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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자의 계단
- 시원한 새벽이다. 소나기 한방에 제일 무더웠던 여름도 막을 내리고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사회은퇴생활 너덧 해가 되었다.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프로필을 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직업기재하기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무직’으로 통용되던 직업란에 몇 년 전부터 ‘은퇴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은퇴자는 현역시절 직업을 바꿨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은퇴자에게도 ‘수습단계’가 필요한 대목이다. ◇‘자기명함’이 필요할 때 서랍 속에 빼곡히 쌓여있던 남의 명함을 정리하고, 남아있는 자기명함까지 다 버리면서 사회은퇴는 시작되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처럼 홀가분하였고 영원히 자유로운 날개를 다는 것 같았다. 남처럼 가족여행을 하거나 친구들과 산을 찾았으면서 한두 해가 꿈같이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사회평생교육과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참여하면서 새 길을 찾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또래 친구들을 사귀면서 매일 즐겁게 생활하였다. 하지만 첫 인사 나눌 때 쉽게 전했던 명함이 없어서 매우 당혹스러웠다. 서로 상대방 연락처를 휴대폰에 두드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자원봉사현장에서 자기소개 기회가 있었다. 중년여성 회원이 “저는 가정주부 000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면서 명함을 건넸다. 가정주부 000, 전화번호와 이메일, 블로그, 아름다운 캐릭터도 새겨졌었다. 이른바 ‘자기 명함’이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별다른 사회활동이 없었지만, 장래 하고 싶은 일을 계획하여 예비명함을 만들었다. 그후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자기 명함’이 많이 생겼다. 자기명함이 필요함을 느낄 때가 진정한 은퇴자가 되는 첫 관문이다. ◇주위에 현혹되지 않을 때 은퇴자는 명함 한 장 남아있지도 않는 과거자랑을 좋아한다. 듣는 사람이 추임새라도 넣어주면 옛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행동이 허망하고 앞으로 삶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알아차린다. 입을 다물고 남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 계단을 오른다. 남의 말에 귀가 얇아진다. 몇 년 전부터 사회평생교육에서도 시니어를 자극한다. 창조경제,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하여 일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경제 불황과 저금리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쉽게 빠져든다.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극복하는 것이 두 번째 관문이다. ◇새로운 것 찾아 사회공헌을 실천할 때 사회평생교육에 참여하여 빛의 속도로 변하는 시대에 맞춰서 새로운 공부를 열심히 한다. 재능기부 자원봉사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에서 받았던 은혜를 후대에 전수하려고 노력한다. ‘100세 장수시대’라고 하지만 건강하게 살면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백 마디 말보다 조그만 실천이 필요한 이유다. 은퇴자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진정한 관문이다.
- 2016-08-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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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스마트폰을 더 자유롭게 쓰는 ‘블루투스’
-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복잡한 선에서 자유롭게 싶다 선 정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TV 근처에 있는 선들이다. TV부터 시작해서 셋톱박스 선, 오디오 선이 얽히고설켜 있다. 선 정리를 하지 않으면 선도 꼬이고 지저분해 보인다. TV뿐만 아니라 우리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자주 보이는 선이 있다. 바로 이어폰이다. 스마트폰을 이어폰으로 연결해서 노래도 듣고, TV도 보고 그러는데 가끔 이어폰 줄이 불편할 때가 있다. 운동을 할 때면 어딘가 넣고 노래를 듣고 싶은데 길게 이어진 이어폰 줄 때문에 걸리적거린다. 그리고 사람 많은 지하철 탈 때 이어폰을 끼고 있으면 이어폰 줄이 지나가던 다른 사람 가방에 걸려서 빠지기도 한다. 이럴 때 생각나는 게 선이 없는 이어폰이다. 아마 주위에서 종종 봤을 것이다. 이어폰을 목에다 걸고 다니는데 스마트폰하고는 연결된 선이 안 보인다. 바로 무선으로 하는 블루투스라고 하는 기능이다. 블루투스 기능만 잘 활용해도 스마트폰을 더 풍성하게 사용할 수 있다. 스피커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공연장이 된다 블루투스라는 단어가 생소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블루투스는 스마트폰에 있는 기능으로 휴대 기기를 서로 연결해 정보를 교환하는 근거리 무선 기술이다. 한마디로 휴대 기기가 근처에 있으면 선이 없어도 소리나 영상이 연결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필요한 웬만한 것들은 다 연결된다. 스마트폰을 전화 통화할 때만 사용할 때는 굳이 블루투스가 없어도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 기능을 확장해서 사용하려면 블루투스 기능이 필수다. 요즘 야외에 나가면 간간이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데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스마트폰으로 직접 듣는 게 아닌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해 놓고 그걸로 듣는다.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크게 들을 수도 있지만 스마트폰 소리를 키우고 노래를 들으면 음질이 떨어진다. 그래서 스마트폰하고 연결하는 조그만 스피커를 갖고 다니는데, 이게 블루투스 스피커다. 작아서 가방 속에 쏙 넣고 다닐 수 있는데 이 스피커가 작다고 무시하시면 안 된다. 요즘 기술력이 좋아져서 작아도 사운드가 웅장하다. 색소폰이나 오카리나를 연주할 때 배경 음악을 틀려고 하면 예전에는 노트북과 앰프를 연결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스피커만 연결하면 웅장한 소리가 나와 많이 사용한다. 스피커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나 공연장이 된다. 선 없이 거의 모든 것을 연결한다 블루투스로 연결하는 장치들을 보면 대부분 이어폰과 스피커다. 조금 더 다양하게 사용하고 싶다면 취미, 관심사에 맞는 장치를 연결해 보기를 바란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분이라면 블로그 글을 쓸 때 컴퓨터에서 쓰기도 하지만 스마트폰에서 글쓰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서는 손가락으로 터치하면서 쓰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게 블루투스 키보드다. 스마트폰과 무선 키보드를 연결해 놓으면 스마트폰에서도 글쓰기가 가능하다. 글을 쓰고 싶을 때 스마트폰을 켜고 키보드를 두드리면 글이 써진다. 또 요즘에는 걸음걸이를 체크해 주거나 이동 거리를 체크하는 용도로 스마트 시계나 스마트 밴드를 손목에 차고 다니곤 한다. 모두 블루투스로 스마트폰하고 연결되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연결이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셀카봉이나 카메라 삼각대에 무선으로 연결시키는 기능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을 때 누군가 찍어 줬으면 하는 상황이 생긴다. 단체 사진을 찍거나 멀리서 찍고 싶을 때 셀카봉이나 카메라 삼각대에 있는 작은 버튼과 블루투스를 연결해 놓고 버튼을 누르면 사진이 찍힌다. 이밖에 블루투스용 펜이 있고 스마트폰용 블루투스 프린터가 있다. 이 모든 기기를 블루투스하고 연결해 놓으면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블루투스를 자주 활용하는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스마트한 삶이 거창한 게 아냐, 이런 게 스마트한 삶이지.” 맞다.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기능을 연결해서 사용하는 것이 더 스마트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루투스로 삶을 스마트하게 연결하자!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스피커 연결하기 1. 블루투스를 연결할 때는 장치의 전원을 켠다. 그런 뒤 스마트폰에 있는 블루투스 기능을 켠다. ● 스마트폰 설정메뉴에서 블루투스를 선택한다. ● 아이폰은 ‘Bluetooth’, 안드로이드폰은 ‘블루투스’라고 되어 있다. 2. 블루투스 기능이 꺼져 있다면 켜짐으로 변경한다. ● 블루투스가 켜져 있어야 연결할 수 있는 장치를 검색할 수 있다. 3. 검색된 장치 중에 연결하고 싶은 장치를 선택한다. ● 한 번이라도 연결되었거나 연결할 수 있는 장치가 검색된다. ● 블루투스 스피커를 연결하고 싶다면 검색된 스피커를 선택한다. 4. 연결 표시가 나오면 성공 ● 연결 표시가 나오면 스피커와 스마트폰이 연결된다. ● 스마트폰에서 음악을 플레이하면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 연결을 해지하고 싶은 경우 연결됨을 한 번 더 누르면 장치와 연결이 끊어진다.
- 2016-08-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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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 2016-08-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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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불편을 참지 말고 해결하자, 스마트폰으로 팩스 보내고 받기
-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팩스가 필요한 상황이 없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필요하다 스마트폰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불편함을 해결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팩시밀리(팩스) 보내기다. 직장을 다닐 때는 팩스가 근처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직장을 나오면 그 흔했던 팩스를 접하기 어렵다. 팩스 한 장 보내려고 근처 문구점에 가서 500원 혹은 1000원을 내야 한다. 평소에 팩스를 쓸 일이 별로 없다가도 1년에 한두 번은 꼭 필요할 때가 있다. 관공서나 보험사에서 관련 서류를 팩스로 보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게 스마트폰으로 팩스를 보낼 수 있는 ‘인터넷 팩스’다. 심지어 스마트폰에서 직접 팩스 내용을 받을 수도 있다. 업무 상 팩스를 자주 쓰는 사람도 외부에 있다가 급하게 팩스를 보낼 일이 생기면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는데 스마트폰용 팩스는 언제 어디서나 팩스 받기와 보내기가 가능하다. 편하기도 하지만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 팩스를 쉽게 보낼 수 있다는 편리함도 있지만, 내가 직접 보낼 수 있다는 든든함도 있다. 어떤 분이 퇴직을 하셨는데 회사를 안 나가니 평상시에 자유롭게 사용했던 팩스가 아쉽기 시작했다고 한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 아쉬움이 생긴 것이다. 팩스를 급하게 보내야 될 상황이 생기면 문구점에 가는 건 귀찮고 해서 옛 직장에 남아 있는 동료에게 부탁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팩스 보낼 문서를 메일로 보내고 직장 동료가 문서를 받아서 팩스로 대신 보내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몇 번을 부탁했더니 옛 직장 동료에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눈치도 보여서 다시는 부탁을 안했다고 한다. 팩스라는 게 별거 아니지만 그게 뭐라고 없으면 옹졸한 마음이 생긴다. 반대로 없다가 있으면 신기하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퇴직 후 1인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분께 인터넷 팩스를 알려 드렸더니 딱 필요했던 기능이었다고 했다. 이제 작게 시작하는 1인 기업이라서 사무실도 없고 휴대폰 하나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거래처에서 팩스 번호를 물어보면 난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팩스는 팩스 번호도 받을 수 있어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스마트폰에 팩스 기계 하나 들여 놓자 “맞아! 팩스 나도 필요했어”라고 하시는 분은 스마트폰에서 바로 이용해보자. 스마트폰 어플을 설치하는 곳에서 ‘인터넷 팩스’라고 검색하면 여러 서비스들이 검색된다. 무료도 있긴 하지만 여러 건을 보내려면 유료로 결제를 해야 한다. 돈을 결제하는 것도 번거롭고 시험 삼아 한번 이용해 보고 싶은 분이라면 ‘모바일팩스’라는 서비스를 추천한다.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서만 사용 가능하지만 가볍게 쓰기에는 강력한 도구다. 모바일 팩스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팩스를 보내면 돈을 충전해서 사용하지 않고 내 문자에서 차감된다. 일반적으로 파일 한 장을 전송하면 2건의 문자를 사용한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따로 결제를 하지 않아 편하다. 두 번째 특징은 팩스 번호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내가 팩스를 받으려면 팩스 번호가 있어야 하는데 이 서비스에 가입하면 팩스 번호 하나를 부여해 준다. 이 번호를 저장해 두거나 명함에 넣고 다니며 상대방에게 알려주면 팩스를 받을 수 있다. 팩스가 오면 스마트폰에서 알람이 울린다. 비용 부담도 없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개인 사업을 하거나 어쩌다 팩스 보낼 일이 생긴 분이라면 지금 당장 사용해 보시길 바란다.
- 2016-08-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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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함에 대한 나의 소고(小考)
- 길바닥에 나 뒹구는 주인 없는 명함을 주어서 찢은 후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에는 순간이나마 서로의 성실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필요 없다고 분신과 같은 남의 명함을 길바닥에 던져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하면 남도 내 명함을 짓밟게 될지도 모릅니다. 길바닥에 명함이 던져 졌다는 것을 명함 주인이 모르니까 모르면 약이라고 그나마 다행입니다. 명함을 주고받는 면전에서 명함 예절이 너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수모를 당한 것 같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와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이런 인사 예절이 학교 수업에도 없고 부모로부터 배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명함에 대한 나의 예절을 말하고자 합니다. 명함을 주고받을 때는 일어서서 걷 옷을 입고 단추를 채우고 단정한 자세에서 주고받아야 합니다. 명함 집에서 깨끗한 명함을 건네는 것이 예의입니다. 구겨진 명함이나 손때가 잔뜩 묻어 더러운 것을 건네는 것은 실례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명함을 공손히 드려야 합니다. 같은 직급이라면 동시에 주고받습니다. 명함을 건넬 때 명함 끝을 잡고 상대가 읽기 쉽도록 드립니다. 내가 명함이 없을 때는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명함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밝혀야 합니다. 남의 명함을 받고 자기 것은 주지 않으면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명함이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백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서 주면서 상황 설명을 하는 것도 센스입니다. 명함을 받았으면 가볍게 확인을 해야 신뢰감을 줍니다. ‘아! 기술과장님이시군요’ 또는 ‘사무실이 방배동에 있군요.’ 라고 하면 나에게 관심을 표현해주어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또 이를 빌미로 대화를 풀어갈 실마리도 됩니다. 일본에서는 같은 한자도 발음이 다른 경우가 있어서 한자 이름의 발음을 물어봐도 실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름의 한자를 몰라서 물어보기는 좀 쑥스럽지만 모르는 한자가 있으면 물어봐야 합니다. 지레 짐작으로 그 글자일 거야 하고 틀린 이름을 계속 부르면 더 망신입니다. 내 이름자의 한자가 어려운 자가 있다는 것은 본인이 더 잘 압니다. 상대가 멈칫하는 표정을 지으면 ‘무슨 자 인데 잘 안 쓰는 글자입니다.’ 라고 말해주면 배려 깊은 사람으로 점수를 따고 들어가고 이름을 잘못 부르는 어색함도 예방됩니다. 명함을 받자마자 주머니에 그냥 넣어버리거나 책상 한 구석에 제쳐 놓는 것도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동입니다. 대화 중에는 테이블 위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대화를 이어나가고 일어설 때 곱게 챙겨야 합니다. 내 명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말은 안 해도 상대방은 관심을 갖고 곁눈질로 지켜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명함을 잡고 대화에 열중한 나머지 명함을 구부리기도 하고 책상을 명함으로 탁탁 치는 사람도 봤습니다. 아주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상대가 아랫사람이거나 약자인 경우 어쩔 수 없이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속에서는 울화가 부글부글 끊고 있습니다. 직장이 없는 시니어들이 과거 경력을 화려하게 백화점식으로 나열하기도 하는데 오히려 슬퍼 보입니다. 막연한 ‘삶길 전문가’ ‘행복전도사’ 라는 추상적이 직명도 추천할 일이 아닙니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넣은 간결한 명함이 후한 점수를 받습니다. 아니면 ‘사회복지사를 꿈꾸고 있습니다.’ ‘곧 귀촌 예정입니다.’와 같은 미래 희망을 담는 것은 좋습니다. 혹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명함 예절이 인간관계의 처음을 열어갑니다. 명함을 볼 때마다 명함 주인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다시 상기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2016-08-0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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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연결시대, 프라이버시의 미래
- 아주 어렵게 던지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소금과 빛이 된다면 더 없는 기쁨이다. 생각의 차이로 표현하는 가벼운 노크도 상대를 배려한 어쩌면 깊은 예의이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SNS의 시대, 잠시 머물러 여유로운 삶의 한 면목을 공유하고 싶다. 바야흐로 남녀노소 누구나 몸에 품고 있는 핸드폰 시대다. 모든 것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초스피드로 돌아가고 손과 손에서 황금알을 쏟아내는 거위의 꿈은 불과 얼마 전에 시작되었다. IT 강국으로 급속하게 발전한 한국은 이제 엄연한 선진국의 대열에 우뚝 서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조그마한 사각형 전화기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 잠을 잘 때도 사각형의 위력은 건강을 위협하며 머리맡에 자리하고, 옆에 없으면 마치 전쟁이라도 날것처럼 안절부절못한다. 사람들은 정서적 마음보다 괴상한 문자를 남발하며, 손가락의 움직임은 밤낮으로 의미 없이 활개를 친다. 바빠서 죽겠다는 사람들이 피아노를 치듯 더 신나게 때려댄다. 눈과 손가락도 과로가 넘칠 텐데, 너무 힘들어 고립된 정서가 마치 한풀이를 하는 것만 같다. 손가락 하나로 다 연결되는 세상, 이제는 모두가 미디어 시대이고, 문명이 가져다준 또 하나의 병폐이다. 필자가 속해있는 한 모임의 이름, 브라보 동년 기자단이 있다. 이 모임만 해도 전화기 하나 안에 밴드와 카 톡 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카 톡만 해도 동년 기자단 운영위원회 방, 동년 기자단 제1기 방, 각 분야 별 방, 개개인의 따로 방, 최근에 가입된 연극모임 방, 등등이다. 도대체 불과 한 단체의 카 톡 방안에 또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되어 정신이 없다. 그렇다면 있는 것도 털어버려야 하는 이 시대에, 과연 무엇 때문에 그것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의 의견은 개인 카 톡 방을 조용히 이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가끔씩은 공동의 공지사항 방이 쓸데없는 개인의 감정 공간으로 도배되어 활용이 된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굉장한 피로와 소음이다. 더구나 쓸데없는 동참으로 의미 없는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카톡 카톡 소리는 시끄러워 머리가 아프고 혼란스럽다.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면 역시나 개인의 자랑이나 쓸데없는 잡담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값없는 수다가 오히려 기자라는 가치를 떨어트린다. 본인이 눌러대는 가벼운 손놀림이 상대방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마구 누르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보며 자신을 감추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를 조심스러운 한마디로 살며시 기대해본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도 다른 사람들 기분을 생각하기에 미안하고 겁이 나기도 한다. 물론 귀찮고 보기 싫으면 떠나면 되고, 진동으로 바꿔놓으면 아무 상관은 없다. 지금은 개인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주장하는 개인 프라이버시의 시대다. 젊은이들은 특히 더한 것 같다. 기자단 시니어 님들만이라도 자신의 과시나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본인의 할 말을 다하기 전에, 한발 물러서서 공과 사를 구분하는 변별력도 성숙한 아름다운 행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래의 시대는 어쩌면 개인만큼이나 상대방의 프라이버시도 더욱 중요하게 존중되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년 기자단이란 과거시험을 통과한 인격체 사람들처럼 일컬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자단의 명함에 어울리는 멋진 자세, 성숙하는 노년의 아름다움이 함께 하기를 정성 들여 기원해본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모든 관계를 맺기 위한 초 연결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한다. 전달을 위한 전문 별 중요 공지사항도 초 스피드로 이루어져야 하며, 미래에는 더욱 간결하고 간편해질 것이다. 공유하는 자숙이 바쁜 이 시대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지 않을까 싶어 아주 겸손하게 노크해 본다.
- 2016-07-1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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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거 땜에 친구와 의 상한다] 동창과 친구사이에서
- 필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등학교 졸업반 반창회 대표를 맡아왔다. 그동안 졸업 10주년, 20주년, 30주년, 35주년 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 때마다 반 친구들에게서 회비를 걷고 행사 안내 확인 전화를 수차례씩 돌렸다. 그뿐 아니다. 매년 봄에 한 차례 반모임을 가졌고 연말에는 송년회를 했다. 그때마다 날짜와 장소를 잡고 회비를 거두었다. 정기 모임 외에 경조사가 생기면 동기들에게 연락하고 경조사에 쫓아다녔다. 동기회장을 하는 친구 중에는 명예욕에 사로잡힌 인사들이 있다. 더러는 몇 회 동기회장이라고 명함에 넣고 선·후배 찾아다니면서 사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동기회장은 회비 조금 더 내는 거밖에 없다. 할 일도 없다. 총무나 반창회 대표들이 고생 다 해서 만들어 놓은 행사에 폼 잡고 나타나서 마이크만 잡으면 된다. 다만 참석해야 할 경조사가 좀 많다는 것이 동기회장이라는 자리가 갖는 유일한 불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동기회의 모든 행사와 모임은 반창회 대표의 역할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역할 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회비를 걷는 일이다. 회비는 자발적으로 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 빚쟁이처럼 수차례 전화하고 사정해야 받아낼 수 있다. 행사 참석 인원 파악도 힘들다. 오랜 세월 동안의 행사 경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전화로 파악한 행사 참석 예상 인원 중 실제 참석하는 인원은 70% 정도라는 것이다. 그나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행사 전에라도 연락하는 친구는 용서가 된다. 철석같이 참석을 약속해 놓고 연락도 없이 참석하지 않는 동기들에게서 상처를 듬뿍 받는다. 그러나 반창회 대표는 이런 섭섭함을 내색해서는 안 된다. 다음 번 행사가 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사 연락을 하면서 매번 심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 되면 참석할게”라는 밑도 끝도 없는 답변을 들을 때이다. 이런 무성의한 답변을 삼십 년 넘게 반복하면서 한 번도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동기들이 있다. 최근에 그들 중에 여럿이 동기회에 나타난다. 다들 은퇴해서 심심하다고 했다. 이제 시간이 남아도니까 나타나서 설쳐대는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증오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 감정을 참을 수 없어 이제 반창회 대표를 그만하겠다고 했더니 다들 종신 대표를 하라고 한다. 대답도 하기 싫어 침묵을 지켰다. 곁에서 필자 고생하는 거 오랜 세월 봐 왔던 동기 하나가 이제부터 자기가 짐을 맡겠다고 나섰다. 반창회 대표를 그만둔 지 2년 동안 필자는 모든 고등학교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신상에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해서 전화하거나 찾아오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시간 되면 참석하겠다”던 동창 중에 필자에게 전화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동안 동기동창과 친구의 구별 없이 살았다. 억울하지는 않지만 이제 잠시 멈추어 인간관계를 차분히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 2016-07-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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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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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휴의 Smart Aging] 경험을 디지털로 연결하면 나눔이 된다-디지털 자원봉사
- 글 유장휴 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 전략명함 코디네이터 디지털 자원봉사란? 주변을 보면 자원봉사 활동을 열심히 하는 분이 많다. 가까운 지인들만 봐도 복지관, 양로원 혹은 자원봉사 센터에 가서 일손을 돕는다. 자원봉사를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두 번 나가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좋은 뜻에서 시작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내가 원하는 활동이 아니라서라는 등 이런저런 핑계거리가 생기고 결국 그만두게 된다. 자원봉사는 거창하게 시작하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작지만 가볍게 그리고 재능과 어울리는 자원봉사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자원봉사를 생각해 보자. 디지털 자원봉사는 해외에서 프로보노라는 전문가 봉사활동에서 나온 개념이다.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는 정년을 앞둔 사람에게는 일정 기간 준비시간을 준다. 그리고 기업생활의 경험이나 전문적인 능력을 비영리단체가 처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토록 한다. 직접 찾아가서 돕는 게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처럼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궁금한 점을 알려주거나 컴퓨터를 원격으로 제어하고 어려운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디지털의 힘을 빌리면, 무쇠팔? “디지털 자원봉사를 하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디지털과 사람을 연결하면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여행을 오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여행 중 다쳤거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언어가 안 통하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럴 때는 주위에 언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방법도 있지만 스마트폰으로 번역 봉사를 하는 사람과 연결해주는 방법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bbb코리아라는 NGO단체가 있다. 통역을 도와주는데 특이하게 휴대폰으로 통역을 도와준다. 길에서 만난 외국인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bbb통역이란 어플로 해당 언어를 선택하면 통역을 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와 연결이 된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총 19가지 언어가 있어서 외국인이 도움을 요청하면 당황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다. 비록 나에게는 없는 통역 능력이지만 연결해 주는 것만으로도 도울 수 있다는 게 디지털의 힘이다. 필요할 때 요청하는 봉사활동 bbb코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우리와 같은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부나 일을 하는 중에 스마트폰으로 도움 요청이 울리면 일을 잠시 그만두고 통역을 도와주는 방식이다. 이렇듯 봉사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가도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짬을 내서 도와준다. 이와 비슷한 봉사가 있다. 시각장애인을 도와주는 활동이다. 시각장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많지만 그중에서 유독 불편한 상황이 있다고 한다. 우유를 사왔는데 유통기한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거나, 약을 먹으려 하는데 약 봉투에 쓰여진 글자를 보고 싶을 때 난감하다고 한다.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be my eyes’라는 어플이다. 시각장애인이 스마트폰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가장 빨리 받을 수 있는 봉사자에게 연결되고 봉사자는 시각장애인과 연결된 스마트폰 화면을 동시에 보면서 말로 설명해 준다. 떨어진 물건을 찾아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외출할 때 색깔 옷을 골라주기도 한다고 한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입소문으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시간을 내어서 하는 봉사가 아닌 짧지만 요청이 있을 때 도와주는 디지털 방식의 봉사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짧지만 누군가를 도와준 강력한 경험이 다른 봉사활동으로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나눔의 경험을 만들어 보자.
- 2016-06-29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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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⓶
- 이윤택은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6년 6개월을 일했다. 등단 시인에 평론도 쓰며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는 굳이 연극을 하겠다며 1986년 사표를 냈다. “앞으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들을 예측해봤을 때 인간은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대중 속에서 고립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고 말이죠. 특히 80년 대 중반부터 언론의 분위기가 삼당통합을 위해 여야가 야합을 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어요. 여야가 없고 신념 체계도 없고,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고 이런 혼탁한 시대에 기자라든지 문필가 이런 것이 위선적이고 힘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 바에는 유랑광대 극단을 만들겠다 해서 이름도 ‘연희단거리패’라고 지은 것입니다. 연희단패거리, ‘패거리가 있어야 되겠구나!’ 하고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연희단거리패? 이제 패거리도 나쁘지 않다! 그의 입에서 쉽게 ‘패거리’라는 말이 나왔다. 이제까지 그는 연희단이 ‘패거리’로 불리는 것을 불편해 했다 “패거리가 좋지. 원래는 ‘거리패’인데 사람들이 (좀 비꼬면서) ‘패거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한 때는 그게 싫었어요. 패거리라 그러면 집단적인 위기에서 뭉치고 그러는 것인데 지금은 역설적으로 패거리 의식이 너무 없는 것이 문제잖아요. 패거리를 이루고 있다는 게 힘이 됩니다. 공동체도 힘이 있는 것이죠. 세상으로부터 독립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앞으로 패거리 의식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웃음).” 차갑고 비정한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세상 3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윤택이지만 그도 벌써 64세. 일반 직장인이었다면 은퇴를 하고도 남을 나이다. 스스로도 현역 연극인으로서 나이가 많다고 얘기한다. 주위 사람들도 대부분 은퇴해서 활동을 안 한다고. “지금 내 주위 친구들은 거의 다 명함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요. 명함이라는 것은 소속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명함이 없는 인생은 대단히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 반대였습니다. 한 대학교수는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모교에 기증한다고 했는데 학교에 보관할 곳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거부했습니다. 그 학교 1기 출신인데도 말입니다. 지금 세상은 대단히 차갑고 비정하고 어른을 존경하지 않는 세상, 공경하지 않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런 세상에 현역이고 은퇴가 없어 살아있는 동안은 연극 연출가로 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윤택 자신의 선택이 결국을 옳았다고 말았다. 자신이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고 내 스스로가 패거리를 만들었다는 게 괜찮은 선택이었다 말한다.
- 2016-06-29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