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요일에 함께 라운드합시다.” 수천 명이나 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원 중에 딱 한 명뿐인 대학 선배이자 지금은 함께 코리안투어 경기위원이기도 한 최병복 프로가 전화를 한 것은 3년 전쯤 어느 나른한 날 오후였다. 마침 약속이 없던 나는 ‘얼씨구나’ 했다. 그러곤 물었다. “티업 시간 알려주시면 달려가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은 누구신지요?”라고. “최상호 프로님이 오시기로 했어.” 황새 최천호 프로(2020 코리안투어 멤버) 아버지이자 스승이기도 한 선배 최 프로가 답했다. 눈이 번쩍 뜨인 내가 물었다. “그 최상호 프로님 말씀인가요?”라고. “누가 또 있겠어. 그 최상호 프로님이지. 내 사부셔. 이번에 한 사람 데리고 오라고 하셨는데 후배님 생각이 나서 말이야.” 선배 최 프로가 사연을 털어놨다. ‘살아 있는 전설 최상호 프로와 뱁새 김용준 프로의 대결’은 그렇게 이뤄졌다. 얼씨구? 대결이라니?
코리안투어에서만 43승. 50세 이상이 참여하는 시니어 투어에서 15승. 다시 60세 이상이 겨루는 그랜드 시니어부에서 10승. 국내에서만 총 68승을 거둬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최상호 프로. 한국 골프에서 이 기록을 깰 선수가 있을까? 내 생애에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성기 최상호 프로만큼 경쟁자를 압도할 기량을 가진 선수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그런 선수가 나온다면 더 큰 무대로 진출하기도 할 테고. 미국 PGA투어에서는 1940년대를 지배한 샘 스니드가 세운 PGA투어 최다승 기록을 ‘외계인’ 타이거 우즈가 마침내 달성하기는 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 같던 82승 기록과 동률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까 최상호 프로는 한국의 ‘샘 스니드’인 셈이다.
살아 있는 전설과의 대결은 어떻게 됐냐고? 라운드가 끝나고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최상호 프로에게 공손하게 물었다. “선배님, 저는 어떻게 하면 볼을 좀 더 잘 칠 수 있을까요?”라고. 전설이 잠깐 생각하더니 답했다. “볼을 너무 세게만 치다가는 실수를 하기 쉬워요. 조금 더 부드럽게 치면 어떨까요”라고. 그랬다. 나는 하이브리드로 페어웨이 한가운데 갖다 놓은 파5 첫 홀 티샷을 빼고는 모든 샷을 강력하게 했다. 아니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러고는 숱한 위기를 자초했다. 티샷이 벙커나 러프 같은 고약한 자리에 들어간 적이 많았다. 세컨샷이 그린을 훌쩍 지나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심지어 티샷한 볼이 하늘 높이 떴다가 한참 있다 툭 떨어지는 이른바 ‘뽕샷’도 나왔다. 그래도 그날 나는 퍼터 하나만큼은 전설에 버금가게 했다. 내가 그날 스크램블(그린을 놓치고도 파를 하는 것)을 대여섯 개나 한 것은 순전히 퍼터 덕분이었다. 물론 그 전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티샷이나 세컨샷 탓이기도 했고.
그날의 대결은 아니 도전은 결국 두 타 차 뱁새의 패배로 끝났다. 최상호 프로 71타, 뱁새 73타였다. 안간힘을 쓴 내가 초반에 기적처럼 한 타 앞서간 적도 있었다. 에이, 설마? 진짜다. 그러나 내가 제풀에 무너지는 동안 전설이 침착하게 경기를 풀어가며 승부를 뒤집었다. 나는 마지막 파5 홀에서도 투 온을 시키는 등 막판까지 완력으로 어찌해보려고 했으나 절정 고수를 상대로 한 번 기운 승부의 추를 돌리지는 못했다. “퍼터를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라는 전설의 칭찬은 한편으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위기상황을 만드느냐’는 질책이기도 했다. 전설과 라운드를 한 뒤로 내 샷은 크게 변했을까? 그의 조언을 듣고 부드러워졌을까? 흐흐. 그날로부터 3년 가까이 지난 어제서야 문득 ‘정말 부드럽게 샷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떠먹여줘도 못 먹으니 내가 발전이 더딜 수밖에.
전설을 오랜만에 다시 본 것은 몇 주 전 챔피언스 투어 대회에 경기위원으로 근무하러 갔을 때였다. 첫 홀 그린 옆에서 일부러 기다렸다가 그와 인사를 나눴다. 스물두 살에 프로 골퍼가 돼 지금까지 40년 넘게 뛰고 있는 전설이지만 여전히 꼿꼿하고 단정했다. 최상호 프로는 올해 65세다. 3년 전인 만 62세에 매경오픈 컷 오프를 통과해 코리안투어 최고령 컷 통과 기록을 경신한 그다. 미국 PGA투어에서도 베른하르트 랑거가 2019년에 마스터스(메이저 대회 중 하나)에서 62세로 컷 통과한 것이 기록이니 대단한 일이다.
오랜만에 전설을 다시 본 날 나는 최병복 프로에게 전설 얘기를 하나 들었다. 전성기 때 전설이 대회를 마치고 부인에게 전화를 할 때 “오늘은 잘했어요”라고 조용히 얘기한 날은 우승한 날이라고. “오늘은 조금 잘 안 됐어요”라고 한 날은 준우승한 날이라고. 그렇게 많은 우승을 했으니 준우승도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톱10에 든 적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우승은 잘한 것이고 준우승은 조금 잘 안 된 것이라니? 최병복 프로에 따르면, 전설은 전성기 시절 대회에 나가면 ‘우승하러 왔다’고 생각했단다. 헉! 아직도 한 홀 한 홀 풀어가기 급급한 뱁새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전설과 같은 마인드와 실력을 한 번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