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6월] 6월이 오면 보고 싶은 할아버지

기사입력 2016-05-10 09:08 기사수정 2016-06-22 12:58

나는 경상도 산골에서 읍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대도시인 인천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나를 대도시로 보내고자 한 데는 그분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경상도 사람이 소백산 준령을 넘어 서울로 가면 잘 산다는 옛말이 있다고 너는 서울로 가라고 몇 번 말했다. 어린 마음에도 궁금했다.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시골에 살면서 나보고는 여기를 떠나서 서울로 가라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할아버지도 내 의중을 파악하고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을 누가 모시는가에 대해 가족회의를 했는데 내가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떠날 수가 없었다. 형제들이 나를 지목했고 아버지도 나와 살겠다고 하니 내가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꿈을 접어야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는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맏이가 부모를 모시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에 할아버지는 3형제 중 중간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맏이인 큰 할아버지는 읍내에서 한의원을 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이유와 동생은 아직 어려 농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겉으로 들어난 큰 이유였지만 할아버지는 유약한 성격으로 자신의 뜻을 강하게 어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응원과 당시 인천에 살던 형님의 도움으로 나는 인천으로 유학(?)을 갔지만 형님도 총각인 탓에 같이 자취를 얼마간 하다가 형님은 곧 서울로 이동 발령이 나서 떠나갔다. 졸지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고등학생은 정서적으로 흔들림이 많은 시기다. 부모를 떠나서 처음 하는 객지생활이 외롭고 쓸쓸했다. 친구도 하나 없어 어디 정붙일 곳이 없었다. 더구나 학교폭력도 있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들이 서클을 만들어 몰려다니며 나처럼 외톨이를 공격하고 왕따시켰다. 나도 덩치 큰 아이들을 내편으로 끌어 들이며 맞서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매를 맞기도 했다.

울적한 날은 뒷산에 올라갔다. 6월의 산야는 나무 잎은 푸르고 줄기는 성장의 기지개를 맘껏 펼쳤지만 나는 점점 움츠려 들었다. 학교가 싫었지만 나의 장래를 위해 다녀야 한다는 양 갈래 길에서 고민은 깊어갔다. 어디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숨통이 막히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참다못해 시골집에 가서 며칠 놀다올 심산으로 6월 어느 날 담임선생님에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고 허락을 받아 열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고 왔느냐는 것이다. 아침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오후에 연락도 안한 내가 집에 들어오다니 어머니의 놀람도 당연했다. 나도 눈치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망연자실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이며 속으로 흐느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할아버지의 꽃상여가 나가는 장례 날이다. 상여는 가다가 멈추고는 상여소리꾼의 애간장 녹이는 선창으로 일가친척들에게 저승 노자 돈을 달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생인 나는 부르지 않을지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형님들이 다 불려갔는데도 나를 계속 찾는다. “손자, 손자 내손자야 내가 가면 아주 가나 어디 있나 내손자야‘ 하고 상여가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혼령이 상여요령꾼의 입을 통해 나를 찾는 것 같았다. 숨어 있던 내가 불려갔다. 돈은 내지 않았지만 내가 큰절을 올리고서야 상여는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훌륭한 농사꾼으로 83세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괴팍한 성격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매를 자주 맞으면서 나는 절대 아이들을 때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신 분이다. 내 새끼 내가 때릴 수 있다는 권리(?)가 당연시 되던 시절에 놀라운 실천력이다. 언제나 일을 찾아서 했다. 연로하여 일이 힘에 부치면 마당을 쓸거나 짚으로 멍석이나 소쿠리를 만들었다. 간 고등어와 가지나물을 좋아하시고 특이하게도 매운 고추를 불에 구어 드시는 걸 좋아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도 보지 못했지만 화를 내거나 남들과 싸우는 일도 없었다.

유월이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현충일 기념식 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친 호국영령 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진혼곡 나팔소리를 들으면 나는 헛것을 본 것처럼 할아버지의 생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는 내 기억력이 혼미해지기전에 할아버지의 생전의 모습을 더욱 또렷이 기억하고 싶다. 결심을 했다. 하루 날 잡아 할아버지 산소에 걸어 오가며 할아버지 생각만 진종일 하려고 한다. 고향 버스터미널에서 할아버지 산소까지 왕복 팔 십리 길이다. 다리가 아플 거라는 두려움 보다는 할아버지의 기억이 어디쯤에서 멈춰 버리는 내 기억력의 한계를 느낄까봐 이를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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