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부는 주고받음이다 PART6] 김종욱 (사)CEO지식나눔 공동대표의 생활에 밴 기부 실천
- ‘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 2015-12-31 09:10
-
- [김유준의 스토리 텔링] 운동선수들의 은퇴 시기는?
- 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접하여 망령이라 / 어이 아니 한심하랴 청천백일(靑天白日) 빨리 가니 / 일거월석 지날수록 늙을 밖에 할 일 없다 … ◇운동선수, 은퇴시기가 빠른 직업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희대의 명창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소설가 김유정이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라는 명문을 바쳤으며 정부까지 나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가창을 멈춰야 했다. 1979년 6월,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도 여지없이 식장에서는 같은 노래가 은은히 흘렀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가진 것을 놓아야 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 스포츠 선수에게 은퇴는 특히 더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언제 필드를 떠나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남은 세월 동안의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언제가 그때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멈추는 것일 터.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를 은퇴 시기로 꼽는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해야 할 종목에서 동체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생각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야말로 은퇴 시기라고 말하는 선수도 많다. 눈은 필드를 향해 있지만 종종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젊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면 은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은퇴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을 법한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프로스포츠인 야구. 이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은 여간해서 은퇴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스타 선수들도 나이가 들고 성적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구단으로부터 방출 선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범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양새가 가장 안쓰러웠던 경우. 그는 불세출의 스타였다. 부채꼴 그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정의 활약을 펼쳤다. 아쉽다면 일본 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뒤의 성적이 부상 탓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하는 이유 다행히 국내로 유턴해서는 다시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3년에는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을 옮긴 타이거즈에서 ‘20-20클럽’ 가입 선수가 되었다. 홈런 스무 개 이상, 도루 스무 개 이상의 다양한 활약을 서른셋의 나이로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고령 기록이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 WBC 클래식 국제야구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WBC 클래식 이후. 2006년 시즌 2할4푼2리, 2007년 1할7푼2리를 기록하며 “이종범도 끝났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두 시즌 모두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100게임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움은 더 컸다. 놀랍게도 이종범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2008년과 2009년 시즌에 100경기 이상 출장해 3할에 근접한 성적을 남긴 것이다. 소속팀은 2009년 시즌 대망의 포스트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에 이종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모르는 야구팬은 많지 않았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구단의 행보.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뛰며 미증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공공연히 은퇴 압력을 행사했다. 2011년 시즌 이종범의 성적은 97경기 출장, 타율 2할7푼7리, 출루율 3할3푼7리였다. 그 정도면 어떤 팀에서든 2번이나 6, 7번 정도 타순의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지표. 따라서 구단의 은퇴 압박을 단지 성적 문제로만 보기는 쉽지 않았다. 2012년, 끝내 이종범은 유니폼을 벗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결정”임을 강조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국을 떠나며 말한 것처럼 ‘자의 반 타의 반’의 등 떠밀린 듯한 은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종범의 은퇴를 바라보는 뒷맛은 더할 수 없이 씁쓸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베테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그아웃에 이종범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이 ‘예전에도 이런 위기 많이 이겨내봤다’는 눈치로 떡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젊은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칼자루 쥔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연봉 축내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할 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좀 다르다. 프로야구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리그인 만큼 이종범과 비교될 만한 에피소드가 종종 벌어진다. 올해에도 여지없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선수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은 올해 마흔 한 살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와 내년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치로는 2016년 시즌을 보장받았고, 2017년 시즌에 계약하지 않으면 50만 달러(약 5억8000만 원)를 추가로 지급받게 된다. 다음 시즌 이치로의 연봉은 200만 달러(23억2300만 원). 여기에 각종 조건이 달려 있다. 250타석과 300타석에 도달하면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씩 추가 지불, 이후 50타석 추가 시마다 40만 달러(4억6000만 원)가 더 지급된다. 최대 600타석인 옵션을 모두 채우면 연봉은 300만 달러(약 34억8000만 원)까지 치솟는다. 이치로가 올해 거둔 성적을 놓고 보면 말린스 구단의 이런 계약은, 우리나라 구단들의 시각에서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타율 2할2푼9리에 출루율 또한 3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자동 아웃’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적으로 이종범의 은퇴 무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린스 구단의 데이비드 샘슨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치로는 팀의 소중한 전력”이라고. 그러므로 “팀이 제대로 구성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그와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음악으로 치면 “비틀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는 베테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떠한 팀 구성이 바람직한지 잘 알고 있다. 영화 에는 일흔 살의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 자도 모르면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저 “삶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싶다”던 한 노인이 첨단 업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나아가 회사 전체를 바꾼다는 설정.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베테랑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발휘되는 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구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지난 8월 6일.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41)이 19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업 포수로서 1,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법했지만 진갑용은 단호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결정에 구단의 압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결정이다. 오히려 구단에서는 아쉬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강팀인 만큼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게 분명하고, 그처럼 큰 경기에서 진갑용 같은 베테랑은 요긴한 힘이 될 테니까. 이후 진갑용은 전력 분석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야구 지도자로 성장하겠다고 꿈을 밝혔다.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준비한 만큼 선수 경력 못지않게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반면 역시 삼성 소속인 이승엽은 “은퇴 시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뜻이다. 성적도 놀라울 만큼 빼어나다. 마흔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400홈런 기록은 그 부산물. 구단에서도 “은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의 판단에 맡겨두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승엽 선수가 올해 성적이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삼성 구단이 그동안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볼 때 ‘그럼에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지금의 삼성 라이온즈는 이종범 시절의 기아 타이거즈보다 한 수 위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13일. 33세인 이탈리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플라비아 페네타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같은 나라의 로베르타 빈치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프로 전향 16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마흔아홉 번째 메이저대회 출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정상이었다. 페네타는 우승 확정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꿈꿔왔다. 매우 행복하다.” 모든 선수가 페네타처럼 은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최선의 상황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베테랑들은 해가 갈수록 성적 지표가 떨어지며 알게 모르게 은퇴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네타나 이승엽 같은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 이치로처럼 부진에 시달리는 베테랑 선수일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가 품고 있는 전력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무관심해왔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제 사회의 눈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진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지금보다 더 멀리 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갖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길이 좀 더 정확해지기를, 좀 더 두루두루 살피기를, 나이를 먹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1-12 09:01
-
- [장수건강 이에 달렸다 Part 9] 老心 잡아라, 달라지는 치과들
- 치과에 중장년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지난 4월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에 치과를 방문한 55세 이상 환자 수는 2010년에 비해 4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부터는 노인틀니가, 지난해부터는 임플란트 건강보험 적용이 시작된 데다, 치아 건강을 찾고자 하는 환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에 치과들도 달라지고 있다. “어머니, 다음 주 월요일에 오셔야 하는데요, 너무 일찍 오시면 힘드시니까 아침에 ‘별이 되어 빛나리’ 보시잖아요? 그 드라마 보시고 나서 천천히 나오세요.” 신당동의 한 치과에서 고령의 환자를 진료한 치과위생사가 다음 진료 약속을 잡기 위해 하는 말이 이채롭다. 약속 시간을 잡을 때 형식적인 숫자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좀 더 쉽고 잘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황윤숙 교수는 “의료기관과 환자 사이에서 정보 전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각 세대나 연령층은 그들에게 맞는 고유한 언어방식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을 맞춰 가족과 같은 공감을 얻어내야 효과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합니다”라고 설명한다. 요즘은 치과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기실에 소파 대신 온돌의자를 비치한다거나, 테이블에 돋보기를 준비하는 등의 작은 배려는 이제 기본이 됐다. 이런 변화는 동네 치과의원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형 대학병원들도 마찬가지인데,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의 경우 시니어 진료실을 따로 운영하면서 연령에 따른 특화된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은 노인구강진료실을 만들어 운영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이런 변화는 학술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노인의 구강건강이나 효과적인 치료법을 연구하기 위한 치과의사들의 모임도 활발하다. 2004년 설립된 대한노년치의학회가 그 대표적인 단체로, 치과에서 노인 환자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다. 학회 김경선 부회장은 “예전에는 나이 든 치과의사 모임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젊은 치과의사들도 중장년층 환자들을 좀 더 잘 치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학구열이 높아지고 있고, 학회 내부적으로도 치료법뿐만 아니라 시니어 구강관리 전문가 과정 도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용 기기나 구강용품 등도 중장년의 치료와 관리를 위해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의치를 위한 임플란트도 바이오 신기술을 이용한 노인맞춤형 임플란트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고, 입냄새의 심한 정도를 숫자로 보여주는 측정 장비도 이미 시중에 선보여, 일부 치과에선 사용 중에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일리톨 껌 역시 의치에 잘 붙지 않고 단단해 씹는 운동도 겸할 수 있는 제품까지 등장했다. 또 최근에는 미래 의료시장을 좌우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한 치과치료 기술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최근 세미나를 위해 방한한 독일 Envisiontec社의 도미닉 크루거 연구원은 “새로 개발되는 기술이 병원에 적용되면 치료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돼, 오랜 치료시간을 힘들어 하는 중장년층에겐 희소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정밀도도 향상돼 의치의 수명도 향상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 2015-11-04 09:27
-
- [장수건강 이에 달렸다 Part 11]부러운 절대 건치 황소웅씨(73세)의 입 안의 행복
- 평소에 모르던 건강의 소중함은 잃고 나서야 재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치아 건강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지만, 많은 경우 소홀히 여겨 뒤늦게 병원을 찾아 후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령화에 발맞춰 치아의 질병도 진화한다. 과거의 충치 질환은 시간이 흐르면서 잇몸 질환을 거쳐 치아의 노화 현상으로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충치 하나 없어 치과 한 번 안 가봤다며 자부하는 황소웅(黃昭雄·73) 카이스트 명예교수의 입 속을 윤홍철 강남 베스트덴 치과 원장이 시원하게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장소제공 강남베스트덴 치과(bestden.co.kr) 나이를 뛰어넘은 듯한 황소웅 카이스트 명예교수의 건강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치아다. “333법칙을 지키는 편입니다. 음식 섭취 후 3분 이내, 하루 세 차례씩, 3분 동안 회전해 닦지요. 그리고 아무래도 70 평생 이렇게 충치 없이 살 수 있는 비결은 매일 아침 아내가 준비해 주는 야채 식사와 우유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살짝 익힌 당근, 사과, 브로콜리, 양배추 가득 한 접시 말이죠.” 황 교수는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는 비법을 아내 덕분이라고 요약했다. “지인들이 제 이를 보고 칭찬과 함께 부럽다며 비결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어요.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엄격하게 식단 조절을 하면 스트레스가 생기잖아요. 건강을 지키는 게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즐겁게 잘 살기 위해서 건강을 지키는 거니까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걸 해야 하고 말입니다.” 올바른 칫솔질과 주기적인 스케일링이 치아 건강의 핵심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황 교수의 치아를 전문가가 들여다보면 어떨까? 윤홍철 강남 베스트덴 치과 원장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하는 윤 원장의 진단을 받으면서, 황 교수는 충치는 없으나 최근 시린 적이 두어 번 있었다고 말했다. “시린 이 증상은 잘못된 칫솔질 습관이나 노화 현상에 의해 잇몸이 내려가 치아 뿌리가 노출되거나 치아의 씹는 면이 심하게 마모될 때 생기게 됩니다. 또 잇몸병이 심하거나 치아에 금이 가거나 깨졌을 때도 같은 증상을 보입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칫솔질은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스케일링을 해야 합니다.” 윤 원장은 정부에서는 7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연 1회 스케일링에 대해 보험 지원을 하고 있으니 노인들은 스케일링을 해두는 게 좋다고 말한다. “비전문가 입장에서 교수님의 치아는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치과 전문의가 볼 때는 아무래도 다양한 질병들이 보이죠. 황 교수님은 잠잘 때 이를 악물고 자는 편인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과 질곡이 보이듯이 황 교수님은 평소에도 참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가슴 언저리에 아픔이 많아 보입니다.” 황 교수의 주치의를 자처한 윤 원장은 환자의 입 속을 통해 인생을 들여다보듯이 말했다. 정직한 삶, 정직한 건강관리법 ‘꼿꼿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의 기개, 의지, 태도나 마음가짐 따위가 굳세다’는 뜻이다. 황 교수를 만나는 순간 ‘참 꼿꼿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키와 다부진 몸매, 인터뷰 내내 보여준 모습이 그랬다. 그래서일까. 흐트러짐 하나 없이 바르게 앉아 사람을 마주하는 모습에서 올곧게 지내온 세월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의 건강관리법 역시 곧고 정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 교수의 삶 자체가 한결같고 곧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 한국일보에서의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국가를 생각하고 살면서 그 안에서 보람과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원래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는 가난했던 유년시절을 보내며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꿨고 이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에서 진심을 담아왔다. 식습관이 치아 건강의 열쇠 “과거에 교수로 재직할 때는 바쁘다고 운동을 소홀히 하다 보니 당뇨가 생기고 혈압수치가 높아졌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운동시간을 늘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덕분에 당과 혈압수치가 많이 내려왔어요. 약은 먹고 있어요.”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하는 재미 속에서 권태를 느낄 수 없다’는 신념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고 있는 황 교수는 요즘도 대덕에 있는 카이스트,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로 강의를 다니느라 분주하다. 신체 나이만 보면 60대로 보이는 황 교수는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가득했다. “저는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성격입니다. 30년간의 기자 생활, 공직자, 교수로 곳곳을 다니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적극적으로 먹어봤던 편이죠. 어느 나라 음식이든 그 나라의 특수성이 담겨 있잖아요. 때론 거칠기도 하고 삼키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가리지 않았어요.” 호기심으로 인해 새로운 음식을 만나면 되레 달려드는 쪽이었던 황 교수에게 다행인 것은 차근차근 꼭꼭 씹어 먹는 습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 덕분인지 별다른 질환이 없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산책을 즐기는 그는 3명의 손녀와 아들, 며느리, 아내와 함께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행복이죠. 특히 세대 간 단절이 심하다지만 우리 손녀들은 집에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해요.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겁니다.” 건강은 자연스러움으로부터 온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늙어가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 억지로 가꾸거나 꾸미려 하지 않는다는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이 바로 자연스러움에 있다고 설명했다. “지금의 모습이 가장 저다운 모습, 진실한 모습 아니겠어요? 특별한 운동법도 건강식도 없지만 항상 바쁘게 살면서 늙어가는 제 모습을 사랑하는 것, 나이에 연연하며 도전을 꺼리기보단 담담하게 사는 것이 제 건강 비결입니다.” 육체적인 건강 말고도 황 교수가 늘 강조하는 또 다른 건강이 있다. 바로 정신적인 건강과 사회적인 건강이다. 정신적인 건강은 스트레스를 덜 받고 긍정적으로 생활하는 것이며 사회적인 건강은 단절되지 않고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다. 육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건강한 삶이라는 것이 황 교수의 철학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자’는 진리는 말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옮기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이 평범한 교훈을 사람들은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이리라. 황 교수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러한 황 교수의 일상적인 노력은 지금, 노년의 건강한 치아와 함께 제2 청춘이 새롭게 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1. 특수검사실에서 1분간의 구취 측정 후 바로 결과지 확인 가능. 2.치아 우식 활성화 검사를 통해 미생물 유무와 충치발생 가능성을 예측한다. 3. 치아의 뿌리, 잇몸 뼈의 상태, 신경치료 여부와 치아 주위의 구조물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 4. 가정용 큐레이인 큐스캔으로 세균막의 형광을 찾아내 구강관리 정도를 알 수 있고 잔존하는 세균막을 찾아내 칫솔질로 제거할 수 있다. 올인원바이오가 개발한 큐스캔은 집에서 사용하는 체온계처럼 사용하는 장비로,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초기 충치 의심 부위, 치태, 치석 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검사 결과를 보고 전문가 영역에서 윤홍철 원장이 질병을 체크한다. 황소웅 교수 진단 소견 - 침 분비 안 돼 세균번식 쉬워져 노인성 충치 악화 - 오른쪽 어금니 치아 겉 부분이 닳거나 깨지기 쉬운 실금 발견 - 잇몸 건강은 임플란트 수명과 직결되어 정기점검 필요 - 치석 덩어리가 많아 스케일링 필요
- 2015-11-04 09:27
-
- [물건의 사회사②] 180여 년 전 처음 나온 하모니카, 구순의 나에겐 80년 친구
- 글 황경춘 전 외신기자클럽 회장 하모니카는 서민들에게도 친숙한 가장 대중적인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가격이 적당하고, 배우기 쉽고, 그러면서도 오묘한 트레몰로(tremolo)음을 내어 음악 애호가를 매혹합니다. 게다가 100세 시대를 지향하는 요즘의 노인들 건강에도 좋다고 하니 한때 침체했던 우리나라 하모니카 동호 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습니다. 하모니카의 기원과 확산 이렇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하모니카가 언제 어떻게 발명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것은 1827년 독일인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부시만(Christian Friedrich Ludwig Buschmann)이 하모니카의 원형을 발명했다는 설입니다. 베를린에 사는 오르간 직공의 아들이었던 부시만은 이보다 6년 전 16세일 때, ‘오라(AURA)’라는 오르간 조율용(調律用)으로 철제 리드(reed)를 붙인 퉁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모니카 발명의 단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모니카는 꾸준히 개발돼 현재 1500여 종의 모델이 있습니다. 가장 정교한 모델은 1200개 이상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수작업은 약 50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품 중 많은 부분이 이렇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량생산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모니카에는 복음(複音), 단음(單音), 중음(重音)의 세 종류가 있으나 복음이 가장 많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부시만이 하모니카를 발명한 뒤 몇 차례의 모델 개발을 거쳐, 하모니카의 상업생산을 시작한 것은 독일의 호너(Hohner)사입니다. 전 세계로 판로를 확대한 호너사는 지금도 하모니카 생산의 중심에 있습니다. 1857년 창립된 호너사는 독일 남부의 소도시 트로싱엔(Trossingen)에 있는 군소 하모니카 공장을 흡수했습니다. 기술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부품 제작의 분업화를 실시함에 따라 한때 지역 주민의 약 3분의 1이 하모니카 제작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창업자 마티아스 호너(Matthias Hohner)는 캐나다로 이민한 4촌 형을 통하여 6개의 하모니카를 1862년에 처음으로 북미대륙에 수출하였습니다. 이때 하모니카 한 대의 수출가격은 단 1달러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수출된 이후 번창 미국에 소개된 하모니카는 특히 흑인들이 즐겨 부르는 블루스, 재즈, 포크 뮤직 등의 연주에 좋은 반응을 얻어 크게 유행하고, 독특한 모델도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뉴저지주 유니온에 두 개의 하모니카 제조공장까지 설립되어 번창하였습니다. 이렇게 대중화된 미국의 하모니카 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뜻하지 않은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모니카의 리드에 필요한 특수 합금이 군수품 통제의 영향을 받게 된 데다 하모니카 제작에 긴요한 자재를 적국인 독일이 수출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모니카가 군인 사이에도 널리 유행되자 미국 정부는 하모니카 제작에 필요한 특수 제강을 하모니카 공장에 계속 배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시라서 자재가 부족해지자 미국은 플라스틱 리드(plastic reed)를 발명하여 이를 하모니카에 사용하였습니다. 이 플라스틱 리드는 미묘한 음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국 하모니카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대중의 반응도 좋았다고 합니다. 미국 음악계에서 하모니카가 차지하는 위치는 미국 음악연맹이 1948년에 하모니카를 ‘합법적 악기’로 인정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엽에 하모니카 연주 음반은 극소수였고 주로 흑인을 위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193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 하모니카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인을 위한 음반도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하모니카 연주자 래리 애들러(Larry Adler)가 처음으로 저명 작곡가들이 클래식 음악을 위해 쓴 곡을 하모니카로 연주했습니다. 그때까지 하모니카는 역시 ‘완구 악기(toy instrument)’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 19세기 말엽에 이 하모니카가 일본에도 수입되었는데, 그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1896년 8월에 발간된 월간지에 ‘손풍금 독학’이라는 기사가 있고 하모니카 판매 광고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2년에는 어느 완구 도매상이 독일 호너사의 불량품을 수입하여 완구로 팔아 호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본제 하모니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10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통치가 시작된 후, 이 하모니카가 일본으로부터 흘러들어 1928년에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하모니카 밴드가 결성되고, 1935년에는 역시 평양에 YMCA 밴드가 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필자의 기억에 당시 라디오에서 가끔 하모니카 연주가 방송되었지만, 이것이 우리 동포의 연주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렇게 명맥을 이어 온 우리 하모니카 활동이 광복 후인 1952년 고려하모니카연구단이 결성되고 1957년 대한하모니카협회의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이었던 조응천 박사가 초대 회장을 맡은 이 협회는 곧 문공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지금은 이 협회 외에도 한국하모니카연맹, 오케스트라 하모니카 교육센터, 한국하모니카아카데미 등 여러 단체와 수많은 동호회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아시아 태평양 페스티벌’을 유치하고, 올해 8월에도 ‘국제 하모니카 페스티벌(International Harmonica Festival)’을 주최하는 등 국제 교류도 활발합니다. 그리고 노인회나 의료기관의 환자 재활에도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하모니카 제작사는 45년의 역사를 가진 미화악기사가 유일합니다. 이 회사는 2008년부터 자체 브랜드의 하모니카를 시장에 공급하고 있는데, 회사 측은 국내외에서 평판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브라질에도 하모니카 애호가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 생산은 독일, 일본 및 중국이 주요 생산국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생산에 노동력의 비중이 큰 만큼, 일본도 국내에서는 교육용으로만 생산하고 중국에서 주문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초등 4학년 때 털장갑 대신 산 악기 올해 92세인 저와 하모니카와의 인연은 열두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됐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취미나 소양이 있는 어린이는 아니었으나 가끔 라디오에서 듣는 하모니카 연주가 어린 저를 홀렸습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원한다고 사줄 가정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제게 털장갑을 사라고 30전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큰돈이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평소에 원했던 하모니카를 사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제가 찾은 곳은 장갑 가게가 아닌 악기점이었습니다. 지금 확실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튼 그 장갑 살 돈으로 연습용 새 하모니카를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전 정도였다고 기억합니다. 장갑을 사오지 않은 저의 꼼수는 금방 탈이 났습니다. 인자하신 어머니는 크게 야단을 치기는 하셨지만, 하모니카를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간단한 동요나 아리랑 같은 쉬운 노래는 독학으로 하모니카로 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입학으로 부모 밑을 떠나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랜 것이 이 하모니카였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였던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의 히트곡 ‘애수의 소야곡’ 외에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고복수의 ‘타향살이’ 등 당시에 배웠던 곡들을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음악 소양이 없어 정식 악보는 읽지 못하는 처지지만 하모니카로는 동요, 유행가 등을 즐겨 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제 하모니카는 광복의 혼란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1950년 미국공보원에 근무할 때 피난 수도 부산에서 미국인 동료에게 부탁해 구입한 일제 하모니카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하모니카는 들숨과 뱉는 숨으로 소리를 내는 리드(reed)가 교대로 배열되어 있어 나이 많은 분이 연주하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는 단순하고 편리한 악기입니다. 노인들의 폐활량을 증강시키는 데 효과가 크다고 하니 늦다고 생각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도전해볼 만한 간단한 악기입니다.
- 2015-10-12 16:08
-
- [전문의에게 묻는다] 신중년 우울증 Q&A
- “뭔가 신나는 일을 하고 싶은데, 만사가 귀찮아진다. 예전에는 귀엽기만 하던 손주 녀석들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드라마도 재미가 없다. 잠도 잘 못 이루고, 밥도 맛이 없다. 살아서 뭐하나 괜스레 이상한 생각도 든다.”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은 우울증. 한림대성심병원 정신의학과 홍나래 교수가 속 시원히 풀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도움말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나래 교수 우울증은 왜 찾아올까? 대개 우울증은 힘든 일을 겪은 이후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별한 어려움 없이도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신체적 변화나 사회적 역할의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인 신중년 시기에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때 우울증이 오게 되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증상은 어떻게 나타날까? 신중년 우울증은 성인기의 우울증과는 증상이 조금 다른 경우가 많다. 성인기 우울증은 기분이 가라앉고 스스로 우울하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신중년 우울증은 흥미 있는 일들이 없고 다 귀찮고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잠이 오지 않거나, 새벽에 일찍 깨서 곤란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흔히들 화병의 증상이라 여기는 가슴 답답함, 화기나 한기가 드는 증상, 소화 불량, 두통이나 어지러움, 여기저기 나타나는 저림이나 통증 등의 증상이 노인성 우울증에서 흔히 나타나는 신체 증상이다. 이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신체적 질환에 대한 검사를 반복하기보다는 우울증은 아닌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면담을 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기분에 빠지게 되나? 예전에는 귀엽기만 하던 손주들도 시끄럽고 귀찮게만 느껴지고, 재미있어서 매일 챙겨 보던 드라마도 재미가 없고 꼭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울증 환자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지만, ‘당장 죽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살아서 뭐하나’, ‘그냥 자다가 이대로 안 깨어났으면 좋겠다’ 등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부질없어 보이고 ‘왜 이렇게 살아왔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치매와 증상이 유사하다던데 구별이 가능한가? 우울증이 심한 경우 일시적으로 치매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를 ‘가성 치매’라 부르기도 한다. 우울증에서 나타나는 가성 치매와 진짜 치매의 증상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치매 검진을 위해 병원에 왔다가 우울증으로 진단을 받고 치료 후 호전되는 환자들도 많다. 대개 신중년 우울증에 의한 가성 치매 환자들은 무조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진짜 치매 환자들은 질문에 열심히 대답을 하려고 하지만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과도 치매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우울 증상들이 먼저 나타나는 사례가 많고 우울 증상이 호전되면 치매와 유사한 증상도 없어지게 된다. 정신과 약물치료는 어떻게 되나? 우울증은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는 뇌의 병이다 보니 그 치료에 있어서도 약물을 이용한 화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진단이 가능할 정도가 되면 반드시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에 사용하는 약물 중 항우울제는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되돌려 주는 약물이기 때문에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약물이고, 중독이 되거나 내성이 생길 위험성이 전혀 없는 약물이다. 강제로 기분을 올려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가벼운 우울감의 경우에는 기분 전환 등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약물 치료를 받는 중에도 생활 조절을 같이 하면 더 빠르고 큰 효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사람들을 만나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햇빛을 맞으며 하는 운동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간혹 술의 힘을 빌려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술은 뇌에 우울증을 일으키는 물질로 작용하기 때문에 매우 좋지 않은 방법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만남, 규칙적인 생활, 스트레스를 피하려고 하기보다는 받은 스트레스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족들은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사실상 은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역할이 줄어드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가족 내에서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은 경험들도 우울증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가 된다. 때문에 ‘우리 가족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집안의 대소사 결정에 있어서 같이 상의해 나가면 ‘내가 아직도 이 집안의 어른으로 역할을 잘 하고 있구나’ 하는 만족감을 갖게 할 수 있다. 혼자 생활하는 신중년이 늘어나고 있는 현재 추세에 맞춰 주말이나 저녁 시간 등을 이용해 여러 가지 활동을 같이 해 보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 홍나래 교수 한림대 성심병원 조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대한노인정신의학회 정회원, 대한노인정신의학회 노인정신건강 인증의, 외국인 진료 활성화를 위한 외국인 진료 담당교수 선정, 2015 경기도 지역사회 정신건강증진사업 발전대회 정신건강증진 유공 표창 수상
- 2015-07-15 11:15
-
- [혼자 산다는 것 PART2] 혼자 노는 남자,이시형 박사의 둔하게 살기
- 팔순이 넘은 지금에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 이시형(李時炯·81) 박사는 최근 새로운 도서 를 발표하여 또 한 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문인화 화가로서, 그리고 세로토닌 문화원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레이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의 멘토로서 여유있게 좀 느슨하게 사는 그가 품고 있는 삶의 철학과 지혜를 엿본다. 이시형 박사는 처음 라는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출판사로부터 들었을 때를 속된 말로 ‘느낌이 확 왔다’고 표현했다. 1982년, 첫 번째 저서인 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에게 있어 라는 제목은 자신의 첫 번째 책에 대한 33년 만의 대답처럼 보였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새로 정의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교류 경험이 적습니다. 그런 데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어요. 지독한 무한경쟁 속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이고 밤낮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과 조건들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격렬하고 거친 사람이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속전속결에 한탕주의까지 익숙해지니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세월호 사고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정신과의사로서, 이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과민하게 살다 보니 피해의식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단지 우연히 쳐다봤을 뿐인데 시비를 걸어 폭행 사고를 일으키는 젊은이, 사방에 깔린 CCTV, 은행을 못 믿어서 옷장 안에 돈을 숨기는 노인들. 이 박사가 바라보는 한국 현실은 이미 병적인 사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대로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을 과민하게 만드는 사회인 걸요. 그래서 저는 좀 순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걱은 기본도 지키지 않고 정도를 걸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정도를 걸으며 원칙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뜨겁고 폼나게 사는 법 어느 샌가 원칙이 사라진 사회. 1934년생으로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그의 원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녁이 되면 (운전)기사는 집에 보내고 저는 지하철을 타며 다니고 있어요. 기사가 내 스케줄을 못 따라오거든요. 하루에 17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그래도 감기 몸살 앓아본 적 없습니다. 4시 30분에서 5시면 기상합니다. 일어나서 운동은 한 20분 정도 간단하게 하고 그게 부족하다 싶으면 건물 10층까지를 계단으로 올라가죠.” 요즘 이 박사의 일상 중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힐리언스 선마을이다.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힐리언스 선마을은 자연을 닮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 이 박사의 의지가 이뤄진 결실이며 다양한 힐링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힐리언스 선마을을 인터뷰 전날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 박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문인화다. 문인화란 먹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시와 그림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림으로 조선시대 선비와 사대부층에서 즐겨 그려졌다. 그가 문인화를 하게 된 사연은 삶의 어떤 돌발과도 같은 일 때문이었다. “대전에 갔을 때 노숙자를 한 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전에 제가 치료했던 환자였어요. 그는 열 번의 사업을 다 실패하고 가족과도 헤어져 노숙자로 사는 중이었죠. 정말 진실하고 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전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모두 그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되긴 되더라고요. 그런 내가 열 번을 실패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 아픈 심경을 공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제일 못하는 걸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배우게 됐어요.” 80 평생 처음 들은 칭찬 이 박사는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 공이나 차라’고 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 미술을 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실 뒷벽에 한 번도 그림을 못 붙여본 사람을 20여 명 모았다. 그리고 김양수 화백을 그림 선생으로 모시고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군자를 그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재도전해도 난 도저히 못 그려서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그림 모임을 그만두진 못했어요. 내가 하자고 했는데 내가 관둔다고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좀 더 그림을 배웠는데, 그러나 그릴 만한 게 산이었어요. 문인화는 글이 필요해요. 그래도 내가 글은 좀 쓰니까 그건 괜찮았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만족하지 못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림 선생님이 쓰레기통에 버린 그의 그림을 가져가 방 안에 전시해놓고 있는 걸 봤다. “그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잘 그린 그림과 좋은 그림이죠. 이 박사님의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좋은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어머니 생각, 친구 생각, 과일 생각 등 생각을 많이 나게 만드니까요.” 80여 년 동안 그림을 못 그리던 사람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 들은 최초의 칭찬이었다. 그 이후 이 박사의 삶에는 화가로서의 업이 추가됐다. 경인 미술관, 대웅 아트 스페이스 등에서 5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요즘은 해외에서도 전시 러브콜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집니다. 사물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고요. 그림에 들어갈 글을 생각하다 보면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음까지 편해지는 둔감력을 키우며 세로토닌적 삶을 사는 데 문인화가 도움이 됐어요.” 멋지게 살고 싶다고? 고독력을 키워라 많은 독자들이 이 박사에게 한 질문을 던졌다. ‘둔하게 살면서 폼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들 멋지게 사는 방법을 찾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싱글들이 많은데 혼자서 멋지게 살 수 있는 법이 중요하죠. 우선 봉사활동을 들고 싶습니다. 봉사활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착합니다. 월급이 고작 차비 정도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은 남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거기에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고독력을 길러야 합니다.” 고독감과 고독력은 다르다. 고독감은 추레하고 권태로운 기분이다.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고독력이란 솔리튜드(Solitude)를 의미한다. 바로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박사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고독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사색을 해야죠. 예전에 KBS 방송사 사람에게 퀴즈 프로그램 좀 만들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건 사색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건 디지털적인 것이에요. 우리에겐 사색을 위한 아날로그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적 사고 위에 디지털이 있어야 완벽해지거든요.” 연애를 하며 사는 행복 레이스 이 박사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혼자 잘 살려면 연애를 하라.”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연애란 일반적인 좁은 의미의 연애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넓은 저변의 연애였다. “손을 잡고 호텔 가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지적인 거죠. 멋진 아가씨와 대화하면서 커피 한 잔 하면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저에게는 연애예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서로 베푸는 것이야말로 연애라고 봅니다.” 이 박사는 돈은 있지만 베풀 데가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며 베푸는 게 곧 연애라는 지론은 신선했다. 그렇다면 이 박사에게 있어 연애의 정의는 소통이 아닐까? 베푸는 것도 상대의 진심을 알아야 베풀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풀기 위해선 가르치는 게 있어야 해요. 가르친다는 게 별 건 아니에요. 내가 하는 걸 보고 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만드는 거죠. 젊을 때는 인색해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있는 대로 다 베풀어야 해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진지하게 보게 되다 “다 고맙고 항상 감사하는 기분입니다. 난 항상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문인화를 시작하고 나니 삶을 더욱 진지하게 보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세히 보게 되거든요.” 이 박사의 베풂은 사회에 대한 애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에게 있어 삶의 자극제는 더 나아지는 우리나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제가 경제하고는 거리가 먼데, 신문 경제면을 잘 봅니다. 그걸 보면 어딘가를 지원하고 무언가를 해내는 우리나라 모습이 보여서 자부심에 기분이 좋아요. ‘삼성이 자기 특허를 나눠줬다’, ‘현대는 협력업체들에게 공평하게 이익을 배분했다’, 등 이런 소식들을 볼 때마다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다는 축복. 이 박사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베이비부머들을 위해 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경치 좋고 물 좋은 땅을 잡고 집을 짓고서, 베이비부머들에게 직능별로 채용공고를 내는 거예요. 일정한 전세금을 내면 집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들어오면 능력에 맞는 일감을 주는 겁니다. 살 집과 월급,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과 단체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할 겁니다. 그들의 건강을 위해 가이드북도 마련하고요.” 베이비부머를 위해 집, 건강, 경제 활동을 한 번에 해결해준다는 솔루션. 어떤 야심마저 느껴지는 계획이다. 나이도 한계도 잊은 듯한 뜨거운 삶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혼자 잘 노는 이 박사가 견지하는 원칙이자 삶 그 자체가 아닐까.
- 2015-07-15 11:07
-
- [착한 환자 좋은 의사되기] 살려준 손, 따뜻한 눈물
-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 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대장암 3기, 수술로 극복하고 현재 완치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류세창(柳世昌·68)씨와 그를 살린 가천대 길병원 대장항문클리닉 백정흠 (白汀欽·51) 교수가 그들만의 이야기를 추억 한 스푼,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려 향 깊은 녹차처럼 우려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교수님, 일단 제 몸부터 봐 주세요. 체중이 좀 빠졌는데, 티가 나나요?” 168㎝의 키에 100㎏이 넘는 류세창씨는 요즘 매일 아침마다 5㎞ 이상 걷는데, 제일 먼저 백정흠 교수에게 확인받고 싶어 한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거 정말 좋은데요. 조금만 더 노력해 보세요. 아직 빼야 할 살이 많답니다. 일단 등산을 가려면 더 빼야 됩니다. 스쿼트부터 한번 해봅시다!” 백정흠 교수는 류세창씨와 등산을 한번 가고 싶은데, 아직 체중이 많이 나가서 무릎을 다칠까 봐 걱정이 된다. 대장암을 겪은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보기에는 너무 편안하다. 궁금한 부분은 모두 말하고, 다 들어주는 그들의 대화에 벽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들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 좀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情이 그리운 나에게 힘을 준 그대 류씨는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 손에서 커 가족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지만, 외로움이 많다. 아플 때는 아픈 것보다 정이 그리운 경우도 많았다. 류씨는 진료를 받을 때마다 항상 따듯한 말로 걱정해주는 백 교수가 가족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남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다. “백 교수는 의사라서 멋있는 게 아니라, 인간적으로 참 좋은 분이에요.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는 걸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걸요. 다들 알고 있듯이 백 교수는 대장암 명의라고 불리지만, 그런 딱딱한 자세를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난 무조건 백 교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게 지금 제가 건강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찾아온 대장암 3기 류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속이 좋지 않아 화장실을 갔는데, 시커먼 변이 나왔다. 춘장 덩어리가 변기에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불현듯 위출혈로 생사를 오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곧바로 병원으로 이동한다. 검사 결과, 대장암 3기라는 판정이 나왔다. “3기라고 하는데, 말이 안 나오더군요. 놀라고 겁이 났죠. 그래서 종교의 힘을 빌려 생각하기로 했어요. ‘생명이 오는 것도 거둬가는 것도 하늘의 뜻이거늘 삶에 그렇게 애착을 갖지 말자. 대신 최선을 다해보는 거다’라고요.” 백 교수도 그날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항문 출혈로 병원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은 류씨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체중이 많이 나가서 복강경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고민을 하던 그다. “동양인의 체형은 말라서 서양인보다 수술이 수월하다는 보고서들이 있죠. 그런데 류씨는 달랐죠. 어떻게 수술을 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했어요. 그러던 중 수술 일정이 잡혔죠. 2011년 5월 27일. 아직도 기억하는 날이죠. 복강경전방절제술을 시행했죠.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수술 후 류씨는 일주일만 입원했어요. 살고자하는 의지가 무척이나 강렬했던 거죠.” 긍정의 열매를 키우는 방법 수술이 끝났고, 류씨는 깨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한다. 백 교수의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는 말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12번의 항암치료 중에도 류씨의 끈기는 돋보였다. 보통 6~7차 때 항암치료를 포기하는 이들이 많은데, 류씨는 버텼다. “사실 항암치료를 받는 분들을 보면 식사를 못하고 토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는 잘 먹어야 된다기에 못 먹으면 갈아서 마셨어요. 2박 3일 동안 주사를 맞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견뎌냈습니다. 백 교수가 말하는 것들은 다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그게 제가 항암치료를 극복해 낸 방법이었습니다.” 이제는 살아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회사에 복귀했고, 성실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최근에는 노인대학에 강사로 서서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백 교수는 이런 류씨를 ‘살고자 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과학적 증명이 우선시되는 의료 분야에서도 과학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곤 해요. 그것은 긍정적인 사고가 낳은 기적 같은 일들이죠. 의사와 환자는 신뢰감을 기반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직접 증명시키는 거죠. 류씨처럼 믿음으로 긍정의 열매를 쑥쑥 빨아들이는 환자가 있는 반면 색안경을 끼고 견제하는 환자들도 있죠. 저는 환자분들에게 류씨의 긍정적인 사고를 배우라고 권하고 싶어요.” 현재 류씨는 대장암 수술 후 재발 고비 시점인 2~3년이 지났다. 이제 1년 반만 버티면 암 완치판정을 받을 수 있다. 그때까지 이들의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평생 같이할 각오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없다. 이 시대 명의의 조건, 소통 의사는 보통 외래환자와 입원환자를 구분해 진료한다. 대형병원의 경우는 환자가 많기 때문에 주치의가 상담을 하는 시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외래를 볼 때면 5분 이상 이야기하는 게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지만 백 교수는 환자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카카오그룹이라는 모바일 메신저에 모임을 만들었다. 환우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공유하는 편안한 자리를 마련한 것.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진 게 지금하고 있는 카카오그룹이 아니었나 싶어요. 우선은 환우들에게 정보를 주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폐쇄된 공간이 필요하죠. 좀 더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리고 특정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니 우리들만의 소식들이 더 소중해지죠. 또 굳이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휴대폰을 통해 수시로 환우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으니 시간이 아껴지죠. 오늘은 환우들이 궁금해하는 음식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현재 84명이 가입된 이 카카오그룹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대장암 극복 환우들의 이야기들로 북적이고 있다. 백 교수 역시 수시로 참여해 환우들과의 격식 없는 소통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주력하고 있는 부분은 오는 9월 길병원에서 진행되는 ‘대장암의 날’ 행사를 멋지게 해보고 싶어 환우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다. 카카오그룹을 설명하는 백 교수의 모습에서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번져갔다. ‘교수’, ‘센터장’이라는 타이틀이 아닌, 더 낮은 자세로 임하는 의사가 되려는 그, 이 시대 진정한 명의의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닐까. “특히 암을 겪은 환자들에게는 이겨낼 수 있다는 안정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소통을 자주 해야만 하죠. 주치의라고 해서 자주 만날 수 없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상대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다가올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드는 것.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노력하고 싶네요. 치료가 우선시되는 것을 전제로 병원 밖에서도 사소한 부분을 신경 써주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라뽀가 형성되는 거죠. 설명하기 힘들지만, 병을 극복하는 데 어떤 방향으로든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최근 메르스 사태로 인해 사회적으로 의료계 불신이 커지고 있다. 그것은 백 교수와 류씨의 이야기와는 달리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 급작스럽게 벌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됐다. 환자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안전한 병원, 믿음직한 의사, 착한 환자의 모습으로 조속히 돌아가길 바란다.
- 2015-07-07 14:32
-
- [문화읽기-저자 인터뷰]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은 남자, <남자의 독립> 저자 이봉규
- TV조선 '황금펀치', '이봉규의 정치 옥타곤'의 MC로 활약하며 '강적들'의 정치만담꾼으로도 잘 알려진 시사평론가 이봉규.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은 남자 이봉규가 꿈꾸는 독립, 그만의 자유분방한 라이프 스타일 노하우를 담은 책 이 나왔다.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Q. 어떤 중년들이 읽으면 좋을까요? 재미없게 그냥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사는 사람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 일터로 나가기 싫어도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출근하는 사람들, 퇴근 후에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마누라에게 야단맞을까 봐 억지로 집으로 향하는 불쌍한 우리들의 중년 남자들, 자신은 늙어가고 있다고 자평하는 사람들이 꼭 읽기를 바랍니다. Q. 자신이 갱년기라고 느낀 순간들에 대해 몇 가지 말씀하셨는데요, 그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갱년기를 어떻게 이겨 내셨는지요. ‘삶에 대한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지금 생각해보면 갱년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친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고, 심지어 집에서 나가기도 싫고 그냥 멍하니 TV만 쳐다보면서 리모컨만 하루 종일 돌려대고 있었죠. 샤워를 며칠씩 안 하는 날도 많았고요. 무기력증에 빠져서 ‘이렇게 나이 먹으면서 늙어가겠구나!’하고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보내던 중, 영화 를 봤습니다. 주인공 두 명(잭 니콜슨, 모건 프리먼)이 6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로 작성합니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 6개월을 정말 재미있고 가치 있게 살지요. 그때 나도 문득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자고 마음먹고 써봤습니다. 그런데 막상 죽기 전에 가장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상상력을 동원해서 죽는다는 가정으로 몰입해서 다시 생각해보니,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소소하지만 재미있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 것들이었습니다. 마치 영화 ‘버킷리스트’의 주인공들이 작성한 리스트처럼. 그때 생각했죠! 이제부터 재미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 남을 위해 또는 가정을 위해 희생을 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의 행복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랬더니 그 후 정말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은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그동안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Q. 어느 순간 중년은 그런 감정과는 멀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년에게 우정이란? 그리고 사랑이란? 중년에게 우정은 중요합니다. 사랑은 훨씬 더 중요하죠. 소년기의 우정은 맹목적이고, 청년기의 우정은 맹목적인 우정에 다소 앞날에 대한 도움을 받거나 줄 수 있는 점을 염두에 둡니다. 그러나 중년의 우정은 맹목적이게 순수하지도 않고 도움을 받거나 주기도 귀찮아집니다. 친구를 만나서 머리를 굴리거나 신경을 쓰기가 피곤해지는 것이죠. 배려하기도 힘에 벅차게 되고요. 그냥 편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상대는 뭔가 우월감을 노출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격지심이 있어서 히스테리를 부리면 마음이 무겁고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헤어져서 돌아갈 때 내가 뭐하러 아까운 시간에 그 친구를 만나서 스트레스를 받았지? 하는 생각에 친구와의 만남의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런데 처지가 비슷하거나 코드가 맞는 친구를 만나면 아무 생각 없이 수다를 떨고 재미있게 소주잔을 비웁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일을 하는 동료를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고 어릴 적 친구와 만나는 횟수는 반대로 줄어들게 되지요. 어릴 적 친구는 늘 마음속으로 그립죠. 그런데 막상 만나려고 하면 스케줄도 서로 다르고 지금 사는 가치관도 다르고 관심사도 달라서 공유할 게 별로 없습니다. 물론 어릴 적 친구와 코드가 잘 맞고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면 금상첨화의 우정이 지속되겠죠. 그런데 중년의 나이에 그런 친구는 많지 않을 겁니다. 한두 명만 건져도 인생을 아주 잘 산 것이라고 자평해도 됩니다. 중년의 사랑은 사활적인(vital) 이슈입니다. 사랑이 없는 중년의 삶은 죽는 연습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불쌍한 인간입니다. 사랑하면 젊어지죠!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대상이 부인이면 최고의 행복이죠. 만약 부인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여인을 사랑한다면? 이혼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합하라고 조언합니다. 부인도, 다른 여인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지금부터 사랑을 애써서 찾아야 합니다.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짧기 때문에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은 필수입니다. 특히 중년에게는! Q. 책에서 ‘자신의 행복만을 위한 시간이나 설계를 해본 적 없으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삶에 회의가 느껴질 수밖에.’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은 무엇이고, 현실은 어떠하며, 설계하신 모습은 무엇인지요. 사람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겠죠. 나의 경우 이상은 “진정한 자유와 행복”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사회의 통념과 충돌하고 어느 정도 맞출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죠. 그래서 요즘 설계하고 있는 인생 계획은 ‘나의 이상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사회의 통념을 용기 있게 깨버리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남은 50년 행복을 위해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기로 마음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라는 책을 내면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여러분과 공유하자는 것이지요. 마치 그룹스터디를 하거나 동아리를 하는 것처럼. Q. 만약 하나님이 “봉규야~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 “전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라고 애원한다고 하셨는데요. 또,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라 표현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가 지금이 황금기라는 것은 일이 잘 풀려서 황금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 중에서 지금이 제일 자유롭고 행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회의 통념에 나를 맞추기보다는 나의 이상에 맞추는 용기가 필요한 중년입니다. 인생을 잘살기 위해 준비하는 단계가 아닌 행복하게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중년입니다. 이를 위해서 두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첫째는 “칭찬받기 위해 구걸하는 노예근성”입니다. 때로는 가족에게 칭찬받기 위해 애쓰고, 때로는 상관에게 칭찬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때로는 사회 통념의 가치에 맞춰서 출세했다는 칭찬받기 위해 발광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좀먹고 있습니다. 남의 칭찬이나 사회의 통념은 나의 행복과는 무관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고래가 춤추면 행복할까요? 아마도 무지 불행한 고래일 것입니다. 오죽 고된 훈련을 받았으면 사람의 지시(칭찬)에 고래가 춤을 춥니까? 우리는 불쌍한 고래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태평양을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짝짓기하고 맛있는 거 자유롭게 먹고사는 고래가 행복하듯이 우리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서 나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야 즐겁고 행복한 중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자식입니다. 자식을 버려야 행복합니다. 버리라는 의미는 자식을 어디에 내다 팔거나 자식으로부터 도망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나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양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면 그 자식이 잘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십중팔구는 애지중지 키우면 오히려 자식이 독립심이 없어서 불행하게 됩니다. 아버지도 불행하고 자식도 불행해지는 최악의 결과를 위해 우리 아버지들은 그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부모들에게 배울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식이 대학을 들어가면 첫 학기 등록금만 대주고 나머지는 학자금대출로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사람은 대학 졸업 후에 상당 부분 시간을 학자금대출 갚느라 고생합니다. 그런데 그걸 고생이라고 불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통념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지요. 우리는 자식들이 졸업할 때까지 꼬박꼬박 학비를 대두고 용돈까지 챙겨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시집·장가 갈 자금까지 마련해주느라 등골이 휘어지게 희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식들은 행복할까요? 잘 될까요? 천만에 오히려 자생력이 없어서 나이를 먹어도 남에게 의존하려는 나약한 젊은이로 자랍니다. 사업자금 대달라고 떼쓰고 유산을 미리 떼어달라고 부모에게 협박합니다. 이게 다 부모가 잘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희생하고 자식은 잘 키워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과 사회통념이 자식도 망치고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Q. ‘이기적으로 사는 남자들’에서 신성일, 손학규, 강용석, 김갑수, 조영남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 중 롤모델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신성일 선생이 제일 부럽습니다. 우선 그 나이에 아직도 멋진 모습이 부럽습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하고 정신수양을 하니까 그 모습이 유지되는 것이겠지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부럽습니다. 부인 엄앵란 여사에게 “방송에서 나를 마음껏 흉보라! 그래야 방송이 재미있어서 당신이 잘 팔릴 거야~”라고 말하는 용기와 자유로운 영혼이 부럽습니다. 원조 한량 신성일 선생을 따라잡기 위해 ‘한량 시즌2’ 이봉규가 분발해야겠지요. 출판기념회에 신성일 선생이 오셔서 응원을 해주셨는데, “한량 신성일이 ‘시즌1’이었고 이제 ‘한량 시즌2’ 이봉규가 행복하게 살아갈 겁니다.”라고 마이크 잡고 외치니까 껄껄 웃으시더라고요. Q. 아직도 ‘나는 늙었다’ ‘나는 늦었다’고 말하는 중년들에게 한마디! “왜 노인행세하고 자빠졌니?”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송해 선생은 90인데도 아직도 재미있게 일하고 술 드시고 매일 목욕탕에서 노래를 부른답니다. 이제 40~50대의 중년들이 늦었다고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멍청한 바보입니다. 인생 100세 시대 지금 중년들은 반 정도밖에 살지 않은 ‘신청년’입니다. 나머지 50년 60년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젓인지는 지금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 디테일한 방법은 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을 각오로 솔직하게 내뱉었습니다. 나는 지금 째지게~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같이 행복하시죠!
- 2015-06-12 16:35
-
-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작 <마지막 거인>
- 파릇파릇 잎사귀가 싱그러운 신록의 계절 5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존재를 만끽해보고 싶다면 국립생태원이 제격이다. 손주와 함께 생태원 구경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까지 심어주면 어떨까? 그런 이들에게 국립생태원 최재천(崔在天·61) 원장은 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온 가족이 함께 생각을 마주하는 어른동화 최 원장이 추천하는 은 프랑스 동화작가 프랑수아플라스의 어른용 동화다. 어른, 아이 모두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최 원장은 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이야기했다. “여느 책처럼 추천사를 부탁받아서 처음 접하게 됐는데, 이 책은 굉장히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해줬어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읽기 어려운 책도 아니죠. 또, 어른이 읽어도 마치 자기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를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어요. 아이가 놓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고, 생각을 이야기하기에 충분하죠. 저는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지만, 절대로 줄거리를 말해보라고 하거나 독후감을 써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 부담을 가지고 읽으면 책 읽는 재미가 없거든요.” 평소 최 원장네 부자(父子)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서로 허물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렇게 책은 그와 아들 사이의 소통의 매개체이자 대화의 소재가 된다. “이제 이십대 후반인 아들이 가끔은 제가 읽는 책을 뺏어서 읽기도 하고, 서로 빌려 읽기도 해요. 읽고 나면 다짜고짜 앉아 토론하듯 말하는 게 아니라 얼마가 지난 후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면서 책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하죠. 그러고 있으면 아내도 ‘무슨 책인데?’라며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고, 그렇게 온 가족이 독서를 하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요. 도 세대마다 느끼는 바가 조금씩 다를지라도 온 가족이 쉽게 읽고 저녁을 먹으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해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해요. 대화를 하다 보면 때론 아이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죠.” 소중한 자연, 알아가고 보듬어야 할 세대 책의 주인공은 한 노인에게서 산 ‘거인의 이’의 지도 속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간다. 순수하고 다정한 거인들과 2년 7개월여 동안 겪은 일을 책으로 펴냈는데, 책을 통해 거인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이 거인을 해치고, 그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목이 잘린 거인이 주인공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말하죠.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라고. 그 말이 굉장히 큰 감동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예전에 학생들과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 탐사를 하다가 반딧불이를 발견한 적이 있어요. 요즘에 어디 반딧불이를 발견했다고 하면 먼저 신문에 났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몰리고, 축제를 하고 야단법석을 떨어 자연이 훼손될 거예요. 그래서 그냥 우리만 알고 세상엔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학문적인 기록에는 작은 구멍이 날지라도, 가끔은 이렇게 자연을 숨겨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거인의 마지막 말처럼요.” 그는 전 세대가 다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특별히 중·장년에게 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중·장년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자연에 대한 공감, 감성이 제일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배워보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연, 환경이 중요하다고 하니, 그걸 공감하기 어려운 세대가 되어버렸어요. 이 나이에 자연공부를 다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더욱 아니죠. 세대를 불문하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우리가 사는 지구, 자연을 어떻게 더 망가지지 않게 하느냐이거든요. 배우지 않았다 해서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까지 보듬어야 할 세대인 거죠. 다짜고짜 학술적인 책 등을 읽고 덤비는 것보다는 일단은 을 통해 그런 것들을 감성적으로 공감하고 접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자연에 대한 생각을 키우는 시작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노는 법도 10년은 배워야 2005년 는 도서로 인생 이모작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최 원장. 1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인생 이모작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준비돼 있건 없건 다가오는 은퇴라는 상황에서, 내가 먼저 나에게 다가올 인생을 기획하자. 그래서 인생을 딱 두 번 나눠서 살아보자. 일하면서 사는 인생, 그리고 일을 멈추고 사는 인생으로 이모작하자고 해서 지어낸 말이죠. 근데 인생 이모작하라 해놓고 정작 나는 뭘 하고 있나. 그런 것으로 치면 나는 낙제점이에요. 사실 제 경우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놀 준비를 못 하고 있어요. 다들 일 걱정은 많이 하지만 놀 걱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한 교장 선생님 말씀이 노는 것도 10년은 준비해야 한다더라고요. 운동이든 뭐든 노는 방법도 10년은 준비해야 은퇴해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는 거죠. 은퇴하고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이라도 노는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어디 끼지도 못할 거 아녜요. 그럼 노후가 얼마나 쓸쓸하겠어요. 저도 노력해야겠지만, 다들 어서 놀 준비하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 2015-04-29 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