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종오소호(從吾所好), 재미를 찾아다니는 재미

기사입력 2016-02-15 17:13 기사수정 2016-02-15 17:13

▲킬리만자로에 오른 패트릭 피셰트.(패트릭 피셰트 구글플러스)
▲킬리만자로에 오른 패트릭 피셰트.(패트릭 피셰트 구글플러스)

<글>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2014년 3월 애플의 최고재무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가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다들 놀라워했지만 정작 피터가 내놓은 이유는 단순명쾌했다. 1996년에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금쯤 피터는 원하던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따고 자가용 비행기 하나 사서 가족과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구글의 CFO 패트릭 피셰트(52세) 역시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유명한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피터 팬(?)들이 수두룩하다.

‘종오소호(從吾所好)’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좇으리라’ 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게 쉽지 않은 일이다. 젊어서는 엄청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또는 벌었거나 아니면 웬만큼 도(?)가 텄거나 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도 저도 아닌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 하면 ‘또라이’ 또는 ‘고문관’이라는 말을 듣기가 십상이다.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 약정한 피터 오펜하이머와 그의 부인.(California Polytechnic State University 제공)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 약정한 피터 오펜하이머와 그의 부인.(California Polytechnic State University 제공)

그런데 나이가 들어 주된 직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마음먹기에 달린 일로 바뀌어 간다. 엄청나게 재산이 많지 않아도 도가 트지 않아도 ‘또라이’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가능한 일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물론 이때 돈이 좀 더 많을수록 좋아하는 일의 범위가 넓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수에 맞게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널려 있다는 점에서 돈의 많고 적음이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2014년 6월 EBS의 <장수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몇 년 전에는 50년 이상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써 온 일기가 언론에 보도되고 책으로 발간되기도 한 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점은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이제 가르칠 정도가 되었고 동네 향교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나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장수의 비밀>에 출연한 신권식씨.(EBS 방송캡쳐)
▲<장수의 비밀>에 출연한 신권식씨.(EBS 방송캡쳐)

‘종오소호(從吾所好)’야 말로 좋아하는 일, 즐거움을 좇아 사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즐겁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연간 근로시간이 2124시간에 달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가장 모자라는 것은 나만의 시간,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OECD회원국들의 평균 근로시간 1770시간과 비교하면 354시간, 가장 적게 일하는 독일(1371시간)과 비교하면 무려 1.6배나 더 많은 시간을 돈을 버는 데에 쏟아 붓고 있다. 야근과 주말 근무 등으로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인 것이다.

그러다 막상 은퇴하면 말 그대로 막막하기만 하다.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은 있지만 해 본 적이 없어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뭐 제대로 놀아본 적이 있어야 놀 것 아닌가? 그런데 은퇴 후 하루에 10시간씩 30년의 시간을 뭔가 의미있는 일이나 활동을 해야 하니까 총 11만시간이다. 등산이나 골프, 배드민턴, 탁구 등 다양한 스포츠와 화투와 카드, 마작 등의 심심풀이를 배우자와 친구들과 함께 즐기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도 하다보면 식상해지면서 시간이 남아돈다는 게 은퇴한 선배들의 푸념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TV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단다. 그래서 그런지 은퇴 후 11만 시간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만시간 이상을 TV 시청으로 때운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사실 TV 시청이 시간 때우기에는 매우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놓는 시간에 TV를 본다면 그 또한 나름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TV를 보면서 얻은 정보를 활용해서 나다닌다면 더 좋지 않을까? 나다니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좋은 시간 때우기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쿡방’을 보고 요리를 하거나 ‘먹방’을 보고 ‘먹행’(먹거리 여행)을 하는 것이다. 특히 ‘먹행’의 경우 그다지 어렵지 않게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필자에게 꿈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500곳이 넘는다고 한다. 그곳을 섭렵하는 것이다. 우연이지만 전국의 골프장 수와 비슷하다. 어떤 분은 전국의 골프장을 다 가보는 게 꿈이라고 하는데 그런 분이라면 더더욱 골프장 근처의 양조장도 한번 들러보면 어떨까? 1박 2일로 숙소도 잡아놓고 느긋하게 그 동네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 한잔 걸치면서 저녁을 해보라. 골프를 치기로 했으니 동반자가 2~3명은 될 것이고 그 동반자들이 다 마음에도 맞고 사는 형편도 비슷할 터이니 분위기 또한 더없이 좋으리라.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도 한두 잔 마시다보면 그 맛과 운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쿡방’이나 ‘먹방’이 유난히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경기가 나쁠 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요즘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이럴 때일수록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TV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돈을 쓰면 그게 경제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틈틈이 봉사와 기부활동도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돈을 버는 재미도 쏠쏠하다지만 돈을 쓰는 데에도 재미를 붙이면 그만큼 쏠쏠한 것도 없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는 재미, 즉 재미를 좇아다니는 재미만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사는 게 재미있으면 시간도 잘 가기 마련이다.

은퇴 후 11만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좇으리라는 ‘종오소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자성어 하나 더. 무엇이나 다 때가 있는 법, 내가 할 수 있을 때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물실호기(勿失好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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