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에 대하여 ] 돈을 남길 것인가, 쓸 것인가

기사입력 2015-08-07 08:47 기사수정 2015-08-24 09:08

잘 쓰고, 잘 늙고 잘 죽기 위한 작은 힌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유명한 희곡을 쓴 테네시 윌리엄스는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 전반부에 부지런히 돈을 모은다.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돈에는 힘이 있다. 다름 아닌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 받을 권리를 갖는다. 말하자면 돈은 상대방의 행동을 일으킨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 쪽에 주도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돈이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가져가지는 못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어떻게 해야 돈을 잘 쓰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열심히 번 돈을 고스란히 자식에게 물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돈 잘 쓰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하고 돈을 잘 쓰기 위해서는 가슴이 필요하다고 했다.나이가 든 뒤에야말로 바로 그 가슴이 필요하다.

때는 이때, 집집마다 증여 붐

자산은 남겨도 되고 남기지 않아도 된다. 장·단점이 각각 있어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식과 손주에게 자신의 의사를 일찌감치 밝혀 제대로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왕에 상속한 재산이라면 후손들이 자산을 불려주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자녀 모두가 사업 수완이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 최근 20년 사이 국내 재계 서열 30위 내 그룹들의 부침은 컸다. 30위 안에 이름을 올렸던 그룹의 절반 이상이 경영 승계 후 법정관리 등으로 순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최근에는 세법을 비롯해 다양한 규제법이 강화돼 부와 경영권 모두를 온전히 대물림하기는 힘들어졌다. 가업 상속의 측면에서 “소유와 경영 모두를 지배하기는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이상건 상무도 “향후 기업의 지배구조는 유럽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방식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KB 2015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의 경우 ‘보유 자산을 누구에게 상속 또는 증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녀’라고 응답한 비율이 98.4%로 가장 높았다. 이어 배우자 72.7%, 손자녀 15.5%, 형제자매 2.6% 순이었다. 주목할 점은 손자녀의 비중이 지난해 조사의 29.4%에서 크게 하락했다는 사실. <표1>

상속 및 증여 방법에 대해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부자 중 71.4%가 ‘자산 일부는 사전 증여하고 일부는 사후 상속하겠다’고 응답해 대다수가 상속과 증여를 함께 고려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전부 사후 상속하겠다’(20.7%)와 ‘전부 사전 증여하겠다’(6.9%)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표2>

2014년과 비교해서는 ‘전부 사후 상속’의 비율이 8.1%포인트 감소한 반면 ‘자산의 일부 증여, 일부 상속’ 비중은 10.9%포인트 증가하여, 사후가 아닌 자녀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일정 부분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는 인식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더 현명하게 자식과 손주들에게 돈을 남기는 방법’에 관한 고민 역시 최근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빗뱅커(PB)가 상속·증여와 관련해 상담해주는 ‘노블 아카데미’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방에서도 상담 요청이 크게 늘었다. 4대 시중은행에만 상속·증여 관련 상담 문의가 올 들어 5월까지 2000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민·우리·신한은행 등은 증여 상담 등을 제공하는 이른바 ‘가문 관리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증여와 상속에 대해 고민하는 자산가들의 공통 질문은 ‘어떤 재산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물려줘야 할까’다. 정답은 무엇일까?

역삼동에 사는 박영희(가명·63·여) 씨의 지론은 그 문제에 관한 정답의 하나가 될 듯하다. 펀드와 주식과 임대업이 주 수입원으로 50억 원대 자산가인 박씨는 스물세 살 된 외동아들에게 어차피 물려줄 거면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파트와 건물을 증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증여세를 줄이는 기본 원칙은 ‘현재 평가액이 가장 낮은 재산’이나 ‘향후 가치 상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산’부터 증여하는 것”이라며 “현금 증여보다 부동산을 직접 증여하는 것이 절세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생전에 돈을 쓴다

“돈 아니면 물려줄 게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다.”

“65세까지는 모으고 그 후에는 다 쓸 생각이다.”

“내일이 아닌 ‘지금’을 위해 쓰고 싶다.”

“자산의 50%는 자녀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남은 인생 좀 즐기겠다는데 자식 눈치 볼 필요 있나?”

“기부하고 싶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다. 사회 환원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자식 결혼할 때 집 문제까지는 해결해주고 싶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 해외 봉사 활동을 가장 하고 싶다.”

“필요한 곳에 쓰도록 살아 있을 때 물려주고 싶다.”

돈을 남기느냐, 다 쓸 것이냐 하는 질문에 자산가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에 비해 ‘살아생전에 모은 돈을 다 쓰겠다’는 생각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쓰죽회’라는 모임이 있다. 70대 이상 부자 어르신들이 ‘재산을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다 쓰고 죽자!’라는 취지로 만들었다. 그 모임이 최근에 해체했다고 한다. 지갑을 여는 사람만 여는 모임의 관행 때문에 서로 불편해지자 하나 둘 모임에서 빠지기 시작해 결국 해체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유형적 재산뿐 아니라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라는 무형적 재산까지 남김없이 쓰고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모들은 자신만의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취미나 문화 활동 등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노후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노후를 자식에게 기대는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도 상대적으로 적다. 자산가들도 장수위험(Longevity Risk)이나 연금 고갈 등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갑을 잘 열지 않는 추세다.

3대째 서울 영등포 로터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장수원(69·가명) 원장은 그런 현상을 대변하는 좋은 예. 장 원장은 “자식들이 재산 상속을 바라지 않고 가진 돈으로 즐겁게 살라고 한다”며 “쓰다가 남으면 아들 형제에게 상속하겠다”고 말한다. 더불어 “금쪽같은 손주 네 명에게 적금이나 보험을 들어주고 있다”고 자식보다 손주 사랑에 더 각별하다.

유산기부자 늘어… 상속보다 기부를 선택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기부를 선택하는 자산가도 없지 않다. 모 건설업체의 A 대표는 얼마 전 두 명의 자식에게 “재산의 20%만 상속하겠다”고 천명했다. 스스로 돈 버는 재미를 느끼고 성공을 체험하는 데 일정 금액 이상의 유산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려준 재산이 오히려 자식을 망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나눔국민운동본부 정경희 사무국장은 “2011년부터 시스템이 갖추지 않은 상태에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회원이 1000여 명 이상”이라며 “재산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2013년부터 시작한 ‘참행복나눔운동’이라는 사단법인에는 유산기부 서약식을 쓰거나 이미 기부하신 분들만이 커뮤니티가 이뤄지고 있어 유산기부자의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보니까 돈은 탐내면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거든요. 연금제도가 생기면서 재산을 좀 더 가치 있게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유산기부자가 늘게 된 요인인 듯 합니다. 전직 장관 출신, 종교인, 교수, 고위 공직자, 과학기술 분야에 계신 박사들도 있고 대기업 회장을 지낸 분들이 있습니다.”

기부는 돈이 많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유산기부의 모범적 행동이 기부문화와 사회발전에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적 유산이 되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전 재산 약 36조 원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지구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는 세계 34위의 부자로 30여 년 전부터 자선사업을 해왔으며 이미 3조9000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에 관하여는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세계적 갑부가 된 그는 55세 때 불치병으로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투병 중에 록펠러는 선행의 길로 들어서며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장학사업과 자선사업에 정열을 쏟으면서 98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 43년은 참된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록펠러 이후에도 카네기, 헨리 포드,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가 이어지면서 자선과 기부는 미국 사회의 전통이 되고 있다. 카네기는 베푸는 삶의 기쁨을 알고부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재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빌 게이츠 역시 재단을 만들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어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남겨주는 데 자신의 돈을 활용하기도 한다.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은 개인의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좋은 예다. 프릭 컬렉션은 실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의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맨해튼 주택가 속의 저택이 그대로 미술관이 돼 있다.

유태인들은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다.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진리를 속담을 통해 남기고 있다. 어떻게 써야 바르게 쓰는 것일까?

인생의 끝자락이 아름다운 사람이 최후의 승자다. 일출보다 일몰이 더 멋있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일몰이 더 멋있어지려면, 자신의 자산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잘 쓰며, 잘 늙어가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작은 힌트가 아닐는지 열대야 잠 못이루는 한 여름 밤 문득 깨닫게 된다.

*돈을 남긴 사람들

마이클 잭슨 2221억 6080만 원

로빈 윌리엄스 55억 5000만 원

파블로 피카소 6조 8499억 5800만 원

야나세 다카시(柳?嵩) 3702억 6800만 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2조 2696억 650만 원

*돈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앤드루 카네기가 도서관 건립에 쓴 금액 3872억 2266만 원

알프레드 노벨이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해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금액 46억 3185만 원

성룡이 자선기관에 기부한 금액 3566억 5245만 원.

사후에 아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기부하겠다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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