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려놓고 살길 원했는데, 시골에서 그게 되더라

입력 2025-08-07 07:00

[박원식이 만난 귀촌 생활] 전남 구례군 토지면 시골에 사는 주영애

▲‘정산서 다실’ 마당에서 주영애 씨 부부.(주민욱 프리랜서)
▲‘정산서 다실’ 마당에서 주영애 씨 부부.(주민욱 프리랜서)


여름 한낮의 땡볕에 살갗이 따갑다. 찜통더위에 녹초가 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자연 풍광은 씽씽하다. 인정머리 없이 달구치는 폭염도 산천엔 자양분이다. 절정에 도달한 생기를 토한다. 따라서 마을엔 더위를 눅이는 청량감이 물씬하다. 새파란 하늘, 짙푸른 지리산, 유유히 굽이치는 섬진강이 저만치에서 장쾌한 파노라마를 펼치는 마을이니 알조다. 이 삼삼한 시골 동네 한 모퉁이에 찻집이 있다. 서울에서 살다 귀촌한 주영애(67, ‘정산서 다실’ 대표)와 남편 서명성(69)이 운영하는 한옥 카페다.

부부가 사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이른바 금환락지(金環落地, ‘선녀가 승천하면서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의 땅’이라는 뜻)라고 부르는 천하의 명당터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조선 양반가 운조루 고택이 바로 이 마을에 있다. 주영애의 찻집은 운조루의 코앞에 있다. 자리 한번 잘 잡았다. 고택 답사 행렬이 오가는 길목이라 영업에 유리할 게 아닌가. 가게 사이즈는 아주 작아 오히려 개성적이다. 단출하고 오붓하며 귀엽다. 테이블이라야 단 두 개에 불과하다. 작고 소박한 물상에 주로 이끌리는 버릇이 있는 이들을 ‘취향 저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주인과 손님 간의 격의 없는 대화가 가능한 곳이다. 찻집 운영을 통해 손님들과 다담을 즐기고 싶었던 주영애 부부의 의도가 반영된 구조로 보인다. 그들은 찻집을 통해 각박한 세상에 한줄기 훈훈한 소통의 공기를 보태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데 찻집을 차린 가장 큰 뜻은 부부가 서로 상대에게 기쁨을 선사하자는 데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훗날 언젠가 시골에 내려가 찻집을 하며 여생을 보내자’는 약속을 한 바 있는데, 그걸 차질 없이 이루었다. 즉 꿈을 성취했다. 드디어 최상의 선물을 공유하게 됐다. 부부애에 따른 돈독한 합심으로 공동의 길을 오래 걸어 마침내 기쁜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부가 찻집 운영에 꽂힌 건 젊을 때부터 차를 유난히 즐기는 취향을 배양해온 결과였다. 주영애의 끽다(차를 마심) 이력은 무려 40여 년에 이른단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남편은 아주 깊은 산중에 살자 했지만

“차에 매료된 계기는 우연히 주어졌다. 남편이 지인에게 선물받은 야생 우전차를 우려 마시며 특별한 감동을 느낀 게 동기였다. 녹차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짧았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우전차의 색과 향과 맛에 바로 반했다. ‘아하, 이렇게 좋은 차가 있다니!’ 깜짝 놀랄 정도의 맛이었다.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오묘한 풍미에 저절로 관심이 생기더라. 이후 인사동에 나가 차와 다구를 사오길 취미처럼 즐겼다. 이렇다 할 뚜렷한 취미가 없었던 터라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찻집 이름이 ‘정산서’다. 무슨 뜻인가?

“고요할 정(靜)에 메 산(山)을 쓰는 ‘정산’은 다도를 가르쳐준 스승에게서 받은 나의 호다. 생년월일시까지 감안해 공들여 지어주신 이름이라 귀하게 여긴다. 이 ‘정산’에 남편의 성 ‘서’자를 붙여 다실 이름을 만들었다.”


즐길 취미가 없었던 일상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었을까?

“그렇다. 취미 활동이 전에 느끼지 못한 생기를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차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이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주 건실한 가장이다. 곧이곧대로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산다. 가령 회사 일을 마치면 즉시 집으로 퇴근했는데, 현관 앞에 딱 도착하는 시간이 한 점 오차 없이 매번 일정했다.(웃음) 가끔 한강변에 나가 낚시를 하는 게 남편의 유일한 취미였다. 그러다가 차에 푹 빠지면서 한층 활력을 얻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집 안에 다실을 마련하기도 했다지?

“우리는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지하실을 다듬어 다실을 꾸몄다. 그간 모은 다관, 탕관, 찻잔, 차통, 찻상 등 갖가지 다구가 많아 제법 그럴싸한 다실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서 부부가 차 생활을 만끽했다. 그즈음 아예 시골로 이사해 찻집을 운영하며 살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됐다. 남편의 정년퇴직과 동시에 서울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둘의 뜻에 큰 이견은 없었다. 다만 남편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으나 난 반대했다. 생활의 불편이 많을 거라서.”


부군이 산에 살고 싶어 한 이유는?

“고요하고 외진 산중에 사는 게 극히 내성적인 자신의 성향에 잘 맞는다고 봤다. 깨끗한 산속에서 차밭을 일구고, 손수 찻잎을 따 차를 만들고, 좋은 술도 만들고, 그렇게 사는 게 남편의 로망이었다. 그러나 난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래 어디로 갈 건지 장소 선정 문제는 차후의 일로 미루기로 했다. 여하튼 시골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살자는 종래의 막연한 생각을 확고한 미래의 목표로 다진 시점이었다.”

우연히 맛본 우전차 한잔이 주영애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나아가 삶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꿀 작정을 하게 만든 셈이다. 그는 오랫동안 전업주부로서 평범하고 고즈넉한 나날을 살았다.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이렇게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잔잔한 일상은 권태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삶이 즐겁기 위해선 뭔가 진부한 타성에서 벗어날 변화와 도발도 필요한 법. 언제부턴가 주영애는 날아다니는 새처럼 자유롭게, 속박에서 해방된 여행처럼 유쾌하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의 얘긴 이렇다.

“1년은 부산에서, 1년은 속초에서, 1년은 제주에서, 이렇게 거주지를 옮기며 살아보고 싶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한때 우울증을 겪기도

요컨대 주영애에겐 새로운 방식의 삶이 필요했다. 그러고 보면 시골 찻집에 관한 추구는 나름의 신선한 일탈이자 생활 반경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거사일지도. 아무려나 그는 티켓을 손에 쥐고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찻집의 나날을 고대했다. 어느 시골을 행선지로 정할지, 찻집은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할지, 머리를 모아야 할 일들이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이 술술 풀렸다. 그의 명민하고 자애로운 친정엄마가 딸의 뜻과 갈증을 간파하고 찻집의 기초를 닦아준 게 아닌가.

“서울에 사시던 친정엄마가 별안간 구례로 귀촌하면서 우리의 상황이 급변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것이다. 나로선 우선 걱정이 많았다. ‘아이고, 혼자 낯선 시골에서 어떻게 사시나?’ 싶어 따라 내려가 엄마와 함께 살며 2년간 간병과 봉양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살림집이 있음에도 마당 한편에 한옥 한 채를 새로 지었다. 그러곤 하는 말씀이 이랬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엔 너희들이 이곳에서 찻집을 해라!’ 이렇게 엄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 찻집의 꿈을 이루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정년을 한 남편이 합류해 마침내 찻집을 오픈한 거다. 그게 9년 전 일이다.”


효도의 보상으로 그토록 큰 복을 받다니 당신은 행운아다.(웃음) 그나저나 찻집 운영은 뜻대로 잘 되고 있나?

“대체로 순조롭게 돌아갔다. 커피와 쌍화차 맛이 좋은 집이라는 입소문도 났다. 차만 맛있게 잘 만들면 될 거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큰 차질은 빚어지지 않았다. 한동안은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은 한풀 꺾였다. 장사가 잘 안 된다.”


이런!

“요즘 남편이 남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우린 이슬을 먹고 살아요!’(웃음) 침체기에 접어든 셈이다.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부진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이곳은 관광지다. 따라서 찻집이 많다. 근래엔 우후죽순처럼 늘었는데, 구례군에 무려 200여 개의 카페가 있다. 그러니 장사가 부진할 수밖에. 어떻게 보면 우린 이모저모 물정을 잘 모른 채 귀촌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꿈꾸었던 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따르는 안심과 성취감을 가지고 산다. 물론 찻집은 활로를 찾아 끝까지 끌고 갈 참이다.”


수익 측면 외에 찻집 운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엔 어떤 게 있다고 봤나?

“차의 매력은 사람 간의 대화 매개체로 가장 요긴하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따라서 손님들과 다담을 나누는 장으로 삼고 싶었다. 단골들과 사심 없는 소소한 얘기를 주고받는 일은 정말 즐겁더라. 오래 남을 추억거리가 됐다. 그러나 고객 대부분은 관광 스케줄에 쫓겨 서둘러 차를 마시고 자리를 뜬다.(웃음)”


마을 주민들과 소통은 잘 되던가? 원주민과 불화 관계에 놓여 고독해질 수 있는 게 시골 생활인데.

“친정엄마가 주민들에게 베푼 게 많았던 덕분에 관계 형성이 수월했다. 작은 성의를 발휘하기만 해도 훈훈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경험도 충분히 했다. 하나를 베풀면 반드시 하나를 돌려주는 게 시골 인심이다. 다만 우리는 관계에 너무 얽혀들지 않고 싶었다. 그게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얻은 값진 것은 무엇인가?

“평온감이랄까, 한결 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며 안도한다. 이건 매사 서울에서보다 자제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얻은 대가라고 본다. 그보다 더 행복한 건 좋은 자연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 나는 이곳에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한강에 드리워지는 노을 풍경이 그리워 견딜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산과 강, 꽃과 새소리를 마음으로 껴안고 사는 사이에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나이가 있으니 이젠 가급적 다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아야지 했는데, 그게 되더라.”

마음을 끓이고 달이고 졸일 이유가 더 이상 없다는 얘기다. 넉넉한 기분, 생기, 긍정적인 생각. 그 찬연한 것들을 시골에서 얻은 사람의 표정은 남달라 내내 미소가 감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주영애가 주는 귀촌 Tip

•시골에 살고 싶다면 가급적 40~50대 때 내려가는 게 좋다. 적응력과 순발력이 뛰어난 이들에겐 예외지만, 은퇴 뒤 60대에 접어들어 귀촌 생활을 시작하는 건 여러모로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골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엔 사전에 물정을 충분히 익히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도시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난 목욕탕으로 침투한 뱀을 보고 기절한 적이 있다. 이처럼 난처한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게 시골이라는 걸 유념하자.

•시골은 도시보다 문화공간과 놀이공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즐길 만한 취미나 특기 하나쯤은 가지고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별 할 일 없는 채 무료감과 무력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귀촌해 온종일 부부가 함께 지내는 건 생각보다 즐겁지 않다. 금슬 좋은 부부라도 트러블이 잦아질 수 있다. 각자의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게 좋다.

•외진 곳에 외딴집을 짓고 사는 건 피하자. 따분하고 외로워 후회가 밀려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서도, 또는 부부끼리 잘 노는 경우라면 문제 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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