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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여행 갈 때 뭐 입고 가지?
- 얼마 전 한 여행사에서 유럽 단체 여행객에게 ‘등산복은 피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보고 여행사가 왜 여행자의 복장까지 제한하는지 의아 했다. 관광객 개인적 취향까지 여행사에서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관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자의 대상이 대충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유럽관광객이라고 하니 연대감에 살짝 발끈하기까지 했다. 여행 갈 때 편리성, 간편성 등 기능적 면에서 등산복만 한 옷이 있을까? 특히 금방 비가 왔다 그쳤다 를 반복하는 유럽의 변덕스런 날씨에 방수, 방풍, 투습 기능이 있는 고어텍스 등산 재킷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적절한 여행 차림새 일지도 모른다고 격하게 자기변호를 했었다. 새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져서 기사의 달린 댓글을 모두 읽어 보았다. 댓글을 단 대부분의 사람이 젊은이들로 어머니 아버지 제발 등산복 좀 입지 말아요, 성당이나 왕궁 등이 산이냐 왜 등산복을 입는가? 예의가 아니다. 우리나라 아줌마 아저씨들 만나면 너무 창피하다고 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생각을 엿보며 씁쓸하면서 5년 전에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카이로를 제외한 도시는 나일 강을 따라 크루즈를 한 적이 있다. 초호화 크루즈가 아니라 도시 간 이동수단 정도의 소박한 크루즈였다. 이용자 중 동양인은 필자와 친구 그리고 서너 명의 일본인 뿐 이고 대부분이 유럽의 시니어 들이었다. 낮 시간에는 볼륨 감 넘치는 유럽의 시니어 들은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즐기곤 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두 리셉션 장에 모였을 때 예상치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유럽 시니어 들은 모두 화려한 성장으로 갈아입고 내려온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짧은 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냥 한 끼 식사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우아하게 차려입고 만찬을 즐겼다. 구두 색깔 까지 완벽하게 맞춰 입고 온 유럽 시니어 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해외여행 갈 때 등산복이 좋으면 등산복 입자. 현지인이 비웃으면 비웃으라. 해라. 그리고 당당하게 말하라. ‘우리나라에서 등산복은 등산할 때만 입지 않고 평상복 여행복으로 다 입는다’ 라고. 다행히 요즘은 등산복이 기능성은 살리고 디자인도 멋진 일상복과 등산복의 경계가 모호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아웃도어 브랜드 들이 등산복을 좀 변형한 여행복도 많이 내놓고 있다. 그러니 여행갈 때 편한 등산복이 좋으면 당당하게 취향대로 입고 가자.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예쁜 원피스나, 멋진 나비넥타이에 정장 재킷 정도는 한 벌씩 만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낮에 관광할 때는 편하게 등산복 입고 저녁에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때, 미술관이나 성당 갈 때 한번 정도는 멋지게 차려 입고 간다면 더 근사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이나 현지인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나의 멋진 여행을 위해서 T. P. 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여행복을 준비하여 적절하게 즐길 수 있다면 여행의 추억에 더 근사하게 남을 것이다.
- 2016-09-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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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학교 전학] (13) 놀라운 준비와 점검
- 별 거 아닌 행사도 손바닥만 한 연락장이 꼭 학교로부터 왔다. 그러니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얼마나 큰 행사인가. 그런데 그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을 생각했던 게 있다. 준비물에 간식비가 3학년 아이인 작은 애는 100엔이었고 큰 애는 150엔이었다. 그 돈으로 무슨 간식을 사라는 건지 이해가 절대 안 되었지만 고민은 혼자의 것으로 생각하며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속으로만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종이 맨 아래에 조금 큰 글씨로 소풍 가기 전 날 이 모든 것을 준비해서 등교할 것이라고 써져 있었다. 괄호 안에 ‘도시락과 간식과 물은 안 가져 와도 됨’이라고도 정확하게 써져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두 아이의 준비물을 차근차근 각자의 가방에 준비해서 넣었다. 준비물은 우비나 우산 중 한 가지, 쓰레기봉투 한 장, 갈아입을 수 있는 옷, 도시락 먹을 때 깔고 앉을 깔개 준비, 휴지, 모자, 본인이 먹는 약이나 특별한 것 챙겨올 것, 손수건, 간식, 도시락, 물, 메모장과 연필이었다. 전날 학교에 가자마자 가지고 간 것들을 모두 책상 위에 꺼내 놓고 선생님이 ‘우산이나 우비~’ 하면 반원 전체가 그 물건을 들어 올리면서 ‘우산이나 우비!’ 하고 가방에 넣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빠진 물건이 있으면 메모장에 내일 반드시 준비할 물건으로 적게 했단다. 제일 처음에 들어 올린 물건이 가방 맨 밑에 자리 잡았단다. 가장 먼저 사용하는 물건을 맨 위에 넣도록 순서도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말에 나는 놀라워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도시락과 물과 메모장이 가장 가방 맨 위에 싸지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하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교육 시키는 그들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왜 준비성이 철저한지 알 거 같았다. 가방 밖에 보조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물과 메모장은 그리고 간식은 그 속에 넣도록 허용한다고 했단다. 절대 돈은 가져 오지 말도록 강조했다고 했다. 그런데 간식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두 녀석이 학교 갔다가 오더니 간식 비를 달라고 했다. 몇 분 뒤에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신이 난 아이들이 벙글거리고 있었다. 자기들이 간식을 사러 간단다. 얼마쯤 있다가 아이들이 각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들을 골라서 산 꾸러미를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서로 견줘가면서 완전 신이 나 있었다. 소풍 가는 날을 즐겁고 흥이 나도록 본인 각자가 가장 먹고 싶은 것들을 사러가는 기회를 주는 부모들과 학교방침이 한 마음이 되어 있음에 나는 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풍 가는 날을 위해 울긋불긋한 색소는 넣었지만 건강상으로 괜찮은 불량식품이 아닌 먹거리를 만들어서 파는 가게가 따로 있단다. 거기 가서 자기 취향에 맞는 즉 자기 입맛에 맞는 것들을 100~150엔이면 충분이 골라서 갖가지를 살 수가 있단다. 늘 엄마가 사 주던 것이 아닌 자유롭게 맘대로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모양이나 색에 현혹되지 않고 잘 고르는 법이나 경험상으로 먹을 것을 고르는 자기만의 노하우 같은 것들을 직접 체험 하면서 본인이 배운다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착상인가!? 엄마가 사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로 우선 신나지고 엄마도 먹어보지 못한 것을 맛까지는 모르고 산다는 걸 저절로 알아져서 엄마가 사 오는 것에 대한 불만도 해소시킨다는 일거양득의 얘기들을 엄마들이 해줬다. 정말 배울 게 너무 많은 거 같아지면서 은근 약도 올랐다.
- 2016-09-1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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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앱]잠 못 드는 밤‘양 100마리’ 대신 ‘백색소음’
- 빗소리, 시냇물 소리,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풀벌레 소리 등은 일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백색소음이다. 백색소음은 계속 나더라도 의식하면서 듣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리에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소리를 듣다 보면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숙면에도 효과적이다. 다양한 백색소음을 취향대로 골라 들을 수 있는 앱 ‘하얀소리’를 소개한다. SNS 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1. 내 마음대로 섞어 듣는 100여 가지 백색소음 ‘하얀소리’ 앱에는 100여 가지 백색소음이 있어 불면증에 시달리거나 심리적 안정이 필요할 때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빗소리, 귀뚜라미 소리, 시계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등 익숙하면서도 잔잔한 소리들을 각각 듣는 것은 물론, 원하는 소리 몇 가지를 섞어서 재생할 수도 있다. 2.앱으로 떠나는 전 세계 소리 여행 앱에 담긴 모든 소리는 전 세계 곳곳에서 직접 녹음한 것으로, 소리 파일명을 보면 ‘비엔나 카페’, ‘부산공항’, ‘중국 귀뚜라미’, ‘모스크바의 거리’, ‘방콕의 아침’ 등 실제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마음에 드는 소리는 ‘즐겨찾기’ 버튼을 눌러 저장하면 편리하다. 3.편안하고 편리하게 효과적으로 복잡한 메뉴나 기능이 없어 사용하기 쉽고, ‘타이머’ 기능을 이용하면 잠이 들어도 앱을 종료할 수 있다. 최소 1분부터 최대 9시간까지 설정이 가능하다. 잠들 때뿐만 아니라, 명상을 하거나 주변이 시끄러운 곳에서 책을 읽을 때도 효과적이다. 4.내 귀에 듣기 좋은 나만의 소리 찾기 자연 소음 외에도 재미있는 소리들이 있어 한두 가지를 섞어 듣는 것도 괜찮다. ‘게으른 김하나 대리님’, ‘계란 프라이’, ‘엿가위’ 등 흥미로운 제목의 소리들도 잔잔하고 튀지 않기 때문에 자연음과도 잘 어울린다. 사람마다 듣기 좋은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소리들을 넣고 빼며 취향에 맞게 조절한다.
- 2016-09-0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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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을 부탁해 PART6] 잠이 부족한 시대 “낮잠 주무시고 가세요!”
- 낮잠. 어린이집에 간 손자, 손녀만 청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낮잠 자는 시대다.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잠시라도 편히 쉴 곳, 잘 곳을 찾아 나서고 있는 세상. 노곤하고 피곤한 삶을 보듬고 치유하고자 낮 시간 잠시라도 누울 자리를 찾고 또 내어주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낮잠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글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수면시간은 적고 스트레스는 높고 “낮잠을 팝니다.” ‘낮잠 카페’ 혹은 ‘힐링카페’가 도시 곳곳에서 성업 중이다. 체인점화된 업체에서부터 크고 작은 사업장까지, ‘잠’, ‘피로’, ‘힐링’이 산업의 아이콘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일. 책상에 누워 잠깐 쉬면 될 것이 사업이 됐다. 낮잠 카페 등 소위 ‘힐링 사업’이 늘어난 것은 한국인의 잠 부족과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관계가 깊다고 말한다. 2014년 OECD 18개국의 평균 수면시간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7시간 49분으로 꼴찌. 1위 프랑스와 1시간 차이가 났다.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2016 통계로 보는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모습’에서 한국 노동자의 은퇴 시기는 2014년 기준 남성 72.9세, 여성 70.6세다. OECD 국가의 평균 노동자 은퇴 나이가 남성 64.6세, 여성 63.2세인 것에 비해 7~8년은 더 오래 일하는 셈. 이렇게 잠 덜자고 일은 많이 하니 자연스레 낮잠, 피로 회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OECD의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인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은 연간 2113시간으로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이OECD 34개 회원국 평균 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많았다. 낮잠 이색 공간 ‘여의도 CGV 씨에스타’ 현재는 여의도CGV에서만 운영하는데 이용객 추이를 살펴 점차 다른 지점으로 늘려나갈 계획이다. 낮잠 장소로 이용되는 곳은 바로 프리미엄관. 대체로 직장인의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오전 11시30분부터 1시까지 운영한다. 잠들기 좋은 어두운 조명에 아로마 향과 뉴에이지풍 음악을 방안 가득 채운다. 좌석마다 촛불형태의 수면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안한 숙면을 위한 허브티에 담요 등을 놓아 정말 낮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특히 CGV 프리미엄관 중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이기에 그 어떤 관보다 안락한 좌석에서 편안한 낮잠을 즐길 수 있다. 왼쪽 팔걸이 안쪽의 버튼을 누르면 의자가 쫙 펴지면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다. 좌석은 좌우로 남성, 여성석, 중간 좌석은 커플석으로 배치했다. 이용자 양옆으로는 티켓을 판매하지 않아 보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힐링 카페처럼 안마의자는 아니지만 부드럽고 안락한 의자에서 최대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씨에스타에는 이용객을 살피는 ‘미소지기’가 상주해 잠을 깨워주는 등 필요한 것들을 제공한다. 여의도 유일한 낮잠 공간을 꼭 한 번 이용해 보시길. 이용 요금 1만원(음료, 담요, 안대, 실내화 등 제공) 낮잠 카페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낮잠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힐링 카페 두 곳을 찾아갔다. 고른 연령대가 이용한다는 체인형 힐링 카페인 ‘미스터힐링’과 ‘퍼스트클래스’ 명동점을 찾았다. 두 곳 모두 기본은 전신 마사지기를 이용한 서비스로 개인 부스와 커플 부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덧신과 손 세정제를 제공하는 것과 서비스 후 음료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점이다. 하지만 엄연히 다른 콘셉트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취향에 맞게 골라 이용해야 한다. 미스터힐링 (명동 인터내셔널점)의 장점은 음료를 마시는 공간(1,2층)과 휴식 공간(지하1층)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전신 마사지기 위에서 쉬는 동안 외부 소음이 적어 쉽게 숙면할 수 있었다. 실내 전체에서 느껴지는 아로마 향과 낮은 조명, 음악, 부스마다 설치된 그림들이 휴식에 도움을 준다.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심신의 안정에 중점을 두어 구성한 것이 이용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이다. 이용 요금은 30분 코스 9000원(20회/15만원)이고 50분 코스는 1만3000원(10회이용권/9만원)이다. ‘퍼스트클래스’ 는 공항을 연상하게 하는 인테리어 때문일까? 여행가방 하나쯤 들고 티켓 부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피로를 푸는 방 또한 항공기 1등석처럼 꾸며 놓아 재미를 더했다. 퍼스트클래스는 음료 카페와 마사지 부스가 같은 층에 있다. 대신 마사지를 하면서 눈 안마기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조도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퍼스트클래스 마사지 코스는 총 6개로 활력, 쾌적, 수면, 목과 어깨, 허리와 엉덩이, 공기 마사지로 구성돼 이 중 원하는 두 종류를 고르면 된다. 객실마다 개별 이어폰과 스마트폰이 있다는 점도 편리하다. 이용 요금은 7000원에서 1만 3000원가지 다양하며 소셜커머스에서 더욱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서울혁신파크의 '공간 휴' ‘공간 휴’를 말하기에 앞서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듯싶다. 서울혁신파크가 있는 곳은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 옛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자리다. 오래전부터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유명했던 곳.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공원 중심에 있는 미래청 건물 안에 바로 ‘공간 휴’가 있다. 창문 카페와 서고 사이, 천장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쉬는 곳이 바로 ‘공간 휴’다. 공원에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좀 자고 싶으면 누구든지 누워 잘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베개와 이불도 준비돼 있다. 전기보일러가 설치돼 겨울에는 따뜻하게 이용할 수 있다. 조명이 있어 뒹굴면서 만화책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엄연히 잠을 자고 쉬기 위한 곳. 10분이고 1시간이고 잘 수 있다. 시민들에게 열린 공간이기에 이용료가 없는 대신 자기가 쓴 물건만 잘 정리하면 된다. 멋지고 화려한 것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쉼’이라는 단어가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 2016-09-0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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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온가족과 유럽 미술관을 순례한 미술평론가 이주헌
- 20여 년 전, 미술평론가 이주헌(李周憲·55)은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 미술관을 순례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은 그동안 14만 부가 넘게 팔리며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았고, 이를 발판으로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만, 당시 기저귀조차 떼지 못한 한 살, 세 살배기 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났던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93년 언론사 기자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던 무렵, 그는 미술평론가로서 대중에게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관련 학위를 더 쌓아 대학교수가 되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는 ‘책’이 그 자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평론가로서 활동하려면 기반이 되고 신뢰하게 할 만한 계기가 필요했죠. 때마침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는데, 국내에는 서양 미술관을 소개한 책이 단 한권도 없더라고요. 그 전에 일본 서점에 갔더니 그런 책이 10~20권 정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대중에게도 그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해외에 가면 유명한 미술관을 안 들를 수 없는데, 그러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알고 가는 것이 좋거든요. 그런 면에서 해외 미술관 관련 책을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혼자 가거나 미술 관련 전문가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온 가족이 함께, 그것도 한 살, 세 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를 데리고 생고생(?)을 자처한 이유가 궁금했다. “여행 가는 사람들을 위해 미술관에 대한 책을 쓰더라도 막상 독자가 미술을 어렵고 낯설게 느낀다면 책에 손이 덜 가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 비할 수 없이 낮았죠. 무엇보다 미술을 쉽게 접하도록 해야 했고, 그러려면 책을 부드럽게 꾸며야 했어요. 젊은 아빠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가면 당연히 좌충우돌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누구나 예상하고 재미를 느낄 만한 에피소드들을 넣어 준다면 쉽게 책을 다 읽어낼 수 있고, 다 읽고 나면 미술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 같았죠. 물론, 바삐 살며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을 만회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요.” ‘미술’, 공부하지 말고, 친구처럼 다가가라 그가 일종의 모험을 감수하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대중이 미술에 친근하게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그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첫째, 미술을 알려고 하지 말고 먼저 느끼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느낌이에요. 대부분이 오해하는 게, 예술적 지식이 없으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고 공부부터 시작하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아는 만큼 꼭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이들이 어른보다 지식이 모자란다고 해서 덜 느끼는 것은 아니잖아요. 길가에 핀 꽃을 보고도 어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 꽃을 보고 강렬한 느낌을 받아 꼼짝을 못할 수 있어요. 아주 좋아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는데 그게 바로 감상이거든요. 감상이란, 느낌을 얻는 거예요. 내가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지각해서 내 마음에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는 경험을 하는 거죠.” 그는 미술 감상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 행위가 아닌 느낌을 얻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지식을 넓히려면 지금 당장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책에 밑줄 긋고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이라는 것. “어떤 사람을 아는 것과 친구가 되는 것이 다르듯, 미술을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그는 줄곧 미술을 ‘친구’에 비유했다. 미술을 친구 사귀듯 하라는 것이 그의 두 번째 조언이다.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미술 작품도 다 알 필요 없어요.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이라도 내가 끌리지 않으면 사귀지 않잖아요.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처럼 유명하다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먼저 내가 어떤 그림에 끌리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죠. 풍경화든, 추상화든, 인물화든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그 위주로 즐기고 보면 돼요. 그러면서 내가 공부를 안 해도 점점 아는 것들이 생겨요. 그러다 관련된 글을 읽거나 책을 보면 확 이해되고 더 깊이 알게 되죠. 유사한 작가나 작품도 찾게 되고요. 깊어지면 넓어지는 건 순간이거든요. 미술은 그렇게 다가가고 공부하는 거예요.” 그는 책을 보고 하는 미술 공부는 관념의 연장선이지만, 그림을 느끼고 감상하는 것은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중·장년에게 미술 감상은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좋아하는 작품을 발견하는 건, 친구가 생기는 거예요. 나이 들수록 나를 든든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친구잖아요. 대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힘들고 슬플 때 음악을 듣죠. 그림도 마찬가지예요. 예술의 기본적인 기능이 있다고 하면 그건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전환되는 것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보면 힘이 나고 위로받을 수 있어요. 좋아하는 그림 전시가 열리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가서 보고, 해외여행을 할 때도 멀리 사는 친구를 보러 가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작품을 찾아가 보면 반갑고 즐거워지죠. 저도 힘들 때 마티스나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곤 해요.” 20년 후, 여섯 가족이 함께한 유럽 미술관 여행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미술은 그야말로 ‘절친’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그 못지않게 미술을 가장 친한 친구로 만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그의 아들들이다. 20년 전 함께 여행을 다녀온 두 형제와, 그 이후 태어난 셋째까지 세 아들은 모두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책이 나오고 20년 후, 세 아들과 아내, 그리고 막둥이 딸을 데리고 다시 유럽 미술관 순례 길에 올랐다. 늘어난 식구만큼이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여행이었다. “가자마자 달라진 걸 느꼈죠. 예전에는 제가 짐을 가장 많이 들었거든요. 젖병, 기저귀, 유모차까지 보통 짐이 아닌 데다가, 아이들 자체도 짐이나 다름없었죠. 근데 이번에 가보니 애들이 크고 힘도 세져서 제 짐도 들고 다니고 알아서들 잘 다니니 아주 편했어요. 스마트폰 지도 앱을 보고 저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전에 갔을 때는 밤 문화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는데, 이번엔 유명한 펍(pub)이나 바(bar)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즐기니까 진짜 여행 온 기분이 들었어요. 여러모로 아이들이 나와 아내를 케어해 주니까 도움이 많이 됐고, 여행의 질 자체가 달라졌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라면 한 번쯤 그처럼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생각해 볼 것이다. 경험자로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부탁했다. “가족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와 ‘프로그램’이에요. 어디를 가서 뭘 즐길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여행이 되고 말죠. 가족끼리 가는데 무슨 프로그램을 짜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녀들이 크고 나면 각자 취향에 따라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다를 거거든요. 사전에 가족끼리 합의하고 배려해서 프로그램을 짜면 수월한데, 막상 가서 정하려고 하면 밥 한 끼 먹는 거로도 트러블이 생길 수 있어요. 현장에 가서 이러자 저러자 하지 말고, 미리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배려해 플랜을 짜면 기분 좋게 여행을 즐길 수 있죠.” 미술관을 테마로 여행을 갈 계획이라면 유명한 명소보다는 작고 한적한 곳을 찾아갈 것을 추천했다. “루브르처럼 유명한 곳을 가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 보면 미술관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수가 있어요. 관광객이 몰려 복잡하고, 입장하는 데만 시간도 한참 걸리기 때문에 정신없이 관람하고 지치기 일쑤죠.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미술관을 가족과 산책하는 기분으로 간다면 더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거예요. 최근 자동차 테러가 있긴 했지만, 제가 가장 추천하는 곳은 프랑스 니스예요. 니스에 가면 마티스나 샤갈미술관도 있고 인근에도 좋은 미술관이 많아요. 주변 풍경이나 밤바다도 참 아름답죠. 반대로 조금 복잡하더라도 비엔날레 기간엔 베네치아에 가면 시끌벅적하지만 워낙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지는 시기니까 한 번쯤 가보면 좋아요.” 그는 유럽 어느 지역을 가도 가 볼 만한 미술관 몇 곳은 있기 때문에 미술관을 테마로 계획을 짜면 여유롭고 감성적인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추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을 권하는 데는 ‘편안함’에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 여행을 가면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데 그런 염려 없이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언제 또 온 가족이 여행을 갈지, 그리고 10년 후에도 책의 개정판이 나올지를 물었다. “글쎄요. 10년 뒤에도 개정판이 나온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 보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또 다른 방향으로 꾸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그 자체로도 무척 고마운 일이고요. 가족 여행은 앞으로도 계속해야겠죠. 근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까 각자 바빠요. 친구들과 여행도 가야 하고 자기 계획이 있으니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자연스럽게 또 떠나게 되지 않을까요?”
- 2016-08-3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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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BMW’ 2대로 만드는 행복
- 필자와 친한 지인이 30여 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를 했다. 마음씨 좋은 부인이 그간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했다면서 좋은 차 한 대 사서 여행을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기왕이면 우리도 BMW 한 대 사 가지고 신나게 다녀 보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아들 녀석 왈, “아니, 아버지가 BMW 사서 뭐 하시게요? 그냥 작은 국산차 하나 사서 다니면 안 돼요?” “아니, 뭐라고라?~~~” 지인은 그때 생각만 하면 분이 풀리지 않는지 “참 내,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자녀를 결혼시킨 부모들이 처음 겪는 갈등은 자녀들이 구입하고자 하는 차종이라고 한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줘야지 하면서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은 물론 결혼 비용까지도 보태줬다. 당장에 가진 돈이 없어서 무리해서 대출까지 받은 부모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혼부부가 대뜸 외제차를 사겠다는 것이다. 결혼 전에 타고 다니던 차를 계속 타도 될 것 같은데 차부터 근사(?)하게 바꾸겠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비싼 외제차냐고 물을라치면 연비 등을 생각하면 국산차보다 비싸지 않다면서 비교표를 들이민단다. 결론 ① 저네들은 외제차 타면서 부모에게는 무슨 외제차 타령이냐고 들이대는 요즘의 젊은 것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내 일이면 내 일로 다가올 수 있다. 결론 ② 아~~~! 결국은 자식도 내 품을 떠나고 나면 남이구나. 남은 것은 내 아내, 내 남편, 우리 둘밖에 없구나. 이제 둘이서 오순도순 사는 게 인생 최고의 목표구나. 그럼 뭘 해야지? 결론 ③ 자식놈들이 뭐라 하든, 주위에서 뭐라 하든 내 살 길 내가 찾아야겠다. 그래, 차제에 BMW나 2대 마련하자. 아니 BMW를 1대도 아니고 2대씩이나? 첫 번째 BMW는 눈치 챘겠지만 바로 ‘버스, 지하철, 걷기(Bus, Metro, Walk)’이다. 사람은 직립인간이 된 이후 걸어 다녀야 뇌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받는다고 한다. 먼 곳으로 여러 날 여행을 가거나 생필품을 많이 살 때는 차를 이용해야겠지만 웬만하면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다. 근교의 산이나 유적지는 물론 연극 또는 영화 등을 보러 다닐 때도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 그 재미도 쏠쏠하다. 가다가 아무데서나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구경도 하면서 다닐 수 있다. 특히 지하철에다 기차를 포함시키면 전국구가 되어 방방곡곡을 유람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도시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려면 사전에 고민을 꽤 많이 해야 한다. 버스 번호가 세 자리를 넘어 네 자리까지 있어서 예전처럼 행선지가 머릿속에 선뜻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두 번 갈아타려면 스마트폰의 대중교통 앱을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탈 경우 출구를 제대로 찾아 나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가거나 길을 건너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나름 요령과 노하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생각도 하고 나름 전략을 짜게 만들어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도 가져다 줄 것이다. 두 번째 BMW는 뭘까 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필자가 만든 신조어이기 때문인데 별 거 아니다. 다름 아니라 ‘맥주, 막걸리, 와인(Beer, Makgeolli, Wine)’이다. 술을 안 마시는 분들께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술을 좀 하는 사람은 적절한 음주만큼 인생을 즐겁게 하는 윤활유도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냥 술이면 술이지 왜 하필 BMW냐고 물을 수도 있다. 사실 위스키나 고량주, 소주처럼 도수가 높은 증류주, 도수가 낮은 맥주와 막걸리, 와인과 같은 양조주에다 칵테일까지 곁들이면 정말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게 술이다. 그중에 BMW를 고른 이유는 나이 들수록 주량도 줄어들므로 도수가 약한 술을 조금씩 즐기면서 마시면 시간도 잘 가고 재미도 있기 때문이다. 와인의 원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점심에도 저녁에도 와인을 마신다. 하지만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으면서도 즐겁게들 식사를 한다. 술을 술술 마시면서 인생을 술술 풀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BMW, 즉 맥주와 막걸리, 와인을 조금씩 맛보기로 한다면 마시는 순서는? 필자가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맥주도 와인도 다 마셔 봐야겠다면서 무엇부터 먼저 마셔야 하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맥주부터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어 알파벳 순(B → W)인 데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시는 게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수가 약한 술부터 마셔야 순하게 취한다는 주당(酒黨)들의 주도(酒道)는 어디나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BMW를 마시는 순서도 영어 알파벳 순서로 보나 도수 순서로 보나 B → M → W가 된다. 도수 또한 맥주가 4~5도, 막걸리가 6도, 와인이 11~14도 아닌가. 지하철을 오르내리기 싫다면서 버스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에 맞춰 다니기에는 지하철이 최고라면서 지하철만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버스건 지하철이건 편한 대로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BMW 중에서도 맥주나 막걸리, 와인 어느 한 가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것저것 다양하게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맥주와 막걸리, 와인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향과 맛이 다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적당히 즐긴다면, 또 가끔씩 순서를 바꿔 마시면 그보다 좋은 재미가 있으랴. 요즘 다양한 국내 여행 패키지가 나와 있다. 차를 가지고 가면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라도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출발 장소까지만 가면 그 다음엔 다 알아서 데리고 다닌다. 2박 3일이면 두어 번 정도는 자유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알아서 해결하도록 한다. 이때 그 지역의 막걸리 등 토속주를 맛볼 수 있다. BMW 2대를 가지면 더없이 자유롭고 행복한 이유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며 한없이 먹세 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 ~~~ 차갑고 매서운 바람 불 때 그 누가 한 잔 먹자고 할 것인가? ~~~”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송강 정철 선생의 ‘장진주사(將進酒辭)’의 일부분이다. 아무리 약한 술이라고도 해도 한없이 마실 수야 없지만 ‘적중이지(適中而止)’, 즉 적당한 선에서 그칠 줄 아는 주당이라면 그 아니 즐거울소냐. 에헤야디야,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8-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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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홍의 와인여행] 와인 구매 가이드라인 8가지 포인트
- 세상에 와인을 구매하는 행위보다 간단한 것도 없다. 마트나 와인 숍 등에서 여느 상품처럼 그냥 돈을 내고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원하는 와인을 제대로 구매하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도 드물다. 글로벌 시대에 특히 뉴 월드 와인이 공산품처럼 대규모로 생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와인은 여전히 규격화된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와인 중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고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와인의 최고 전문가라 해도,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을 모조리 꿰차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실수하지 않고 와인을 구매하려면 몇 가지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자신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라. 최고로 비싼 와인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향과 맛에 관한 한 최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존재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최고일 뿐이다. 게다가 주관적인 관점은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그리고 그날의 기분, 컨디션, 분위기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 음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평소 여러 종류의 와인을 접해보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고르는 훈련이 필요하다. 와인 선택에도 당신의 개성과 끼를 발휘하라. 둘째, 비싸다고 다 좋은 와인은 아니다. 대체로 값과 질은 비례한다. 저 유명한 1855년 보르도의 ‘그랑 크뤼 클라세’도 가격을 바탕으로 작성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값에 비해 질이 수준 이하인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특정 AOC의 명성을 배경으로 질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와인들도 있다. 그러니 레이블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아직 세상에 그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격 대비 질이 우수한 와인을 찾는 노력을 하라. 가격이 적당하면서도 질이 우수한 새로운 와인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똑같은 와인이 어느 날 유명 전문 잡지에 소개되고 나면 값이 20~30% 이상 치솟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먼저 선수를 쳐라! 참고로 프랑스에는 병당 1만5000원 이하의 와인만 모아 놓은 와인 가이드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와인을 레이블이나 값으로 마시지 않고 각 와인의 고유한 특성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와인 애호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래된 와인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의 와인은 생산 후 5년 안에 마시는 것이 좋다. 화이트나 로제 와인의 경우는 1~3년, 레드 와인의 경우는 3~5년 정도가 적당하다. 그리고 샹파뉴는 특별한 빈티지 샹파뉴를 제외하면 구매한 후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소비하는 것이 좋다. 보졸레 누보는 6개월 내에 마셔야 한다. 물론 뛰어난 빈티지의 고급 와인의 경우 보관기간이 10~20년 이상 가는 것들이 대다수지만, 이런 와인은 값이 비싼 만큼 예외적이란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런 고급 와인은 하나같이 타닌이 높아 몸체가 탄탄한데, 너무 일찍 마시면 향과 맛이 채 열리지 않아 절대 고급 와인의 오묘한 진수를 느낄 수 없으니 창문으로 돈을 던져 버리는 것과 같다. 넷째, 빈티지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많은 와인 아마추어들이 빈티지 표를 마치 수학 공식처럼 신봉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빈티지는 와인의 출생신고 같은 것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같은 지역, 같은 빈티지라 할지라도 주조하는 사람의 정성과 테크닉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와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니 빈티지를 참고는 하되 너무 신봉하지 않는 게 좋다. 게다가 나쁜 빈티지는 오랜 보관이 불가능하므로, 고급 와인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기다리지 않고도 마실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우리 실정에 맞는다고 판단된다. 가끔 활용해보기 바란다. 다섯째, 머잖아 마실 와인과 장기간 보관했다 마셔야 할 와인을 구별하여 구매해야 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고 10년 이상 보관했다 마셔야 제격일 ‘그랑 크뤼 클라세’를 구매해서 그날 바로 마시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행위이며,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자칫 돈만 낭비하고 얼굴을 찡그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여섯째, 같은 와인을 최소한 여섯 병 단위로 구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러 사람과 마실 때 한 병으로 모자라는 낭패를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한 종류의 와인을 일정 시간을 두고 마시게 되면, 그 와인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와인이 자신의 기분이나 컨디션,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발전해 나가는지도 경험해 볼 수 있다. 만약 그러지 못할 사정이면 최소한 두세 병이라도 구매하는 것이 좋다. 물론 매우 귀한 고가의 와인일 경우는 한 병으로 만족해야겠지만. 일곱째, 믿을 만한 와인 가이드북을 한 권 정도 준비하는 것은 필수다. 한글로 번역된 것들도 있으니,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접근이 가능하다. 가이드북을 통해 와인을 구매하기 전에 구매할 와인에 대해 사전에 공부를 할 수 있고, 마시고 있거나 마신 와인이 어떤 것인지 검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내린 평과 전문가의 평을 비교해 봄으로써 와인 시음에 대한 능력과 자신감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매우 까다로운 문제인 ‘언제가 마시기 적절한 시기인가?’에 대해서도 상세히 일러준다. 가이드북의 종류에 따라서는 생산자나 가격에 대한 여러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각자의 필요에 맞는 와인 가이드북을 꼭 한 권 갖추라고 권한다. 한 가지 문제점은 매해 새로운 빈티지가 나오기에 매해 새로운 빈티지를 첨가한 가이드북의 개정판이 나온다는 점이다. 와인 마니아나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적당한 간격으로 구매하면 어떨까 한다.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리라고 믿는다. 여덟째, 공동구매를 해보라. 와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같이 공동구매에 대해 논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 모르는 와인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습득하게 되고, 특히 할인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가격대가 높은 와인일수록 공동구매는 더욱 유용하리라 본다. “당신이 어떤 와인을 마시는지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만큼 이제 와인은 단순한 음료나 상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와인의 선택은 간단한 생필품 구매와는 여러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주머니 사정을 넘어, 선택하는 사람의 성향과 인품을 나름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 장 홍(張洪)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국제관계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 알자르 소믈리에협회 준회원이며, 등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본 와인, 인류역사 속 와인의 의미와 파워, 예술 인문학을 통해 본 와인 등에 대해 강의도 하고 있다.
- 2016-08-0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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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수산업을 우리가 살려야 한다
- 우리는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걸고 수출을 해야 먹고 산다고 알고 있다. 일단 수출은 품질을 인정받은 것이니 세계적인 품질이고 수출을 못하고 있는 상품은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러나 내수 기반이 부족하니 수출을 해야 하는 면도 크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이 튼튼하면 굳이 수출에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자국 시장에서 생산하고 자국민들이 소비해줘도 충분하다면 굳이 출혈수출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내수 시장 규모는 인구가 1억 명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는 5000만 명 수준이라 그 절반밖에 안 된다. 통일이 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니 그 때문에라도 통일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인구가 1억 5천만 명이나 되는 일본이 부럽다. 실제로 일본은 우리처럼 수출에 그토록 전념하지 않는다. 내수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국산품의 수준은 이제는 세계 수준급이다. 산업초기에는 품질에 문제가 많아 KS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산보다 외국산은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산품을 그렇게 만들었다가는 경쟁제품이 있어 팔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항의를 받으면 바로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산품을 사줘야 한다. 폴크스바겐이 연비 조작으로 세계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만 오히려 판매가 늘었다는 것이다. 재고가 늘자 할인을 더 해줬기 때문이란다. 그 때문에 다른 나라에는 설설 기던 폴크스바겐이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 하여 정부에서 판매 금지 조치를 내린다는 기사가 있었다. 연비 조작은 했지만, 내가 우선 타는 데는 별 지장 없고 할인해줄 때 사자는 실리적인 생각이 우선했다. 크게 품질에 문제가 없는 봉제 상품 등도 그렇다. 90년 대에 우리나라 인건비도 많이 오르고 3D 현상 때문에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가방 공장을 인건비가 싼 동남아시아에 차렸었다. 가방을 팔기 위해서 미국의 가방 박람회에 갔었는데 미국제 가방이 많아 당황했던 일이 있다. 미국은 인건비가 비싼 나라인데 싸게 만들어줄 테니 내게 주문을 달라고 했으나 미국산에 자부심을 갖는다며 거부하는 업체가 많았다. 가방 잘 보이는 곳에 ‘Proud of USA'라는 라벨을 당당히 달고 있었다. 수출과 내수는 제조업의 상품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 기사에 보니 해외 대신 국내 휴가로 돌리면 일자리가 5만개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매년 인천 국제공항 출국자가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 여행객의 10%만 국내로 돌려도 지역경제를 살리고 4조원의 내수 창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내 관광수입 중 거의 90%가 자국민이 쓴 돈이고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도 70%를 상회하는데 우리는 50%대라고 한다. 볼거리가 많은 외국 관광지도 가보고 싶을 것이다. 대충 보고 나면 역시 우리나라 관광이 말 잘 통하고 음식 맞고 우리 취향에 맞는 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긴 하다. 피서지 바가지요금 등 개선해야 할 점도 많다.
- 2016-08-03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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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귀티나는 촌사람)] 박미향·엄팔수 부부 '산골 꽃차 전문가의유쾌·상쾌·통쾌'
- 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6-08-02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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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아직도 애인이 필요하다
-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 2016-07-25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