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고가공원 ‘서울로 7017’이 지난 달 20일 개장하였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폐쇄되고 1년 반 만에 완공하였다. 우리나라 첫 고가공원이어서인지 기존 공원과는 다르다. 새 명물 탄생을 축하할 일이다.
6월 첫 주말 친구 몇 명과 회현역에서 공원으로 걸었다. 하늘은 맑고 서울타워가 더 높게 보였다. 고가공원에서 오랜만에 내려다본 서울역이 새롭게 보였다. 서울의 모든 길이 서울역으로 통한다던 옛 영화가 그리워지는 대목이다. 처음 보는 ‘창작품’ 감상까지는 보람이 있었다. 친구들과 여기저기 구경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은 놀이시설에서 뛰어놀기 바쁘다.
‘서울로 7017‘ 이름에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문필가인 한 친구가 “서울로는 도로명 주소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였다. 때마침 외국관광객이 YTN 남산타워를 가리키면서 '서울타워 맞느냐?'고 물어왔다. 고맙다고 하면서 “이곳 이름은 무엇이냐?”고 또 물었다. ‘서울로 7017‘라고 하였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서울타워를 향하여 휙 가버렸다.
고가공원에 붙은 ‘서울로’ 의미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7017’에 이르러서는 옛 고가도로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것 같았다. 1970년에 개통하였던 서울역고가도로는 정밀안전진단에서 붕괴 등 심각한 사고의 우려가 있었다. 공원화에 착수하여 2017년에 고가공원으로 완공한 것이다. 이것이 ‘서울로 7017’의 역사다. 지금 이미 사라진 고가도로의 역사까지 알고자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대는 글로벌시대다. 이름은 지금 누구나 부르기 좋고 명쾌하여야 한다. 옛 역사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서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인 서울타위를 보자. 소유주 YTN은 매 시간마다 ‘YTN 남산타워’라고 방송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심지어 외국관광객까지 부르기 쉬운,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서울타워’라고 부른다.
이름을 지을 때 사주ㆍ음양오행 따지던 시대도 지났다. 외국을 자주 왕래하거나 외국인과 교류가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부르기 쉽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좋은 ‘외국인명’을 따로 만들어서 사용한다.
‘서울로 7017’은 서울의 공중공원이다. 서울공원ㆍ서울고가공원ㆍ서울공중공원ㆍ서울파크ㆍ서울하이파크 등 많은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서울시민의 창의력을 물어보자. ‘서울로 7017, 좋은 이름 찾기’ 대대적인 공모전을 제안한다.
사람이 서로 알아갈 때 인사라는 과정을 통한다. 잠깐 동안의 첫인상. 목소리에서 기운을 느낀다. 표정을 읽는다. 차차 친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있었나 싶다. 마음은 허락한 적 없는데 친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없다. 반칙처럼 이름도 모르고 “나, 이 사람 알아!”를 외친 사람 손들어보시라. 이제 알 때도 됐다. 그의 이름 석 자 김유석(金有碩), 배우 김유석. 안방극장 터줏대감으로 익숙한 그가 은막(銀幕)에 모습을 드러냈다. 7년 만에… 돌아왔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 같은 배우다
친해질 기회를 언제 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너무 친숙하다. 이름 대면 알만 한 배우만큼 참 가깝다. 주위 사람에게도 물어봤다. “배우 김유석을 알아요?” 고개를 갸우뚱함과 동시에 사진을 보여준다. 그러면 안다고 백이면 백 대답한다. 사극에서 봤다던가, 찌질(?)한 연기가 좋았다던가. 연기 경력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김유석은 이름보다는 얼굴 자체가 이름이고 또 얼굴인 셈. 사람들 대부분이 “어!” 하며 연예인으로 알아차리지만 세 단계쯤은 거쳐야 저 배우가 누군지 감을 잡는다. “제가 나온 작품을 재밌게 보신 분이 길을 지나다가 어디서 봤죠? 초등학교? 우리 동네? 아! 대학교?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그러면 제가 ‘그게 저인데요(웃음)’ 그래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별하게 눈에 확 띄지는 않는데 뭔가는 있었고. 그렇게 기억해주시는 것 같아요. 물론 좋죠. 제가 누군지 그 사람이 알고 나면 ‘정말 그 연기 좋았어요’, ‘팬이에요’라고 말씀해주세요.” 배우란 인기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대중 앞에 선 그들은 사랑받기 시작하면 자리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배우 김유석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살아왔겠지만 집중해보거나 느낀 적이 없다. 그저 어느 샌가 스며서 젖어버렸다. 어디에도 흔치 않다. 안정적이고 기복 없이 늘 있는 배우 말이다. “등산 같아요. 내가 나를 돌이켜보면. 저 위까지 가려면 어떤 방법으로든 밟아서 올라야 하잖아요? 단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쑥 하고 올라간 적 없어요. 그냥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걷다가 ‘어, 좀 올라왔네’ 그래요. 한참 아래 있던 친구가 갑자기 올라가는 것도 보고 말이죠.” 고등학교 때까지 아무런 꿈이 없던 김유석은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배우가 됐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는 없지만 행복한 삶의 형태 속에서 다른 것 안 하고 원하는 연기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제가 배우를 하면서 한 가지 색깔만 사용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일반적으로 배우를 하면 비슷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잖아요. 제가 안정적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꽤 독특한 연기도 했어요. 대박 난 작품이 없는 게 아쉬운 거죠(웃음)”
영화 , 스크린으로 돌아오다
김유석을 처음 만난 장소는 4월 말 전주국제영화제 현장이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허철 감독)가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과 첫 상견례를 가졌다. 김유석은 TV 탤런트로서 인상이 깊지만 데뷔 초 김기덕과 홍상수의 대표 영화에 출연해 주목 받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틈틈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다 한동안 TV 드라마에만 몰두했다. 마지막 영화 이후 7년 만에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작품이 바로 이다. “이 영화를 감독한 허철이와는 사회 친구예요. 지금은 정치를 하지만 민변이던 송호창, 진선미 의원, 한지승 영화 감독 등이랑 어울려 친한데 지승이가 철이를 데리고 왔어요. 10년 전쯤 만나서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극영화를 하겠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를 하던 친구가요. 어떤 연극을 봤는데 5000만원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이라더군요.” 허철 감독의 말에 김유석은 그저 친구가 잘되기만을 바랐다. 미국에서 잘나가던 교수 허철이 한국에 와서 갖은 상황 속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고 뚝심 있게 영화 만드는 허철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네가 영화를 만들면 내가 뭐든지 할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묻지도 말고 시키기만 해. 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할게. 그냥 써. 그랬더니 ‘네가 그냥 그걸 해야겠다’ 그러더군요.” 허철 감독은 김유석에게 의 주인공인 변사장 역을 줬다. 이미 감독에게 선택당했던 것이다.
예술은 ‘얘’랑 ‘술’ 먹는 거
사실 김유석에게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예술영화는 이제 그만. 데뷔 초에 예술영화로 시작했더니 정말 대안영화나 독립영화 아이콘처럼 제가 그렇게 돼 있더라고요. 예술은 ‘얘’와 ‘술’ 먹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좀 더 다양하고 보편적이고 편한 영화, 한마디로 흥행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었어요. 일단은 시나리오나 좀 보자고 말했어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정하고 읽고 또 읽다가 세 번이나 눈물이 터졌다. 순간적인 감정일지 몰라서 다음 날 또 읽었는데 전날과 다르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관객들도 같은 감정을 느끼면 영화가 잘될 거란 확신이 생겼다. 개런티에 대한 생각은 애초에 접고 시작했다. “몇천만원으로 영화를 만드는데요, 무슨. 당연히 그래야 했어요. 영화를 만드는 것만도 고마운 거잖아요. 작년 3월에 만나 미팅하고 6월에 촬영 들어갔습니다. 영화 찍는 내내 정말…정말 행복했습니다.” 최근 방송 드라마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사전 제작을 도입했지만 모든 제작 환경이 바뀐 것은 아니다. 대본을 받아 외우기가 바쁘게 빨리 찍어 내보내는 속도전의 연속이다. 줄곧 브라운관에서만 활동했던 김유석은 영화 촬영 하는 동안 기운을 얻고 더욱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제 나름 영화에 대한 갈증도 있었고, 영화 팀이 주는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영화 찍는 내내 허철 감독을 다시 알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서 철이는 굉장히 합리적이고 정석대로 잘 배운 감독님이었습니다. 흔히 보지 않았던 노하우를 쏟아내는 그런 감독이었죠.” 함께 영화에
출연했던 연기 후배들은 김유석이 팀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며 입을 모았다. 이에 손사래를 치며 함께한 후배들에게 고마움을 돌렸다. 이 영화는 연극 를 영화화한 것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주역을 맡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허철 감독이 연극을 보고 그 배우들과 작품 만들겠다고 시작한 영화잖아요. 내가 아니고 연극배우들이 중심이죠. 연극에도 출연했던 리우진, 정연심, 이황의, 김곽경희, 강유미 같은 배우가 탄탄하게 잡고 있었어요. 내 나이가 조금 많은 관계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같이 술 한잔 마시고 그러는 거죠. 제가 슬쩍 낀 건데 이질감 안 느끼고 받아줘서 고맙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영화 는 전회 매진을 기록했고, 영화계와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것도 뜻깊었다. “영화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어요. 어느 순간 드라마 방송만 하다 보니 영화가 굉장한 동경의 대상이 돼 있더라고요. 심지어 영화하는 친한 친구도 저를 방송 연기자로만 생각해서 당황한 적이 있어요.” 애써 외면했다. 영화제나 시상식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좋은 한국 영화가 개봉돼도 찾아보지 않았다. 영화제에도 가지 않았다. 이번 영화를 찍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TV로 챙겨봤다. “무명배우 33명의 축하공연이 인상적이었어요. 시상식에 앉아 있는 배우들이 모두 울더라고요. 배우 심정이 다 그런 거 같아요. 충분히 재능 있는 연극배우나, 안정적이지만 뜨지 못한 배우나, 연기를 막 시작한 배우나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오빠냐, 아저씨냐 그것이 문제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특히 한국사람) 상대방 이름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나이에 대해 궁금해한다. 새파랗게 어려보이는 김유석이지만 사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남자.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외국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가 영어로 “My first son is twenty years old(내 큰아들은 스무 살입니다)”라고 했을 때 ‘twenty(스무 살)’란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됐다. 너무나 젊어 보이는 외모 때문이었다. 오빠로 느껴야 할지, 아저씨라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오십? 네? 물리적인 나이는 그렇지만 나의 생각과 신체적인 나이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제 친구들을 보면 놀라요(웃음). 언제부터 그랬냐면 스물일곱 살 때 러시아에 유학 가서 서른두 살에 왔어요. 그리고 서른세 살에 데뷔를 했는데 지금도 그때랑 마음이 똑같아요.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7년 만에 영화를 했는데 이렇게 세월이 금방 갔나. 큰아들 키가 제 키를 훌쩍 넘었는데 이렇게 애가 컸나 싶죠.” 데뷔 초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신체 중 노화가 빠른 것 중에 목소리가 있다는데 예전 그대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젊은 외모에 중년의 멋이 가미된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참을 생각한다. “젊음을 유지하기보다 잘 늙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런 노력 중 하나가 불편한 것은 안 해요. 불편한 사람과 술 안 마셔요. 제가 술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랑 술을 먹으면 한두 잔에 취하다 체해요. 물론 피할 수 없을 때는 버텨보지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아요.” 김유석은 어느 순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기길 바란다고 했다. 여태까지 믿고 살아왔던 삶이나 연기가 퇴색, 변색, 탈색되지 않으면 좋겠단다. “그렇다고 어떻게 늙고 싶은지가 지금 당장의 고민은 아닙니다. 할 게 많아서 그런 고민할 여지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나이 먹다 보면 자기가 바뀌는 모습을 못 느끼더라고요. 나도 저럴까 걱정은 하죠. 편안해지고 옛것 얘기하고 남에게 가르치려 하는 거 말입니다.”
중년의 배우, 나이 앞에 유연해지다
언제쯤 자신의 실제 나이와 비슷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극 중 배역에 녹을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고 했다. “배우는 자기 나이를 중심으로 위아래 열 살 정도는 연기할 수 있어야 해요. 나이를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 또한 이번 영화처럼 나이 많은 연기도 가능하고 또 젊은 역할도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웃음)” 혹시 인생에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을까 싶어 물어봤다. 지금까지 못해본 캐릭터를 연기해보는 것 말고는 별로 없단다. 마흔을 넘겨보니 대충이라도 알 수 있었다.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고 채우는 것만큼 비워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낀다. “연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그냥 소소하게 놀고 술 마시고 힐링하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해요. 비워야 또 무엇이 들어올 수 있어요. 가끔씩 작품이 끝나면 일주일이건 한 달이건 절에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오거든요.” 김유석은 배우로서 일상에 대한 호기심,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식지 않길 바란다. “제가 맡는 캐릭터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요.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이 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보내고 싶습니다.”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치는 남자가 있다. 바로 그녀의 이탈리아 남편 카를로다. 대기실에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소프라노 Stella Kim 김성은의 목소리만큼 아름답고 특별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들여다봤다.
현재 유럽에서 프리마돈나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소프라노 Stella Kim의 한국명은 김성은이다.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극장에서 동양인 최초로 오페라 의 주인공인 질다 역을 멋지게 열연해서 유럽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스페인 비냐스 국제콩쿠르,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이탈리아 토티 달 몬테 국제콩쿠르, 스페인 아라갈 국제콩쿠르 등 유명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다.
스페인 황실 신년음악회에서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협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김성은 초청독창회가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의 찬사 속에 끝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한량 이봉규도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독특한 음색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김성은 공연을 놓칠 리가 만무하다. 그날 무대에서 뿜어내는 그녀만의 오묘하면서 섹시한 타고난 천상의 목소리를 접하고는 그녀가 왜 유럽에서 그토록 주목을 받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맑고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
나는 그동안 수많은 소프라노 공연을 국내외에서 감상했지만 음악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목소리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저 고음의 꾀꼬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들이 음색에 따라 각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은 느꼈지만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느껴보기는 김성은이 처음이다.
대중가요 가수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여가수들과 심수봉 목소리의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재즈 가수로 말하면 루이 암스트롱의 독특한 음색이 다른 재즈 가수들과 확연하게 다른 것처럼, 김성은의 목에서 흐느끼듯 터져 나오는 음색은 가히 독보적이다.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목소리다. 물론 비전문가로서 음악을 그저 즐기기만 했던 한량 이봉규의 평가이기에 음악평론가들이 내 글을 읽으면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즐겼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솔직하게 느낀 점이다.
요즘은 문화평론가들이 정치평론을 하고 변호사나 의사들도 너도나도 TV에 나와 정치평론을 해대는 자유로운 세상이기에 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키다리 아저씨와의 운명적 만남
아름다운 프리마돈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아홉 살 연상의 이탈리아 심리상담사(psychology counselor) 카를로다. 올해로 벌써 결혼 20년 차. 그와의 인연도 오페라가 맺어주었다. 오페라 정극의 주인공을 뽑는 콩쿠르에서 1등(주역)에 뽑혀 이탈리아의 트레비조에서 40일간 생활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녀에게 방을 내준 집주인이 카를로다. 당시에는 남자로 보이기보다는 거처할 집을 내준 키다리 아저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 후 약간의 세월이 흘러 다음번 이탈리아 공연 때 만났는데 카를로의 식구들이 따뜻하게 대해줘 강한 인상이 남았다. 인연이 되려니까 하늘도 도왔는지 이탈리아 공연 스케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만날 기회도 늘어났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가 4년쯤 무르익어갈 무렵 그녀의 어머니가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카를로의 인간미에 반해버렸다.
“왜 결혼 안 하냐? 카를로와 결혼하든지, 아니면 지금 깔끔하게 헤어져라!” 하고 압박을 해온 것이 결정적으로 통해 트레비조 대성당에서 1997년 결혼했다. 당시 김성은과 카를로의 결혼은 이탈리아에서 화제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남자와 동양인 프리마돈나의 결혼은 당시로서는 이탈리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국제결혼의 장점을 물으니, “국제결혼 이전에 여자와 남자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 것이고,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여자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결혼한 지 20년 됐고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도 그 이상 되기 때문에 김성은은 국제결혼의 실감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공연을 위해 가끔 한국에 오면 낯설고 어색할 때가 많단다. 이탈리아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겠지만 시어머니는 그녀를 아주 사랑하고 예쁘게 봐준다. 외국 며느리라서 봐주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존경받는 오페라 가수가 내 며느리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그런 것 아닐까.
이탈리아도 점을 많이 본다니 놀랍다. 카를로가 김성은을 만나기 전 브라질 여의사와 사귀고 있을 때 점을 보았는데 점쟁이 왈 “너는 동양 여자랑 결혼한다”고 했단다. 카를로는 그 소리를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고 그러던 어느 날 눈앞에 동양 여인 김성은이 나타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콩깍지가 씌면 아무거나 마구 갖다 붙이면서 운명론자가 되어버리는 경향은 이탈리아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동양계의 귀하고 아름다운 프리마돈나의 마음을 훔치려고 지어낸 말인지 진실인지는 카를로만이 알 것이다. 카를로의 직업이 심리상담사이기에 합리적인 의심은 들지만 이 정도로 넘어가자!
‘범생’ 남편과의 찰떡궁합
프리마돈나라고 해서 한량 이봉규가 우아한 질문만 하고 보내줄 리가 없다.
“이탈리아 남자들이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데…”라는 도발적 말에 그녀는 웃으면서 “내 남편은 삼식이”란다. “하루 세끼를 집에서 먹는 ‘범생이’라서 바람피울 줄도 모를걸요?” 남편을 만나본 적이 없기에 그 말을 믿어야지 어쩌겠나? 김성은이 공연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 무대 안팎에서 호들갑 떨면서 “내가 스텔라의 남편이요”라고 외친단다. 대기실에 찾아와서는 이탈리아어로 예쁘다는 의미의 “Bella Bella”를 연발한다. 이탈리아에도 팔불출이 있기는 매한가지.
심지어 아내의 노래를 CD로 들을 때도 눈물을 펑펑 쏟는다고 하니 아까 김성은이 한 말을 믿기로 했다. 두 사람은 부부싸움을 할 때도 여느 부부와 다르다고 한다. 김성은이 “너는 왜 코가 삐뚤어졌니?” 하고 남편에게 시비를 걸면 카를로는 “너는 왜 코가 납작하니” 하며 응수한단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코가 중간에 약간 휘어진 것을 지적하면서 놀리면 한국 여자들의 납작한 코를 얘기하며 맞받아친다고 하니 유치한 사랑싸움의 극치다. 그만큼 다정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말로 들렸다. 결혼생활이 오래되고 느긋해서 그런지 카를로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10년 살고 바꿔야 한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더니, 이제는 “뭐든 다 해줄 수 있으니까 제발 이혼만 요구하지 마라!”고 어리광을 핀다고 한다.
그녀는 공연 등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도 다 이해해주면서 외조를 해주는 카를로가 늘 고맙다. 이탈리아 남자와 한국 남자의 차이를 묻자 “이탈리아 남자들은 가족 구성원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중요하고 개별적인 사생활을 존중해준다. 그렇게 자유를 얻는 대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국 남자들은 권위적이긴 하지만 모든 책임을 감수한다. 간혹 힘들고 귀찮을 때는 한국 남자 같은 스타일에 의지하고픈 마음도 든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남자랑?
“다시 태어나도 이탈리아 남자랑 결혼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한국 남자랑 안 살아봐서 다음 생에는 꼭 한국 남자랑 살아보고 싶다”며 깔깔대고 웃는다. 그런데 그 눈가에 진심이 묻어나온다. 20년 넘게 이탈리아 남자와 외국에서 생활했으니 고국이 그리웠을 것 같다. 또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 남자와 살아봤으면 하는 마음도 슬쩍 해봤으리라.
완벽한 결혼생활이 어디 있으랴. 김성은은 지금 행복하기에 다음 생의 바람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만약 행복하지 않으면 당장 이혼하고 보따리 싸서 한국으로 날아올 것 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한량 이봉규는 간파했다. 승부욕이 강하고 처절한 노력 끝에 유럽에서 성공한 프리마돈나가 되었는데 싫은 결혼을 참으면서 살 김성은이 아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지금 나름대로 만족한 결혼생활과 이탈리아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12세의 딸 알레그라의 사진을 보여준다. 기가 막히게 예쁘게 생겼다. 알레그라를 성악가로 키우고 싶은데 엄마를 안 닮아 노래를 못한다며 아쉬워한다. 그런데 펜싱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딸이 이탈리아 3개 도(道)의 12세 펜싱대회에서 2등을 했단다.
“제2의 김연아를 기대해보라! 얼굴도 예쁘니까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는 순간 세계적인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부추기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프리마돈나 김성은도 별 수 없이 자식바보다. 52세의 소프라노는 대체로 은퇴할 나이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다. 그 원동력은 가족의 사랑이 아닐까? 그녀는 말을 할 때도 마치 노래하는 것 같다. 고음의 목소리로 흥얼거린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오페라를 감상하는 느낌이어서 행복했다.
TV뉴스를 보던 중 그래피티(graffiti)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어떤 호주인이 우리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에 낙서를 하고는 사라졌다는 소식이다.
그래피티는 건물 벽이나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말한다.
우리 동네 산책길의 다리 밑 한쪽 벽면에도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자는 몰랐는데 손녀와의 산책길에서 아기가 그 벽면의 그림을 보더니 “할머니 원더 볼즈에요!” 라고 해서 그 그림이 어린이용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이 있기 전보다 화사해진 다리 밑은 보기에 좋아서 이런 벽화라면 많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미대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 담장에 그림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보여준 사진이 그래피티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필자 눈에도 수준 높아 보이고 멋져서 그래피티를 예술의 한 장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피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밋밋한 담장에 예쁜 그림을 그리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 곳에나 그려놓으면 일종의 범죄라는 말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은 번개처럼 스프레이로 그림이나 메시지를 쓰고는 재빨리 도망을 간다고 한다.
담장이나 평범한 벽면이 아닌 공공장소인 지하철이나 기차역 건물 벽에 낙서해 놓으니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됐다고 한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역무원들이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는데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하고 계속 청소를 했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고 한다.
아마 낙서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깨끗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갱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데 그 후로 차츰 사회, 정치적 비판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낙서 예술가도 생겼다. 스물여덟 살에 타계한 뉴욕 바스키야의 작품은 경매에서 164억 원이나 호가했다니 그냥 낙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피티는 원래 그리는 장면을 들키면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그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디에 낙서를 하는지도 중요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낙서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이라는데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객차 전체를 통째 낙서로 채운다는 영화도 나왔단다.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습격 받은 지하철이 17군데나 되었고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고 하니 좀 걱정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역 세 군데에 그래피티 습격이 있었는데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 티셔츠 차림의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를 잘라내고 차고지에 들어가 낙서를 하고는 경찰이 손쓰기도 전에 유유히 호주로 돌아갔다는데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나서 원정낙서까지 왔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낙서를 하고 갔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전담 수사관까지 동원되었다면 좋은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우리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인다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낙서한 내용이 반사회적이거나 공포를 조장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우리 동네 산책길의 벽화처럼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들어오는 객차에 예쁜 그림이 그려있어 보기에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그래피티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킨다면 범죄라 하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곳곳에 나쁜 그래피티가 아닌,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벽 그림이 많아지면 좋겠다.
인생 황혼기에 맞은 손님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차드 젠킨스, 히암 압바스
제작연도 2007년
상영시간 104분
20년째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년의 교수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단조롭고 열의 없는 나날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던 월터는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자인 타렉 칼릴(하즈 슬레이만)과 자이납(다나이 거라이라)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가 갈 곳 없는 젊은 커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자,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인 젬베(Djembe 혹은 jembe;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원추형 모양의 가죽 드럼) 연주를 가르쳐준다.
타렉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젬베를 연주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게 된 월터는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자 타렉과 자이납, 그리고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온 타렉의 어머니 모나 칼릴(히암 압바스 Hiam Abbass)의 운명과 얽히게 된다.
모든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의 초반부는 주인공 월터의 무뚝뚝한 캐릭터와 잿빛 삶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간결하게 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거리를 걷는 월터의 처진 어깨, 귀가하여 홀로 와인을 마시는 월터의 쓸쓸한 표정. 얽은 얼굴에 안경을 걸친 반대머리 월터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리포트가 늦었다고 사정하는 학생을 냉정하게 내쫓는 그의 유일한 관심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아내와 함께 듣던 클래식 음악 감상뿐. 아내의 피아노로 교습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선생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번번이 내쫓고, 마침내 네 번째 선생 바바라(마리안 셀데스)로부터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좋은 피아노를 팔려거든 내게 팔아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다.
월터가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마저 공동저자가 아닌, 단지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고 새 책을 거의 다 써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했고, 한 과목뿐인 강의도 성의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월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이 전제로 묘사되었기에, 자신의 집을 점거한 불법 체류 외국인 커플을 다시 불러들여 잠자리를 제공하는 설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 타렉과 자이납이 채 챙겨가지 못한, 그들의 다정한 한때를 담은 사진, 그리고 월터가 창밖으로 내려다본 밤거리에서 초조하게 잠자리 구걸 전화를 거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는 세심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월터가 젬베 연주에 금방 빠져드는 장면 또한 월터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음악 애호가라는 초반의 설정 덕분에 쉽게 이해가 된다. 월터를 경계하는 진중한 자이납과 달리 낙천적이고 영리한 타렉은 월터에게 차근차근 연주의 기쁨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젬베 연주 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드려야 한다. 4박자 클래식에 익숙하겠지만 아프리카 리듬은 3박자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타렉이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건 자이납과 젬베뿐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사에서 짐작되듯 타렉은 세네갈 출신인 자이납을 깊이 사랑한다. 이처럼 음악이 중동인 타렉과 아프리카인 자이납을 연결시켜주었듯, 백인 월터와 중동인 모나의 내적 교류에도 큰 몫을 한다.
학사 일정 때문에 코네티컷으로 돌아간 월터가 바바라에게 피아노를 주는 장면은 과거의 아내 혹은 그녀의 음악과 이제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반면 그가 뉴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나가 청소를 하며 월터 아내가 연주한 클래식 CD를 듣고 있는 장면은, 음악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터는 CD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는 모나를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브로드웨이의 마제스틱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을 예매한다. 타렉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절박한 시점에 만난 낯선 장년 남녀가 뮤지컬 감상을 통해 웃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월터는 “책을 안 써본 사람과는 말이 쉽지 않다”며 모나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끊어버리지만, 결국엔 자신이 “바쁜 척, 책을 쓰는 척했지만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다. 남의 논문만 읽고 똑같은 과목을 20년 강의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모나는 진심을 말해줘 고맙다며 “교수가 아니면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월터에게 모나는 ”그래서 더 신나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낙천적인 타렉의 어머니답게 모나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임을 드러내주는 대사다.
런던에 사는 아들이 있다는 대사만 있을 뿐, 월터 아들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가 타렉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일 수 있고 이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나의 깊은 모성과도 연결된다.
는 아무런 사건도 인연도 없이 생의 끝점에 이를 것 같던 월터의 삶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이국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9·11 사건 후의 미국 정부(는 2007년 작품이다) 태도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간접,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타렉이 지하철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끌려갈 때 월터가 경찰에게 진정하라며 신음하듯 내뱉던 외침, 퀸즈의 불법 체류자 수용소 외관을 창고처럼 보이게 의도했다는 월터와 모나의 대화, 모르겠다고만 하는 수용소 직원들에 대해 “시리아와 똑같다”(저널리스트였던 모나의 남편은 반정부 글 때문에 7년을 징역살이하다 죽었고, 그 때문에 모나는 아들 타렉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며, 본국 귀환 명령서를 받고도 이를 무시한 채 타렉을 키웠다고, 시리아로 떠나기 전 날 밤 월터의 품에 안겨 고백한다)고 하는 모나의 탄식, 타렉이 강제 송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터가 외치는 절규 등이 그러하다.
거리, 관공서, 공항에서 인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조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던 구호 ‘미국의 힘은 이민자들로부터’도 그렇고,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마찬가지다. 모나는 “까매도 너무 까맣다”며 놀랐던 아들의 연인 자이납을 만나 아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자이납, 모나, 월터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볼 수 있는 페리를 타게 된 연유다. 그때 모나는 월터에게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본 적 있냐고. 월터는 한 번도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인공 월터는 이민자들이 미국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들, 즉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랬던 월터가 세 사람과 만나면서 국가를 대신해 사과까지 하게 된다. “저들이 나를 테러범 취급한다”며 불안해하는 타렉에게도, 추방된 타렉을 따라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한 모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월터(하필 그의 세미나 발표 주제는 ‘개발도상국 경제’란다). 국가를 대신한 월터의 사과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다.
수용소로 면회 갔을 때 유리벽을 마주하고 탁자와 가슴을 두드리며 협연을 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마음이 통했던 월터와 타렉. 타렉이 “손님이 많은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던 지하철 바로 그 공간에서 월터는 홀로 젬베를 연주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케 한다. “월터가 우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자이납의 경계심은 우려로 그쳤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월터 개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는 뉴욕대학의 케보키안 센터, 킴벨 센터, 헌드레드 에이커스 레스토랑, 그리고 타렉이 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뱀부 하우스와 줄스 비스트로, 자이납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호의 길거리 시장 등을 뉴욕의 명소가 아닌, 시민권자도 불법 체류자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안정적인 카메라(올리버 보켈버그), 음악, 그리고 연기다. 클라식과 젬베 연주가 화답하는 영화답게 베토벤의 ‘Sonata No. 21 in C Major’가 흐르는가 하면, 타렉으로 분한 하즈 슬레이만이 직접 협연에 참여한 ‘Darius Blues’와 ‘In Memory of the Dead’와 같은 재즈풍 연주가 청각을 만족시킨다.
연기 앙상블이 빼어난 것은 감독 토마스 맥카시가 배우 출신이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2005), (2005), (2006) 등에 출연해온 조연 배우 토마스 맥카시는 2003년 직접 각본을 쓴 독립 영화 로 선댄스, 산세바스티안, 스톡홀름 등의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역시 직접 각본을 쓴 와 (2011)도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중장년층의 소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세 작품 모두 톱스타가 아닌,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아카펠라 화음을 이끌어냈는데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18개의 트로피와 17번의 후보 지명을 받은 는 로버트 젠킨스에게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와 2008년 모스크바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네 명의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각본과 연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53년생 리차드 젠킨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미국판 리메이크 실패작인 (2004) 촬영장에서, 젠킨스의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후라고 한다. 리차드 젠킨스는 “나를 주연으로 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려울 텐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토마스 멕카시 감독은 "의 아이디어는 베이루트를 여행했던 나의 경험에서 가져왔으며, 한 사람의 삶이 우연한 짧은 만남으로도 영향받을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레바논 출신의 하즈 슬레이만과 미국으로 이민 온 짐바브웨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나이 거라이라 모두 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은 TV가 주 무대다.
이 두 젊은이보다 더 오래 시선을 사로잡는 기품 넘치는 여배우들이 있으니 히암 압바스와 마리안 셀데스다. 1960년, 이스라엘 나사렛 출신인 히암 압바스는 에란 리클리스의 (2004)와 (2008), 아모스 기타이의 (2005) 등에 출연해온 이스라엘 대표 여배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 등에도 출연하며 반경을 넓히는 한편, 연기 지도까지 병행하고 있는 재원이다. 단 두 장면 출연으로 위엄을 보인 마리안 셀데스는 1928년생.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의 디바’로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멋있게 늙어가고 있다. 히암 압바스가 더 나이 들면 마리안 셀데스처럼 따뜻한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나이 차이가 얼마 없는 진짜 남매를 알아채는 방법 한 가지가 있다. 원활한 관계를 위한 친절한 안부는 없고 퉁명스럽게 다짜고짜 본론부터 들어간다면 100%다. 멋진 추억여행이 있다기에 만난 김미혜(42)씨와 김대흥(40)씨는 완벽한 남매 자체였다. 화창한 봄, 꽃향기 살짝 풍기던 어느 날. 인사인 듯 인사 아닌 인사 같은(?) 직설 화법 쏘며 대화를 이어가는 남매. 이들이 만나 두서없이 나누는 이야기는 역시나 여행. 부모님과 함께여서 행복했다는 여행 이야기였다.
해군 출신 부자, 여행에 추억 더하기
“아버지! 저랑 같이 술 마시고 좀 돌아다녀요. 입원하고 나면 한 달간은 못 마시니까 여행이나 함께 하시죠?”
퇴역 군인 아버지와 배우 아들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해군에서 복무 중 잠수를 많이 한 탓에 생긴 염증으로 아버지 김성준씨가 고막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아들 대흥씨의 꿀맛 같은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술이나 마시게 여행을 가자니.
“동해안 해군 부대를 쭉 둘러보고 오자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아버지는 해군 퇴역 군인이시고 저 또한 해군으로 제대했거든요.”
군복을 벗고 다시 그곳으로 가면 어떤 느낌일까? 군부대 안까지는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근처라도 닿게 되면 그 또한 뜻깊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원도 봉평에서 메밀전병 사 먹은 것을 시작으로 정동진, 통일전망대까지 쭉 훑고 올라갔다. 아버지 김성준씨가 수술을 바로 앞둔 2012년 3월 중순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여행
여행의 행선지가 동해안으로 정해진 이유는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대흥씨가 찾아낸 빛바랜 아버지 사진. 발견 당시 기분은 소름끼칠 만큼 신기했다고 대흥씨는 말한다.
“해군에 들어가 얼마 안 됐을 때인 일병 시절, 배 위에서 사진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사진을 뽑고 난 뒤 집에서 앨범 정리를 하다가 아버지 젊을 때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게 됐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와 아버지가 찍은 사진 배경이 똑같은 거예요. 위치까지도요. 소름이 끼쳐서 ‘아버지 이거 뭐예요?’ 그랬더니 ‘그 배, 내가 미국에서 끌고 온 배야’라고 그때서야 말씀하셨어요. 시간을 초월해서 아들과 아버지가 같은 곳에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언젠가 그 배에 가서 꼭 한번 같이 사진 찍자고 약속했어요.”
“늙은이들끼리 한번 늙은이 보러 갑시다”
여행에서 바라던 최고의 장면은 퇴역 함정과의 해후였다. 강원도 강릉시 정동진의 ‘강릉통일공원’에는 아버지와 김대흥씨의 군 시절을 함께했던 같은 기종의 구축함이 전시돼 있다. 배와 만난 시대와 그 이유는 달랐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는 오랜 친구임에 분명했다.
“둘 다 군 생활을 마치고 여행 가서 퇴역 배에 다시 올라탄 거잖아요. 다 고물로 만난 거죠. 배는 고물, 아버지는 퇴역 군인, 나는 제대 군인. 이 셋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말이다. 이 무심, 무뚝뚝, 무정한 부자는 정말 꼭 같은 장소에서 사진 한번 찍자는 말을 제대로 지키고야 말았다. 단둘이 간 여행에서, 단둘이 찍은 사진이 ‘바로 그 위치’란 곳에서 찍은 단 한 장(!)뿐이란다.
“남자들이 다 그렇죠 뭐(웃음). 만나면 술 먹고. 여행으로 서로 더 돈독해진다거나 그런 거 없어요. 낮에는 운전해야 하니까 술은 못 마시고요.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젊으셔서 술 정말 잘 드셨어요. 수술 앞두고 어머니가 술 못 드시게 하시니까 제가 아버지에게 술 실컷 마실 기회(?)를 드린 것이죠. 그러고 딱 돌아오자마자 입원하고 수술하셨어요.”
여행 가서 정치 얘기는 금물
“술 먹고 아버지랑 싸우지 말걸 그랬어요.”
술이 부르는 여러 가지 사건 중 하나가 싸움. 대흥씨도 아버지랑 여행하던 중 다툼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배에 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시작해 천안함 사건으로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더니 결국 정치 얘기로 가고야 말았다. 해서는 안 될 대화였다고 회상했다.
“당연히 군인으로 한평생을 산 아버지와 저는 분명한 이견이 있었어요. 여행 가서 아버지랑 얼굴 붉힐 줄이야(웃음). 지금은 싸운 것도 웃기지만 좋은 추억이 더 쌓여서 괜찮아요. 이 여행을 계기로 영화 시나리오도 썼고요.”
여행 뒤 김대흥씨는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을 주제로 한 작품 를 집필했고 2014년 제주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 ‘가작’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솔직히 엄마와 딸은 들어본 적 있어도 다 큰 아들과 나이 든 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사실 아버지와 싸웠던 것도 시나리오에 녹였죠. 단 정치로 싸우는 거 말고 다른 것으로 상상해 썼어요.”
아버지와 단둘이 또 여행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하고 싶다고 말하는 김대흥씨.
“아버지랑 함께 군함에 올랐던 것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거예요. 아버지가 정말 많이 좋아하셨거든요.”
부모와의 여행은 좋지만 늘 고민되는 일
그러면서도 부모님과의 여행이 쉬워졌다거나 편해졌다고 선뜻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솔직히 쉽지 않아요. 부모님과의 여행은 아무리 자주 여행을 함께한다 하더라도 늘 대단한 각오가 필요해요. 그게 쉽다고 말하면 정말 제가 이상한 사람이죠. 가기 전에 항상 고민해요. 이 돈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가서 맞출 것도 많고요. 그래도 갔다 오면 잘 다녀왔다 생각하게 됩니다.”
김대흥씨는 시시때때로 사진을 찍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과의 시간을 기록한다. 여행은 부모와 가족 모두를 사진에 담기에 아주 적당한 장치 같은 것이다.
“지금 제 핸드폰에도 부모님 사진이 있거든요. 미혜 누나 결혼식 때도 북촌길을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요. 요즘 보면 대부분 부모님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많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더욱더 부모님과의 여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 누나가 여행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을 거예요. 누나는 엄마랑 대만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말 잘 놀다 왔더라고요.”
둘째 누나 김미혜씨의 꽃보다 엄마 ‘대만 편’
이제 그럼 김대흥씨 누나의 여행 이야기에 빠져볼까? 김대흥씨는 삼남매 중 막내. 둘째 누나 김미혜씨가 여행에 조예가 깊다고 귀띔해줬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하는 여행은 전문가 수준이라고. 현재 IT업계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미혜씨는 전직 여행작가다. 거짓말 약간 보태 국내외 구석구석 안 가본 지역과 나라가 없을 정도다. 지금도 호시탐탐 여행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혜씨는 가방에서 앨범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엄마와 대만 여행 갔을 때 사진을 모아서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념도 될 것 같고요. 엄마가 너무 좋아하셨어요. 제가 원래 여행을 좋아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엄마랑 여행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여행지에서 맛있는 거 먹을 때는 늘 엄마가 생각나더라고요.”
김미혜씨 가족은 제주 출신이다. 해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해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살았고 종착지는 부모님이 나고 자란 제주가 됐다. 제주에 살고 있는 부모님. 물리적인 거리가 다소 걸림돌이 되지만 엄마와 어떻게 하면 새로운 곳에 갈까 찾아보고 고민한다. 그렇게 떠난 첫 외국 여행지는 대만. 이유가 있었다.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을 재밌게 보셨나봐요(웃음). 일본이나 중국 2박 3일로 갈 수 있는 곳을 추천해드렸는데 갑자기 대만에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혈액 투석하는 어머니를 위한 맞춤 일정
미혜씨는 고민 끝에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대만을 자주 다녔고 여행 일정도 짤 수 있었지만 패키지여행을 선택한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어르신이랑 여행을 할 때는 식사와 동선이 문제거든요. 젊으면 모르겠는데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다니는 게 힘들어요. 무엇보다 식사를 특히 잘 맞춰주잖아요. 현지식과 한식을 고루 섞어주니까. 자유여행의 경우 자식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걸 눈앞에서 보시니까 부담스러워하시더라고요. 패키지는 여행 전에 돈을 미리 지불하잖아요.”
혹시나 패키지여행의 일정이 빡빡하고 버스 이동이 많아서 어머니가 재미없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매 순간 즐기고 따라다니셨다고 했다. 그리고 패키지를 선택한 이유가 또 있다. 어머니의 건강이 문제였다. 어머니 이경숙씨는 일주일에 세 번 혈액 투석을 한다. 그래서 멀리 가고 싶어도 2박 3일이 넘는 여행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월·수·금 중 하루 투석이 끝난 오후 시간에 여행을 떠나요. 제주도에서 투석하거나 서울에서 할 때도 있어요. 만약 엄마가 속초나 이런 곳에서 여행을 하시게 되면 며칠을 자야 하니까 제가 미리 그 근처 병원을 알아보고 시설이 어떤지 확인하고 예약해요. 그런데 항상 하는 일이라(웃음). 대만 갈 때는 아주 많이 기대하셨고 다녀와서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고 말씀하세요.”
여행남매, 지금도 여전히 여행 계획 짜는 중
작년 미혜씨는 엄마와의 홍콩여행 계획을 세웠다 어머니 몸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어머니의 투석은 여행을 참 힘들게 하지만 해결하고 넘어야 할 일. 그럼에도 미혜씨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짧게라도 여행을 꾸준히 다닐 것”이라고 말한다. 오는 10월 아버지 김성준씨의 고희(古稀)를 기념해 김미혜, 대흥 남매는 온 가족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 여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중심은 단연 부모님이다. 아이들은 더 좋은 곳에 많이 갈 것이기 때문에 일정 대부분은 부모님 위주로 짤 계획이다.
김대흥씨는 자신과 누나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했다. 부모와의 여행이 불편하다는 편견을 좀 깨주고 싶었다고.
“여행 가고 싶은데 불편해서 못 간다구요? 어머니 투석 챙기는 누나 보세요. 그래도 누나는 하루라도 젊을 때 엄마랑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거든요. 게다가 저희 부모님은 제주에 사시잖아요.”
돈이 꼭 있어야만, 그리고 건강해야만 할 수 있는 게 부모와의 여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터뷰 말미, 호기심이 발동해 질문 하나를 던졌다.
“누나와 동생, 단둘이 여행 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이구동성으로 단호히 대답했다.
“없죠(웃음).”
짙푸른 동해 바다. 저 멀고 깊은 곳으로 눈길이 따라가면 하늘이 시작된다. 바람과 파도소리도 경계가 흐려져 귓가에는 하나의 소리로 들릴 뿐이다. 구름 아래 뻗은 손가락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주황색 빛이 몸을 감싸 내린다. 그곳에 서 있는 기분? 이게 바로 축복 아닐까.
산과 바다, 하늘이 이어진 예술가의 놀이터
멀리 바다에서 시야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면 청록색 소나무 숲길과 다양한 형상을 한 조각상이 자유로이 서 있다. 한적한 해안도로 옆, 예술가의 숨길과 손길이 쉼 없이 스쳐지나가는 하슬라아트월드(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발길이 머무는 순간 관람객이 아닌 설치된 미술작품의 한 소재로서 존중받는 곳이다. ‘하슬라’는 고구려·신라시대에 사용됐던 강릉의 옛 지명으로 ‘해와 밝음’이라는 의미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여기에 ‘아트월드’를 붙여 ‘강릉에 세워진 예술가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강릉 출신 미술가 박신정·최옥영 부부의 예술가적 기질이 이 공간을 채웠다. 박신정 대표는 하슬라아트월드 홈페이지를 통해 “외국에 작품 전시를 다니면서 예술품뿐만 아니라 전시 장소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받아왔다”며 “모든 것이 조화롭게 화합하는 곳을 꿈꿨다”고 공간 건립 배경을 설명했다. 2003년 조각공원을 시작으로 2009년 뮤지엄 호텔(24개 객실), 2010년 현대미술관, 2011년 피노키오 박물관과 마리오네트 미술관을 순차 개관했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연간 약 15만 명이 찾는 강릉의 관광 명소다. 최근 SBS 드라마 와 영화 촬영 장소로 이용됐고, MBC 드라마 의 주요 무대가 됐다.
하슬라아트월드의 크고 작은 모든 공간이 예술가들의 작업 현장이자 방문객의 관람 장소다. 이곳은 뭐든 다중적인 감각과 의미가 부여돼 있다. 호텔일 수도, 전시실일 수도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 이곳의 특징. 보는 사람에 따라 자유로이 생각하고 상상을 즐기는 곳이다. 작가들은 이곳에 상주하면서 작품 활동도 한다. 취재를 갔던 4월 초에는 마침 최옥영 대표가 전시에 필요한 작품을 손보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최 대표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온몸에 먼지가 잔뜩’이라고 멋쩍게 웃었다. 최 대표는 “자연 자체로도 아름다운 곳과 인연이 된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면서 “예술가라 타협도 잘 못하고 부족하지만 생긴 대로 오랫동안 이곳을 지킬 것”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고래 뱃속을 걷는 피노키오처럼
하슬라아트월드는 정해진 방식은 아니지만 현대미술관, 피노키오 박물관, 마리오네트 미술관 순으로 관람한다. 현대미술관은 호텔 건물 로비에서부터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지상에서 지하로, 다시 지상으로 오르내리며 작품 감상을 하는 구조다. 동해의 파란빛과 자연광, 목조 마루, 겉치레 없는 시멘트벽을 배경으로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건물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마치 어딘가 ‘툭’ 하고 놓아둔 느낌에 시선이 간다. 감각적이고 기발함이 돋보이는 회화와 조각 작품 200여 점도 전시되고 있다.
손자·손녀의 감성자극 미술 공간이 현대미술관 다음에 이어지는 피노키오 박물관이다. 특히 박물관으로 향하는 통로가 매우 인상적이다.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형상화한 공간으로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이다. 큰 원형 통로 내부를 플라스틱 비닐로 촘촘하게 감싸놓았고, 형형색색 움직이는 조명을 설치했다. 마치 고래 뱃속을 여행하는 피노키오가 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각거리는 비닐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 웃음소리 그리고 조명이 마블링되듯 섞여 완벽한 예술작품으로 거듭나는 곳이다.
피노키오 박물관에는 피노키오 관련 작품 500여 점이 있다. 3개월에 한 번씩 작품과 전시 성격을 바꾸고 있다고. 이곳에는 꽃으로 만들어진 피노키오와 유럽에서 들여온 각양각색의 피노키오를 만날 수 있다. 디즈니 만화영화 피노키오 관람은 덤이다.
마리오네트 미술관에서는 센서로 움직이는 하슬라아트월드의 특허품 ‘마리봇’을 만날 수 있다. 사람이 가까이 오면 팔과 다리를 흔들어 몸을 움직인다.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가지고 온 특별한 마리오네트가 관람객을 맞는다.
편견 없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것
실내 관람을 마치면 조각공원 산책을 한다. 호텔 안 매표소 쪽으로 다시 돌아가 실내 계단을 이용해 조각공원 입구로 간다. 반드시 편한 신발을 준비하라. 빨리 다녀도 최소 30분이고 나지막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솔향 가득한 소나무 정원을 지나 무심히 서 있는 조각들을 보며 걷다 잠시 뒤를 돌아보시라. 자연이 내려준 예술작품(?)을 벅찬 마음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외에도 동해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바다카페와 전망대, 아이들의 체험학습장과 소똥박물관 등이 있다. 자연 속 나 자신이 작품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 하슬라아트월드 안에 있다.
하슬라아트월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다. 작품의 제목, 작가 이름 그리고 거울이다. 심지어 거울은 화장실에도 없다. 시멘트벽도 골조 외에 별다른 장치가 없다. 이 모든 것에는 편견 없이 작품을 바라보고 집중해달라는 대표의 철학이 담겨 있다. 단, 예약제로 진행되는 도슨트 시간에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품에 관한 설명이 듣고 싶다면 도슨트 설명을 들어보시라.
요즘 연일 뉴스를 통해 북한의 군사 도발적 언행과 핵 실험이 보도되고 있다. 필자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면 너무나 무섭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정책기자단에 4월 26일 경기도 포천에서 한미 연합 훈련을 한다는 공지가 떴을 때 꼭 참석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방부는 2017년 4월, 강한 국군의 위용을 과시하고 적 도발 시 강력한 응징, 격멸 능력을 시현하기 위해 한미 연합 및 합동훈련인 ‘2017 통합화력격멸훈련’을 시행했다. ‘통합화력격멸훈련’이란 한미 및 육·공군의 합동작전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이다. 1977년 6월 처음 시작하여 총 8회를 시행해온 이 훈련은 원래 5년에 한 번씩 하는데 올해는 북의 위협으로 2015년 8월 이후 2년 만에 실시하는 것이란다.
이번 훈련은 국군이 자랑하는 최첨단 무기를 한데 모아 적을 압도할 수 있는 최강의 화력을 보여줌으로써 어떠한 위협에도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우리 군의 의지와 강력한 국방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또한 우리 군의 확고한 대비 태세와 강력한 한미 연합 및 합동작전수행 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해 적의 도발 의지를 분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훈련이었다.
이제 봄날의 화려하고 아름답던 꽃의 향연은 끝나가고 연초록의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계절을 알려주고 있다. 참으로 쾌청한 날 오전 9시 반 집합 장소인 용산 전쟁기념관으로 갔다. 정책기자단은 사무관님과 14명의 기자가 함께 출발했다. 한 시간 반쯤 걸려 도착한 포천의 승진 훈련장은 휴전선 남방 25km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공개 모집한 일반 참관단과 중·고교생, 국내외 주요 인사, 외국 군인, 우리나라 군인 그리고 우리 기자단 등 각계각층의 2000여 명은 훈련장이 내려다보이는 참관석에 앉아 훈련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기대에 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하늘을 보니 사파이어 빛으로 깨끗했고 흰구름은 솜사탕 같은 모습으로 떠 있었다. 그 아래 가, 나, 다, 라와 같은 숫자로 표시된 훈련장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이제 훈련이 시작되면 평온해 보이는 저곳이 타깃이 되어 포탄과 화력으로 망가질 것이다. 아름다운 산하에서 폭격 연습이 이루어진다니 우리나라의 현실이 가슴 아프고 안타깝기만 했다.
드디어 훈련이 시작되었다. 심장을 터뜨릴 듯 굉음이 울리고 탱크에서는 무서운 화력이 뿜어져 나왔다. 날씬한 전투기와 헬기가 하늘 위에서 포탄을 명중시키는 소리도 연이어 터졌다. 그때 지금은 적에게 어떤 공격을 하고 있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드디어 적을 무찔렀다는 멘트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영화에서 봤다는 그저 신나게 볼 수 있는 광경이 계속 펼쳐졌다. 그러나 실전에 대비한 훈련 상황이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한편으로는 이런 무기로 이렇게 강력하게 대비하면 걱정 없겠다는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미동맹은 지난 3월부터 전략폭격기, 항모강습단, 핵잠수함 등 다양한 전략자산으로 북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비한 확고한 대북 억제 및 응징 능력을 과시한 바 있다. 이번 ‘통합화력격멸훈련’은 강력한 한미 연합작전수행 능력과 우리 군의 위용 및 발전상을 과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훈련이 끝난 후 아파치 헬기 등 33종의 장비 견학이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무엇보다도 국방비는 든든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아들 같은 군인들의 늠름하고 멋진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이들이 지켜주기에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가 총성에 파괴되지 않도록 전쟁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훈련과 대비를 해서 우리나라를 굳게 지켜내야 할 것이다.
즐거운 취미생활은 인생의 달달한 간식시간과도 같다. 차곡차곡 단지에 꿀을 모으듯 취미도 오래, 그리고 깊게 즐기다 보면 어느새 꿀단지가 가득 차 삶의 밑천이 되고 보람이 된다. 그러다 보니 좀 더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고, 생산성 높은 취미활동을 찾는 이가 많다. 반면에 여전히 독서, 영화감상, 등산에만 머물러 있는 이들도 있다. 아직 취미를 제대로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한 다양한 취미 관련 프로그램 가이드를 준비해봤다.
STEP 1. 취향 따라 두루두루 ‘백화점 문화센터’
무엇을 취미로 삼을지 막연하다면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를 방문해보자.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적힌 카탈로그를 쓱 훑어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몇몇 강좌가 눈에 띌 것이다. 문화, 스포츠, 예술, 생활 공예 등 일회성 프로그램에서부터, 여러 달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장기 프로그램의 경우 분기별로 신청할 수 있고, 단기 프로그램은 강좌 스케줄에 따라 별도로 참여 가능하다. 눈여겨볼 만한 3대 백화점 문화센터 주요 강좌들을 정리해봤다.
STEP 2. 내면이 차오르는 취미활동 ‘서울시 평생학습 포털’
다양한 취미활동을 맛보며 몸 좀 풀었다면, 이제 내면의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서울시평생학습포털(sll.seoul.go.kr)을 이용하면 각종 온라인 강좌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서울시민대학 강좌를 신청할 수 있다. 인문, 철학, 문학, 교양 관련 강좌 및 외국어, 취업, 자격증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TEP 3. 커리어 플러스 ‘50플러스인생학교’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하면서도 뭔가 남는 것이 없고 아쉽게만 느껴진다면 좀 더 전문적으로 구체화해볼 필요가 있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장차 제2인생의 커리어로 발돋움하길 원한다면 50플러스캠퍼스의 문을 두드려보자.
친정엄마가 필자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 오셨다. 엄마와 필자는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같은 취미를 가졌다.
엄마 집에 케이블방송을 설치한 후 요즘 우리는 좋은 영화 찾아보기에 열중하고 있다.
각각 다른 장르의 수많은 영화 중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내기란 그리 쉽지는 않다.
그래서 엄마랑 필자는 리모컨을 들고 계속 영화 제목을 돌리고 있다.
엄마는 한국영화는 보지 않으신다. 알고 보니 언젠가부터 귀가 나빠져서 자막이 나오는 외국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이유를 알고 나니 쓸쓸하고 가슴이 아팠다.
엄마는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신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이나 서양의 왕실 이야기에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엄마의 설명을 듣는 건 재미있고 영화에 대한 이해가 잘 되는 장점이 있다.
오늘은 많은 영화 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선택했다.
필자가 아는 ‘앙투아네트’는 그저 프랑스 왕실에 시집온 철없는 왕비가 극심한 사치를 부리다 혁명군에 의해 기요틴으로 사형당했다는 정도였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잘못 알려진 내용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대 배경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왕녀인 어린 앙투아네트는 동맹을 위해 정략결혼으로 어린 나이에 프랑스에 홀로 오게 된다.
할아버지 루이 14세는 나라를 잘 통치하고 있었지만, 왕실이나 귀족의 머리 모양과 의상에서 화려한 허영의 극치를 보여 주었는데 여인 의상 한 벌이면 서 너 명의 옷을 만들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앙투아네트 역의 배우가 인상이 좋고 연기를 잘해서인지 그렇게 사치만 일삼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역사가에 의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어머니의 엄명을 받고 정략으로 어린 나이에 혼자 프랑스에 도착한 그녀가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지 상상이 된다.
더구나 적국으로부터 온 왕녀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차가운 눈초리는 그녀를 더욱 움츠리게 했을 것이다.
예쁘고 고운 심성의 그녀는 잘 어울려보려고 노력하지만, 권위적인 프랑스 귀족들과 친해지기는 어려운 듯 보였다.
남편이 된 루이 16세는 앙투아네트에게 그저 예의를 지키며 대했고 사랑하지 않는 듯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실 7년 동안 그들은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허영에 눈을 돌린 것이라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르게 내려오고 있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의 편에서 이루어진다고 앙투아네트가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좋은 점이 가려지고 루머가 이어졌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로 프랑스 국민이 배가 고파 살 수 없다 했을 때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철없고 나쁜 사람이지만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었다는 문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그녀가 사치를 즐긴 것은 사실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다른 나라로 시집왔는데 남편은 모른 척하니 주변 귀족들과 어울려 사치 향락에 빠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픔에 허덕이는데 왕실은 큰돈을 물 쓰듯 하며 향락에 빠져있으니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스캔들로 유명한 목걸이 사건이 있다.
앙투아네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추기경이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엄청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샀다. 그러나 약간의 돈만 지급했을 뿐 외상으로 사서 궁궐에 자주 드나들던 백작 부인에게 왕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중간에 이 백작 부인이 다른 나라로 빼돌려 팔아먹었다고 한다.
보석상은 추기경이 나머지 돈을 주지 않자 왕비에게 직접 청구서를 보냈는데 목걸이를 본 적도 없던 왕비가 백작 부인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간수를 매수해 백작 부인이 도망을 가버리자 국민들은 앙투아네트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평소 심한 사치를 한다고 알고 있어 그녀를 믿지 않은 것이니 앙투아네트는 참으로 억울한 왕비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적자가 된 것은 왕실의 사치 허영뿐 아니라 영국과 전쟁하고 있는 미국을 돕느라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그 당시 프랑스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결국, 혁명군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감옥에서 처형 소식을 듣고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슬픈 마음이 든다.
영화는 감옥에 들어가 괴로워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정책적으로 여리고 순수했던 한 여인이 루머와 스캔들에 휩싸여 쓸쓸하고 무서운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모습이 진짜 앙투아네트였을까? 정치의 희생양이 된 거라면 너무 불쌍하고 30대 후반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죽은 그녀가 매우 안타깝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엄마와의 토론은 계속 이어졌는데 화려한 궁중 모습과 귀족 여인들의 패션을 감상해 본 것도 영화 보는 재미와 즐거움 중 하나였다.
케이블 TV에는 수많은 영화가 있어서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어쩌다 보석 같은 좋은 영화도 발견할 수 있으니 한가한 시간엔 영화 한 편 찾아보는 호사를 누려 봐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