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 애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보기가 참으로 딱했고 선생님들 뵙기도 민망했다.
그날, 명희가 소풍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용민 선생님 덕이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속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느라고 가엾을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던 명희는 힘이 들어서 쉬엄쉬엄 걸어야 했기에 소풍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애를 안쓰럽게 생각하신 조 선생님이 야학교에서 칠보산까지 왕복길을 기꺼이 업어주셨던 것이다. 시간을 보시려면 늘 바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시던 조 선생님이었다.
당신 자신도 너무 마르신 몸이어서 조선생님은 시계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등과 배가 거의 맞붙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선생님은 수업 중에도 허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연신 추켜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이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악을 사랑했다.
듣는 것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르는 것 또한 즐긴다. 나는 남들에게 지목을 못 받으면 굉장히 서운했지만 막상 지목을 받으면 부끄러워했다.
그러기에 노래 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굉장한 갈등을 느껴야했다.
노래를 기차게 잘 불러서 여러 사람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에 안달이 났지만, 막상 노래를 부를라치면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는 모기가 사촌이다 하고 따라올 지경이었다.
‘아이 속상해. 그동안 ’흠흠‘ 열심히 가다듬었던 목청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필자가 모기소리를 낼 때마다 필자의 아버지와 황 선생님은 안타깝게 외치셨다.
“크게! 더 크게~~”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부르면 필자도 남들 못지않게 해서 한 번은 ‘오빠생각’을 불러 ‘1등 상’을 탄 적도 있다.
별명이 ‘미친 카루소’인 김용곤 선생님은 별명에 걸맞게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산이 떠나가라고 열정적으로 잘 부르셔서 우리를 홀리게 만들곤 하셨다.
호리호리한 몸 어디에서 그렇게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선생님은 전공을 잘못 선택하신 것 같았다.
김 선생님은 당시에 유행하던 ‘림보춤’도 능수능란하게 추셨다. 양쪽에서 줄을 잡고 있으면 그 밑으로 ‘림보 림보 림보야’ 하는 림보 노래 장단에 맞춰서 허리를 뒤로 젖히고 그 줄을 통과하는 것인데, 높이를 점점 낮춰 나중에는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도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같이 유연하고도 날렵하게 그 밑을 통과하시곤 했다.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신기(神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