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기사입력 2018-05-09 16:38 기사수정 2018-05-09 16:38

(박미령 동년기자)
(박미령 동년기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보랏빛, 흰색, 노란색, 분홍색 저마다 뽐내고 있다. 겨우내 금방 말라 죽을 것만 같던 나무도 어느새 연두색 잎사귀로 뒤덮여 몸체가 안 보일 지경이다. 점점 짧아져 쥐꼬리만 한 봄이지만, 그래도 역시 봄은 좋은 계절이다. 이런 천지가 그 유혹에 안달 난 우리를 자꾸 밖으로 끌어낸다.


그 기운에 기대어 겨우내 몸 사리느라 못 만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 끝에 친구가 말했다.

“지난 주말 우리 며느리가 친구들이랑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논다고 우리 아들한테 손주를 맡기고 나갔단다. 그래서 아들이 손주만 데리고 우리 집에 왔더라고. 그게 뭐 요새 트렌드라나 뭐라나.”


이 친구도 시어머니 노릇 하려 이 말을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뒷말은 잇지 않았다. 그가 내게 마음을 숨기거나 교양이 있어서가 아니다. 며느리가 안 듣는 데서 며느리를 흉보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요즘 트렌드이기 때문이다. 명색이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가 시어미가 되었다고 모여앉아 며느리 흉보는 모습이 옹졸해 보였는데 바람직한 변화이지 싶다.


언뜻 우리의 꽃다웠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숨죽이며 살지 않았던가.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도 억지로 꿀꺽 삼키며 지내지 않았던가. 그 기간은 착한 며느리 코스프레를 하며 지낸 듯하다. 매일매일 평소 자신의 모습인 양 연기하며 지냈으니 그 억울함은 얼마나 컸나!


자가 발전한 참았던 분이 어디로 터지겠는가. 남편은 무방비상태에서 애꿎게 폭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부부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고 영문 모르는 남편은 이 싸움에서 이길 수도 휴전의 방법도 알 길이 없다. 아내는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멍청한 남편이 야속하기만 하다.


결혼할 때는 서로 지나치게 잘 맞아 아무 말 안 해도 내 마음을 알아줄 줄 알았더니 갈수록 눈치가 발바닥이다. 하지만 정작 억울한 것은 남편이다. 멍하니 아내만 바라보다 센 펀치를 한 대 맞은 셈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항상 여린 연두색 잎사귀일 것 같던 그녀가 이제는 사철나무 두꺼운 고무나무 껍질이 된 것이다.


여자로서 이런 일이 반복되며 그 꽃다운 시절을 다 보내고 말다니. 하지만 다 잃은 것은 아니다. 그 덕에 ‘세상에 더 없는 며느리’, ‘착한 새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무엇이든 그 값어치는 우리가 그것을 위해 내놓으려고 하는 인생의 분량과 같다“라고 했다던데. 과연 인생의 반을 대가로 바칠 만한 것이었을까?


문득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최은희가 남긴 말이 귓가에 맴돈다. 무슨 대단한 유언이 아니라 자신의 영결식장에 가수 김도향이 부른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틀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스치는 봄바람 속에 흔들리는 꽃마저 예쁘다. 꽃이 만발한 동안 그 귀한 시절을 만끽했으면 좋겠다. 그때 하루하루가 얼마나 좋고 아까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결코, 우리와 다르게 지내는 젊은 세대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가 정녕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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