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영화는 철저히 우디의, 우디에 의한, 우디를 위한 영화다. 홍상수가 늘 비슷비슷한 자기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그런 줄 알면서도 팬들이 그의 새 영화를 기다리듯 우디 앨런도 그렇다. ‘관객주의(위주)’가 아닌 ‘감독주의(위주)’ 영화인데도 팬들은 늘 그의 영화를 기다린다.
이번에 개봉한 <카페 소사이어티>는 우디 앨런의 47번째 영화이고, 14번째로 칸 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다. 정말 꾸준한 창작욕이고 꾸준한 수준작이다. 전반기 작품이 삶에 대한 야유와 조롱과 도전이었다면, 후반기 작품들에서는 인생에 대한 깊은 관조가 느껴진다. 영화를 보며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영화는 193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평소 할리우드를 동경하던 뉴욕 청년 바비(제시 아이젠버그)는 영화사 거물인 삼촌 필(스티브 카렐)을 찾아 LA로 온다. 필은 바비에게 할리우드 관광 가이드로 자신의 비서인 보니(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소개해주고 바비는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다.
둘은 할리우드를 누비고 다니며 1930년대를 풍미하던 유명 배우들과 그들의 저택들을 구경한다. 이 장면들에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전작인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작이 ‘시간 이동’이라면 이 작품은 ‘공간 이동’이다. 지나간 시절과 인물들을 만나는 게 우디의 새로운 취미가 된 셈이다. 회고 취미가 생긴다는 건 늙는다는 증거다.
보니에게 금지된 사랑의 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화의 호흡은 빨라진다. 더구나 그 상대가 바로 삼촌 필이라니. 보니는 필을 선택하고 바비는 할리우드 이면의 추악함에 대한 환멸과 이별의 충격으로 뉴욕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형의 도움으로 나이트클럽 매니저가 되고 새로운 상류사회를 맛본다.
특유의 사교성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바비는 비로소 그들만의 리그인 상류사회 ‘카페 소사이어티’의 일원이 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보니와 같은 이름의 모델 베로니카(블레이크 라이블리)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사실 이런 스토리는 흔한 삼각관계의 구조를 보인다. 별로 새롭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매력은 스토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쏟아지는 우디 특유의 유머와 인생의 페이소스들이 영화 감상에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영화는 과거와 달리 관계의 끈적임이 줄어들고 뽀송하며 따뜻하다. 사랑도 쿨하고 심지어 갱스터 형의 살인도 쿨하다.
대사에도 달관의 자세가 묻어난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대사는 젊은이가 할 대사는 아니다. “인생도 자신의 인생이 있다.”든가, “음미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지만, 음미해버린 삶은 매력이 없다.”는 말들에는 젊은 감독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깊이가 배어 있다.
남편과 뉴욕에 온 보니가 바비와 재회하는 장면도 구질구질하지 않다. 남편을 따돌리고 바비와 센트럴파크를 비롯한 도심을 누비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데이트도 상큼하다. ‘막장’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아쉬울 정도다.
흔히 불륜은 언젠가 대가를 치른다는 통념을 깨고 필과 보니의 관계도 좋다. 우디 자신의 상황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81세인 우디 자신도 이젠 삶의 끈적임이 버거워졌다는 방증이다. 유대인인 자신의 정체성도 코믹하게 유머로 녹여낼 정도로 그의 삶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재즈 음악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1930년대로 초대하며 영화 속에 빠져들게 한다. 무성영화 시대의 감독들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특히 <맨해튼> 같은 곡은 전형적인 뉴요커인 우디의 취향을 잘 살려내고 있다.
제시 아이젠버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케미도 안정감을 준다. 특히 크리스틴은 이미 뱀파이어 류 영화를 뛰어넘어 여인의 향기를 풍긴다. 두 주인공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하며 동시에 아련한 눈빛을 보이는 엔딩신은 어쩌면 우디가 자신의 지난날을 응시하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을까? ‘선택에는 배제가 따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