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생활엔 장단점이 고루 있다. 가장 큰 장점은 과욕을 다스려 도시에서보다 한결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다는 데에 있을 테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 수도 있다. 시골은 때로 도시의 병원과 맞먹을 일종의 요양소 역할도 한다. 스트레스가 줄어들어 마음의 숨통이 트이며, 망가진 건강이 회복되기도 하니까. 물론 시골에서 오히려 병을 얻기도 한다.
서울에서 살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으로 귀농한 강유성(64, ‘송이향버섯마을’ 대표)씨 는 산골에서 지병을 깨끗이 털어낸 케이스다.
그는 애초 병 치유를 목적으로 농촌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병을 고쳤다. 치료비 한 푼 요구하는 법이 없는, 시골이라는 이름의 의사에게 몸을 맡기고 살자 병증이 저절로 사라지더라는 게 아닌가. 농원도 잘 돌아간다. 초기엔 헤매고 어긋난 게 많았다. 그러나 우직한 뚝심으로 극복했다. ‘일밖엔 난 몰라!’ 속으로 그리 외치며 미친 듯이 버섯 농사 하나에 몰입했다. 진심으로 미치면 마침내 목적지에 닿게 마련이다. 강유성은 그 명백한 공리(公理)를 몸소 체현한 사람이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측량기사로 일했다. 지방을 돌며 토지측량을 했다. 업무의 내용이 너무 과중해 난감한 직업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출장이 연달아 이어졌다. 일단 출장을 나가면 보통 2주 만에 귀가할 수 있었다. 세상에 내 맘대로 유쾌하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이건 그에게 원체 버거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몸에 탈이 나기에 이르렀다. 날로 스트레스가 첩첩 쌓이고 불편과 불만의 감정이 몸에 붙은 피부처럼 만연하더니, 마침내 몇 가지 병이 그를 방문했다.
병원을 다녀도 좀체 차도가 없었다. 그래 전전긍긍하다 문득 떠올린 게 귀농이었다. 어딘가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을 찾아가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내 역시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앞장을 서다시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부부는 금슬이 아주 좋아 보인다. ‘남편이 건강을 잃고 아예 드러누우면 가여워서 어떡하나?’ 아내의 생각이 그랬단다. 외지고 적막한 숲속으로 귀농한 지 올해로 9년 차. 강유성과 아내는 불도저처럼 강인한 노동력을 발휘해 농원을 산정으로 밀어붙인다. 그들은 표고버섯 농사의 최고봉에 올라서고 싶은 것이다. 강유성의 건강은 완연히 좋아졌다. 병증으로 시들시들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병을 가지고 있었나?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으로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신경성 위염이었다. 조금만 신경 쓰면 곧바로 위경련이 일어났다. 일단 경련이 시작되면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진다. 심할 경우엔 뱃속을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극한의 통증이 몰려든다.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구르게 된다. 무섭더라.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이런 상황에선 매번 응급실에 실려 가 진정제를 맞았다. 신경성 질환들이 흔히 그렇듯 특별한 치료제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며 직업을 바꾸라고 했다. 결국 의사의 권유를 따른 셈이다. 농사를 새 직업으로 삼았으니까. 이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모든 병이 다 나았나?
“고지혈증을 제외하고 모두 완쾌됐다.”
햐! 시골의 무엇이 병을 고쳐주었다고 보나?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아마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던 서울 생활과 달리 이곳에선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고 산 덕분인 것 같다. 잡념 없이 농사 하나만 신경 쓰며 살자 서서히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산골의 좋은 공기, 일상적으로 섭취한 표고 음식들, 금주에 가까운 절주(節酒) 등도 치유의 힘이 됐다고 본다.”

남들의 말, “귀농 로망을 이뤘구나!”
강유성의 농원은 숲속의 구릉지에 있다. 솔바람이 상쾌하게 콧등을 치며 지나가는 곳이다. 나무들의 향훈이 그윽해 엔도르핀이 절로 솟는 자리다. 그는 이곳에서 스마트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 5동을 운영한다. 큰 규모로나 첨단 설비로나 흔치 않은 버섯농원이다. 요즘 강유성이 지인들에게 듣는 얘기가 있다. “아하! 드디어 귀농의 로망을 모두 이루었구나!” 이럴 때 그는 흐뭇해 씩 웃지만, 동시에 한숨도 나온다고 한다. 자리 잡기까지 초기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에 새삼 생각이 닿아서다.
“이곳은 원래 황무지였다. 면적은 넓어 2500평(약 8264㎡)이지만 땅다운 땅이 아니었다. 길이 300m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물웅덩이가 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움푹 파인 채 메마른 골짜기도 쓸모없긴 마찬가지였다. 이 어지러운 지형을 정리하기 위해 덤프트럭 업자를 불러들여 평탄 작업부터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했다. 후속 토목 작업도 난해했다. 어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진저리가 난다.(웃음)”
터를 살 때 이미 예상한 필수 과정이었을 텐데?
“모든 게 예상보다 힘들었다. 난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농업에 뛰어들었다. 미리 귀농교육을 좀 받아두긴 했다. 그러나 농사에 대한 또렷한 이해나 의지를 지닌 건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농사나 한번 지어볼까, 그런 생각을 갖고 귀농했다.(웃음) 이런 나에겐 초기의 모든 과정이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이다. 어려운 걸 알고 나서야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가급적 자력으로 일을 처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일의 능률을 높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중장비 면허증도 땄다. 포클레인과 지게차를 직접 몰아 작업을 함으로써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건강상태가 나빴던 시점인데 그게 감당이 되던가? 신경성 위염이 ‘난동’을 부리진 않았느냐는 얘기다.(웃음)
“모든 생소한 일들이 힘에 부쳤지만 적응하며 헤쳐나갔다. 이건 사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내가 살아갈 터를 내 손으로 개척한다는 쾌감이 컸으니까. 따라서 몸은 고달팠지만 심적으로 괴롭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위염의 통증이 점차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몸을 마구 썼던 당시 살이 순식간에 15kg이나 빠져 과체중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이 역시 건강 회복을 도운 요인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초기의 고생이 여러모로 약이 됐다. 귀농 생활 전반의 기본을 다지게 했다.”

다양한 농작물 가운데 표고버섯을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이곳은 산속에 위치해 낮이 아주 짧다. 일조량이 너무 적어 논밭 농사는 어림없는 곳이다. 그래 고민하다가 느타리버섯 농사를 경험한 친척에게 표고버섯을 추천받고 그대로 따랐다. 버섯이 농장의 자연환경에 그나마 적합하다고 봤다. 그래 재배용 비닐하우스를 짓고 참나무를 넣어 원목표고 생산에 나섰다. 그러나 그 첫 농사를 보기 좋게 실패했다.”
재배 기술에 문제가 있었을까?
“그렇다. 버섯 재배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채로 용감하게 뛰어든 탓이었다. 뒤늦게 버섯 농가들을 찾아가 이모저모 배웠지만 한계가 있더라. 핵심적인 기술은 잘 가르쳐주지도 않았다.(웃음)”

죽자 사자 일에 매진한 대가
당시 기상 조건도 아주 나빴다고 한다. 결국 상품성 없는 원목표고를 주로 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생산원가에 턱없이 미달한 결산을 보게 됐다. 초심자로서 부부가 협업하며 용을 쓰다시피 했으나 결국 쓴맛만 본 셈이다. 이에 강유성은 원목 재배 방식을 바로 접었다. 이듬해부터는 배지(培地, 버섯 증식을 위한 영양물을 집어넣은 고형틀)를 이용한 표고 생산에 나섰다. 배지 버섯 재배도 쉽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강유성은 첫해부터 실로 범상치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어! 이게 정말 표고버섯이야? 송이버섯 향이 나는데? 참 놀라운 일이다!” 그의 버섯을 맛본 이들이 이렇게 극찬을 했단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버섯을 기른 것일까?
“버섯 농사의 포인트는 온·습도 관리에 있다. 특히 적정량의 수분을 공급해야 제대로 자란다. 이를 위해 농가들에서 물을 뿌려준다. 흔히 분사기를 이용해 안개처럼 미세한 물 입자를 살포한다.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습도가 높은 숲에 둘러싸인 우리 농원의 특징에 착안, 환기를 통해 대기 중에 있는 습기를 끌어들이는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자 기대 이상의 고품질 표고가 나왔다. 단단하고 뽀얗고 뽀송뽀송한 외양, 그리고 송이를 닮은 향기와 부드러운 식감이 알려지면서 단박에 소비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당신의 방법을 사용하는 농가도 있나?
“매우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숲속에 재배사가 있어야 가능한 방법이라, 누구나 따라 할 수도 없다. 나 역시 불안감을 갖고 시작했다. 선례를 찾아 배운 것도 아니고, 자력으로 고안한 방법이라 염려가 많았다. 일종의 모험을 한 셈이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다’고, 우연한 행운을 만났다고 본다.(웃음) 그런데 농사에서 더 중요한 건 농부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게 곧 농부의 실력을 가른다고 본다. 아내와 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스마트팜으로 전환한 뒤에도, 오늘 현재에도, 재배사에 묻혀 살다시피 한다. 버섯 농사가 궤도에 오른 건 이렇게 죽자 살자 일에 매진한 대가일 뿐이다.”
주로 일만 하다니, 인생은 유한한데….
“아내가 하는 말이 있다. ‘단 하루라도 실컷 잠을 자고 싶다!’(웃음) 어쩌면 우리가 미련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곧 놀이거니 하며 긍정한다. 또는 취미 생활로 여길 만큼 마음은 여유롭다. 표고 시세가 예전보다 낮아 큰 부를 일군 건 아니지만 안정적인 기반은 이미 잡혔다. 불만 요소가 없는 날들이다.”

얼굴에 쓰여 있다. 어떤 점에 특히 만족하나?
“이곳에서 건강을 회복했다. 게다가 믿을 만한 제2의 직업을 갖게 됐다. 이 일엔 타인들의 억압이 없으며, 정년도 없다. 서울에선 맛보지 못한 자율성과 자유를 느끼며 산다는 점에 기쁘다.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다만 고생한 아내에겐 미안하다. 우리는 집을 짓기 전 수년간 비닐하우스 안에서 매우 불편하게 살았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명품 버섯을 만들자는 꿈을 놓지 않고 견뎌주었다.”
어둑한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별들이 수군거리는 야밤에야 휴식에 드는 나날들. 그럼에도 만족스런 시골 생활. 하릴없이 저물기 시작하는 인생의 가을에 그는 진귀한 열매를 딴 셈이다.
강유성이 주는 귀농 Tip•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 어렵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초기의 고생은 일종의 통과의례와 같다. 그러나 열심히 농사에 몰두하면 반드시 대가가 주어진다.•농업소득을 얻기 어려운 초기의 생활자금을 준비하고 귀농하자. 너무 빠듯하면 지칠 수 있다. 간혹 귀농하면 정책자금이 거저 나오는 줄 알지만 이는 오산이다. 65세 이상의 귀농인은 아예 지원 자격이 없음을 유념하자.
•정책자금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접근하자. 지자체 담당자와 수시로 상담해 지원이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한다.자격 여건을 충족한 뒤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한다. 의외로 다양하고 좋은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
•시니어의 경우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귀농하라. 농사는 기본적으로 체력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버섯 농사에 뜻을 둔 이라면 충실히 공부하고 뛰어들라.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전문 농가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유능한 멘토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 버섯 농사는 사시사철 단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고려하자. 가령 수확기에 하루만 방치해도 A급 버섯이 B급으로 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