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윤슬을 보았습니까

기사입력 2015-08-11 23:33 기사수정 2015-08-11 23:33

(함철훈 사진가)

윤슬이라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햇빛이나 달빛이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을 말합니다. 빛이 구슬처럼 보여 ‘빛구슬’이라고 하는데, ‘물비늘’이라는 비슷한 어감의 말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 영롱한 윤슬을 사진기에 담아내기 위해 호수가로 나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뷰 파인더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피사체와 정작 필름에 담기는 내용과는 별개이기 때문입니다.

사진가는 그 두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 오락가락하며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좌절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기대 이상의 결과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이번에도 삼각대에 사진기를 고정시키며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려 마음을 다독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진작업에 빠지게 되면 피사체에 집중하는 만큼 주위 환경에 반응하고 대처하는 감각과 이성이 둔해집니다. 사진기를 매체로 해서 대상에 몰입되고 서서히 피사체와 나만 남게 됩니다. 이번에는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따라 햇볕에 반사되는 빛들입니다. 주제인 윤슬과 배경의 노출 차이기 크기 때문에 그 둘을 필름에 담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강하게 잡히던 윤슬이 흐릿해졌습니다. 카메라 뷰 파인더에서 벗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저기서 모여든 구름이 해를 가리고 빗방울이 호수 위에 톡톡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먹구름이 호수 위를 채우며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진 소나기가 호수를 둘러싼 산들로부터 흙탕물을 이루며 흘러듭니다. 그 사이 변하는 물빛과 하늘을 카메라 뷰 파인더를 통해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호수 면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상시 그냥 듣던 빗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빛의 변화는 물론 아름다웠습니다. 빛의 아름다움과 함께 호수와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소리가 증폭되어 들렸습니다. 귀가 쫑긋! 온몸이 긴장했습니다. 그 영롱한 소리를 주위 다른 소리들과 구별해 듣기 위해 호수가로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가, 아주 몸을 낮추어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빗방울 몇 개만 볼 수 있을 만큼 카메라 렌즈로 줌 인했습니다. 그러자 정말 시야에 들어온 그 빗방울 하나하나의 이미지처럼 소리들도 시차를 두고 한 방울씩 따로 따로 들렸습니다. 수많은 빗소리와 갈라져 나누어 들리는 한 음 한 음이 신비로웠습니다. 마치 슬로 모션을 볼 때처럼 망원렌즈로 호수 면과 부딪치며 떨어지는 비 한 방울의 터짐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 한 방울의 빗방울이 호수 면과 만나는 울림을 선명히 선택해 구분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 재미있었던 것은 그 음이 모두 제각기 다른 톤과 크기였으며 시간 차이 또한 다르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실로폰 위에 떨어지는 맑은 구슬의 투명한 수정 같은 금속성도 있었고, 마린바와 같은 포근하고 청명한 나무 음도 있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본 것이 귀로 들리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사진을 하면서 해석되지 않던 이미지가 풀어지면서 주위에 흔하게 펼쳐져 있는 풀과 바람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렌즈의 뷰 파인더를 통해 보이는 피사체와 연관되어 들리는 소리가 바뀌는 재미있는 일을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가 얼마나 아름다움에 반응할 수 있는지 서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조금 확장시킬 수 있고,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장르가 함께 어울려 승화될 수 있다면, 그만큼 세상은 더 살 맛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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