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아내는 술을 못 마신다. 아니 넘기기는 하는데 곧 이상이 생긴다.
“우리 막걸리 마실까?”
“웬 막걸리요?”
“TV서 지금 막걸리들 마시는데 맛있어 보여서….”
“그럼 하시죠, 제가 사올게요.”
막걸리가 어울리는 나이도 됐다 싶다.
학창 시절 무교동에 낙지 골목이 있었는데 찌그러진 양은 대접에 술안주라곤 매운 새끼낙지볶음과 단무지가 전부. 단숨에 한잔하고 저어새처럼 휘익 돌려 젓가락에 걸리는 게 있으면 먹고 아니면 젓가락만 빨다가 밥 한 공기 시켜 매운 국물 넣어 비벼 먹었지. 그 밥을 또 안주 삼아 인원수대로 한 주전자씩 걸쳤지. 그때 세상의 애국자들은 다 모였었는데 어찌된 게 이제 주량도 주나보다.
막걸리 병을 휘휘 돌린 뒤 한 잔씩 부은 뒤 짠 부딪치고 한 모금 넘기니 히야~~ 본 건 있어서 할 짓은 다 한다.
“그래 이 맛이었지.”
속성으로 대충 부침개 만들어 간장에 재어둔 깻잎에 싸 먹으니 깻잎이 막걸리 안주로 궁합이 척 맞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반 잔 넘기고 서로 불콰해진 얼굴 마주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독한 고량주도 아니고 맑은 소주도 아닌 게 그 속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적당한 도수마저 막 걸러서 막걸리가 아니고, 안개 속에 보이지 않는 인생이 있어 그걸 찾으려 마시는 게 막걸리인가. 가는 길을 모르고 사는 것이나, 그 속을 보여주지 않는 막걸리나, 그것이 인생이라면 삶의 맛도 그 안에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막걸리 넘김이 조심스럽고 한층 깊어진다.
소주의 양은 홀수로 나오도록 계산해서 만들었다는데, 막걸리는 그런 약삭빠름 없이 이 녀석 저 녀석 주위에 보이는 아무 그릇을 막 들이대도 그 양이 딱 맞아 내외가 두 잔씩 하면 되니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양이 신기하다.
너무 붉어진 얼굴이 부담스러워 밖에 나와 적당히 서성거리다 들어오며 가끔 한잔씩 하자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투박함이 오히려 정이 드는 막걸리와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마치 새 친구 만난 기분처럼 설렌다. 이 한잔이 뭔데 이렇게 추억이 새롭고 그 맛이 아직 내 옆을 지키는 듯해 고맙기도 하다.
아마도 이게 술꾼의 시작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