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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식의 칠보시(七步詩)
- 를 읽어보면 79권에 조조(曹操)의 사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물어 위(魏) 문제(文帝)로 등극한 조비(曹丕)가 자신의 친동생이자 정적인 조식(曹植)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죄를 묻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七步詩)’가 나온다. 그런데 이 칠보시의 원작자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쟁이 있다. 조식이 활동하던 건안(建安) 시대에는 칠보시 같은 오언시(五言詩)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기였다. 게다가 정사(正史)인 와 조식의 사후 편찬된 어디에도 이 시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느 문헌에 최초로 등장할까? 위진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집한 다. 이 문헌이 편찬된 시기와 조식의 시대는 약 200년 차이가 나는데,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 문제 조비가 동아왕(東阿王)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고, 만약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을 의미함)을 받을 것이라 하자, 조식이 이에 시를 짓기를 ‘煮豆持作羹,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라 하니, 황제가 심히 부끄러워하는 안색이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칠보시’의 원전은 특이하게도 6구의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에 관한 한 고금 제일이라 칭할 만한 조식이 불완전한 6구 형태의 오언시를 남겼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또 가 위진시대 유명했던 인물들의 일화 및 대화만 기록한 글이어서, 이 시가 언제, 어떤 일로인해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의 글을 토대로 시기를 유추해보면, 일단 조식을 동아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조식이 동아왕으로 봉해졌을 때는 그의 형 조비는 죽고, 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보위를 이은 후여서 이 시의 신뢰성은 또다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후 이 시는 의 주석에 인용된다. 에 가장 권위 있는 주석을 단 이선(李善)은 60권, 임언승(任彥昇)의 에 대한 주석에서 “에서 말하길, 문제(文帝)가 진사왕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니 그 시는 ‘萁在灶下燃,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이다”라고 하면서 본래의 6구를 절구(絶句) 형태인 4구로 줄여 소개한다. 그러다가 조식 사후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에서 이 시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일화들과 함께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다. 煮豆持作羹, 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조식의 칠보시는 소개되는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2017-08-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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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의 ‘도원결의’, 사실일까?
- 우리가 재미있게 읽는 는 사실상 라는 소설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전문가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소설 는 황건적 난에 만난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로 결의를 하는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그리고 이들 세 명은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도 이 결의를 지켜낸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오(吳)-촉(蜀) 동맹을 어기고 오나라가 형주를 지키던 관우를 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자 장비는 연일 폭음을 하고 부하들을 두들겨 팼다. 급기야 장비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되고, 이에 대노(大怒)한 유비는 제갈공명의 만류를 뿌리치고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 오나라를 공격한다. 하지만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대패한 후 백마성(白馬城)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사람의 의형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출발점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과연 사실일까?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려면 먼저 삼국시대 역사서인 정사(正史) 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에는 도원결의가 나올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촉서(蜀書) 관우전(關羽傳)을 보면, “선주(先主, 유비)는 관우, 장비와 잠을 잘 때도 같은 침대에서 자는 등 서로 아끼기를 형제와 같이 하였다. 관우, 장비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는 선주 뒤에 시립해 하루 종일 있었으며, 선주를 따라 천하를 다니며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나온 ‘은약형제(恩若兄弟)’라는 단어에서 나중에 나관중이 ‘도원결의’를 상상해낸 듯한데 실제 관계는 위에서 보듯 형제라기보다는 군신관계로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또한 촉서 관우전의 다른 부분에는 서주를 잃고 관우가 붙잡혔을 때 조조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통해 자기를 위해 일하지 않겠냐고 관우의 의중을 떠보자 관우는 탄식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공(曹公)이 베푼 극진한 은혜를 잘 아오. 하지만 나는 유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함께 죽기로 맹서했고, 그러므로 그를 배신할 수 없소.” 즉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라고 말할 뿐, 의형제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한편 위서(魏書) 유엽전(劉曄傳)에도 이를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 관우가 오(吳)에 의해 피살된 후 위문제 조비(曹丕)가 여러 신하들에게 과연 유비가 병사를 일으켜 오를 칠 것인가, 관우를 위해 복수를 해줄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시중(侍中)인 유엽(劉曄)은 “유비와 관우는 의리상으로는 군신이나, 은혜상으로는 부자와 같습니다. 관우가 살해되었는데, 유비가 만일 그를 위해 복수해주지 않는다면, 관우의 은의에 대해 시종일관하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도 관우와 유비는 의리상으로는 군신, 은혜상으로는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을 뿐 의형제로는 묘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촉서(蜀書) 장비전(張飛傳)에도 “어릴 적부터 관우와 함께 선주(유비)를 모셨는데, 관우의 나이가 몇 살 많아서 장비가 형 대접을 하였다”라는 표현만 나올 뿐, 형제관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07-2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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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의 인재 등용
- 우리나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외교 및 정국이 급속도로 정상화되어가고 있다. 한편 내각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새 대통령은 상당히 광범위한 인재풀을 활용하는 모습이다. 인재 등용에 관한 한 역사상 가장 과감했던 이가 바로 삼국지의 영웅, 조조(曹操)다. 그는 인재를 구하는 칙령을 세 차례나 발표했는데 특기할 점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능력 제일주의로 사람을 뽑을 뿐 그 사람의 청빈함이나 덕성 등은 보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그는 건안(建安) 8년에 발표한 경신령(庚申令)에서 이러한 과감한 인재 등용 시책을 펴는 이유에 대해 ‘治平尙德行 有事賞功能(태평성세에는 덕성을 봐야 하지만, 난세에는 재능이 우선한다)’는 말로 비상시국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다. 조조는 또한 건안(建安) 15년(AD 210), 그 유명한 ‘구현령(求賢令)’을 발표한다. “예로부터 천명을 받아 임금이 되었거나 또는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일찍이 현인(賢人),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있었던가! 그러나 현인을 구하려 애를 써도, 그들이 은거해 있는 곳을 나오지 않는다면 만날 수 없으니, 뛰어난 사람은 구할 수 없도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아니하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시기이라. … 만약 반드시 청렴한 선비라야 등용할 수 있다면, 제 환공은 어떻게 (관중(管仲)을 등용해) 세상을 제패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강태공(姜太公)처럼) 갈옷을 입었으나 옥 같은 마음을 품고서 위수(渭水)가에서 낚시질하는 자가 없겠는가? 또 (한(漢) 고조(高祖)의 책사 진평(陳平)처럼) 형수를 도적질하고 금을 받았지만, (자신을 알아보고 천거한) 위무지(魏無知)를 만나지 못한 자가 없겠는가? 그대들도 나를 돕고자 한다면, 비록 흠결이 있는 자라도, 오직 재능만 보고 천거하여, 내가 그들을 얻어 기용할 수 있도록 하라.” 조조 이전에도 인재를 구하는 칙령들은 한(漢) 무제(武帝)의 ‘현량조(賢良詔)’ 등 한(漢)나라 때부터 계속 발표되어왔다. 그러나 오직 능력 하나만을 보겠다는 과감한 인재 등용 정책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소설 에는 조조가 지었다는 그 유명한 ‘단가행(短歌行)’이란 시(詩)가 실려 있다. 이 시를 정말 조조가 지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여기서도 그 중심 내용은 인재 등용이다. 이러한 과감한 인재 등용 정책으로 조조는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아놓게 되는 것이다. 무제기(武帝記)에서는 조조의 용인술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평(評)하여 말한다: 한말(漢末)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여, 원소(袁紹)가 4주(四州)에서 호랑이처럼 군림하니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太祖, 조조)가 계략과 지모를 내어 천하를 독려하였다. … 태조는 관직을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하매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의 정무[皇機]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르고, 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세대를 뛰어넘는 웅걸, 즉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6-2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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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봄
- 늦은 봄을 노래한 시 중 필자가 좋아하는 시는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이다. 이 시는 두보가 47세 되던 AD 758년 늦은 봄,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할 때 지은 작품이다. 좌습유라는 벼슬은 간언(諫言)을 담당하던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당시 그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재상(宰相) 방관(房琯)이란 사람이 죄목을 뒤집어쓰고 파면되는 일이 발생하자 ‘죄가 가벼우니 대신을 파직함은 옳지 못합니다(罪細,不宜免大臣)’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자 숙종(肅宗)은 매우 노하여 삼사(三司)를 시켜 두보를 문초하게 한다. 이때 재상 장호(張鎬)가 얘기하길, ‘(간관인 두보가 간언한 것을 가지고) 죄를 묻는다면 그것은 간관의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甫若抵罪,絕言者路)’라고 하여 이 일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는 여름이 되자 결국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이 시는 당시 황제의 눈 밖에 난 두보가 좌천되기 이전,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늦봄에 실어 읊은 걸작이다. 2수 중 첫 번째 시의 전련(前聯)을 먼저 살펴보자.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만 점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니 정녕 사람을 시름 잠기게 하네 且看欲盡花經眼(차간욕진화경안) 장차 다 지려는 꽃잎, 눈앞을 스쳐가는 것을 보노니 莫厭傷多酒入脣(막염상다주입순) 몸이 많이 상했다 하여 술 마시는 것을 마다할 수 있으리오… ‘한 조각 꽃잎이 날려도 봄빛이 줄어든다’는 의미의 ‘일편화비감각춘(一片花飛減却春)’은 참으로 뛰어난 명구로서 역대로 수많은 문인들에 의해 애송되어왔다. 이 구절은, 대조를 이루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라는 의미의 ‘일엽낙지천하추(一葉落知天下秋)’ 구절과 더불어 각각 봄이 짐과 가을이 옴을 읊은 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신세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니 어찌 심란하지 않았겠는가? 마지막 구절을 보면 ‘몸이 이미 많이 망가졌다(傷多)’는 표현을 통해 심적 고생이 이미 건강을 해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를 짓고 난 뒤 두보는 같은 제목의 두 번째 시를 짓는다. 이 시의 전련에는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유명한 시구가 등장한다. 朝回日日典春衣(조회일일전춘의)정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매일강두진취귀)매일 강가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주채심상행처유)외상 술값이야 으레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사람은 예로부터 70년 살기도 드문 일 아니겠는가 이 시를 보면 그는 더욱 심해진 마음고생을 술로 풀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차피 칠십도 못 사는 인생,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냐고…. 이어지는 후련(後聯)이다. 穿花蛺蝶深深見(천화협접심심견)꽃을 파고드는 호랑나비 깊숙이 보이고 點水蜻蜓款款飛(점수청정관관비)물 위를 스치는 잠자리 사뿐히 날아오르네 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말을 좀 전해다오, (우리 인생과) 함께 흘러가는 경치에게… 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잠시나마 함께 즐기면서 서로 거스르지 말자고” 두보는 자신이 존경했던 도연명의 형식을 빌려 아름다운 봄날 경치에 대한 자신의 헌사를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아호는 양우養愚.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KAIS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경영과학을 전공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하고 있다. 오랜 소망이었던 서예와 한학을 다시 공부하게 됐다. ‘난정서’를 접하게 된 이후 국내외 문헌을 찾아가며 난정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저서로는 가 있다.
- 2017-05-2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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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산책] 도망시(悼亡詩),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
- 사람이 가잘 절절한 아픔을 느낄 때는 바로 사랑하던 사람을 잃은 순간이 아닐까? 옛날 중국에서는 엄격한 유교적 전통이 살아있어 남녀 간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천시했다. 그러나 아내가 죽었을 경우만큼은 그 절절한 심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었는데, 이를 도망시(悼亡詩)라 불렀다. 이 도망시의 원조인 시가 바로 서진(西晉)시대 반악(潘岳)의 3수다. 반악은 자가 안인(安仁)으로, 서진시대 육기(陸機)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 최고의 문인이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미남으로 보통 두 사람을 꼽는데, 한 사람은 전국시대 초(楚)나라 삼려대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며, 다른 한 사람은 후세에 반안(潘安)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이 풍운아다. 반악은 미남에다가 좋은 가문 출신,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혀 재모쌍전(才貌雙全)의 인재로 불렸는데, 당시 권문세가였던 서진(西晉)의 외척인 양씨(楊氏) 집안과 혼인을 하게 된다. 금슬도 좋았는데 하늘이 시기해서인지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그 애절한 슬픔을 노래한 시가 바로 3수이며 그의 대표작처럼 불리고 있다. 이후 아내를 잃은 슬픔은 이를 본떠 ‘도망(悼亡)’, 벗을 잃은 슬픔은 ‘도붕(悼朋)’ 등으로 표현했다. 3수 중 첫 번째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소개해본다. 荏苒冬春謝(임염동춘사) 들깨 무성하다 겨울 봄에 그 자취를 감추고, 寒暑忽流易(한서홀류역) 계절은 홀연히 다시 바뀌니, 之子歸窮泉(지자귀궁천) 그댄 황천(黃泉)으로 돌아가, 重壤永幽隔(중양영유격) 아홉 층 깊은 땅 아래 영원히 격리되는구려. 작가는 원강(元康) 8년 초겨울, 아내 양씨가 병을 얻어 원강 9년 봄에 장사를 지내게 되는 과정을 첫 번째 구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구는 망자(亡者)를 위해 복상(服喪)한 지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복상기간도 끝나 탈상(脫喪)을 하게 되니, 소위 사자(死者)가 망자(亡者)로 바뀌는 슬픔을 ‘영원한 격리[永幽隔]’란 단어로 그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워낙 유명한 시여서, 첫 구절에 나오는 ‘임염(荏苒)’이란 단어는 후대에 도연명과 두보 등 역대 유명 시인들이 다투어 인용을 했고, 이후로는 그 의미가 본래의 ‘들깨가 무성하다’는 뜻에서 1~2구의 전체 의미인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다’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다. 如彼翰林鳥(여피한림조) 마치 저 숲을 나는 새처럼, 雙栖一朝隻(쌍서일조척) 쌍으로 살다 하루아침에 홀로 되고, 如彼遊川魚(여피유천어) 저 내에서 헤엄치는 고기처럼, 比目中路析(비목중로석) 나란히 다니다가 도중에서 헤어진 듯하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동쪽 바다에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남쪽 땅에 비익조(比翼鳥)가 사는데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두 마리가 좌우로 달라붙어야 비로소 헤엄을 칠 수 있는 물고기이고,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각각 한 개밖에 없어 암수가 좌우 일체가 돼야 비로소 날 수 있는 새라 한다. 모두 남녀의 떨어지기 힘든 사이를 의미하는데, 작가는 이 단어를 인용해 떨어질 수 없는 배우자를 잃은 자신의 고통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 2017-05-0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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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요”
-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4-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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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절함을 노래한 시, 두 번째
-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에는 심원(沈園)이란 명소가 있다. 중국 남송시대 때 부자였던 심씨 소유의 아름답고도 거대한 정원인데, 이 정원 입구에는 계란 모양의 둥근 바위가 둘로 쪼개져 있는 조형물이 서 있다. 가서 살펴보면 ‘단운(斷雲)’이란 행서체 글자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바로 부부간의 정을 뜻하는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끊어버린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부부였지만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슬픈 사연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곳은 바로 중국 남송시대의 유명한 애국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애절한 사랑의 일화가 서려 있다. 육유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당완(唐婉)이라는 이종사촌 동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친구로 지내다가 미모와 재색을 겸비한 규수로 성장하자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육유의 나이 20세 때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육유가 과거시험에 자꾸 낙방하자 며느리 탓이라 여기게 된다. 자식도 못 낳고,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런 상황들이 모두 며느리를 잘못 들여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급기야 둘을 강제로 떼놓는다. 모친의 성화에 시달리다 못한 육유는 이혼을 가장하고 인근에 당완을 숨기고는 몰래 만나는 행각을 이어가지만 곧 들통이 나고, 결국 모친이 정해준 왕씨 성의 여인과 재혼을 한다. 어쩔 수 없게 된 당완도 친정어머니의 권유로 조사정이라는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진 두 사람이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 육유가 27세 되던 봄이었다. 육유는 심원에 놀러왔다가, 같은 날 봄나들이를 온 당완을 만나게 된다. 당완의 낯빛이 변하는 것을 본 남편 조사정은 사정을 물었고, 당완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사정은 대인의 풍모를 보이며 술과 안주를 준비한 뒤 육유를 초대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그러나 서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육유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 비통한 마음을 담아 이 라는 시를 벽에 써두고 떠난다. 이듬해 이 정원에 다시 놀러온 당완은 이 시를 보고 같은 제목의 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일 년 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완의 죽음을 알게 된 육유는 큰 상처를 지닌 채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 심원을 찾아와 당완을 그리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 유명한 작품이 75세 되던 해 지은 라는 시다. 城上斜陽畵角哀(성상사양화각애) 성곽에 노을이 지니 들리는 뿔피리소리 애절한데, 沈園非復舊池臺(심원비복구지대) 심원은 옛날의 연못과 누대로 돌아갈 수 없구나. 傷心橋下春波綠(상심교하춘파록) 서로 마음 아파했던 그 다리 아래 봄의 물결은 푸른데, 曾是驚鴻照影來(증시경홍조영래) 그때 놀란 기러기 같던 그녀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스치네. 夢斷香消四十年(몽단향소사십년) 꿈도 없어지고 향도 사라진 40년… 沈園柳老不吹綿(심원유로불취면) 심원의 버들도 늙어 버들 솜도 날리지 않는구나. 比身行作稽山土(차신행작계산토) 이 몸도 곧 죽어 회계산(會稽山) 흙이 되겠지만, 猶弔遺蹤一泫然(유조유종일현연) 그녀의 남은 옛 자취 찾으면서 한없이 눈물 흘리노라.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3-2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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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 산책] 절절함을 노래한 시, 첫 번째
-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슬픔을 겪는다. 그런데 그 슬픔이 극에 달한 절절함은 이별(離別)할 때 나타난다.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시로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강엄(江淹)의 ‘별부(別賦)’를 최고로 친다. 암담하여라… 혼(魂)이 다 녹아나는 건, 오직 이별 외에 또 다른 것이 또 있을까! … 고로, 이별이란 정서(情緖)는 하나이지만, 이별하는 사연은 만 가지라네… 봄풀이 푸르게 싹을 틔우고, 봄물이 맑은 물결 일으킬 때에, 사랑하는 임을 남포(南浦)로 보내면, 그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어떻게 하리오! … 이처럼 이별의 상황은 일정치 않고, 이별의 이치도 갖가지이나, 이별에는 반드시 원망(怨望)이 있고, 그 원망은 반드시 가슴에 사무치게 되네… (黯然銷魂者, 唯別而已矣! … 故別雖一緒, 事乃萬族... 春草碧色, 春水淥波。送君南浦, 傷如之何! … 是以別方不定,別理千名。有別必怨, 有怨必盈…)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절절한지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혼마저 다 녹아내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별의 아픔 중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절절함이 가장 돋보이는 시는 조선시대 천재 여류시인인 이옥봉의 ‘몽혼(夢魂)’이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달빛 드는 사창에 소첩의 한이 더욱 서립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꿈에라도 넋이 오간 흔적 만일 남는다면,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문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이옥봉은 조선시대 선조 때 충청도 옥천(沃川)군수를 지낸 이봉(李逢)의 첩에게서 태어나, 승지(承旨)를 지낸 조원(趙瑗)의 소실이 된 여인이다. 조원을 사모하여 소실을 자청하였는데, 조원은 이옥봉을 받아들이며 어릴 적부터 시명(詩名)을 날리던 이옥봉에게 다시는 시를 짓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얼마 후 조원 집안의 산지기가 칠석날 밤에 술을 한잔하고 돌아오다가 억울하게 소를 훔친 누명을 쓰게 되어 하옥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아낙이 옥봉에게 소장을 써달라고 간청하자 옥봉은 아낙을 불쌍히 여겨 ‘위인송원(爲人訟寃)’이란 시를 지어 파주목사에게 보낸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머리 빗을 때 물로 머릿기름 삼는 신세입니다.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제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칠석(七夕)날 일어난 사건이므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고사를 인용해 견우가 아닌 사람이 어떻게 소를 끌고 갔겠는가라고 쓴 기막힌 시다. 이 시를 접한 파주목사는 기이하게 여겨 산지기를 방면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일종의 필화(筆禍)사건인 셈인데, 불같이 화가 난 조원은 이옥봉을 쫓아내게 되고 이후 이옥봉이 버림받은 뒤 지은 시가 바로 ‘몽혼’이다. ‘자술(自述)’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는 참으로 절절하다. 달빛이 창을 비추는 밤, 버림받은 여인의 한이 서린 그리움은 더욱 깊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2-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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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형의 한문 산책] 뛰어난 신하는 물러날 때를 안다
- 현 정권의 요직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역사상 정말로 뛰어났던 신하들은 충심을 바쳐 모시던 주군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오르면, 오히려 표표히 초야로 떠나 횡액을 피한 사례들이 전해진다. 중국의 춘추시대, 월(越)나라는 오(吳)나라와 국가의 존망을 건 사투를 수십 년간 벌였다. 월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을 성공시키고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중원의 패자(覇者)로 올라서게 된다. 당시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두 명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범려(范蠡)와 대부(大夫) 종(種)이었다. 그런데 본격적 권세를 누려야 할 시점에 범려는 외려 월왕 구천(句踐)에게 작별을 고한다. 구천이 펄쩍 뛰면서, “나와 함께 있으면 나라를 반으로 나눠 줄 것이로되 만일 끝내 떠나고자 한다면 베어버리겠다”는 극언까지 하지만 범려는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행하지만, 신하는 자기의 희망을 행할 뿐입니다[君行令 臣行意]”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러면서 대부 종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편지를 남긴다. “하늘에 새가 다하면 좋은 활도 창고에 넣어 두게 되고,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겨 죽는 법, 게다가 폐하의 상은 목이 길고 입은 새 부리처럼 생겼으니, 이런 인물은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소.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 것이오?[蜚鳥盡,良弓藏;狡兔死,走狗烹。越王為人長頸鳥喙,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子何不去]” 바로 ‘토사구팽(兔死狗烹)’, ‘장경조훼(長頸鳥喙)’란 고사성어를 낳은 명구절인데, 여기 나오는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이 바로 ‘어려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다’란 어록이다. 그런데 약 300년 후, 중국은 유방의 한(漢)나라와 항우의 초(楚)나라 간 천하 쟁패를 다시 겪게 되는데 한나라는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업을 성취하게 된다. 이때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시킨 대표적 공신이 소하(蕭何), 장량(張良), 한신(韓信)의 한초삼걸(漢初三傑)이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책사로 불렸던 인물이 바로 장량으로, 그는 유방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제(齊)나라 3만호 식읍을 상으로 내리자 이를 사양하고 유방을 처음 만났던 조그만 유(留)땅만을 청한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모든 공직을 내려놓고 중앙 정치무대를 떠나버린 후 천수를 누린다. 반면에 천하의 명장 한신은 계속 한고조 유방의 곁에 머물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한신이 남긴 말이다. “옛사람이 말하길,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겨 죽고, 나는 새가 사라지면 좋은 활도 창고에 넣어두게 되며, 적국이 망하면 유능한 신하도 필요없다’라고 하였거늘, 이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실로 마땅히 죽게 되었구나.[果若人言,狡兔死,良狗烹;高鳥盡,良弓藏;敵國破,謀臣亡。天下已定,我固當烹]” 최근 권력의 부침을 보면서 새삼 되새기고 싶은 어록이 바로 ‘가여공환난, 불가여공락[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이다. >>하태형(河泰亨) 전 현대경제연구원장 서울대 경영대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 수원대 금융공학대학원장 역임.
- 2017-01-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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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인생] 보람도 찾고, 취미와 경력도 살리는 시니어 창업
- 매달 시니어의 제2인생과 직결된 새로운 직업을 소개해온 이 코너가 2017년 정유년(丁酉年)을 맞이해 새해 각오와 어울릴 만한 주제를 준비했다. 바로 특정한 직업이 아닌 ‘창업’이다.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통해 익숙해진 일 혹은 남에게 도움이 되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회사를 세우는 것. 창업은 시니어에게는 거창한 일로 여겨지지만, 벤처나 스타트업이 뜨고 있는 요즘 사회에선 어렵지만도 않다. 또 시니어의 창업을 돕기 위한 관련 기관의 도움도 쏠쏠하다. 새해 계획을 이미 세워놨다면 ‘창업’이라는 꿈을 하나 더 집어넣어보면 어떨까?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올해 사업 활동 결과는 이상이며, 내년 사업 계획을 보고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말쑥한 정장 차림도, 대기업 임원도 아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성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니어의 모습. 지난해 12월 7일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진행하는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한 단체들이 지난 1년간 사업 결과를 평가하고 다음 해 활동을 소개하는 자리. 현장에선 센터에 의해 ‘보육’되고 있는 스타트업 기업 10개 업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성과를 자축했다. 비록 프레젠테이션이 서툴러도, 아직 대표라는 직함이 쑥스러워도, 한 회사를 설립해 성장시키고 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이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이들은 어떻게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을까. 창업은 ‘소자본’ 1억원 내외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2017년 한국경제 7대 이슈’ 보고서에서 60대 이상의 연령층에서 경제활동인구 증가가 취업자 증가보다 커 고용 여건이 악화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취업활동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취업활동이 어렵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창업’. 그러나 막상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종목 선정이나 자금 마련, 동료나 직원 확보, 판로 개척 등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시니어들은 어떻게 창업을 추진할 수 있을까?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는 최근 은퇴 후 창업 시 망하지 않는 5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소자본으로 창업하기 ▲365일 묶여 있는 창업 피하기 ▲가족의 지지 확보하기 ▲잘 알고, 좋아하는 일 선택하기 ▲사업가 마인드로 무장하기 등이다. 소자본 창업을 추천하는 이유는 상당수의 시니어들이 창업할 때 은퇴 자금을 한꺼번에 투자해놓고 사업이 안 되면 곤란을 겪기 때문이다. 또 잘 알지 못하거나 가족의 도움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면 그 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창업 금액은 1억원 내외가 적당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창업진흥원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 프로그램을 활용하자 창업을 원하는 시니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장치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는 창업진흥원. 만약 어떤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창업진흥원을 노크해보라. 창업진흥원에서는 각 지역 23개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를 운영하면서 시니어의 창업을 돕고 있다. 또 별도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통해 창업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제공하고 있다. 창업진흥원 지식서비스창업부 이경희 대리는 창업진흥원의 활동을 이렇게 설명한다. “창업진흥원에서 기술창업, 즉 기술을 바탕으로 한 창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시니어의 창업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에 올인할 경우 사회적 약자가 되기 쉽고,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은 창업은 폐업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창업에 필요한 지식과 준비 과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기술교육을 지원해 안정적인 창업활동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창업진흥원은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시니어 기술창업스쿨을 올해부터는 각 지역의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로 이관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시니어 창업기술센터는 교육뿐만 아니라 설립된 회사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입주공간지원 사업, 창업자금지원, 마케팅활동지원 등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기업이 설립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지원받을 수 있는 셈이다. 또 시니어에 국한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창업진흥원의 창업지원 교육이나 프로그램들은 연령 제한이 없기 때문에 창업 전 꼼꼼하게 살펴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모임과 함께 사업 계획 다듬은 뒤 출발해도 늦지 않아 하고 싶은 사업은 있는데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바로 서울50플러스재단 산하 각 지역의 50플러스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와 인큐베이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도심권50플러스센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도심권50플러스센터의 정현주 대리는 현재 센터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회사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센터에서는 2016년 현재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을 통해 10개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이 사업은 사업계획 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10개 업체를 선정해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멘토링을 통해 사업이 다듬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또 지자체나 다른 기관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면 저희가 다리 역할을 하고, 사업 내용에 따라 센터가 직접 돕기도 합니다.” 센터에서 지원 기업을 선정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은 일반 창업지원 기관과는 다소 다르다. 기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나 생존을 위한 기존 기업 혹은 청년창업 기업과의 경쟁에 그 초점이 맞게 되면 취지와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거나, 사회 참여적 조직, 협동조합, NPO(비영리 민간단체)를 지향하는 곳을 우선시한다. 물론 사업성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들은 전 단계로 센터 내 커뮤니티를 선택한다. 동호회 활동과 비슷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사업 계획을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덧붙이는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다. 또 센터 내 활동을 통해 인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실제로 현재 인큐베이팅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 중 일부는 이미 협동조합을 갖췄거나, 사단법인의 형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참여 기업 중 한 곳인 주식회사 리스타트의 경우 창업투자회사를 통해 자금 투자를 약속받기도 했다. 준비하고 있는 기업의 일자리와 은퇴 후 구직자들을 맞춰주는 서비스가 좋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다. | 전국 시니어 창업 기술센터 | 서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232 서울테크노파크 1203호(02-944-6038),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18 마포창업복지관 601호(070-7727-4101),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211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B104(02-941-7257) | 경기 경기 의정부시 경의로 114 영빈빌딩 4층(031-828-8877), 경기 수원시 영통구 광교로 107 창업보육동 B2(031-259-6692), 경기 성남시 분당구 야탑로 205번길 26, 213호, 214호(031-707-5962) | 부산 부산광역시 남구 신선로 365 행정관 302호(051-629-7971) | 울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곡천동문길 20-22(052-277-1996),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진순환도로 1138(HRC빌딩8층)(052-219-8632) | 대구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수로 64, 1층(053-784-8261),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로 128, 1층(053-643-7994),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서대로 675, 복지관 3층(053-589-7932) | 경북 경북 칠곡군 왜관읍 공단로 1길, 2층(054-973-9605) | 인천 인천광역시 남동구 인주대로 506-1 서울외과 4층(032-567-5051) | 광주 광주시 동구 금남로 238 무등빌딩 10층(062-236-3262) | 경남 경남 양산시 주남로 288 영산 테크노폴리스 산학협력관 3314호(055-380-9577), 경남 진주시 동진로 33 경남과학기술대학교 8동 3층(055-751-3610) | 강원 강원 춘천시 동면 장학길 48 한림성심대학교 산학관 1층(033-240-9833) | 충북 충북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377-3 서원대학교 글로벌관 B203호(043-217-1311), 충북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8-2, 3층(070-4814-6515) | 전북 전북 전주시 덕진구 기린대로 945-6 소상공인희망센터 희망관 1층(063-717-1322), 전북 익산시 인북로 187, 1층(063-841-7480) | 전남 전남 목포시 석현로46 목포문화산업지원센터 1층(061-280-7492)
- 2016-12-28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