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푸른 하늘 연작의 서곡(序曲)

기사입력 2015-03-05 17:49 기사수정 2015-03-05 17:49

▲사진=함철훈 사진가

해가 뜨려면 아직 두세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주위에 있을 법한 사물도, 스치는 바람도 멈춘, 고요 가운데 내가 서 있습니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깰 때가 있습니다. 이번 촬영의 주제는 빛이 만난 바람과 물입니다. 이렇게 빛이 약할 때에는 조리개와 필름감도의 한계를 시간이 감당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하여야 시간이 확보됩니다.

먼저 사진기와 볼 헤드, 그리고 삼각대가 한몸이 되도록 모든 연결고리를 되풀이 점검하고 노출계로 셔터와 조리개 값을 계산해봅니다. 필름 스피드를 감안하더라도 210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코 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머리로 상상하며 따져 보아도 빛이 양으로 덧입혀 만들어 낼 질감과 색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계산해 나온 시간은 3분 30초입니다. 평상시 사용하던 250 분의 1초에 비해 쉽게 감당하지 못하는 양입니다. 이렇게 큰 볼륨은 기계에 맡겨야 합니다. 일상적인 스틸 사진의 시간에 비해 4만 5000배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쉽지 백, 천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감각을 넘어선다는 것을 사진을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만 배라는 양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근육운동을 위해 날마다 턱걸이를 10번 하던 사람에게 1000번은 감당할 수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겨우 100배일 뿐입니다. 하물며 천 배? 만 배?

그렇게 빛의 양을 계산하는 사이 사진기가 4만 5000 번 필름에 덧칠한 빛이 드러납니다. 신선한 코발트색입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무의 실루엣이 그럴 수 없이 섬세합니다. 멀리 그리고 더 멀리서 받쳐주는 산의 능선 덕이기도 했지만, 바람마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이며 색입니다. 우리는 나온 결과를 색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사람의 감각은 놀랍습니다. 단순한 겉껍질의 색에 복잡한 인간의 오랜 기억이 덧입혀지는 순간입니다. 하루가 채 끝나기 전에 날은 또 다른 하루를 품어내듯, 내 생각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온갖 바람을 잉태하고 있는 몽골평원 새벽이 사진기에 담겼습니다. 어떤 바람도 풀어내기 전, 고요가 필름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렇게 푸른 바람의 연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첫 작품입니다.

연작의 매체는 나무입니다. 바람을 끊어뜨리지 않고 드러내는 선(線)은 땅에게는 나무이며, 나무에게서는 가지가 담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신경 줄 시냅스(synapse)가 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언뜻 봐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 사람의 감각을 넘어서는 4만 5000배의 시간을 덧바르니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실체를 드러냅니다. 맨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섬세한 빛을 기계를 통해 이렇게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기를 사용해야 하는 시각예술의 한계가 오히려 인간의 눈을 확장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입니다. 내가 못 본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나선 한국 실버의 몽골 정착기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여행은 인기 있는 오락이며, 취미, 유익한 공부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여행을 사진가로 평생 해온 우리 부부는 이름난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으며 돌아갈 집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쇼핑하는 여행이 아니라, 살면서 점검해 온 높은 가치에 나를 던지는 임상적이며 실험적인 삶을 위해 낯선 몽골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아내(손 청 몽골국제대학교 예술감독)에게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고국의 살림살이를 정리하였습니다. 재미를 위한 여행에서 더 짙은 삶을 위해 나이 먹은 부부가 소꿉장난처럼 삶을 던지는, 적어도 우리에겐 진한 여행기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기도 저기도 아닌, 어디에도 고향이 없는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있는 곳이 내 집이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형제이길 바라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을 만날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스스로도 모르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바람처럼 만나는 몽골 생활의 기쁨과 설렘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함철훈(咸喆勳) 사진가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 <보이지 않는 손>,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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