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사랑이 내게 말했다

기사입력 2017-02-03 09:39 기사수정 2017-02-03 09:39

‘이루어지지 않아서 첫사랑’이라는 말처럼 첫사랑은 어쩐지 애틋하고 비극적이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아름답고 슬픈 사연으로 각자의 가슴에 묻혀 간직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끔 그날의 추억을 꺼내 그리워하면서 은근히 비밀을 즐기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렸을 때 필자 마음을 설레게 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첫사랑이라기보다는 풋사랑이다. 언제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고 장난스러운 추억이다. 그러니 첫사랑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아프게 한 남자, 그가 바로 필자의 첫사랑이었다. 필자는 좀 괜찮은 용모였음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몇 해가 지나도록 결혼을 못했다. 딸만 셋인 집안의 장녀로 27세가 되어도 사귀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엄마의 걱정이 대단했다. 당연히 수없이 많은 선 자리에 끌려 나갔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 옆 골목 안에 ‘라라’라는 작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선을 봤는데 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모처럼 마음이 활짝 열려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뻤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같은 시기에 선을 본 다른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특히 엄마의 성화가 심했다. 필자가 마음을 굽히지 않자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 결혼해서 살 집은 있는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 속물 같은 질문을 해대며 모욕을 줬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그가 집을 나설 때 같이 따라 나가 서부역에서 일영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람이 아니면 세상 그만 살아도 좋다는 결심까지 했지만, 부모님의 큰 반대 속에 결국 엄마가 좋다는 남자와 결혼하게 됐다(이 글은 남편이 알면 곤란한 특급 비밀이다). 그렇게 첫사랑은 가슴에 묻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싸이월드’라는 미니홈피가 유행처럼 퍼졌을 때 필자도 ‘싸이월드’에 사진과 글을 올리며 대학 동창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그때 이름과 나이 정도를 입력하면 친구를 찾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느 날 반신반의하며 첫사랑 이름을 입력해보았다. 순간 너무 놀라 필자의 눈을 의심할 뻔했다. 나이 들어 중년 아저씨가 된 그 사람의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비슬산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는 사진 속 남자는 웃고 있었는데 필자가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필자 모습이 변한 것도 잊은 채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렇게 샤프하고 매력적이었던 사람이, 헤어지면 죽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이제 저런 아저씨가 되어버렸다니 믿을 수 없었다. 괜히 찾아봤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서로 각자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그냥 그 사람도 살아 있었구나 하며 마무리를 했다면 좋았으련만 필자는 사진 밑에 “비슬산이 어딘가요? 멋지네요”라고 다소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다음 날 다시 홈피를 찾아가 보니 필자가 단 댓글 밑에 “과거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합니다”라는 답글이 달려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아는 척을 왜 했을까 민망하고 후회스러웠다. 그냥 추억이 떠올라 한마디 써본 건데 그렇게까지 냉정한 반응을 보이다니…. 그 후 다시는 그 사람의 홈피를 찾지 않았다.

보고 싶었다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좀 실망스럽긴 했다. 지난 일은 그저 가슴에 묻어두고 아름다웠다고 추억만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절실하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첫사랑의 한마디는 참 멋대가리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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