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머니 가슴’ 위협하는 유방암
- 유방암은 다양한 암종 중 여성을 괴롭히는 대표주자로 꼽힌다. 중앙암등록본부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전체 한국인에게 발생한 암 중 5위로 많았다. 대상을 여성으로 한정 지으면 순위는 2위로 훌쩍 올라선다. 총 1만9142명의 여성이 자신의 유방암을 발견했다. 발생 시기도 문제다. 지난해 유방암의 발생 연령은 40대가 가장 많았고, 50대가 그 뒤를 이었다. 자식들이 수험생이 되거나 대학에 입학하는, 인생에서 소위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갈 때’ 발생하는 셈이다. 남편이 경제력을 잃어 부인이 가장이 되어야 하는 가정이 늘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유방암을 사회적으로도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국립암센터 부속병원 유방암센터장인 이근석(李根碩·51) 교수를 통해 유방암에 대해 시니어가 알아야 할 내용들을 들어봤다. “그것이 가장 답답한 부분이지요. 정확한 원인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최근에는 유전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발병할 확률이 높은 위험군을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이근석 교수는 유방암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유방암 발병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스트레스에서 생활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유방암의 원인은 여성호르몬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성의 일생 중 여성호르몬이 생성되는 초경부터 폐경까지의 가임기 중 여성호르몬에 노출되는 기간이 길면 유방암 확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어요. 즉 임신과 출산 횟수가 많으면 발병률이 낮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 경험이 적거나 없으면 발병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안젤리나 졸리의 선택은 옳았을까? 유방암 예방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사례가 있다. 바로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 그녀는 검사 결과 BRCA 1, 2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발견돼 유방암 발병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자 미련 없이 스스로의 가슴을 절제했다. 외모가 재산인 여배우가 유방암 예방을 위해 사전적 절제술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그녀의 선택을 전문의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이 교수는 모든 여성이 유전자 이상 검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유전자 검사를 했을 때 이상이 발견되는 경우는 5~10% 내외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검사는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어머니 등 가족 중에 병력이 있다면 검사해볼 것을 권해요.” 유전자 이상이 발견된다면 졸리처럼 사전적 절제를 하는 것이 나을까? 이에 대해 이 교수의 의견은 엇갈렸다. “유전자 이상이 발견되면 유방암이나 난소암 발병 확률이 60~70% 정도 됩니다. 난소암은 조기진단이 어렵고 증상으로 인해 암이 발견되었을 때는 상당히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아 사전 절제를 고려하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유방암은 발견이 쉬운 부위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검사만 하면 조기진단이 가능해요. 유전자 이상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미리 약을 먹거나 예방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 답답하지만 그래도 사전 절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유방암 예방의 또 다른 적 ‘비만’ 유방암 발병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 중에 비만도 있다.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간혹 가슴 크기에 따라 유방암 발병이 달라지냐는 질문도 받는데, 크기는 사실 발병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만은 영향을 줘요. 비만세포가 많으면 여성호르몬을 만들어내는 효소인 아로마타제 분비가 활성화되거든요. 그래서 시니어는 유방암 예방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열심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극단적인 식단조절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체지방 관리를 위해 채식만 고집하는 등 과격한 관리는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의들은 유방암 진단 방법 중 가슴을 압착해 촬영하는 유방촬영술 결과를 가장 신뢰한다. 초음파로도 진단이 되지만 조직의 석회화를 제대로 관찰하는 데는 유방촬영술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자가진단법을 통해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가슴은 민감한 부위이다 보니 작은 상태, 조기진단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간혹 유선의 멍울과 헷갈리기도 하기 때문에 뭐가 만져진다고 해서 모두 암이라 하긴 어렵습니다. 자가진단을 한달에 1회 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표적치료제 만병통치약 아냐 유방암 치료는 일반적인 암 치료 과정을 그대로 따른다. 암세포를 절제하고, 항암제를 쓰는 화학적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암의 크기에 따라 방사선 치료는 생략되기도 한다. “흔히 유방암 수술이라 하면 가슴 전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데 최근에는 의료기술이 발전해 조기진단이 늘면서 부분절제술도 많아요. 이런 경우 수술 후에 재건술을 하지 않아도 수술 전과 외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어요. 또 암의 크기가 커서 전절제 후 재건술을 할 경우 국민건강보험을 통한 치료비 지원이 되어 부담도 많이 줄었습니다. 다만 유방암의 재발 가능성은 치료 후 2~3년 동안 가장 높기 때문에, 2년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재건술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최근 ‘만병통치약’처럼 관심을 받고 있는 표적치료제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전체 유방암 환자 중 표적치료제에 효과를 보이는 환자는 20%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Her-2 양성 유방암 환자에게는 효과 있는 치료제예요. 예전에는 다른 유방암에 비해 암세포 증식이 빨라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표적치료제 등장 이후에는 치료가 한결 쉬워졌어요. 물론 이 약만 투여하면 낫는 게 아니라 다른 치료도 병행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 약의 등장으로 환자의 생존율이 한결 높아졌습니다.” 가족의 보살핌 중요해 이 교수는 암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환자의 마음가짐과 가족의 도움이라고 말한다. 간혹 유방암 치료를 받고 나면 남편이 아내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심한 경우 외도로 이어져 가정문제가 발생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이전처럼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남편과 부인 모두 꺼리지 말고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실 것을 권합니다. 정서적으로도 좋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 2018-08-06 08:47
-
- 도심 속 공원길 걷기
- 얼마 전 연트럴파크 길 걷기에 참여했다. 연트럴파크라는 도로명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와 연남동을 합성해 지어졌다고 한다. 2011~2016년에 걸쳐 완공된 전체 6.3km의 옛 경의선 숲길 중 가장 긴 연남동 길이다. 약 두 시간에 걸쳐 경의선 숲길을 지나고 홍제천을 따라 걷다가 월드컵 평화공원까지 걸었다. 1905년 첫개통 했다는 옛 경의선은 현재는 공항철도 및 복합 전철로 건설되면서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철길 상부를 50년간 무상 임대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길 주변으로 카페나 편의, 위락시설은 좋은데 경관 훼손이나 고성방가 등의 소음을 규제할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최근 떠오르는 길이 또 하나 있다.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1971년도에 숙명여대에 입학했으니 통학버스 안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길이기도 하다. 1024m의 이 길은 2015년에 철거됐는데, 지난해 5월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7017’은 1970년에서 2017년의 시점을 의미하고 ‘서울로’는 서울로 향하는 사람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울로 7017’은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인근 하이라인공원 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알려졌는데, 총괄 디자인 기획을 한 세계적인 건축·조경 디자이너 비니 마스(Winy Mass, 네덜란드)는 오히려 하이라인 공원길과의 차별성을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뉴욕과 서울의 도시 환경을 비교할 때 차별성을 갖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이라인 공원길은 1934년에 맨해튼 중심부 20개의 블록을 가로지르며 운행되던 2.33km의 고가 화물 노선이었으나 철도 업이 쇠락한 1980년, 철로도 완전히 중단되어 20여 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뉴욕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하이라인 친구들’이라는 시민단체와 하이라인공원길 건설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2009년 완공했다. 아름다운 식물과 벤치 등 디테일한 디자인으로 조성된 길은 허드슨강의 풍광을 배경으로 마천루를 비롯한 뉴욕의 건축사를 살펴보는 교육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뉴욕 맨해튼의 도시 설계자 로버트 모지스는 “뉴욕 도시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5년 후에는 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라 당부한 바 있다. 그 공원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센트럴 파크’인 것이다. ‘연트럴파크’와 ‘서울로 7017’도 오랫동안 훼손, 오염되지 않고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로 남아 주기를 바란다.
- 2018-07-27 19:39
-
- 일본 고전 영화② 섬마을 선생님과 12명의 학생 이야기
- 어느 나라나 제대로 알려면 구석구석 둘러봐야겠지만, 일본은 한촌까지 볼거리를 많이 준비해둔 완벽 여행 만족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카마쓰시도 그러한데, 최근 우리나라에선 배를 타고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둘러보는 여행 상품이 인기다. 영화 팬이라면 다카마쓰시에서 배를 타고 쇼도시마를 찾을 일이다. 일본 흑백 고전 ‘24개의 눈동자’를 찍은 ‘24개의 눈동자 영화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극 중 미사키노 분교장으로 나왔던 나에바 소학교 다노우라 분교에선 영화 촬영 당시의 책상과 풍금, 학생들 작품을 볼 수 있다. 소설 ‘24개의 눈동자’ 원작자인 쓰보이 사카에 문학관, ‘24개의 눈동자’만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 주연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 갤러리, 추억의 알루미늄 식기에 담긴 튀김 빵과 카레 수프가 나오는 급식 세트도 즐길 수 있다. 영화마을은 쿠사카베항과 가깝지만, 반대편 도노쇼항 입구에도 쓰보이 사카에 동상과 주인공들의 조형상이 있다. 영화는 1928년부터 1946년까지, 작은 섬마을 여교사와 12명의 학생이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과 전쟁으로 인한 비극을 그린다. 일본인에겐 소화 3년부터 소화 21년의 기간으로, ‘그리운’ 쇼와시대에 해당된다. 시대 배경만 그리운 게 아니라, 사제 간 진심어린 교류가 감동적으로 그려졌기에, ‘24개의 눈동자 영화 마을’은 교육의 원점 장소로서 전국의 교직원을 비롯한 방문객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28년, 세토나이가이에서 두 번째로 큰 섬 쇼도지마의 미사키노 분교에 이제 막 대학을 마친 오이시(다카미네 히데코) 선생이 부임한다. 양장을 하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선생은 이제 막 입학한 열두 명 제자의 이름과 별명을 외우며, 벚꽃 아래서 기차놀이도 하고, 아름다운 동요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개구쟁이 학생이 파 놓은 모래 구덩이에 빠져 다리를 삔 선생은 치료 차 학교를 떠나게 된다. 아이들과 단체 사진을 찍으며 “본교에서 너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라며 선생과 제자들은 이별을 맞이한다. 마침내 4학년이 된 학생들은 본교로 가서 오이시 선생의 반이 되고, 다카마쓰시로 수학여행을 가는 등, 행복한 추억을 쌓는다. 그러나 가난과 전쟁은 다감한 선생님과 천진한 제자를 평화롭게 공부할 수 없게 만든다. 식당으로 일하러 가는 여학생들과 징집되어 나가는 남학생들. 오이시 선생은 군군주의를 강요하는 학교에서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며 학교를 떠난다. ‘24의 눈동자’는 섬마을의 평온한 삶을 파괴하는 가난과 전쟁의 상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회복되는 인간성을 담백하면서도 눈물겹게 그린다. 다리를 다친 선생을 위문하러 집에 간 아이들에게 오이시의 어머니는 우동을 내어준다. 다카마쓰시엔 사누키 우동 순례 버스가 운행될 정도니 말해 무엇 하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우동을 먹어본 아이들, 학부모들은 고맙다며 농산물로 보답한다. 오이시 선생은 항구 우동 집에서 일하는 아마츠를 우연히 만나 눈물짓는다. 아마츠가 작별 인사를 하러 달려 나오다 급우들에 둘러싸인 선생을 보고 골목에 숨어 운다. “수학여행 가는 대신,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기로 했어요”라던 고토에는 식구들마저 외면하는 가운데 폐병으로 죽어간다. 오이시 선생은 “내 앞에서 실컷 울어라”라고 말할 뿐이다. 패전 이듬해, 오이시 선생은 다시 분교로 돌아와 옛 제자의 아이들 담임이 된다. 부모, 형제들과 꼭 닮은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감회에 젖는 오이시. 세상 떠난 제자들 무덤을 찾아 꽃을 놓는다. 살아남은 옛 제자들은 환영회를 연다. 전쟁으로 눈을 잃은 제자가 선생과 찍었던 단체 사진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다 보여요” 한다. 오이시 선생은 옛 제자들이 선물한 자전거를 타고 씩씩하게 분교로 출근한다. 미모와 연기력이 빛나던 29세에 ‘24개의 눈동자’에 출연한 다카미네 히데코. 대학을 막 졸업한 초임 여교사에서 세 아이를 둔 미망인까지를 연기하며 당시 일본 열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물론 영화는 지금 보아도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명작이다. 1929년 데뷔한 아역 배우 출신으로 셜리 템플과 비교되며 일본 영화 팬을 울린 이래, 쉼 없이 영화에 출연한 다카미네 히데코.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 기노시타 게이스케와 같은 일본 영화계 거장들 대표작의 히로인이었던 연기력 빼어난 배우. 하라 세츠코, 다나카 키누요, 쿄 마치코와 함께 일본 영화 황금기를 대표했던 여배우. 1979년 은퇴 후 수필가로 활동하다, 2010년 12월 28일 86세에 도쿄 병원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영화 속 오이시 선생과 섬마을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매를 들기 일쑤였던 엄혹한 교사만 겪었던 시니어에겐 낙원의 나날과 다름 없다. 정말 저렇게 다정하고 생각 바른 스승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왜 스승의 날에 찾아뵙고픈 선생님이 없는 것일까, 저런 선생님이 단 한 분만 계셨어도 내 인생은 따뜻했을 텐데, 설움에 겨워 자문하게 된다. 한 분의 선생님과 열두 명 학생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에 빗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 2018-07-19 08:57
-
- 바삭바삭한 여자, 배우 박정수가 만난 딜레마
-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 2018-07-16 15:14
-
- 시집간 딸의 임신
- 외출하고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당신 어제 혹 좋은 꿈을 꾸지 않았느냐”고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얼굴이다. “아니 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 무슨 좋은 일 있어?” 하고 물어보았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고 통 말할 생각을 안 한다. 표정으로 봐서는 좋은 일이 분명한데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말하라 독촉하면 재미있어서 더 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관심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이 특효약이다. “알았어!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하면서 별 흥미 없어 했더니 그제야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시집간 딸이 전화가 왔는데 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첫 외손자가 지금 4세인데 둘째 소식이 없었다. 요즘 시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 분위기라 자신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딸의 임신이 신기한 일도 아니고 깜작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냥 무덤덤했다. 오히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할 딸이 걱정되었다. 요즘은 결혼이 늦어지다 보니 여지도 30세 넘어 결혼하는 추세다. 임신한 딸의 나이가 35세인 점도 마음이 쓰인다. 또 입덧을 심하게 하는 편이어서 첫아이를 낳을 때 고생을 심하게 했는데 잘 견뎌낼지도 걱정되었다. 더구나 큰애도 돌봐야 하는 부담도 있다. 천금 같은 내 딸이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서 딸이 말하기를, 입덧이 시작되면 엄마가 자기네 집에서 기거하면서 큰애도 봐주고 몇 달 고생을 해달라고 했단다. 친정엄마로서 입덧하는 딸을 돌봐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친정집에 와서 몸조리하면 좋을 텐데, 어린이집에 다니는 큰놈 때문에 아내가 딸네 집으로 출장을 가야 한다. 그래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며느리가 내년에 복직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친손녀랑 그 밑에 두 살 터울의 동생들 둘을 우리가 또 돌봐줘야 한다. 아들네와 딸네 집은 수원과 일산이어서 먼 거리다. 이런 점을 감안해 양쪽 집을 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우선은 며느리의 복직 전에 딸애의 입덧이 끝나야 한다. 그 후에는 아내가 일산 아들네로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면 된다. 머리를 굴려가며 방법을 찾아보니 그럭저럭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빈틈없는 계획이다 보니 누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아이들 돌보는 일에 있어서는 예비군이다. 필자가 직접 아이 돌보는 일의 일선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할머니는 찾아도 할아버지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아무리 인기가 없다 해도 감당할 수 없는 큰일이 생기면 5분대기조처럼 뛰어나가야 한다. 전에도 필자가 자주 아이들 돌보는 일에 나섰다. 운전하는 며느리가 교통사고를 내서 운전을 못하게 됐을 때도 대리운전을 해줬고 아이들 돌봐달라고 SOS를 보내오는데 아내가 마침 다른 일로 바쁠 때도 필자가 뛰어갔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직은 신체건강하게 버티고 있어 친손자 외손자 양육에 개입하고 자식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이 다행이고 사는 보람이다. 큰손녀가 유아원에 다닐 때는 아기 같더니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부쩍 어른처럼 행동했다. 막내 놈들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봐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럭무럭 빨리 잘 자라라. 한 다리 건넌 내 새끼들아!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든든하게 보살펴줄게! 큰손녀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집에 왜 안 오세요? 오셔서 우리를 돌봐주셔야죠.” 그 말이 보약처럼 힘이 된다. “암 돌봐줘야지!” 이 맛에 산다.
- 2018-07-09 11:43
-
- 시간을 돌고 돌아 소설가 되다, 한보영 MBC 전 복싱 해설위원
- 만나고 보니 꽤나 독특한 삶이다. 마치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듯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완벽하게 전문적이고 색다른 인생담. 전생과 현생을 말하는 듯 세대를 넘나드는 사건 전개. “내가 무슨 인터뷰할 게 있어”로 시작했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치열한 역사 드라마를 고스란히 감상한 느낌이랄까? ‘선데이서울’ 전 방송사 출입기자이자 MBC 전 복싱 해설위원, 등단 1년 차 신인 소설가 한보영(韓寶榮·82) 작가를 만났다. 대한민국 1960~70년대를 주름잡았던 별들의 야사와 링 위의 전쟁이 정신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보영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시 중구 서울신문 사옥 내 한 커피숍. 세련된 모습으로 단장한 서울 중심부이지만 옛 시절부터 발을 디뎌온 기자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트가 숨어 있다고 했다. “한국체육언론인회가 이 근방에 있어요. 체육기자 출신 모임은 여기에서 하거든. 전 직장인 서울신문 사우회도 여기에 있고, 자주 가는 기원도 이곳이니까 벗어나지 못해요. 아무래도 내가 가는 단골집도 많고요. 교통편도 좋고 나는 광화문이 편해요.” 한보영 작가는 매일 아침 일찍 배낭 하나 메고 되도록 빨리 집을 나선다. “생활에도 리듬이 있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밋밋한 건 딱 질색이거든. 그러니 집에만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벌어 글을 쓰고 오랜 지인들 만나 얘기하고 또 짬을 내서 글을 쓴다. 한보영 작가는 작년 4월 손자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단편소설 ‘너와 나의 끈’으로 월간 문예지 ‘조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이후 꾸준하게 단편소설을 문예지에 게재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삶을 그려가는 중이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작년에 4편을 발표했습니다. 제가 등단했던 ‘조선문학’ 6월호에 작품 하나가 나왔고. 7월은 한국소설가협회에서 나오는 월간지 ‘한국소설’에 신작이 나옵니다. 올해 말까지 한 5개 정도 쓰고 내년 초에 지금까지 썼던 단편소설을 묶어서 단행본으로 내려고 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틈틈이 글을 쓰고 있는 신참내기 소설가. 참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정성들여 월간 문예지에 게재를 해도 원고료 주는 곳이 많지 않다. 돈을 염두에 두고 이 일을 했다간 한 글자도 못 쓸 것이 빤하니 금전적 보상은 단념하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지고 호흡을 고르면서 써야 돼, 쉬엄쉬엄. 그 대신 뭐 시간이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조금씩 쓰다가 나중에 싹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그럽니다. 예전에 한 번은 컴퓨터 조작을 잘못해서 다 없어지는 바람에 처음부터 새로 썼다고. 얼마 전에 발표를 했는데 디테일한 점은 좀 모자라는 대신 구성은 오히려 마음에 들더라고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거죠. 글은 쓸 때마다 기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뭐든 마음에 들면 들이대!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전주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한보영 작가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문제는 한보영 작가가 운동에만 몰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관심 분야가 생기면 일단 발부터 담가보기를 반복했다. “배구부에 있을 때 트럼펫에 관심이 생겨서 밴드부에 들어갔더니 한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가 왜 여기에 있냐’며 저를 쫓아냈습니다. 문예부에도 들어갔었어요. 글재주가 있었으니까요. 교지 만들 때 일조했습니다. 대부분 운동부라고 하면 수업시간에 안 들어가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중학교 3학년 때 교실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어요. 운동만 해서 그런지 어느 순간 배구가 싫었습니다.” 배구도 곧잘 해 서울 소재 대학에서 배구선수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입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대학교를 안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학한 곳이 바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였다. “글을 제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갔습니다. 김동리 선생과 서정주 선생이 저희 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한보영 작가는 특히 김동리 교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신이 쓴 습작을 봐주십사 부탁했다. ‘선데이서울’ 기자도 MBC 복싱 해설위원도 아닌 어린 나이에 소설가로 데뷔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를 중요한 순간이었다. “한창때 실존주의 이론에 빠져 있었어요. 젊은 패기에 선생님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김동리 선생이 저와 별 상의 없이 습작에 관한 심사평을 ‘현대문학’에 내신 거예요. 문장과 구성은 다 좋은데 주제와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더라고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김동리 선생 취향과 너무나 동떨어졌던 것이죠.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본인과 주제가 잘 맞지 않으니 다른 소설가를 소개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말에 충격받아서 두 번 다시는 소설 안 쓰겠다고 하고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때는 어깨에 왜 그렇게 힘이 많이 들어갔는지.(웃음)” 당시에 만약 김동리 선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더라면 한보영 작가의 삶은 어떻게 전개가 됐을까? 대작을 쓰는 작가로 거듭났을까? 소설에 대한 희망을 접고 선택한 한보영 작가의 첫 번째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경기도 포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사무치도록 좋았지만 몇 개월 지나자 공포감이 엄습했다. 눈이 내렸다 하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월급은 보리와 쌀 반 가마니. 그나마 현찰로 지급되는 돈은 학교운영회에서 거친 회비를 조금 얻어 쓰는 정도였다. 하숙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힘든 시간을 좀 이겨내나 싶었을 때 영국 민요 ‘오 데니 보이’를 여학생들에게 가르치다 교장에게 발각됐다. 노래 속에 사랑 얘기가 들어 있다는 게 화근이었다. 왈가왈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송사 출입기자로 방송가를 누비다 “나는 잡지 출신이야. 신문사 출신이라는 말 잘 안 해.” ‘선데이서울’이 ‘서울신문’에서 나오는 주간지였고, 복싱 해설위원으로 모습을 바꿀 때도 ‘서울신문’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인물검색을 하면 전 신문인으로 뜬다. 하지만 한보영 작가는 우리나라 초창기 잡지를 꿰고 있는 잡지사 기자 출신이 맞다. 초등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들어간 곳이 월간 ‘여성계’였다. 피란 시절 대구에서 창간했던 월간 ‘여성계’를 시작으로 ‘교육평론’이라는 잡지사에서도 일했다. 책이 나오는 달만 월급이 나오는 상황인지라 돈도 없고, 잘 챙겨먹지 못해 급기야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김동리 선생이랑 싸우고 소설도 안 써지니까 위장병에 걸렸던 것 같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밖에서 밥을 사 먹다 보니 나아질 기색이 없었어요. 결국 위장병이 있는 상태로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몸이 좋아지더라고요. 건강을 되찾고 난 다음 군에 있는 동안 프리랜서로 글을 꽤 썼습니다.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낫다 싶을 정도였죠.” 제대 후에는 당시 인기 잡지였던 ‘아리랑’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방송사 출입 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부나 문화부 기자로 방송사에 드나드는 기자를 말한다.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탤런트와 개그맨, 성우를 매년 정기적으로 뽑았다. 특히 탤런트의 경우 소속 방송사의 드라마와 프로그램에만 등장할 수 있었다. 방송사 소속 아나운서와 같다고 보면 된다. 심은하, 장동건을 보려면 MBC를 찾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다. 방송사 출입기자는 연기자와의 끈끈한 인맥과 유대감은 물론이고 방송사 관계자와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하는 힘든 분야 중 하나였다. “‘아리랑’은 글씨를 세로가 아닌 가로로 표기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연예인 주변 이야기,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아낸 세련된 책이었죠. ‘아리랑’에 있을 때 배우 신성일과도 친해졌습니다. 그때는 방송사 소속 탤런트들이 조금 딱했습니다. 기획사를 차리는 게 꿈이었는데 잡지 사업에 발을 들이고 말았습니다. 뜻대로 안됐죠.” ‘아리랑’에 있는 동안 음악 전문지를 만들어볼 생각에 ‘청춘’이라는 소규모 잡지를 인수했다.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 잡지로 만들려고 했는데 1970년대 초 유신시대가 도래해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두 달여 공을 들였지만 사회 상황과 잡지 성향이 맞지 않아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큰 손해를 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남들처럼 술 먹고 울분을 토하고 그런 성격이 또 제가 못됩니다.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산업경제신문’에서 연예부 기자로 오란 연락을 받았습니다. 물불 가릴 것이 없었어요.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직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나왔거든요. 그곳에 있다가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주간 시민’으로 옮겼고 그다음이 ‘서울신문’ 대표 매거진인 ‘선데이서울’이었죠.” 한보영 작가가 방송사 출입기자로서 활약하고 성과를 낸 매체는 ‘선데이서울’이다. 본격적인 방송계 출입기자 삶을 산 시간이 이때였다고도 자평했다. “기자는 많은데 방송사를 제대로 찾아다니는 기자가 의외로 적었습니다. ‘선데이서울’에 있을 때는 정말 탤런트, 연예인들 일에 제가 많이 좌지우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대면 쉽게 알 만한 연예인 사생활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과거 연예사를 들춰내는 종합편성채널 TV 프로그램 출연이 잦았다. 한 여성 탤런트는 한보영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선생님, 그런 방송에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라면서 넌지시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요새는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저보다 순발력 있는 다른 사람을 구해보라며 거절해요. 누구 부탁 때문이 아니고, 그게 좀 더 방송이 살 것 같아서죠.” 복싱 해설위원으로 다른 삶을 살다 방송국 출입기자로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을 두루 섭렵하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어쩌다 돌연 스포츠 분야로 눈을 돌려 복싱 해설위원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됐을까. “1972년 3월 ‘선데이서울’에 방송사 출입기자로 들어가 오랜 시간 연예계 기사를 썼습니다. ‘서울신문’에서 ‘주간스포츠’를 창간해 왔다 갔다 하면서 복싱 관련 기사를 쓰다가 1980년대 초에 ‘주간스포츠’로 완전히 옮겨가 복싱 담당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복싱 인기가 정말 대단했어요. 그런데 복싱 담당기자가 자꾸 나가버리니까 하루는 국장이 불러서 복싱을 맡으라니 어쩌겠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배우와 탤런트를 위한 기획사를 차리는 것과 방송 극본을 쓰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다. 스포츠 분야로 가라는 말에 회사를 관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지만 국장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회사니까 복싱 담당을 하다가 연예부 쪽에서 일하라 하면 그쪽으로 가서 취재했죠. 나중에는 스포츠 쪽에 남기로 했습니다. MBC와 해설위원 이야기도 된 상태였고요.” 한국 복싱 전성기, 최고의 명승부에는 늘 MBC 복싱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던 한보영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뒤따랐다. 방송사 출입기자에서 복싱 담당기자, 이를 바탕으로 복싱 해설위원으로 살아온 삶. 기간이 좀 길어서 그렇지 듣고 보니 납득이 가는 인과관계가 있다. 새로운 격변이 아닌 삶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뭐든지 억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그렇게 순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최전성기 복싱 해설을 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남들 은퇴하는 55세에 종이매체와 이별하고 MBC와 해설위원으로 정식 계약을 맺었습니다. 70에는 고희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었고요.” 복싱의 인기가 사그라지면서 방송 기회도 점점 줄어들었다. 2003년 MBC와계약을 만료하고 MBC스포츠로 옮겨 2007년까지 간간이 복싱 해설을 했다. “그런데 지금도 저는 복싱 해설을 합니다. 어디서 하는 줄 아세요? 유튜브에서요. 오픈게임부터 끝까지 제가 도맡아서 합니다. 훨씬 힘든 대신 신바람은 납니다. 복싱 해설도 내 인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일이죠. 1년 차 소설가이면서 현역 복싱 해설위원 입니다.” 한참 복싱과 관련한 얘기를 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듯 소설 이야기로 돌아온다. 최근 집필한 ‘친부(親父)의 꿈’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전설의 파이터 김득구 아들을 상상하며 썼다고 했다. “김득구 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면 34세쯤 됐을 거예요. 그런데 왜 복싱에 데뷔하느냐면 말이지….” 이야기 보따리가 온몸 구석구석 한아름이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3시간 꼬박 앉아서 참 많은 얘기를 끄집어낸다. 아무리 봐도 적당한 시기에 자기 진로를 잘 선택했다. 지금이 딱 소설 쓰기 좋은 나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김동리 선생과의 일화는 새삼 한보영 작가 인생의 중대한 복선이 된 것만 같다. 그 후 방송계와 복싱계를 누비며 쌓아놓은 기억은 소설가 한보영에게 좋은 자양분이 됐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원래 바라던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을 한보영 작가에게 한마디 건네고 싶다. 언제나 브라보 유어 라이프.
- 2018-07-02 10:17
-
-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대 그리움에'
- 중학교 2학년 여름, 사춘기라서 감성에 젖어 있을 때였다. 원고지를 묶어놓고 토요일이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지도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감정에 취해 생각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다. 그마저도 여름 한 계절밖에 쓰지 못했다. 3학년 때, 작문시간에 글짓기를 해서 제출했는데 작문 선생님이 부르셨다. 영문도 모른 채 갔더니 이미 여러 아이가 와 있었다. 작문 선생님은 시인이신데, 우리에게 시를 한 편 지어내라고 하셨다. 당시 최종 선발된 아이들이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게 됐다. 거기서 시 부문 장려상을 탔다. 내 평생에 시(詩)를 써서 받은 상장은 이 장려상이 유일하다. 상을 받았는데도 그 후로 ‘시’에 대한 건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우리 세대는 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을 봐서 합격해야만 다닐 수 있었다. 고교입시가 코앞이라 시에 대한 건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론 줄곧 바쁘다 보니 내가 시를 써서 상을 탔다는 것도, ‘시’라는 것도 모두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요즘은 지난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지나온 날을 뒤돌아보면 후회만 남는다’라고 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살아오는 동안,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을 하나둘 놓쳐가며 육십 평생을 살아왔으니 그동안 소중한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잃어버렸겠는가! 귀한 사람들을 놓친 것이 후회스럽다. 그때 꽉 붙잡았어야 하는 건데 남녀가 유별하다해서 귀한 사람을 놓칠 때도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우정을 위해 떠나보냈지만, 결국 그 친구도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인품 좋고 훌륭한 선생님을 잃어버린 것도 한없이 아쉽다.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도 품이 넓은 사람이 많았는데 나의 미련함 때문에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지난 세월 놓치고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은데, 가끔 그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는 한없이 미웠던 사람조차도 이제는 그리운 얼굴이 되어 내게 다가온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옛날 시를 쓰던 내가 생각났다. 문득 놓치고 잃어버린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시를 쓰고 싶어졌다. 시인도 아니고, 시도 중학교 때 이후로는 처음 써 보지만, 단지 그들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쓰게 된 시가 ‘그대 그리움에’라는 시(詩)다. 그대 그리움에_김영선 그대 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인 줄 알았더니 불어오는 바람 소리였습니다 그대 내게 오는 발자국 소리인 줄 알았더니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였습니다 그대 그리움에 창밖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에 그대 얼굴 감춰 두었습니다 그대 그리움에 밤하늘 반짝이는 별빛 속에 그대 이름 새겨 두었습니다 오늘도 그리움에 감춰둔 그대 얼굴 몰래 꺼내어 봅니다 새겨둔 그대 이름 살며시 불러 봅니다
- 2018-06-22 10:55
-
- 내 나라 문화유산 답사기② 전남 나주 향교(鄕校)
-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이다. 지방에 세운 향교는 국가가 유교 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켰다. 교육의 기능 외에도 지방 단위 유교적 행사를 치르는 문화기능을 담당했다. 또,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 시험을 통과하여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하는 정치기능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나주 향교(사적 제483호)는 나주읍성의 서쪽 성문 밖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가 있어 동네 이름이 교동(校洞)인데 전국에 향교가 있는 많은 곳 또한 교동(校洞)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교육시설을 크기로 따지면 나주 향교가 성균관 다음으로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大聖殿)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 후기 향교 건축을 대표할 만큼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나주 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년) 처음 지어져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강당을 앞에 두고 사당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 구조와 달리 나주 향교는 앞에 사당을 두고 뒤에 강당을 둔 전묘후학(前廟後學)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제는 교육의 기능을 하지 않으나 정기적인 제향을 올리거나 방문객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문성왕(文聖王)으로 부르는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사성(四聖)과 안연, 자공, 자로 등 10명을 일컫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주돈이, 정이, 장재 등 송조육현(宋朝六賢)과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등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를 함께 모셔 정기적인 향사(享祀)를 올린다. 나주 향교의 주춧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놓았는데, 이는 검박한 유교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꾸밈이다. 특히 연꽃이 불교적인 무늬임을 감안하면 이곳이 전에는 사찰이었거나 근처의 절집 주춧돌을 가져와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향교 돌담 밖으로는 여러 개의 비석을 모아 놓았다. 관아에 있는 비석들은 대부분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공덕비이다. 이곳 향교에는 학문을 펼치는데 애써주심에 감사한다는 흥학불망비(興學不忘碑)들이다. 전국 군(郡) 단위로 대부분 향교를 보유하고 있으나 나주 향교 대성전은 서울의 문묘와 전북 장수향교, 강원도 강릉향교 등과 함께 웅장한 규모로 손꼽히는 건물이다. 대성전 벽에 바른 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왔다고 할 만큼 자부심을 갖는 곳이다. 그밖에도 근처에는 나주읍성 4대 성문중 서쪽 문인 서성문(사적 제337호)이 있다. 관아는 남아 있지 않으나 목사(牧師)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금학헌(琴鶴軒)과 관아 정문 정수루(正綏樓) 등이 있어 시간을 내어 둘러볼 만하다.
- 2018-06-18 14:58
-
- 나카가와 히데코의 폭신 달달하고 왁자지껄한 요리 이야기
- 구르메 레브쿠헨(Gourmet Lebkuchen). 나카가와 히데코(中川秀子·51)의 요리교실 이름이다. 연희동 주택가 골목을 헤매다 한참을 헉헉대며 올라가다 보면 2층 집 파란 대문이 보인다. 요리 스튜디오가 있는 그녀의 집이다. 이곳에 드나드는 수강생만 한 달에 200여 명, 대기자도 수백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에서 셰프의 딸로 태어나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산 지 20여 년. 일본어 강사, 번역가, 기자로 활동했던 그녀가 지금은 요리를 가르친다. 순전히 사람들과 만나 음식을 나누고 대화하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다. 두서없는 수다와 한숨, 투정까지 레시피가 되는 요리교실이 있다. 교실 주인은 나카가와 히데코. 우리말 독음이 ‘중천수자’라서 종종 ‘수자 언니’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연희동 자택에서 10여 년째 요리교실 ‘구르메 레브쿠헨’을 운영하고 있다. ‘Gourmet’는 프랑스어로 ‘미식가·식도락가’라는 의미이고, ‘Lebkuchen’은 세상에 다양한 맛과 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준 독일 과자 이름이다. 발음하면 구름이 연상되는 이 폭신 달달한 간판을 달고 그녀는 거의 매일 파티를 하듯 수강생들과 만난다. 무슨 비장의 무기라도 있는 걸까. 1, 2년을 기다려가면서까지 그녀의 요리교실을 탐내는 사람도 많다. 첫 연락이 됐을 때 그녀는 영국에 있다 했다. 너무 바빠 보여 거의 포기 상태로 그녀가 출판한 책들을 읽으며 귀국 날짜를 기다렸다. 요리교실을 통해 만난 수강생들과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다 보니 사람들이 왜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먹방 시대, TV만 켜면 수만 가지 레시피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카가오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의 요리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바로 ‘식탁 위의 이야기’. 그녀는 각국의 특별한 요리를 가르칠 때마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스페셜(?)한 인생 이야기도 식탁 위에 올린다. 모두의 스토리가 요리의 가장 빛나는 레시피가 되는 시간이다. 요리 배우러 와서 위로받고 마음 치유까지 하고 간다는 입소문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요리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마음을 녹이고 흔들어놓는 재주도 있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돌아오기 전 다행히 시간을 비워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속한 날 그녀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얼마쯤 헤매어도 좋을, 옛 정취가 살아 있는 길이었다. 도자기에 문어가 그려진, 그녀의 작은아들이 만들어줬다는 요리교실 간판은 2층 집 파란 대문 기둥 위에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연희동의 ‘킨포크’ 구르메 레브쿠헨 수강생들은 요리를 배우러 왔다가 그녀의 음식 철학에 반해 아예 친구가 되어버리곤 한다. 요리도 요리이지만 그녀에게 푹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교실은 어느새 연희동의 킨포크(kinfolk)로 불리고 있다. “저는 셰프라는 호칭보다는 요리 연구가로 불러주는 게 좋아요. 푸드 디렉터, 연구라는 말에는 문화적, 인문학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잖아요. 요리 기술만 가르쳤으면 힘들어서 벌써 그만뒀을 거예요. 스토리가 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사람들과 만나 요리하고, 먹고, 마시고, 수다 떨고, 웃고, 눈물 콧물 빼는 시간을 사랑해요. 그 시간 속에 우리가 귀하게 여겨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녀는 식재료를 사러 자주 들르는 ‘사러가 쇼핑센터’, 빵집, 도자기 공방, 한의원 등 동네를 오가며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오래 기억한다.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고마워서 감동하고, “밥 먹었어? 우리 밥 먹자!”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지인이 운영하는 화랑에도 괜히 들러보곤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도무지 사는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요리는 사랑이고 우주다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 요리 셰프였던 아버지를 따라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지냈던 그녀는 코즈모폴리턴으로 살기를 원했다. 1994년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 한국 남자를 만나 두 아이를 낳고 벌써 24년째 한국에서 지내고 있지만, 그녀만의 철학을 실천하는 ‘구르메 레브쿠헨’ 안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지금은 요리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지만 어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의 직업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현재 85세인 아버지는 프랑스 요리계의 대부 무라카미 노부오(村上信夫)의 제자가 된 후 78세까지 주방에서 일했다. “부모님은 제가 대학에서 요리 관련 공부를 하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 일이 싫었어요. 가족과 함께할 시간도 없이 하루 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모습만 봤거든요. 일본대사관 전속 요리장으로 있던 아버지가 독일에서 돌아와 고향 사도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는데 갑갑하게 섬에 갇혀 사는 이유가 다 아버지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 마음에 어느 날은 화가 나서 ‘나는 정장을 입고 매일 출근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야!’ 하며 대들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어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그녀는 그러나 20대에 동독과 스페인에서 지내면서 요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이방인의 심정을 헤아려 요리를 해주고 같이 나눠 먹는 친구들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느꼈고, 음식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그 관계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로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친구들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도 보고 싶었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도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점점 중독(?)되어갔다. 결혼해서 살던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가 언제든 바비큐 파티를 하고 싶어서였다니 참 대책 없이 귀여운 여인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 경비실 인터폰이 울린 적도 있어요.(웃음)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죠. 마침내 단독주택을 샀을 때 마치 신한테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어요. 자그마한 정원과 별이 있는 밤하늘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지인들을 불러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어요. ‘그렇게 파티를 자주 하면 돈이 많이 들 텐데’ 하면서 걱정을 해주는 지인도 있었어요. 요리는 문화예요. 그리고 우주예요. 문화를 나누고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그 신비스러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남편도 그녀 못지않게 파티를 즐기고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다. 일본어 강의를 하던 시절 한 수강생을 통해 알게 됐는데 첫눈에 미각도 있어 보였고 술을 좋아하는 남자라 금세 친해졌다. “제 인생이 시원하게 펼쳐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이런저런 지루함도 밀려와 그만 일본으로 돌아가자 마음을 먹었어요. 가서 학위도 따고 그동안 못한 효도도 좀 하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운명처럼 남편이 나타난 거예요. 서로 술을 좋아하다 보니 처음부터 만나는 게 어색하지 않았어요. 자주 자리를 함께하며 음식을 즐기고 대화를 나눴죠. 자연스럽게 이성의 감정이 싹트더군요. 그래서 함께 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은 중요한 일 같아요. 이유도 모른 채 애인과 헤어진 사람은 그(그녀)와 즐겁게 먹었던 음식이 뭐였는지 한번 검토해볼 일이에요.(웃음) 남편은 제가 하는 일을 적극 지지해주고 때로는 가혹한 조언도 해줍니다. 물론 제 지인들과도 잘 어울리고요.” 한국 음식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한국에 사는 일본인 친구들에게 스페인 요리 파에야를 가르쳐준 것이 계기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 그녀의 요리교실. 수강생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여자 수강생이 대부분이지만 남자도 꽤 있다. 4년째 요리를 배우는 60대 교수님도 있고, 한 치과의사는 캠핑을 다니다가 요리에 관심이 생겨 그녀의 교실을 찾았다. “남자분들이 요리 배우는 걸 그렇게 좋아하실 줄 몰랐어요. 그분들은 특별한 요리를 배우러 오시는 게 아니에요. 꽈리고추멸치볶음 같은 아주 소박한 가정식 요리를 원해요. 나이가 드니까 뭘 먹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하기가 점점 구차하다는 거예요. 괜스레 아내 눈치를 보시는 거죠.(웃음) 간단한 안주 요리에 대한 관심이야 다들 뜨겁죠.” 최근, 은퇴 후 혼자 지내는 남자들을 위한 요리교실을 기획하고 있다는 그녀는 한국의 내림 음식들은 매우 훌륭한데 제대로 된 레시피가 없어 국제화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한국 음식은 양념장이에요. 간장에 마늘과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넣어 맛을 낸 양념장은 어느 나라에서도 맛보지 못한 음식이에요. 결혼 후 시어머님에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이거 조금 넣고 저거 조금 넣으면 된다’ 하시는 거예요. 답답한 마음에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 가서 공부도 했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음식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어요.” 때로는 프랑스 요리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 나카가와 히데코, 아니 수자 언니답게 ‘요리의 관계학’을 펼쳐나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 2018-06-04 10:11
-
- 손녀의 휴대폰 기능
- 손녀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이다. 밑으로 두 살 터울인 여섯 살 남동생과 네 살 여동생이 있다. 엄마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다 보니 며느리는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전업주부로 돌아섰는데도 늘 바쁘다. 우리 세대가 아이들을 키우던 방식과 지금은 매우 다르다. 교육 환경이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유치원도 못 다니고 바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자식들은 유치원을 보내고 태권도나 피아노 같은 사설학원을 하나 정도 보낸 기억이 있다. 요즘은 아이들이 불쌍할 정도로 놀 틈이 없다. 우리 집의 경우만 봐도 네 살, 여섯 살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어린이집이 끝나면 여섯 살은 발레학원에, 네 살은 집으로 돌아와 엄마랑 그림 맞추기 퍼즐게임을 한다. 초등학교 1학년인 큰 손녀는 학교수업이 오후 1시쯤 파하면 요일별로 영어, 수학, 체육 등 과외공부를 한다. 체육과외라는 말이 생뚱맞아 뭘 하는가 보니 줄넘기 같은 것인데 신기하게도 이런 과외를 받으면 잘한다. 며느리 말에 의하면 남들도 다 하기 때문에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하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아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단다. 못 따라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이가 기죽어 시들해진 모습은 차마 못 보겠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일 전쟁터처럼 아이들도 바쁘고 며느리도 한눈팔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며느리가 삐끗 다치기라도 하면 난리가 난다. 5분대기조처럼 숨죽이고 기다리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바로 구조요청 전화가 날라 온다. 그럴 때는 걸어가도 안 된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가야 한다. 아이들을 자동차로 실어 나르는 운전도 해야 하고, 시간 맞춰 학원에 보내는 일도 늘어 할머니 할아버지로서는 현기증이 다 난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이제 혼자 해야 할 나이다. 혼자서기 훈련을 시켜야 했다. 우선 등굣길에 위험요소를 알려줬다. 큰길을 건널 때는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더라도 좌우를 보고 건너고, 아파트 안에서는 자동차들이 많고 키 작은 아이들을 운전자가 못 볼 수 있으니 뛰지 말 것, 한적한 뒷길은 위험하니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로 다닐 것, 등하굣길에 친구와 항시 같이 다닐 것 등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노래 부르듯 가르쳤다. 아이를 혼자서 내보낼 때는 불안하다. 마음이 놓일 때까지 아이의 동태를 CCTV 보듯 감시 선상에서 볼 필요가 있다. 좋은 방법은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 주는 것이다. 요즘 휴대폰에는 이런 기능들이 많이 개발돼있다. 문제는 학교에서 수업에 방해가 된다며 아이들이 휴대폰을 갖고 등교하지 못하도록 막아 달아는 가정통신문이 왔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전화벨 소리가 나면 수업에 지장을 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아이의 홀로서기를 위해서는 휴대폰을 사주지 않을 수가 없다. 단, 학교 안에서는 가방 속에 넣고 절대 꺼내지 말 것을 당부했다. 휴대폰으로 아이의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게임을 못 하도록 막는 기능도 있다. 필요한 사람만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지금은 학교에 등교해서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엄마에게 무사히 학교에 왔다는 전화를 하고 수업을 마치고 정문을 나설 때도 전화를 하도록 했다. 앞으로 혼자 등교가 완전히 익숙해지면 이런 전화는 불필요해질 것이다. 피아노학원이나 수학 과외를 갈 때도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움직인다. 하루는 학교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이에게 전화가 없었다. 궁금한 엄마가 전화를 했다. 한참 후 전화를 받은 아이가 “엄마! 왜 학교로 전화했어요? 학교로 전화하면 선생님께 혼나요” 하더란다. 그날은 등굣길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그만 엄마에게 전화하는 걸 잊어버렸다고 한다. 휴대폰을 사주고 큰아이로부터 신경을 덜 쓰게 되자 며느리의 하루는 부쩍 여유로워졌다. 집 밖으로 나간 아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우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늘 불안했다. 아이에게 위험한 자동차나 나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다. 도시는 사람은 많아도 철저히 개인주의로 고립되어 있다. 남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휴대폰을 매개로 하여 엄마와 아이가 늘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좋다. 빨리 아이가 혼자 생활하는 데 익숙해지고 더욱 안전한 사회가 되어 CCTV 기능을 하는 휴대폰이 없어지는 날을 희망해본다.
- 2018-05-29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