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패이고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온 세월. 아팠던 일은 아프지 않게 마음 속에 저장한다. 잊고 싶은 순간은… 담담하게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과거는 낭만으로 포장돼 기억되기 마련. 그게 나이 듦의 특권일 수도 있다. 평양식 맛집으로 소문 자자한 봉화전 주인장 김봉화(金鳳華) 씨를 만났다. 고운 얼굴 수줍은 미소가 기억하는 옛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봤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 내려 멀지 않은 거리에 봉화전이 있다. 강남이라고 해서 멋들어진 건물 자태 운운하면 곤란하다. 건물만 똑 떼어 어느 시골 마을 장터에 갖다 놔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 정감 가는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 봉화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사진작가를 앞에 두고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봉화 씨. 주제는 전쟁이었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6·25전쟁 때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과 드라마보다 더 무거운 옛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심히 들려줬다. 직장인들이 시끌벅적 점심을 먹고 돌아간 후, 피곤할 만도 할 텐데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 좀 끝내는가 싶더니 음식 솜씨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다.
“저희 집안이 경주 김 씨 왕손 집안입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왔어도 음식은 고급스럽게 먹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잡아두고 요리를 가르친 건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가져다 먹고 또 나이가 들다 보니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요리나 하면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정말 우연하게 봉화전을 열었습니다.”
평양식 온반과 어복쟁반, 특히 부침 전이 맛있기로 소문난 봉화전.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봉화전이 ‘경북 봉화 지역의 전’을 말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김봉화(봉화)가 전하는 이야기[傳]’란 의미다. 광고기획사 다니던 큰아들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고민해서 만들었다.
“한 학생이 그러더래. ‘봉화전’ 어떠냐고요.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나는 싫었거든요. 어쨌든 봉화전이 식당 이름이 된 거예요.”
평양 양반댁 요리의 정갈함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췄기에 그녀 스스로도 전통이라는 말로 봉화전의 요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요즘 스타일이에요. 옛날 잔칫집에서는 고기를 꼬치에 크게 꼽고 전을 부쳐냈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음식은 그저 먹기 좋게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북식 배추김치는 여기처럼 배추 전체에 양념을 치대지 않아요. 이파리 속에다 단정하게 넣어요. 그 상태로 자르면 정말 꽃 같아요. 예쁠 뿐만 아니라 아삭아삭하고 맛있어요. 그런데 싱겁죠. 평안도 사람 입맛에는 맞겠지만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창기에는 전 부칠 때 전통식대로 돼지기름도 써봤지만 제가 직접 기른 돼지도 아니고 못 믿죠. 지금은 콩기름에 부쳐요. 최대한 평양 맛을 고수하되 요즘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을 많이 고려합니다.”
요즘은 봄철이라 두릅전을 계절 음식으로 내놓는데 인기가 좋아서 금방 동날 정도란다. 그녀는 매일 시장에 가고, 전과 함께 먹을 반찬도 그날그날 바꾼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아야 하잖아요. 촌 음식 그대로 해주면 안 먹어. 내가 여기에 오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고민하게 돼요. 젊은 사람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고맙죠. 잘해주고 싶고 과일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요. 이 나이에 돈만 벌겠다고 나와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날 찾아온 인생 일탈 ‘봉화전’
봉화전을 열기 전까지는 가족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였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막내아들 때문이었다며 또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 자리가 원래는 곰장어 집 자리였대요. 2011년에 막내아들이 ‘엄마 나 조그마한 가게 두 개 계약해놨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그러는 거야. 여기 와서 보니까 엉터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들한테는 표시 안 했어요. 그런 얘기하면 실망하잖아요. 이미 돈도 다 줬더라고요. 여기서 식당했던 사람마다 망했다는 얘기도 들렸어요. 일단 다른 가게는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포기했어요. 이것만 남겼죠. 아무 경험도 없는데 자신감이 있었겠어요?”
자리만 봐주고 발을 빼도 되나 싶었는데 아들이 다시 부탁을 해왔다.
“아들이 ‘엄마, 3일만 봐주세요. 여기 일하시는 분들한테 요리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셔요’ 그러는 거야. 내가 속으로 3일 가르쳐서 되면 뭐든지 잘되게?(웃음) 그랬어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들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투자했는데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약속한 3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사할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손님들이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잠깐 동안 80만 원어치 팔았어. 막 음식을 해 달라는데 어쩌겠어.”
정작 일을 벌인 아들은 개업 한 달 만에 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가버렸다. 첫날부터 대박식당으로 소문이 나더니 문 연 지 얼마 안 돼 방송사에서 촬영까지 해갔다. 맛집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난 ‘수요미식회’(tvN)에 소개되면서 대한민국 맛집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어느 날 가수 이현우가 왔다는 거야. 누군가 하고 봤더니 여기서 먹고 가곤 했대요. 그 사람이 ‘수요미식회’에 소개한 거예요. MC인 신동엽 씨랑 전현무 씨도 와서 우리 음식 먹어보더니 정말 맛있다는 거야. ‘우리 아들 망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집을 떠나면 안 되겠구나’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요리하다
봉화전을 열 때 아들이 그녀에게 알려 달라는 요리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집에서 노상 해주던 음식이었어요. 그게 가장 맛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제가 요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젊었을 때는 남편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을 다녔어요. 남편이 방산사업을 했는데 외국 바이어들을 저희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호텔에 가봤자 별 볼일 없잖아요. 그때마다 남편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 우리나라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업도 잘 풀렸습니다. 방부제 들어가지 않은 빵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어서 오븐을 사서 빵도 구웠습니다. 제빵사 자격 이런 건 없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몇 년 전 오랜만에 아들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만든 빵을 기억하더라고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 피란 통에도 좋은 것 먹고 곱게 자란 그녀였지만 과감한 면이 있었다. 좋은 선 자리 마다하고 연애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잘사는 집안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어요. 서너 군데서 선도 들어왔고요. 그때는 스무 살만 넘어도 빨리 시집가라는 분위기였잖아요. 근데 제가 꿈에서 어떤 키 큰 남자를 봤는데 누군가가 ‘저 사람이 네 신랑감’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 꿈을 꾸고 나서 한 일주일 됐나? 키 큰 공군사병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리고 3년 동안 저를 쫓아다녔어요. 제 남편이요.”
열두대문집 손자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내세울 것 없었던 남편을 어느 날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내심 걱정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사람 괜찮구나”였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큰 회사의 커리어우먼이었던 김봉화 씨는 남자 친구이던 남편이 군 제대를 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에 용돈까지 줘가며 연애에 푹 빠져 살았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생각날 정도.
“결혼식은 워커힐에서 했어요. 앙드레 김 웨딩드레스를 입었어요.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짧은 드레스였습니다. 훗날 남편에게 들었는데 돈 엄청 썼더라고요. 다 늙어가지고 얘기하더군요.”
사실 그녀는 돈에 대해 신경 쓰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편도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려 늘 최선을 다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남편은 살아 계신가요?”
기자의 질문에 김봉화 씨는 순간 멈칫했다.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다 포물선을 그리며 손을 내렸다. 눈가가 촉촉해지기에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에 가 있어요.(웃음) LA에 몸 관리하느라고요, 늙어빠져가지고서는. 거기 사촌들이 다 있어요. 나는 어딜 가도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여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친정에서도 못 자봤고요.”
어디든 함께 다녔던 남편은 환갑을 넘기고 몇 년 뒤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LA는 남편 살아생전 함께 다녀온 마지막 여행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상상하며 사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속 편한 방법이리라.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가 봉화전이다. 홀로 남아 방황하는 그녀를 위해 아들딸들도 발 벗고 나선다. 매일 추억을 다듬고 고향 음식과 벗하며 하루하루 예쁜 모습 유지하며 살아가길 자식들은 바란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 죽고 싶지 않아요.(웃음) 시장에 갔을때 새로 나온 봄나물 보면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요. 매일 여기에 나와서 메뉴 개발하고요.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제 인생이 아까워서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아야겠어요. 젊은 마음으로 살면서 아들딸하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연세를 물으니 “아직 백 살 되려면 한참은 남았다”며 한사코 나이 공개를 하지 않는 그녀. 과거를 추억하기보다 이제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마음 변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봉화전이 자랑하는 메뉴
깻잎전, 육전, 돼지고기전, 고추전
봉화전 인기 메뉴. 깻잎전과 고추전에는 소고기가 들어간다. 비결은 두껍지 않게 부치는 것. 평안도식 돼기고기전도 인기가 좋다. 삶은 돼기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사용한다. 원래 평안도 잔칫상에는 더 크게 꼬치에 꽂아서 내놓던 요리다.
평양식 온반
이북에서 잔칫날 먹는 대표 음식으로 원래는 꿩고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구하기 쉽지 않아 소고기를 쓴다. 육수는 삶은 양지머리와 꼬리뼈를 우려서 낸다. 삶은 소고기를 손으로 찢은 후 소금, 참기름,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대접에 밥을 퍼 담고 그 위에 소고기와 알맞은 크기로 부쳐낸 녹두전, 지단을 순서대로 올린다. 여기에 맑게 끓인 뜨끈한 온반육수를 부어 먹는다.
‘종로’와 ‘시니어’ 하면 여전히 탑골공원을 떠올리는가?
그러나 이제는 편견을 거둘 때가 됐다. 중장년을 위한 즐길거리, 먹거리, 볼거리가 즐비한 지붕 없는 아지트, 그 다채로운 경험의 시작은 종로3가역 5번출구를 나서면서부터다.
종로3가역 5번출구 #1 송해길
1. 송해길의 마스코트 ‘송해 동상’ 종로3가역 5번출구
2016년 명예도로로 지정된 ‘송해길’(수표로)은 종로2가 육의전빌딩부터 낙원상가에 이르는 240m 구간이다. 50년 넘게 종로구 낙원동 일대를 제2고향처럼 여기며 활동했던 방송인 송해를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거리다. 그 명성답게 곳곳에 송해 캐리커처가 붙은 가게들이 눈에 띈다.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오면 거리의 상징인 송해 동상과 팻말을 바로 찾을 수 있다.
2. 젊은 시절 속으로 ‘실버영화관 추억을 파는 극장’ 삼일대로 428
한국 영화 중흥기를 대표하는 개봉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단 하나의 극장이 있다. 바로 옛 허리우드극장인 ‘추억을 파는 극장’이다. 2009년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하면서 종로거리를 추억하는 시니어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55세 이상이면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타 상영관에 비해 자막이 크고 곳곳에 손잡이를 설치해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를 배려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바깥 활동을 꺼리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5월부터는 ‘종로는 맑음존’을 설치해 운영할 계획이다. 추억을 파는 극장 바로 옆에 마주해 있는 낭만극장은 영화 상영뿐 아니라 유리상자, 전영록이 출연했으며 김세레나, 송해 등의 공연도 이뤄진다.
3. 송해길 대표 맛집 ‘종로진낙지’ 수표로 122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먹방요정 이영자가 정우성과 함께 방문해 화제가 됐는데 원래도 송해길을 대표하는 맛집이다. 낙지볶음과 산낙지철판볶음 등이 소문날 만큼 맛은 보장됐으니 송해길 방문 시 잊지 말고 드셔보시길.
4. 노래 찐하게 부르고 싶다면 ‘송해길 가수 김미나 라이브 카페’ 수표로 125
성인가요 ‘만날사람’을 부른 가수 김미나가 운영하는 라이브 카페.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입소문 난 곳이다. 술 한잔 마시고 스트레스도 풀고, 노래 연습하는 장소로 좋다. 노래동호회나 출판기념회, 시낭송회 등 모임 공간으로도 애용되고 있다.
5. 따끈한 차 한잔 마셔요 ‘라이브 카페 스타하우스’ 수표로 120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카페이지만 평일 낮시간대에는 커피, 생강차, 유자차 등을 마시러 오는 손님도 많다. 코미디언이자 전문 MC인 김종수 사장이 평생 군대, 경찰서, 교도소 등지로 위문공연 다니며 받은 각종 상패가 벽면에 가득하다. 위문공연으로 사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미모의 아내 구현숙 씨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다.
6. 퇴근길 추억의 음악을 청하다 ‘청춘1번지’ 수표로 108
장민욱, 차영민, 강해룡 3명의 베테랑 DJ가 돌아가며 음악 선곡을 한다. ‘추억 더하기’ 메인 DJ 장민욱 씨도 오후 6시 이후엔 ‘청춘1번지’로 이동한다. 소장하고 있는 LP와 CD만 5000여 장. 원하는 음악을 DJ에게 신청해 들을 수 있다. 40~50대 이상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붐비는 시간은 오후 7시 이후다.
7. 색소폰 입문은 ‘효은 색소폰 클럽’ 수표로 107-1
송해길이 시작되는 육의전빌딩 뒤쪽 건물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효은 색소폰 클럽 엔터테인먼트’라고 쓰인 푯말이 보인다. 말 그대로 색소폰을 배우는 곳. 색소폰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힐 수 있다. 송해길에 사람이 와글대는 시간이 되면 남효석 대표가 종로3가역 5번출구로 나와 모임 홍보 차 직접 색소폰 연주를 들려준다.
밤거리의 낭만 ‘포장마차’ 종로3가 5번출구 일대
종로3가 5번출구의 밤 분위기는 ‘포장마차’가 책임진다. 서울에서 잘 알려진 포차거리 중 하나로 중장년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도 인기다.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포차 천막이 하나둘씩 올라가고, 퇴근시간 이후에는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띤다. 쭉 늘어선 포장마차 중 어느 곳을 가더라도 곰장어, 오도독뼈, 닭발 등 20가지가 넘는 다양한 안주를 즐길 수 있으니,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송해길에서 송해 선생을 만나다
“안녕하세요, 송해입니다! 나들이하기 참 좋은 계절이죠. ‘송해길’ 오시면 2000원으로 든든하게 우거지국밥 한 그릇 드셔보세요. 개그우먼 이영자 씨가 단골인 낙지집도 아주 맛있답니다. 락희거리도 한번 둘러보시고요. 최근엔 익선동 거리에도 젊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때론 사람 구경도 취미로 삼으면 좋지요. 천태만상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재미가 있거든요. 종로에 자주 오셔서 맛난 것도 드시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한창 좋은 시절에 활동했던 동호회에서 열정을 다 바쳤던 것 같아요. 걷는 게 좋았던 아마추어가 길 전문가가 된 거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나만의 길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걸었던 길처럼 사람들이 많이 밟지 않은 길, 숲길, 오솔길을 좋아해요. 그런 길 위주로 사람들과 함께 많이 걸었어요. 정말 그때는 열정적으로 길을 안내했죠. 그 래서 제 길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지금도 같이 걷는 거 같아요.”
산들네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신미숙(61) 씨는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걷는 게 좋아서 걷고, 책임감 때문에도 걸었다. 언젠가는 다리를 크게 다쳐 수개월은 절대 안정하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지만 그냥 배낭 하나 메고 밖으로 나갔다. 아픈 것보다 못 걷는 게 더 끔찍했다고 한다.
“한번은 무르팍 주변으로 통증이 심하더라고요. 그리고 넘어져서 또 다쳤어요. 그때도 의사가 걷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걸었어요. 지금은 오히려 근육이 튼튼해졌는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팠을 때 만약에 걷기를 멈췄다면 다시는 못 걸었을지도 몰라요.”
의사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따라야 하는 나이임에도 계속 걸어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했다. 신미숙 씨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했다.
“어릴 때 미호천이 흐르는 시골에 살았는데 부모님이 먼저 서울로 이사를 가셔서 저만 시골 친척집에 맡겨졌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죠. 신작로를 보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한없이 몰려왔어요. ‘저 길을 계속 따라가면 엄마를 볼 수 있을까? 버스를 탈 수 있겠네’ 하면서 말이죠. 그때부터 향수, 그리움, 고향, 부모님 등에 대한 마음이 길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것 같아요. 많은 길을 알고부터 더 열정이 생겨난 거고요. 도보는 제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정보 없이 길 안내 책자를 사서 보며 혼자 혹은 지인 몇 명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도보여행 카페에 들어가 활동했고 지금은 독립된 도보여행 모임의 좌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신미숙 씨는 카페지기로서 많은 이와 길을 공유하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부모, 자식, 직장인으로서 수고했던 회원님들과 아직도 생업의 현장에서 애쓰시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걷기를 통해 자연과 만나고, 신나는 인생을 꿈꾸는 신중년 세대의 건강한 카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나는도보여행’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휴일 오전, 전철 1호선을 타고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간다. 한산한 전철 안에서 시간여행자가 되는 상상을 한다. 인천역 앞에 있는 화려한 패루를 통과하면, 1800년대 말 인천 개항 시절의 풍경이 펼쳐지는 상상 말이다. 실제로 패루 너머에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곳에 새겨진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간을 되짚어보면, 나도 모르게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고 만다.
걷기 코스
전철 1호선 인천역▶ 제1패루▶ 차이나타운▶ 선린문(제3패루)▶ 자유공원▶ 제물포구락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 인천 중구청(옛 일본영사관)▶ 중구생활사전시관▶ 인천개항박물관(옛 인천일본제1은행)▶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옛 인천일본18은행지점)▶ 신포시장▶ 답동성당▶ 애관극장▶ 싸리재 카페▶ 전철 1호선 동인천역
인천 개항과 함께 형성된 화교 마을
1883년 인천 개항 후 청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독일인, 영국인들이 앞다퉈 제물포(지금의 인천항)로 몰려왔다. 항구 일대에는 각국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 극장, 학교, 호텔, 은행과 같은 서양식 근대건축물도 세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철도, 시외전화, 화폐, 구두, 등대, 담배 성냥, 축구, 야구 등 해외 문물도 물밀듯 들어왔다. 이 시절의 흔적이 제물포와 가까웠던 지금의 인천시 중구에 오롯이 남았다. 그 자취를 찾으며 질풍노도 같았던 인천의 근대사를 돌아본다.
출발지인 인천역부터 특별하다. 인천역은 1899년에 개통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종착역이었다. 인천역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우마차나 수로로는 반나절 이상 걸릴 길을 열차로 한 시간 만에 갔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겠다.
인천역 광장 맞은편에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 시에서 기증한 패루가 화려한 단청을 뽐내며 서 있다. 패루 사이로 차이나타운의 ‘T’자형 대로가 보인다. 차이나타운 골목마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대규모 중식당과 중국 간식 상점,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개항 후 중국 산둥성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살기 시작한 곳이다. 이때 정착한 화교들이 중국요리점을 열고, 한국인 입맛에 맞는 자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자장면의 대명사로 불렸던 ‘공화춘’의 우희광 씨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1983년에 문을 닫은 공화춘은 30년 뒤인 2012년에 ‘짜장면박물관’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옛날 공화춘의 인기는 신승반점, 만다복, 연경, 중화원 등이 잇고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요리 외에 화덕 호떡인 옹기병과 월병, 홍두병, 공갈빵 같은 중국 전통 간식도 재미 삼아 먹어볼 만하다.
뜨거운 옹기병을 뜯어 먹으며, 차이나타운 중간 지점에 있는 선린문(제3패루)으로 향한다. 3개의 계단을 지나 마지막 계단 위에 우뚝 세워진 선린문은 차이나타운 최고의 포토존이다. 선린문을 통과해 다시 계단을 조금 오르면 자유공원 입구와 만난다. 왼쪽 길에 초한지 벽화 골목이 있고, 오른쪽 길은 자유공원 산책로와 연결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인천 근대사 이야기
자유공원은 1888년 응봉산에 건립된 국내 최초의 서구식 근대공원이다. 공원 초입에 있는 석정루에 올라 인천 앞바다와 월미도를 조망하고, 한미수교 100주년(1982년)을 기리는 기념탑과 한국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둘러본 뒤, 제물포구락부로 이동한다. 제물포구락부는 자유공원과 이어진 계단 중간에 있다. 이곳은 개항 당시 제물포에 거주했던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인들의 사교장이었다. 하얗게 회칠한 외벽과 고풍스러운 홀이 인상적이다. 제물포구락부와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도 거리가 가깝다. 이 계단은 일본과 청나라가 각각 조계지를 설정하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계단을 경계로 북성동 쪽은 청나라의 차이나타운이, 신포동 쪽은 일본 건축물이 들어섰다. 계단 양쪽에 세운 석등조차 중국식과 일본식으로 구별돼 있다. 계단 상단의 공자상도 중국 쪽으로 약간 치우쳐 세워졌다. 외국인들이 조선 땅을 땅따먹기하듯 갈라놓은,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청일조계지 계단을 내려와 왼쪽, 중구청(옛 일본영사관)으로 가다 보면, 일본 적산가옥과 일본제1은행, 구 일본18은행과 같은 근대건축물이 모여 있는 개항장 거리를 만난다. 차이나타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다. 거리 입구에 있는 중구생활사전시관은 1888년에 개업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의 외관을 되살려 지은 건물이다. 귀부인이 머물렀을 법한 객실과 1960~70년대 인천 중구의 의식주 생활공간을 실감나게 재현했다. 나무 전봇대가 세워진 골목길과 문방구, 백항아리집(선술집), 극장, 다방, 의상실, 이발소 등 추억을 부르는 풍경이 마냥 반갑다.
전시관 옆 개항박물관은 옛 일본제1은행을 개조한 것이다. 1883년에 건축한 르네상스풍의 석조 건물로서 일본영사관의 금고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우표와 우편물, 우체통, 전보와 전화기, 경인선 기관차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라인에 있는 근대건축전시관은 일본제18은행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가사키 상인들이 상해에서 수입한 영국 면직물을 한국에 수출해 큰 이익을 얻자, 인천에 은행 지점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개항장 일대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과 소실된 건축물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인천과 서울을 연결했던 싸리재 고갯길
개항장 거리를 지나 먹거리 성지인 신포국제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포시장은 인천 개항 이후 형성된 인천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이다. 19세기 말 화교 농민들이 산둥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키워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신포국제시장의 시초라고 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먹거리도 풍성하다.
쫄면의 탄생지도 신포시장이며, 신포순대, 신포만두의 고향도 이곳이다. 주먹으로 깨 먹는, 단단한 공갈빵과 매콤한 맛을 강조한 신포 닭강정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다. 닭강정을 사려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골목 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다.
시장 골목 끝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답동성당과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을 만날 수 있다. ‘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을 지닌 애관극장은 1895년에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20년대부터 애관극장으로 불리며, 복합상영관이 주름 잡는 이 시대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설은 여느 극장과 비슷하고, 상영작도 같다.
흐뭇한 마음으로 애관극장을 구경하고,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고갯길, 싸리재를 걷는다. 옛날에 이 길에 싸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낙후한 거리가 되었지만, 1920년대 말부터 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한약방, 약국, 양화점, 포목점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서울 명동 못지않은 상권을 자랑했다고. 옛날 양복점과 병원 건물과 기록 사진만이 싸리재의 옛 영화를 증명한다.
최근, 뉴트로 열풍에 힘입어 싸리재의 아날로그 정취가 돋보인다. 그 중심에 ‘싸리재’ 카페가 있다. 지은 지 90년 된 목조 카페에서 노부부가 커피를 내린다. 카페 안쪽에는 노부부의 100년 된 한옥 살림집이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부는 수집한 축음기로 레코드판 음악을 들려준다. 마침 퀸의 ‘보헤미안랩소디’가 흘러나와 한껏 흥에 젖는다. 바리스타인 박차영 대표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하니 자신이 개발한 ‘커피봉봉’과 ‘싸리재’를 권한다. 모든 커피를 모카포트로 내려준다. 쌉싸래한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연유, 촉촉한 생크림의 조화가 감미롭다. 싸리재의 빈티지한 분위기와 포근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노부부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싸리재 카페에서 동인천역은 멀지 않다. 전철을 타기 전에 송현동 순대 골목이나 화평동 냉면 거리, 동인천 삼치 거리에서 요기를 해도 좋겠다.
주변 명소 & 맛집
신승반점과 명월옥
공화춘은 1983년에 폐업했으나 우희광 씨의 자손들이 공화춘의 손맛을 이어가고 있다.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신승반점이 그곳. 신승반점의 인기 메뉴는 돼지고기와 채소를 갈아 춘장과 볶은 유니자장면이다. 달지 않으면서 감칠맛 나는 자장 소스와 부들부들한 면발이 입맛을 당긴다. 흰 자장면이 궁금하다면 만다복(032-773-3838)을, 맛있는 짬뽕을 먹고 싶다면 복림원(032-773-8778)을 추천한다. 한식은 신포시장 가는 길목에 있는 백반식당, 명월집이 잘한다. 1966년에 개업한 식당이다. 7000원짜리 백반에 밑반찬만 열 가지. 여기에 곤로 위에서 푹 끓인 돼지김치찌개와 누룽지도 양껏 먹을 수 있다.
신승반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매일 11:00~21:00
명월옥 인천 중구 신포로23번길 41, 07:30~19:30(일요일 휴무)
송월동 동화마을
송월동 동화마을은 차이나타운과 이어져 있다. 2013년 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통해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예쁘게 꾸몄다. 입구의 아치문을 통과하면, 알록달록한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진다. 골목마다 도로시길, 빨간모자길, 전래동화길 등 테마가 있다. 동화 캐릭터 입체 조형물이 많아 곳곳이 포토존이다. 이 마을이 개항기 때 독일, 일본, 프랑스인들이 살았던 부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인천 중구 자유공원서로37번길 22(연중무휴)
짜장면박물관
1908년 차이나타운에 개업한 중식당, 공화춘의 내부를 개조해 2012년에 개관했다. 전시물을 통해 화교와 자장면의 탄생기, 전성기, 자장라면의 역사 등을 알 수 있다. 1930년대 공화춘 접객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실제 크기로 재현했다. 졸업식이나 운동회 날에 부모님과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공화춘 건물은 중국 산둥 지방의 장인이 참여해 중국식으로 지었으며, 2006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로 56-14, 09:00~18:00(월요일 휴관)
걷기 Tip
❶ 차이나타운은 골목이 많으므로 인천역 앞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지도를 받아, 갈 곳을 미리 표시해두는 게 좋다. 송월동 동화마을을 코스에 넣는다면, 맨 먼저 들르자.
❷ 신포시장까지만 걷는다면, 수인선 신포역에서 전철을 타면 된다.
❸ 개항박물관, 짜장면박물관, 중부생활사전시관, 근대건축전시관, 한중기념관 등 5개 전시관 통합관람권을 구매하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통합관람권 어른 3400원. 매달 마지막 수요일 문화의 날에는 입장료 무료.
짧지만 강렬하다. 자신의 몸무게보다 두 배, 심지어는 세 배가 넘는 무게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가 내려놓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남짓. ‘무거움’을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들어 올린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역도 라이트급에 출전해 용상, 인상, 합계 전 종목을 석권한 원신희(74)를 만났다.
“시골에 바벨이라는 게 있었겠어요? 빈 통에 모래랑 시멘트를 섞어서 만든 ‘돌역기’밖에 없었어요.”
또래 중에서 가장 힘이 셌던 그는 동네에서 돌역기를 들 때마다 “잘한다, 잘한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의 칭찬을 듣는 재미에 본격적으로 역도를 시작하게 됐다. 대전공업고등학교 역도부에 진학한 그는 1965년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추상(125kg)과 합계(392.5kg)에서 주니어 세계 신기록을, 인상(120kg)에선 주니어 세계 타이기록을 세우며 주목을 받았다. 혜성과 같이 나타나 1966년부터 12년간 역도 국가대표로 활약한 그는 “손가락이 좀 더 길었으면 더 잘했을 텐데 짧아가지고… 그래도 한의사이셨던 아버님이 달여주신 인삼 덕을 많이 봤어요” 하며 웃었다.
“아버님이 항상 술, 담배, 여자는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수촌에서 서로 눈 맞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전 워낙 이성관계에 둔해서… 연애도 안 하고 중매결혼으로 했죠. 아버님의 세뇌(?) 교육 덕분에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웃음)”
‘국가대표’ 하면 생각나는 곳이 바로 선수촌. 원신희는 1966년에 설립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태릉선수촌이 설립된 이후 한국의 스포츠가 발전하기 시작했어요. 운동생리학, 운동역학 등 스포츠과학이 접목되면서 체계적인 훈련이 가능했죠. 효과적으로 훈련을 하다 보니 성적도 잘 나오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절엔 헝그리 정신이 있었죠.”
스쿼트 훈련을 하고 나면 다리에 쥐가 나서 오르막길을 뒤로 걸으며 올라갔다. 바벨에 쓸려 손 가죽이 찢어지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 상처는 굳은살로 메워졌다. 마치 발바닥 같았다고 말하는 그의 손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굳은살 대신 흘러간 세월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름이 자리 잡았다.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죠. 힘들어도 참고, 포기하고 싶어도 이 꽉 물고 했어요. 죽도록 힘든 와중에도 근육이 붙고 새로운 기록을 내면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어요. 역도는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무게를 들어 올리는 순간 역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죠.”
1978년 전국체육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원신희는 1983년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역도 선수들을 육성했다. 그가 선수들을 가르칠 때마다 항상 하는 말이 있단다. 바로 ‘욕심을 버려라’다.
“기술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 몸을 내가 이길 때 비로소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해요. 역도도 마찬가지예요. 내 몸이 준비가 안 됐는데 무거운 무게를 들겠다고 하면 그건 욕심이죠. 그전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몸, 기초를 다지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금메달 3관왕의 영광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꼽았다. 라이트급에 출전해 인상(130kg), 용상(165kg), 합계(295kg)의 기록으로 전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한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개최국 이란의 잔머리 덕분(?)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세 종목의 시상을 따로 하지만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은 용상과 인상의 합계로만 시상해요. 근데 역도 강국인 이란이 종합순위를 올리기 위해 전무후무하게 아시안게임에도 세계선수권대회처럼 한 체급당 3개의 금메달을 건 거죠. 자국 선수가 금메달을 딸 거라고 확신했었나 봐요.”
그에게 금메달을 예상했냐고 묻자, 후보로는 거론이 됐다고 말했다.
“전년도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라이벌이었던 이란의 데나비 선수가 동메달을 따고 제가 4위를 기록했어요. 겨뤄볼 만하다고 생각했죠. 결국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만난 그를 꺾고 우승했어요. 아마 이란에서는 아차 싶었을 거예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은 중국을 비롯해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와 더불어 바레인, 이라크, 라오스 등의 국가가 처음 참가한 대회였다. 때문에 우리나라와 북한과의 종합순위 경쟁도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북한 선수와 처음엔 신경전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로 안 보는 척 힐긋힐긋 쳐다보곤 했어요.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다른 대회에서도 마주쳤는데 그땐 서로 인사도 건네고 대화도 나눴죠. 북한 선수가 밝은 표정을 지으면 남북관계가 좋았던 거고 서로 딴청 피우고 만나주지도 않을 땐 남북관계가 냉랭한 시절이었죠.(웃음)”
우리나라는 금메달 한 개 차이로 북한을 누르고 종합순위 4위를 기록했다. 금메달 3개를 보탠 원신희가 귀국하자 국민들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카퍼레이드는 물론이고 서울에서 지방까지 환영식이 이어졌어요. 심지어 제 고향에선 사물패까지 동원해서 잔치를 열어줬죠. 그 시절엔 그랬어요.”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그에게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딴 금메달이 더욱 값진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부상을 이겨내고 거둔 우승이기 때문이다. 1967년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당한 그는 선수생활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털어놨다.
“역도에 추상이라는 종목이 있었는데 무릎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기록을 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은퇴까지 고려했죠. 근데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부터 추상 종목을 폐지하더라고요. 저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 거죠.”
그는 메달을 따는 데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할 때 추상 종목이 폐지된 것처럼 말이다.
“메달은 하늘이 주는 선물 같아요. 노력한다고 다 목에 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원한다고 딸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비슷한 실력의 상대에게 패했을 땐 결코 그 사람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우승자에게 많은 관심이 쏠리는 법이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노력에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면 좋겠어요.”
“계상 씨 이것 좀 도와주세요.” 22세 여직원이 건네는 말에 그는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리지 않은가. 평생을 이사, 상무라는 호칭 속에 살던 그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동료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낯선 환경이 그는 괴롭지 않았다. 마치 새 인생을 막 시작하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이케아에서 변화된 삶을 즐기고 있는 이계상(李桂相·63) 씨 이야기다.
이계상 씨가 근무하던 곳은 영등포에서 실크로 유명했던 섬유회사. 지금은 역사 속 이름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종사자가 4000명이 넘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3만 평 부지가 공장 시설로 차 있었고, 근로자를 위한 사내 학교까지 운영됐었다. 중국이 국제시장에 경쟁자로 등장했을 때 사업다각화를 하지 못한 것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계기가 됐고, 1997년 외환위기 때 결정타를 맞았다.
“회사가 쓰러진 후에도 창업주 곁에 남아 재건을 도모했죠. 나중에는 자동차 관련 생산업체가 설립돼 그곳에서 상무이사로 정년을 맞이했어요. 새로 설립한 회사가 정상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섬유회사가 쓰러진 직후의 삶은 여러 가지로 힘들었죠. 회사를 지키지 못한 것이 낙인처럼 느껴져서 떳떳하게 밝히지도 못했으니까요. 외환위기 직후에는 월급이 나오지 않아 아내가 칼국수집을 해야 했어요. 테이블도 몇 개 안 되는 작은 가게였는데, 재건 작업 후 퇴근하면 가게로 출근해 아내를 돕곤 했죠.”
그가 창업주 곁을 떠나지 않고 35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1979년 2월 입사해 시작한 회사생활을 2014년 2월에 마감했다. ‘국가부도의 날’도 이후 찾아온 금융위기도 멈추지 못한 직장인으로의 삶이 정리되는 날이었다.
귀농 후 투자한 오미자 농사 실패
사실 그는 퇴직 후에 농부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충주의 논밭을 다시 가꾸겠다는 다짐이었다. 비어 있는 집도 아직 쓸 만했고, 건강에도 자신이 있었다.
“퇴직 전 농협대학교 주말 귀농·귀촌대학을 이수했어요. 퇴직 후에는 중장비를 동원해 묵은 밭도 갈고, 집도 수리해 본격적인 귀농생활을 시작했죠. 농업기술센터를 들락거리며 다양한 정보도 얻으면서 이대로 고향에 정착할 수 있겠다 싶었죠.”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회사생활처럼 우직하게 해나가면 다 순조로울 것이라 믿었는데, 초보 농부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주변에서 오미자 농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추천을 많이 받았어요. 당시엔 효소 열풍이 불어 오미자 수요가 늘고 있었어요. 그래서 시에서 시설지원까지 받아가며 1000평이 넘는 땅에 오미자를 가득 심었죠. 오미자는 심은 지 3년이 되어야 수익성이 좋아지는데, 심자마자 오미자 값이 폭락하기 시작했어요. 효소가 설탕뿐인 허상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했거든요. 오미자로 손에 쥔 돈은 단돈 300만 원이 전부였고, 두 집 생활비와 교통비를 퇴직금으로 메워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어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2017년, 고민에 휩싸여 있던 귀농 2년 차에 친구의 조언을 듣고 그는 농사를 포기한다. 본전 생각으로 투자금에 미련을 뒀다가는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이후의 삶은 주변의 중장년 구직자와 다를 바 없었다. 워크넷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매일같이 구인구직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뿌렸다. 하지만 고령자인 그의 손을 잡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많은 회사에 건넸던 말이다. 이력서 내는 것쯤은 자유일 텐데도,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는 눈치를 봤다.
“안 된다는 곳이 많았죠. 어떤 곳은 단순 안내직이었는데, 나이가 많으면 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니 이력서 낼 필요 없다고 했어요.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아직까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이력서 내도 되나요?” 그가 사는 일산 근처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장. 그곳에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이케아 광명점에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계십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그는 또 물었다. “사무직 출신이라 접객 경력이 없는데 괜찮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채용 후 교육을 받으면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입사지원과 면접을 거쳐 합격 전화를 받게 됐고, 여전히 아내 앞에서 자랑스러운 남편일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수평적 기업문화에 감탄
한국의 경제성장 초창기를 장식했던 섬유산업의 전통적인 기업문화 속에서 평생을 일해온 그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그것도 외국계 기업 소속으로 해내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까? 이 씨는 “유니폼이 가장 어색했다”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확실히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거의 모든 것이 달랐어요. 전통적인 연공서열 조직문화에서 간부들은 뒷짐지고 도장만 찍잖아요. 하지만 여기는 파트너십으로 연결된 수평적 구조예요. 주변 부서가 손이 모자라면 다 같이 가서 도와요. 직급의 상하 여부 상관없이 말이죠.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호칭이에요. 이곳에서는 직함을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요. 20대 어린 친구들에게도 저는 ‘계상 씨’예요. 상무님, 이사님으로 불리다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웃음)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퇴근 후 젊은 직원들과 맥주 한잔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그가 놀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직원들에게 자기계발을 늘 독려하는 회사를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사내채용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모습은 한국 기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근무처인 고객지원센터에 장애인 직원이 배치된 것도 그에겐 생경하게 보였다. 처음엔 잘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반복 훈련을 통해 한 사람의 몫을 당당히 해내는 모습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실 한국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장애인 직원을, 그것도 기업의 이미지를 좌우할 수 있는 고객 대면 부서에 배치할 수 있는 기업은 국내에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이케아 인사 담당자는 “고객 대면 부서에서도 근무 방식이 다양해 장애인 직원도 충분히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면서 “이케아에서 ‘다양성과 포용’은 사내 문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성별, 나이, 배경, 장애 유무 등으로 차별받지 않도록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며, 동네 지인을 마주쳐도 유니폼 차림의 자신이 부끄럽지 않고,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한다. 새로운 기업문화도 즐거운 경험이다. 과거 노사분규 협상장에서 사측 자리에 앉은 그의 어깨를 눌러대던 부담감도 이제 없다.
“경제적 이득보다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는 행복이 커요. 삶의 활력도 얻고 건강관리도 돼요. 체력적으로 괜찮다면 가능한 한 오래 일하고 싶어요. 다른 중장년 구직자들에게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꼭 나타나니까, 과거 경력에 매이지 말고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일자리를 찾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간혹 그의 목소리는 흡사 파도처럼 올라갔다가 거친 자욱을 남기며 내려오는 듯했다. 스스로 일류를 넘은 ‘특류’라고 말하는 국내 최고의 전각(篆刻) 작가 진공재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자신의 이야기에 쏠린 감정을 타고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 근저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날선 도끼가 서려 있었다. 타협하지 않는 예술혼과 부패하지 않는 태도로 평생을 살아오며 실력과 배짱과 자존심으로 무장한 진짜 예술가, ‘58년 개띠’ 세대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진공재(陳空齎)를 만나 그의 거친 예술가 삶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차고 넘친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고독하고 단호하다. 국내 최고 전각 장인으로 평가받는 진공재 작가를 만나니 흔히 광기의 예술가라고 하면 연상되는 거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서편제’에서 궁극의 소리를 찾아 끝없이 방랑하던 소리꾼의 모습도 떠올랐다.
“남원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죠. 열네 살까지는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머니와 함께였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1학년 때인 1971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진공재 작가는 어머니가 사망한 시간을 분 단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날이었다.
“다른 집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우리 집은 내가 불을 피워야 연기가 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 집을 떠나보자 하고 1974년에 자전거 팔아 3400원을 챙겨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얼마나 많은 소년 소녀들이 각박한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던 시절이었던가. 1974년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해였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지하에서 파낸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밥벌이로 시작한 도장 파기
소년 진공재는 인쇄소, 중국집, 노점상 등 별의별 일을 다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인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가 경기도 안양에서 도장을 파기 시작한 것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평소에 새기는 걸 좋아했죠. 학교에선 서기 일도 했었고. 그런데 길에서 도장을 파다 보니 밥벌이는 되는데, 밥만 먹어선 충족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서예를 배웠죠. 독학자습이었어요. 그렇게 서예를 하다 보니 그림이 나오더군요. 글씨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글씨가 되듯이….”
서화동원(書畵同源). 서와 화는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런데 시절이 1980년대였다.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불같은 성질에 기름을 부은, 군부독재 시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눈을 뜬 거죠. 그래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20대 후반이었는데, 사실 대학생도 아니고 학생운동가도 아니고 노동운동가도 아니고 그저 길거리에서 도장 파서 먹고사는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요.”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만난 아내와 사랑하게 되어 결혼도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데모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력만으로 오른 최고의 자리
아이는 198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백 일도 안 됐는데 감기, 모세기관지염, 폐렴, 장염까지 온 거예요. 아이들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하실에서 살았거든요. 의사가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살라고 하더군요. 부랴부랴 짐 챙겨서 전라도로 내려갔죠.”
그는 서예 솜씨 덕분에 전북 도청 고용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아이도 다행히 얼마 안 있어 병이 나았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예술가 기질, 방랑가 기질이 다시 돋았다.
“공무원이 내가 갈 길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따리 싸서 다시 도장을 파기로 했죠. 1990년에 전주를 떠나 인천으로 갔어요. 거기서 서예학원을 개원했는데 3개월 하고 망했어요. 다시 경기도 안양으로 갔어요.”
처음 도장을 파기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1991년 대한민국 서예대전 전각 부문에 작품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아무런 ‘빽’도 없이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뤄낸 결실이었다. 그 길에서 그는 전각과 서예, 동양화가로서 일가를 이룬 석도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계 다 썩었잖아요. 서예계도 마찬가지였죠. 문중끼리 다 해먹고….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사람에게 최고상을 준 분이었어요. 성철 스님과 함께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셨죠. 2011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로 제가 담배를 끊었어요.”
전각(篆刻)은 심각(心刻) 예술이다
당시 서예계의 부정부패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92년 그는 서예계 인사들이 비리로 구속되고 난리가 나자 소위 ‘혁명’을 하러 협회로 들어간다. 한국청년서예가협회 대표였던 그는 “다 나와라,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자” 하고 외쳤다.
“아무도 나를 못 건드렸죠. 전부 스승과 제자로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못된 거라면 고쳐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일 마치고 나오려 했는데 어떤 분이 ‘네가 지금까지 한 게 있으니 그대로 나오면 안 된다, 도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협회에 들어갔죠.”
이때가 그의 공적인 삶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었다. 1995년에는 중국서령인사 전각평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수상을 받았고, 1998년에는 ‘채근담’ 1만6600여 자를 새기는 대작을 완성했다. 그 와중에도 서예협회 경기도지부장, 서예협회본부 이사, 한국전각학회 감사를 맡아서 활동했다.
그러나 공적으로 화려한 간판들이 과연 그에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성정이 짐작이 된다면 예상 가능하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2003년 3월 29일이었어요.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것도 안 해먹은 빈 껍데기야. 그런데 벼슬하면 뭐 해먹었다고 똑같이 욕먹고…. ‘여기를 떠나자’ 싶어서 맡고 있던 직위들을 한날한시에 다 내려놨어요. 그리고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가기로 하고 보따리 싸서 지리산으로 갔죠.”
그는 부질없음을 깨닫고 홀연히 떠났다. 방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끝없는 방랑벽, 다시 떠나다
평생 39번을 이사했다. 지금도 그는 임대사무실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왜 그렇게 돌아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정적으로 뭔가 쌓이는 것도 없고 붙잡는 사람도 없고 술맛도 떨어지면 떠나게 되는 거죠.”
어느 곳에서는 202호 스님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를 본 건물주가 야반도주한 스님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단다. 그는 자신의 호가 마흔아홉 개인데 ‘202호 스님’도 그중 하나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굳이 스님 아니라고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고 했지. 어차피 전기세 받을 때만 볼 테니.”
2005년에는 그의 방랑벽이 해외로도 뻗어나갈 기회가 왔다. 정부에서 독일을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한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행사가 매년 열리는데 그 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아 행사 일환으로 전각 시연을 보여주고 싶으니 그에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가 어디를 못 가겠냐, 대신 거기서 작품을 팔 수 있으면 가겠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인데 보름 동안 거기 가 있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받아주더군요.”
독일은 그에게 좋은 방향이었던 모양이다. 그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작업물을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는 독일 녹색당 당수도 있었고, 독일 방송국에서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정도였다.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멋지게 산다
평생을 강렬하게 살아온 그도 이제 환갑이 됐다. 나이 들어감에 대해 그가 느끼는 바가 궁금했다.
“내 종교는 세 개예요. 열여섯 살에서 서른 살까진 새옹지마교였죠. 인생사 새옹지마다. 서른 살에서 예순 살까진 천지조화은혜교였죠. 천지가 사람을 절대 굶기지는 않더라. 밥은 주더라. 그리고 예순 살 이후는 안빈낙도교나 믿을까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해요. 가난을 즐길 줄 알면 나이 들어도 멋지게 살 수 있으니까요.”
흔히 예순 살이 넘으면 사주팔자도 없다고 한다. 다시 한 살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기 전 열네 살까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 일흔네 살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봤다.
“앞으로 14년은 황금기예요. 그 이후로는 삶을 구걸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자신으로 사는 거죠.”
그는 최근 딸 덕분에 아내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갔다 왔다. 거기서 인생 최고의 환희를 맛봤다. 자연 속에서, 안나푸르나의 굽이진 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손녀인 하리다.
“손녀가 나를 너무 좋아해요. 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제부터 오직 전각만을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는 인사동에서 자신의 학습 단계에서부터 현재까지를 총정리해서 집대성하는 전시를 열 계획이다.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
그가 현재 머무르는 곳은 의왕시 청계산 자락. 작업실 이름은 비니루(扉泥陋)다. 사립문 비(扉), 진흙 니(泥), 더러울 루(陋) 자를 쓴다. 한자 음 그대로 비닐하우스로 된 공간이다. 2년여 전 경상북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된 ‘심상서화각의향연’이라는 돌판새김 작업을 했다. 이 작품을 만들고 그동안 28% 이자를 내고 있었던 캐피털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싹 갚고 나니 3000만 원이 남았다고 한다. 그 돈을 전부 이 작업실을 만드는 데 썼다.
“나는 평생 석도필묵(石刀筆墨)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에요.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고 싶어요.”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밥을 먹고살 수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벌이를 위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는데, 좋아하면서 밥을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형편이 어려워서, 곤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어요. 대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내 예술의 가치는 절박함에 있었다고 봐요. 나는 삶을 위해서 예술을 하는 거예요.”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로…
멀고도 굽이진 길을 돌고 돌아온 그가 삶류 작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작가가 아니라 오로지 밥벌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일류라지만 나는 특류다. 자만심 있는 삶류다”라고 말하는 그는 홀로 이뤄낸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을 가진 그가 평생 안고 있는 석도륜 스승의 말씀이 있다.
“눈을 사랑하면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눈을 사랑하기로 해놓고 따뜻하길 바란다면 눈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가 품고 있을 만큼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있는 그대로 여겨지고 싶다”고 대답했다.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노력으로 일가를 이루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섰기에 그는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진공재 작가에 대한 설명은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진공재와 그의 작품들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다시 한 살이 된 그가 스스로 ‘황금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앞으로의 14년. 어떤 작품들로 자신을 말하게 될지 기대가 크다.
지리산 청학동은 나의 고향이다. 유소션 시절을 삼신봉 아래에서 보냈다. 근래에는 자주 들리지 못하지만 정신적 터전이다. 당연히 청학동과 관련한 자료에 관심이 많다. 그중 하나가 풍수지리설로 유명했던 옥룡자 도선 스님(827~898)이 쓴 ‘청학동 비결(秘訣)’이다. ‘조선비결전집’에 수록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간에 널리 유포된 비결들을 입수해 연구 가치가 있거나 보존 의미가 있는 것들을 묶은 책이 조선비결전집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현재 지리산 청학동이 명실상부하게 자리매김했다. 이 비결에는 청학동의 산세 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청학동에 얽힌 전설을 한 번 읽어봄직하다.
한세상 제때 만나기를 기다리는 보배로운 세 고을이 있다. 선을 쌓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서 후세를 기를 것이다. 그중 하나가 청학동이다. 운세가 길(吉)하여 천년이 되면 하늘의 문창성을 지키고 땅은 흑서(黑鼠)가 흥하고 오성(五星)이 모여든다. 때가 되면 세 가지 기이한 빛이 봉우리를 비추어 삼대(三坮)가 분명해진다.
땅은 넓어 평탄하고 북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남쪽으로 통한다. 남쪽의 백운산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았다.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혈(穴)이 낮다. 운이 전해지면 갑좌(甲坐)가 다음의 길지(吉地)다. 주위가 사십 리며 석문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다. 아름다운 이곳이 천년의 기반으로 이 나라와 함께 길이 보전되리라. 비록 작은 나라에 있지만, 중국의 명승지보다 훨씬 나은 곳이다. 그곳이 개벽이 될 때는 황계(黃鷄)가 하늘에서 울 때다.
이곳에서 나는 것은 하늘 가득한 것이 떨어지는 땅이라. 이곳을 지켜 20년이 되면 석문(石門)이 우레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30년을 살면 사마(駟馬)가 땅에 드나들 것이니 공명이 세상을 덮는다. 청학이 세상을 더욱더 높게 날면 많은 공경(公卿)과 재상(宰相) 그리고 명사(名士)와 현인(賢人)이 배출되리라.
공문(孔門)에 사숙(私淑)한 자는 누구인가. 국가의 사부가 그것을 맡으리라. 기내(畿內)의 사람들이 최고의 명승으로 만들어 별천지가 되리니 천지개벽이 일어나리라. 선학(仙鶴)이 골에서 날아오르니 유(柳) 씨의 복지(福地)요. 학의 등에 타고 피리를 부니 강(姜) 씨의 복지(福地)요. 금 거북이 진흙 속으로 들어가니 권(權) 씨의 복지(福地)요. 선학이 알을 품으니 정(鄭) 씨의 복지(卜地)요. 청학이 밭에 내려앉으니 서(徐) 씨의 천지(穿地)요. 학이 옥녀에게 내려오니 황(黃) 씨의 복지(福地)요. 달리던 노루가 어미를 돌아보니 김(金) 씨의 소지(召地)요. 선인(仙人) 춤추는 소맷자락 같으니 이(李) 씨의 응지(應地)요.
매가 꿩을 쫓아 내려가니 방(方) 씨의 복지(卜地)요. 황룡이 배를 업고 가니 하(河) 씨의 유지(留地)요. 옥등(玉燈)이 벽에 걸렸으니 천(千) 씨의 필지(必地)요. 다섯 신선이 둘러앉아 바둑을 두니 박(朴) 씨의 복지(卜地)요. 소가 학림에 누워 잠자니 장(張) 씨의 유지(留地)요. 선학이 쫓아서 가니 허(許) 씨의 복지(福地)요. 소가 학림에 누웠으니 노(盧) 씨의 수지(守地)요.
상서로운 붕이 하늘에 날개를 펼쳤으니 작은 달이 10필(疋), 오운(五雲)이 싸우며 여인이 관을 쓰고 벼슬을 한다. 풀이 풍성한 들판에 사슴이 놀고 소(丑) 좌편에 가로 누워 있도다. 청학이 서편으로 날아가니 산새가 크게 응하도다. 대숲에서 봉황이 우니 10일을 날마다 길하리라. 한가운데 신선의 베개가 있으니 원형이정(元亨理定)이 마한(馬韓)에 갖추어졌도다. 선학(仙鶴)이 좇아서 가버리니 청학이 하소연하는 것 같도다.
하소연도 말고 상소도 말고 오직 후인(後人)을 기다리며 조화를 미루어볼지라. 건곤(乾坤)에 기운이 가득 모이니 복점(卜占)으로 그 주(主)를 지키리라. 전해 받고 조응(照應)하니 상서로움을 맡아 인재를 배출한다. 복록과 길상(吉祥)이 서좌(西坐)로 향하니 가장 아름답고 그다음에 길하도다. 사람들이 오직 이곳을 찾으니 신풍(神風)을 한(恨)하도다. (참고자료: 향토지 ‘청암’, 하복조 편저)
정년퇴직을 1년 남긴 시점에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희망퇴직 공고. 평생을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기쁨으로 알고 일해온 홍노희(洪魯憙·59) 씨는 고민에 휩싸였다. 정년을 채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후배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떠나주는 것이 사랑하는 회사를 돕는 길일까. 37년을 상용차 제조 현장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해온 그의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결같았던 이른 새벽 출근길 떠오른 확신은 결심으로 변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2018년 2월의 일이다.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1981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아이콘 청계고가 위를 포니가 신나게 달리던 시절. 당시 현대자동차는 북미 수출의 꿈을 안고 포니2의 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홍노희 씨는 군복무를 마치고 갓 입사한 청년이었다. 그는 그 시절의 현대자동차를 이렇게 회고했다.
“포니가 인기를 얻으면서 공장은 활기로 넘쳤죠. 저는 특장차 조립 일을 했는데, 건설 붐을 타고 수요가 폭발했던 레미콘 같은 차량을 담당했죠. 컨베이어벨트에서 맡은 부분만 조립하는 소형차와 달리 대형 상용차들은 몇 명이 달라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부품을 조립해 완성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내가 만든 차’라는 자부심이 컸고, 소소한 부분까지 공을 들였죠.”
32년간 품질관리 매달려
그런 노력이 회사의 눈에 들었는지, 품질관리라는 개념이 생산현장에 도입되면서 담당자로 발탁된다. 입사 5년 차에 시작한 품질관리 업무는 그렇게 32년간 평생 직업이 됐다. 회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실력을 발휘해 2004년과 2006년에는 국가품질경영대회에서 우수분임조 은상을, 2010년에는 금상을 받았다.
“사실 품질관리라는 분야는 시어머니 같은 역할입니다. 협력업체에서 부품이 제대로 만들어져 왔는지, 그 부품들을 제대로 조립했는지 확인하는 일이니까요. 모든 수치를 암기하고 있어야 했죠. 검사할 때마다 자료를 찾아볼 순 없으니까요. 또 간혹 조립 담당자와 갈등도 있습니다. 조립자들은 할당된 생산량을 맞춰야 하는데, 품질관리자가 시간을 잡아먹는다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스펙에 미달하는 것을 용인할 순 없었죠.”
퇴직 후 예상과 다른 현실에 당황
그의 퇴직 스토리를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가족의 반응이었다. 만류는 없었을까?
“아내도 이제 쉴 때가 됐다며 응원해줬어요. 몇 년만 잘 버티면 연금도 나오니까 일찍 노년의 삶을 준비할 기회가 될 거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회사 후배들이 말렸지만 저는 퇴직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덜컥 퇴직하고 나서 당황했다. 그는 “생각과는 달랐다”고 고백했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 현실은 큰 차이가 있었다.
“텃밭에서 과실수를 관리하고 닭 모이를 챙기는 것이 평생 생산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일다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돈 걱정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끊기니 심리적 압박도 있었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취업.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관련 교육도 받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 도움도 받았다.
그런 와중에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퇴직 소식을 들은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품질관리를 맡아 개선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해온 것. 그리고 국내 주요 자동차 기업의 우수 협력사로 꼽히는 중견기업 평안정공주식회사에 입사했다.
자동차 산업에 도움될 수 있어 보람
“긴 공백기 없이 일을 계속할 수 있어서, 특히 제가 그동안 해왔던 품질관리 일을 할 수 있어서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또 고향 같은 전 직장에도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더 즐겁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모도 문화도 다른 조직에서의 적응이 쉬울 리는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부품을 갖고 조립만 하다가, 직접 쇠를 깎고 다듬는 과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리 회사는 상용차 후륜의 구동부(rear axle housing assembly)를 만들고 조립해 납품하는 일을 합니다. 100분의 1mm만 틀어져도 조립이 되지 않거나, 윤활유가 새어 나오기 때문에 높은 정밀도를 요구해요. 매일 생산되는 약 1000대분의 부품에 문제가 없게 하려면 품질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출근 초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불량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그는 “몽롱했다”고 표현했다. 사람 손에서 나는 오류는 확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공정에서 다시 점검하는 ‘키퍼(keeper) 제도’를 도입하는 등 품질관리 과정을 보강하고, 경영진을 설득해 장비도 새로 들였다. 2억 원이 넘는 투자는 곧 품질로 나타났다. 입사 초기보다 10분의 1 이하로 불량이 줄었다.
“새로운 회사에서 제가 노력한 만큼의 성과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 너무 즐겁습니다. 저를 믿고 과감한 투자를 결정한 경영진을 만나게 된 것 역시 제겐 행운이죠. 평생의 보람이라 생각하는 이 일을 회사에 보탬이 되는 한 계속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