈에 들어온 거리이다. 여행의 ‘여(旅)’자는 한자옥편에서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 군사’라고 뜻풀이하고 있다. 그런 탓일까? 유독 동양인 관광객들은 깃발 아래 뭉치고 좋아하고, 줄줄이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정해진 코스를 예정된 시간대로 성실하게 돈다.
그런 이방인(異邦人)인 나는 쏟아지는 햇살 아래 노천 카페에서 몇 시간째 커피와 맥주를 즐기며 소일(消日)하는 유럽의 거리에서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의 ‘일상’이 나에게는 ‘비일상’이며, 그들과 같은 여유는 아예 처음부터 부재했던 사치였는지 모른다.
일상의 쉼으로 떠난 여행이지만 결국 우리는 ‘비일상의 탈출’속에서 다시 일상을 짜맞추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되물으면서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짐 없는 ‘가벼움’의 여행을 꿈꿔 본다.
소풍 전날 밤잠을 설친 사람은 마약 같은 ‘설렘’을 알지 싶다. 운동회 가장행렬에서 맛본 ‘낯선 쾌감’도 중독성이 강하다. 여행 역시 떠나기까지가 귀찮아서 그렇지 한번 맛보면 인이 박이는 법.
속된 말로 ‘힐링’이다 ‘웰빙’이네 떠들지만, 또 언제부턴가 맨토라는 말도 불쑥 튀어나와 다들 쓰고 있다. 영어로 써야 더 고상한 느낌이 드는가 싶은데, 아무튼 여행은 ‘힐링’이자 살아있는 ‘멘토’이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삼인행 필유아사언
擇其善者而從之
택기선자이종지
其不善者而改之
기불선자이개지
다시 논어 ‘술이편’의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선한 사람을 가려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는 살펴 자신을 고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여행에서 마주치는 낯선 세계, 그 속에 던져진 꾸밈없는 자신과의 만남, 그리고 화보집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곳 사람들이 뿜어내는 삶의 향기 등 이 모든 게 나에게 스승이고 가르침인 것이다.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고 했는데, 여행에서는 ‘아는 것만큼만 본다’는 게 문제이다. 사전 지식이 결국 마지막 지식으로 고스란히 보존되고 자신만이 느끼고 얻어낸 새로움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시간과 돈의 낭비이겠는가?
오히려 선입견은 버리고 편견없이 旅행을 떠나자, 홀가분하게 비운 상태에서 호기심의 촉수가 움직이는 대로 여行의 ‘새로움’을 채워넣자.
첫 50대의 이 긴장감처럼 ‘낯선 체험’이 기다리는 여행이야말로 각 세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맞춤복일 수 있다. 50대만이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참 묘미, 훌쩍 속옷 몇 가지 든 가방만 들고 집을 나서자.
내 발길 닿는 그곳의 사람들에게 나는 한낱 불청객(不請客)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들은 내게 값진 삶의 거울이자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다. 일탈을 두려워 말고 망설임을 돌파하자.
여행은 힘껏 발을 굴러 높이 올라가는 그네 뛰기, 더 높이 더욱 널리 세상을 구경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 그네’이기에 걱정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