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독특한 전시가 열렸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패션 아이콘인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의 옷장을 소재로 한 전시였다. 당시 아펠의 나이는 83세였다. 그녀의 옷장에는 1960년대의 파리 패션을 대표하는 주요 의상은 물론, 터키의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며 사 모은 다양한 색감의 의상과 티베트 지역의 보석이 가득했다. 세상을 향한 한 사람의 태도와 가치관이 녹아 있는 저장고가 인간의 옷장임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그녀의 옷장(Wardrobe)은 이후 수많은 패션 브랜드의 컬렉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06년 랄프 로렌의 홈 컬렉션은 아펠의 직물 컬렉션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고,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M·A·C은 2012년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컬러를 이용해 색조 제품을 내놓았다. 현재 아펠은 9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패션계를 매혹하고 있다. 최근 시니어 모델이 매체를 장악하는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시니어 패션 블로거와 스타일리스트들이 연일 패션쇼의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년의 백발이 성성한 모델들이 패션을 비롯한 트렌드에 민감한 산업의 핵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멋 내기 딱 좋은 나이
패션 역사에서 젊은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은 1960년대다. 그 이전만 해도 파리의 오트 쿠튀르의 디자이너들은 젊은 모델을 고집하지 않았다. 발렌시아가도 기혼의 중년 여성을 주로 기용했고, 이브 생 로랑도 다르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일수록 ‘나이’라는 요소보다 영원한 여성성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더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1960년대, 청년문화의 등장과 함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공격하며 자신의 미감을 자신 있게 드러냈다. 부모들에게 물려받은 풍족한 경제력도 원인이었다. 당시 소비의 주요 계층은 청년이었다. 이후 패션계는 젊음의 활력과 아름다움을 미의 원천으로 둔갑시켰고, 소비재 산업도 이에 호응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도는 법.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나이대의 예법과 문화, 가치관을 쉽게 접하면서 ‘자신의 나이’에 대해 생각하던 기존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다양한 삶의 경험과 사회적 성숙을 이룬 세대가 패션시장 전면의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노년 세대의 스타일, 시니어 시크(Senior Chic)에 대한 열망도 한층 커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이리스 아펠은 뉴스 인터뷰에서 “늙어간다는 거, 그게 확 드러나는 게 언제일까요? 그건 옷을 젊어 보이게 입으려고 혈안이 될 때예요”라고 말했다. 노년은 그 자체로 찬미의 대상이다. 노년을 상징하는 주름은 생의 훈장과 같은 것이라며 더 이상 생물학적 시계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이들이 늘고 있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라는 노래 가사는 노년의 어르신들이 더 이상 아픈 몸을 구석구석 눌러가며 푸념조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미국의 패션 매거진 ‘얼루어(Allure)’는 더 이상 안티에이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했다. “안티에이징이란 단어가 노화(aging)를 무의식중에 우리가 싸워내야 하는 삶의 조건처럼 만든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노년을 다루는 언어부터 성찰할 필요가 있다. 언어부터 노년을 부끄럽게 만들면, 그 언어를 쓰며 우리는 자연스레 노년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갖게 된다. 노년은 우리 스스로 의미를 복원하고, 창조하는 시기여야 한다.
‘시니어 시크’를 위한 원칙
패션은 노년의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있다. 옷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과 같은 우리의 외양을 창조하는 도구는 살아온 생의 서사를 쓰는 장치다. 노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과 결과물을 숙성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시기다. 노년의 패션 스타일링은 젊은 날의 방식과 다른 신중함과 관점이 요구된다. 달라야 한다. 무엇보다 내적인 자신감이 밖으로 표출돼야 한다. 옷태라는 단어에서 태(態)란 한자가 ‘내 마음이 막힘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변화하는 신체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지나치게 넉넉한 실루엣의 옷을 입는 일도 피해야 한다. 시니어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 중 하나다. 패션은 노년의 몸을 ‘못나고 늘어진 어떤 상태’로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자기검열을 통해 그 늪에 빠질 뿐이다. 패션의 매혹은 감춤이 아닌, 여전히 아름다운 신체의 부분으로 타인의 시선을 모으는 데서 나온다. 항상 피팅이 된 옷을 골라야 한다. 당신이 축적해온 선별력 있는 눈을 옷을 고르는 데 써야 한다. 우아함의 어원이 ‘심혈을 기울여서 선택한다’는 단어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옷장에서 오래된 옷들을 버리고, 가장 단순한 선과 중성색(화이트, 블랙, 베이지)으로 된 기본 품목으로만 채운다. 이러한 원칙부터 끈덕지게 지켜보자. 참조할 수 있는 모델이 있냐고 묻는 분이 많다. SNS를 켜고 ‘#AGELESS’라는 표제어를 넣어보라. 멋진 노년을 함께하자며 자신의 스타일을 공유하는 수많은 이가 당신을 기다린다. 그들을 보며 외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멋 내기 딱 좋은 나이!”라고.
뒷모습이 청년 같았다. 낡은 청바지에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중간 톤의 체크무늬 셔츠. 햄버거 주문을 하며 서 있는 남자의 옷차림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의 앞모습도 궁금해졌다. 그 순간 그가 햄버거와 커피를 받아들고 뒤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반전이었다. 그는 허리가 금방이라도 휘어질 것 같은 나이로 보였다.
굽은 나무는 멋스럽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옷매무새가 좋아 보이려면 일단 몸이 곧아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인다. 패션쇼에 나오는 의상들을 일상에서 입는다면 소화 못할 옷이 많다. 그러나 그 옷을 걸치고 모델이 당당하게 자신감 넘치는 스텝으로 걸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다리도 벌어지고 무릎도 구부러진다. 젊음을 포기하면 몸도 따라간다. 탄탄한 근육과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싱싱하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반짝인다. 무얼 입어도 근사해 보인다. 늙는다고 멋까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중후함과 우아함이 있다.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생기고 행동도 달라진다. 잘 다듬은 세련미를 무기로 나이보다 젊게 옷을 입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
패션 감각도 세대에 따라 많이 다르다. 우리 세대는 3가지 색 이상으로 옷을 코디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보색에다 튀는 색깔의, 좀 정신없어 보이는 패션을 하고 다닌다. 고정관념의 파괴를 일으키는 세대다. 자유롭고 과감한 패션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물감을 갖고 노는 기분이랄까.
나이가 드니 어두운 색이 싫다. 얼굴이 컴컴해 보일 것 같아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밝은 색의 옷을 입는다.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으면 스카프나 브로치 등으로 포인트를 준다. 옷 잘 입는 요령은 때와 장소에 맞게 갖춰 입는 것이다. 아무 때나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가끔은 특별한 사정도 있겠지만 마치 불감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고 성의도 없어 보인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남자들의 패션은 마치 군복 같다. 하나같이 우중충한 색깔에 신발도 거무튀튀한 색이 많다. 남자는 코트에 목도리만 잘 걸쳐도 멋이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해 옷을 입던 시절의 얘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다양한 패션 문화에 적응해보자. 비 내리면 레인코트, 가을엔 바바리코트, 눈 내리는 겨울엔 털 달린 파카, 늦겨울 봄 눈 트는 따스한 날엔 좀 화사한 재킷, 연말 모임이나 축하 파티에서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장신구는 보기에도 좋고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나이 든 당신들, 이제 허리 펴고 멋진 노년을 맞이하면 좋겠다. 마사지를 하고 화장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의 패션 감각을 적극 배워볼 때다.
은퇴 뒤 길어진 후반생을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자 시니어 인턴에 도전하며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이 시대 시니어들. 시니어 인턴으로 시작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삶의 가치를 나누고 있는 ‘상상우리’ 수석 컨설턴트 박생규(66) 씨를 만났다. 그가 말해준 시니어 인턴 성공 노하우? 일단 꼰대만 아니라면 반은 성공이다.
서울시 중구 일대의 작고 큰 건물 사이. 사회적 기업 상상우리의 아지트인 상상캔버스에서 박생규 씨를 만났다. 그가 하는 일은 ‘취업을 하고 싶은 시니어에게는 일자리를,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스타트업 업체에는 일손을 주선해주는 것’이라고 하면 쉬운 설명일 게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일궈낸 젊은이들의 회사에, 경력으로 다져진 시니어가 사업에 필요한 보편적 구조를 담당한다는 취지다. 사업체를 꾸리는 데 있어 신·구 세대의 소통이 원활하면 사회공헌활동에도 기여할 수 있는 획기적인 프로젝트. 일자리뿐만 아니라 봉사를 바탕으로 한 기업의 재능기부 현장에서도 박생규 씨는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처음 만났던 날도 악수를 나누기가 무섭게 업무와 관련한 전화를 받느라 바빠 보였다. 쉬는 날은 외부 강의를 하고 시니어 인턴도 찾아가 상담해야 하니 개인 시간 내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지치지 않고 오래 일하기 위해 급여를 낮추고 여유롭게 일할 수 있게 업무시간을 조율해서 쓰고 있다.
“제가 취업시켜드린 분과 전화하는 거예요. 올해 벌써 시니어 5명이 취업했네요. 취업 초기에는 자주 전화합니다.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서서히 연락을 줄이면서 관리합니다.”
2015년 사회적 기업 상상우리에서 인턴기간 3개월을 마치고 정직원이 된 박생규 씨. 4년이 지난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발판 삼아 일터를 취사선택하며 거듭 성장하고 있다.
“2016년까지 상상우리에서 일했고, 이후 2년 여 정도는 시니어 세대와 이들의 전문성·역량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기업을 연결해주는 ‘사단법인 신나는조합’에 다녔습니다. 업무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두 곳 모두 개인 커리어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는 일이었죠. 최근에 상상우리에서 다시 할 일이 생겨 돌아왔습니다. 2월부터 정식 출근입니다. 대표님과 제 업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적당한 선에서 방향을 잡게 될 것입니다.”
상상우리의 신철호 대표는 박생규 씨가 컨설팅 팀에서 수석 컨설턴트로 활동했으면 한다. 현재 박생규 씨는 2017년 성동구 성수동에 생긴 서울시 성장지원센터 ‘소셜 캠퍼스 온’에 관심이 많다. 그곳에 입주한 스타트업 회사에 적합한 시니어 인재를 찾아줄 계획이다. 이곳의 운영과 관리를 상상우리가 맡고 있기에 박생규 씨가 귀환을 결심했다.
“지금까지는 시니어 개인에 맞춰 취업을 소개해왔는데, 이제부터는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을 찾아 적합한 자리에 배치시키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그런 그림을 그리는 곳이 ‘소셜 캠퍼스 온’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상상우리’에서 시니어 인턴 첫발
지난 2년 동안 박생규 씨가 일했다는 ‘신나는조합’은 상상우리와 인연을 맺게 해준 곳이다. 2015년 ‘신나는조합’에서 진행한 ‘시니어 혁신 사회적 기업가 발굴 육성 사업’에 참여한 박생규 씨는 7주간의 교육 과정을 마친 뒤 시니어 인턴 자격으로 상상우리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턴생활 시작하고 가장 힘들었던 건 할 일이 없는 거였어요. 누구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할 일을 찾는 것이 제일 급했습니다. 그래서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세심한 관찰도 이어갔다.
“가만히 보니까 직원들이 밤늦게까지 일하더군요. 어느 날 내가 도울 일이 없는지 물어보니 ‘마침 잘됐다’ 하면서 엑셀 작업 일을 넘겨주더라고요. 숫자만 기입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숫자를 집어넣다가 수식 몇 개 바꿔서 프로그램을 더 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어요. 그게 훨씬 간편하고 편했나봅니다. 그다음부터 엑셀 작업은 제가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인턴 기간은 다 끝나가는데 제가 그만두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더라고요. 가령 대표가 3개월 인턴 기간 끝났으니 나가라고 할 작정인데, 직원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을 수도 있죠. 나 대표님한테 물어봐야 되겠네요. 진짜!(웃음)”
그래서 사회적 기업 ‘상상우리’ 신철호 대표에게 직접 물어봤다! 박생규 씨가 상상우리를 떠나 있다 다시 들어오면서도 늘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를 멘토와 멘티로 생각할 만큼 돈독하다지만 인턴 기간이 끝났을 때 정말 고민이 없었는지 궁금했다.
Q. 인턴기간이 끝난 후 정직원으로 뽑을 때 망설임은 없었습니까?
“박생규 님 같은 경우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기 때문에 저희한테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저와 직원 입장에서도 ‘시니어이기 때문에’라는 생각 별로 안 했고요. 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채용한다’였습니다. 인품도 뛰어나신 분이시고요.
Q. 지나친 방송 멘트 아니신가요?
아뇨. 진심입니다. 그래서 저희가 계속 관계를 유지해왔고 또 제 롤 모델이십니다. 교육생들도, 저랑은 상담을 안 해도 박생규 님과는 해요.
Q. ‘상상우리’에 시니어 인턴십이 존재하나요?
저희 회사의 미션이 ‘경험과 지혜가 계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게 하자’이기 때문에 지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회사 내 다른 부서에서도 일곱 분 정도를 중장년층에서 채용했습니다. 저희는 인턴 채용 방식으로 시니어를 만나지 않습니다. 상상우리의 교육과정에 참여시키거나 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충분히 모니터링한 뒤 채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니어를 채용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어떤 분인지 충분히 봐야 돼서 적게는 3개월, 더 길게도 만납니다.
지난 세월 잊고 미래를 설계하라
박생규 씨의 얘기를 듣고 보니 한층 파격적이고 수준이 다른 시니어 일꾼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취업을 해야만 하는 ‘가장의 무게’ 말고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자신감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공군 중령으로 예편해 사회생활을 시작한 박생규 씨. 30년 군생활을 마치고 나니 그의 나이 49세였다. 평균 수명 백세 시대에 아직 창창한 나이였지만 재취업하기에는 쉽지 않은 나이였다.
“저는 그때 생각을 좀 달리했습니다. 이력서를 쓰되 제안서에 가깝게 썼습니다. 이력은 간단하게 쓰고 내가 당신 회사에 가면 어떤 일을 하겠다고 썼습니다. 퇴직할 때 대기업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우리나라 대기업 하면 생각나는 회사에 이력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내용증명으로요. 이게 채용 담당자에게로 다 전달됐습니다.”
공군에서 정보통신 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던 이력을 활용해 현대정보기술을 거쳐 SK 등에서 활약했다. 박생규 씨를 만나기 전 타 매체에 소개된, ‘공군 예편하고 대기업 임원으로 재직했다’는 이력을 큰 의미 없이 읽었는데 모두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발굴해낸 자리였음에 새삼 놀랐다. 게다가 한창 일하던 시기에 대장암 3기 판정을 받고 12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생각했던 것이 봉사였다.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새 삶을 주신다면 남을 위해서 한 손을 쓰겠다고요. 기도를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어떻게 남을 도와줄 것인가 고민했죠. 2012년도부터 항암치료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자원봉사문화 소속으로 NPO 단체 혹은 일반 기업에서 인사와 노무 관련 문제를 해결해드렸습니다. 시니어 인턴도 하게 되고 제에게 딱 맞는 기업을 만나 일하고, 연계하고요. 무엇보다 시니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잖아요. 저는 제 평생 직업을 봉사에서 찾았다고 말합니다.”
시니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오랜 시간에서 나오는 노련함이다. 한계를 모르고 도전하는 자세로 세대와 소통하고 공감해온 것이 지금의 박생규 씨를 만든 게 아닐까.
“내가 나의 경쟁력을 만들지 않으면 힘들어요. 제가 일자리를 찾아드리는 분이 별 고생 안 하고도 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01 꼰대는 안 된다(꼰대 체크리스트 참조).
02 취업이 아니고 봉사라고 생각하라.
03 업무시간은 때우는 시간이 아니다. 채우는 시간이다.
04 사회 초년생, 신입의 자세로 임하라.
05 나는 회사의 주인이 될 거다’라고 생각하라.
-돈 버는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일 욕심도 내지 마라.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라.
-50대 이후 제2직업으로 사는 사람은 ‘회사’가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01 사람을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02 대체로 명령조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
03 후배의 업적에 대해 칭찬보다 약점을 언급한다.
04 “내가 너만 했을 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05 유명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의 인연을 자주 자랑한다.
06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유난히 민감해한다.
07 칭찬을 들어도 그 칭찬의 양과 질에 불만이 많다.
08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주로 말한다.
09 연애사나 자녀 계획 같은 사적인 고민에 조언해주려고 자주 안달한다.
10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 후배에게 토라진다.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은 기본,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사 연습은 또 얼마나 많이 했을까. 대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인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만났다. 설렘과 벅찬 감동. 무대는 그들에게 언제나 꿈이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시니어 극단
구로문화재단 아트벨리 지하 소강당, 매주 화요일은 정기적으로 구로 시니어 연극 동아리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모이는 날이다. 지금까지 함께 작품을 해온 세월도 11년째. 2007년 구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1년 뒤 시니어 연극 동아리가 생겨난 것이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시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는 재단의 뜻이 컸다. 마침 설립 당시 구로구민회관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그곳에서 교육받던 시니어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해 창단 당시 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작년 입단한 신입 배우 우성연(66) 씨를 포함해 현재 13명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한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라지만 시민극단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2018년 제1회 영동생활시민연극제 초청 공연과 함께 성미산동네연극축제, 서울시민연극제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무대에 올린 ‘어미’와 ‘우당탕탕, 이사 왔어요!’로 2회 연속 시상대에 오른 바 있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아마추어 연극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구로문화재단의 뒷받침이 있다. 단원의 능력 향상을 위해 연극에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빙해주고, 연극 연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소강당도 빌려준다.
육십 넘어 찾은 재능
느티나무 은빛극단 단원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출석률. 정기적인 만남은 당연하고 연극 공연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일정이 잡혀도 밤이고 낮이고 제시간에 맞춰 연습 장소에 전원이 모인다. 이유는 단 하나,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신정례(73) 씨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이 싹 나았다며 밝게 웃었다. 구로구 토박이이자 극단 최고 연장자인 안영분(81) 씨는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했다.
“구로구청 뒤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세 자매 중 막낸데 언니들이 마차 4개를 붙여놓고 학예회를 하는 것처럼 공터에서 뭔가를 하는 거예요.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그 옆에서 엉덩이를 막 흔들고 춤을 췄습니다. 공부는 잘 못해도 남들 앞에 서서 하는 건 잘했어요. 동네 아이들한테 무용도 가르치고 나름 공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청춘극단 단원이었던 동네 오빠를 따라다녔어요. 당시 유명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5보충대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5세였는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 지내다가 스무 살에 결혼해서 살던 그녀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구로구민회관에서 노래를 배웠고요. 그 인연으로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1년에 한 작품씩은 꼭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늙지 않나봐요.(웃음)”
창단 멤버인 이필연 씨는 구내 복지관에서 연극을 하다가 창단 소식을 듣고 입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이도 있다. 2012년에 입단한 강정자(75) 씨는 지금까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용기를 냈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만나고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참 내성적인데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어요. 대사 외우는 게 치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양양례(72) 씨도 이렇게 뒤늦은 나이에 연극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안영분 씨가 어느 날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 번도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다 했더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된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살면서 슬프고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연극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오면 마냥 즐거워요.”
서막동(78) 씨는 식당 운영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느티나무 은빛극단 공연을 보러 왔다가 배우가 됐다.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쪽이 제 고향인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봤겠어요? 처음에는 떨렸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복지관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가끔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요.”
다양한 사연이 연극으로 모여들다
이곳에서 배운 실력을 봉사활동에 연계하는 단원도 있다. 성모병원 과 마포요양원 등에서 봉사를 해온 임절자(77) 씨다.
“봉사활동한 지는 21년 됐어요. 처음 배울 때는 인형극을 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날은 연극하듯 어르신들과 얘기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산다고요. 연극은 인생 같아요. 굴곡지고 희로애락도 있잖아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는 안옥희(73) 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육아를 책임져줄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한 것이 계기가 돼 연극을 하게 됐다.
“손주 육아와 함께 공부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동안 극단 작품 ‘산불’과 ‘어미’에도 출연했습니다. 제가 원래 남자 전문 배우인데 요즘은 연출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 은빛극단에는 남자 배우가 없다. 주로 안옥희, 안영분 씨가 남자 역을 맡는다. 한봉애(66) 씨와 임절자 씨도 남자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처음에는 남자 배우도 있었지만 남자 단원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져 여배우 극단이 됐다.
극훈도 있다. “우아하고, 멋있고, 겸손하자”이다. 죽을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설 것이라는 느티나무 은빛극단. 2월까지는 휴식시간을 갖고 3~4월 중으로 올해 무대에 올릴 작품을 고를 예정이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기억하시라. 한 명, 한 명 연륜에서 우러나온 귀한 열정을 조명 불빛 아래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여성 리더십’으로 우아하게 극단을 이끌다, 느티나무 은빛극단 대표 이정란
목소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이정란(78) 대표는 소녀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죠. 굉장히 잘했어요. 배우도 해볼까 생각해본 적 있는데 집안 반대로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살림하면서 아이 잘 키우는 아내를 원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맞이한 여유로운 시니어의 삶. 부부가 함께 노후를 잘 보내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역 신문을 들춰보다가 인형극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첫 번째 등록자였어요. 그때부터 연극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구로문화재단이 시니어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며 이정란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재단에서 시니어 극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거였거든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 생길 극단을 홍보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고 관심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이 들면 다들 한 고집하잖아요.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연극을 통해 만났으니 무조건 감싸고 서로를 보듬자고 생각했어요. 공연 연습을 할 때 혹시 따라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함께 공부도 하고요.”
극단을 이끌던 지난 11년 동안 지각, 결석, 조퇴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정란 대표. 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우리 극단 단원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요.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냉정하게 잘랐어요. 너무한가요?(웃음)”
대본 외울 때가 제일 즐겁다는 이정란 대표. 대사를 다 외우고 난 다음에는 단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셔서 보람을 느껴요. 강사들도 다 딸 같은 사람들이지만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단원들 출석률은 칭찬받을 만큼 좋고요. 참 2011년도에 극단 이름을 공모했는데 제가 응모한 아이디어가 채택됐어요. 느티나무는 구로를 상징하고 은빛은 시니어를 의미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복화술이다.
“연극과 구연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나이 먹어서 못한다는 소리를 안 해요. 자존심 상해서요. 우리 며느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롤 모델이라고. 나처럼 늙고 싶대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으로요. 연기는 ‘80세까지만 하자!’ 했는데 벌써 팔십이 다 되어가네요. 대본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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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인턴’을 보고 시니어 인턴에 대한 로망을 갖는 이가 많다. 전문가들은 시니어의 경우 요즘 청년들처럼 온라인을 통해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조언한다. 무엇부터 어떻게 준비해나가면 좋을지 단계별로 정리해봤다.
도움말 이희수 한국재취업코칭협회 대표(‘재취업 교과서’ 저자)
◇ STEP 1. 시니어 인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까?
청년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취업 사이트나 앱 등을 통해서는 시니어 인턴 채용 정보를 구하기 어렵다. ‘시니어 인턴십’의 경우 한국노인인력개발원(보건복지부)에서 공모한 전국 80여 곳 운영기관을 통해 참여 가능하다. 중장년 여성이라면 경력단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새일여성인턴제(여성가족부)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각 지역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방문). 각 운영기관에서는 개인의 경력과 역량에 맞는 기업과 일자리를 연계해주고, 관련 직무 교육 등을 진행한다. 기관 방문 전 자신의 경험이나 가치관 등을 되짚어보고, 어떤 일을 시작하면 좋을지 미리 정리하면 원활한 상담에 도움이 된다. 먼저 워크넷 ‘중·장년 직업역량검사’ 등을 통해 개인의 역량이나 선호 직업을 가늠해볼 것을 권한다.
Tip 내게 맞는 직무 찾으려면? 워크넷 ‘준·고령자 직업선호도검사’ & ‘중·장년 직업역량검사’
‘준·고령자 직업선호도검사’는 50대부터 80대 미만을 대상으로 흥미에 따른 고령자 적합 직업을 제시하고 분석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중·장년 직업역량검사’는 만 45세 이상을 대상으로 중·장년 근로자의 후기 경력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 역량을 진단해 15개 직종 중 재취업에 알맞은 3개 직종을 추천한다. 워크넷 홈페이지 로그인 후 검사 가능하다.
◇ STEP2. 이력서&자기소개서 작성하기
지원할 기업마다 제출할 서류나 양식은 다르겠지만, 구직활동을 하려면 기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력서는 직무 관련 최근 경력 위주로 작성하고, 사진은 6개월 이내 찍은 것으로 포토샵이 과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소개서는 성장 과정을 연대기 순으로 기재하는 글이 아니다. 소중한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한 자신의 가치관을 두괄식으로 작성한 뒤 각 항목마다 2매(400자) 이내로 쓰면 된다. 작성이 끝나면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문맥이 매끄러운지,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은 없는지, 연락처 등 인적 사항에 틀린 부분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한다.
항목별 작성 요령
❶ 지원 동기 지원 동기를 쓸 때는 자기 가치관과 경력이 지원하는 직무와 연관돼 있다는 것, 즉 자신이 적임자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를 위해 먼저 지원하는 회사와 직무를 탐색해봐야 한다. 먼저 회사 홈페이지 등을 방문해 연혁과 회사의 인재상 등을 분석하며 자기 가치관과 잘 맞는 회사인지 살펴본다.
❷ 경력 사항 경력 사항을 과거부터 일일이 작성하면 시각적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최근 이력 순으로 적되 강점 위주의 경력을 최우선으로 기재한다. 만약 경력단절 기간이 있다면 그 이유를 자기소개서에서 밝힌다. 지원하는 직무와 관련 없는 경력은 과감히 배제한다. 가령 조각 경력이 많을 경우 공통된 직종이나 직무로 묶어 정리하자.
❸ 입사 후 포부 또는 직무 수행 계획 입사 후 포부를 얘기할 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잘하겠다, 열심히 하겠다 등)은 삼가고, 그동안의 직무 성과를 수치로 정확하게 적는다. 직무 수행 계획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회사 입장에서 필요한 업무에 초점을 맞춰 작성한다.
❹ 추가 사항 국가 공인 자격증과 직종에 관련한 자격증을 빠짐없이 적는다. 이전 직장에서 받은 공로상, 우수사원상 등의 이력도 기록한다. 취업훈련센터 등에서 이수한 내용과 발령청 등도 함께 기재하면 도움이 된다.
Tip 시니어 스펙은 인턴 고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지원하고자 하는 직무에 맞는 이력을 가려 쓸 용기가 필요하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자. 지나치게 화려한 과거의 이력이 오히려 취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한다.
◇ STEP3 취업의 마지막 관문 ‘면접’
시니어의 경우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보다는 대면 면접 비중이 큰 편이다. 면접은 조직에 잘 융화가 될 만한 인재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이다. 예상 질문을 몇 가지 추려보고 답변 연습을 해보자. 단, 암기하듯 답변을 준비하면 오히려 낭패를 보기 쉬우니 주의한다. 면접 당일에는 외모를 단정히 한다. 면접관이 자신보다 젊고 경력이 적어 보여도 가르치는 듯한 표현을 쓰거나 장황하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시니어 면접 시 자주 나오는 질문
• 경력단절 기간이 긴데, 그동안 무엇을 하셨나요?
• 다른 직원보다 나이가 많으신데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요?
• 연세가 있으신데 일을 하시기에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 젊은 동료들과 의견 충돌이 나면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 필요로 하는 경력이 짧으신데 근무하시기 괜찮을까요?
• 지원하는 분야에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하신데 대안이 있으신가요?
Tip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지병이 있을 경우 ‘건강상의 문제’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 설명한다. 가령 몇 개월 전에 발병이 되었고 현재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자신감과 정신적인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다. 이를 통해 자신이 긍정적인 사고를 지녔고, 정신적인 건강은 이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 STEP4 인턴 입사 후에는?
인턴으로 입사 후, 넘치는 의욕과 자신감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업무 매뉴얼과 상황을 숙지하기도 전에 자기 판단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나이 어린 상사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종 고용이 되기까지 인턴 기간에 다음 세 가지 조언을 잘 새겨두도록 하자.
❶ ‘왕년의 나’를 잊자 과거의 직위라든가 어설픈 사회 경험을 앞세우는 것은 동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 왕년에 무엇을 했든 현재가 중요하다. 내 앞에 놓인 상황을 직시하자.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든 배우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❷ 먼저 앞서가지 말자 너무 왕성한 행동도 금물이다. 도움 요청도 안 했는데 자꾸 나서면 자칫 간섭으로 비칠 수 있다. 회사의 매뉴얼을 따르지 않고 자기 경험을 믿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행동도 주의한다.
❸ ‘인턴’ 기간을 잘 버티자 인턴 기간은 법적인 노동 수습 기간이다. 비굴하지 않은 낮은 자세로,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배우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바다 같은 넓은 이해심으로 잘 버티자. 강해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다 보면 강해진다.
◇ 이희수 대표의 Tip 'Q&A로 알아본 시니어 인턴'
Q ‘시니어 인턴’이라고 하면 영화 ‘인턴’의 주인공 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상과 현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로버트 드 니로의 역할은 참 매력적이죠. 미국 특유의 직장문화 덕분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직장문화와 비교해볼 때 같은 분위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삶의 연륜을 통해 나오는 행동과 조언으로 세대 간 융화를 이끌어내는 시니어의 역할은 우리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Q 막상 시니어 인턴의 직무를 보면 급여가 낮거나, 기대하던 업무 수준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요?
인턴을 포함한 재취업 과정에서 눈높이를 낮추지 않으면 자신만 더욱 초라해질 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인턴 직무를 선택할 때는 다른 조건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 또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에 지원하길 권합니다.
Q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외에도 기업체에서 진행하는 인턴 채용이 있습니다. 중간 기관 없이 개인적으로 지원할 때 유의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시니어 인턴 제도하에 정부지원금을 받는 기업이 아닌, 근로자 5인 미만인 업체에서 시니어 인턴을 모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혹 단기간 저임금으로 중장년 인력을 부당하게 활용하는 업체들도 있어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워크넷, 지역 일자리센터 등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을 통해 신뢰할 만한 업체인지를 꼭 알아본 뒤 지원해야 합니다.
Q 인턴 활동 중 대인관계, 직무 관련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나요?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인턴 알선을 진행했던 운영기관을 통해 해결해나갈 것을 권합니다. 시니어의 ‘가르치려 드는 행동’이 종종 젊은 동료들과의 갈등을 일으키곤 합니다. 할 말이 있다면 조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지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 고충의 시작입니다. 아집을 버려야 합니다.
Q 인턴 종료 후 고용 연장이 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다음 계획을 준비해야 할까요?
인턴 기간이 종료된 후 고용 연장이 안 되는 이유가 본인의 능력 부족인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즉 회사의 이러저러한 여건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개인의 역량 문제라면 그 상황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도 인식할 만큼 일처리의 부족함이 많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나의 결함이나 문제 등을 분석해 개선해나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별다른 사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회사 사정으로 인한 결과이니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아시아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의 중심엔 핸드볼 선수 임오경이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여자핸드볼의 전성기를 이끈 임오경(林五卿·48)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만났다.
금메달의 밑거름이 된 ‘지옥 훈련’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핸드볼팀이 금메달을 딴 직후 여자핸드볼팀의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때 임오경 감독도 국가대표로 합류하게 되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생애 첫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부담스럽진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부담감보다 긴장감이 더 컸다”며 “오히려 태릉선수촌에서의 ‘지옥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눈 감는 것도 두렵고 눈 뜨는 것도 두려웠어요. 눈을 감으면 다음 날 아침이 오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니까요. 그중에서도 매주 한 번씩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산악훈련은 그야말로 공포였어요. 기록을 매번 단축해야 했거든요. 훈련이 끝나면 울면서 태릉 귀신한테 기도했어요. 우리 감독님 제발 좀 데려가라고.(웃음)”
매일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견뎌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메달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한국이 메달을 딸 거라고 예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올림픽 직전 독일에서 열린 5개국 초청대회에서도 꼴찌를 했으니까요. 저희끼리도 동메달을 목표로 할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노력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운도 잘 따라줬던 것 같아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러시아 팀이 다른 조로 배정되면서 우리 선수들은 순조롭게 준결승까지 갈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독일과의 경기에선 아슬아슬하게 한 점 차로 이기면서 결승에 올랐다. 그때 한국 팀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가 러시아를 한 점 차이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떨어지고 노르웨이가 결승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저희 선수들 다 뒤로 자빠졌습니다. 예선전에서 노르웨이랑 맞붙었을 때 저희가 큰 점수 차로 이겼거든요. 결승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죠. 그때 ‘아, 3년 동안 지옥 훈련을 견뎌낸 선수들을 위해 하늘이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노르웨이를 28대 21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쾌거였다.
“선수들이 시상 단상에 올라가면 눈물을 흘리잖아요. 그 눈물엔 기쁨의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이 생각나서 흘리는 눈물도 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피나는 훈련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구나’ 하고요.”
일본에서의 새로운 도전
올림픽이 끝나자 그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는 일본의 2부 리그 신생 팀인 ‘히로시마 이즈미’를 선택했다.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가 핸드볼 강국 유럽 팀의 제안도 뿌리친 채 일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유는 뭘까.
“일본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3년 안에 팀을 정상에 올려놓고 유럽에 가자 했는데, 일본에서 14년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웃음) 당시 제가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했는데, ‘내가 스카우트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떠나질 못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이즈미에서 감독 겸 선수로 14년간 활동하면서 리그 8연패를 포함해 총 27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자단이 선정하는 인기투표에서 8년 연속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핸드볼 스타플레이어로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짱구? 이마가 많이 튀어나왔다고 그런 별명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카미사마(かみさま, 신)로 불렸어요. ‘내가 왜 신이야?’라고 물어봤더니 핸드볼을 너무 잘한다고….(웃음) 팬도 엄청 많았어요. 재일교포가 대시도 하고요. 어느 날은 아들이 상사병 걸렸다고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찾아오신 분도 있었어요. 별일 다 겪었죠.”
아쉬움 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임오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에게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다. 한국은 결승에서 만난 덴마크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 페널티 스로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임오경은 두 번째 주자로 나섰다.
“대회를 일주일 정도 남기고 발바닥 부상을 당했어요. 항상 베스트 멤버로 뛰다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굉장히 났죠. 페널티 스로를 앞둔 상황에선 부상 때문에 몸도 유연하지 못했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어요. 던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제가 무조건 던져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가 던진 슛은 덴마크 골키퍼의 오른쪽 다리에 걸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 그다음 주자였던 문필희 선수의 슛도 막히면서 최종 스코어 2대 4로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그동안 잘해왔는데 마지막 순간,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제 핸드볼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생각에 많이 아팠어요. 무엇보다 운동선수는 부상이 없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그리고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게 됐죠.”
그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맡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핸드볼팀 지도자라는 점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첫해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저희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 감독이 이끄는 팀이라는 이유로 심판 판정도 이상하게 해서 불리하게 만들고. 심판실에 따라 들어간 적도 많아요. ‘나 오늘부터 서서 볼일 볼 테니 나를 남자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몇몇 고비를 넘기면서도 조금씩 다가가니 결국은 손을 내밀어주더군요. 근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핸드볼과 함께한 지 30여 년이 넘는 세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볼을 시작하면서 선수가 됐고, 선수를 하면서 지도자가 됐고, 대한민국의 애 엄마도 돼봤어요.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이면 제가 지도자와 선수생활을 모두 해본 사람으로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
과거의 모습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무척 힘들고 괴로웠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던 가슴앓이였다. 이상과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느끼는 좌절감은 쉽게 형언할 수 없다.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는 고통도 따른다.
어린 시절 나는 아나운서처럼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남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좋은 조건에 타고난 끼와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볼 때는 더 위축됐다. 학창 시절을 지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내게는 늘 극복해야 할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과의 싸움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 크리스토퍼 리더십코스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이 과정이 좋은 점은 강사들이 모두 무료 봉사를 해서 최소한의 운영비를 제외하고는 큰돈이 들지 않았다. 나도 교육을 마치고 강사로 5년을 봉사했다. 자신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맞닥뜨리는 것이다. 수영이나 자전거는 이론으로만 배우면 쓸모가 없다. 직접 물에 들어가거나 자전거에 올라 몸소 체험해야 한다. 정신적인 힘도 길러야 한다. 늙은 인디언 추장이 손자와 나눴다는 다음의 일화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우리 마음속에서는 늘 두 늑대 간의 큰 싸움이 일어난단다. 한 마리의 늑대는 악한 놈으로 열등감, 화, 질투, 슬픔, 죄의식 같은 감정으로 가득하고 또 한 마리의 늑대는 선한 놈으로 기쁨, 평안, 소망, 친절함을 잃지 않지.”
“싸우면 어떤 늑대가 이겨요?”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마음속 불안과 용기란 놈도 이와 마찬가지다.
심리학에서는 지나치게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과열반사’, ‘과열의도’라 표현하는데 이는 모두 신경증의 원인이 되어 오히려 자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설화에 “너는 어떤 순서로 다리를 움직이느냐?”는 질문을 받은 지네가 그 문제에 집중하다가 전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래서 정신과에서는 사고 중단, 반성 제거라는 치료법을 통해 지나치게 자기 문제에 집착하는 행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새로운 삶 시작
실수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속에 갇히게 되면 점점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실수 좀 하면 어때,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용기를 가지고 과감하게 부딪쳐봐야 한다. 나는 리더십코스교육과정을 끝내고 군부대로 재능기부 강의를 하러 다녔다. 군에는 관심병사도 많고 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교도 많다. 내가 이들의 인성교육을 맡아 2015년부터 지금까지 봉사한 시간이 200시간 가까이 된다.
서두에서 밝혔듯 남 앞에 서는 게 두려웠던 내가 오늘날 강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몸을 던지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강사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PPT 작성법도 익혀야 한다. 또 다른 사람 강의도 많이 들어봐야 한다. 나는 강의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니며 들었다. 재미도 있고 강의 기법 등 배울 것이 많았다.
지금도 현장에 가 보면 많은 학생과 청소년이 발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 교육이 입시 위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표나 토론 문화에 익숙지 않다. 나는 청소년들이 좀 더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신감과 발표력을 증진시켜주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비록 명강사는 아니지만, 과거의 나를 이기고 여기까지 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물론 앞으로도 자기계발을 꾸준히 해 명품 강사로 거듭나고 싶다. 군부대 강의도 기회가 되는 대로 적극 참여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도전하는 중이다.
지난 연말 서울시50+재단에서 진행한 ‘패션人스타’에 응모했는데 덜컥 뽑혔다. 설마하면서도 시도한 것이 행운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내게 어울리는 색은 뭘까 궁금했다. 내게 맞는 최고의 색을 찾는 일은 스스로를 좀 더 돋보일 수 있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전문 컨설턴트 사무실에서 내게 맞는 퍼스널컬러를 찾기 시작했다. 화장하지 않은 피부로 검사를 해야 한다기에 세수를 한 뒤 촬영이 시작되었다. 머리색도 가려야 해서 하얀 두건을 쓰고 어깨에도 하얀 가운을 둘렀다. 그러고 나서 다양한 색깔의 천을 하나씩 어깨에 얹어보며 얼굴이 화사해 보이는 컬러를 찾았다. 피부색이 누렇고 붉은 기가 있는 내게 어울리는 색은 따뜻한 가을 색이었다.
너무 튀지 않으면서 적당히 색이 빠진 자연스러운 컬러가 내게 어울린다고 전문가는 말했다. 그 색들은 튀지 않는 밤색, 카키색, 회색, 아이보리, 오렌지 등등이었는데 회색은 스님들이 입는 승복 색깔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특별한 날 즐겨 입는 검은색도 두 번째로 잘 어울린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퍼스널컬러를 모를 때도 내가 이런 색깔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내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옷 색깔도 내 퍼스널컬러와 비슷하다. 화려하고 튀는 옷차림은 부담스러워 피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전에 퍼스널컬러 공부를 했다는 분과 잠시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도 정확히 알려면 검사를 제대로 해봐야겠지만 내 퍼스널컬러는 아마 가을 느낌이 나는 웜톤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자신의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색과 어둡게 만드는 색이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그것을 알아내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변화를 위해 염색도 해보라고 권하며 어울리는 머리카락 색도 알려줬다. 잘 어울리는 색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레드브라운이었다. 피부는 건성이라며 내게 필요한 화장품도 알려주었다. 상황에 따라 가끔 하게 되는 파운데이션이 21호인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파운데이션 21호가 내게는 너무 밝다고 했다. 잘 맞는 색은 23호. 어쩌다 화장을 하면 뭔가 얼굴이 떠 보이는 것 같았는데 색이 안 맞아서 생긴 일이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평균연령 100세는 이제 평범한 얘기가 되었다. 긴 호흡으로 가야 하는 인생 후반기, 이왕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으로 가꾸면서 멋지게 채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퍼스널컬러 경험을 해보니 한 번쯤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을 알아보고 자신감을 더 상승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세 시대가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된 지금, 이제 50대는 청년과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은 그 이름대로 서울 시민 50세부터 64세까지인 50플러스 세대의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재단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후 재취업, 일자리, 교육, 정책 개발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는 50플러스재단은 지난해 10월 김영대 전 국회의원을 대표이사로 임명해 향후 3년 동안의 사업 전개를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최대 화두가 된 시대, 김영대 대표이사를 만나 50플러스 세대의 일과 삶에 대한 대안을 들어봤다.
새해 이슈는 일자리다.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이 기존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고, 그 조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반발로 편의점과 프랜차이즈 등 단순 서비스직 업계에서는 사람을 쓰지 않는 대신 자동화 설비, 로봇 도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시니어가 은퇴 후 직업으로 많이 선택하는 택시 업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카풀 논란 또한 자율주행차가 도입될 미래의 택시 산업과 연결되는 사전적 갈등이다. 이처럼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일자리가 4차 산업혁명으로 줄어들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리라는 점은 자명하다. 50플러스 세대는 노인 세대도 청년 세대도 아니어서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모든 50플러스 세대가 생산적이고 준비된 노후를 맞이할 수 있도록 각 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 재단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실 생계형 일자리를 연계해주는 곳은 이미 많습니다.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 등에서 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죠. 그래서 재단은 인생 후반 새로운 일의 유형으로 ‘사회공헌일자리’를 발굴하고 확산하고자 합니다. 보통 ‘앙코르커리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속적인 수입뿐만 아니라 개인적 보람, 사회적 가치 모두를 만족하는 활동, 일거리, 일자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일자리 해법
시니어에게 일자리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수명이 늘어나고 부양 의무가 계속되면서 현역으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정무적 책임을 갖고 이뤄지고 있다. 서울시도 50플러스재단을 발족해 시대적 화두에 동참했고, 최근 김영대 대표이사가 임명되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민주노총 부위원장 출신으로 시민사회단체, 국회의원, 중소기업 CEO 등의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남북경제협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임명에서부터 50플러스재단의 방향성에 대한 큰 그림이 느껴졌다.
“재취업, 일자리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많은 분이 칠십까지 노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되는데, 그중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분들도 있죠. 그런 부분에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저소득, 취약 계층의 50플러스 세대를 케어하는 노력을 보강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김 대표는 50플러스재단이 시니어 취약 계층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우리나라의 고령자 빈곤율은 OECD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2.7%, 7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은 60.2%에 달한다. 고령화 속도도 가장 빨라서, 높은 노인 빈곤율과 고령화의 쌍끌이 현상은 젊은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더 가중시키는 상황을 불러오고 있다. 시니어의 일자리 확보가 본인 스스로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중요한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틈새시장 공략해나갈 것
일자리를 찾아내는 것도 문제이지만 중장년 일자리와 시니어를 매치시키는 것도 만만찮다. 현장에 가면 정책과 현장의 차이가 크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50대 이후의 직업 훈련, 생계를 위한 일자리 알선 등은 고용노동부나 보건복지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노동의 가치를 살려 저소득 취약 소외 계층, 그리고 일하고 싶은 분들을 잘 안내해야겠죠. 또한 서비스직, 문화관광, 기타 영업 마케팅 쪽으로 자기 전공을 살릴 수 있도록, 구력과 경험 많은 분을 매칭하고 관련 프로그램과 직업들을 만들고자 합니다.”
김 대표는 최근의 일자리 대책이 세대 융합 일자리의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모범적인 사례를 찾아내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만큼 그런 사례를 만들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창업과 관련해서는 당사자가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창업하는 분들 중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순식간에 돈을 까먹습니다. 조사해보니 창업자 10명 중 6~7명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수를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려면 창업을 철저히 준비하게 해야 하고, 창업자 수도 줄여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진입장벽을 높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업을 하겠다고 하면 사전에 꼼꼼히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실행 전에 미리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프로그램을 재단에서 올해 개발해볼 생각이에요.”
시니어가 대거 투자를 했다가 실패하면 엄청난 손실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잃어서 순식간에 나이 들어버린다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들려온다. 청년 때는 아래로 떨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이 있지만 나이 들면 어렵다. 따라서 선경험을 해보고 안 맞으면 빨리 정리하는 게 도움이 된다. 설명을 들으며 김 대표가 말하는 “조사, 증명과 함께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방향”이라는 게 어떤 모양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인 관광객 수를 보면 일본의 성장세를 우리나라가 못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건 관광 서비스하고도 맞물려 있어요. 관광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 중에 50플러스 세대가 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들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관광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외국인들을 안내할 수 있는 문화재 해설사 역할 등이 있겠죠.”
은퇴자를 위한 귀촌 일자리 창출
김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 중에는 귀농·귀촌도 있다. 귀농·귀촌이라고 하면 무조건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농촌에 가서 생활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걸로 하고 귀촌을 하면 생기는 일자리가 있다. 수확기에는 일당 받는 일자리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통, 택배를 도와주는 일도 있다. 그리고 지방에 가면 축제가 많은데 축제에 활용될 인력으로 50플러스 세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살려고 하면 힘들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귀농한다고 부부가 함께 갔다가 몇 달 후 아내 혼자만 올라오는 일도 있고요. 차라리 가벼운 마음으로 일정 시간 귀촌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어 일주일 중 월화수목은 도시에, 금토일은 귀촌을 하는 거죠. 경험을 쌓고 그 속에서 익숙해지면 정착하는 걸로 계획을 세우게 해 너무 부담을 갖고 가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을 모아 집단으로 공유주택을 만들면 자연스럽게 귀농·귀촌과 일자리 문제 해결이 함께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북경제협력, 돌파구 될 수 있어
김 대표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것이 남북경제협력 부분이다. 현재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분야가 경제협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경제협력 전문가인 김 대표가 50플러스재단 대표로 임명된 것은 남북 간의 경제, 일자리 문제를 위한 장기적인 포석은 아닐까.
“사실 정년에 걸려 배출되는 50플러스 세대가 많잖아요. 서울만 해도 교통공단, 시설관리공단, 교사, 금융인 등등 꽤 많은데 이분들이 제2인생을 설계하는 데 나름대로 기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50플러스 세대가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김 대표는 남북 간 교류가 진행되면 당장 철도에 대한 시설관리 점검에 들어가야 하는데 개선, 보수 부분에서 나름대로 시장이 꽤 크게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50플러스 세대의 인력들은 기능직이 많다. 북측의 도로 보수, 여러 가지 인프라 조성 등의 기간산업에서 발생하는 일자리는 50플러스 세대 기능직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50플러스재단이 중추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건강하다면 계속 일할 것
“저 역시 50플러스 세대로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경험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50플러스 세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은 실제 경험해본 사람이 시민들의 피부에 느껴지도록 설계해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50플러스재단에서 최근 공을 들이고 있는 기획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50플러스보람일자리’다. 은퇴한 50플러스 세대가 학교, 마을, 복지시설 등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경험과 전문성을 살린 사회공헌활동을 하며 인생 2막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이다. 2015년 6개 사업 총 442명의 규모로 시작해 지난해는 총 31개 사업에 2236명이 참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리고 신중년 커리어 프로젝트 ‘굿잡5060’이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고용노동부, ㈜상상우리가 재단과 함께 풀어가는 사업으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5060세대 1000명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한 후 사회적기업 취업률 50%를 목표로 하는 장기 계획이다.
“저도 칠십 세까지는 일할 계획이 있고 그 이후에는 건강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건강할 때까지는 일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서 쉬는 것도 익숙하지 않고, 엄청난 여유가 있어서 여행만 다니며 살 조건도 못 돼요. 그래서 칠십까지는 일하고 이후에는 사회봉사형 일자리, 공헌형 일자리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여하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내내 담백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부분 없이 실제를 말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읽고, 통찰력과 정책으로 다듬어진 김 대표 자신이 무엇보다도 50플러스 세대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입버릇처럼 ‘세월이 빠르다’라는 말을 자주 되뇌다 보니 2018년 무술년(戊戌年)도 역사 속으로 휭하니 사라져버리고 황금돼지해인 기해년(己亥年)을 맞았다. 이쯤해서 동년기자로서 1년여의 시간을 정리해 보려한다.
우선 재작년 동년기자 송년모임에서 나는 ‘독자가 뽑아준 감동상’을 수상했다. 더 좋은 글을 쓰라는 뜻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2018년도에는 한 해를 시작했으나 좋은 글이 잘 써지지가 않았다.
열심히 쓴답시고 장고(長考)를 거듭 하다보면 하품이 나오다 목까지 올라오는 게으름 탓에 손을 놓아버리곤 했다. 더구나 작년 여름은 전례 없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책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릴라 치면 금세 쏟아지는 땀방울로 정신까지 혼미해져 그만두어버리곤 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에는 손 놓고 쉬는 것도 한 방편이라 생각하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 백두산 천지에 여행 계획이 잡혔다.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세 번째 순서인 백두산 천지와 압록강 두만강을 보러 6월 중순에 출발했다. 동년기자 3명과 함께 동행을 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두산 천지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또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하늘연못 천지. 천지의 말간 얼굴을 보기 위해서 그리도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데, 막상 드러난 고운 얼굴에는 평화가 한가득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감동의 여운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브라보마이라이프에서 동영상 콘테스트 작품을 공모했다. 백두산 천지의 생생하고 그 평화로운 모습과 압록강 두만강을 아우르는 동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장려상을 받았는데 나로서는 최우수상을 받은 것보다도 더욱 기쁘고 의미가 깊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 인생 2막을 응원하는 행사 ‘브라보! 2018 헬스콘서트’가 11월 7일 오후 쉐라톤 서울 팔래스 강남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개최됐다. 이 행사에 참석하여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글과 함께 동영상을 편집하여 제출했다. 물론 촬영과 편집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술적인 문제는 늘 고민하게 만들었지만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동년기자로서 ‘브라보마이라이프’와 함께했던 나에게 많은 자성(自省)과 함께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나도 할 수 있어. 하면 돼” 한 해를 보내면서 움츠러들지 않고 충만한 자신감을 가지고 또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게 되어 감사하다. 그래서 ‘브라보마이라이프’와 함께 했던 2018년 한 해는 나에겐 축복이고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