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만큼이나 열광하게 했던 리우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많은 선수가 그동안 피땀 흘려 노력했던 결과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메달을 따고 못 따고, 메달의 색깔을 떠나 그동안 수고했던 모든 선수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스포츠는 국경과 사상이나 이념 그리고 종교를 떠나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순수한 경기다. 말 그대로 지구촌의 축제다. 메달의 색깔에 따라 환희가 오가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쳐 메달을 놓친 경우도 있다. 우리의 국민요정 리듬체조 손연재 선수가 그렇고 여자골프 양희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도전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모든 국민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동안은 참 행복했다. 누구에겐가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을 참 보람된 일이다. 아니 누구 때문에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많은 교훈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교훈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었다. 펜싱의 박상영 선수가 막판 대역전극으로 에페 개인전에서 헝가리 선수 게라 임레 선수에게 14대 10의 패배위기를 막판에 뒤집으며 금메달을 거머쥔 것은 감동이었다. 패색이 짙어가는 그 위기에서 ‘나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자신에게 외우며 뛰어나가는 그 정신은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용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사격에 진종오 선수 또한 집념의 승리였다.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9번째 탄환이 만점 10.9에서 6.6을 기록한 것, 이렇게 점수가 나와 버리면 가망이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필자도 고등학교 때 사격선수여서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타킷의 검은 중심을 벗어나 버리면 스스로 좌절하고 포기하기 마련이다. 그때부터는 불안해지고 집중력이 떨어져 그다음 점수도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종오 선수는 역시 특등 사수다웠다. 그 실수를 탁월한 집중력으로 극복하고 드디어 금메달을 확보한 것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시절 공기소총 충청북도 대표 선수로 태릉 선수촌에서 전국대회를 위해 보름 동안 합숙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는데 그 교훈이 지금도 나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언제든 누구든 실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에 집착하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휩쓸려 버릴 수가 있다. 그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국가대표 코치로부터 배운 그 한마디다 ‘이미 날라가버린 탄환은 잊어버려라’ 이말 한마디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이번 진종오 선수에게서도 바로 입증이 되었다.
결국, 진종오 선수는 그 충격적 실수를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 사격 3연패를 달성했다. 실수를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는 힘!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이정표가 된다. 그 교훈은 이번 올림픽에서도 보았듯 바로 는 그 말과 연결된다. 올림픽이 주는 크고 작은 감동 속에는 이러한 교훈이 있어 어떠한 드라마 보다도 짜릿한 맛이 있지 않나 싶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은 잊어버려라.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이번 리우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운동경기에서 키가 작은 선수들은 고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태권도에서 가까스로 금메달을 딴 김소희 선수도 상대방이 다리를 반 쯤 접어서 견제하자 들어가서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상대방보다 아래쪽에 있다 보니 수비하기 급급해서 점수를 지키기 위해 소극적인 경기를 한다고 주의 경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하마터면 연장에 들어가 금메달을 놓칠 뻔 했다.
사실 필자도 태권도, 유도, 복싱을 배울 때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다. 똑 같이 동시에 팔 다리를 뻗어도 나보다 팔 다리가 긴 상대방의 팔다리가 먼저 내 몸에 닿는다. 특히 타격을 가하는 운동은 팔다리의 길이가 중요하다.
이번 올림픽 경기에서 펜싱이 그랬다. 팔다리가 짧은 대신 빠른 발놀림으로 상대방을 위협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발도 빠르다면 당할 재간이 없다.
타격을 가하지 않는 유도도 그렇다. 유도를 할 때에는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야 하는데 엎어치기 기술을 구사하려면 상대방의 체중이 일단 넘어 와야 그 에너지를 앞쪽으로 쏠리게 하여 업어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키가 큰 선수라면 필자가 업어치기를 하려고 상대방을 끌어당겨도 긴 다리가 버티고 있어 상체가 넘어 오지 않는다.
당구를 칠 때도 수구의 위치가 멀리 있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팔이 닿지 않아 불안한 자세에서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키가 큰 사람은 허리만 간단히 구부려도 되니 자세가 불안하지 않다.
키가 크면 내려다보기 때문에 잘 보인다. 농구에서 바스켓이 위로 보이면 일단 공을 위로 보내서 중력으로 떨어지는 것을 노려야 하지만 키가 커서 바스켓을 내려다 볼 수 있다면 그대로 꽂으면 된다. 배구에서 공격을 할 때에도 키가 크면 상대방 진영이 다 보인다. 스파이크를 하면 내리꽂는 위력이 더 대단해서 수비하기 어렵다.
공을 멀리 보내는 구기 경기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역시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야구에서 키가 큰 투수가 내리 꽂는 공이 더 위력적이다. 골프에서도 키가 상관없을 것 같지만 키가 큰 사람은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치가 커서 임팩트 또한 크게 작용한다.
이외에도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한 것은 수없이 많다. 우리 선수들이 키 뿐 아니라 체구까지 큰 서양 선수들과 싸울 때 불리한 조건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핸드볼 경기를 보다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의 체구도 많이 좋아졌다. 키도 커지고 체구도 커졌다. 배드민턴이나 유도 경기를 봐도 확연하다.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 선수들보다 오히려 키가 더 큰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큰 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격투기에서는 오히려 큰 키로 엉거주춤 있다가 주의 경고를 받아 경기에서 지는 모습을 볼 때 더욱 그랬다. 탁구나 배드민턴도 빠청하게 서 있다가 수비 전환이 늦어 점수를 잃는 일도 많았다. 상대방은 키가 작아 큰 키의 우리 선수들을 부러워하는데 전혀 큰 키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답답했다는 얘기이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잠 못 자면 고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면 다음 날 고전하게 되어 있다. 하루 종일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눈은 퀭해서 남들이 먼저 알아본다. 일의 능률이 떨어질 뿐 아니라 피곤해서 별 일 아닌데도 쉽게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서 잠은 잘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밤에 잠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늦잠으로 보충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움직이는 일은 되도록 피하려고 한다. 조찬 모임이 가장 싫고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골프 모임도 그래서 다 끊었다. 어쩔 수 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스케줄이 생기면 그날로 그치지 않고 며칠 간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지는 후유증도 따른다. 바이오리듬이 깨지기 때문이다. 혹자는 낮에 몸을 많이 움직이면 피곤해서 잠이 잘 온다고 하지만, 젊었을 때 얘기이다. 나이가 들면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아예 힘든 일을 안 한다.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데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기 때문에 피곤해지지 않는 것이다.
◇술이 보약
잠은 아무래도 술이 보약이다. 술이 적당히 취하면 집에 가자마자 바로 잠이 드는 편이다. 단, 주량을 잘 지켜야 한다. 너무 적게 또는 어설프게 마시면 효과가 없다. 너무 많이 마시면 오히려 자다가 깨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막걸리로 주종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집에서는 막걸리 반 병이면 적당하다. 밖에서는 분위기를 봐서 1병 반 정도까지가 적당하다. 미리 2병을 주문했다가 다른 사람이 나눠 마시면 필자 주량에 맞춰 적당히 추가한다. 다른 술과 섞이면 알코올 섭취량이 일정하지 않아 가늠이 어렵다. 그래서 막걸리로 고집해야 한다. 너무 찬 막걸리는 마시기에는 시원해서 좋지만, 몸에 부담이 되니 피한다. 막걸리는 양이 많기 때문에 자기 전에 반드시 방광을 비운다. TV 등 모든 환경도 잠이 깨는 요소는 없애는 것이 좋다. 온도도 적당하게 해야 중간에 깨는 일이 없다.
◇귀가시간
귀가시간도 중요하다. 술을 마시더라도 전철 막차가 끊어지도록 마시면 과음이다.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에서 내리고 나면 술이 다 깬다. 술자리에서는 전철 막차는 사수한다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전철 막차에서는 혹시 전철 안에서 잠이 들더라도 종점에서는 다 내려야 하므로 무조건 깨워준다. 종점과 가까워 귀가에는 별 문제가 없다. 단, 집 쪽으로 가는 전철을 탔을 때에 한한다. 그렇지 않고 환승해야 할 경우에는 엉뚱한 종점에서 내리는 수가 있다. 마지막 잔을 다 마시고 나서 잠들기까지 3시간 정도는 경과해야 술 때문에 부대끼지 않고 잘 잔다.
◇영화를 본다
밤에 잠이 안 온다면 자려고 애는 써보지만,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조용한 영화 한 편을 고른다. 액션 영화는 금물이다. 중간에 볼륨이 커지기 때문이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도 영화에 빠져들어 끝날 때까지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그러므로 대략 조용한 멜로물이 좋다. 자연 다큐멘터리나 당구 방송도 좋다. 내용도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것을 고른다. 보다가 재미없어서 잠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볼륨은 크지 않게 작게 해 놓는다. 너무 크면 갑자기 큰 소리가 날 경우 잠이 달아나기 때문이다. TV 볼륨이 자장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덮고 자는 이불이 되기도 한다. 잠이 안 온다는 것은 뇌가 여전히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낮에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었더라도 다 잊고 영화에 눈을 돌린다. 영화관에 갔을 때 영화가 재미없으면 자다 나오던 일을 연상하면 된다. 영화관은 주변 조명은 어둡고 의자는 편안하니 잠이 잘 오는 것이다. 여기에 덤으로 추가하자면, 침대에서 발은 약간 높게 머리는 낮게 해둔다. 피로가 빨리 풀린다. 여분의 베개를 이용하면 좋다. 베개가 하나 더 있으면 다리 사이이든 배 부분이든 편하게 끼고 있으면 몸이 한 쪽으로 쏠려도 지탱해준다. 똑바로 누워 자는 경우는 복식 호흡을 반복하다 보면 잠이 든다.
◇미리 조심해야 할 것들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오후 6시 이후에는 커피는 금물이다. 카페인 때문에 머리가 맑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흔히 마시던 믹스 커피 대신 아메리카노 종류는 농도가 짙은 경우가 많다. 커피가 아니더라도 녹차도 카페인이 있다. 콜라도 카페인이 많다. 부득이 커피숍에 가게 되었을 때는 차라리 주스를 마시는 편이 좋다.
저녁 식사도 양을 적당히 해야 한다. 너무 많이 먹어 두면 속이 거북해서 잠드는 데 방해가 된다. 너무 소식을 하고 나면 배가 고파 잠이 안 올 수 있다. 더 챙겨 먹었다가는 그 때문에 움직이다가 잠이 달아나고 살도 찐다.
낮에 낮잠은 절대로 금해야 한다. 낮잠을 자고 나면 밤에 잠이 안 온다.
낮에 적당히 햇볕을 쬐고 온몸이 차분해지도록 정리 운동을 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실내온도는 최적의 온도를 만들어 두면 좋다. 전기요금 부담은 있겠지만, 여름이면 에어컨으로, 겨울이라면 히터를 아끼지 말고 틀고 볼 일이다.
올해 7월 초에,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60)와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85)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우정이 화제가 됐습니다. 게이츠가 블로그에 올린 글 ‘배움과 웃음의 25년’을 통해 아버지뻘인 버핏과의 인연을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억만장자들의 사귐과 도타운 우정에 감동했습니다.
버핏을 처음 만난 1991년 7월 5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이츠는 그가 자신과 아내 멜린다의 삶을 모든 면에서 좋게 바꿔놓았으며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웃을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같은 존재’ 버핏처럼 사려 깊고 친절한 친구를 둔 것은 행운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워런이라면 어떻게 할까?” 자문해보면 최선의 해답이 나온다고 합니다. 25세의 나이 차는 두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독일 바이마르시의 바이마르 극장 앞에는 괴테(1749~1832)와 실러(1759~1805)의 동상이 다정하게 서 있습니다. 괴테가 열 살 많고 성장배경과 문학관도 판이했지만 둘은 격의 없이 지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면서 세계문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괴테는 실러를 많이 도왔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은 26세나 차이가 났지만, 1558년부터 퇴계가 타계한 1570년까지 12년 동안 사단칠정론을 중심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 유학사에 길이 남을 논쟁과 우정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흔히 친구라고 말하지만 이와 비슷한 단어에 붕우(朋友) 벗 동무가 있습니다. 지기(知己)라는 말도 친구와 뜻은 같습니다. 그런데 朋은 뭐고 友는 뭔가? 원래 朋은 동사(同師), 스승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복수, 집단개념이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友는 지동(志同), 뜻이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특히 屮(왼손 좌)+又(오른소 우) 형태로 이루어진 友라는 글자는 두 손이 서로 협력하듯 친하게 지내며 도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벗과 동무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동무는 잘 아시다시피 공산당이 사용하면서 거의 죽은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동무는 참 좋은 말입니다. 글동무 길동무 꿈동무 노래동무 놀이동무 배움동무 소꿉동무 씨동무 어깨동무 책동무... “어깨동무 씨동무”로 시작되는 전래동요에서 씨동무는 씨앗처럼 소중한 동무라는 뜻입니다. 농사 지어 먹고살던 농경시대에 씨앗처럼 소중한 것은 없었겠지요. 지금 시니어들에게는 산행동무 골프동무 당구동무 술동무 여행동무 낚시동무 서예동무 사이클동무 조깅동무 트레킹동무, 이런 동무들이 있을 것입니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두보의 시에 나오는 춘수모운(春樹暮雲), ‘봄날의 나무와 해질 무렵의 구름’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벗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성어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당 시인 위응물(韋應物)의 ‘추야기구원외(秋夜寄邱員外)’도 음미할 만합니다. 동무생각을 잘 표현한 아주 유명한 시입니다. “懷君屬秋夜(회군속추야) 이 가을밤 그대 그리워 散步咏凉天(산보영량천) 서늘한 날씨에 거닐며 시를 읊네. 山空松子落(산공송자락) 빈 산에 솔방울 떨어지니 幽人應未眠(유인응미면) 숨어사는 그대도 잠 못 이루겠지.”
논어 첫 대목의 공자 말씀 중 두 번째 문장이 바로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아닙니까?
연암 박지원은 “벗이란 동거하지 않는 아내요, 동기가 아닌 아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도 했고, 담헌 홍대용에게는 “그대와 나눈 대화가 10년 독서보다 낫소”라는 말도 했습니다.
소중한 벗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글로는 간서치(看書癡)로 잘 알려진 이덕무(李德懋)의 문장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만약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의 벗을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 손수 오색실을 물들이리라. 열흘에 한 가지 빛깔을 이룬다면 50일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룰 수 있으리. 따뜻한 봄볕에 말린 다음, 아내에게 부탁해 백 번 정련한 금침으로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리라. 그런 후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래된 옥으로 축(軸)을 만들어 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 사이에다 펼쳐 놓고 말없이 마주보다가 뉘엿뉘엿 해 질 녘에 품에 안고 돌아오리라.” 정말 대단한 정성 아닙니까?
벗은 왜 소중할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자 나의 스승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에 나오는 ‘익자삼우 손자삼우(益者三友 損子三友)’의 개념 중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고 박학한 벗이 바로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친구입니다. 그 반대로 나에게 해로운 벗은 편벽되고 굽실거리기 잘하고 빈말 잘하는 사람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양명학자인 이탁오(李卓吾)는 라는 책에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 하나이니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인 줄은 알지 못하니, 이리하여 네 번 절한 뒤 수업을 전해 듣는 사람만을 스승이라 하지요. 또 스승이 바로 친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친교를 맺으며 가까이 지내는 자만을 친구라고 일컫습니다. 친구라지만 네 번 절하고 수업을 받을 수 없다면 그런 자와는 절대로 친구하면 안 되고, 스승이라지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를 또 스승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중략)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若不可師 卽不可友]
그렇게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 형제라면 얼마나 다행스럽고 좋겠습니까? 아버지와 함께 당송 팔대가로 꼽히는 소식(蘇軾)-소철(蘇轍)은 떨어지기를 아쉬워하며 평생을 함께하려 했던 형제이면서 친구이면서 사제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둘 다 유배지에 있을 때 흑산도의 형 약전이 숨지자 다산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며 통곡했습니다. “하늘도 땅도 무너지도록 원통히 부르짖으니 나무나 돌도 눈물을 흘리는데 하물며 무슨 말을 하랴? (중략) 지금 그분을 잃었으니 이제는 터득하는 바가 있어도 누구를 향해 입을 열 것이냐? 사람에게 지기가 없다면 진작에 죽느니만 못하다. 아내가 나의 지기가 되지 못하고 아들도 나의 지기가 아니며 형제와 일가도 모두 지기는 아니다.”
법구경에는 “나보다 나을 게 없고 내게 알맞은 길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가서 착하기를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學無朋類 不得善友 寧獨守善 不與愚偕]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스승을 찾듯 친구를 찾아야 합니다. 친구에게서 배우고 친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에게 있는가, 늘 생각해봐야 합니다.
변종경(卞鍾敬·68) 국일제지(주) 사장에겐 ‘촉’이 있다. 신규 사업을 하면 길이 열린다.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기업도 그가 손을 대면 황금알을 낳는다.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기획전략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의 촉이 이번엔 제조업에 뻗쳤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특수지 제지업체 국일제지(주)를 드라이빙하는 중책을 맡았다. ‘아직 제지업계 초보’라고 자신을 겸손하게 소개하는 그는 삼성맨으로서, 그리고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국일제지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안주하는 삶은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과 재미있는 일,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 들어본다.
변종경 사장의 이력은 화려하다. 서울대와 UCLA 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물산 경영기획부장, 삼성그룹 비서실 임원,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삼성맨 시절을 거쳐 삼부토건그룹 계열 (주)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 등을 역임한 그는 올해 초 국일제지(주) 사장으로 선임됐다.
‘고희록’ 써 경험과 지혜 전수하고파
사장으로 취임할 때 마침 그의 나이는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은퇴해도 여러 번 은퇴했을 나이, 그는 김형석 교수의 말을 빌려 이제야 자신이 전성기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6세의 나이에도 강의 등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65~75세의 나이가 쓴맛 단맛 다 보고 인생의 소중함을 음미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지금 김형석 교수가 말씀한 인생 황금기에 3모작을 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종전에는 매주 수요일 등산, 주 1회 골프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으나 요즘에는 매일 아침 20~30분 시트업 등 스트레칭을 하고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건강관리는 킬리만자로,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을 정도로 여행을 좋아하는 그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행 마니아는 못 되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은 자주 했지요. 여행은 새로운 풍광과 문물을 통해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 좋고요. 등산이나 트레킹의 경우 목표에 도전하고 정상에 이르렀을 때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요. 그리고 등정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는 것도 보람이지요. 지난번 킬리만자로 등정 시에는 그동안 내 자신을 되돌아보며 70세가 되면 그동안의 삶을 담아 을 써보기로 한 것이 수확이지요.”
살면서 지켜야 하는 3가지
은 제목 그대로 70세에 이른 자신을 돌아보며 쓰고자 하는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후손에게 자신이 평생 배운 지식과 지혜를 전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70 가까이 살면서 꼭 지켜야 할 3가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자신을 책임지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올바른 가치관과 도덕성을 가지고 신뢰를 지키는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 ‘인생의 평판을 쌓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평판을 잃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할 수 있겠지요.
둘째는 경제적으로 생활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수단이 될지언정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건사할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푸는 것도 마음만이 아니라 금전적으로 베풀어야 효과가 높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셋째는 주변과 사회성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저희 세대는 대체로 앞만 보고 달려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게 후회됩니다.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그랬고요. 요즈음은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려 노력해 많이 좋아졌지요. 평소부터 가족, 친구들에게 잘해야 노년에도 관계가 좋지 않을까요.”
기업은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
그는 최근 새롭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종 회의를 주재할 때 오프닝 멘트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노하우 등을 간단한 사례 등과 연결시켜 전수해 주고 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물론 사전 준비 등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임직원이 경청하고 활용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에 나오는 ‘가르치면서 절반은 본인이 배운다’는 글귀대로 저도 준비하며 또한 배웁니다. 최근의 예는 ‘역발상 아이디어’를 강조하며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한국과 프랑스가 1:1 무승부일 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 선수가 후반 46분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한 뒤 홧김에 라커룸 사물함을 발로 차 찌그러졌는데 라이프씨티 축구경기장 측에서 배상 청구을 검토하다 오히려 찌그러진 사물함에 금테를 두르고 11유로 입장료를 받고 관광객을 유치해 성황이라고 얘기해준 게 생각나네요.”
그가 현역 경영자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는 경영에 있어 기업 자체적으로 보면 수익 가치가 중요하겠지만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고용 및 인적 자본 형성, 기술 축적, 양질의 제품 및 서비스 제공, 사회공헌 등 사회적 가치 기여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경영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기업이야말로 복합적 가치를 지닌 조직이라는 생각이 이유였다.
“경영자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요? 글쎄요. 고위 관료나 정치인의 길을 갔을지도 모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반이었는데 대학은 문과를 택했지요. 당시 주변에서 저에 대해 나름 논리적이고 언변이 좋다고 부추겨 대입 때는 문과를 지원했습니다. 사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요. 사주에도 정치를 했으면 ‘한 인물’ 했을 거라고 하네요. 그러나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치 지망 안 하기를 잘한 것 같고요.”
회사의 미래를 위한 길 닦는다
그는 자신을 ‘제지업계 초딩’이라고 겸손하게 낮춰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그룹의 구조조정본부의 임원이었다. 기업과 경영의 엔진 구조를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경험과 지식이 그의 커리어에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1994년 삼성물산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로 옮겨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삼성이 상공부로부터 자동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1차 반려받은 후 비서실에 차출되어 전략지원팀을 만들었고 6개월 뒤 삼성자동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진입시켰다. 10여년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에서 열정과 집념을 갖고 그룹과 회장을 보좌하던 때를 회상하며 새로운 도전에 최선을 다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간 업무 파악을 통해 회사의 비전을 ‘첨단 정밀 종이로 100년 가는 강한 기업’으로 정하고 선순환적 구조조정, 즉 사업구조를 수익력 있는 기존 품목 이외 부가가치 높은 지종 확충, 영업 인력 확대 등 미래지향적 인력 운용, 쥐어짜기식 경비 절감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과감히 투자하고, 절약할 수 있는 경영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 본사는 물론 2개 공장 200여 명 전 직원에게 7~8회 경영방침을 설명하고 회식을 통해 공감대를 갖는 기회를 가져 직원들이 ‘한번 해보자’는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 자신도 보람을 느끼고 있고 이와 관련하여, 회사의 미래 토대 마련을 위한 청사진인 중기 계획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년에 가장 중요한 건 품위를 잃지 않는 것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쉽지 않은 미션을 수행 중인 그는 은퇴를 잊고 경영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나이 먹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위를 유지하려면 조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는 자세도 중요하고 독서 등을 통해 인격 도야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고 베푸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이 들어 품위가 있어야 멋도 있고 존경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위해 준비 중인 것들도 있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기 때문이다.
“취업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트레킹 등 여행을 많이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그리스, 이집트, 터키, 러시아 등을 비롯해 중남미 지역을 여행하지 못해 시간이 나면 몇 년 내에 꼭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2인승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타고 전국을 일주하는 것이 버킷리스트입니다.”
당구의 기술 중 가장 어려운 기술이 끌어치기이다. 수구가 적구에 맞고 뒤로 오게 하는 기술이다. 4구경기에서 제2적구가 제1적구에서 볼 때 90도 이하일 경우도 끌어쳐야 한다. 끌어치기를 해야할 때도 자주 있고 다음 당구를 치기 쉽게 만드는 포지션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도 끌어치기가 가장 유용하다. 그래서 끌어치기가 당구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아치는 기술인 세리도 끌어치기가 되어야 가능하다.
끌어치기는 당연히 수구의 하단부를 겨냥한다. 그래야 수구가 적구를 맞고 뒤에서 봤을 때 위에서 아래로 구르니 뒤로 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호인들은 중간 하단부를 겨냥하기 때문에 수구가 둔탁하게 임팩트 되면서 끌어치기 또한 제대로 안 되는 편이다. 요령은 하단부 중에 거의 바닥에 가깝게 밑둥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큐 자세에서부터 지지대까지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 엉덩이는 뒤로 충분히 빼서 큐를 잡은 손이 오른손 바지 주름 근처에서 출발해야 한다. 동호인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독학으로 당구를 익혔기 때문에 이 기본자세가 아예 안 되어 있다. 당구대에 붙어서 치거나 큐가 주름선을 넘어 재봉 선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끌어치기보다는 다른 기술을 할 때는 굳이 엉덩이를 그만큼 뒤로 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편하게 치다 보면 기본자세를 반드시 취할 기회도 사실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리 자세는 오른 쪽 뒤꿈치가 큐와 일직선이 되어야 한다. 다리는 오른쪽으로 벌린 자세가 된다. 그러나 상체도 같이 오른쪽으로 향해 있으면 안 되고 절 하듯이 공을 정명으로 향해 있어야 한다. 역시 동호인들은 굳이 그런 자세를 하지 않아도 쉽게 칠 수 있는 공들이 많으므로 굳이 기본자세를 몸에 익히지 않은 상태이다. 대부분 몸도 하체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돌아 간 상태에서 대충 쳐도 그런대로 맞았기 때문이다. 동호인 중에는 기마자세 상태에서 스트로크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하면 큐가 하체에 걸려 스트로크를 정면으로 하지 못하고 약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아웃사이드 인 자세가 되어 오조준 될 가능성이 높다.
끌어치기의 비결은 엉덩이를 충분히 뒤로 뺀 기본자세를 충실히 한 다음 지지대와 제1적구 사이를 12센티 가량 뗀 후 스트로크에 있다. 왼팔은 스트레이트로 해야 하고 지지대도 손목을 편 상태가 된다. 동호인들은 보통은 지지대에서 어느 정도 큐가 앞으로 나간 다음에 밀어친다. 그렇게 하면 임팩트가 약하다. 큐를 스트로크 할 때 지지대 근처까지 빼서 임팩트를 하면 임팩트 거리가 커서 효과가 커진다. 그러려면 지지대가 단단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큐가 겨냥한대로 되지 않고 밑에서 떠올리는 실수가 일어나기 쉽다. 여기 덧붙여서 스트로크는 가볍게 손목만으로 스냅을 준다. 스냅은 큐를 쥔 오른 손은 진행할 때는 엄지와 검지만 사용하지만 짧게 끊어칠 때는 다섯 손가락을 다 써서 큐를 잡아야 한다. 동호인들은 손목만으로 치지 못하고 하박은 물론 상박, 어깨까지 동원하기 때문에 힘은 많이 쓰는데 임팩트는 막상 에너지가 덜 먹히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어깨 힘은 빼야 한다. 골프의 임팩트와 비슷하다. 골프채와 골프공이 만날 때 임팩트가 가장 세게 일어나야 하는데 어깨에 힘을 과다하게 주면 몸이 경직되어 막상 공이 맞을 때 임팩트가 약해지고 몸만 힘드는 경우와 같다. 골프가 어깨 힘보다는 골프채의 무게를 이용하여 공을 치듯이 당구도 큐의 무게를 느끼며 쳐야 한다.
끌어치기가 잘 되면 다음 단계는 적구의 이동선을 보게 되고 힘 조절로 다음 당구를 치기 좋게 공을 모으는 기술 단계로 갈 수 있다.
미국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인구는 6500만 명. 이 가운데 10%가 좀 넘는 700만 명의 조부모가 손주와 함께 산다. 1992년에는 7% 정도였던 것이 경제여건 악화 등으로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절대 다수인 90%의 조부모는 손주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남한)의 거의 100배나 되는 넓은 나라이다 보니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어 손주에 대한 애틋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주 보지 못해 안타깝고 가끔 만나면 손주가 서먹해 하니 더 안타까운 것이 조부모의 마음이다. 이런 조부모들을 위해 미국의 ‘A&E 가족출판사(www.fambooks.com)’가 제시한 ‘떨어져 사는 손주와 가까워지는 기법 20가지’를 소개한다.
손주가 다음 만날 날짜를 되새길 수 있도록 선물을 한다. 약속한 다음 방문 때까지의 일수를 계산해서 그 수만큼의 초콜릿을 예쁜 통에 담아 선물하고 매일 하나씩 꺼내 먹도록 하면 효과가 있다.
손주가 아플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담은 상자를 보낸다. 아플 때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이나 게임 기구, 맛있는 죽 같은 것을 담은 선물 상자를 받은 손주는 조부모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예쁜 종이를 하트 모양으로 오린 후 그 위에 손주에게 고마움을 담은 글을 쓴다. 이 종이를 봉투에 담아 우송을 하면 받아 본 손주는 조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보물찾기 놀이는 재미있고 친근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가 미리 약속한 곳에 보물을 숨기도록 한 후 조부모는 온라인으로 손주에게 숨긴 곳에 대한 힌트를 주는 방식이다.
뽀뽀나 키스를 의미하는 상표가 붙은 과자(또는 초콜릿)를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에게 보내 손주에게 매일 하나씩 주도록 한다. 할머니·할아버지가 그 과자를 통해 손주에게 매일 뽀뽀를 한다는 말도 전달토록 한다.
이메일(또는 편지)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한다. 조부모가 먼저 이야기의 서두를 적어 보내면 손주가 이야기를 뒤이어 가는 방식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함께 완성해 나간다.
손주에게 ‘세계 최고의 손주’라는 문구를 새긴 트로피를 보낸다. 트로피를 보낼 때 세계 최고인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동봉한다.
세상을 살면서 체득한 교훈을 담은 소책자를 만든다. 매주 혹은 매달 몇 가지 교훈을 적어 소책자를 완성한 후 손주에게 보낸다. 인생을 시작하는 손주에게는 의미 있는 인생 안내서가 될 수 있다.
껴안을 수 있는 봉제완구를 보낸다. 이 봉제완구를 통해 조부모가 포옹해 주는 듯한 느낌을 손주가 받도록 해 유대감을 높인다.
부드럽고 얇은 작은 종이에 편지를 써 목걸이 펜던트로도 이용할 수 있는 작고 예쁜 곽에 넣어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편지를 꺼내 재미있게 읽고 그 곽을 몸에 지니면서 조부모를 생각하게 된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자(또는 초콜릿)에 덕담을 적은 메모를 첨부한 후 상자에 듬뿍 담아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과자를 먹을 때마다 조부모의 뜻이 담긴 덕담을 읽게 된다.
손주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손주가 고맙게 한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소상히 적어 편지로 보낸다.
가족사를 함께 만든다. 손주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조상이나 친척에 대한 자료를 같이 수집하고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가족사 만들기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봉사활동 하는 날을 서로 같은 날짜로 정한다. 봉사활동을 한 날 저녁에는 손주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봉사활동을 했는지, 어떤 보람을 느꼈는지 서로 이야기 나눈다.
손주만을 위한 크로스워드 퍼즐을 만든다. 인터넷 크로스워드 퍼즐을 이용하되 함께 한 활동이나 책 읽기 등에서 힌트를 얻어 풀 수 있도록 퍼즐을 재구성한다.
이름 없는 별을 하나 고른 후 손주의 이름을 따 별 이름을 짓고 공식적으로 등록(www.starregistry.com) 한다. 그 별을 볼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영웅을 공유한다. 먼저 조부모가 존경하는 영웅이 누구며, 왜 존경하는지 손주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손주에게 존경하는 영웅과 그 이유를 물어보고 의견을 나눈다.
손주와 만난 후 떠나기 전에 작은 카드를 작성하여 집안 곳곳에 숨겨 둔다. 그러면 조부모가 떠나고 난 뒤에 손주가 그 카드를 찾아보면서 재미도 느끼고 추억도 되새기게 된다.
손주와 함께하고 싶은 신나는 모험을 주제로 한 공상소설을 같이 쓴다. 공상소설을 시리즈로 만들 수 있으면 더 좋다.
인터넷 게임을 함께 한다.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을 통해 골프, 카드, 체스 등 각종 게임을 함께 할 수 있다. 손주에게 스포츠, 미술, 음악 등을 직접 가르쳐 주면 조손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스포츠나 미술, 음악 활동을 하는 조부모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놓으면 손주가 그 비디오를 보면서 배울 수 있어 더욱 좋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오늘은 골프 유머 몇 가지로 시작해 본다.
- 100 깰 때 필요한 3無 무욕(無慾), 무력(無力), 무념(無念)
- 90 깰 때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3가지 벙커, 미들아이언, 마누라
- 80 깰 때 있어야 할 4가지 돈, 시간, 건강, 친구
- 70 깰 때 버려야 할 3가지 직장, 가정, 돈
- 골프 폼도 좋고 스코어도 좋으면 금상첨화
- 폼은 좋은데 스코어가 나쁘면 유명무실
- 폼은 안 좋은데 스코어가 좋으면 천만다행
- 폼도 안 좋고 스코어도 안 좋으면 설상가상
골프 사자성어
- 일취월장(一取越長) 잘 친 퍼터 샷이 길게 친 드라이버 샷보다 낫다
- 이구동성(二球同成) 세컨 샷을 잘 치면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
- 삼고초려(三高初慮) 골프 라운딩 때 세 명의 고수와 함께 치게 되면 초반부터 심려가 많다.
- 사고무친(四高無親) 드라이버, 세컨 샷, 어프로치, 퍼터 네 가지를 모두 잘 치면 사장님 손님 떨어져요~친구가 없어요~
같은 뜻의 말이라고 해도 생생하게 말할수록 설득력이 있고 기억도 오래 간다. 재미있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귀에 쏙 들어온다. 재치 코드는 그래서 필요하다. 살아 있는 말은 사람의 마음 속에 쏙 들어온다. 구체적인 사례와 예증을 제시하면 더 흡인력이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나이가 들어도 여러 가지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이렇게 말하면 그저 그렇다. 다 아는 이야기요,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다.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흘려들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론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사례와 실제 인물의 경우에 연결해서 말하면 뜻이 더 살아난다.
“러시아의 소설가인 파스테르나크는 68세에 노벨문학상을 탔다.”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는 그녀의 유명한 소설 ‘지지’를 71세에 썼다.”
“이탈리아의 토스카니니는 86세에 정열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피카소는 87세에 걸작을 여러 점 그렸다.”
“두 살 때 시각과 청각을 잃은 헬렌 켈러는 88세에 사망할 때까지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생생하고 귓속에 쏙쏙 들어온다.
언젠가 받은 어느 회사의 카드에는 1세부터 100세에 이르기까지 나이에 따라서 한 살, 한 살 재미있게 설명해 놓았다. 1세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태어나고, 누구나 비슷하게 생긴 나이란다. 나이 3세에 정약용은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일세’라는 시를 지었단다. 그런데 보통 나이 3세는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는 나이다.
21세에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고, 보통 나이 21세는 사과 같은 얼굴을 갖기 위해 변장을 시작한다. 35세에 퀴리 부인은 남편과 노벨상을 받았고, 보통 나이 35세는 이제 혼자 아니라는 사실을 엄청 느끼게 된다. 36세에 스티븐 스필버그는 ET를 만들었지만, 보통 나이 36세는 절대로 ET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44세에 원효대사는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도를 깨달았지만, 보통 나이 44세는 약수터의 약수물도 믿지 못하는 나이다. 47세에 이순신 장군은 옥포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보통 나이 47세에는 싸울 일이 있으면 피하고 본다.
54세에 디즈니는 디즈니 왕국을 만들었지만, 보통은 꿈의 왕국을 꿈속에서나 보게 된다. 59세에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했는데, 보통 나이 59세는 성골, 진골이 아니면 아무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한단다. 68세에 갈릴레이는 천동설을 뒤집어서 지동설을 주장했지만, 보통 나이 68세에는 생각을 뒤집으면 민망해진다. 91세에 샤갈은 마지막 작품을 완성했지만, 보통 나이 91세는 나이 자체가 작품이 된다. 93세에 피터 드러커는 경영학의 기둥을 세웠다지만, 보통은 한국말도 통역이 필요해지는 나이가 된다.
나이에 관한 유머는 청중에 맞춰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다. “언제 나이 드셨다는 걸 느끼십니까?”하고 묻는다. 여러 사람이 이런 저런 대답을 하고, 본인이 몇 가지를 덧붙인다.
- 종로, 신촌, 명동 거리에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몇 번씩 지나다녀도 아는 사람 한 명을 만나지 못할 때
- 크리스마스 이브의 귀가 시간이 매년 빨라질 때
- 나도 모르는 사이 택시기사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을 때
- 오랜만에 찾은 오락실에서 계속 두리번거리며 테트리스를 찾을 때
-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어제 본 TV 이야기를 하던 중 “그전에는 잘 몰랐는데 ‘가요무대’도 꽤 재미있더라고”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때
- 몸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 이야기가 들리면 귀가 솔깃해질 때
- 대한민국 군인이 더 이상 아저씨가 아니라고 느껴질 때
-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온 여자가 무척이나 어리게 느껴질 때
유머는 인상적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초면의 어색함과 거리감을 없애는 데 유머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또한 유머는 팽팽한 긴장을 풀어 주는 돌파구가 된다. 협상의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팽팽하게 긴장감이 돌고 있을 때, 한마디 유머를 던지는 장면은 영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 않은가? 긴장되고 숨 막히는 분위기,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유머로 반전시킬 수 있는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실패할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라고 한다. 15분이 넘으면 잡념이 생기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유머 한마디는 집중력을 회복시켜 준다. 그런데 유머를 섞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유머 전에 “지금부터 농담 한마디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농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예요”라고 해서는 곤란하다. 이 말을 함으로써 뒤에 오는 농담의 김이 빠지고 만다.
유머의 매력은 놀라움에 있다. 미리 예고를 해서 김을 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들으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농담 하나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듣는 사람들을 썰렁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유머를 섞더라도 이야기의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 유머가 좋다. 유머라고 해서 전혀 관계 없는 ‘무슨 무슨 시리즈’를 읊는 것은 컨텍스트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 강미은 교수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전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미시간 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박사,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저널리즘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