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들이 가족사진을 찍어 벽에 걸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사진이 아들 초등학교 졸업 때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과 유명 사진관에서 세 딸 가족이 친정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액자 하나 끼우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쁜 손녀도 커가니 하나쯤 만들어 걸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는데 아들의 속마음이 따로 있었
남편과 사별한 지 8년째인 최영옥(72세, 여)씨는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3년 전에 명예퇴직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 큰아들(48세) 때문이다. 부족한 경험과 자본 탓에 시작부터 불안해보였던 큰아들의 사업은 결국 1억원의 부채를 남기고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최영옥씨의 큰아들은 어머니에게 부채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에 산다. 우리 시니어들이 모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서 먹을 것이 넘쳐, 덜 먹으려고 고민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저녁 모임은 으레 술을 겸한 자리다. 술을 마시려면 저녁 식사 겸 안주를 푸짐하게 주문한다. 처음엔 배가 고프니 허겁지겁 먹지만, 이내 주문한 안주들이 남아돌기 시
영등포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목동에 있는 화산목장으로 봄 소풍을 가던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간밤에 내린 비가 논둑을 넘쳐서 도로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들이 주저주저하며 선뜻 건너지 못하고 있자 구두 또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남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당신들 등을 내미셨다. 당신의 구두와
한 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 애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필자는 시끄러운 것을 참지 못한다. 음식점이나 술집, 당구장에서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집중이 안 되고 화가 난다. 그냥 못 들은 척하라는데 그게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못 한다고 한다. 대화를 하는데 옆자리가 시끄러우면 말해야 할 것을 까먹기도 하고 대화 상대자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 화가 나는 것이다. 못 들은 체하려 해도
시대를 상징하는 목소리가 있다. 포크음악의 전설 세시봉의 막내인 김세환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1970년대를 수놓았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노랫말과 귀공자 같은 외모와 함께 어우러져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화려하게 부활한 세시봉의 멤버로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손관승(58) 전 iMBC 대표를 만났다. 전 MBC 베를린 특파원, 전 iMBC 대표이사,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쳐온 그는 여러 개의 호칭을 갖고 있다. 스스로 부여한 현업(業)은 스토리 노마드, 즉 이야기 유목민이다. 강의와 강연, 기고와 저술을 하는 삶이다. 전반전은 수치와 가치를 추구한 2치의 삶이었다
매주 목요일 저녁. 기타 가방을 메고 드럼 스틱을 든 남자 다섯이 남양주의 한 대형 가구 상점에 출몰한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곳에 모여든 기간만 5년째,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같은 목적으로 수도 없이 만나왔다. 이들 중에는 40년이 더 된 사이도 있다. 으슥하고 인적 드문 곳에 자꾸 모여드는 이유는 철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매주 같은 시간, 조건반
“요즘 재미난 일도 없고 밥맛이 자꾸 없어져.”
“남편이 은퇴하고 집에만 있으니 날로 스트레스만 쌓여.”
“이제 자식도 다 크고 할 일 했으니 혼자 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
시니어들이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다. 몇 년 계획을 세우고 노년 준비를 했지만 자꾸 움츠러드는 기분…. 신체적, 정신적 변화 때문에 오는 우울 증상이다. 취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