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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황의록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의 꿈 “따뜻한 세상을 위한 인내심 싸움, 즐기고 있다”
- “투기나 투자가 아니라 누구나 하나씩 그림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저변화되어야 그림이 팔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림이 팔리지 않습니다.” 오랜 경영학자로서의 삶이 뒷받침해 주는 것일까. 황의록(黃義錄·68)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이 지향하는 목표는 매우 뚜렷하고 분명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기질이라기보다는 경영자의 기질에 가까워 보였다. 희미하고 열악한 한국 미술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질이란 그러한 분명함과 뚜렷함이 아닐까. 이미 미술계에서 놀랍다는 반응을 얻고 있는 황 이사장의 과감한 실험, 그리고 꿈을 들어 본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을 전공하고 싶었죠.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사진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학하면서 한국에 생활비를 보내야 할 정도였기에.” 베테랑 경영학 교수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황의록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은 노년이 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을 찾다 다시 사진을 만나게 됐다. 중앙대 사진 아카데미에서 3년을 공부했다. 그러나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사진 동호회에서 어울릴 시간도 없어서 혼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혼자 출사를 가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사진을 얼마 하다 보니 사진이 발전이 없는 게 보이더군요. 그러다보니 고민을 하게 됐는데…. 사실 고민하는 게 싫었습니다. 사진은 즐기려고 시작한 거였으니까. 친한 사진작가에게 사진이 나아지지 않아서 즐겁지 않다고 털어놨어요. 그가 심미안이 달라지는 게 좋겠으니 이제부터 얼마 동안은 사진을 하지 말고 그림을 보러 다니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때까지 겉멋이 들어서 국내 작가는 보지 않았는데, 그후부터 일주일에 이틀은 그림을 보러 다녔어요.” 중견 화가가 물감 사려고 ‘야간 경비’… 충격이었다 황 이사장은 전시회를 가게 되면서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고, 친한 작가가 하나둘 늘어나고, 초대까지 받게 됐다. 그리고 화가들이 힘들게 산다는 것과 개인적인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한 중견작가가 작업하다 말고 알바를 나간다는 거예요. 물감이 떨어져서, 건설 현장에 야간 경비를 하러 나간다고. 여자 작가는 전화했더니 이젠 그림을 안 그린다고 말하더군요. 너무 수입이 없어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다고. 연말에 시험에 통과하면 내년부터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몇 푼이라도 받아서 먹고살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더군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미술계의 열악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고민하게 됐다. 명색이 경영학 교수인데 이걸 보고 넘어간다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해서 미술계 사람들을 만났는데 다 말렸다. 그들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실패한다, 그리고 돈을 벌 수 없다. “전 돈 버는 건 관심 없었어요. 밥은 먹고사니까. 밥 먹고사는 내가 또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한다는 부분만 성공하면 되는 거겠죠. 여러 가지를 검토한 결과, 전 된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림이 안 팔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파는 쪽에서 잘못해서지 사람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구매 능력이 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조차 그림을 안 삽니다. 왜냐면 미술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감, 불신 때문이에요. 저 작가가 정말 좋은 작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이 뉴스를 타는 것은 투기나 투자 목적으로 사는 극소수 사람의 얘기들뿐이다. 미술품을 문화적 향유품이 아니라 돈벌이로만 여기니 미술품에 과도한 금액이 매겨지고 투기와 투자로만 쓰이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작가들만 빼고 대다수의 작가들은 생활 자체가 열악한 현실을 만들었다. “국내 작가로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투잡을 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수라든지로 일해서, 그 네임밸류 덕분에 비싸게 팔리는 경우도 많고. 아니면 다른 영향력 있는 미술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서 팔리죠. 그걸 비웃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건 그거대로 존재하는 거고, 옥션 등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도 그것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을 나와 관계없는 세상으로 압니다. 그들에게 미술 소비자가 되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화가들에게는 작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어요.” 시장을 키워야 작가도 갤러리도 소비자도 행복해진다 황 이사장은 그래서 2015년에 화가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조합은 후원자 조합과 작가 조합으로 나뉜다. 그는 먼저 후원자 조합을 모았다. “후원자 조합원이 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로 기본적으로 1000만 원 이상 출자해야 한다는 겁니다. 협동조합 중에서 이렇게 많이 내는 데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정도 출자해도 삶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리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 두 번째는 이 미술운동이 실패할 수 있다는 걸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000만원이 사라질 수 있는데, 그래도 하이파이브하고 좋은 꿈 꿨다 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과 시간으로 이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건들로 조합원을 선별해서 받았고, 현재 그분들이 도와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 이사장이 의도하고 있는 조합원 선발은 후원자에게 쉽지 않은 엄격함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작가 조합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소비자들이 그림을 가까이하고 친해지면 사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불안과 불신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도 소비자가 그림을 잘 몰라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게 첫 번째입니다. 정말 좋은 작가를 엄격하게 선발할 테니 마음놓고 사도 된다는 걸 조합에서 보증해 주는 거죠. 그래서 작가 선발에 엄청나게 공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엄격한 조합원 선발로 소비자의 신뢰 보장 까다로운 작가 조합원 선정 과정은 총 3차에 걸쳐 이뤄진다. 심사위원은 평론가, 원로 작가, 갤러리 관장 등으로 총 10명이 있다. 이 10명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1차 심사는 블라인드 리뷰다. 흡사 TV 프로그램 처럼 작품만 보여주고 작가는 감춘 채 오로지 미술시장의 대중화, 세계화에 적합한가가 심사 조건이다. 이는 그림이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소수만 좋아하는 그림은 안 된다는 관점에서 이뤄진다. 그러면서도 작품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부분에서 심사위원 10명 중 7명 이상이 지지해야 작가가 통과된다. 2차는 현장 심사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서 가진 작품 모두를 확인하여 작품 세계의 집중도와 일관성을 확인한다. 앞으로의 계획, 도움이 필요한 작가인지 등도 확인하는 과정이다. 3차는 공개 심사다. 초대 전시회를 열어 작가의 모든 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여기에서 70% 이상이 찬성해야 작가 조합의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엄격한 선발은 상반기와 후반기에 한 번씩 한다. 현재 작가 조합에 속한 작가는 11명. 100명까지 늘리려고 계속 선발 중에 있다. 건강한 미술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다 황 이사장의 도전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어떨까? “놀라죠 다들. 지금은 지원서가 상당히 많이 들어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 부족해요. 그런데 미술계가 너무 어렵다 보니 작가를 위해 해 주는 것도 많고 팔리는 것도 제법 되고 작가를 띄우는 역할을 하니까 놀라는 거겠죠. 아직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만, 많이 기적처럼 받아들여주시는 거 같아요.” 황 이사장은 현재 미술시장의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해선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건강한 미술에 대하여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실천하여 괜찮은 성과를 내면 사람들이 ‘저것도 괜찮네’라며 평가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1년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느낌이 와요. 저는 페이스북에다 제가 겪는 일을 다 쓰고 있어요. 이렇게 했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했는데 효과가 있다 등등. 감추는 게 아니라 투명하게 하겠다, 판단은 당신들이 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그리다 황 이사장은 70세에 가까운 시간을 교육자로서 살다가 이제 사회와 문화와 공유의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감한 플랫폼 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다르지 않아요. 지금은 현실적인 고뇌고 옛날엔 이상적인 고뇌였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경영학은 현실 학문이기에 계속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실제 효과를 내서 사람의 삶을 개선하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내가 아는 지식을 접목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일을 찾아왔던 겁니다. 지금은 그러한 방법을 적용하는 영역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효과와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두 가지 조건. 그러한 방향성은 그의 심미안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그림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남달라야 한다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도 감동받을 수 있고 신선함에 감동받을 수 있고, 감동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감동이 있어야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게 제 소신이에요. 살기 힘든 사람도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림을 누구에게나 필요로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어야 세상이 따뜻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았다는 확신, 즐기면서 산다 “앞으로 30년 보고 있어요. 당장 그림이 얼마라도 팔려야 작가도 살고 조합도 살죠. 그래서 30년 정도를 초단기, 단기, 중기, 장기로 계획을 잡아보고 있어요.”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황 이사장은 작가들은 나은 여건에서 작품에 전념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돈이 있든 없든 그림을 가까이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자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인내심 싸움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남들은 칭찬해도 저는 계속 불안하거든요. 짧은 성과부터 긴 투자까지 생각해야 하니 쉽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런데 여러 가지 반응을 보니 제 예상이 맞았고 전략도 맞았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 좀 더 빠르게 나오지 않아서 불안할 때가 있죠(웃음). 하지만 즐기자는 쪽으로 가고자 해요. 지금 상황은, 아주 괜찮은 거 같아요.” >>황의록 이사장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 및 기획처장, 한국소비자학회장, 한국유통학회장, 한국마케팅학회부회장, 한국의농학회장을 역임했다.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제일제당, 삼성전자,두산그룹, LG그룹의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및 GS그룹 자문교수를 맡고 있다.
- 2016-10-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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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5] 쌓여가는 마음의 양식 소화하기 "넘치는 책, 어떻게 정리할까?"
-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책은 단순한 종이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같은 책이라도 소장하고 있는 사람마다 그 책에 대한 애정과 추억은 다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철이 지나고 표지가 낡아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쌓여가는 책을 가만히 두고 볼 수도 없다. 인생의 보물과도 같았던 책들이 애물단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면 선택은 두 가지다. 보기 좋게 잘 정리해 보관하거나, 어디로든 떠나보내거나. 한국정리수납협회 수납전문 정영주 강사 ◇ 서재 정리하기 100권 내외의 책을 정리하는 것은 단 몇 시간만 투자하면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에 욕심이 있거나 직업 특성상 책을 많이 두고 지낼 수밖에 없던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이들은 대개 개인 서재를 갖고 있는데, 정리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온 가족을 총동원해도 며칠이 걸릴지 까마득할 정도라면 관련 전문가에게 맡길 것을 추천한다. 인터넷에 ‘서재 정리’ 등 관련 키워드를 입력하면 전문가가 직접 서재 정리를 해 주는 업체를 찾을 수 있다. 규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서재 한 곳을 정리하는 데 30만~50만원 정도 비용이 든다. 서재가 크고 정리해야 할 책이 많으면 인원이 여러 명 배치되는데, 이에 따라 금액이 좌우된다. 그래도 돈을 들이는 것보다 스스로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 하는 이들을 위해 한국정리수납협회 정영주 강사의 조언을 담아 봤다. >>STEP 1 마음을 먼저 비우자 책을 폐·휴지 버리듯 막 대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미련’이라 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 수학 교과서,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책, 작가의 사인이 적힌 도서 등 다시 읽어 보지 않더라도 그 책은 이미 그 값어치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몇 가지 기준을 정하고 그에 따라 아쉬움 없이 책을 정리하기로 스스로 약속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막상 그렇게 다짐해도 잊고 지냈던 책을 발견하면 다시 마음이 약해지곤 한다. 그래도 기준을 정했다면 과감히 놓아주도록 하자. 마음을 비울수록 서재는 더욱 가벼워진다. >>STEP 2 서재의 레이아웃을 파악하자 서재를 정리하려면 먼저 내 서재에 수용할 수 있는 책의 양을 파악해야 한다. 책장에 책을 얼마나 넣을 수 있느냐를 알면 얼마를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대략 한 칸에 들어가는 책 수를 헤아려 칸 수만큼 곱하여 계산해 볼 수도 있겠고, 책장 바깥에 놓아둔 책 수를 어림잡아 짐작해 보는 것도 방법이다. >>STEP 3 서재의 80%만 채우기 전문가들은 보통 서재에 있는 책을 몽땅 꺼내 한꺼번에 정리하기도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버거운 작업이다. 그보다는 ‘책장의 80%만 채운다’는 생각으로, 20% 정도 책장을 비운 상태로 시작해 보자. 공간을 비운 상태로 정리해야 책을 옮기기도 수월하고 나중에 액자나 상패 등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책으로만 가득 채운 서재보다는 빈칸이 더러 있어야 보기 좋고 여유가 생긴다. >>STEP 4 분류하기 시, 소설, 에세이, 과학, 자기계발서 등 자기 기준에 따라 책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버릴 것’, ‘기증할 것’, ‘보관할 것’, ‘사용할 것’으로 나눈다. 기증하거나 판매할 책은 따로 모으고 보관하고 사용할 책의 자리를 잡아 준다. 책의 소장 가치가 모호하다면, 헌책방에 가져가 따져 보고 분류하는 것이 좋다. 책이 많을 경우, 책 이름·저자·발행연도·출판사 등 간략한 정보를 적어 리스트를 가져가 대략적인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STEP 5 위치 정하기 사용빈도, 책의 크기 등에 따라 책의 위치를 정한다. 자주 보는 책은 눈높이에 맞게 배치하고, 자주 보지 않는 책은 맨 위나 아래 칸 등에 꽂아 둔다. 가벼운 책은 위로, 무거운 책은 아래로 넣는다. >>STEP 6 보기 좋고 건강하게 보관하는 팁 고서나 추억의 책들은 먼지가 많이 나고 자주 꺼내 보지 않기 때문에 유리문이 달린 책장에 보관하면 좋다. 곰팡이 등에 의해 생기는 호흡기질환을 예방하고, 책을 보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가능하다면 책 높이와 색상을 맞춰 넣어 보기 좋게 정리한다. 대부분 책이 앞코가 맞지 않아 들쑥날쑥한데, 책장 끝에 맞추는 것보다 책 앞코에 맞춰 진열하면 더 깔끔해 보인다. 크기가 작은 책은 이중 수납을 하면 효율적이다. >>STEP 7 유지하기 ‘책장의 80%만 채운다’는 생각을 잊지 말고 책의 총량을 컨트롤해야 한다. 1주일 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날을 잡아 조금씩 책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가령 평균적으로 한 달에 10권의 책을 새로 산다면, 매달 10권의 책은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해 균형을 맞춘다. ◇ 책 팔기 서재를 정리하며 팔거나 기증하기로 마음먹은 책들을 어떤 방법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가까운 헌책방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온라인 사이트나 스마트폰 앱 등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중고 책을 팔 수 있다. ‘알라딘 중고서점’, ‘예스24 바이백’, ‘인터파크 중고서점’ 등에 대해 알아봤다. >>간단하게 인터넷 중고서점에 책 팔기 ‘알라딘 원클릭 팔기’ 알라딘 웹사이트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해 ‘알라딘에 중고팔기’ 메뉴로 찾아 들어가 ‘원클릭 팔기’를 선택한다. 한 권씩 일일이 바코드를 입력하지 않고 박스 수량(1박스에 20권까지, 10kg 이내)만으로 신청 가능한 서비스다. 발송 방법(지정 택배사 또는 편의점), 판매권 수, 박스 수량, 주소를 입력하면 바로 접수 가능하다. 접수 후 번호가 나오면 프린트하거나 직접 적어 해당 박스에 넣어두면 된다. 매입 가능한 도서는 3~4일 내에 계좌 또는 예치금으로 받을 수 있고, 매입 불가한 도서는 폐기처리하거나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 >>특별하게 책을 판매하는 방법 ‘한 평 시민 책 시장’ 올해로 4년째를 맞이하는 ‘한 평 시민 책 시장’은 서울 시민과 중소 헌책방, 소규모 출판사가 함께하는 중고 책 장터다.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펼쳐지는 행사로, 지난해에는 총 20회에 걸쳐 8만40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헌책방과 소규모 출판사가 운영하는 책 판매 부스와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헌책방 운영자들을 위한 위탁 판매의 장도 마련돼 있다. 일반 시민도 참여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며, 신청자들은 한 평에 해당하는 자리를 배정받아 직접 가져온 책들을 판매 또는 교환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과 참가신청은 서울도서관 홈페이지(lib.seoul.go.kr) 또는 한 평 시민 책시장 홈페이지(www.seoul-bookmarket.com)에서 확인할 수 있고, 전화(02-2133-0209)로 문의하면 된다. ◇ 책 기증하기 책을 파는 것보다는 기부를 통해 의미를 더하고 싶다면 다음 두 곳을 추천한다. >>책다모아 (www.nl.go.kr/sun) 읽지 않는 책들을 모아 ‘책다모아’를 통해 기부하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은 자료는 영구 보존하고, 이미 소장된 자료는 작은 도서관이나 문고 등 필요로 하는 소외 지역 도서관에 전달한다. 일반도서 외에 학술도서, 연구보고서, 정기간행물뿐만 아니라 멀티미디어 시청각 자료 등도 기부할 수 있다. 기증한 자료에는 기증자 명을 기록해 놓는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고,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우편, 택배 등을 통해 책을 보내면 된다. 문의 02-590-0700 >>사랑의 책 나누기 운동본부 (www.booknanum.org)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 병사들에게 독서와 문화생활의 기회를 선사하기 위한 운동이다. 여러 단체와 개인이 기부하는 책이 전국 76곳의 병영 도서관에 채워지고 있다. ‘사랑의 책 나누기 운동본부’ 사이트에 회원 가입 후 도서 기부를 신청할 수 있다. 문의 02-465-5417
- 2016-10-0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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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건만 AnF' 이건만 대표, 인생 2막에 펼친 한글 패션 디자인 ‘제1장’
-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 2016-10-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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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암(Pro-Am)
- 9월3일 쉐라톤그랜드워커힐 비스타홀에서 열린 2016 코리아 수퍼스타즈 페스티벌에 다녀 왔다. 이 행사의 특징은 프로-암이 주축이며 프로 갈라 쇼도 곁들였다는 점이다. 프로- 암이란 프로와 아마추어가 한 커플이 되어 플로어에서 같이 춤을 추는 것이다. 주로 시범 댄스의 경우가 많지만, 우열을 가리는 경기 대회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프로-암 댄스가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다. 다른 경기 대회에도 프로-암부문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외국의 경우는 일찍부터 성행해 왔었다. 프로-암의 동기는 아무래도 프로와 춤추고 싶은 아마추어가 많다는 얘기이다. 일반인들끼리 추자니 춤의 기량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커플로 마음이 맞아서 같이 추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시간도 맞아야 하고 경제적인 처지도 비슷해야 바람직하다. 일반인들끼리 파트너가 되면 남들 시선도 의식해야 한다. 둘 사이에 사적인 감정이 오고 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프로-암은 한쪽은 춤을 직업으로 하는 프로이고 기량도 보장된다. 아마추어는 한쪽 파트너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자신의 문제만 거기 맞추면 되는 것이다. 프로-암으로 같이 연습하게 되면 거의 개인 레슨 수준으로 교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량이 느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프로-암의 문제점도 많다. 아마추어인 사람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취미에 돈을 쓰겠다는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 개인 레슨비용에 더해서 작품비, 심지어 프로의 드레스까지 해주는 경우도 있다. 개인 레슨 후의 식사비는 푼돈이다. 어떤 경우는 플로어에 단독으로 올라가므로 그에 대한 비용을 별도로 내거나 한 테이블 식사비용을 책임지기도 한다. 프로와 같이 춤을 추는 아마추어의 경우, 마치 자신도 프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일반인들을 깔보는 것이다. 물론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개인 레슨에 준하는 레슨을 받았으므로 더 잘 추는 것은 당연하다. 댄스 경기 대회에서 프로-암으로 출전하면 다른 출전 팀이 많지 않아 단독 우승이나 상위권 성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력이 프로는 아니다. 다른 커플과 경합했을 때 냉정하게 실력만으로 우열을 결정하기도 쉽지 않다. 프로의 경우 프로끼리 또 서열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또한 만만한 게 아니다. 프로 부문 외에 청소년부 장년부처럼 나이별로도 출전 부문이 나눠져 있고, 나이에 관계 없이 출전할 수 있는 부문이 일반부, 아마추어 부문이다. 그중에 아마추어 부문은 중하위 프로 선수 못지 않은 젊은 선수들도 출전하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프로가 아니면 아마추어는 아니다. 최소한 여러 부문 경기에 출전하여 경험과 기량을 쌓아야 아마추어 부문에 출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기량도 쌓아야 하지만, 인정도 받아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프로-암으로 바로 출전했다고 아마추어를 뛰어 넘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프로-A'라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징검다리 급도 있긴 하다. 이 경우는 두 사람이 프로 못지 않게 열심히 연습해서 장차 프로 선수가 되려는 사람들이다. 둘 다 아직 프로가 아니다. 프로는 프로이다.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아마추어가 춤을 좀 잘 춘다고 해서 프로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프로는 생업이므로 매일 춤을 연습해야 하고 당연히 기량도 높아야 한다. 그러나 여가나 취미로 춤을 배우는 사람이 프로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프로의 관문이 높지 않아서 라틴댄스 건 스탠더드 댄스 건 5종목을 할 수 있으면 누구나 프로 부문에 출전할 수 있다. 일단 한번 만 출전해도 프로 소리를 듣는다. 그 목적을 위해서 프로 부문에 출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보고 있고 관중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2003년에 영국에 IDTA 국제댄스지도자자격증 시험을 보기 위해 갔었다. 당시 ‘테크닉 오브 라틴댄싱’의 저자 월터 레어드(Walter Laird)의 비서를 했던 준 먹머르도(June MucMurdo) 여사에게 레슨을 받았다. 시험에서는 커플댄스도 보여줘야 하는데 객지인 런던에서 여자 파트너를 구할 수 없었다. 구한다 하더라도 같이 또 커플댄스 시연에 대한 레슨을 받아야 하고 그 파트너에게 사례를 해야 했다. 그런데 결국 파트너를 구하지 못했고 시험 볼 때 준 여사가 커플 댄스의 파트너 역할을 해줬다. 세계적인 저명인사가 파트너가 되어 주니 커플댄스 점수는 당연히 높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별도의 사례를 하려고 했더니 극구 사양했다. 레슨을 해줬으니 커플댄스 파트너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 2016-09-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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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문주현 MDM 회장의 돈의 철학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 2016-08-1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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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유감
- 바둑을 접한 지 47년이 되었다. 중학교 무시험제 시행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 때 부모님 바둑 두시는 것을 어깨 너머로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한 곳에 빠지면 몰입하는 개인적 습성 과 지기 싫어하는 승부욕으로 열심히 하다 보니 6개월만인 중학교 1학년 때 5급이 되었다. 학교에 가서 바둑을 잘 둔다고 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가서 대국하면 상대가 되지 않게 졌다. 이게 소문이 나서 2학년 때 기우회를 운영하는 친구들이 시합에 초대하였다. 여기서 이겨 우승 트로피를 타고 보니 이를 되찾으러 방과 후에 기다리는 친구 B가 생겼다. B와 수업만 끝나면 기원으로 다니다 보니 공부는 뒷전이 되었다. 이때 급격히 기력이 늘어 1급이 되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입단도 가능할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자신이 없어 고등학교 입학 시까지 바둑을 끊고 학과공부에 매진했다. 다행히 고등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바둑을 두려니 대학입시로 잠시도 틈을 주지 않아 겨우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 끝나는 날 친구들을 집으로 초청해 제자를 키우는 작업만 하였다. 대학에 들어 와 본격적으로 바둑을 두어 보니 영 늘지가 않아 더 이상 실력 키우는 것은 포기하였다. 그래도 과거의 실력에 힘입어 단체나 학교의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하였다. 대학 이후는 많은 시간 바둑에 빠져 학업에 소홀하였다. 바둑은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썪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바둑에 투자한 시간을 다른 데 투자했으면 무엇가기 하나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바둑에 빠져 자신의 일에 소홀히 하여 노후에 고생하는 지인도 많이 보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 절제하여 폐인이 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바둑을 통해 기쁨과 슬픔을 다 맛보았다. 기쁜 일은 바둑시합에 나가 바둑판과 트로피를 탄 일이다. 슬픈 일은 단체전 선수로 참여하여 유리한 판을 실수로 지고 나면 자책하며 밤을 새우는 것이다. 바둑승부를 중시할 때는 열심히 두어 이기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의 바둑을 인정하지 않았다. 필자가 이기면 실력이고 상대방이 이기면 필자가 실수하는 행운이 따랐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바둑 친구들의 공적(?)이 된 적이 있었다. 겨우 이기면 실력도 안 되는 데 운이 좋아 이겼다는 악평을 들었으니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상당히 기분이 상했던 가 보다. 필자와 바둑을 두는 친구들은 모두 다른 판은 포기하고 필자하고 두는 판만 이기기로 하고 나왔다. 왠지 바둑을 한 판 이기기가 힘들고 시간이 무척 걸리는 현상이 나타났다.넌지시 술을 한 잔 하면서 이유를 알아냈다. 바둑실력과 인격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후부터 절대로 이긴 친구에게 악평도 안하고 축하해 주는 일을 상당기간 하고서야 공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둑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게 빠져든다. 그러나 온통 천장이 바둑판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는 시간이 될 때만 바둑을 둔다. 승부에 대한 욕심도 더 실력을 기르겠다는 미련도 버렸다. 단지 상대방과 수담하는 재미로 둔다. 바둑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는 게임이다. 이를 더 철저히 할수록 승률이 높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집중력이 떨어져 수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집계산도 부정확해져서 승률이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바둑 두는 사람은 치매에 잘 안 걸린다는 말이 있다. 기다릴 일이 생기면 바둑 두다 보면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둑은 노후 취미로 바람직하다. 승부를 떠나 몰입하는 재미로 바둑 두는 시간을 기다린다.
- 2016-08-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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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무사는 기생충(?)
- 10여 년 전 필자가 개인회사를 차릴 때 지인의 소개로 세무사를 소개받고 사업자등록증을 냈다. 무역 중개업이었다. 초기에는 사업이 꽤 잘 되어 거래가 많으니 세무사도 할 일이 많았다. 세무사는 국내 회사만 상대하다가 영어가 등장하는 서류는 필자의 업무가 처음이었다. 무역을 모르니 용어도 모르고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지 반복해서 가르쳐 줘도 이해를 잘 못했다. 그러면서 월 10만원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그러다가 사업이 점차 시들해지자 일 년에 거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줄었다. 분기별로 거래를 신고해야 하는데 분기에 거래가 한 건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수입은 점점 적어지는데 세무사 수수료는 고정비로 나가니 수수료를 좀 내려달라고 해봤다. 월 10만원이 최저라서 더 못 내려준다고 했다. 거래가 없어도 월 10만원은 내야 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거래도 일천한데 10년 동안 꼬박 월10만원의 수수료를 내야했다. 세무사가 도와주기는커녕 내 피를 빠는 기생충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는 한해에 거래가 한 두건으로 줄어들었다. 내가 낸 주문을 생산해주는 중국의 인건비가 너무 올라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업을 접었다. 드디어 폐업신고를 하고 세무사에게 주는 수수료도 끊었다. 거래는 직접 생산 공장에 연결해주고 나는 손을 뗐다. 무역협회에서 마침 회원들 대상으로 무역 애로사항 공모전을 했었다. 거래는 뜸한데 고정비로 나가는 세무사 수수료에 대한 내 경험을 써서 보냈더니 1등상에 선정되었다. 개별적으로 세무사를 쓰지 말고 다른 업종처럼 대행사를 만들어 염가로 세무 대행을 해주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내 경우는 일 년에 한 두 건이니 건당 수수료를 지급하는 방식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실행이 안 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국세청에서 세금 신고에 대한 공문 편지가 등기 우편으로 날아온다. 내가 통역 겸 고문으로 일해 주는 회사에서 내게 주는 약간의 고문료를 세무 신고하기 때문에 날아오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인데 굳이 세무 신고까지 해야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내게 유일한 소속회사로서 그 가치가 있다. 사회 활동을 하다 보면 회사 이름을 적어야 할 때가 있는데 당당히 그 회사 이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적는 것과 소속 회사를 적는 것은 본인이나 상대방이 볼 때에도 큰 차이가 있다. 5월에 국세청에서 등기우편이 날아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세금 내라는 얘기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홈텍스’라고 집에서 컴퓨터로 세무처리를 하는 방법을 설명한 안내장도 들어 있지만, 그냥 봐서 하기는 어렵다. 처리할 때까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그래서 옛날 세무사에게 한 두 해 신세를 졌다. 옛정을 생각해서 그냥 처리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더 이상은 그냥 처리해줄 수 없으며 처리를 원하면 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해는 직접 세무서에 찾아 갔다. 필자처럼 세무신고 문의를 하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한참 줄을 서서 기다리려니 이렇게 시간투자를 해야 하는 것도 수수료에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차례가 되었을 때 창구 직원이 줄을 잘 못 섰다며 다른 줄로 가라고 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다른 줄로 옮기면 줄이 더 길어 그날 처리가 불가능해보였다. 필자가 난감해하자 창구 직원이 가만히 서류를 보더니 국세청 등기 서류내용이 틀림없으면 밑에 사인해서 접수 통에 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을 세무사는 대가를 지불하라고 했었다. 세무서에서는 긴 줄을 서라고 했었다. 인터넷으로 처리하지 못한 내게도 잘못이 있지만, 이의 없으면 사인해서 반송하라든지 세무서에 방문해서 접수 통에 넣으면 된다는 설명만 있었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서류를 접수해 놓으면 다음 달 국세 환급통지서가 날아온다. 종합소득세 공제초과라며 이미 낸 세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다. 올해는 등기 공문 편지에 반송 봉투까지 들어 있어 바로 사인해서 보냈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걸 세무사는 그렇게 생색을 냈었다. 부재중에 등기 우편물이 국세청에서 와 있다고 현관문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우체국에 와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다른 등기우편물은 그냥 편지함에 넣으라고 할 수 있지만, 국세청 공문이라니 그럴 수도 없었다. 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제는 환급 통보서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체국에 가보니 과연 짐작대로 환급통보서였다. 우체국에 신분증과 함께 환급통보서를 제시하면 바로 현금 지급한다는 내용도 함께 있었다.
- 2016-07-0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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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6 성형]“100세 시대, 좋은 인상에 대한 요구가 커졌습니다”
-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불사약을 구해오라며 서복에게 동남동녀3천명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실제로 제주도와 오키나와에는 서복이 다녀간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영생, 늙지 않고자 하는 영생을 대표하는 일화로 자주 인용된다. 이런 욕망에 시달리는 이들은 진시황뿐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이들은 제주나 일본이 아닌 성형외과를 찾는다. 그래서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성형외과장 박은수(朴殷秀·48) 교수를 만났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많죠. 적지 않습니다.” 바삐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에게 다짜고짜 성형외과에 시니어 환자가 많은지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은 개원가의 개인 병원에 비해 사정이 다를까 했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는 자료를 봐야겠지만, 제 체감으로 시니어 환자의 비중은 한 35% 전후가 아닐까 싶네요. 젊어지거나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망이니까요. 생각보다 남자 환자도 꽤 됩니다.” 남자도 많다고? 성적 편견인지 몰라도 기본적으로 외모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은 여성이 아니던가. 이 의외의 현상에 박은수 교수가 내놓은 답은 이랬다. “성형외과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바로 100세 시대로의 진입입니다. 과거만 하더라도 기대수명이 짧기 때문에 노후에 어떤 질환이 나타나더라도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본인들도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남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려면, 다른 사회활동을 위해서 좋은 인상과 외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투자에도 과감해질 수 있는 것이고요. 성형에 대한 욕망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사회로부터 받는 좋은 인상에 대한 요구 기간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환자 중에 봉사활동 과정에서 더 나은 리더십을 얻기 위해 성형을 선택한 환자도 있었다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학계에도 영향을 줘, 학계에서는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질환으로 보고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했다. 특히 항노화 등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늘어나는 시니어들의 성형을 설명할 만한 또 다른 요인으로 시술 방법의 변화와 정보를 꼽았다. “비침습적(非侵襲的) 시술, 그러니까 째거나 꿰매지 않고 시술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등장했기 때문에 큰 각오를 하지 않아도 병원을 찾을 수 있게 됐죠. 또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정보 교류가 되는 것도 한 몫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들에게는 갈수록 기능적 개선과 성형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예를 들어 눈꺼풀이 처져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하면, 단순히 시야만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모도 개선되고, 자신감도 생기고, 그 과정에서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시니어의 성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균형이죠. 간혹 젊은 여성들은 본인이 성형을 했다는 흔적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고, 그 이유를 알 것 같긴 해요. 간혹 중년분들도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적극적으로 이해를 구하는 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에요. 시니어들의 성형은 티를 덜 내면서 인상을 밝게 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만족도가 높습니다.”
- 2016-06-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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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행복추구 모든 것 <번영학>에 담았죠” -3년 걸쳐 인생 역작 펴낸 이형구 전 노동부 장관
-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 2016-06-1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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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6월의 함성’이 일궈낸 오늘의 역사 -역사학자 이이화
- 역사학자 문강 이이화(文岡 李離和·79). 그의 아버지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1889~1958) 선생이 지어준 독특한 이름과 호에는 빛난다[離]는 뜻과 글 봉우리[文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야산 선생은 다섯 아들과 딸에게 8괘 중 부모를 뜻하는 ‘건’과 ‘곤’을 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일까? 문강 선생은 역사 통서 를 집필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987년 6월에 일어났다. 거리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전투경찰, 짱돌과 최루탄,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적힌 피켓과 닭장차가 맞서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항쟁이다. 당시 50세였던 문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과 함성으로 젖은 현장에 나가 민족 헌법 쟁취를 외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는 를 보며 그날의 역사 속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 2월, 이이화 선생(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과 서중석 교수(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대중화한다’를 목표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집중적인 집단 연구에 열성을 다하던 그들에게 6월 항쟁은 가장 생생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상황과 무지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문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는 우리 국민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5년 를 출간했다. 문강은 그가 집필하는 동안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초판본(2005)에 추천사를 쓰는 등 적극 격려했다. “해방 이후부터 6월 항쟁까지 사진, 만평, 우표, 지도 등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어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이건 정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죠. 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려면 영어 원서도 보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자는 능통하지만,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책을 써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는데, 서중석씨가 한다 해서 정말 기뻤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절규로 가득했던 6월의 거리 문강은 자신의 책에서 주로 다뤘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알아야 현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판단력이 생긴다고 역설한다. 특히 6월 항쟁과 같은 민주운동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지금도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뿌듯해요. 매일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지나가던 버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사람들의 함성,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죠.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고 민주주의 절차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해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문제 연구 자료를 발표하거나 강의하는 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강은 과거에 비해 그런 열기가 부쩍 줄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겪은 중·장년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더 모를 수밖에요. 인터넷상에 퍼지는 그릇된 정보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시위나 데모 등 민주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기기도 하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완결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이이화 선생 하면 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10년간 22권으로 펴낸, 그야말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책이 완결되고 약 10년이 흐른 2015년, 그는 개정판을 냈다. 처음 완성하는 데만 10년, 그리고 다시 펴내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독수리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가며 개정판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낼 때는 우리 민족사·민중사·생활사 등을 어느 한쪽에 편협하지 않고 두루두루 종합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났죠. 동북공정이나, 일본 위안부 문제 등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생겼어요. 우리 아이들도 볼 책인데 그런 내용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통사를 쓰고자 결심하고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1권을 낸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가 느꼈을 변화가 궁금했다. “현대에 들어오니 민주운동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민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경제발전에 방해되는 인물로 취급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종북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개념 없이 쓰고요. 민주의식이 결여되다 보니 배려나 나눔의 정신도 사라졌죠. 오늘날 이만큼 살만하면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인권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문강은 그런 의식을 지닌 부모세대의 영향이 자식세대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영어, 수학 공부는 시키면서 정작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기보다는 잘난 사람으로만 만들려 하죠. 자기 자식만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에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통질서나 예의범절은 뒷전이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시위도 활발할 수 있었죠.” 그는 어른세대가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때 상인들은 거리의 학생들에게 김밥이나 사이다 같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어요.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겠죠. 나는 한국전쟁 유족이나 독립투사 후손을 만나면서 내 개인 소득에 비해 돈을 많이 썼어요. 나야 세 끼 밥 잘 먹고 있고, 병도 없고, 어디 투자하는 것도 아니니 삶의 여유가 그런 쪽으로 흐른 셈이죠. 그게 나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외 재벌들을 보세요. 사회에 다 내놓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나눔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어린이 도서관 인기쟁이 ‘역사 할아버지’ 그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그동안 낸 책만 100여 권이다. 개정판이나 공동 저서 등을 포함하면 2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문강은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고 애쓰는데 쉽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많아도 어린이 책을 쓰는 데는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느꼈어요.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되는데, 자꾸 내가 아는 걸 다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워요.” 책을 쓰는 것 외에 그가 꾸준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독자와의 만남이다. 요즘도 그가 사는 파주 헤이리 근처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를 만나고 있다고. 문강은 어린이 팬 사이에서 ‘역사 할아버지’로 통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마 전에도 춘천에 있는 마을도서관에 다녀왔는데 그때 온 부모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도 주고 참 즐거웠어요. 최근 인터넷에 한 군인이 를 10권째 읽었다며 소감을 썼더라고요. 자신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요. 역사 공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과거에는 이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런 상상력을 키우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죠. 그런 독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요.”
- 2016-06-01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