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큰 사업을 했던 남편은 다행히도 낯선 이민생활에 잘 적응을 해 나갔다. 그러나 빈손으로 무작정 시도한 모험이었기에 헤쳐나가야 할 과정은 험난하고 어두운 터널의 연속이었다.
한 달에 통틀어 1350달러 수입으로는 집세 900달러 내고 나면 생활하기가 빠듯하다며 잡(일거리)하나를 더 해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흐트러져 남은 일들 수습하기도 바쁜 덕
1998년 8월 남편은 왕복 비행기 표 1장과 이민 가방에 달랑 옷가지 몇 벌을 담아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쳐 필자가 설득시키고 단행한 1차 이민이었다. 온 나라에 경제 위기와 그 도미노 현상으로 가정이 휘청거려 별다른 대책이 없어 무조건 단행한 모험이었다.
온 살림에 빨간 딱지가 붙고 집은 경매로 날아갔다. 게다가 여기저기 쏟아지는 빨간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5월 7일 토요일 오후.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서울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방문한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라 부르기엔 앳된 얼굴을 한 그들의 가운에서 ‘소금회’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20년 넘게 동작종합사회복지관을 찾는다는 이들은 국가유공자 자녀 중심으로 꾸려진 ‘소금회 대학생 의료 봉사단’이다.
여름휴가철이 돌아오면 대개는 낭만적인 일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건 하나가 툭 하고 마음에서 일어난다. 지금부터 43년 전 일이나 필자 ‘기억의 창고’에서는 조금도 스러지지 않은 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느라 학교생활은 늘 따분했다. 대학 캠퍼스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고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
윤무부(尹茂夫·75) 경희대 명예교수는 1990년대 TV 톱스타였다. 에 나와 조근조근 새 이야기를 해주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연예인도 아니고 스포츠 스타도 아닌데 지금도 ‘새 박사님’하면 떠오르니 대단한 인기인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 그에게 최고의 팬은 아마 아들 윤종민(尹鍾旻·42) 박사가 아닐까? 다른 공부를 해도 됐을 텐데 아버지를 따라
11년전 여름, 그러니까 미국 시애틀에 살던 2005년 7월 중순경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부산소재 모 수산회사의 1인 지사장으로 시애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말이 지사장이지 고정수입이 없는 프리랜서형 지사여서 힘겹고 배고프던 때였다.
23세부터 23년간 당연시 여긴, 중독중의 최고라고 여겨지는, '월급'이 없어 마음이 황량한 때였다.
당시 알래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군 시절부터한의사 생활을 했으니 어느덧 30년을 바라본다. 이재동(李栽東·54)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침구과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인체의 생체리듬과 자연치유력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헛발질을 줄일 수 있는 한방의 철학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한다.
#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K씨. 그녀에게는 세 딸이 있다. 첫째는 의사, 둘째는 법조인, 셋째는 교수를 꿈꾸는 재원이었다. 첫째 딸은 꿈을 이뤄 동료와 결혼했고, 둘째와 셋째 딸은 사법시험 준비와 박사과정이어서 결혼에 급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K씨는 김희경 팀장이 추천하는 남성을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다.
몇 년 후, K씨의 두 딸은 각각 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