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80세 생일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당신이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훌륭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물론 나의 가정입니다.”
인류의 과학사에 남긴 공적으로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폴란드 태생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도 가정, 가족관계가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실버 라이프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가정, 특히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후에 아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남성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결혼 생활 20년이 지난 뒤에 하는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결혼해서 30년이 넘은 부부의 이혼건수가 2004년에 4600여 건, 2009년에 7200여 건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1만300여 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헌상은 ‘남은 인생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버 세대 여성들의 독립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 즉 확실한 ‘현금출납기’의 역할만으로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의 육아, 진학, 결혼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의 모든 일들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과 남성 중심 교육의 결과로 대다수의 아내들은 그것을 당연히,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부부들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한, 부부간의 대화와 소통 없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동거인 비슷한 생활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졸지에 ‘현금인출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부가 집안에서 얼굴을 맞대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상 역전, 혹은 갈등 증폭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평생을 가장으로 군림해 온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외롭고 허전하고, 때로는 상당 기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 공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내인데, 정작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아내는 그런 남편들의 언덕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아내들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무기로 삼고, 가정의 문제를 등한시해온 긴 세월동안,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기만의 성벽을 굳건하게 쌓아 왔습니다.
그러니 현금인출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잃어버린 남편이 그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의 상태가 돼버린 것이지요.
아내 역시 이성적으로는 남편이 안됐다거나,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세워진 심리적 장벽은 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것이 돼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은퇴하여 집에 박혀 있는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는 여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s’ Syndroms)’이라는 생소한 정신질환까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부부간의 갈등이 발전하여 급기야 황혼이혼의 폭발적 증가라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된 것입니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편들의 그 이후의 삶은 거의 오아시스조차 말라 버린 사막에서의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노후에 벌어지는 부부갈등의 경우 자식조차도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였을 뿐, 아버지와 따스한 인간적 교감을 나눠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남성의 경우는 배우자 없는 혼자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편들은 평생 동안 직장생활 말고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고 행복한 노후의 필수 조건인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은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편들이 스스로 현금지급기 역할을 넘어서는, 아내가, 그리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다기능설비(multi-functional equipment)가 되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의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소위 3D 업종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 교육, 진학, 결혼 등의 일들이 결코 아내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공동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도 노후에 남편을 위해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은퇴한 이후로도 상대적으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제가 그런 일들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평소의 저의 그런 자세와 노력을 인정하고 평가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평상시부터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상시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주말의 취미생활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평상시 주말에 골프 치는 노력과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아내를 위해 할애한다면, 노후에 아내가 남편을 배려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요컨대, 갑자기 늘어난, 두 사람이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함께 시간 보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내를 곁에 잡아 두고, 변함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해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내가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상태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면, 무엇보다 아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아내의 독자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조만간 황혼이혼 통보서를 받아 들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버 세대 남성들이여!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라는 실버 보험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송재호의 너스레는 결코 너스레가 아닌, 100%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삽시다.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은 몇 가지나 될까? 고통으로 몸서리치던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닌 인생의 한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실패와 우여곡절로 다듬어진 조각들이 모여야만 인생의 큰 지도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高美淑·56)씨다. 그녀는 중년 이후 삶의 여정에 는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그녀는 를 리라이팅하며 를 다시 봤다. 그전까지만 해도 는 만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만화처럼 재미있는 이야기 속에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이 왜 이렇게 긴 여행을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문제가 담겨 있다는 것은 중년 이후 정독(精讀)하면서 알게 됐다.
“기본적으로 남녀노소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인데, 거기에 그동안 생각해온 철학적 사유나 구원의 문제 등이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최고였어요. 아마 젊은 친구들이 읽으면 손오공이나 요괴 등의 캐릭터에 집중할 것 같아요. 하지만 중·장년이 읽으면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대비해 굉장히 많은 인식의 지도를 만들어 낼 수 있죠. 막상 이런 장편을 읽으라고 하면 중·장년은 ‘내가 책을 놓은 지 오래됐어’, ‘한동안 공부를 안 했는데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앞서지만 는 정말 쉽거든요. 심오하거나 고상한 것 없이 나를 아주 편안하게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 주는 책이죠.”
인생의 안전띠 ‘고난’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14년간 10만8000리를 걸으며 총 81가지 난(難)과 마주한다. 이들은 108 요괴와 대적하며 구법과 구원을 위해 천축(天竺, 인도)으로 향한다. 위험천만한 고비가 많지만, 고난과 실패 없이 사는 삶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젊어서는 성공과 에로스를 향해 달려가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아요. 그러고는 나중에 ‘앞만 보고 달려왔어. 이제 나는 뭐하지?’라고 생각하면 인생은 허무할 뿐이죠. 오히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게 다행이에요. 그러면 걸려 넘어질 테고, 더 달려가지 못하잖아요. 그게 결국 날 구하는 것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야 알아요. 젊을 때는 걸려 넘어지면 ‘나만 왜 이래?’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사람은 다 그래’라고 이해하죠. 그때부터 진정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요.”
81난을 겪어야만 탐진치(貪瞋癡, 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덜어낼 수 있다는 의 내용처럼, 인간은 자랑스러운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살면서 몇 가지 난을 겪었느냐”고 종종 묻는다. 대부분 대답을 들어보면 몇 가지 꼽지 못한다고. 그런 그녀는 그동안 몇 가지의 난을 겪었을까?
“굉장히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요. 현대인이 흔히 말하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고루 겪으며 살았죠. 그런데 나중에 고전을 공부하면서 ‘과연 그런 것들을 안 겪는 게 더 좋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돌아보니 내가 겪은 것들이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거예요. 물론 당시에는 그런 고난이 날 너무 무겁고 힘들게 했죠. ‘내가 이렇게 힘들었는데 너희가 뭘 알아?’라는 식으로 주변 사람을 폭력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고요. 그런데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런 환경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가둬두고 있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자발적으로 고난에 뛰어들면 구법의 여행이 될 수 있지만, 끌려다니면 상처가 된다는 것을요.”
결국 과거 고난은 있었지만,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난은 없는 셈이었다. 그녀는 고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약자가 되어 트라우마라는 착각을 핑계거리 삼는다고 지적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강하려고 온 게 아니라 생고생을 자처해서 온 것이라 생각해요. 그것을 즐기는 거죠. 갖은 고생을 해서 한고비를 넘겼을 때만큼 뿌듯한 것도 없잖아요. 고난을 통해 내가 변한다고 느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실패는 두렵지 않아요. 기꺼이 대응할 수 있죠.”
인생의 가을, 청춘으로부터의 해방
그녀는 중년을 가을이라 표현한다. 인생의 봄, 여름을 지나 겨울을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만큼 삶 전체를 아우르는 힘이 생기는 시기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년에는 자기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 해요. 젊어서는 경제적인 자립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을 배워도 기술적인 것이나, 전문적인 것에 치중하죠. 중년이 되면, 스펙이나 진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단기적인 목표도 아니죠.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찰력, 그것을 걸고 공부해야죠. 그런 공부 없이는 노년을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술이나 쾌락에 빠질 테고요. 그런 것을 뛰어넘으려면 진리와 접속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진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끊임없는 질문과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질문은 저절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을 자꾸 회피하죠. 청춘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도망가려 해요. ‘내 청춘은 어디로 갔나’라고 탄식하며 말이죠. 가을이 됐는데 봄을 모방하는 것은 가을의 정취를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지금 보면 봄이 썩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았어요. 저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 1위가 20대예요.”
하지만 인생의 봄으로 가고자 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터. 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닐지 의아했다. 이러한 물음에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착각이라 생각해요. 지금의 경제력이나 명성, 능력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돌아갈 만하겠죠.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노하우에 몸은 젊으니까요. 나는 젊은 시절의 무능한 상태가 싫었어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죠.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많고 세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잖아요. 이게 좋은 것 아닙니까? 폐경기가 되면 또 어때요. 나는 여자다울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면에서 자유롭잖아요. 어려서는 얼굴에 점 하나도 큰 고민거리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자잘한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잖아요. 그게 바로 청춘으로부터의 해방이라 할 수 있죠.”
진정한 노후대책은 ‘유머’를 갖는 것
에는 81난이 나오지만, 상황이나 인물의 행동 등은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 단순히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와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의 매력이다. 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유머를 겸비해야만 지혜로운 노인이 될 수 있고, 세대 간 소통도 원활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노인은 지혜롭죠.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에 유머가 없으면 바로 설교가 돼버려요. 정말 옳은 말인데 듣기가 싫은 거죠. 그게 세대 갈등의 포커스예요. 노인은 정말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겪은 분들이잖아요. 하지만 그 경험들을 이야기할 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필요해요. ‘너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노년세대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태도로 전달하면 소통의 벽이 생겨요.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대화를 못 하면 혼자 떠돌아 다녀야 하는데. 돈에 대한 설계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대화하는 방법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제시한 노후대책은 한 가지 더 있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라는 것. 그리고 오늘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100세 시대가 되고, 대부분 중·장년이 30년 뒤를 생각하며 부담을 느끼죠. 하지만 그럴수록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해요.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억울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를 굉장히 집중해서 살 수 있어요. 앞으로 100세까지 뭘 하고 사느냐를 걱정하는 것은 내 삶을 유예시키는 것에 불과해요. 살아 있는 한은 죽음을 이해할 수 없어요. 죽으면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또 언젠가 그날이 온다 해도 현재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고민은 도움이 되지 않죠.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오롯이 살기 위한 것이에요. 거기에만 소용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진정한 노후대책 아닐까요?”
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의 노인인구 비중이 20%를 넘어서면 초고령사회라고 부른다. 일본은 이미 2005년 초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일본은 지난해 80세 이상 인구가 총 1002만명으로 1000만명을 돌파했다.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총 3384만명으로 전체 인구 1억 2683만명의 26.7%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는 줄고 노인 복지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는 가운데, 늘어난 수명만큼 연장된 삶을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에서 흔히 쓰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의 뜻과 함께 이들 세대가 갖춰야 하는 요소, 그리고 필요 항목들을 살펴 보자.
1. 액티브 시니어란?
먼저 일반 사단법인 일본액티브시니어협회(www.nihon-asa.org)의 정의에 따르면, 액티브 시니어란 65~75세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정년퇴직 후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노인으로 취급하기에는 좀 이른 세대를 말한다.주위를 둘러보면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동적이고 의욕 넘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의 베이비부머 세대와 비슷한 1946~1949년에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이른바 ‘단카이 세대(団塊世代)’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대체로 단카이 세대의 특징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그 특징은 평생 현역을 지향하며, 활기차고 일과 취미에도 의욕적이고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라이브 스타일 등을 갖고 소비 의욕도 높다.
지난해 일본 전체에서 취업 상태로 등록된 노인은 681만명으로 11년 연속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65~69세 남성 가운데 50.5%, 여성 가운데 30.5%가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65세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살려 일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생계를 위한 취업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65세 이후에도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세대임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이 새로운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아마도 ‘나이 먹음’ 혹은 ‘늙음’의 일반적인 상식을 깨거나 뒤집는 당당한 세대가 될 것이다.
2. 액티브 시니어 세대에게 요구되는 다섯 가지
앞서 밝힌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는 액티브 시니어 세대라고 불리는 것이 곧바로 은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은퇴라는 이미지는 이미 구시대의 산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액티브 시니어 세대에게 요구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1) 건강한 몸
먼저 몸의 건강,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언제까지나 튼튼한 몸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일하는 노인이 아니더라도 친구와 가족 등 주위 사람들과 쇼핑을 하거나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립해 자유로운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다면 65~75세의 10년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건강한 몸은 자신의 이로 맛있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자신의 발로 가고 싶은 곳을 찾아 즐기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서 노후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생활력까지 포함한다고 하겠다.
2) 마음의 건강
건강한 몸은 유지하고 있어도 마음이 늙으면 안 된다. 어렵게 손에 넣은 여유있는 자유로운 시간에 뭐든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일에 쫓기고 자식들 키우느라 바삐 살아온 끝에 겨우 얻은 자유 시간이므로 여러 분야와 많은 것에 흥미를 갖고 즐겁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65년 이상 살아온 삶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이 주는 여유를 맘껏 이용해 젊은 세대보다 몇 배 더 유용하게 즐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3) 자기 관리·자립
‘너무 힘이 넘쳐 버려 곧잘 벽에 부딪힌다’ ‘너무 참다 보니 몸이 안 좋은 날이 많다’와 같은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몸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상처와 병 치료에 시간이 그만큼 더 걸리며, 그 사이 근력도 떨어지고 만다. 또한, 인간의 면역력은 20~30대를 절정기로 저하된다고 하는데, 따라서 몸이 안 좋은 날이 이어지거나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육체에 대한 고민도 늘기 마련이다.
자신의 몸에 대해 과신도 맹신도 하지 말고, 수시로 점검하면서 그때그때 적절한 조치로 건강 유지에 각별한 신경을 쓰도록 하자. 젊었을 때처럼 웃어넘길 수 없는 경우도 많으니 현재 자신의 몸을 제대로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4) 센스
앞서 세 가지만 충족해도 충분하겠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한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센스를 꼽을 수 있다.
사실 이 부분 역시 앞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부분이다. ‘예쁘게 나이를 먹다, 곱게 나이가 들다, 나이에 어울리게 늙었다’ 등의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도 바로 센스의 부분이다.
거창한 멋이 아닌 허리를 쭉 펴고 걸음걸이도 당당한 자세, 요즘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한 걸그룹의 이름과 노래로 화제를 이끌어갈 수 있는 감각, 가방 하나와 커피 한 잔에서도 품격 있는 라이프 등등. 이는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상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취미와 스타일에서도 자기만의 고집이 있는 센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센스는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꾸로 몸과 마음이 적응하고 변하는 재미도 더욱 새로울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꼭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5) 풍부한 경험의 공유
끝으로 풍부한 경험에서 얻은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가 된 자녀가 큰일을 결정해야 할 때 주위의 조언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때 풍부한 경험에서 얻은 견해는 참으로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한창 일할 나이의 후배들일지 모르지만 역시 선배의 경험에서 얻은 감각이라는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보물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에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머리를 자주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치매 예방에도 좋지만, 주위와의 소통을 통해 고독한 노후와 외로운 최후를 예방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풍부한 경험을 갖고서 적극적으로 사회와 교류하는 자세가 어느 세대보다도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액티브 시니어가 되기 위한 세 항목
1) 몸 만들기를 게을리 말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몸은 따라주지 않고 마음만으로는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일이 갈수록 더욱 늘어나기 마련이다. 역시 액티브한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움직일 수 있는 몸, 즉 건강이다. 그 키워드는 바로 식사와 운동이다.
① 식사 흔히들 인간의 몸은 음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그만큼 식사는 건강한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요 요소이다. 따라서 식사에 신경을 쓰면서 활력이 넘치는 삶을 만끽하자.
몸의 움직임을 돕는 성분은 보통 식사로는 충분한 양을 섭취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타민제 혹은 영양제 등의 건강 보조식품을 통해 섭취해야 한다.
② 운동 식사를 조심하면서 동시에 근육량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근육량은 연령을 더할수록 줄어드는 경향이 있으니 되도록 줄지 않도록 꾸준히 단련할 필요가 있다. 단련이라고 하지만 갑자기 격렬한 운동을 할 필요는 없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라는 것을 만들어 가벼운 체조와 스트레칭을 한다거나 보폭을 넓혀 빠르게 걷기, 계단 사용하기, 평소보다 좀 떨어진 슈퍼마켓에 가기 등 ‘지금보다 플러스 10분 운동’이 생활 속에 자리 잡도록 권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1일 40분 이상 몸을 움직이는 것이 목표이다. (64세 이하는 60분)
거창한 운동 목표나 과도한 운동은 도리어 몸에 부담을 주기 때문에 평소 생활에서 몸 움직이기에 10분을 더해 꾸준히 단련시켜 주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미 체력과 근력이 떨어진 경우에는 실내에서 할 수 있는 가벼운 스쿼트나 한 쪽 다리 들고 서기 등 운동 요소를 생활 습관 속에 넣어서 적극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공익재단법인 일본정형외과학회는 ‘언제까지나 자신의 발로 걷기 위해(로코트레)’라는 생활 속 트레이닝 방법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힘쓰고 있다.
2) 취미를 가져라
사실 액티브 시니어의 정의를 찾아보면 반드시 ‘취미와 일에 의욕적’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액티브의 상징이라고 해도 좋겠다. 여행과 산길 걷기 등 외출도 좋고, 노래방과 예술감상 등 실내에서 즐기는 취미라도 관계없다. 물론 봉사활동 등 사회와 소통하는 적극적인 활동도 괜찮다. 꼭 취미를 갖도록 하자.
취미를 가지면 취미를 통해 생기는 교류 등이 뇌를 자극해 뇌의 활성화에도 좋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따라서 취미로 삶을 더욱 풍부하게 즐기는 노후, 이는 몸과 마음의 건강으로 이어지며, 결국 건강한 삶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3) 유행에 민감하자
앞서 말했듯이 유행에 민감한 것은 액티브 시니어의 필수 조건이다. 젊었을 때부터 일본의 소비사회를 이끌어 온 지금의 액티브 시니어 세대는 유행에 민감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정년 퇴직을 해도 여전히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독자적인 가치관을 가지면서도 유행에도 통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시니어는 새로운 것에 둔감하고 생각도 고리타분하다는 상식을 뒤엎는 것, 이게 바로 지금의 액티브 시니어 세대가 갖춰야 할 요소 중의 하나이다. 머리를 쓰는 동시에 감각을 잃지 않는 것, 현재와 소통하는 의욕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왜 필요한지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자리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풍부하고 건강한 삶의 또 다른 얼굴임을 실감할 것이다.
4. 40대부터 준비하라
40대 50대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이때부터 대책 마련을 시작해야 한다. 너무 이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너무 빠른 것은 아니다. 인간의 근육량은 40세 전후부터 서서히 감소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40대부터 영양에 신경쓰고 운동 부족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
또한 일만 해서 감성을 자극하지 않는 상태도 뇌의 활성화라는 관점에서는 좋지 않다고 한다. 취미를 갖고 유행도 체크하도록 하자. 어렵게 여유있는 시간을 손에 넣어도 머리와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없다면 액티브 시니어가 될 수 없다.
건강하고 밝은 미래를 누리기 위해서 일찌감치 대책 마련에 나서고 조금씩 실천에 옮기면서 ‘액티브 시니어 세대’를 설레며 맞이하자.
어느 날, 남대문 시장 노점에서 메뚜기 설 볶아놓은 것을 한 대접 사왔다. 위생처리 겸 프라이팬에 다시 한 번 더 볶은 후 맛있게 집어먹고 있을 때, 퇴근하여 거실로 들어서던 며느리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어머니… 어떻게 그것을, 잡수세요?”
“먹어봐라, 고소하다! 아, 이제야 메뚜기 솟증[素症]을 풀었다!”
노릿노릿 잘 볶아진 메뚜기 두세 마리를 집어건네자 며느리는 뒷걸음질을 치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웃었다. 물방개와 잠자리 여치를 잡아 구워먹은 옛이야기를 하면 꾸며낸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무논과 수초 많은 개울이나 못[池] 가장자리에서 우렁이와 개구리를 잡아먹었다면 그런 곳(무논 등)이 어디 있느냐며 과장하여 표현하는 줄 안다.
산속 계곡 물속에서 다슬기와 가재를 잡아먹었다면 그 정도는 믿어준다. 산행하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란다. 특히 참새 개구리 잠자리 물방개를 잡아 구워먹고 구운 물방개의 살찐 뱃대지가 입안에서 툭 터질 때의 쾌감이 좋았다고 하면 “아, 어머니 몬도가네!”라고 한다.
그렇다. 며느리는 나를 몬도가네 버금가는 못말리는 여사로 알고 있다. 김장배추도 푸른 잎이 많이 달린 뻣뻣하고 못생긴 야생 배추를 쭉쭉 찢어먹기 좋아하고, 썰어서 버리는 배추김치 대가리조차 와삭와삭 씹어먹는 나에게 더러는 연민의 눈초리도 보낸다. 뿐인가, 보리쌀을 두 번 삶은 순 꽁보리밥과 누런 다시멸치 몇 마리 넣은 멀건 된장국 만으로 식사하길 좋아하고, 찬밥 물에 말아 새우젓 한 가지로 혹은 된장에 박은 고추장아찌 두세 개로 한끼를 때우곤 “아 잘먹었다!” 만족한 낯빛의 나를 더러는 멸시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가마솥 가득한 보리밥을 보며
가난에 절어서 먹을 음식 같지 않은 조야한 것들로 목숨을 연명해온 당신의 성장과정이, 또한 그때로부터 수십년을 더 살고도 그것을 잊지 못해 즐기는 당신의 지금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고 불쌍하여 눈물을 머금기도 한다.
그럴 것이다. 수십년을 지나고도 상기도 그때의 입맛이 뇌리와 심층 켜켜에 박혀, 그렇게 양육된 살과 뼈와 피가 영혼까지 흡수하여 향수(鄕愁)라는 미명으로 그립고 그리워 찾게 되는, 그 즈음의 먹거리며 하늘이며 바람이며 공기며 사람냄새 풍기던 촌스럽고 순박하던 인심이며, 그것은 진득한 사랑이며 아픔이었다.
1950~60년대는 모두가 가난할 때였지만 농촌은 더욱 가난했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삶 속에서도 여자들은 더욱 바닥 대접을 받았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대가족으로 가마솥 가득 보리밥을 지으면 가운데 한움큼 얹은 쌀은 보리쌀과 섞어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 할머니 순서로 밥을 담고, 나머지는 전부 보리밥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들 차지였다. 보리밥뿐만 아니라 나물밥 무밥 고구마밥 등으로 곡식을 아끼기도 했지만, 그나마 여자들에게는 별미이기도 했다.
당시의 김장밭 배추는 비료나 속성 영양분을 주지 않아 푸르고 질기고 가운데만 노란 속잎 이 조금 차 있었는데(지금은 푸른 잎이 거의 없지만) 노란 부위는 어른들 상에 썰어놓고 푸르고 억센 겉잎과 대가리는 여자들 차지였다. 갈치나 고등어를 굽거나 졸이면 살은 전부 어른 상이고 여자들은 대가리와 꼬리부분, 닭 백숙을 하면 껍질과 국물 정도 맛보는 형편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막내라 어른 상이 물려지면 남은 반찬을 제일 먼저 차지하는 특혜를 누렸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섭취했던 음식은 그야말로 현대에 와선 웰빙식이나 다름없다. 비료나 속성 영양제를 주어 성숙시킨 인공식품이 아니라 천연의 햇살과 바람과 흙이 키워낸 ‘자연식’ 그대로였다. 사람들의 인성도 우직스러웠지만 대체적으로 순수하고 소박했으며 교활하거나 사기치는 사람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서 젊은이들은 다이어트 식품 섭취와 자기관리에 혈안이 되어 영양실조로 비틀거리는 웃지못할 현상이 일어나고, 오히려 못살 때 먹던 ‘자연식’을 찾는다. 자연식을 찾아 귀촌하는 사람도 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현상인가.
금쪽이야 보물이야 품던 ‘아들’들이 TV에서 걸핏하면 고만한 여성에게서 뺨을 맞고, 하이힐에 무릎이 차이는 수난과, 설거지며 아기 키우기에 비지땀을 닦고 있음을 본다. 장모 눈치 아내 눈치 살피기로 눈동자는 연일 충혈되어 있고, 사나이다운 기개는 어디에도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과연 저 남자들이 이 나라를 지켜줄 수 있을까 심히 불안해진다.
남녀 성의 특징은 유전자부터 너무나 다르다. 특성이 그 성의 적성이라면 각각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거늘, 여자 남자 특성이 뒤죽박죽 혼성되어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다.
당시, 딸들이라고 남자들에게 당하고 살지만은 않았다. 열 두세 살부터 열 대여섯 살까지 동네 여식들은 밤마다 수틀을 들고 어른 출타중인 동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시집갈 준비로 신부의 필수 혼수인 베갯잇을 수놓아 만들고 횃대보와 상(床)보도 십자수를 놓고, 버선을 수십짝 만드는 등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고 수를 놓았다. 재잘재잘 수다도 떨었다. 그러면서 사흘이 멀다하고 공동야식도 했다. 모두가 각자 집에서 쌀 두세홉, 배추김치 한 쪽씩을 훔쳐와 모두어 밥을 지었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노란 속 김치를 쭉쭉 찢어 걸쳐서 한입 가득 우겨넣고 씹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만 먹는 흰 쌀밥과 노란 속 배추김치를 그릇 수북히 담아 원을 풀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햐얀 쌀밥은 입안에서 제대로 씹히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부드럽고 노란 배추속잎은 시퍼렇고 질긴 배추잎에 길든 이빨을 간지럽혔다.
어떤 동무는 자기 집 닭서리를 유도하여 닭백숙을 만들어 영양 결핍의 여식들 몸뚱이에 기름을 넣기도 했고, 더러는 집에서 담근 밀주를 퍼내와 마른 명태를 찢어 음주도 즐겼었다.
황혼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감히 집 곡식을 훔쳐와 이렇듯 야식을 즐길 수 있는 여자들은 그나마 딸자식들이었다. 며느리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행위들이었다. 딸자식은 부모에게 들켜도 나무람을 듣는 정도로 끝났지만 며느리들은 심하면 쫓겨나거나 좀 더 엄한 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졌다. 숙녀가 신사의 빰을치는 것이 예사로운 세상이 된 것 이상으로 늙은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공경심 따위는 진작에 없어져 기대도 않는다지만, 일 나가는 며느리가 살림 사는 시부모 부려대는 모습에는 한숨이 절로 터진다.
세상이 미친년 널뛰듯 뒤집어져 버린 것을 어찌하느냐고 많은 어른들이 포기하는 척 이해하는 척 말들도 하지만, 삿대질에 거친 말 거침없이 내뱉는 젊은이의 눈앞 폭력이 두렵다 해도, 또한 그 며느리에 의지하여 밥을 먹는 상황이라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린 당신의 모습은 처량하다. 스스로 만들어낸 푸대접이며 상황설정이라는 생각이다.
황혼녘의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는 가장 소중한 재산은 오로지 ‘시간’뿐임을 누구나 다 알면서 그 시간을 온통 빼앗기고 사는,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착취 희생을 즐기며 자위하는 어른들도 많다니, 각각의 마음을 누가 어쩌겠는가.
누구나 인생은 한 번뿐이며,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유일한 내 재산인 ‘시간’은 천금 만금보다 더 윗자리의 소중한 것이거늘, 진정 나를 위해 그 시간을 보듬고 살고 있는지 열 번 스무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최근 ‘존엄한 죽음’을 위한 법이 통과되었다.
회복되지 못할 말기암 환자나 다른 위중한 병으로 회생불능의 상태임을 의사가 진단하면,더 이상 숨이 붙어 있게 연명치료를 하지 않아도 불법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전 법은 회생불능의 환자라 해도 온갖 생명 연장 장치를 환자에게 설치하여 숨이 끊어지는 시간을 늦추거나 기적처럼 회복도 시키는 의료법을 의사들이 강행했지만(그러지 않았을 경우 의사는 살인죄로 제소될 수도 있으므로),이제는 환자가 입원 당시에 승낙을 하지 않아도 가족들로 인해 생명 연장 장치를 거두어 버리거나 아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이다.
물론 옛날에도, 현재도 우리 풍습에 ‘객사시키지 않는다’며 가망이 없다는 환자를 가족들이 퇴원시켜 집으로 옮겨가는 경우는 있었다.그리고 실제 종합병원 등에서는 법이 통과되기 이전부터 내부적으로 행하여지고 있었다.대개 가족들이 금전적인 이유로 혹은 환자의 원함으로 이루어지고는 있었지만, 이제 그것이 정식으로 합법화된 것이다.
살아나지 못할 환자인데 온몸에 주저리 주저리 생명줄을(인공호흡기등) 시설하여 고통을 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인 듯싶지만(그러한 부분도 없지 않다),여기에는 의도적인 많은 위험한 요소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세상에 죽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죽을 시간의 장단(길고 짧음)이 있을 뿐 모두 죽지만, 상호간(가족관계등)의 이해관계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충분히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일한 ‘내 자산’은 ‘내 시간’ 이다
몸이 건강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죽을 병이면 생명 연장 시설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병원에 입원케 되면 백명의 환자 모두가 ”어떤 방법으로든 살려달라“고 의사에게 매달린다고 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현실이라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밝혀둠이 어른들이 갖춰야 할 순서이다. 본인의 의사가 없으면 가족들이 각각의 의견을 내놓는 살벌한 분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연명’ 시설을 말자 하고 둘째아들은 ‘시설을 하자’는 상반된 의견으로 내 목숨이 자식 손에 달려 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그들에게 상처를 안겨주게도 된다.
정부도 그렇다. 이런 엄숙하고 중대한 법을 합법화시키려면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정리하면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시설이 우선 만들어져 병행되어야 하고, 문제화될 수 있는 부분을 의혹이 없도록 규정을 마련해야 되겠지만,어쨌거나 가장 먼저 법시행을 맞이하는 당사자는 바로 우리 어르신(노안)들이다.
오로지 유일하게 내 재산인 앞으로의 내 ‘시간’을,즐길 일이고 아낄 일이다.당당하게 변한 세상과 맞서면서 소리도 질러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하고 싶은 일을 세상 눈치 볼 것 없이 즐길 일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떠난 후의 남은 사람 걱정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이제는 오로지 나만 위해 살아야, 후회없이 쉽게 미소 머금으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지 않겠는가.
100세 시대, 치매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청객과도 같다. 이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맞았을 때는 누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지게 된다. 20여 년간 수많은 환자를 진료해온 킴스패밀리의원·한의원 김철수(金哲秀·62) 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장모의 치매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김 원장은 “나는 치매랑 친구로 산다”고 말한다. 노년의 불청객인 치매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맞이할 수 있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9년 어느 날 장모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휴대전화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장모가 아닌 한 남성이었다. “할머니께서 집을 못 찾으시네요.” 깜짝 놀란 김 원장은 곧장 서울아산병원으로 장모를 모시고 갔다. 검사 결과, 치매 초기라는 것.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노안을 너무 과하게 진단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장모의 치매를 바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평소 단정하시고 영민하신 장모님이었기 때문에 더욱 갑작스럽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정도가 심하지 않아 약을 타서 드시게 하고 이전과 똑같은 일상을 지내시도록 했죠. 이후로는 아내가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했고 저도 자주 인사드렸어요. 그렇게 한동안은 조금씩 불안해도 평범한 생활을 하실 수 있었죠.”
자존심과 자립심이 강했던 장모는 바쁜 자식들이 행여 마음이라도 쓸까 봐 스스로 조심하며 조용히 잘 지내셨다. 이러한 생활은 치매 진단 후 3년 정도까지 가능했다. 2012년 초봄, 장모의 증세가 심상치 않아졌음을 느꼈다. 매주 찾아뵀는데도 “왜 요즘은 얼굴을 안 보이느냐”며 역정을 내시는 모습은 낯설게만 보였다. 깔끔했던 집안 곳곳은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정성스레 키운 화분들은 메말라갔다.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아찔함에 몸서리칠 시간도 잠시, 집중적인 간병계획이 필요했다.
치매,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병
치매 증상이 심해진 장모와 한집에서 지내면서 갈등은 하나둘씩 생겨났다. 집에 보내달라며 화를 내고, 불안해하는 장모를 위해 김 원장 부부는 자신들이 쓰던 안방을 내어 드렸다. 내 집으로 편하게 생각하시고 가족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가족들은 조금씩은 불편했지만 그런 생활에 적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장모도 마찬가지였다.
“온전한 어머니라도 갑자기 딸의 집에 와서 지내려면 불편할 것 아녜요. 그런데 늙고 치매에 걸린 장모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와 적응은 시련 그 자체였겠죠. 몇 가지 인지능력이 떨어졌을 뿐, 당신의 자존심이나 가치관 등은 정상이라 느끼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늘 미안해하셨어요. 그래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시며 그런 마음을 덜어보려 하셨는데 그게 갈등의 불씨가 되어버렸죠.”
인지능력이 떨어진 장모가 설거지해놓은 그릇은 제대로 헹궈지지 않아 끈적거렸고, 음식물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가 뒤섞여 집 안에는 하루살이가 날아다녔다. 집안일을 절대 하지 마시라 해도 소용이 없었다. 틈만 나면 설거지에 집착해 부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통에 아내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모녀의 마찰은 점점 거세졌고 급기야 장모가 울고불고하며 감정이 격해졌다.
“치매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이 설거지를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행동을 했을 때 갈등이 생기니 서운한 마음이 생기고 감정 컨트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아내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요. 치매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정상이었던 과거 모습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런 변화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죠.”
김 원장은 장모의 행동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속상해하는 아내를 보며, 치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급선무라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라면 실수를 하더라도 쉽게 이해할 일을 어른인 치매 환자에게는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는 치매 환자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눈높이에서 상황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 이것도 못하지?’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 이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정상적이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하기보다는 치매 환자니까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무언가를 해냈을 때 감탄하는 쪽으로 바꿔 나가야죠. 그렇게 되면 아이가 하나둘씩 해나갈 때의 기쁨처럼, 치매 환자가 스스로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에 감사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될 때 가족도, 환자도 편안해질 수 있고요.”
환자의 스트레스가 완화될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주면서 반복적으로 상황을 리마인드시키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설거지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면서, 빨래를 개거나 파를 다듬는 등 비교적 단순한 일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들은 치매환자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끔 도움을 준다.
장모 덕분에 친해진 치매라는 친구
그 이름도 ‘굳세어라’ 장금순(85)인 장모는 평생을 굳세게, 활동적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장모가 꼼짝없이 집에서만 있게 됐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장모는 매일 안부 전화를 했던 아들에게 당신 집으로 보내달라며 떼를 쓰곤 하셨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아내는 어머니의 집을 처분해 단념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들과 딸의 설득 끝에 어머니는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집을 내려놓기로 했다. 마음은 먹었지만, 크나큰 아쉬움과 존재감 상실로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실신까지 하며 힘겹게 집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지 않으시도록 계속해서 설명하고 위로해 드렸죠. 하지만 이해를 못 하고 저에게 아내가 집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심지어 집을 빼앗겼다고까지 생각하셨어요. 우리 부모세대는 특히 집에 대한 애착이 강한데, 의식이 멀쩡한 상태라면 모를까 치매로 판단력이 흐려진 뒤에는 집착만이 남을 수 밖에요.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집을 팔고 난 돈을 넣어둔 통장을 펼쳐 보여드리며 이 돈으로 여생을 건강하게 사실 수 있도록 약속드린다고 거듭 말씀드렸어요. 한 달 정도 지나 안정을 찾으셨죠.”
현실적으로 치매 환자의 경우 집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탓에 김 원장의 아내는 일찍이 어머니의 도장, 통장, 보험, 부동산 서류 등을 공동 관리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 공동 재산관리에 대해 운을 떼기는 쉽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장모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이러한 상황 등으로 자칫 오해로 번져 간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김 원장의 가족은 치매 덕분에 가족애가 더 끈끈해진 계기가 됐다.
“지방에서 사는 처남도 평소보다 자주 올라와 이전보다 가족끼리 대화하고 마주할 일이 많아졌어요. 특히 우리 부부가 장모님에게 하는 행동을 보고 두 아들이 어른을 대하고 효를 실천하는 방법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됐죠. 아내와 저도 20~30년 후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치매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인생을 더욱 신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요.”
애매한 치매 등급 테스트, 웃지도 울지도 못해
어쩌면 이들 가족이 치매를 안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장모의 예쁜 치매’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흔히들 대소변을 못 가리거나 욕을 하고 호통을 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미운 치매’, 인지기능은 떨어지더라도 전두엽의 손상이 적어 감정 조절이 잘 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우를 ‘예쁜 치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평소 선하고 즐거운 생각을 많이 하는 긍정적 생활이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치매 환자가 밝고 낙천적인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치매 이후에도 늘 긍정적으로 무엇이든 하고자 했던 장모는 학교에 보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건강보험센터에 의뢰하고, 요양원과 보호센터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치매 등급 테스트에서 너무나 정확하고 똑똑히 대답하신 탓에 등급이 애매하게 나와 시설에 보내드리긴 어려웠다. 어머니의 상태가 좋아 다행이지만, 원하는 바를 들어드리지 못해 속상했던 아내는 김 원장에게 “우리가 예쁜 치매 병원을 차리자”는 말까지 하게 됐다.
“예쁜 치매 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제 꿈이기도 해요. 아직은 여건상 당장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죠.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한의학 공부를 해서 한의사가 됐어요. 처음 가정의학과를 전공한 이유도 환자의 질병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서였거든요. 거기에 한의학도 전공하게 됐으니,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죠. 양의학과 한의학의 융합을 통한 진료와 치료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관점에서 치매를 연구하려 해요. 무엇보다 치매 환자를 믿고 편하게 맡길 수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담담히 조언하는 그이지만, 치매를 빠르게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에는 묘안이 없다고 설명한다. 누구나 치매를 인정하긴 어렵고, 적응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치매 가족을 두고 의사로서 치매를 연구한 그의 온기 어린 조언이 치매를 겪게 될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순재, 김형자, 송재호, 김학철 씨 등 실버 연령층에 해당하는 유명 탤런트 네 사람이 등장하는 ㅇㅇ 실버보험 광고를 모르는 분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겁니다.
송재호 :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
김학철 : 하하하! 선배님! 진짜 있어야 되는 게 뭔지 아세요?
김형자 : 당연히 ㅇㅇ 실버보험이지! 없을 땐 몰랐는데 있으니까 당당해지는 거 있지?
송재호 : 맞어! 나도 나이 때문에 걱정 했는데, ㅇㅇ 실버보험은 다르더라고…
김형자 : 그치?
김학철 : 보험료 오른다고 자식들한테 손 벌릴 수는 없잖아요. 이건 그럴 부담이 적어서 가입했어요. 고맙습니다 선배님!
이순재 : 제가 아니라 ㅇㅇ 실버버험에 고마워해야죠?
비단 이 실버보험 광고 뿐만이 아니라 은퇴한 실버 세대를 위한 각종 금융상품 광고를 보노라면 이런 상품들에 가입하는 것이 행복한 실버 라이프를 보장해주는 필요충분 조건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런 금융상품들은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것들이 행복한 노후생활의 본질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실버 세대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노후생활이 행복한 것이기를 염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특정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재테크 정도로 (행복한) 노후가 보장되는 것처럼, 인기 있는 실버 연기자를 등장시키는 광고를 통해 실버 세대들의 쌈짓돈마저 거두어 가려는 건 별로 아름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한 노후생활이란 어떤 것이고, 그런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한 것일까요…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난해에 OECD가 ‘한국인의 행복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56퍼센트가 ‘경제적 여유’ 즉 ‘돈’을 얘기했고, 17퍼센트가 ‘건강’을 얘기했으며, 12퍼센트가 ‘가족관계’를 들었습니다.
한편 60대 이상의 한국인이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동기로 ‘경제적 어려움’이 38퍼센트, ‘건강 및 질병’이 36퍼센트, ‘외로움’이 12퍼센트, 그리고 7퍼센트가 ‘가정불화’로 나타나고 있어, 실버 세대의 행복과 ‘돈’ ‘건강’ ‘가족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 혹은 자살충동의 이유라고 거론하는 돈 문제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돈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답변들을 심층 분석해 보면 ‘돈’ 그 자체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진정한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기 때문에, 혹은 내 욕망에 비해 가진 돈, 혹은 벌어들이는 돈이 훨씬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란 ‘자신이 가진 것을 분자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분모로 하는 숫자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컨트롤하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이 문제에 관해 미국의 철학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더 많이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을 줄이는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습니다.
특정한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건강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가 성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행복한 삶’이란 어떤 구체적 조건이 충족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행복이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오늘’ 혹은 ‘나의 현실’ 속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은 ‘내일’ 혹은 ‘다른 어느 곳’에서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한때 독일 시인 칼 붓세의 ‘산 너머 저쪽’이라는 시가 50년 대와 60년 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남들 따라 나 또한 찾아갔건만,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 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그러나 산 너머 저쪽 어느 하늘 아래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올 수 밖에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의 동화작가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이야기’에서 ‘미치르와 치르치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나서지만 헛고생만 했는데 결국 파랑새는 자기집 처마 밑에 앉아 있었다’ 는 이야기도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에 있다는 걸 암시해 줍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아름다워야 우리들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하루가 행복해야 내일이 행복합니다” 라는 헤르만 헤세(1877~1962)의 말도 행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지금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일이 온다고 하여 행복해질 수 없으며, 어렸을 때 혹은 젊었을 때 불행하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하여 행복해지기는 어럽다는 얘기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즉 노후에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려 놓는 삶’ ‘버리는 삶’의 자세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은 나이 들어가면서 이해력이 넓어지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버의 행복, 즉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려놓는 삶’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과거에 오랜 기간 고위직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대접을 받거나, 이른바 ‘갑질’을 해온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내가 왕년에…’라는 생각을 털어버리지 못하는 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들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자신이 유별나게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 비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마음이 불편하거나 속이 상하는 때가 있어도 늘 ‘내게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행복하다’고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저와 같이 적당히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저는 대략 다섯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배우자라는 존재입니다.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 라는 말이 진리라 할 정도로, 나이 들어 배우자라는 존재는 삶의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자식들과 손주들과의 관계입니다. 한국 사람에게 자식과 손주들과의 관계를 빼고 행복한 삶을 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친구’라는 존재입니다. 노후에 좋은 친구라는 존재는 사막을 걷는 순례자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이지요.
네 번째는 ‘일’입니다. 약간의 용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봉사의 성격을 띤 일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다섯 번째는 건전한 ‘취미생활’입니다. 운동을 겸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면 좋겠고, 배우자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우리가 그러한 환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살 수 있기 위해 미리부터 어떻게 살고 준비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편 끝)
>> 조용경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한 동영상이 있습니다. 독일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에데카(Edeka)의 광고입니다. 이 광고에서 매년 혼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아버지는 자신의 거짓 부고를 자식들에게 보냅니다. 충격과 슬픔 속에 모여든 자식들 앞에 펼쳐진 것은 장례식이 아니라 성탄절 만찬 테이블이었습니다. 놀라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너희 모두를 불러 모을 수 있었겠니?”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보내준 이 동영상을 본 60대 후반의 여성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눌리듯 아픈 그 순간들을 그들이 어찌 알리오? 묻어두고, 그리곤 눌러 놓고 흐르는 눈물 못 흐르게 하늘을 쳐다보는 그 아픔을 알 리가 없지요. 한 겹은 그들을 향한 그리움, 한 겹은 저 아이가 저런 아이였나 하는 낯섦, 한 겹은 흥건한 서러움... 그 여러 겹 사이사이는 저 아이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사는 기도로 가득 차고, 나는 괜찮으니 저 아이만 늘 괜찮게 해주십사고 비는 마음. 저 아이의 가슴을 옥토로 만드사 그곳에 말씀의 씨 떨어뜨려 주소서. 한평생 주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시경 개풍(凱風)에 “슬하에 일곱 형제가 있지만/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구경에는 “열 아들을 양육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아버지 한 분마저 봉양하지 않는 열 아들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비슷한 말이 여러 나라 속담에 나옵니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에 대해서는 동·서양이 같고, 옛과 지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어려서 양팔의 짐, 자라서는 마음의 짐”, 이건 영국 속담입니다. “어린 자식은 어머니의 얼을 밟고, 큰 자식은 어머니의 마음을 밟는다”, 이건 독일 속담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무자식 상팔자”라는 게 있습니다.
아들과 딸을 일컫는 자식의 息자는 참 절묘합니다. 쉬다, 숨 쉬다, 생존하다, 번식하다, 자라다, 키우다 이런 뜻 외에 그치다, 그만두다, 중지하다, 망하다라는 뜻이 있으니 인간의 일생을 담고 있는 게 바로 이 글자입니다. 태어나서 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늙어서 죽게 되는 과정이 息, 한 글자에 다 새겨져 있습니다.
인생이란 부모를 만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다가 부모와 이별하고, 그러는 동안 스스로 부모가 되어 자식들이 부모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이 세상을 떠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없듯이 자식도 골라 낳는 게 아니지만, 나는 부모의 분신이며 자식은 나의 분신입니다. 분신이 된 인연을 보살피고 갚아야 합니다. 시경에 “아버지 없으면 누굴 믿으며 어머니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랴”[無父何怙 無母何恃]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믿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메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메고 살갗이 닳아 뼈가 드러나고 다시 골수가 보이게 되도록 수미산을 수천 번 돌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이며 자식을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자신을 염려하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나와 다름없는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어버이는 제 자식을 가르치기 어려우니 남들과 바꿔 가르친다[易子敎之]는 게 동양의 옛 가르침이었고, 공자도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버이는, 특히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가슴속에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듯한 기상을 품고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 폐족(廢族)으로 살아가야 하는 자식에게 할 법한 말입니다.
제갈량의 계자서(戒子書)는 천고의 명문입니다. 제갈량은 “군자는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른다”는 말부터 합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말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게 할 수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멀리 나아갈 수 없다”[非淡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고 강조합니다. 바빠서 아들을 가르칠 여유가 없었던 제갈량은 편지 한 통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는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함께 사라진다”며 정진과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아들을 위한 기도서’는 용맹과 겸손 온유 소박함 유머를 주시기를 주님께 빌면서 “그리하여 주시면 그의 아비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맥아더의 기도도 행동이나 일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를 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어버이의 분신이지만 어버이의 것은 아닙니다. 대장 부리바는 적국의 여인에게 마음을 뺏겨 조국을 배반한 아들을 총으로 쏴 죽입니다. “네 생명을 내가 주었으니 내가 거둔다”고 했지만, 부모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준 것은 생명이지만 그 뒤에 줄 수 있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지혜를 말보다는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주는 대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적거나 없더라도 자식에게는 많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보다 나은 자식을 만드는 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이제 삶이 더 이상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시니어세대에게는 아쉬움과 후회가 많습니다. 지자막여부(知子莫如父), 아들을 아는 데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지만 자식에 대해 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자랄 때 무슨 대화와 접촉을 해왔던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저절로 좋은 영향을 주고 교육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이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모습 아닙니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아쉬움이 많은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을 기를 때의 아쉬운 마음을 내 자식이 그의 자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극복의 대상이며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과 같은 대화 단절과 갈등의 시대에는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바탕부터 새로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아들이 이에 응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아들세대의 땅으로 건너뛰어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낡은 세대, 지는 세대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식을 옳게 가르치는 자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과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갈등이 생길 것 같다. 하지만 배우자와 둘만 살자니 뭔가 적적한 느낌이 올 때도 있다. 손주 녀석들이 보고 싶어 전화기를 들지만, 막상 보려고 하면 귀찮아 수화기를 내려놓기도 한다. 자식과 ‘함께 사는 것’이 망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여유로운 황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거기에 자녀 내외와의 갈등이 생길 것에 대한 걱정과 ‘품 안의 자식이 나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더해지면서 지레 겁을 먹는 것이다.
가정경영연구소의 강학중 소장은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해보지 않고 겁먹을 일이 아니다. ‘같이 사는 것’은 장점이 많아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다. 같이 사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부각이 돼서 그렇지, 자식과 부모의 지혜를 모은다면 세대 간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다는 뜻이다.
함께 살기. 도전해보자.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동거의 목적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동거 그 자체가 목적인지, 행복을 위한 선택인지 말이다. 그것이 후자라면 강 소장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서로 합의하라
“같이 살면 어떤 갈등이 생길지 미리 예상을 해보세요. 그리고 그 예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생각해본 후 동거를 시작하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질 거예요.”
사실 자식뿐만 아니라 어떤 누구와 같이 산다고 해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수십 년 같이 산 배우자와도 가끔은 다툼이 생기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 자식이나 사위·며느리는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같이 살면서 이런 갈등을 피하려고만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가족 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한 집에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상 문제들을 미리 준비해놓는다면 갈등은 가벼운 문제가 되고, 해결은 쉬워진다.
생활비 분담과 같은 경제적인 것부터 육아와 집안일의 분담 등 예상 문제들을 생각해보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같이 살다보면 가사는 여자가 담당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합의가 필요하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 요즘은 어느 한쪽의 주도나 강요에 따른 분담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 소장은 설명했다.
“구성원 모두의 대화를 통해 만든 규칙을 A4 용지 분량으로 작성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가령 ‘아침밥은 어머니가, 저녁밥은 며느리가 한다’ 등 간단한 것 말입니다. 연초에 이것을 만들었다면 분기별로 가족회의를 통해 개정해도 좋겠죠.”
강 소장은 갈등이 없어 좋은 시기인 동거 초기에 미리 어려운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해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지금은 함께 살지만 누구나 그것을 원치 않을 때엔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나가서 사는 것이 있다. 이것을 미리 말해둔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등이 생겨 따로 살고 싶어졌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지켜라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했으니, 양가 부모들은 ‘자식이 아니라 남이라고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또 다른 출발점인 만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과의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강 소장은 우리나라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나친 밀착 관계 탓이라고 설명했다. 자식이 성인이 됐거나, 결혼을 했으면 부모도 자식을 정서적으로 내보내고, 자식도 부모 품을 떠나 자립을 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지 못한 경향이 있다는 것. 그는 ‘함께 살기’ 위한 올바른 방법은 심리적·정서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이것을 ‘아름다운 거리’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에 실패하면 상호 의존적이 되거나, 한쪽의 영향력이 커져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때의 자식과 성인이 된 자식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인 자식의 행동양식이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닐 수가 있거든요.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부모에게만 요구되는 사항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식들도 부모를 부모이기 전에 한 남자와 여성으로서 존중하는 게 당연하죠. 가끔은 부모가 자식 방에 들어오면 잘못됐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반대로 그런 경우에는 자식도 부모 방에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같이 살면서,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형태의 동거가 늘고 있다. 간섭이나 강요는 없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 존재한다.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다섯 자녀의 내외와 한 건물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 건물에 살지만, 각각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모두 다르다. 한곳에 살지만, 독립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같이는 살지만, 서로의 독립적인 생활과 취향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생활권 안에서 각자가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도 자식이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부모도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후 준비를 차근히 하는 것이 좋은 동거입니다.”
같이 살기? 장점이 많다
“요즘은 자식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쿨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두려워서 회피하는 것이면서 말이죠. 자식과 같이 살면, 즉 대가족이 되면 좋은 점은 많습니다.”
강 소장은 같이 살기의 가장 큰 장점 중 첫 번째가 역할 분담이라고 했다. 부모가 가진 경륜이 자식 내외와 손주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정의 아이들은 생활부터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과 만나 소통하는 데 있어 구사하는 어휘의 범위도 커지고, 어른들을 대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것이 더욱 깊다는 것이다. 가사 분담하는 것도 힘든 일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좋다.
두 번째로는 중년에 느끼는 외로움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손주의 육아를 일부분 담당하면 자식들에게도 큰 혜택이 되겠지만, 반대로 부모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 손주들에게 느끼는 생동감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줘 외로움을 달래주기 때문이다. 손주들의 학습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조작법 등이 익숙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거를 시작할 때 회의를 통해 생활비를 합리적으로 분담한다면 부모와 자식 모두 경제적인 부담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공동 경비를 모아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산다든지 여행을 간다든지 할 수 있어 가족의 화목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신중년이라면 성공적인 자식과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과 같은 패션을 공유하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집에 와서는 아들의 고민을 상담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 그리고 내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자식의 미래에 커다란 멘토 역할을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부모자식 관계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인 것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아들보다 옷을 더 잘 입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아들이다.
지난해 3월 서울패션위크, 최수혁씨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찾았다. 대한민국의 패션 피플이 모두 모인다는 그 주에 아버지와 함께 멋지게 빼입고 부산에서 상경한 것이다. 그곳에 입장하기 전 최씨는 지인으로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는다.
“수혁아, 아마 너와 아버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질 거야. 준비 단단히 해라.”
지인의 이야기에 콧방귀를 뀐 최수혁씨와 그의 아버지 최용환씨는 인생에서 믿기지 않는 경험을 한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여기서 포즈 좀 취해주세요.”
지인의 말이 맞았다. 믿기지 않지만 이 부자(父子)의 사진을 찍기 위해 두 줄, 세 줄의 카메라 라인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연신 플래시가 터졌다. 이 부자의 패션은 SNS를 타고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최용환씨는 이탈리아의 ‘중년 멋쟁이’로 소문난 이탈리아의 패션 에디터 닉 우스터(Nick Wooster)에 버금간다며 찬사가 쏟아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 옷을 입고, 아버지는 옷을 구매할 때 아들 것까지 두 벌을 맞춘다. 패션에서 전혀 거리낌이 없으며, 세대 차이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혁씨가 아버지에 대해 거리낌이 없는 것은 ‘함께 살며’ 비밀까지 터놓는 친구 같은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의 친구들과 맞담배를 피우며, 노래방에서 함께 즐기는 아버지는 영락없는 친구다.
함께 살기? 이들처럼만 한다면 인생,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섹스 이야기를 하는 부자
“아들에게 그래요. ‘야동’ 보지 말라고요. 그것은 판타지잖아요. 섹스는 서로가 좋아야 하는 것인데 야동을 보고 배우면 파트너는 전혀 좋지가 않거든요.”
아들인 수혁씨는 깊은 고민이 있을 때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상담하는 것도 좋지만, 인생의 깊은 이야기는 함께 사는 아버지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을 털어놓는 아들에게 아버지 용환씨는 결코 충고를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스토리텔링과 조언이 있을 뿐이다. 그 고민의 소재 또한 다양하다. 부자지간에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아버지는 스스럼없이 한다.
“아들과 벽 없이 지내려고 노력해요. 벽 사이엔 거짓이 있으니까요. 아들과 친구가 되려면 제 모든 것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비밀이 없어야 둘 사이에 거짓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아버지 용환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보여줄 것’과 ‘안 보여줄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아들에게 털어놓는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부끄러워했던 ‘흑역사’라도 말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는 아들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용환씨. 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고, 잘못된 것이라면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어려운 것 모르고 자랐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됐어요. 아버지는 제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뭐든지 해주셨죠. 철이 없던 저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그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더라고요. 제 아들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되기 싫었습니다. 꼭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죠.”
사실 아버지 용환씨가 아들의 친구들과 맞담배를 피우고, 그들의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젊은 날의 그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 아버지 용환씨는 소위 한가닥했던 ‘놀아본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창문을 180개 정도 깼어요. 자해 시도까지 한 적도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해줘야겠어요. 놀아봐야 인생을 알거든요.”
윈-윈의 관계라 함께 살아 좋다
“아버지와 같이 살면 좋은 점요?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함께 사니 무엇이 좋으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돌아온 수혁씨의 답변이 조금은 의외였다. 워낙 빼어난 패션 센스로 기자를 놀라게 했던 탓에 ‘아버지의 패션 센스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답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소금 간을 하지 않은 음식처럼 조금은 싱거웠지만, 담백하고 영양가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신중년이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의 말 속에 담긴 의미는 ‘경청’이었다. 여러 관계에서 지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은 바로 소통의 시작이자 성공적인 관계의 출발점 이었다.
우리네 자식들도 배워야 할 점은 있다. 바로 부모 세대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북돋워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들 수혁씨가 아버지를 ‘SNS 핫 피플’로 만들고 싶었던 이유도 이와 같다. 자신에게는 최고의 ‘패션왕’인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아버지를 위해 아들 수혁씨가 패션 사진 촬영을 제안했다. 일종의 아버지 ‘기 살리기 프로젝트’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중년 중에 아버지의 패션은 독보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물론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요. 확신에 차서 아버지께 제대로 빼입고 사진 한번 찍자고 했어요. 그리고 SNS에 사진을 올렸는데 저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응이 더 폭발적이더라고요.”
처음엔 어색해하던 용환씨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길거리에서 사진을 찍어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업 실패로 떨어진 자신감이 아들 덕분에 생겼어요. 이제는 부산 서면(西面)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저를 알아보고 사진 찍자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정말 놀라운 일이죠.”
함께 살고, 함께 입고, 함께 사업한다.
아버지 용환씨의 패션 철학은 뚜렷하다. 바지의 길이는 복숭아뼈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고, 바지의 통은 항상 7인치를 유지한다. 옷을 살 때는 사이즈보다는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합리적인 가격이어야 한다, 어떨 때는 옷값보다 수선비가 더 많이 나올 때가 있다. 옷은 몸에 꼭 맞게 입어야 한다는 그만의 철칙 때문이다.
“아들이 갓 성인이 됐을 때 옷을 입고 나가는데 너무 짜증이 나더라고요. 옷을 너무 못 입어서요. 내가 ‘이렇게 입으라’고 조언을 하면, 자기 뜻대로 입으려고 고집을 피우기도 하고요. 지금은 그때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참으로 우습죠.”
이런 아버지의 패션 센스를 보고 자란 덕분인지 아들 수혁씨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손을 잡고 패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와 패션 사업을 같이한다는 게 궁합이 잘 맞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젊은이들보다 더 젊게 옷을 입는 아버지 덕에 그런 걱정은 이미 날려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역할도 뒤바뀐 듯하다. 마케팅과 디자인은 아들이 맡고, 모델은 아버지다. 참으로 비범한 사업이다.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는 항상 옷을 살 때 제 것까지 두 벌을 맞추셨죠. 이제는 그 옷을 입고 함께 사업을 하려 합니다. 아버지의 ‘Father’와 아들의 ‘Son’을 결합해 ‘Fason’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어요. 늘 아버지와 함께하니 힘도 두 배가 됩니다.”
이 부자는 묘하게 닮았다. 여유로운 행동이나 꼿꼿한 자세.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까지. 함께 살기란 닮아가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서로를 배려하고 닮아가려 한다는 것. 그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함께 산다면 가족의 얼굴을 보라. 함께 살며 닮아 있는 것은 이 부자만의 이야기가 아닐 터이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