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백발이 아름답다

기사입력 2015-11-27 08:38 기사수정 2022-12-23 10:12

아들 결혼식날. 사람들의 덕담이 결혼식장을 가득 채웠다.

그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 - 신부 예쁘다. 신랑 잘 생겼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아들 결혼식장에서만이 아니다.

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었고, 신랑 아버지라는 이유로 건배사를 하게 되었다. 많은 손님들 앞에 잔을 들고 나서니 갑자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객들의 웅성거림이 멈추고 잔을 든 채 모든 눈들이 내 입을 주시한다. 그런데 내 귀에 맴도는 말은 신랑 신부 아름답다는 인사말들이고, 정말 내 곁에는 아름답게 성장(盛裝)한 신랑 신부가 서 있다.

내 입이 열렸다.

“오늘 여러분의 축하를 받으며, 여기 이렇게 멋진 신랑과 신부가 새 세상으로 첫발을 디딥니다.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세대도 아름답습니다. 물론 젊은이들이 저희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들이 우리 나이가 되어 즉 우리의 손자를 출가시킬 때까지, 앞으로 한 세대를 잘 살아내야 우리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떨결에 터진 이 말 때문에, 물론 아내에게 몇 마디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뭐! 틀린 말도 아니구먼, 우리 부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우린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젊은이들을 부러워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나를 부러워한다고 믿는 편이다. 좋아한다는 것과 부러워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내가 청년을 좋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곧 지금의 내 삶을 후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살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 해도, 난 지금보다 더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남은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나의 늙음을 부러워하도록 살려고 한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근사하게 늙은 분들이 분야마다 여기저기 눈에 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청년들이 비틀거린다 하더라도 그래도 앞날이 밝은 것은 여러 분야에서 드러나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멋진 백발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늙은이 없이 멋진 젊음이 생겨나기 어렵다.

요즘 단풍이 한창이다.

여기 몽골도 그렇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수종은 덜 다양하지만, 그래서 더 정갈한 맛도 있다. 바람이 불면, 산 전체가 환하다. 잎의 앞뒤로 구별되는 한껏 채도가 높은 노랑 일색이다. 바람이 세지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다 이내 우수수 떨어질 때면, 보는 눈이 황홀하고 마음까지 몽롱해진다. 겨울을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피는 봄의 꽃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면, 단풍은 의젓하고, 숭고하다. 추위에 억눌려 참았던 분을 한껏 터트리는 힘의 방향이 봄의 기운이라면, 단풍은 여름 내 넉넉히 받은 자연에 감사하여 스스로 절제하는 모양이다.

나무마다 겨우 내 생명을 부지하느라 목마르고 배고파 땅이 녹자마자 뿌리로부터 공급받은 양분을 가지를 통해 서로 다투듯 빨아들였다. 그러고도 잎이 통통해지도록 양분을 저장까지 해 두기 바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영양 공급이 예전 같지 않다. 벌도 나비도 뜸해졌다. 욕심도 심심해져, 하나 둘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내 곁의 나같은 다른 잎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하루 이틀 한 주일 열흘을 지켜보니 그들이 아름답다. 내게 쌓아 두었던 양분을 주고 싶을 만큼 그들이 예쁘다. 그들에게 양보하고 절제한 만큼 몸도 맘도 가벼워졌다.

그렇게 자꾸 얇아졌을 어느 때. 만산홍엽(滿山紅葉)!

모두 아름답다. 나도 다른 잎처럼 아름다운지 몰랐다.

온 세상이 아름답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란 성경 잠언이다.

젊은 날의 푸르름을 다하고 곱게 물든 단풍은 아름답다. 푸르름을 다한 단풍이 아름답듯 나의 백발도 그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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