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산업전문가포럼과 국제제론테크놀로지학회 한국지부는 오는 10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대구 엑스코에서 ‘기술과 삶; 인공지능 시대 100세 인생’을 주제로 포럼과 전시회 등 각종 행사가 포함된 '2022 제론테크놀로지 세계대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 행사는 국제제론테크놀로지학회가 주최하는 제13차 제론테크놀로지학회 학술대회와 실버산업전문가포럼이 주최하는 제6차 국제제론테크놀로지 엑스포&포럼이 하나로 통합돼 진행될 계획이다. 또한 대구시가 주최하는 2022 액티브 시니어 박람회가 동시 개최돼 기대를 모은다.
제론테크놀로지란 노년학과 과학기술을 결합한 단어로, 노후의 삶을 건강하고 안전하며 독립적이고 사회참여가 가능하도록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다양한 융합을 디자인하고 삶의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이번 세계대회에서는 이와 함께 시니어 라이프 디지털 도시포럼, 고령친화사업 정책포럼 등 약 30여 개 부대 행사도 진행될 예정이다. 지난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액티브 시니어 유튜버 경진대회도 이어 개최되며, 중장년을 대상으로 한 액티브 시니어 뷰티 메이크업 경진대회 등의 행사도 진행돼 베이비붐 세대들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심우정 실버산업전문가포럼 회장은 “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년학과 기술을 융합해 노화에서 돌봄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노년의 삶을 개선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다룰 것”이라고 설명하고, “제론테크놀로지는 최근 세계적으로 산업계의 뜨거운 감자인 ESG 경영이 추구하는 다양성 요소를 담고있어 사회적 관심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인구 고령화 현상이 초래되면서 대응 방안이 다양하게 전개되던 와중에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사태가 일어났다.
코로나19는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이미 2억3000만 명이 확진되고 47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의료 역사상 악명 높았던 1918년의 스페인독감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 놀랍게도 그동안 선진국으로 인정되었던 국가들마저 역병을 통제하지 못했고 환자들의 병원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젊은이보다 노인의 치사율이 100배 정도 더 높다는 점으로, 미래 장수 사회에 울린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역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별로 사회 문화적 차별성이 크게 노출되어, 이번 팬데믹 출현은 미래 사회 구축에 개인적 역량 강화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공공 정책과 문화적 요소가 더욱 중요함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특이한 사항은 코로나19로 사망한 환자들 대부분이 고혈압, 당뇨, 폐 질환, 암, 비만 등의 기저질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기저질환의 근저에는 생활 습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태의 해법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갖게 했다.
면역 향상에 좋은 방안 7가지
코로나19 팬데믹이 보여준 고령 사회에 대한 엄중한 메시지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 고령이 되더라도 고혈압, 당뇨, 암, 폐 질환, 비만 등의 기저질환이 발생하지 않도록 생활 습관 개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둘, 노인 요양 개호 시설의 철저한 관리와 지원이 요구되며, 밀집과 밀폐를 해소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셋, 사회적 거리두기와 연계해 시설의 단순 폐쇄로 초래되는 노인 고립화를 해소하는 방안이 시급하다. 넷, 위기 상황에서 노인들이 스스로 생활하고 봉사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절실하다. 다섯, 팬데믹 상황에서 가족과 지역주민의 연대 의식과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여섯, 개인의 일부 희생으로 보다 많은 공공의 혜택을 누리도록 질서를 지키는 데 협력해야 한다. 일곱, 비대면 상황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술적 시스템을 보급해야 한다.
이상과 같이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치사율 저하의 결정적 조건으로 부각된 기저질환 예방이 시급하다. 기저질환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일어나는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을 통한 생활 습관 개선이 중요한 대책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부터 오래 살기 위한 장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인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찾지 못했던 천연 불로초 대신 이에 준하는 약물을 직접 조제하는 연단술을 개발해, 그 소산인 단약을 방사들이 비술적 방법으로 제조하여 16세기 무렵까지 황실을 비롯한 고관대작과 부자들에게 1000년 이상 사용해왔다. 연단술은 아랍권으로 그리고 유럽권으로 전파되면서 연금술로 발전했고, 근대까지 이어져 철학과 의학의 중심 과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천연 또는 인공의 단약들은 수많은 부작용을 야기했다. 그 반작용으로 천연 또는 인공 약제의 복용을 거부하고 신체를 직접 단련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장생술 기법이 다양하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장생술은 생활 방식 개선과 신체 단련 위주로 발달하여 역사적으로 도교가 주도하면서 종교적 위상으로 승화했다.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 달생법(達生法)과 양생술(養生術)이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불로장생술의 핵심은 일상생활 습관에 있다
중국의 명산 무이산(武夷山)은 자연, 생태, 문화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특별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주자(朱熹)가 제자를 양성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어, 조선조 유학자들이 가고 싶어 한 성리학의 성지였다. 무이정사 가까이에는 도교 36성지 중 하나인 천유봉(天遊峰)이 있고, 그 정상에 팽조(彭祖)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팽조는 1000년 가까이 살면서 부인을 49번이나 바꾸었고, 장생술의 일환인 방중술 비법을 완성했다는 인물로 달생술의 전설적 상징이다. 그 사당 안쪽 팽조의 조상 양편 기둥에 각각 은수서산수정양성 내장생불로극공(隱水棲山修精養性 乃長生不老極功)과 찬하복기토고납신 위익수연년요지(餐霞服氣吐故納新 爲益壽延年要旨)라는 장생술의 비급 두 가지가 새겨져 있다. 맑은 물 있는 깊은 산에 살며 정기를 단련하고 본성을 다스리는 것이 불로장생의 최고 방안이며, 이슬 먹고 호흡을 다스리며 낡은 것을 뱉어버리고 새것을 받아들이면 해를 거듭할수록 건강해지는 핵심 방안이라는 의미다. 장생술의 요건인 깊은 산 맑은 물은 청정한 지역으로 공기와 물이 맑고 열심히 신체 단련을 할 수 있는 공간적 환경을 거론하고 있고, 이러한 장소에 살며 몸과 마음을 단련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팬데믹에서 심각하게 제기되는 공간적 문제점인 밀폐, 밀집, 밀접의 심각성을 이미 1000년 전부터 거론한 것이다. 나아가 신체 단련으로는 소식하며 호흡을 거칠게 하지 말고,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적극적인 쇄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적 생활 습관을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도교의 양생술은 음식 섭생의 섭양술, 호흡 조절의 복기술, 자연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신체 단련의 도인술, 음양 조화를 통한 방중술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섭양술로는 소식과 생식을 위주로 하라는 벽곡, 신선이 되는 장생식 또는 단약과 같은 약물을 복용하라는 복이가 있다. 약으로는 웅황이나 단사와 같은 광석과 지황이나 영지 같은 천연 식물이 있으며, 효능에 따라 상약, 중약, 하약이 있다. 호흡 조절의 복기술에는 조식, 태식, 폐기와 토고, 납신, 행기가 있다. 이와 같이 호흡 수련을 강조했고, 몸 안의 모든 노폐물을 제거하고 맑은 기운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러한 호흡법은 단전호흡 형태로 현대에도 일반에 널리 보급되고 있다. 신체 단련을 위한 도인술로는 몸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기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 요법으로 역근경, 팔단금, 오금희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 국민 건강 체조인 태극권과 같은 기공 요법을 보급하여 크게 성행하고 있다.
남녀 간의 육체적 결합을 적절히 활용하여 정(精)을 보하고 기(氣)를 키우는 방중술은 기본 원리가 채음보양에 있으며, ‘소녀경’, ‘채녀경’, ‘황제내경’ 등을 통해 일반에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도교의 장생술은 도교 신봉자만이 아니라 유학자들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청정한 곳에서 은일하게 지내는 청정무위의 삶과 스스로 노력하여 건강을 다지는 자강유위를 생활 규범으로 삼았으며, 이를 본받아 퇴계 선생도 신체 단련을 위한 활인심방을 개발하여 중화탕, 화기환, 도인술과 같은 체조 요법을 스스로 실천했다. 이와 같이 양생술의 핵심인 신체 단련의 도인술은 선비 사회에서도 널리 유행하여 건강을 유지했다.
백세인들의 운동
프랑스의 랑동(Lucile Randon) 수녀님은 117세로 세계 최고령 2위에 오른 분인데, 코로나19에 걸렸지만 회복했다는 뉴스가 나와 세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어 세계 곳곳에서 백세인들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회복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년 9월 말 통계로 미국에서도 코로나19에 걸렸음이 확인된 백세인 60명 중 사망에 이른 분은 단 3명에 불과해 백세인의 코로나19 치사율이 5%라는 보고가 나왔다. 같은 보고에서 대조적으로 90대 초고령자의 코로나19 사망률은 11.4%로 백세인의 치사율이 유의미하게 낮았음을 밝혔다.
일본에서도 팬데믹 기간 중 백세인의 수가 예년보다 오히려 크게 증가했음을 보고했다. 또한 7월 말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백세인학술대회(ICC2021)에서는 팬데믹 상황에서의 백세인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저명한 인구학자 미셸 풀랭(Michel Poulain) 팀은 코로나19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벨기에의 2020년도 사망률이 80대 이상 연령대에서 평년보다 20% 이상 증가했는데, 놀랍게도 100대의 경우에는 사망률이 0.95배로 오히려 감소했음을 보고했다. 백세인이 80~90대보다 코로나19에 대한 회복 능력이 더 강하다는 의외의 사실이 구체적으로 보고된 것이다. 큰 미스터리는 왜 백세인의 코로나19 치사율이 일반 고령인보다 낮은가라는 문제다.
노인이 되어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생체 기능이 저하되고 생체를 보호하는 기능도 동시에 낮아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백세인의 코로나19 저항성은 뜻밖의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일반 고령인과 백세인의 다른 점을 비교해보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추진되고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백세인 조사에서 밝혀진 백세인의 생활 습관적 특성인 활동성과 규칙성 그리고 절제성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백세인은 항상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하고, 생체 리듬에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먹는 것과 움직이는 것에서 결코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보였다. 그 결과 의학적으로는 당뇨병이환율이나 고혈압률이 일반 노인보다 백세인이 유의미하게 낮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생활 리듬을 지키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생활 습관은 건강을 지키고 기저질환을 예방했으며, 이러한 생활 습관은 결국 고대로부터 내려온 장생술의 재현이 아닐 수 없다.
신체 단련과 생활 습관 개선이라는 양생술이 불로초보다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부작용 측면에서 훨씬 안전하다는 기대치와 고가의 경비가 들지 않는다는 경제성 때문이었다.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으로 귀족만이 아닌 일반인들도 활용할 수 있었기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장생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개개인의 일상생활 습관을 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사는 일반인은 일상생활의 편리함에 익숙하여 신체를 활용하고 욕구를 절제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도회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먹는 것을 절제하고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동양식의 개선이 더욱 요원한 일이다. 그러나 고령사회에서 건강장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생활 습관 개선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각종 기저질환의 근원인 퇴행성 질환을 미리 예방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일반인이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실천적 생활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터벌 워킹
이러한 측면에서 고령인이 일상생활 습관으로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방법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세계적 장수 지역인 일본 나가노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권장하는 인터벌 워킹(Interval Walking)은 간단하다. 매일 3분 천천히 걷고 3분 빨리 걷는 사이클을 5회씩 반복하는 단순한 방법이다.
신슈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운동법을 3개월 이상 수행한 주민들의 심폐 기능이 크게 개선되고 고혈압과 당뇨가 회복되었으며, 3년 이상 추적한 결과 지역주민 건강보험 의료비 지출이 30%가량 줄었다. 인터벌 워킹은 단순하게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빠르게 그리고 천천히 되풀이하여 걸음으로써 심폐 기능을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가장 간편한 운동 방법이다. 이에 덧붙여, 심신을 자극해 정서적 기능도 증진하고 신체 균형 감각을 증진해 낙상 같은 사고를 방지하는 목적의 우리 춤 체조 같은 운동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권장한다. 이러한 운동 프로그램은 모두 신체적 기능을 증진하는 성과 외에 인지 기능 저하와 면역력 저하도 방지할 수 있음이 차례로 밝혀지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이겨내기 위해서는 면역력을 높일 수 있는 적절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생활 습관 개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질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적인 무병장수를 이룬 경우는 기대만큼 흔하지 않다. 다만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가능한 한 아주 늦게 질환에 걸리는 경우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백세인의 모습이다.
장수인이 되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결국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여유로운 곳에서 건전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서 성실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비법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에서 보여준 백세인의 강인한 생존 미스터리는 그들이 평생 지켜온 건강한 생활 습관이 반영된 것임이 분명하며, 미래 장수 사회의 기본 조건이 바로 생활 습관 개선임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1년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동계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후 가셔브룸 2봉을 포함한 여러 고봉을 등정했다. 베테랑 산악인 박경이(57)는 교사, 국제 산악스키 심판, 산악전문지 편집장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국립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활동 중이다. 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서, 그간의 여정과 더불어 알피니즘(Alpinism)의 가치와 매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1985년 대학교 산악부를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악인으로 살아왔다. 최근엔 그간의 세월을 정리하며 책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를 출간했다.
“산악인으로 살았던 시간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고산 등반에 도전했던 동료에 관한 기록, 고산 등반의 의미와 산에서의 죽음의 가치에 대해 논픽션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더불어 이 책이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고산 트레킹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유용한 지침서가 되기를 바랐다. 마스크 없이 트레킹하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얼마 전 김홍빈 대장은 히말라야의 브로드피크 등반 후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다. 책의 첫 장에도 나오지만, 추억을 나눈 동료 중에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신 분이 많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김홍빈 대장과 밤새도록 인터뷰를 했었고, 내밀한 얘기를 나눌 정도로 많이 친했다. 동료를 잃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프다. 다만 등반가가 산에서 죽는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글을 쓰다가 책상에 앉아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작가의 숭고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함께 늙어갈 수 없어서 슬프지만, 이제는 히말라야가 된 그들의 영혼이 부디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리움을 품고 있다.”
어쩌다 산악인의 운명
친척의 권유로 성적에 맞춰서 교대에 입학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산악부는 삶의 이정표를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어쩌다 산악인이 됐지만, 뒤돌아보니 그 선택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악부라고 해서 계곡 가서 기타 치고 노는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부원으로 처음 한 것이 암벽등반이었다. 도봉산의 오봉에 올라가 암벽등반을 처음 했는데, 정말로 아찔했다. 선배들은 가느다란 줄 하나를 믿고 올라오라고 하는데 오금이 절로 저렸다. 가뜩이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엉엉 울다가 내려왔다. 이후에 선배들이 ‘쟤는 곧 나가겠다’고 했지만 오기가 생겨 이 악물고 버텼다. 그때 신입생으로 13명이 들어왔는데, 2학년 때는 나 포함 3명이 남았다. 당시에 선배들한테 끈기와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4학년 때는 한국대학산악연맹 부회장을 맡아서 백두대간 종주를 기획했다.
“84학번 선배들이 백두대간과 조선 시대 지리서 ‘산경표’ 연구자인 이우영 선생님과 백두대간 종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만 선배들이 끝내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바로 아래 학번 집행부였던 우리가 이어나갔다. 백두대간 개념이 생소하던 때라서, 집행부가 약 4달 동안 지도 수십 장을 강의실에 깔아놓고 ‘산경표’를 바탕으로 지도의 능선을 잇는 작업을 했다. 지금이야 백두대간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는 정보도 없고 개인이나 산악회 차원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백두대간을 15구간으로 나눈 후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지도를 들고 7월에 4박 5일간의 종주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GPS 기술이 발달해서 문제가 없겠지만, 그때는 개념조차 없을 때라 상당히 열악했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땠을까?
“당시 이화령에서 속리산까지 내려가는 구간의 대장이었다. 지도가 있어도 구간의 지형이 불확실한 탓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지형을 살펴봤다. 여름이라 물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덤불 지대를 지나다가 후배들이 배낭에 달아놓은 물통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찾지 못한 채 근처에 있는 오디로 목을 축였다. 구간에서 잠시 벗어나 샘이 있을 것 같은 골짜기로 내려가서 물을 채워오기도 했다. 당시에 수월하게 종주한 팀이 없었다. 종주 후에 우리가 쓴 보고서가 발표되고, 1990년대부터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어났다.”
언니와 형, 그리고 가족을 위해
그녀는 건장한 청년들도 올라가면 쓰러진다는 고봉을 두 번이나 올랐다. 첫 원정은 아마다블람(6856m)이었다.
“첫 원정은 제일 좋아하던 4학년 언니와 84학번 형(선배) 때문이었다. 둘과 정말 친했다. 언니는 나랑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나중에 꼭 히말라야에 같이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형은 에베레스트에서, 언니는 설악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술만 먹으면 둘이 자꾸 눈에 아른거려서 매일 울었다. 꿈에도 자주 나왔다. 등반을 통해 그들의 못다 이룬 꿈과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꼭 형과 언니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후엔 그들이 꿈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언니와 형은 히말라야가 됐다.”
신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히말라야의 고봉, 그곳에 오르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두 번째 원정은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가셔브룸 2봉(8035m)으로 갔는데, 정상을 앞두고 얼음 화살이 온몸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려도 정상에 꼭 오르고 싶었다. 학교의 졸업생 대표로 왔다는 책임감, 가족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 없었다. 흔히 고산에서는 정신을 잃는다고 하는데,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정상을 찍고 무사히 귀환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8000m가 됐다.
“가셔브룸 2봉은 결혼 후 다녀온 원정이었는데, 당시 위성 전화로 아이들과 통화할 때 매번 눈물이 날 정도로 보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공항에서 아이들을 마주했는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안 놓더라. 엄마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만일 내가 혹시 잘못됐을 때 자식들에게 남을 상처를 생각하니 맘이 아팠다. 그때부터는 낮고 안전한 구간의 산으로 다녔다. 산악인이기 전에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과 사람
8000m를 대신하여 낮고 짧은 구간의 산을 다녔고,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겨울마다 스키를 탔다. 공교롭게도 산악스키 선수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한창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스키를 탈 때가 있었다. 우연히 산악계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산악스키 아시안컵 대회를 권유했다. 등산과 스키를 워낙 좋아했는데, 둘 다 할 수 있는 장르가 산악스키더라. 당시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라서 장비를 어렵게 구했다. 발 사이즈보다 큰 부츠라 경기 내내 물집으로 고생했지만, 3위란 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 산악스키 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후엔 실업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가르치는 게 천성인 것 같다.(웃음) 내 자식에게는 소고기를 못 사줘도 선수들과는 자주 소고기 회식을 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아웃도어학과 교수, 산악잡지 편집장, 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이렇게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산에서 단련하고 쌓아온 경험과 교육자로서의 DNA가 많은 도움을 줬다. 교사를 그만둔 후 운명처럼 교수 제의가 왔는데, 그간 교사와 산악인으로 쌓은 내공 덕분에 무사히 할 수 있었다. 다만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제자들과 학교에 미안함이 크다. 편집장 시절엔 전문성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학예사로서는 산악인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유물을 박물관 수장고로 가져왔다. 이 모든 건 산을 좋아했기에 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산을 통해 연을 맺은 이들의 격려와 신뢰 덕분이었다. 나의 쓰임새를 알아봐 준 이들에게 항상 감사한 맘으로 살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다.”
현재 그녀가 일하고 있는 국립산악박물관은 2014년에 산악 문화의 대중화를 목표로 개관했다. 매년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으며, 유물 수집 및 보존, 연구와 교육, 전시 및 학술 업무 등을 통해 산악 문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산악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습득한 그녀는 편집장 이력과 교수 시절에 진행했던 전시와 학술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학예 연구에 매진 중이다.
경이로운 삶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 위주의 문화 때문에 여성 산악인으로서 힘들었던 경험도 있었을 터.
“대학 시절엔 여자들도 함께 등반했는데, 주위에서 여자들은 졸업하면 나오지 말고 집에서 애들 잘 키우라고 그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기와 승부욕이 생겨서,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산에 다녔다. 실제로 언니들은 다 결혼 후엔 등반을 안 했다. 나만 아직 유일하게 등반을 한다. 예전에 산 관련 일을 할 때 여자가 업무 분담과 지시를 한다고 말을 안 듣는 남자 분들이 더러 있었다. 결국 그들의 일도 내 몫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텼다. 언제나 ‘여자’가 아니라 동등한 ‘산악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알피니스트로서 30년 이상 산에 올랐는데, 산은 그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산 덕분에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 등반은 한계를 넘기 위한 행위이자 몰입도가 높은 스포츠다. 한계가 높을수록 도전하는 짜릿함이 크다. 그것을 극복했을 때 생기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됐다. 올림픽 메달처럼 외적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 보상이 크다. 도전을 완수하는 과정, 이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아줌마 박경이라 할지라도, 산에 올라서 정상에 서는 순간 ‘산악인 박경이’로서 깃발을 꽂는 것이다. 한계, 몰입, 성취. 이 3박자가 내 삶에 큰 행복이었다.”
끝으로 트레킹 입문자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고산 트레킹을 꿈꾸는 중년이 많은데 국내에서도 준비할 수 있다. 겨울의 설악산이나 한라산은 히말라야에 버금가는 강추위와 거친 환경을 자랑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낮더라도 그런 산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론 마스크가 사라지는 세상이 오면,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떠나는 것이 소박한 목표다. 공적으로는 여성 산악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관련된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역사에 가려진 여성 산악인을 조명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열등감에서 나온 오기였다”라고 말했다. 여자, 작은 체구, 고소공포증. 핸디캡으로부터 생긴 열등감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패배감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오기를 꾸준한 실천으로 옮겼고, 목표를 이루겠다는 집념과 끈기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알피니스트의 경험은 그렇게 그녀의 삶을 바꿨다.
진정한 알피니즘의 조건은 “미터가 아니라 태도”라며 “결과보다는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산악인의 전부가 아니다. 실전을 위해서 훈련을 꾸준하게 하고, 극한의 순간일지라도 동료와의 협동심을 발휘해야 비로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산이 좋아도,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연습을 통해 쌓은 내공이 없다면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녀의 경이로운 삶은 좋아하는 산과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과정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결국 유종의 미는 과정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멋지게 완수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인플루언서’(Influencer)라는 말이 있다. 영어로 ‘영향을 주다’라는 뜻의 ‘인플루언스’ 뒤에 접미사 ‘er’을 붙여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칭한다. 연예인, 운동선수 혹은 잘나가는 유튜버 크리에이터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플루언서’로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부자다. 특히 부자들의 삶에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경매시장에 나온 예술품은 범상치 않은 이의 손과 손을 거치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낸다. 그들의 입소문을 타면 예술의 가치가 올라갔고, 문화로 정착했으며, 새로운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했다.
‘부’를 업고 문화를 껴안다
재력을 쌓아올린 부자들은 먹고사는 일에서 해방되자 규칙을 정하고 그들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최고급, 최상품, 최고 가치는 부자들의 눈썰미에 최적화되어 분류됐다. 도시가 생겨나고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 예술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자는 결국 시간과 정서적 여유가 있는 부자들이었다. 먹고사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이들은, 예술세계를 알면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과 카타르시스가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인플루언서였던 그들은 시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을 찾아내고 성장시켜왔다. 당장 빵 한 조각이 없어 굶어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 예술을 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예술과 문화에 대한 지원은 결국 부자들이 했다. 그것은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였다.
예술과 학술 활동을 후원하고, 문화 가치의 보존에 힘쓴 역사 속 수많은 부자 중에는 15세기의 메디치 가문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섬유 사업으로 가세를 키워 금융업으로 성장해 유럽 최고 부호가 된 가문이다. 막대한 자본을 기반으로 피렌체 정치도 좌지우지했다. 그다음으로 한 것이 바로 예술인 후원. 온갖 고서를 찾는 책 사냥꾼을 고용해 전 세계의 서적을 모았고 문화, 조각, 회화는 물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등 14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예술 작품을 메디치 가문이 보존했다.
한국판 메디치 가문을 꼽자면, 간송 전형필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넘어가거나 훼손, 말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집하고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간송은 증조 때부터 배우개(현 종로4가) 중심의 상권을 장악해온 대부호 집안의 상속권자였다.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중국어 역관이자 서화가, 수집가였던 오세창과 함께 민족문화재 수집 보호에 힘을 쏟았다. 대대로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눈썰미, 그리고 두 사람의 민족문화운동에 감명을 받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순조롭게 문화재를 회수했다.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했다.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고려자기와 조선자기를 비롯해 불상, 불구, 와전 등의 문화재도 수장했다.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해 중국 역대 미술품도 수집했다.
제2의 메디치 가문을 꿈꾸는 ‘메세나’
지난해 가수 헨리가 10년 동안 써왔다는 바이올린이 자선경매에서 1000만원에 낙찰되는 모습이 MBC의 ‘나 혼자 산다’를 통해 전파됐다. 이 낙찰금은 ‘2017 오사카 국제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하고 ‘2018 티보르바르가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 김주선 양에게 전해졌다. 현재도 다양하고 굵직한 무대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김주선 양이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기업의 지원이 있었다. 2013년 LG(회장 구광모)와 함께하는 사랑의 음악학교 장학생, 2014년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몽구) 아트드림콩쿠르 장학생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할 수 있었다.
‘메세나’는 기업들이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를 지원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현재 249개 기업이 (사)한국메세나협회에 가입해 문화 지원활동 분야에서 사회 공익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원 규모나 스케일도 꽤 크다. CJ문화재단은 음악 장학생을 선발해 청년 음악가를 후원한다. 특히 2014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후원을 시작해 2018년부터는 공동 주관사로 대회 운영을 함께한다.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이끌어가는 것 또한 대중예술과 창작자를 돕는 사회 공익 사업 중 하나. 한류 문화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보니 대중문화 지원 활동이 눈에 띈다. 두산그룹(회장 박정원)은 매년 두산아트센터에서 청소년아트스쿨이라는 워크숍을 열어왔다. 우리나라 최고 연출가와 극작가를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무대예술에 관심 있는 청소년에게 뜻깊은 프로그램이다. 연출가 박근형, 김수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연출가들이 참가해 청소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어줬다. 한화그룹(회장 김승연)의 한화청소년오케스트라도 반향이 크다. 2014년부터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평소 클래식 악기를 접하지 못한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연주를 가르치고, 연주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년에는 천안과 청주 지역 청소년들에게 정통 클래식 악기를 가르쳤으며 연말에는 이틀에 걸쳐 정기 음악회도 열었다. 이러한 각 기업들의 활동은 더 나은 예술 환경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미래 인재를 위한 소중한 씨앗 뿌리기가 되고 있다.
아이오바이오가 지난 5월 10일부터 3일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41차 아시아‧태평양치과의사연맹 총회, 제54차 대한치과의사협회 종합학술대회, 제16차 서울국제치과기자재전시회에 참가해 행사장을 찾은 치과 업계 관계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이오바이오는 이번 2019 APDC·SIDEX를 통해 신제품 ‘큐레이캠 프로(Qraycam Pro)’를 최초 공개했다. 큐레이캠 프로는 지난 3월 광학식 치아우식 진단장치로 2등급 의료기기 허가를 받은 진단 장비다. 이 신제품은 기존 장비보다 고해상 이미지를 자랑하며 경량화까지 이뤄내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오바이오는 행사를 통해 검사, 평가, 진단, 치료, 관리로 구분되는 5단계 진료시스템을 강조했다. 전반적 치아 상태를 진단하는 스크리닝과 치아 이상 발견 시 정밀검사를 진행하는 평가가 전문화된 시스템이 정착할 때 진료의 전반적인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 아이오바이오는 5단계 진료시스템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제품이 포함된 큐레이 패키지 상품도 행사를 통해 공개했다.
아이오바이오 윤홍철 대표는 “새로 출시된 큐레이캠 프로와 5단계 진료시스템에 대한 치과의사들의 높은 관심을 실감했다”며 “구강건강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큐레이 기술의 보급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고 말한 도산 안창호는 그 모든 위업을 아우를 수 있기에 진실이 화두인 요즈음,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태산처럼 서 있는 거목이다. 대학 시절 처음 도산의 존재를 접한 후 평생 동안 그를 사숙했다. 일과 삶 모두에 도산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산 김재실(金在實)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지금 시대야말로 도산의 신념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올해 72세인 그가 평생을 바칠 정도였던, 도산에게서 발견한 거대한 화두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는 유독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1878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했다. 그야말로 조선 말기의 혼돈과 신문물의 합리주의를 동시에 겪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연설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적이고 신중한 조직가였던 도산 안창호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재미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바로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창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기보다는 지적인 조직가로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민족의식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오가며 벌인 그의 행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통해 오늘날에도 표표히 흐르고 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어요.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기 위해 조직됐죠. 흥사단 일을 하느라 대학교를 휴학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는 도산 선생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흥사단을 어떻게 전파하느냐만 생각하며 살았죠.”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후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남 천안이 고향이며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산 안창호와 만나게 된다.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흥사단은 유력한 사회인사들이 청년 시절 거치는 대표적인 모임이기도 했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준영, 순천향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윤배, 교육부장관을 지낸 황우여가 그 면면이다.
흥사단에 바친 청춘
흥사단 활동은 김 회장의 젊은 시절 꿈이 신문기자가 되게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흥사단에서 라는 잡지가 나와요. 왜 인가 하면 도산 선생의 말씀 중에 ‘기러기는 항상 줄을 맞춰 다닌다’는 말에서 따온 거예요. 그래서 흥사단의 상징이 기러기이기도 하죠. 이걸 제가 3년 동안 편집하고 책을 냈어요. 그래서 언론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가장이 되자 그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했다.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죠. 그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죠.”
도산의 삶에서 배운 교육자의 삶
산은을 나온 김 회장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현재는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그는 도산이라는 자신의 롤모델을 놓치지 않았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으며, 흥사단 이외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에 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흥사단은 나이 제한이 없어요. 흥사단 후배들을 제가 많이 만났죠. 대학생활 아카데미 회장,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교사도 했으니. 그때 가르친 고등학생들이 지금 칠십이 다 됐어요(웃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그렇다면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도층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지도층이 거짓말을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도산은 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유혹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이였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을 중심으로 청년내각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도산이 그 제안을 거절했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도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해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설립됐는데 도산이 5월 25일에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죠.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돈을 모아서 상해에 지원금을 보낸 것도 도산의 공이라 할 수 있죠.”
‘도산의 희망편지’로 청년들에게 희망을
김 회장은 도산을 가리켜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닮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됐죠.”
그는 도산의 사상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근거를 도산의 말들에서 찾는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그리고 지식의 자본, 마지막으로 금전 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으며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이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김 회장은 도산이 말한 ‘힘’을 믿고 ‘도산의 희망편지’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2016년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요즘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을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략 2만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그 글귀들을 모아서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생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1973년, 사업회는 도산의 묘소를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서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에는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0일이 되면 도산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 도산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됐어요. 그 사건에 도산의 제자 60여 명이 잡혔기 때문이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산은 초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병보석을 나와서 다음 해
3월 10일에 사망하시고 말았죠.”
또한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도 책자로 발간했다. 청소년들 대상으로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고 한다. 글짓기 공모도 매년 실시하여 도산의 탄신일인 11월 3일에 시상식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그야말로 도산 안창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
사업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김 회장의 정의와 묘하게 부합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이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란 바로 ‘뭔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면 안 되죠.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도산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성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이 많이 드는 걸 피하려면 공동체에 속하는 게 좋습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사람 대하는 법을 간략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요즘은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문자도 있잖아요. 그런 도구들로 관심을 가져주고 표현하다 보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거죠.”
도산 정신이 뿌리 내리도록 전파
“도산 선생은 정말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정의하면서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산을 불러왔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도산의 마음은 김 회장을 통해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응축하고 있었다.
“날 기억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김재실 회장은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왔는데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고 밝혔다.
그때는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백인 청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걷기 힘들었던 다리가 동양의 비술을 만나자 5분 만에 나아버렸다. 한의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반드시 이 학문을 익히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한의대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한의사 국가고시 사상 최초로 합격한 백인이 되었다.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드 로이어(Raimund Royer·53) 센터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푸른 눈의 한의사. 많은 언론에서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이 수식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보인다. 한의사라는 단어보다는 푸른 눈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으로 인해 그는 역경도 겪었고 혜택도 받았다.
오스트리아인인 그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7년.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동양의 아시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았고, 그중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고.
“당시 한국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이었으니까 유럽에서 한국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어요. 그렇게 무작정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도시의 모습이었죠.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은 알프스 산맥의 작은 동네 출신인 저를 사로잡았어요.”
한국에서 지내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노란띠를 매고 한창 재미가 붙을 무렵 훈련 중 발목을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한의학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발목이 다쳐서 갔는데 엉뚱한 부위에 침을 놓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해서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항의했어요. 그런데 5분 만에 통증이 사라지면서 걸을 만해지더라고요. 마법 같았죠. 한의원 특유의 한약 냄새, 약장의 모습 등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알아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무술처럼 엄청난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통해 체계화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절 놀라게 했어요. 당장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한의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주변의 만류도 컸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알아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 쪽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유명 한의대에 입학 가능 여부를 문의했는데 거절한다는 회신이 왔다. 이미 한 차례 외국인이 도전했다가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기도 하고, 외국인이 제대로 된 수강이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한국어로)대로 그는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내였다.
한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해서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문과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해서 강릉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배웠다. 그때 대관령 자락에 있는 빈집에서 장작불을 지펴 가마솥밥을 해먹고 다녀,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까지 들었다.
그 후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대구한의대(당시 경산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원하던 한의대생이 됐지만 자격을 획득하기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1993년에 약사에게 한약 조제권을 주는 것을 놓고 한의대생들의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 다른 학생들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받았죠. 어렵게 한의대생이 됐는데 말이죠. 그리고 1995년에 약학대학 안에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문제 때문에 또다시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는 안 되겠다 싶어 강의를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교수님들이 파업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정작 수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한문이 낯선 것은 한국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전공 수업이 익숙해지면서 성적은 점점 향상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양인 최초 한의사라는 감격적인 타이틀을 따냈다. 아직까지도 서양인 한의사는 그가 유일하다.
한의사가 되고 난 후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가 한의학의 세계화다. 자생한방병원에서 그에게 국제진료센터를 제안했을 때 어렵지 않게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효과가 좋고, 체계적으로 발전해온 한의학이 아직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제 고국에 인접한 독일의 경우 TCM(중의학) 관련 단체만 60개가 넘어요. 소속된 양의사들이 3만~5만 명 정도 돼요. 한국의 한의사보다 많은 셈이죠. 이들은 양의학의 테두리 안에서 침술과 같은 동양의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벽이 너무 높아요. 왜 이렇게 싸우나 의문이 들 정도죠. 확실한 건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분명 한의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거예요. 특히 한약의 우수성은 중의학이 못 따라옵니다. 부작용 적고 효과 좋은 한약의 장점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의학을 알리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CNN 등 다양한 해외 매체와의 접촉을 통해 한의학의 장점을 알렸고, 국제학술대회 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한한의사협회에 소속돼 일하기도 했다.
의사로서의 그는 어떨까. 병원 관계자는 그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 실적만으로도 병원 내에서 상위권이라고 귀띔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용하다는 소문이 난 덕분이다.
“이젠 고향이에요.” 한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 한국 생활 30년. 어지간한 젊은 청년들보다 한국 생활을 오래한 그다. 그럴 수밖에.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푸른 눈’에 가려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한의학을 아끼고 사랑하며, 환자 걱정을 멈추지 않는 그. 이제 그를 바라볼 때 인종을 구분하는 수식어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멋진 韓醫師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다이어트 성공요인으로 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의지’다. 주변의 도움을 받더라도 정작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없다면 체중감량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일 년을 기점으로 보더라도 의지가 강했던 새해와 달리 시간이 한참 지나면서 다이어트 결심이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다. 흔히 많이 하는 금주, 금연 결심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 ‘의지’가 다이어트 성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 자료가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추석과 설날이라는, 고칼로리 음식 섭취가 집중돼 체중이 늘기 쉬운 기간을 설정한 부분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최대 명절로 꼽히는 설날과 추석 중 어느 때 다이어트가 더 어려울까? 또한 다이어트 성패에 ‘의지’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까?
비만치료 특화병원인 365mc 비만 클리닉은 설날과 추석 두 명절 전후 체중 변화에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분석했다. 365mc 전국 16개 지점에서 체중 관리를 받은 7340명을 대상으로 했다. 2015년 추석 연휴(2015.9.26~29) 전후 1주 이내로 각각 한 차례 이상 병원을 방문한 이들과 2016년 설날 연휴(2016.2.7~10) 전후 1주 이내로 각각 한차례 이상 방문한 이들의 의무기록을 각각 분석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추석이 설날보다 체중을 감량한 사람의 비율이 적었고, 평균 체중 감량 폭도 낮았다.
추석 전후 일주일 간 방문한 3649명 중 체중이 500g 이상 감량한 사람은 1567명(42.94%)이었고, 500g 이상 늘어난 사람은 762명(20.88%)이었다. 반면, 설날 전후 일주일 간 방문한 환자 3,691명 중 체중이 500g 이상 감량한 사람은 1868명(50.61%)이었고, 500g 이상 늘어난 사람은 640명(17.34%)이었다. 설날과 추석 전후 체중변화를 비교할 때 500g 이상 체중을 감량한 사람의 비율은 설날이 7.67% 높았고, 500g 이상 체중이 증가한 사람의 비율은 설날이 3.54% 낮은 것으로 나타나 의미있는 차이를 보였다. 또한 설 명절 전후로 평균 체중 감량은 540g인 반면, 추석 명절 전후 평균 체중 감량은 350g으로 평균 체중 감량 폭도 추석이 설날보다 낮았다. 참고로, 500g은 리우 올림픽 금메달 무게에 해당된다.
이번 연구를 진행한 365mc 식이영양위원회 김우준 원장은 두 명절간 체중 감량의 차이에 있어 ‘새해 결심’이라는 의지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 원장은 “비슷한 풍습이라도 추석 명절 기간보다 설날 명절 기간에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사람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흔히 다이어트의 성패는 방법보다는 ‘의지’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인데 이를 어느 정도 입증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또 “특히 이번 연구결과를 통해 ‘새해 결심’이 다이어트에 있어 좋은 습관을 만들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일부 확인시켰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 결과는 이달 초 개최된 2016 국제비만학술대회(ICOMES)에 ‘새해 결심과 다이어트 결과에 대한 연계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레코드판에는 욕심이 많았으나 오디오 기기에는 욕심을 부릴 형편이 못 되어 결혼 후 얼마간은 야외휴대용 전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당시 국산 중에서는 가장 낫다는 ‘별표 전축’을 구입했다. 이것을 들여놓은 날은 마치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필자가 이 별표 전축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뉴욕대학교 폴리테크닉대(Polytechnic Institute of New York)의 방문교수로서 19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갈 때였다. 이때쯤은 전축도 상당히 낡았고 또 아들 넷을 동반하자니 짐이 많아 도저히 이것까지 가져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얻은 셋집에서 모처럼 음악이 없는 삶을 살던 어느 날, 뉴욕의 5번가를 따라 한인상점들이 많은 지역을 걷고 있는데 ‘Fisher Audio Sale!’이라는 광고가 필자의 눈을 때렸다. 당시까지 필자는 외제 오디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지도교수이셨던 C교수께서 항상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Fisher 오디오’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포에 들어가 보니 물론 교수님 댁 것과 같은 고급 모델은 아니었지만 성능이나 모양도 그럴듯하고 가격도 큰 무리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 이 오디오는 귀국 후에도 친구들이 ‘서린 카페’라고 부르던 필자의 서린아파트 거실을 차지하고 가족들은 물론 놀러오는 친구들에게 많은 음악을 선사하였다.
1990년 초, D건설에 근무하던 친구 K군이 동대문운동장 옆 민자 지하주차장 건설 현상공모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다행히 이 작품이 당선되자 그 친구는 음악을 좋아하는 필자가 제대로 된 오디오 하나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며 돈 대신 오디오를 한 세트 기증하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당시 필자는 전설적인 DJ 최동욱씨와 몇 번 방송을 같이 한 적이 있어서 상의해보니 영국의 B사 제품을 추천하며 용산 전자상가에 있던 ‘태양오디오’라는 B사 대리점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B사 오디오보다 기기별로 특성이 있는 컴포넌트들을 모아서 꾸며보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프리앰프 분리형 Audio Innovation 진공관앰프, Thorens 턴테이블, Sony CD플레이어, Teac 카세트데크, Elac 스피커 등 최고급은 아니지만 매우 실용적인 컴포넌트로 구성된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Fisher를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 오디오로 인하여 ‘서린 카페’의 격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친구들도 더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용인으로 이사 온 후인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가끔씩은 친구들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곤 하였다. 최근에는 이 오디오를 쓰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수년 전에 구입한 Teac 소형 올인원 오디오로 종종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이 오디오는 LP나 카세트테이프의 음악을 CD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옛날에 좋아하던 LP음악을 차에서 들을 수 있도록 CD에 녹음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필자와 매우 가까운 친구인 (재)월드뮤직센터의 강선대 이사장은 필자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음악 수집광으로, LP나 CD만 해도 필자의 10배 정도인 수 만장을 가지고 있다. 또 음악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관련 책자, 외국의 각종 민속악기 등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 그는 특히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에 많은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필자는 명지대 교양학부에 ‘세계의 민속음악’이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그를 겸임교수로 초빙하도록 하였다. 이 강좌는 수년간 인기리에 운영되었다. 우리들은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을 토대로 전 세계 음악자료의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아카이브와 국내외 음악 관련 학술 연구 지원 및 세계음악의 대중적 보급을 위한 세계음악문화연구소 등의 설립을 추진해 나가는 한편, 다문화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고 나눔과 소통을 도모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법인을 설립할 필요가 있음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 7월, 강 이사장을 중심으로 필자와 몇몇 사람이 모여 월드뮤직센터 설립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약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소장품을 옮겨온 후 정리를 시작하였고, 2011년에는 국내외 월드뮤직 전문가 및 활동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12년 11월에는 (재)월드뮤직센터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세계 음악학회와 공동으로 “다문화 사회와 음악: 글로벌 현황과 우리의 실천적 과제”라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2013년에는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였고, 북촌우리음악축제를 후원하기도 했다.
2014년 3월에는 국민대 김희선 교수를 소장으로 세계음악문화연구소를 설립했고, 4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 여러 단체의 후원을 받아 Asia Society와 공동으로 ‘뉴욕 한국음악 페스티벌:산조와 판소리’(New York Korean Music Festival: Sanjo and Pansori)를 주최하였다.
또 9월부터 11월까지는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90분간씩 국민대학교 명원민속관(한규설 대감댁)에서 강 이사장, 음악평론가 황우창, 세계음악학회장 박미경 등의 강의로 월드뮤직 가깝게 듣기 시민강좌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비엔날레로 개최되는 아시아 월드뮤직 어워드를 제정하여 제 1회 수상자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그가 이끄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선정하고 10월 27일 13시 30분에 예술의전당 푸치니 홀에서 시상식을 가졌다. 그 다음 날은 관계자들과 더불어 그들의 공연을 만끽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