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장소는 예전에 둘이 누비고 다녔던 종로로 정했다. 클라우드 하우스라는 레스토랑으로 빌딩 꼭대기 층 유리로 된 구름다리에 서면 발아래로 거리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바깥 모습도 차가 달리는 모습도 모두 밟고 있는 유리 아래로 보이니 아찔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종로2가 사거리는 많은 추억이 담긴 동네이다. 보신각 건너편의 이제는 종로의 랜드마크로 손색이 없는 이 빌딩은 예전 화신백화점 자리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화신백화점은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화려한 백화점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다.움직이는 계단이라며 별 볼 일 없이도 중 고교 시절 친구들과 어지간히 들락거렸다. 우리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움직이는 계단인 에스컬레이터를 보려고 온 관광객도 많았다고 한다.
종로에는 화신백화점과 건너편 신신백화점이 있었다. 화신은 높은 고층백화점이었고 신신은 단층의 상점이 이어진 아케이드 형식의 백화점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친구들과 ‘신난다, 신난다, 신신백화점, 화난다, 화난다, 화신백화점’이라고 운율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지금은 모 은행이 된 신신백화점은 참으로 아기자기했다.예쁘게 단장한 가게가 줄을 이어서 동대문에 있는 여학교에 다녔던 필자는 방과 후 이곳에 들러 가운데 분수도 감상하고 예쁜 가게를 들여다보며 구경하는 게 일과일 정도였다. 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엄마가 좋아하는 일식 초밥 스시를 사러 신신백화점에 다니기도 했다. 돈암동이 집이었는데 엄마의 취향을 맞추려고 아버지는 언제나 필자에게 종로 신신백화점에 있는 스시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신신백화점 뒤편의 한일관이라는 한식집은 우리 가족의 단골 음식점이었고 엄마의 계 모임을 따라서 자주 가 본 곳이다. 엄마의 계 모임에서 갈비탕이나 냉면 불고기를 먹었던 맛있는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외국 관광객도 많이 찾던 한일관이 몇 년 전 재개발 때문에 문을 닫고 압구정동으로 궁전 같은 건물을 짓고 이사했다. 맛을 잊지 못해 찾아간 우리는 옛날 그 맛이 아니라며 발길을 끊었다. 엄마는 예전 종로의 한일관이 그립다고 하셨다. 추억이기 때문에 예전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일 게다.
화신백화점에는 삼류 극장도 있었다. 학생 불가인 영화를 보려고 선도부 선생님의 눈을 피해 몰래 드나들었었는데 걸리면 정학인 그 시간이 어찌나 스릴 있고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놀기만 한 종로통은 아니었다.종로엔 유명한 학원도 많아서 여고 시절 EMI 등 여러 학원에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YMCA 건물은 당시로써는 고층건물에 속했다. 그곳에서 실내수영을 즐겼고 대학생일 땐 쿠키 만드는 강습도 받았던 멋진 곳이다. YMCA 건너편에는 복 떡방이라는 떡집과 고려당이라는 큰 빵집이 있었는데 약속장소로 꼽을 정도로 맛있고 인기 있는 장소였다. 프랜차이즈 유명 제과점이 성행하면서 떡집이 없어지고 고려당이 문을 닫았으니 명맥을 유지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후에 다시 복떡방 가게가 문을 연 걸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종로통에는 음악감상실도 많았다. 요즘 뜨고 있는 쎄씨봉 이나 디세네, 고 아나운서 이종환 씨가 운영했던 쉘부르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곳이다. 종로는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모든 게 예전처럼 변함없으면 좋으련만 발전을 위한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필자만의 추억을 위해 옛 그대로 있어 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부터 무지개처럼 피어났던 젊은 날의 추억이 곳곳에 스며 있는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종로통이다. 신나는 일도 많았던 종로에서 반가운 친구와 만나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8월 5일 막을 올리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축구 대표팀 명단이 지난 6월 27일 발표됐다. 손흥민(토트넘) 등 국외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을 비롯해 23세 이하 선수 15명과 와일드카드인 24세 이상 선수 3명 등 18명의 선수가 올림픽 무대를 밟게 됐다. 이번 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와일드카드 수비수로 누가 뽑히느냐’는 것이었다. 유력한 후보였던 홍정호는 소속 클럽인 분데스리가 아우크스부르크가 차출을 거부해 탈락했고 중국 리그 광저우 푸리에서 뛰고 있는 장현수가 뽑혔다. 신태용 감독의 와일드카드 구상은 2+1(수비수 2+공격수 1)이었으나 결과적으로 1+2(장현수+손흥민 석현준)가 됐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열린 올림픽에 축구종목이 있었다면 수비수 김호와 김정남은 나이 제한과 와일드카드 제도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표 선수로 발탁됐을 것이다. 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기 때문이다. 수비수 네 명이 일(一)자로 늘어서는 포 백을 쓰고 있는 요즘과 달리 1960~70년대에는 중앙 수비수 두 명이 앞뒤로 자리를 잡은 스토퍼-스위퍼 시스템을 사용했다.
1967년 9월 도쿄에서 열린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69년 10월 서울에서 벌어진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 등 10여 년 동안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김호는 한국 축구의 수비 버팀목이었다. 당시로서는 큰 키인 177cm의 김호가 스토퍼로 상대 공격을 1차로 저지했고 170cm의 비교적 작은 키인 김정남이 스위퍼로 나서 상대 공격을 쓸어냈다. 김호-김정남 콤비는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날 한국 축구가 누리고 있는 월드컵 4강 등 명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호의 이력서는 그의 오랜 축구 인생에 견줘 보면 간략하다. 학력은 더욱 그렇다.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물론 동래고는 축구 명문이다. 김호곤(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박성화(전 올림픽 대표팀 감독) 최용수(중국 장쑤 쑤닝 감독) 등 우수 선수들이 김호의 뒤를 이었다. 김호의 학력을 내세운 이유는 그가 학연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가 축구계에 이러저런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가 학연과 지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학벌 중심의 사회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OO시에서는 OO고를 나오지 않으면 전자 제품 대리점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가 하면 OO협회는 OO대학 출신들이 잡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돈다.
김호는 은퇴한 뒤 국가 대표팀이든 단일팀이든 어느 팀을 맡아도 학연 지연 등과 관련한 뒷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때도 그랬다. 김호는 동래고를 졸업한 뒤 1964년 실업팀 제일모직에 입단했다. 제일모직은 뿌리를 따지면 K리그 클래식의 명문 구단인 수원 삼성의 할아버지쯤 된다. 삼성그룹 계열이다. 이 무렵 실업 축구는 군 축구의 대표격이던 방첩대가 해체되면서 제일모직, 대한중석, 금성방직 등이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실업 정상권 팀에 들어갔으니 김호는 요즘으로 치면 특급 고졸 신인이었다.
김호는 은퇴한 뒤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배들을 가르쳤다. 김호는 지도자로서도 이력서가 간략하다. 동래고와 한일은행,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대전 시티즌 등 지휘한 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팀에서 최소 3년 이상 지휘봉을 잡았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라는 얘기다.
김호의 고향은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종목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우수 선수들이 그렇듯이 김호도 초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린이 김호가 더 좋아한 운동은 축구였다. 두룡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축구로 60년 축구 인생을 살게 됐다. 5학년 때 6학년 선배들 틈에 끼어 통영시 초등학교축구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하니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6학년 때는 주장을 맡아서 또 우승했고 김호가 통영중학교에 진학한 뒤 후배들이 3년 연속 우승해 우승기를 영구 보관하게 됐는데 그 우승기가 여전히 모교에 있다고 한다. 통영은 우수한 축구 선수가 많이 나온 고장이니 초등학교부 3연속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유소년들이 그랬듯이 김호도 라디오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축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김호는 10대 초반에 들었던 라디오 중계방송 내용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무렵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이 축구를 잘했다. 일본에서 열린 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결승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자유중국에 2-3으로 졌다. 그때 훌륭한 축구 선수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김호가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들은 경기는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결승전이었다. 1950년대 자유중국에도 밀리던 한국 축구는 뒷날 김호가 국가 대표로 뛰게 됐을 때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대만을 8-0으로 이기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김호는 통영중학교~동래고를 거치면서 축구 선수로 쑥쑥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뛰어난 수비수들이 대개 그렇듯이 김호도 학창 시절에는 공격수로 뛰었다. 신세대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포지션인 센터포워드, 레프트 인사이드 등으로 뛰면서 동래고 시절에는 그 무렵 전국 최강인 서울 동북고를 2-0으로 꺾기도 했다.
김호는 1965년 처음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됐다. 이때, 이제는 50년 지기가 된 김정남을 만나게 되고 얼마 뒤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남이 레프트백과 하프백을 오갔고 김호는 라이트백이었다. 그때 국가 대표팀 중앙 수비수로는 둘의 선배인 김정석이 있었다. 둘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만든 ‘양지’에 나란히 입단하면서 김용식 감독(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종목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출전)에 의해 중앙 수비수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김호-김정남 콤비의 출발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드라이버는 힘, 아이언은 기술, 퍼팅은 돈’ 아마추어 골퍼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일단 드라이버는 멀리 보내고 볼 일이고 아이언은 정확하게 핀 근처로 갖다 붙여야 한다. 그리고 마무리인 퍼팅이 좋아야 내기에서 돈을 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중요한 퍼팅이 가끔 전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 본인의 최종적인 판단과 실제 퍼팅시 잘못은 생각지 않고 애꿎은 캐디에게 한마디 던지는 골퍼가 있다. 물론 캐디가 경사를 잘못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캐디의 조언을 받아 본인이 동의를 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럴 때마다 필자는 참지 못하고 꼭 하는 말이 있다. “주식투자와 퍼팅은 자기 책임이다. 우리 인생에서 또 하나 자기 책임 하에 하는 것이 있는데 무엇인지 아느냐?” 답은 ‘노후준비’이다. 우리가 주식투자에서 다양한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는 것처럼 퍼팅 시에는 홀마다 실제로 공이 굴러간 궤적 등을 보고 익힌 캐디의 조언을 참고한다. 캐디가 못 미더울 때는 동반자의 의견을 구할 수도 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캐디가 있는가 하면 초보 캐디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최종 결정과 최종 퍼팅은 내가 하는 것이다. 그 결과가 엉뚱하게 나왔다고 해도 조언한 사람은 조언에 그칠 뿐이다. 조언을 받아들인 것도 나고 그에 따라 퍼팅을 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이다.
노후준비는 어떤가? 노후준비 역시 주식투자나 퍼팅처럼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요즘 노후준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노후준비 또는 은퇴설계 관련 전문가가 주식투자 전문가와 캐디에 못지않게 많다. 오히려 주식투자와 퍼팅은 나름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 반면 노후준비는 누구나 당면한 과제이므로 한마디씩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은 안 해도 그만이지만 노후준비는 안 하면 노후가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좀 더 나은 노후준비를 위해 전문가는 물론 은퇴를 했거나 은퇴를 앞둔 선배들의 경험과 조언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식투자와 퍼팅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노후준비에도 정답은 없다. 여기서 정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맞는 답, 즉 정답(正答)도 없지만 정해진 답이라는 뜻의 정답(定答)도 없다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대신 현명한 답, 현답(賢答)은 있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아니라 노후준비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문(賢問)에 대해 현답을 하는 것, 즉 현문현답(賢問賢答)인 것이다. 더욱이 그 현답은 자기 책임 하에 나만의 맞춤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스스로 뭔가 계획하고 설계하기에는 뭔가 크게 부족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퍼팅이나 주식투자를 할 때처럼 전문가와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조언과 정보는 헛갈리게 만들 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 2~3명, 이미 은퇴해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선배 또는 친구 2~3명으로부터 조언을 듣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더해서 관련 책을 읽기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듣고 읽으면서 은퇴자들의 실제 생활을 보다 보면 나만의 철학과 전략이 설 것이고 그에 따라 차근차근 나만의 노후라는 집을 설계하고 지으면 되는 것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듯이 핑계 없는 노후불안도 없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무덤은 피할 수 없지만 노후불안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후가 불안한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핑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소득이 적거나 가족관계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따라서 스스로 한 번쯤 짚어 봐야 할 질문은 “만약 내 노후가 불안해진다면 그 핑계거리가 무엇일까?”이다. 이때 기준은 필자가 좋아하는 ‘행복한 노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분야, 즉 5F(Finance, Field, Fun, Friend, Fitness)’이다. 분야별로 조목조목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노후에 쓸 돈(Finance)이 부족하다면 왜 부족할까? 은퇴한 후 그 많은 시간을 보낼 소일거리 또는 취미활동(Field)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지금부터라도 뭘 해야 할까? 노후에 나와 함께 할 배우자와 가족을 포함한 친구(Friend)가 없다면 왜 없을까? 재미(Fun) 없는 노후가 예상된다면 왜 그럴까? 현재 건강(Fitness)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가 예상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라도 5F 중 가장 부족한 분야를 우선적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과연 돈만 있다고 해서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따라올까? 그 돈을 누구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할 일과 친구, 재미, 건강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돈은 비료와 같아서 쓰지 않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 돈을 잘 써야 할 일도, 친구도 생기고 재미도 따라오고 건강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기만 해도 돈과 건강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다.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를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취미활동이나 문화행사 또는 봉사활동에 참가해보라.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뿌듯함과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특히 걸어 다녀야 몸이 건강하다는 걸 알고 열심히 대사활동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수록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 더 중요해진다. 오래 살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치매에 걸리지 않고 100세까지 건강하게 산다면 가족이나 친구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인터넷을 뒤져 재미있는 건배사와 에피소드를 발굴,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써먹어 보라. 하다 보면 늘기 마련이고 잘 하면 나만의 주특기가 될 수도 있다. 사는 게 재미있으려면 내가 재미있거나 재미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되는 것이다.
‘평균화의 맹점’은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다. “다리의 수송력은 여러 교각이 떠받치는 힘의 평균값이 아니라 가장 약한 교각의 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리는 가장 약한 곳에서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F도 평균값을 끌어올리는 것에 못지않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건강을 잃으면 다른 4F가 아무리 풍족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5F 중 부족한 F를 찾아내서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필자는 선생님과 대하기가 지금도 어렵다. 마음속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 선생님과 가까워져야한다'고 마음을 토닥이지만 몸은 선생님 앞에만 서면 얼어붙고 행동은 굼뜨고 말은 어눌해진다. 몇 년 전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프로에서 선생님을 찾는 사연과 과정이 소개되었다. 저런 천사 같은 선생님이 과연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 했다. 내가 겪은 선생님의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내 뇌리 속에 선생님에 대해 나쁜 기억들이 여러 건 있어서 이런 기억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점점 선생님은 두려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가까이 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의 옛 이름)2학년 다닐 때 까지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월사금(月謝金)이라 하여 정확한 금액은 희미하지만 매월 200환(지금화폐로는 20원)의 돈을 내야 했다. 70여명의 한반에 20여명정도는 가난해서 그 돈마저 내기가 어려웠다. 월사금을 내지 않은 학생들을 선생님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에 가도 돈이 없는지 뻔히 아는 아이들이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교실에서 쫓겨나면 엉거주춤 학교운동장 구석 땅바닥에 주저앉아 흙장난이나 철봉대 주위를 맴돌았다. 월사금을 못내는 학생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했다. 학생의 잘못이 아니지만 선생님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으로 슬슬 선생님을 피하게 된다. 나도 몇 번 이런 경험이 있다.
장관과 한국은행 총제를 역임하신 박승씨도 수업료를 못 내서 학교 기말고사 때만 되면 시험을 못보고 쫓겨났다고 했다. 수업료를 못 내서 쫓겨나는 일은 비일비재하던 시절이다. 난 우리 집이 가난하기 때문이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고 믿었는데 박승 전 총재는 가난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국가의 잘못이라고 설파했다. 국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을 세워서 가난을 몰아낸 것만 봐도 개인보다 국가의 잘못이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역시 이런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어 나라를 발전시킨다.
선생님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게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예전에는 학생은 많고 교실은 부족했다. 저학년인 일 이 학년을 대상으로 오전반 오후반 이부제 수업을 실시했다. 가끔은 운동장에서도 수업이 있었다. 한번은 운동장 야외수업시간에 우리 반 2학년 초등학생이 무슨 잘못을 했다. 화가 난 선생님이 그 학생을 불러내어 다짜고짜 입을 벌리라고 한 후 운동장의 모래를 한주먹 집어서 학생의 입에 뿌렸다. 지금도 충격적인 그 장면이 내 머리에 박혀있다. 한반에 70~80명의 콩나물시루 공부를 하던 시절이니 선생님도 아이들 통솔에 힘이 들고 짜증도 많았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처사는 지나쳤다. 지금 같으면 아마 교단에서 영구 추방되었을 것이지만 당시의 선생님 권력은 아무도 시비 걸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오래간다.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에 살아남은 사람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당시 사건이 나고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지하철 타기가 겁이 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면 승차장에서 CCTV를 향해 손으로 V자를 그리고 2~3초간 이런저런 행동을 하고서 전철에 오른다고 한다. 혹 잘못되어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전철을 탔다는 증명을 남기기 위함이란다. 10 여년이 흘렀는데도 지하철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어릴 적 기억에 강렬하게 남게 하는 트라우마는 폭력이나 성적 수치심을 주거나 신체 비하적 발언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트라우마로 작용하는지를 모르고 재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잘못을 저지른다.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참으로 오래간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좋은 말,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줘야 한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SSDD가 뭐야?
호주 영화 ‘드림 캐쳐’에 자주 나오는 용어이다. ‘Same Shit Different Day’를 줄인 단어이다. 매일 같은 똥만 싼다는 뜻으로, 매일의 삶이 똑 같아서 지루하다는 뜻이다. 인사 조로 "요즘 어떻게 지내?"하고 물으면 시들한 표정을 지으며 "SSDD"라고 답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신나는 일을 만들거나 안 해본 것 중에 위험 부담은 있더라도 새로운 도전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 매일 같은 날이 반복되면 지루할 것이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매일 변화가 없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 같다.
젊은 시절에 은행에 근무한 적이 있다. 처음 보직이 ‘Auditing’이라고 ‘감사과’였는데 은행 전반의 일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 자리는 한번 배치 받으면 평생 그 자리에 있게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달 내내 허덕였는데 일이 익숙해지자 보름 만에 한 달 치 일을 다 끝내고 그날그날 루틴한 일만 하다 보니 시간도 남고 빈둥대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어 곤란했던 적이 있다.
두 번째 직장인 건설회사에 갔을 때는 본사 근무부터 시작했지만, 나머지 기간은 건설 현장에 투입되었다. 건설현장은 보통 3년 내외로 공기가 끝나기 때문에 공사가 끝나면 옮겨가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얽힌다. 좋은 일도 있지만, 잊고 싶은 일도 있다. 툭툭 털고 새 일을 한다는 것이 새로워서 좋았다.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일한다는 것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여의도 쌍둥이 빌딩이 LG 그룹의 사옥이므로 워낙 큰 공사였다. 그 현장이 끝나니 승진해서 그보다 큰 현장으로 배치되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었다.
세 번째 직장인 중소기업 봉제 수출업을 할 때도 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했다. 전 세계를 돌며 오늘은 이도시 내일은 다른 도시 등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수출 전선에서 뛰는 것이 좋았다. 같은 일을 한지 10년이 넘자 회장은 내게 다른 일을 맡겼다. 수출업이 아닌 수입해서 국내에 파는 내수 사업을 맡아서 해보라는 것이었다. 수출업은 기반이 이미 잘 닦여 있어 거저먹기였으나 새로운 사업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다른 임원들처럼 하던 일이나 계속하고 있으면 편할 텐데, 골치 아픈 책임이 뒤따르는 일을 맡은 것이다. 결국 IMF의 직격탄을 맞고 책임지고 물러났다. 그때 SSDD가 좋다는 것을 새삼 느꼈었다.
우리 젊었을 때만 해도 공기업이나 은행 등 한 자리에 계속 근무하다 퇴직하는 직종은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먼저 퇴직하고 보니 루틴한 일이라도 붙잡고 오래 근무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SSDD가 더 좋은 직장인 것이다.
시니어가 되고 보니 정말 SSDD가 바람직하다. 신나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아무 일 없이 편안한 것이 제일이다. 거취를 옮기는 등 무슨 변화라도 생길 것 같으면 몹시 불안해진다. 저녁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다가 다음 날 아침은 뒹굴거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느긋한가.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전날 저녁부터 술자리도 자제하고 일찍 자야 한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면 바이오리듬이 깨져서 화장실 가는 것도 생략 된다. 하루 종일 불편한 것이다. SSDD가 행복이다.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메종 드 히미코(La maison de Himiko)’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를 만들었던 이누도 잇신 감독과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 콤비의 작품이다. 일본의 원빈으로 불리는 하루히코 역의 오다기리 죠와 어딘지 촌스런 분위기의 여배우 시바사키 코우가 사오리 역으로 주연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실버타운의 이름인데 영영사전을 찾아보니 “Originally, La maison de mon rêve was only intended to be distributed among a close circle of friends.”라고 나온다. 폐쇄된 서클의 친구들에게 바친다는 정도로 해석이 된다.
사오리는 아버지 히미코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 경제적으로 혼자 어렵게 살아간다. 술집에 바니걸로도 취직을 하려 했으나 용모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퇴짜 맞는다. 여자로서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얘기이다.
어느날 훈남 하루히코가 찾아 온다. 아버지 히미코가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전해준다. 술집에 나가느니 실버타운에서 청소나 잡일을 하면 유산도 받을 수 있을 거라 해서 마음이 흔들린다. 하루히코에게도 끌리지만, 아버지의 젊은 동성연인이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게이 아버지를 원망하며 아버지의 존재 자체도 부정했으나 일단 실버타운에 가서 일을 해 본다. 남자들 만의 여러 군상들이 모였는데 모두 게이 동성애자들이다.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여성스러운 이들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다. 조금씩 마주보다 보니 그들도 사람이었다. 하루히코와의 사랑도 싹트지만, 역시 게이인 하루히코는 사오리에게 더 이상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의 콘텐츠로는 동성애자들이 나오고 젊은 남자가 아버지의 애인이라는 등 거북스럽지만, 동성 성애 장면은 한 장면도 안 나온다. 남녀 간의 키스 정도만 나올 뿐이다. 장면 상으로는 외설스러운 부분이 없는 영화이다.
지난 6월 초 서울광장에서 ‘퀴어 축제’라고 동성애자들의 시위가 있었다. 뉴스로는 5만 명가량이 모였다는데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동성애지이지만 굳이 시위까지는 안 나온 사람들이 더 많다는 얘기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성이 문란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유롭다.” 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동성애 부문에서도 우리보다는 개방적인 모양이다.
필자가 남성으로 태어나서 여성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다행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히코가 사오리와 키스까지는 했으나 그 다음 진도를 못 나가는 것을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나 여자들처럼 옷을 입고 화장을 해야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면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되는데 소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다. 다음 세상에는 여자로 태어나겠다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실버타운 사람들이 단체로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왕년에 은행지점장이었던 사람은 부하직원이었던 사람을 우연히 마주친다. 부하직원이었던 사람은 이 옛 상사가 여성스럽게 옷을 입은 것을 보고 게이라며 마구 놀려대며 비난한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다 알리겠다며 조롱한다. 혼자만 알고 이해해주면 될 일을 이렇게 발설하는 사람도 인성이 덜 된 사람이다. 영화는 그들에게 다가가 보면 그들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화해해 나가라는 교훈을 남긴다.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50대 후반의 기혼자,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최근에 건강 또는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FINRA)에서 내린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의 정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때 만약 ‘50대 후반의 기혼자’를 ‘50대 후반 이상의 은퇴자’로 바꾸면 대부분의 은퇴자가 금융사기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자들이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고정적 수입은 크게 줄어들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사업준비자금 등 자금 동원력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회사 생활을 20~30년 이상 해오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판단과 금융지식이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일만 하느라 경제 및 금융시장 변화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반면 은퇴와 함께 수입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은 조급하고 귀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황이다. 이런 틈새를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기꾼 자녀가 퇴직금이나 목돈이 생긴 순간 ‘내 돈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설마 내가 사기를 당하랴 하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실제로 사기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금융사기를 당한 사람의 비율이 40~50대의 3.5%에서 60대로 가면 5.7%로 높아지고 있다. 5.7%면 조사대상자 20명 중 1명 이상이 사기를 당한 것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또한 금융사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비율도 40~50대는 20% 안팎이지만 60대는 27.3%로 높아진다. 60대는 10명 중 3명이 금융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다는 것이니까 누구나 사기를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융사기로 입은 피해 금액도 만만치 않다. 30대는 1900만원, 40대는 2328만원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피 같은 내 돈이라고 생각해보라. 특히 50대로 가면 9038만원으로 피해 금액이 급증하고, 60대도 5464만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50대의 피해규모가 가장 큰 것은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이 정의한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 중 첫 번째로 언급한 ‘50대 후반의 기혼자’와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53~54세이므로 50대들이 퇴직금을 포함한 목돈을 들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50대에게 9038만원이 얼마나 큰돈인가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201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순자산(총자산-부채)은 3억4363만원이다. 이 중 9038만원을 사기 당했다면 순자산의 26.3%에 해당하는 돈이다. 내 노후에 1억원이 더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생각해 보면 1억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잘 가늠할 수 있다.
한두 번 사기를 당하고 나면 세상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액수가 노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정도라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돈과 사람에게 속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기회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로또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예금금리가 1%대인데 누가 6~7%대의 투자 수익률, 그것도 확정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사기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6%의 확정 수익률이 가능하다면 은행에서 3%로 대출을 받아 투자하면 3%의 수익이 그냥 떨어지는 장사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쉽고 안전하면서도 많은 수익이 남는 장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순서가 오겠는가?
그렇다고 금리 1%대의 은행예금에만 돈을 넣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투자를 하더라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결정을 늦춰야 한다. 사기꾼들은 통상 희소가치를 들먹이는 동시에 특별히 당신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재촉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꾼들은 엇비슷한 수법을 모방해서 우려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비슷한 수법에 사기당한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로 당신의 과거와 이력을 부추길 때 발을 빼야 한다. 전문 사기꾼일수록 왜 하필 나일까에 대한 대답을 미리 다 준비해 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도 이미 투자하고 있다고 할 때 의심의 눈초리를 더 세워야 한다. 유명 인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팔리고 있기가 십상이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투자액은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기 당하지 않는 다른 대비는 경제와 금융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주식이나 펀드에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 정도 투자해 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너무 많은 돈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여유분 중 일부를 넣어두고 말 그대로 여유만만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한 회사는 물론 그 회사가 속한 업종에 더해 경제동향과 전망, 뉴욕증시 등도 살펴봐야 할 과녁 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를 위해 평소 신문이나 인터넷의 경제면을 꼼꼼히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만 세워도 절반 이상은 성공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써먹은 명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안다.” 금융사기는 일단 당하고 나면 돈도 친구도 잃고 남는 것은 실망과 후회, 노후빈곤뿐이다. 금융사기든 창업사기든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자 최상의 방책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