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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한 수가 된 속셈
- 18년 전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재산분배에 대한 계산서를 내밀었다. 지금 회고해보면, 아내나 필자가 이혼 얘기는 많이 했지만, 실제로 이혼할 생각이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퇴직을 하게 된 충격으로 필자는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잘못해서 이혼 당할 유책 배우자도 아니니 이혼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내가 얼굴만 보면 이혼 얘기를 꺼내 견디기 어려웠다. 이혼 절차를 밟아도 마지막으로 구청 신고를 하지 않으면 별거를 하다가 재결합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내민 계산서를 제대로 따지지 않고 서명을 했다. 당시 아내가 내민 계산서에는 우리가 가진 재산이, 동산과 부동산 합해서 5억 원 정도로 되어 있었다. 50평짜리 아파트가 2억5000만원 정도였다. 맞벌이를 했으므로 아내가 축적한 비자금이 상당액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아내는 가진 동산이 한 푼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필자의 동산은 퇴직금과 당시 주식시장에 약간의 여윳돈을 넣고 있던 것까지 합해 2억5000만원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깡통계좌가 속출하던 시절이어서 주식시장에 넣어두었던 돈의 잔존 가치는 별로 없었다. 증권회사 직원의 강권으로 대박이 난다는 텔슨전자 주식을 샀다가 얼마 안 되어 상장 폐지되면서 휴지가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의 계산서에는 투자한 원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부부가 재산을 반분하면 필자 몫이 2억5000만원인데 아내는 여기서 또 1억원을 떼었다. 왜냐고 물으니 앞으로 있을 아들딸 결혼자금이라는 것이었다. 왜 벌써 떼냐고 물으니 10년 후 아들딸이 결혼할 때 필자가 경제적 여력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 입장이 달라져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내도 오랜 시간 고민했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필자는 재결합의 가능성도 열어놓았으므로 다투지 않고 그대로 수락해줬다. 결국 필자에게 남은 돈은 장부가격으로는 1억5000만원이었지만 주식으로 날린 돈 때문에 잔존 가치는 500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돈이면 일단 원룸을 전세로 얻을 돈은 되니까 그대로 수락하고 짐을 씨서 나왔다. 독립을 하고 나서 당장 수입이 없어 막막했다. 그래도 아직 젊고 건강했으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스포츠용품 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 지역에 빌붙어 있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 같았다.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Umbro’ 대표이사를 지냈기 때문에 경력도 있었고 영어가 취약한 업체들이 필자를 필요로 할 거라고 예상했다. 마침 계약 추진 중이던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도 결국 다음 해 성공적으로 따내서 성가를 높이고 있었다. 개인 사업도 바이어 중 하나가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메인 스폰서로 선정되면서 매출이 급증해 승승장구했다. 형제간에 끝없는 갈등을 낳게 했던 아버님 유산도 필자가 나서서 해결하고 공평하게 배분받았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으로 기사회생하고 겨우 노후 대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년 후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접했다. 아들은 그동안 엄마와 같이 살았으므로 결혼 준비는 전 아내가 다 했다. 아내는 이혼할 때 떼어줬던 돈으로 오피스텔을 사서 자금을 불렸고 그 돈으로 아들에게 신혼집으로 작은 빌라 전세를 얻어줬다. 그리고 예물이며 결혼식장 계약 등은 전 아내와 아들이 직접 해결했다. 이윽고 아들의 결혼식 날, 아내와 필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정상적인 부부처럼 나란히 서서 하객들을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그날 온 하객들의 80%는 필자가 부른 손님들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던 전 아내의 직장 동료들 몇 명과 처가 친척들을 빼고는 거의 필자 손님이었다. 직장은 물론 동창모임, 댄스와 커뮤니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한 덕분에 필자의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전 아내나 필자 모두 처음 치러본 결혼식이라 잘 몰랐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전 아내가 결혼식이 끝났는데도 하객 명단을 필자에게 안 주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었다. 아내의 직장 동료들이 접수를 봤고 그대로 아내에게 전달되었으므로 필자는 아는 것이 없었다. 하객들이 누가 왔고 축의금으로 얼마를 냈는지 알아야 인사도 하고 추후 관혼상제가 있을 때 갚아야 할 돈이라 반드시 명부가 필요했다. 필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내는 우여곡절 끝에 명부를 건넸다. 필자는 그것을 기초로 결혼식장에 와준 하객들에게 직접 인사 또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누구 손님인지를 가려 들어온 축의금을 그대로 나눠야 하는데 아내는 한 푼도 못 내놓겠다고 했다. 그동안 아들에게 들어간 양육비며, 사두었던 오피스텔이 안 올라 신혼집 빌라 전세금 마련하느라 힘들었다는 얘기였다. 이혼 초기에는 필자도 상당히 어려웠다. 밥은 안 굶었지만, 여윳돈이 없어 당장 전세금을 올려달라 하면 대책이 없었던 시절이다. 반면, 전 아내는 살던 집도 있었고 직장도 있었으므로 아이들 양육에 큰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르바이트를 통해 경제적으로 도움도 주고 있었다. 돈 문제로 다투는 것이 아이들 보기에도 안 좋은 것 같아 포기했으나 섭섭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덕분에 이제는 아내와의 이혼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돈 문제에서는 한 푼의 양보도 없는 전 아내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들이 결혼도 했으니 전 아내를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느슨했던 마음이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린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아들딸 결혼식을 대비해서 미리 돈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아내의 속셈은 신의 한 수였다.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 아내는 필자를 가능한 한 빈털터리로 내보내면 얼마 안 가 못 버티고 항복하고 다시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직 딸이 출가 전이다. 제 말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니 결혼할 의사가 없는 듯하다. 아빠로서 결혼을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더구나 제 힘으로 벌어 이미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도 사놓았다. 필자가 18년 전에 남긴 결혼 비용 5000만원을 얼마나 불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는 데 보태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세상에 재테크에 밝은 똑똑한 딸이나 신의 한 수를 두었던 전 아내가 이 방면에 해박하니 알아서 할 일이다.
- 2017-09-1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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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되는 것
- 건강한 시니어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 또는 활동력을 활용하여 봉사활동에 나서기를 사회에서 부추긴다. 은퇴 후 허전함을 채워주고 자긍심도 올려주는데 수익성 일이 아니라면 공부와 봉사활동이 한 몫을 한다. 남을 위한 봉사활동은 신체 움직임을 통해 본인의 건강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3조다 그러나 봉사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여서는 안 된다.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올려주셨다. “자원봉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장에 간식으로 먹으라고 주최 측에서 넉넉히 빵과 우유, 차 등을 준비하였다. 체면상 나중에 먹으려 한 사람들 몇 분은 없어서 먹지 못했다. 중간에 몇 분들이 더 가져다 가방에 넣어버린 것이다. 더러는 친구 몫이라고 가져가 자기 가방에 챙긴다. 다음날 주최 측에서 친구 몫 챙기지 말고 자기 것만 가져가라는 주의가 주어졌다. 그래도 모자람은 여전했다. 결국은 일일이 빵 하나, 우유 하나씩을 나누어주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교육장이 되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욕심을 양심의 무게로 억눌러야 한다. 이곳저곳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면 욕심이 양심을 이기는 분들을 아주 많이 본다. 이런 분들은 봉사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봉사활동으로 남에게 빵과 우유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분이 남이 안보다고 자기 것처럼 자기 가방에 먼저 챙긴다면 그에게 보내던 찬사와 박수가 허망해 진다. 봉사활동시간에 자주 늦는 사람, 입으로는 일을 잘 할 것 같이 말하면서도 막상 현장에서는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가 먹을 때는 귀신처럼 나타나는 사람. 동장이나 기관장이 올 때는 앞에 나서서 설레발치다가도 봉사자끼리만 남으면 노골적으로 단체에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도 봉사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봉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못 마땅하다. 필자가 봉사활동을 하는 치매센터의 예를 들면 치매 환자의 특성이나 대처 방법을 모르고 어영부영 시간 때우기로 일관하는 봉사자를 말한다. 그러다 보니 봉사활동 몇 년을 해도 쓰레기나 줍고 청소나 하는 단순 노동자 수준에서 맴돈다. 봉사 시간에 걸맞게 고급 봉사자가 되도록 자기 발전을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책도 보면서 공부를 하여 그 방면에서는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봉사활동은 결코 시간 때우기 식의 심심풀이용 땅콩이 아니다. 우선은 봉사 활동할 마음자세 즉 심성이 아름다운 사람이 해야 한다. 다음으로 내가 봉사활동 할 대상이 정해지면 겸허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봉사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여서는 안 된다.
- 2017-09-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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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도산의 삶과 함께 살다
-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고 말한 도산 안창호는 그 모든 위업을 아우를 수 있기에 진실이 화두인 요즈음,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태산처럼 서 있는 거목이다. 대학 시절 처음 도산의 존재를 접한 후 평생 동안 그를 사숙했다. 일과 삶 모두에 도산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산 김재실(金在實)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지금 시대야말로 도산의 신념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올해 72세인 그가 평생을 바칠 정도였던, 도산에게서 발견한 거대한 화두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는 유독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1878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했다. 그야말로 조선 말기의 혼돈과 신문물의 합리주의를 동시에 겪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연설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적이고 신중한 조직가였던 도산 안창호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재미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바로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창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기보다는 지적인 조직가로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민족의식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오가며 벌인 그의 행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통해 오늘날에도 표표히 흐르고 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어요.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기 위해 조직됐죠. 흥사단 일을 하느라 대학교를 휴학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는 도산 선생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흥사단을 어떻게 전파하느냐만 생각하며 살았죠.”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후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남 천안이 고향이며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산 안창호와 만나게 된다.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흥사단은 유력한 사회인사들이 청년 시절 거치는 대표적인 모임이기도 했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준영, 순천향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윤배, 교육부장관을 지낸 황우여가 그 면면이다. 흥사단에 바친 청춘 흥사단 활동은 김 회장의 젊은 시절 꿈이 신문기자가 되게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흥사단에서 라는 잡지가 나와요. 왜 인가 하면 도산 선생의 말씀 중에 ‘기러기는 항상 줄을 맞춰 다닌다’는 말에서 따온 거예요. 그래서 흥사단의 상징이 기러기이기도 하죠. 이걸 제가 3년 동안 편집하고 책을 냈어요. 그래서 언론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가장이 되자 그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했다.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죠. 그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죠.” 도산의 삶에서 배운 교육자의 삶 산은을 나온 김 회장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현재는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그는 도산이라는 자신의 롤모델을 놓치지 않았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으며, 흥사단 이외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에 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흥사단은 나이 제한이 없어요. 흥사단 후배들을 제가 많이 만났죠. 대학생활 아카데미 회장,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교사도 했으니. 그때 가르친 고등학생들이 지금 칠십이 다 됐어요(웃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그렇다면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도층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지도층이 거짓말을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도산은 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유혹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이였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을 중심으로 청년내각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도산이 그 제안을 거절했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도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해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설립됐는데 도산이 5월 25일에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죠.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돈을 모아서 상해에 지원금을 보낸 것도 도산의 공이라 할 수 있죠.” ‘도산의 희망편지’로 청년들에게 희망을 김 회장은 도산을 가리켜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닮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됐죠.” 그는 도산의 사상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근거를 도산의 말들에서 찾는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그리고 지식의 자본, 마지막으로 금전 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으며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이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김 회장은 도산이 말한 ‘힘’을 믿고 ‘도산의 희망편지’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2016년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요즘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을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략 2만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그 글귀들을 모아서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생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1973년, 사업회는 도산의 묘소를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서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에는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0일이 되면 도산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 도산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됐어요. 그 사건에 도산의 제자 60여 명이 잡혔기 때문이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산은 초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병보석을 나와서 다음 해 3월 10일에 사망하시고 말았죠.” 또한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도 책자로 발간했다. 청소년들 대상으로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고 한다. 글짓기 공모도 매년 실시하여 도산의 탄신일인 11월 3일에 시상식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그야말로 도산 안창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 사업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김 회장의 정의와 묘하게 부합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이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란 바로 ‘뭔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면 안 되죠.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도산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성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이 많이 드는 걸 피하려면 공동체에 속하는 게 좋습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사람 대하는 법을 간략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요즘은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문자도 있잖아요. 그런 도구들로 관심을 가져주고 표현하다 보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거죠.” 도산 정신이 뿌리 내리도록 전파 “도산 선생은 정말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정의하면서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산을 불러왔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도산의 마음은 김 회장을 통해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응축하고 있었다. “날 기억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김재실 회장은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왔는데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고 밝혔다.
- 2017-09-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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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식 라이프 스타일 ‘휘게 라이프’
- 아차산역 근처에는 이탈리언 레스토랑 ‘휘게’가 있다. 처음 보는 단어라서 일단 들어가 봤다. 깨끗한 인테리어에 분위기가 아늑했다. 가격과 음식도 그런대로 괜찮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 ‘휘게(Hygge)’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되었다. 덴마크어로 ‘편안하고 아늑한 상태를 추구하는 덴마크식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친 김에 인터넷에서 ‘휘게’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마이크 비킹이라는 사람이 쓴 라는 책이 있었다. 덴마크라면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고 소문난 나라다. 그 행복의 요령을 설명해놓은 책이다. 이 책에 ‘휘게 10계명’이 나온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다. 일상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라는 조언이다.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방안 분위기를 약간 어둡게 하라, 현재에 충실하라, 달콤한 음식을 즐겨라, 혼자보다 함께하라, 감사해하고 오늘에 만끽하라, 혼자 뽐내지 말고 남들과 조화하라,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라, 감정 소모를 하지 마라, 추억을 얘기하며 관계를 다져라, 보금자리의 편안함을 즐겨라 등이다. 덴마크식 행복 요령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만 해도 방안 분위기가 밝은 것이 좋다. 달콤한 음식보다는 한국적인 맛이 더 좋다. 현재에 충실하기는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 함께하고 싶지만 혼자도 좋다. 오늘을 즐기지만 내일도 준비한다. 뽐내는 일은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정리 중이다.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건 매일 하는 일이다. 감정 소모는 피하거나 줄이려고 노력한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보금자리가 편안하기는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일단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거나 주거 형태에 대해 고민 중이다. 기후 조건이 좋지 않은 덴마크의 환경으로 볼 때 행복을 집 안 생활에서부터 찾는 것 같다. 밖에서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가족 구성원이 좋아야 한다. 배우자와 좋은 관계이거나 애견이라도 기르며 밖에 나가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밖에 나가 큰 관계를 만들고 활발하게 활동하라는 얘기는 없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조용히 소박하게 즐기는 것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 중 하나로 정치, 경제, 사회적 안정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복지까지 더해지니 불만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정은 다르다. 북한의 핵 위협에 일본의 이기적 정치, 중국의 힘 자랑 등 바람 잘 날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수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이고 이를 발전시키거나 유지하는데도 내적으로 문제가 많다. 비교적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회적 불안도 있다. 복지도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피부로 와 닿는 건 별로 없다.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이 가진 돈이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늘 긴장하고 산다. 행복의 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휘게 라이프의 기준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면 행복한 것이다. 바쁜 생활이나 화려한 사회생활은 점차 정리하고 느긋하게 삶을 즐기라고 조언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 행복하면 된다. 단, 건강이 제일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 2017-09-0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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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신,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 ‘선타투 후뚜맞’. 이게 무슨 의미일까? ‘허락 전에 문신을 하고 그 후에 부모님께 뚜들겨 맞겠다’는 뜻이다. 문신을 반대하는 기성세대와 문신을 개성 표현 방법의 하나로 여기는 신세대 간의 첨예한 대립을 제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사람들 몸에 문신을 새겨주는 타투이스트 ‘난도’를 만나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문신(tattoo)’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는 온몸을 휘감은 용, 잉어, 도깨비 등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조폭, 야쿠자 등으로 연결되면서 ‘문신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결론 난다. 가끔 뉴스에서 보이는 불량 청소년이나 조폭의 몸에 새겨진 휘황찬란한 문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문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의 틀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라는 옛말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문신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오늘날 문신은 더는 낯설지 않은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요즘에는 길거리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문신한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화배우, 스포츠 선수, 가수 등 예체능 종사자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문신이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 열려 있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문신, 그 편견을 넘어서 한남동에서 타투숍을 운영하고 있는 타투이스트 난도. 담배 연기로 자욱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숍을 예상했지만 이 또한 편견이었다. 처음 방문한 타투숍이 신기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난도가 인사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숍이 밝죠?” 그렇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여기저기 놓인 독특한 소품들은 애초에 생각했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밝은 조명과 쾌적한 환경, 거기에 난도가 직접 그린 작품들은 타투숍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경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스페인 유학 시절 문신을 접하면서 시술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럽 사람들은 개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문신을 하곤 해요. 스페인에선 워낙 많은 사람이하니까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죠. 아무래도 제 전공이 미술이다 보니 눈길이 많이 갔고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유럽에선 20세기를 거치면서 문신이 이미 자연스러운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19세기에는 영국 해군들 사이에서 일종의 ‘무사 귀환’을 상징하는 부적으로 여겨졌고 이후 미국으로까지 퍼졌다. 그렇게 전 세계로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 문신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패션의 일부이자 개성 표현의 한 문화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인 JTBC 을 보면 가수 이효리와 남편 이상순 몸에 새겨진 다양한 문신이 눈에 띈다. 예전이라면 모자이크로 처리했겠지만 지금은 별다른 제재 없이 노출하고 있다. 그만큼 문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타투숍을 방문하는 걸까? “문신은 조폭이나 나쁜 사람들만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십니다. 문신이 조폭 영화에서 필수가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움이 커요. 하지만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패션이나 개성 표현 방법으로 문신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최근 유행하는 문신은 눈에 잘 띄지 않다 보니 인식도 바뀌는 등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하는 작업은 선이 얇고 비교적 작은 크기이다 보니 남성분들보단 여성분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난도의 SNS 계정은 국내외에서 18만 명이 팔로우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스타일을 문신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그의 지향점이 바로 인기 비결. 피부에 수채화를 그려넣은 듯한 그의 섬세한 문신은 우리가 흔히 아는 ‘혐오스러운’ 문신과는 거리가 멀다. 문신은 피부에 상처를 내서 물감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하면 지우기 어렵다. 레이저 시술로 없애는 방법이 있지만 완벽한 제거는 아직 불가능하다. 마치 우리 기억 속의 추억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추억을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들도 있단다. “아무 의미 없이 하는 손님도 있지만 나름의 사연이 있어서 찾아오는 손님도 있어요. 흉터를 가리기 위해 찾아오는 분, 반려견이나 반려묘와 이별하고 찾아오시는 분, 가족 얼굴을 새기고 가는 분 등 매우 다양하죠. 탄생화나 별자리를 새기는 분들도 있고요. 최근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아기가 태어난 날짜를 시계 도안과 함께 팔에 새기고 간 분이에요. 지워지지 않는 문신은 잊지 못할 순간을 평생 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난도에게 물었다. “혹시 시니어분들도 문신을 하기 위해 찾아오나요?” “3년 전부터 급격하게 우리나라도 문신에 대한 인식이 관대해졌지만 아직 시니어에겐 쉽지 않은 것 같아요(웃음). 딱 한 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 한 적은 있지만 거의 드물다고 해야겠죠.” 문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남아 있다. 대중목욕탕엔 ‘혐오감을 주는 문신을 한 사람은 입장 불가’라는 안내판이 존재한다. 공무원 응시 자격 요건에도 ‘공무원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문신이 없어야 함’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실제로 야구선수 이대은은 2016년 경찰야구단 입대를 위해 지원서를 냈다가 문신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난도는 문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조폭 하면 쉽게 떠올리는 알록달록한 문신인 ‘이레즈미’, 글자만 새기는 ‘레터링’, 명암으로만 표현한 ‘블랙 앤 그래이’ 등 문신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어요. 또 도안마다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죠. 타투이스트들 또한 손님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도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요. 아직까진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시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예술 활동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에는 ‘평범함’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문신을 한 사람들도 ‘이상한 사람’에 포함된다. 위아래로 훑어보곤 ‘분명 엇나갔을 거야’, ‘몸이 도화지야?’, ‘철이 없네’ 하면서 부정적으로 그들을 평가한다. 문신을 찬양하자는 말은 아니다. 한 번쯤은 편견이 아닌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려 노력해보자. 어쩌면 그들의 문신에는 위협이 목적이 아닌, 끝까지 잊지 않고 싶은 추억과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 2017-09-0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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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쁘게 산다는 건 좋은 일일까?
- 남자들이 퇴직하고 나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삼식이로 하루 세끼를 집에서 해결하고 하루 종일 TV와 논다. 그래서 아내는 때 맞춰 밥을 대령해야 하고 간식까지 제공해야 한다. 그동안 이웃과 사회 활동에 길들여진 아내는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부 싸움이 종종 일어난다. 그전에는 돈을 벌어오던 남편이라 대우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니 싸움에서도 밀리는 것이다. 반면에 직장생활 할 때보다 더 바쁘게 사는 시니어들도 있다. 필자도 그렇다. 이 경우는 너무 바빠서 문제이다. 자신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남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도 매일 프로그램을 정해 놓고 움직인다. 월요일은 댄스, 화요일은 노래교실, 수요일은 장애인 봉사 등으로 정해 놓았다. 다른 일이 생기면 결석을 할 수는 있으나 별 일없으면 그대로 움직인다. 올해는 맡은 일이 많아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열심히 할 작정이다. 일하는 재미도 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즐겁다. 성취감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서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복이 많았는지 어지간한 것은 다 해 봤으므로 더 이상 욕심도 없다. 그래서 삶의 방식을 바꿔 인생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되도록 바깥일을 접고 필자 위주의 삶으로 전환할 것이다. 혹자는 그러면 우울증이나 허탈감으로 삶이 무력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여정으로 볼 때 시간을 가치 없이 보내지는 않을 것 같다. 밖으로 나돌지 않아도 충실히 내 안에서 나를 위해 할 일들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여행도 있고, 영화 감상도 있고, 독서도 있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필자의 생활 중에 댄스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호인들끼리 즐기는 모임이 있고,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있고, 시니어들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모임도 있다. 필자의 건강을 위하여, 봉사를 위하여, 성취감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는 좋은 반려자를 만나기 어렵다. 같이 댄스를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필자가 마음을 비우고 한다지만, 다른 여자들과 춤을 추는 동안 옆에서 보기에는 불편한 것이다. 댄스 외에도 다른 스케줄도 그렇다. 다 따라다니기에도 벅차다. 차 한 잔 마실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도 잠시도 쉼 없이 뛰듯이 사는 것을 보면 차마 그런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바쁘게 산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우선, 댄스를 줄이고, 공적인 활동을 줄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삶’을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늘어지게 자고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도 괜찮은 삶을 찾아보겠다.
- 2017-08-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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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떠나지 않고 내 집에서 ‘도시농부’ 될 수 있을까
- 누구나 노후에 작물을 기르며 텃밭을 가꾸고 싶은 작은 소망이 하나씩 있다. 밥상 위에 놓을 야채 몇 가지가 추가되는 것만으로도 좋고, 주변에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면 더 좋다. 여기에 약간의 용돈까지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현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그렇다고 집을 등지고 시골로 내려가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잘만 하면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바로 도시농업이다. 도시농업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다. 자연이 도시화되고 상당수의 인구가 도시에 몰려 살면서 농촌이 가지고 있던 일부 농업 기능을 도시로 옮기고자 하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다. 그녀는 백악관 텃밭에서 작물을 가꾼 경험을 바탕으로 이라는 책을 2012년에 발간했다. 미국은 자생적 도시농업의 대표적 국가로 각 주정부마다 시민들이 마음껏 경작을 할 수 있도록 세세한 조례를 마련해놓고 있다. 뉴욕 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 텃밭 조성을 위한 시민사회단체가 운영하는 그린 섬(Green Thumb) 프로그램을 시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또 식량위기를 도시농업으로 돌파한 쿠바의 이야기나 시민농원법을 통해 공동체 텃밭의 운영을 권장하는 일본 역시 도시농업의 주요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도시농업의 세계적 우수사례 서울 이렇게 많은 도시가 도시농업에 주목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환경 문제가 있다. 도심의 생태계를 도시농업을 통해 복원시키고 거주 환경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로도 도시농업이 꼽힌다. 각종 텃밭 관리나 농업 관련 교육 등은 은퇴자 일자리에 적합한 분야 중 하나다. 특히 ‘땅’을 기반으로 한 농업은 지역 공동체 결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결국 지역에서 거주기간이 긴 중장년층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공동체 문화가 조성되고, 지역의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다면 금상첨화다. 국내에서 도시농업에 대해 정책 개발을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곳은 서울시다. 서울시의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모범으로 꼽힌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도시농업 1.0 사업을 통해 도시농업이 정착될 수 있는 제반 준비와 함께 다양한 실험적 사업을 진행했다. 현재는 2018년까지 완료를 목표로 ‘도시농업 2.0’을 진행하고 있다. 1.0이 관 주도의 취미·여가형 도시농업이었다면, 2.0은 민관이 결합해 함께 사업을 추진하고 지역에 공동체 문화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서울시의 설명이다. 서울시의 도시농업 사업이 잘 적용된 대표적인 곳이 바로 종로구 행촌권 성곽마을이다. 종로구 행촌동 일대 지역은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으로 그동안 돈의문 뉴타운 사업이나 재개발구역에서 소외되어왔다. 그러다 주거환경관리사업 정비계획안이 통과되면서 주거환경 개선사업과 더불어 도시농업 시범마을로 특화돼 연중 자동화 재배가 가능한 IoT(사물인터넷) 스마트팜 조성도 진행 중이다. 서울시와 지역민들은 지역공동체 거점인 ‘행촌共터’를 3호점까지 개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도시농업을 위한 여러 교육을 진행했다. 지난해부터 육묘장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텃밭을 가꿔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소득도 올렸다. 양봉도 시작해 꿀 800ℓ를 얻기도 했다. 올해는 도시농업의 특성상 작은 면적에서 높은 효율의 수확을 얻어내기 위해서 부가가치가 높은 더덕, 감초, 어성초 등을 심은 약초밭도 만들었다. 농부 되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 도시농부가 되는 과정은 무엇이 있을까. 도시농부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관련 교육과정을 통해 농업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교육과정은 지역별 농업기술센터의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의 경우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을 통해 매년 100명 이상의 도시농부를 배출하고 있다. 도시농업 교육기관을 표방하는 민간단체들도 상당히 많다. 일부에선 “교육기관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 서울시에서 꼽은 도시농업 시민단체만 해도 협동조합을 포함해 44개나 된다. 관련 소규모 시민단체들은 지역에 따라 활성화된 곳도 있지만 조직적, 재정적 어려움도 상당하다. 이러한 교육 과정의 정비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국가자격증 제도인 ‘도시농업관리사’ 제도가 실시된다. 지난 3월 관련 법령이 개정되면서 9월 22일부터 시행 예정인 도시농업관리사는 도시민의 도시농업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도시농업 관련 해설, 교육, 지도 및 기술보급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또 개정안에는 도시농업의 범위에 ‘수목과 화초를 재배하는 행위’와 ‘곤충을 사육(양봉 포함)하는 행위’를 추가해 도시농업의 범위가 넓어졌다. 해설과 교육, 기술 보급도 도시농업 도시농업이 단지 주변의 작은 유휴지에 작물을 심어 가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텃밭학교나 스쿨팜 사업 등을 통해 작물에 대한 교육과 이를 통한 인성 교육을 추진하는 단체들도 많다. 도시농업포럼의 꿈틀텃밭학교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는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이 교장으로 부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초등학생들과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텃밭을 가꾸는 데 필요한 각종 교육, 채취한 농산물을 활용할 수 있는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단순한 농업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텃밭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 간의 잃어버린 대화를 회복하고, 아이들의 인성 발달 등 긍정적인 효과가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직업으로서 도시농부는 어떨까? 아직은 글쎄다. 일부에선 “농작물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강사로 활동하는 것이 벌이는 더 낫다”고 평가할 정도. 도시농업에서의 텃밭이라는 공간은 농촌의 대규모 농업과 경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구조적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일부 지자체나 주민단체가 고부가가치 농작물에 열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농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고, 이를 가공해 서비스 사업으로 연계해야 도시농업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 2017-08-3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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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나의 영웅, 인호 형 보고 싶어요”
- “라디오코리아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989년 2월 1일, LA의 한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라디오를 틀었는데 한국어가 나오고 한국 노래가 나왔던 거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한인들을 울렸던 목소리는 지금도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28년 동안, 그가 마이크를 놓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저 방송이 좋아 방송쟁이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덧 라디오코리아는 그의 인생이 되어 있었다. 최영호 라디오코리아 부회장(69). 그는 부인할 수 없는 LA의 라디오 스타다. “죽을 때까지 하자던 장희는 울릉도로 가버리고, 글쎄 나만 이러고 있네요. 하하하.” 올해로 28주년을 맞은 라디오코리아와의 인연을 묻자 최영호 부회장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랬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라디오코리아는 ‘이장희’로 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장희가 홀연히 떠났고 라디오코리아는 위기설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후 10년, 라디오코리아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동안 광역주파수를 가진 자체 라디오방송국도 마련했고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지역과 하와이까지 지국을 넓혔다. 최근엔 한국의 종편채널 ‘TV조선’과 손잡고 TV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영호 부회장의 공이 적지 않았다. 라디오코리아의 주인도 바뀌고, 건물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뀌었는데 그는 바뀌지 않았다. ‘부회장’이라는 묵직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전히 그의 자리는 스튜디오 안 마이크 앞이다. 28년을 한결같이 들어온 목소리. 이제 사람들은 라디오코리아 하면 ‘최영호’를 떠올린다. ‘라디오코리아’ 너는 내 운명 “참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에요. 미국에 오기 전 장희(가수 이장희)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동아방송 이라고. 장희랑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예요. 친구가 일하는 방송국에 가서 재미 삼아 원고도 써주고 음악도 고르며 놀곤 했어요. 그때 김병우 PD도 알게 됐고요. 나중에 세 사람이 모두 미국 LA에서 만난 거예요. 운명이었죠. 우리에게 라디오코리아는.” 1974년, 대학(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을 졸업하고 큰누이가 사는 LA에 와 있던 최 부회장은 김병우 PD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때가 1988년, 무역회사에 잘 다니고 있을 때였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어보자는 말에 최 부회장은 짜릿함을 느꼈다. 곧 이장희까지 합세, 세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라디오 방송을 하려면 주파수(스테이션)를 사야 하는데 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때문에 같은 주파수를 여러 다른 커뮤니티가 시간별로 렌트해서 나눠 쓰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시작했어요. 아시안 라디오 Am1300에서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방송을 하기로 계약을 했어요. 김병우 PD가 한국에 레코드판을 사러 간 사이 우리는 방송 인력을 뽑았어요. 프로를 원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실기시험 갖출 건 다 갖춰서 했습니다. 다섯 명을 뽑았는데 그들이 라디오코리아 공채 1기입니다. 그중엔 현재 라디오코리아 보도본부장을 맡고 있는 송봉후씨도 있었습니다. 그때 목소리가 상당히 좋았어요. 지금도 좋지만…(웃음).” 최 부회장은 1989년 2월 1일 12시를 잊을 수가 없다. 애국가가 울려 퍼진 후 송봉후 아나운서의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의 한인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이 방송이 진짜냐, 내일도 하느냐?”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장희가 맡은 음악 프로그램 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방송이 나가는 시간이면 방송국 앞으로 찾아온 사람들로 한바탕 난리가 나곤 했다. 그야말로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4월 29일 “라디오는 참 매력적인 매체입니다. 들으면서 뭐든 다 할 수 있으니까요. 한인들은 삶의 현장에서 라디오를 들었죠. 봉제공장에서, 미장원에서, 방앗간에서, 운전을 하면서 모두가 라디오를 들었던 겁니다. 한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수백 명의 한국인 여직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려 미국인 감독이 깜짝 놀랐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힘들었지만 낭만이 있던 시절이죠.” 라디오코리아는 한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함께 울고 웃었다. 가장 떠오르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 부회장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1992년 4월 29일의 LA폭동 이야기를 꺼냈다. “퇴근을 하려는데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뭔가 일이 터지겠구나 싶더라고요. 직원들에게 퇴근하지 말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사우스 센트럴 일대는 순식간에 무법천지가 되었다. 폭도들은 북쪽으로 밀고 올라와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 불길이 치솟아도 소방대는 오지 않았고 떼를 지어 가게 물건들을 약탈해가도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리쿼스토어인데 폭도들이 쳐들어온다.” “지금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고 있다.” “웨스턴 길로는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다.” 최 부회장은 재빨리 특별 생방송을 결정하고 시시각각 들어오는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폭도들의 위치를 알려주면 상인들은 미리 대비를 했고, 운전자들은 자동차에서 방송을 들으며 안전한 길로 갈 수 있었다. “상상해보세요. 스마트폰도 GPS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눈앞에서 폭도들이 날뛰고 건물이 불타는 전시 상황과 같은 곳에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한인들에게 목숨 줄이었습니다. 경찰이 한인타운을 지켜주지 않자 한인들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죠. 1세들이 이민 와서 피땀으로 일궈낸 모든 것이 초토화될 상황이었습니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는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급한 일이었다. 한인 공무원, 회계사, 변호사들을 불러 모아 함께 방송을 했다. 라디오코리아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가 똘똘 뭉치는 모습에 미국 주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하루는 화이트하우스에서 전화가 왔어요. 백악관 말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하겠다고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현직 대통령이 로컬 언론사를 직접 찾는 일은 처음이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비서실장이 직접 한 말입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개인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어요.” 야구광, 다저스를 만나다 최영호 부회장은 유명한 야구광이다. 미국으로 이민 온 이후 다저스의 팬이 되었고 특히 ‘다저스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빈 스컬리 캐스터의 중계를 듣는 것은 그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라디오코리아를 개국한 이듬해인 1990년, 최 부회장은 당시 LA 다저스의 구단주 피터 오말리를 찾아갔다. 거두절미하고 그가 던진 말은 “라디오 중계 좀 합시다!”였다고. “한인들이 다저스 중계를 들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었습니다. 야구 중계를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재미있었던 것은 오말리 구단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예스’를 한 거였어요. 당시 메이저리그 중계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세 가지 언어로만 했는데 한국어가 네 번째가 된 겁니다. 그해 9월 다저스와 신시내티와의 경기 중계를 하러 다저스구장에 갔지요. 그때의 감격이란… 그날 경기 녹음테이프는 뉴욕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 중계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최 부회장의 중계는 재미를 더했다. 경기 상황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뒷이야기 등 미국 야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긴 그의 중계는 한인 다저스 팬들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했다. 다저스 구단으로서도 대만족이었다. “다저스 구단 측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팀에 한국 선수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외국 선수를 기용하는 데 꽤 적극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말을 꺼내기도 쉬웠죠. 4년 뒤인 1994년, 마침내 박찬호 선수가 LA에 오게 되었죠.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2년 동안 라디오코리아는 전 경기를 중계방송했어요. 당신을 응원하는 한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이후의 메이저리거 활약은 모두를 신바람 나게 했어요. 박찬호 선수와 지금 뛰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저 혼자 느끼는 보람 같은 것이 있습니다.” 최 부회장은 지금도 다저스 경기에서 캐스터와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했던가. 야구 중계만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방송 경력 28년에 다저스 경기 중계만 27년, 그는 단연코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며 무한애정을 드러낸다. “간혹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힘들게 일할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줍니다. 빈 스컬리는 67년간 다저스 중계를 하다가 88세에 은퇴했다고(웃음).” “인호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최영호 부회장은 2013년 작고한 고 최인호 작가의 친동생이다. 세상없는 우애를 나누던 형이자 국민 작가를 떠나보낸 지 어느덧 4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최인호 작가는 유독 LA와 인연이 깊었다. 3남 3녀 중 누이들과 동생인 최 부회장이 197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있었던 까닭에 자주 찾아와 오래 머물다 가곤 했다. 참고로 최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198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LA와 데스밸리 여행 중에 구상된 작품이다. 잡지 에 35년간 연재된 자전적 소설 을 비롯해 고인의 작품 곳곳에는 홀어머니와 그 밑에서 어렵게 자란 형제들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다. “작가 아니랄까봐 까칠하고 예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인호 형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형의 글 쓰는 모습만 떠올라요. 자고 일어나 문틈으로 보면 역시나 글을 쓰고 있었고… 이사할 때마다 형의 습작들이 한 짐이었지만 어머니는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셨습니다.” 형 최인호와 아우 최영호만이 아는 신춘문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형이 군대를 가면서 자신이 공책에 끄적거려놓은 게 있으니 원고지에 정필해 신문사에 보내라고 했어요. 나름대로 정성껏 써서 신문사에 보냈죠. 그렇게 당선된 작품이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견습환자’예요. 원고지 첫 장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정성을 들여 한자(漢字)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어령씨가 글씨가 너무 유치해서 읽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형과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 같은 형이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최 부회장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이 범접할 수 없었던 ‘거인’이었다는 것을. “정치, 경제, 문화, 예술계 전체가 애도를 표해왔지요.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들과 분향을 하고 흐느끼는 독자들을 보면서 형님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였는지, 한 시대를 품었던 예술가였는지 알게 됐어요. 아, 내 형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내가 더 존경해야 했던 분이었구나 회한이 밀려와 많이도 울었습니다.” 최 부회장은 형의 작품을 모두 소장하고 있다. 서고의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형이 하늘로 간 후로 지금까지 그는 그 책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읽고 있다. 라디오코리아 그의 사무실 책상에도 작가 최인호의 주옥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늘 곁에 두는데도 볼 때마다 마음이 철렁한다. 첫 장에는 어김없이 ‘영호에게’로 시작되는 형의 짧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보물들이다. “갈수록 무뎌져야 하는데 어떻게 된 게 갈수록 보고 싶어요. 큰누이를 잃고 많이 울던 나에게 형은 누이를 가슴에 묻으라 했어요. 인호 형도 그렇게 가슴에 묻어야겠죠.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형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그 깊이가 더해져요. 형 없이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또 많이 감사합니다. 형으로 인해, 형의 글들로 인해 깨닫는 것이 많아지니까요.” 지키고 싶은 이름, 방송인 최영호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TV보다는 인터넷을, 라디오보다는 MP3가 더 편한 세대다. 최영호 부회장은 방송은 변하지만 방송을 하는 정신은 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라디오코리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로컬 방송의 생명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인 동포들이 라디오코리아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겁니다. 라디오코리아는 미주 한인의 자본으로 만든 한인언론이에요. 진짜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이익을 대변하는 ‘우리 방송’인 거죠. 저는 한인 사회가 있는 한 라디오코리아도 존재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마이크 앞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스스로를 뼛속까지 방송인이라고 칭한다. “나는 마이크 앞에 방송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감투도 싫고 명예도 귀찮습니다. 나이가 더 들어 목소리가 변하면 청취자가 싫어할까요?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친구 같은 분들이 있지 않을까요? 그분들을 위한 좋은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요. 깊은 밤에 함께 음악도 듣고 지난 얘기도 나누고요. 와, 이런 얘기 방송에서 해도 되나 싶은 것도 막 이야기하면서 말입니다(웃음).”
- 2017-08-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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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주 KBS 아나운서, 하루를 여는 <행복한 시니어>로 일상의 행복을 나누다
- 흔히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멀뚱멀뚱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보지만 세상은 아직 단잠에 코골이 중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박영주입니다.” KBS 1라디오 의 박영주(朴英珠·57) KBS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97.3MHz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모닝콜은 전국 방방곡곡 시니어 애청자들에게 비타민주스처럼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새벽 4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침대에 누워 여전히 어제의 꼬리를 붙잡고 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른 시각에도 활기찬 하루의 포문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의 애청자들이다. 상냥하고 은은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덩그러니 놓인 새벽의 허전함을 사뿐히 채운다. 이미 애청자들과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을 놓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박 아나운서에게 직접 소개를 부탁했다. “새벽 4시부터 4시 40분까지, 시니어를 위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입니다. 새벽잠은 없고 그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라는 이름으로 방송했어요. 청취자 층을 50대까지 확장하려는데, 그들을 실버라 부르긴 어울리지 않아 ‘시니어’를 사용하면서 가 됐죠. 이름이 바뀌고 얼마 뒤에 제가 진행을 맡아 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건강, 추억의 음악, 영화 그리고 한시까지 새벽 프로그램인지라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가 코너 편성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9988 치매완전정복’, ‘행복밥상’, ‘낭독으로 읽는 고전소설’, ‘유성기로 듣는 우리 음악’, ‘그 시절 그 노래’, ‘추억의 영화’, ‘꿈꾸는 책방’ 등 건강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한 14가지의 콘텐츠가 한 주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소개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리포트와 더불어 두 가지의 주제를 40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들려주니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친근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 그중 청취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코너는 무엇일까? “치매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상담까지 해드리는 ‘9988 치매완전정복’이 반응이 좋아요. 또 ‘한시 산책’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시니어 세대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자를 다 배웠잖아요. 다들 그런 향수가 있는데, 일반 방송에서는 잘 안 다루죠. 그런 주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각양각색 코너를 마련하는 데 제작진을 비롯한 진행자의 노고도 상당할 터. 여느 교양 프로그램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은 시니어 청취자를 향한 그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해요. 우리 작가는 20여 년 문화 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는데, 나와 또래도 비슷하고 취향도 잘 맞아요. 그래서 문화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다 다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책, 음악, 영화, 시, 소설 등 미술이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라디오라서 미술이 지닌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평소 일주일에 두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 음악회, 발레, 오페라 등을 즐긴다는 박 아나운서다. 그녀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은 다채로운 코너 구성에 힘을 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배정을 받아 교실에 가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커다란 전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매일 조회, 종례시간이면 ‘차렷, 경례’를 하고 그 시를 다 함께 낭송하곤 했죠. 한 달 동안 매일 하나의 시를 외우다시피 읊다가, 다음 달이 되면 또 다른 시를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그 순간이 굉장히 좋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시가 넘쳐나면 보다 더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 코너를 넣게 됐어요. 그건 제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코너라 남다른 애착이 있죠.” 사연 속 사연이 담긴 ‘부모님 전 상서’ 요일별 달라지는 코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토요일 방송분인 ‘부모님 전 상서’다. 청취자가 부모님께 띄우는 편지를 성우가 낭송하는 시간인데, 매주 애잔하고 감동 어린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신다. “부러웠던 사연이 있어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아 아버지께서 홀로 수습하시다가 결국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비록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녀들의 우애가 대단했죠. ‘의좋은 삼 형제’라고 불렀는데, 큰형이 나무를 하면 꼭 두 동생의 집에 몇 단씩 놓고 가고, 작은 형이 시장에서 뭘 사면 그것을 셋으로 나눠 형과 아우의 집에 주고…. 결혼해서도 윗집 아랫집 다 같이 살았죠. 그러고도 아쉬워서 나란히 묻힐 곳을 마련하고 묘비명도 미리 써두었다는 거예요. ‘우리 삼 형제는 한평생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눴는데 그 정을 두고 가기 아쉬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기 나란히 묻힌다. 후세들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며 잘 지내라.’ 그런 이야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참 부러운 마음으로 사연을 소개했어요.” 이 코너는 편지의 내용에서 오는 감동뿐만 아니라, 편지 그 자체에서도 특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휴대폰 문자로도 라디오 사연을 받는 요즘, 의 청취자들은 젊은 시절 라디오 사연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성 어린 손편지를 보내온다. 한평생 일하던 회사에서 쓰던 누런 갱지, 신문지 사이에 들어 있는 광고지 뒷면, 아들의 회사 로고가 찍힌 기안용지 등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가 아닌 저마다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편지지가 인상적이다. 또 한글을 잘 몰라 구술을 해서 아들이 대신 적어 보낸 편지부터, 할아버지가 늘 하는 이야기를 타이핑해서 사연으로 보낸 손주, 손에 힘이 풀려 삐뚤빼뚤 쓰인 필체 등 그들이 보낸 사연에는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청취자를 위하여, 그리고 청취자로부터 온기 어린 사연들만 보아도 어딘가 모르게 시니어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듯, 청취자의 특징이 드러나는 몇 가지 귀여운(?)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청취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박 아나운서다. “우리 방송 이름이 ‘행복한 시니어’인데, 어떤 청취자께서 사연을 보내면서 ‘행복한 신녀’라고 써서 보내셨더라고요. 아마 ‘선녀’처럼, ‘신나는 여(女)’ 이런 식으로 의미를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려 해요. 또 제 이름을 ‘백영주’라고도 하고, ‘박영희’라고도 하고,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건데 더 또박또박 말씀드리려고 신경 쓰고 있죠. 가끔 리포터가 현장에 나가 청취자를 만나면 (코너가 많다 보니) ‘박영주 아나운서가 참 똑똑하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아느냐’고 칭찬하신대요(웃음). 그러면 작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드리곤 하죠.” 그 외에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 4시 생방송 진행으로 안다는 것이다. 대체로 라디오는 생방송이지만, 새벽 시간대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로 만들어진다. 박 아나운서가 실제 방송을 녹음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출근시간 이후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벌써 33년째 KBS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몇 년 후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박 아나운서에게 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85년에 입사해서 초창기에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15~20년쯤 지나면 TV 프로그램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니어 아나운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력하게 돼요. 이제 퇴직이 4년이 채 안 남았는데, 선배들도 그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을 하다가 떠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어서 한참 아이 키우고 할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는 상당 부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거든요. 일상의 성찰도 있지만, 지난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참 많아요. 아주 느린 호흡으로 참되게 나를 위해 집중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복되게 가꿔나가 보려고요.” 현재도 시간을 내서 사단법인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집단 치유 프로그램 치유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녀는 은퇴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며 시각장애인 녹음 봉사자 교육 등에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곁에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부모님 전 상서’ 코너가 교훈이 됐다. “부모님은 늘 거기 계시고, 당연히 뒷바라지해주는 분들로 여겨왔는데, 이 코너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러 사연 속 공통 메시지는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뵀더라면, 식사 한 끼 함께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걸 할 수 있는 처지거든요. 원래는 냉랭한 딸이었는데, 가능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살갑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복한 시니어, Just Do it! 는 청취자들의 노후뿐만 아니라 다가올 박 아나운서의 노후까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글쎄요,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여행할 때, 친구와 대화할 때,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죠.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춤출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춤을 출 때는 단지 춤추고 있고, 춤에 몰입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정확하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춤을 추고 나서 아닐까요? 그건 이미 춤을 추는 행복에서 벗어난 상태죠. 궤변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 그래도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면’ 행복한 시니어가 아닐까 해요.” 끝으로, 의 청취자와 독자를 위한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다. 영화 마니아답게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의 대사를 언급했다.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네가 신에게 이 난국을 헤쳐갈 용기를 달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신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용기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용기? 사랑? 그게 뭔데? 네가 행동을 하면 거기에 용기가 얹어진다. 또 네가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얹어지는 거다.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용기이고 사랑이다.’ 나이 들면 뭔가를 하려다가도 못할 이유와 핑계를 찾거든요. 그럴 땐 그냥 무엇이든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무언가를 했을 때 거기 길이 있고 답이 얹어질 거예요. 자신을 믿고 저질러보세요.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박영주 아나운서 KBS 11기 아나운서로 입사이후, KBS 제3라디오 , , KBS 1TV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현재는 를 진행하며 KBS 편성본부 KBS한국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 2017-08-2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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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기하면 더 큰 낭패 겪는 알츠하이머병
- “알츠하이머병은 노망이 아닙니다.”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신경과 송인욱(宋寅旭·47) 교수의 단언이다. 흔히 알려진 상식과는 다른 이야기다.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알츠하이머병 같은 치매 질환은 곧 노망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다. 치매가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의 병으로 알려진 것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이나 주변인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송 교수는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해도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알츠하이머병이 대표적인 치매 질환으로 꼽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흔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중앙치매센터가 발간한 2016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치매 환자 수는 65만 명에 달한다. 2024년이면 1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예상도 함께 내놨다. 전체 치매 환자 중 4분의 3은 알츠하이머병 환자다. 이 병은 뇌에 발생하는 퇴행성 질환으로, 1907년 독일 정신과 의사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 박사가 처음으로 발견해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기억력 등 사소한 증상으로 시작해 점차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말기에는 망상이나 환각, 공격성, 수면장애 등의 정신행동 증상이 나타난다. 학력이 높으면 발병 가능성 낮다?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뇌 속에 쌓여 뇌 손상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알려진 정도다. 뇌 세포의 골격 유지 역할을 하는 타우 단백질 또한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 의료계에서 주목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유전이다. 전체 알츠하이머병 환자 중 40~50%는 유전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것. 송인욱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발병 위험을 높이는 대표적 유전자로 아포지단백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의 유전자 성질 중 E4형을 가진 사람은 알츠하이머병이 나타날 확률이 3배 이상 커요. 유전자가 E4로만 조합된(E4-E4형) 사람은 알츠하이머병이 6~8배 이상 발생하고요. 또 발생하면 진행 속도도 훨씬 빠릅니다. 그만큼 유전적 요인은 이 병과 관계가 밀접합니다.” 알츠하이머병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학력과의 관련성이다. 조사 결과 고학력자일수록 알츠하이머병 발병률이 낮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송 교수는 “학생 시절 공부를 좀 못했다고 해서, 학교를 오래 다니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아직 확실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에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의학계에서도 처음에는 이 결과를 보고 뇌의 사고나 기억을 위한 노력의 정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공부를 위해 머리를 많이 쓴 결과가 아닐까 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가설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아직 부족한 단계입니다. 최근 좀 더 다각적으로 분석한 결과 학력은 결국 성인이 된 이후의 소득수준과도 관련이 있고, 이는 쾌락을 위한 활동, 즉 여행이나 레저와 같은 다양한 경험이나 활동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일부의 견해도 있어요. 소득이 낮으면 생계를 위한 일과 일상만 반복되기 쉬우니까요. 어르신들에게 사회활동을 멈추지 말고 가급적 평소에도 많은 사람과 만나시라고 조언하는 것도 이러한 부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송 교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우울증 유무 여부도 병에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에 집에 있는 것보다는 가급적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주간보호센터나 노인대학 등에서 치매 환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는데, 이를 활용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낮 동안의 다양한 활동은 수면과도 연관이 되거든요. 낮에 활동이 적으면 밤에 불면이 생기기 쉬운데 불면은 환각 등의 증세를 불러오기도 해요. 낮과 밤이 바뀌는 것이죠. 결국 견디기 힘든 환자 가족들이 수면제 처방을 원하기도 하는데 큰 효과는 없습니다. 밤에 충분히 잘 수 있도록, 낮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 맞다!”가 가능해야 정상 일반적으로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건망증이다.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증상 중 하나가 건망증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횟수가 잦아지면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증상 여부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 송 교수의 설명이다. “보통 치매로 발전하기 전 단계를 경도인지장애라고 하는데, 신경과에서는 경도인지장애의 전 단계가 주관적기억장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건망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주관적기억장애가 발생하는 것은 경도인지장애에 들어서기 직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단순 건망증일 수도 있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어요. 일반적인 건망증과 알츠하이머병과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아 맞다!’예요. 잊어버린 것에 대해 단서를 주었을 때 ‘아 맞다!’를 외치며 기억해낸다면 정상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알츠하이머병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주관적기억장애로 시작하는 알츠하이머병은 언어기능이나 판단력 같은 인지기능 저하로 발전하거나 의처증과 같은 정신이상행동 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점점 정상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진행 속도는 환자마다 다르다. 과거에는 초기에 알츠하이머병을 정확히 진단해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뇌 조직의 변화를 확인해야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환자가 사망한 후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 의학의 발전으로 알츠하이머병이 뇌 속의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관련이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를 통한 진단법이 보급됐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뇌 속 아밀로이드 단백질의 농도를 알기 위해서는 척수에 직접 주사를 꽂아 뇌척수액을 채취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등장한 것이 ‘아밀로이드 PET-CT’다. 아밀로이드 단백질의 농도 측정이 가능한 CT(컴퓨터 단층촬영) 장비를 통해 뇌의 상태를 손쉽게 알 수 있게 됐다. 송인욱 교수는 조기에 진단 가능해진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한다. “이 장비가 임상에서 적용된 지는 3년 정도 됐습니다. PET-CT의 등장으로 알츠하이머병의 진행 여부를 조기 발견하고 그에 맞는 투약이 가능해졌어요. 60~70대 시니어 중 최근 기억력이 떨어졌다고 느껴지는 분은 진단을 받아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진찰 과정도 간단합니다.” PET-CT 검사와 함께 의료진이 환자를 대면해 신경심리검사를 진행하면 알츠하이머병은 비교적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병 생겨도 노망은 막을 수 있어 송 교수는 환자들에게 혹은 이 병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바로 “알츠하이머병은 노망이 아니다”라는 조언이다. “의료진들이 노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치매에서 노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심한 단계는 분명히 존재하죠.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의 알츠하이머병 혹은 치매 질환을 노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계가 달라요.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 질환은 노망의 전 단계라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완치가 불가능한데도 조기 치료가 중요하고, 약물 복용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 병이 발병하고 나서 노망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입니다. 발병했다고 무조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처음에는 다른 질환처럼 좀 불편한 정도입니다. 이 시기를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고 가능한 한 여생 동안 ‘노망’을 겪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알츠하이머병 치료의 목표입니다. 다시 말하면 알츠하이머병이 시작되었어도 얼마든지 평범한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약물 복용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약물의 꾸준한 복용만으로도 환자의 상태가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송 교수의 설명이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가족의 보살핌에 따라 병의 진행 속도에서 많은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 역시 약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제시간에 꼬박꼬박 약을 챙겨준 환자와 그렇지 못한 환자의 차이는 커요. 그래서 초기에 약을 쓸 수 있도록 의사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 2017-08-24 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