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베토벤의 곡을 즐겨 들었다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전호근(田好根·54) 교수. 10년 전, 메이너드 솔로몬이 쓴 베토벤 평전 은 자연스레 그의 손에 들렸다. 처음 책을 접했을 당시에는 평전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할 만큼 저자의 분석력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때는 자료를 읽어내듯 눈으로 읽고 머리로 기억했는데, 그는 최근에 들어서야 같은 책을 마음으로 읽게 됐다. 지난해 여름, 국제학술대회 참가차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오고부터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베토벤의 생가와 묘소를 둘러본 그는 한국에 돌아와 다시 을 꺼내 들었다. 과거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감성적으로 느끼며 읽게 된 것. 그러자 베토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인간 베토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토벤이 남긴 작품이 총 135곡이에요. 거의 모든 곡을 샅샅이 신물이 날 정도로 들었죠. 그렇게 익숙한 멜로디가 빈에 다녀오고 다시 이 책을 읽고 들으니 새롭게 들리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알게 돼서 다르게 들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에 접근하는 감수성의 차이가 작용했던 것 같아요. 베토벤의 삶을 더 이해하게 되면서 음악도 좀 더 깊은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많은 사람이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주목하지만, 전 교수는 베토벤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기울였다. 1802년에 남긴 베토벤의 유서는 철학을 전공하는 그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유서를 보면 베토벤처럼 절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조차도 인간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요. 자신이 인격적으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끊임없이 강조하죠. 나 같은 철학자는 부당한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 자기 수양은 제대로 됐는가 등으로 평가를 하는데 그런 까다로운 기준을 굳이 베토벤 같은 예술가에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유서를 읽고 생각을 바꿨어요. 아, 모든 사람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할 수 있구나. 아무리 권력과 부를 쌓아도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받지 못하면 불행한 거구나. 그게 인간의 보편적 욕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베토벤은 서른두 살에 유서를 썼지만, 18세기 당시 평균수명이 30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중년이나 다름없다. 30세 무렵부터 귀가 먹기 시작했기에, 음악가로서 중년의 베토벤은 자살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긴 것이다. 전 교수는 위기를 지나 더욱 뛰어난 작품을 남긴 베토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말했다.
“중·장년이 되면 기회도 오지만 어려움도 많이 찾아오잖아요. 베토벤은 작곡가인데 귀가 먹어가니 심적으로도 힘들었고, 통증도 심각했죠. 그러한 시련을 오히려 자신의 창작력을 불태우는 원동력으로 삼거든요. 구애가 실패로 돌아가도 걸작으로 나오고, 귀가 먹어가는 고통이 있어도 그런 어려움이 뛰어난 작품으로 생산하죠. 그런 걸 보면 고난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베토벤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추천하게 됐어요.”
추운 계절의 소나무를 칭찬하는 까닭
전 교수는 공맹(孔孟)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하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인 35명의 철학을 담아낸 를 펴냈다. 그런 전 교수가 베토벤을 보면 떠오르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그는 단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라 답했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뿐만 아니라 경학과 실학 등의 다양한 학문까지 아우르며 학예일치의 경지에 오른 추사, 절대적인 명성을 얻은 점 또한 베토벤과 유사했다.
“베토벤이 몸에 병이 생기며 찾아온 내적 고통을 앓았다면, 추사는 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갔으니 외부에서 온 고난에 시달린 셈이죠. 베토벤이 고난을 이겨내고 위대한 곡들을 작곡했듯, 추사 역시 세한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전 교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시련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사는 시련을 겪으며 우정을 얻게 됐죠. 유배를 가서 정치적 생명이 다하고 나니 가까웠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연이 끊기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라는 제자는 그를 이전과똑같이 대하고 더욱 살뜰히 챙기죠. 고난의 시절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우정과 이상적의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때 이상적의 우정에 감동해 추사가 남긴 작품이 ‘세한도’이다. 그는 세한도에 공자의 말을 덧붙여 마음을 전하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 추운 계절이 오고 다른 나무들이 시든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여전히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에도 더함이 없고, 이후에도 덜함이 없다. 나의 곤경 이전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삶이 평온하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을 발견하기 힘들죠. 인격이라는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이기도 한데, 역경이 없으면 서로 간에 그런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소나무가 푸르렀음을 알게 해준 추운 계절처럼, 인간에게 고난의 시간은 깨달음을 주죠.”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이제는 나를 바라볼 시간
흔히들 요즘 중·장년들을 말할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만큼 열심히, 진취적으로 살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 교수는 이제 자신을 바라봐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성취, 다른 말로 욕망입니다. 돌아볼 줄 모른다는 거니까요. 그렇게 되면 자기 내면과 대화할 기회가 적은 거죠. 나이가 들고 어떠한 상실감을 느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자각하면 자연히 겸손해지거든요. 잃어버린 게 많을수록 삶의 무게는 높아지고, 고통이 클수록 내면은 더 단단해지죠. 그러니 어느 순간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인 거예요. 자신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전 교수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이상을 지키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했다.
“젊어서든 나이가 들어서든 근본적인 철학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부터 철학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봐도 중요한 비중을 두고 기술되지 않은 사람들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죠. 권력이나 출세 등의 외압에도 끝까지 자기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지킨다고 하는 게 반드시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젊은 시절에 가졌던 이상, 그 이상을 포기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을 바꾸고 변절시키려고 외부에서 강요를 하겠지만 어떻게 지키는가가 자기 수양이죠. 결국 그런 신념이나 이상을 잘 지키는 게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스포츠 올드 팬들에게 우리나라 축구 선수 계보를 살펴보라고 하면 차범근과 함께 빠뜨리지 않고 등장할 인물이 있다. 스포츠 올드 팬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야기할 한국 축구 선수 계보는 일제 강점기 유일하게 올림픽(1936년 베를린 대회)에 출전한 김용식을 첫머리로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에 이어 이번 호의 주인공인 이회택(李會澤)을 거쳐 차범근 그리고 신세대 팬들에게 익숙한 홍명보, 박지성, 손흥민 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회택은 1960~1970년대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를 향해 나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좌절했던, 가슴 아픈 시대를 대표한다. 월드컵은 물론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고 직계 후배인 차범근처럼 국외 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한국 축구 암흑기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올드 팬은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 축구와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회택이 1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니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축구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이회택.
한국 축구 2세대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큰 체격이 아니다. 1972년 6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투스가 내한해 한국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뒤 찍은 사진을 보면 이회택은 대표적인 단신 공격수인 김진국(프로필 165㎝)과 키가 거의 같다. 이 경기에서 산투스가 3-2로 이겼는데 펠레의 통산 1204번째 골이 나왔고 한국은 이회택과 국가 대표가 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 스타 계보를 잇는 이회택과 차범근은 이 경기 직전인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 5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4-1로 이긴 이 대회 예선 B조 크메르(오늘날의 캄보디아)와의 경기에서 이회택과 차범근은 나란히 한 골씩을 기록했다. 그때 기준으로 베테랑인 이회택(26세)과 차범근(19세)의 신구 조화는 축구 팬들의 기대를 한껏 모았다.
동북고 3학년인 1965년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회택은 그해 4월 도쿄에서 열린 제 7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그러나 한국은 요즘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적인 예선 1승 3패, 조 꼴찌로 탈락했다. 태국에 0-1, 버마(오늘날의 미얀마)에 0-2, 말레이시아에 0-1로 지고 인도에만 4-1로 이겼다.
국내에서는 초고교급 실력을 자랑하던 이회택은 이듬해인 1966년 제 5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에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선발 문제를 놓고 크게 분란이 일었다. 그 무렵 종종 있는 일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 친선 대회인 메르데카배대회에서 4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예선 탈락의 쓴잔을 마셨다. 방콕 대회에서는 태국에 0-3, 버마에 0-1로 졌으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예선에 대비해 세대교체를 하고 꾸린 대표팀이라고 해도 협회는 할 말이 없게 됐고 이회택은 활약할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이제 문제의 멕시코시티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이다. 이 예선은 1967년 9월, 일본 스포츠의 심장으로 불리는 요요기 국립경기장(1964년 도쿄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이회택을 비롯해 골키퍼 이세연과 수비수 김호, 김정남, 김정석, 공격수 정병탁, 김창일 등 패기만만한 멤버들이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20년 만의 올림픽 출전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을 4-2, 레바논을 2-0, 월남을 3-0으로 물리치고 같은 3승의 일본과 맞붙었다.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일진일퇴의 숨 막히는 접전 끝에 두 나라는 3-3으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이 경기에서 이회택은 0-2로 뒤진 후반 3분, 1-2로 따라붙는 추격 골을 넣었고 가마모토 구니시게(釜本邦茂)는 전반 13분과 후반 21분 각각 선제골과 3-2로 달아나는 골을 기록했다. 1946년생인 이회택과 1944년생인 가마모토의 축구 인생이 이 경기에서 갈렸다.
한국은 필리핀, 일본은 월남과 경기를 남겨 놓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골득실차에서 +7로 +21의 일본에 크게 뒤져 있었다. 일본이 필리핀을 15-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로 이겼기 때문이다. 15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 속에 한국은 필리핀을 5-0으로 이긴 반면 일본은 월남을 1-0으로 누르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었다.
1969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예선에서 이회택은 가마모토 구니시게와 다시 한 번 겨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가마모토 구니시게는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않았고 한국은 1승 2무 1패로 2승 2무의 호주에 밀려 탈락했다.
이회택은 A매치 32골의 기록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1960~70년대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경기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그의 이력은 올림픽과 월드컵 출전 등으로 더욱 화려했을지 모른다.
◇ 신금단 부녀 상봉에 이은 이회택 부자 상봉
이회택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와중에 의용군이 돼 북한으로 갔고 어머니는 재가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축구는 최고의 친구였고 부자 상봉의 큰 선물까지 안겼다.
이회택은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탈리아전 1-0 결승 골의 주인공인 북한 박두익 감독으로부터 네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확인했다. 이회택은 이 예선을 3승 2무로 통과해 한국의 세 번째 월드컵 출전을 이끌며 지도자로서도 축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듬해인 1990년 열린 ‘남북통일축구경기‘에 이회택은 남측 선수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해 10월 10일 평양에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씨와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신금준-금단(1960년대 초반 육상 400m·800m 세계 기록 보유자) 부녀 상봉, 1990년 2월 삿포로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때 한필성-필화(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3000m 은메달리스트) 남매 상봉에 이은 스포츠계 남북 핏줄의 만남이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1976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노신사가 신문에 난 부음을 보고 빈소가 마련된 우리 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이철원 박사였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 신세를 많이 지었다며 이를 잊지 못하여 찾아왔다고 말하였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 우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손우현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일제 말기에 선친은 종로 2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자가 고장 난 기계가 있으면 수리하겠다고 아버지 회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 남자의 용모는 도저히 이런 일을 할 사람으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차를 한 잔 대접하며 사연을 들어보았다. 그의 이름은 이철원이며 배재학당 재학 중 3·1독립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른 후 상해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유학하며 이승만 박사를 돕다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곧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49년 이철원 박사가 아버지에게 급한 연락을 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 들어가야겠는데 입고 갈 양복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바로 양복과 모자를 해주었다. 그는 얼마 후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이 박사는 아버지와의 인연을 회고하며 지금은 자신도 은퇴를 하였지만 도와줄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얘기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그 이듬해 형 결혼식의 주례를 이 박사에게 부탁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에 있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유신체제하라 긴 주례사를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얼마 전 형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버지의 세대가 있기에 우리 세대가 있다
요즘 나는 이철원 박사의 아들 이준일 교수(전 중앙대 정경대학장)와 우리 둘 다 회원으로 있는 광화문문화포럼에서 매달 만나 선친들의 우정을 회고하며 2대에 걸친 세교(世交)를 이어가고 있다.
선친 이야기로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저지른 불효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다. 또 아버지 세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인간에게는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 언제, 어디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나는 1948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태어나지 않아 이등 황국신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군대도 대한민국 군대에 가고 나중에는 고위 공무원도 될 수 있었다. 또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만 한살이라 어머니 등에 업혀 고생을 모르고 피난을 갔다 올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난 시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내가 태어난 해는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해이다. 그러니 나의 역사는 곧 대한민국의 역사다. 나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4·19와 5·16을 목격했고 그 후 오랜 권위주의 정부 후에 온 1987년 민주화, 88 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등을 국내외에서 지켜보며 대한민국의 변화된 국제적 위상을 목도했다. 대한민국은 그사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공여국이 되었다.
4·19 총성과 시민들의 울부짖음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대통령은 이승만 박사’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의 육성 연설을 라디오로 들으며 자라났다. 그런데 6학년 때 수업 도중 내가 다니던 수송국민학교(현재의 종로 구청자리)에서 멀지 않은 세종로에서 총성이 울려 펴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는데, 그의 차량이 떠나는 연도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새벽잠이 없던 아버지는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우리 형제들을 깨웠다. 종로 2가에 나가보니 탱크가 지나가고 있었다. 라디오는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의 육성 성명을 보도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 집 살림이 비교적 넉넉했는데,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서 출산하지 않고 산파를 불러 집에서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개한 것 같지만 그때는 그렇게들 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끼워 대문에 걸었다. 지금은 병원에서 출산하고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지만 그 시절에는 집에서 해산하고 집에서 초상을 치렀다. 그래서 어느 집에 애경사가 있는 지를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다. 또 집집마다 한자로 된 문패를 걸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냈다. 지금은 같은 아파트 바로 앞집 사람의 성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4대문 안인 종로 2가 YMCA 뒷동네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생가 주소는 종로구 인사동 245번지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주소는 오래전에 없어졌고 건물만 남아 있으나 지금은 개조하여 음식점이 되었다.
내 유년 시절의 종로 2가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YMCA 자리는 6·25 때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어 있었으며 YMCA 건너편에는 기독교 방송국이 있었다. 종로 1가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을유문화사 서점이 있었고 안국동방향으로 돌아서는 모퉁이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 1936년 민족자본으로 건설된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까지 구비한 이 건물은 규모는 다르지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같은 장안의 명물(landmark)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화신백화점은 1987년 종로의 도로 확장계획으로 철거되었다.
서울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데 다른 유서 깊은 외국 도시와는 달리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수려한 자연 경관은 무분별하게 치솟은 고층 건물과 아파트에 가려지고 기념비적인 건물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이런 철거 위주의 도시 계획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없어진 옛날 집 주소와 화신백화점을 생각하며 나는 실향민과 같은 심정을 금할 수 없다.
고교 시절인 1966년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주최 세계 청소년토론대회(World Youth Forum)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된다. 지금은 조기 유학들을 많이 가지만 그 당시는 고등학생이 미국에 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3개월 여간 뉴욕 지역의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그 집 아들들과 함께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에 대한 연설도 하고 또 전 세계 39개국에서 온 학생들과의 토론회에도 참석했다. 이때 나는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지금은 서울이 글로벌한 도시가 되었지만 그 당시 한국은 고속도로도 없는 후진국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
또 그 당시 서울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유일한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전화는 비싸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고 항공우편 중에서도 저렴한 봉함엽서(aerogramme)에 깨알같이 적은 편지를 주고받곤 했다. 우리 세대에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을 꼽으라면 나는 통신수단이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빛의 속도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SNS, 무료 국제전화까지 가능하지 않은가.
만 28세였던 1977년 나는 코리아헤럴드 파리지사장 겸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다. 뜻밖의 인사 발령이었다. 대개 지사장이나 특파원하면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는 의외와 예외가 있다. 나는 이때 프랑스에 2년간 체류하면서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체험하며 프랑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시작한다. 그 후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두 차례 8년을 더 근무하면서 도합 10년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며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도 받고 프랑스에 대한 책도 출간하게 된다.
프랑스 지사장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코리아헤럴드의 중앙청과 외무부 출입기자를 겸하고 있던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다. 자고 있는데 중앙청에서 전화가 왔다. 긴급 중대 발표가 있으니 빨리 기자실로 오라는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부리나케 중앙청으로 향했다.
기자실에서는 기자들이 소문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평소와는 달리 초췌한 모습의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이 기자들 앞에 나타나 울먹이면서 대통령 시해 사실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우두망찰할 사이도 없이 전화로 송고를 시작했다. 며칠 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에 취재기자로 참석했다. 고인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평소 박 대통령을 비판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께서 이제 고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달라고 기도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못해 나는 외신을 통해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기자로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당시 한국 언론의 정국관련 보도는 마치 암호를 읽는 것과 같았다. 그때와 지금의 우리 언론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김영삼 ‘문민정부’의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1984년 초 연합통신 기자로 있을 때 나는 주 인도네시아 대사관 공보관으로 나가 달라는 공직 제의를 받았다. 외교관 신분으로 해외에 근무하는 기회다. 그 당시 나는 미국 대학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장학금도 거의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주저하는 나에게 내가 자문한 선배들은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말라고들 권유했다. 사농공상 문화의 잔재 때문일까. 그 당시 해외공보관 중에는 많은 전직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 이후 공무원이 된 나는 자카르타, 파리, 제네바, 오타와 등에서 근무했다. 그리고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는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으로 발탁되어 대통령 해외 순방에 수행하며 세계 여러 지역을 다녔다. 그때는 잘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특혜 받은 인생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기적을 해외에서 지켜봤다. 1987년 6월 항쟁은 권위주의 정부 방어에 종사하던 나에게는 커다란 감격이었다. 그 이후 나의 공보관 업무는 훨씬 수월해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때는 파리에서 서울에 파견되어 외신 홍보 지원을 했다. 올림픽 개막식을 생중계하는 프랑스 TV와의 회견에서 나는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축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파리에 대사관 공사 겸 문화원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구하려고 한국문화원을 찾았고 월드컵이 생중계되는 파리 시청 광장에는 교민과 유학생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러 몰려들었다. 우리 가족도 여기에 합류했다.
지난 9월 나는 파리에서 개최된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 상호 교류의 해’ 개막행사에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 색채로 조명된 에펠 탑 앞에서 열광하는 파리 시민들과 우리 교민들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 개막행사를 한 사요극장은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를 통과시킨 곳이다.
2007년 이후 나는 한림대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이를 공직 시절에 하던 ‘한국 알리기’의 연장으로 생각하며 깊은 사명감을 느낀다. 특히 흐뭇한 것은 이제 한국도 전 세계에서 유학생들이 찾아올 만큼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은 지난 67년간 참 먼 길을 달려왔다. 안으로는 여전히 시끌벅적하나 밖에서는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과 함께 태어난 나는 이 여정에 국내외에서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 손우현 (孫又鉉)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
1948년 서울 출생. 서울고, 한국외대 불어과, 파리 외교전략대학원(CEDS) 졸.
코리아헤럴드 기자, 파리지사장, 연합통신 기자, 주 인도네시아, 프랑스, 제네바,
캐나다 공보관. 대통령 해외공보비서관, 정부간행물제작소장,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역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기사장’ 수훈.
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에 걸쳐 방송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모티브로 제작한 뮤지컬 .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시대를 대표하는 가요들을 리메이크해 당시의 감동을 전한다. 6·25전쟁으로 자식을 잃고 슬픔 속에 살아가는 돌산댁 역은 배우 나문희가, 전쟁포로로 끌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양백천 역은 배우 박인환이 연기한다. 뮤지컬의 연출이자 서울시 뮤지컬단을 이끌고 있는 김덕남 단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Interview>>
이번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콘텐츠로 서울시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금의 뮤지컬산업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홍수 속에 일부 연령층의 뮤지컬 마니아가 선호하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소위 그들만의 잔치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 뮤지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시뮤지컬단은 다양한 접근방법으로 작품을 개발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이 빚어낸 질곡의 삶을 조명한 우리의 이야기 을 공연함으로써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겪었던 중·장년 세대들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시니어뮤지컬 시장의 활로를 개척해 보고자 합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는지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의 마라톤 방송으로 진행됐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세계 최장시간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시청자의 88.8%가 방송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는 한국 갤럽조사연구소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고, 저도 물론 그중의 한 명이었어요. 단 한 명의 가족이라도 더 찾길 간절히 기도하며 방송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신혼 때 헤어져 33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부부가 재회하기도 했는데, 그 사연이 그렇게 기억에 남습니다. 그토록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감동의 시간은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중·장년 배우들이 공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 연극무대입니다. 이번 작품은 뮤지컬인데요. 젊은 배우들이 장악하는 다른 뮤지컬과 비교해 이 작품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중년 세대뿐 아니라 젊은 층을 아울러 모든 세대가 잠시 즐기고 끝나 버리는 화려한 재미보다는 오래 마음속에 남을 만한 깊이 있는 감동을 원하는 추세인 것 같습니다. 중·장년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까지 공감이 갈 수 있는 배우가 누굴까 고민하다 나문희·박인환씨를 생각했어요. 대본 자체가 희곡을 리메이크하는 작품이라 연극성이 강합니다. 대극장에서 노래보다 대사가 많은 작품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잘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노래보다 연기가 우선시된 캐스팅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웃겨주고 감동을 선사하는 두 배우의 명품연기가 이번 공연의 완성도를 높여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영화 처럼 전 연령층을 아우르는 이야기로 공감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나요?
시니어뮤지컬인 만큼 중·장년 세대가 많이 관람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연을 관람하며 아프고 어리숙했던 과거를 잠시 돌아다보고, 다시 앞을 내다보면 의미있는 삶을 설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부터 조부모 세대까지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쟁과 이산이라는 역사도 중요하지만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어도 변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가족의 끈끈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전달되길 바랍니다.
△김덕남 연출
세계 25개 도시 공연, 미국 4개 도시 공연. 주요작 , , 등
△ 뮤지컬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일정: 10월 30일~11월 15일 연출 김덕남
출연: 나문희, 박인환, 곽은태, 왕은숙, 권명현 등
음악 듣기 딱 좋은 계절이다. 떨어지는 낙엽과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은 감수성을 자극한다.
괜스레 천천히 걷게 되고,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한참 주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익숙한 한 곡조를 흥얼거리기 마련이다. 이렇게 친숙한 노랫가락은 애쓰지 않아도 술술 나오는 것 같은데, 정작 노래 한 곡 듣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요즘 음악 듣는 법은 복잡하다. 음악을 파일로 휴대폰에 넣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데, 이젠 그 방법도 아니란다.
그 흔했던 레코드점은 2015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귀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LP가 테이프가 되고, CD에서 MP3로 듣는 미디어가 변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만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녹음하거나 재생하는 기술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하지만 최근의 변화는 당황스럽다. 언제부터인가 레코드점은 귀한 장소가 되더니, 서점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나마 애써 그곳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어쩐 일인지 신곡 CD 찾기가 쉽지 않다. 가수들이 이제 온라인에서 음원 판매에만 힘쓸 뿐 CD와 같은 미디어의 대량 제작은 꺼리기 때문이다. 지금 CD는 소수 열성 팬들의 차지다.
50대 동안(童顔) 가수로 불리는 이승환씨는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이제 음악은 소유하는 것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변모했다”고 정의 내렸다. 한 장 한 장 앨범을 사 모으고, 앨범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던 것은 안타깝게도 이젠 옛날 추억이 되어 버렸다는 선언이다. 미래 기술에 매달리는 기술자도, 판매에 목맨 장사치의 이야기가 아닌, 한때 LP 레코드와 CD로 수익을 얻던 현직 가수의 이런 이야기는 무게감이 다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요즘 음악 시장 ‘소비’의 축은 스트리밍이라는 기술이다. 주변에서 가장 쉽게 보는 유사 기술은 ‘TV 다시보기’ 기술이다. 이는 마치 커다란 도서관에서 음악이나 영화를 TV나 스마트폰으로 꺼내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LP나 CD와 같은 별도의 미디어를 소유할 필요 없이, 돈을 지불한 회사에서 통신망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재생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전용 앱을 통해 스마트폰에서 재생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PC를 오디오와 연결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에서 소비로
중년들은 이런 음악의 ‘무소유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시대적 변화에 대해 前 편집장이자, 오디오 평론가로 활동 중인 오승영씨는 이렇게 조언한다.
“음악을 파일로 재생하는 방식은 관련업계에 종사하거나 스스로 관심을 갖고 다루어 온 경우가 아니라면 많이 낯설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 현상이 음악재생산업의 큰 축이 되어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관심을 갖고 크고 작은 재생 기기와 시스템을 접하려는 활동은 중요합니다. 현상 자체를 무시하면 스스로가 주류에서 멀어진 시각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LP가 그랬듯이 CD재생 시스템도 주류의 자리를 넘겨줄 뿐, 별도의 노선을 통해 생존을 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에 병행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인켈과 태광, 삼성에서 엔지니어로 활동하다 이제는 오디오 팟캐스트를 운영 중인 윤종민 소장은 제조사들의 적극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시니어들에게 음악을 듣는 과정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최근 만들어지고 있는 제품들의 인터페이스, 즉 조작방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젊은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제조사들이 먼저 이러한 장벽을 제거한다면, 보다 쉽게 시니어들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반에서 음원으로
하지만 윤 소장도 시니어들의 변화와 디지털 환경에 대한 적응을 촉구한다.
“평생 갖고 있는 음반만 고집하겠다면 기존 시스템만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새로운 미디어로의 전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갖고 있는 음반을 디지털화한다면 좀 더 편안한 음악감상과 소유 두 가지 모두를 효율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도서관’을 나만의 도서관으로 만들어 집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이야기다. 요즘 유행하는 NAS(개인용 파일서버)가 이런 식이다. 일반인이 NAS를 구축하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일단 구축해 놓으면 인터넷이 연결된 곳 어디서든 꺼내 들을 수 있다.
아날로그 미디어의 디지털로의 ‘복각’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영구적인 보존이다.
가 실시한 오디오점 만족도 조사에서 수년간 1위를 지켜냈던 금강전자 고태환 대표는 보존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잘 보존된 앨범 한 장은 미술품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화재 등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음악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는 중요합니다. 다만 진동에너지가 전기에너지로 변환되는 소리를 오롯이 담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장비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그렇다면 앞으로의 음악감상은 어떤 모습일까? 오승영 평론가는 앞으로의 음악감상에 대해 이런 예상을 밝힌다.
“음악감상이라는 고유의 취미성은 대중화와 고급화가 동시에 진행될 거라 봅니다. 소프트웨어와 그 서비스 시스템, 재생 하드웨어 등이 결합된 음악 재생품질의 향상은 음악을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기기들과 폭넓은 사용환경에서 청취할 수 있게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자동차나 지하철에서도 고음질을 손실 없이 감상하고 있습니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네트워크와 컴퓨터에 대한 공부를 강화해야 하겠지만, 오디오 마니아에 대해 스노비즘(속물근성)을 들이대던 대중적 시선도 스트리밍의 음질적 차이에 대한 자각을 통해 경계심이 완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원 전용 재생기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거실의 오디오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주자는 아스텔앤컨이다. 아스텔앤컨은 한때 MP3로 명성을 높였던 아이리버의 고급제품 라인이다. 이들은 고음질 음원재생기기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얻은 상태로, 최근에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하이파이(고음질 오디오) 오디오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아이리버 제품기획담당 안지현 과장은 음악감상의 미래를 이렇게 예상한다.
“네트워크 기반의 음악감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향후에는 이보다 더 발전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IOT(사물인터넷)와 연계되어 지금보다 더 편리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용자의 음악 패턴을 특정 알고리즘으로 파악해서 그날의 날씨 등과 연계한 음악을 조명이 켜지면서 들려주는 방법 등 실생활과 더 가까워질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감상실로
그래도 음악듣기가 어렵다면 기존의 방식을 따르면 된다.
물론 집에 뱅앤올룹슨이나 매킨토시와 같은 좋은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면 그대로 감상하면 되지만, 여의치 않다면 음악감상실이 대안이다. 음악감상실은 최근 들어 되레 늘어나는 추세다. 음악감상실은 양평이나 파주, 성북동 등 중년들이 자주 찾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는데, 오디오 마니아들이 본격적으로 전업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리버도 이태원에 그룹 청취실과 루프탑 라운지 등을 갖춘 4층 규모의 음악감상 공간 스트라디움을 최근 오픈했는데, 유명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의 해설을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국민 DJ로 사랑받았던 황인용씨가 개설한 파주 헤이리의 카메라타는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유명하다.
“젊은 분들도 오시긴 하지만 아무래도 중년층이 많이 찾는 편입니다. 좋은 음질로 클래식을 감상하고자 하는 분들이 찾아 주십니다” 라고 관계자는 이야기한다. 역시 중년은 음악감상실에 익숙한 세대인 것이다.
요즘의 대중가요는 4분을 넘기는 게 거의 없다. 지루한 것을 못 참는 세대에게는 4분도 길다며 3분 10초 내외로 상품을 내놓는다. 작품이 아니다. 그러고는 음원의 순위를 고가에 거래하는 일들이 폭로되기도 한다.
커다란 스피커 앞에 자세를 고쳐 앉고, 음반 속지의 해설을 꼼꼼하게 읽던 세대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 있다. 지금의 기술적 진보가, 아버지 사랑방의 독수리표 전축보다 나은 소리를 들려준다는 보장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음악듣기는 달라졌고, 그 변화는 진보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서 더 나아진 음악감상을, 변화된 환경을 조금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LP 레코드를 디지털로 복각하는 방법
LP 레코드를 복각하는 것은 용도에 따라 그 방법이 다양하다. 전문적인 음질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큰 비용의 지출을 각오해야 하지만, 기록을 위해 남기는 용도라면 낮은 가격으로도 가능하다.
1. 디지털 변환장치를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는 방법
LP의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변환해 주는 ADC를 구매해서, 기존 오디오의 LP나 프리엠프에 연결하는 방법이다. ADC는 Analog-Digital Converter의 약자로 말 그대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해 주는 장치다. 고가의 턴테이블과 고성능의 ADC가 만나면 CD에 버금가는 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오디오 마니아들이 선호하는 방식이며, 대부분의 경우 기존 오디오 시스템에 적용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2. 복각 전문 업체에 맡기는 방법
LP 복각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여러 업체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기념 앨범이나 복각하고자 하는 앨범이 몇 장 되지 않을 때 추천한다. 시중에 4~5개 업체가 활동 중이며, 앨범 한 장 복각 가격은 5만원 내외.
3. USB 턴테이블을 구매해 활용하는 방법
직접 USB를 꼽아 MP3와 같은 컴퓨터용 파일을 만들어 주는 장치들이 시중에 많이 등장했다. 다만 대부분의 장비들이 전문적인 오디오 장비가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 수준이어서 음질이나 만듦새가 조악한 경우가 많다. 저가의 바늘(카트리지)은 LP 레코드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대신 기존 오디오와의 연결 없이 자체적으로 복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4. PC 사운드카드를 사용하는 방법
PC의 사운드카드를 활용한 방식. 사운드카드의 입력단자에 LP의 신호를 입력해 PC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MP3 파일 등을 제작할 수 있다. 수년 전 디지털 오디오의 저렴한 대안으로 선호되었으나, 최근에는 효용이 떨어진다고 평가된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 현황
국내 음원 스트리밍 시장은 통신사를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각 통신사의 멤버십 서비스는 데이터 요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용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편. 이밖에도 애플과 삼성이 자사 기기에 갖춘 어플을 통해 음악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국내 포털에서 애플 뮤직으로 검색하면 등장하는 사이트는 아이폰 제조사 애플과는 무관하다.
1. 멜론 www.melon.com,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2. 벅스 www.bugs.co.kr, SK텔레콤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3. 지니 www.genie.co.kr, KT올레 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4. 엠넷 www.mnet.com, LGU+사용자는 스트리밍 무제한.
5. 네이버뮤직 music.naver.com, PC 사용자에게 유리.
6. 그루버스 www.soribada.com, 고음질 MQS 스트리밍 서비스.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
문숙(文淑·61)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를 향한 놀라움은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젊은 세대들로부터 먼저 왔다. 그녀의 모습에는 분명 세월을 증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나이가 예순에 달했다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단순히 ‘동안’이라고 표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종의 생명력이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하며 무려 38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인간’ 문숙이 밝히는 남다른 젊음의 비결과 삶의 철학.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우리는 문숙을 흔히 ‘배우’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배우 문숙’이라는 명칭에 손사래를 친다.
“영화배우요? 40년 동안 안 했는데, 갑자기 영화배우 노릇을 하려니까 힘들어 죽겠어요(웃음). 하긴 내가 한 게 배우밖에 없으니까 한국에 오면 배우라고 하는데, 배우 노릇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웃음) 갑자기 ‘선배님’, 이러면 내가 뭐 어색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웃음).”
인터뷰 내내 문숙과 같은 자유인을 만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든 훌훌 털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아름다움은 거기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체험으로 사는 것밖에 없기에 잡을 만하고 걸릴 만한 게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강박 중의 강박은 바로 아름다움일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혹은 더 아름답게 되기 위하여 ‘남들 하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매일 하며 살고 있다. 이에 관하여 문숙은 철저하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라고 조언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확 놔버리면, 그만큼 나이에 맞게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괜히 그 에너지를 젊어지려고 애쓰는 데 쓴다는 거죠. 그건 이길 수 없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늙어 보이면 어때요. 주름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고. 주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주름은 내가 제일 많을 걸? 대한민국 여자들 중에서.(웃음) 나이가 들면 지혜가 생기는데, 시간이 나에게 마련해준 것에 대해 반항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노송이 젊은 소나무에 비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눈이 없는 거죠.”
그녀가 말하는 ‘자연스러움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은 문숙 본인이 가진 아름다움과도 일치한다. 혹시 그렇게 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아직 일반적인 삶의 입장에 서서 물어봤다.
“오히려 노력을 덜해야 할지 않을까요? 난 한국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해 노력을 어마어마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피부에 쏟는 노력을 다른 데로 돌리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걸요. 그건 불필요한 에너지를 많이 낭비하고 있다는 거죠.”
문숙은 해외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정말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만큼 아름답게 보였다고 말했다. 그 생명력 자체가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에 비해 스스로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게 안쓰럽다고 말했다.
“우리는 원래 우아해요. 왜냐하면 우주의 기운이 우아하고, 우리는 그 기운의 소산물이기 때문이에요. 스스로를 우아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는 건, 디스커넥트(단절)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자신과 분리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의 본질을 찾아서 접속시켜야 해요. 그러면 우아해질 수밖에 없어요. 꽃도 새도 우아한데 하물며 인간이야, 우아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돼요.”
목적 없는 생활의 기쁨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아픔과 익숙한 사이가 된다. 오랜 기간 수행한 요가 수련자로서 문숙은 아픔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요가는 자신과 함께 하는 수행이며 그동안 쌓여 있던 침체된 기운들을 정리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아프면 행운이에요. 왜 아픈지 그 원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까. 그래서 아픈 건 운이 좋은 거죠. 요가를 하면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어서 아픔 속으로 들어가게 해 줘요. 그 전에는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모든 게 밖을 향했어요. 목적의식, 욕구 등등. 그러다보니 제 몸은 혼자 살아남아야 했죠.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다른 데로 가 있으니까 몸이 혼자 움직여야 하니 아프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프면, 내가 아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아요.”
자신에게서 어긋난 것을 고치고 나다움을 찾는 것. 문숙의 철학은 그렇게 간명하면서도 강직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성공을 위해 설정해야 하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바라보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목적’이란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목적을 갖고 사시잖아요? 그런데 목적을 갖고 살면 꼭 사고가 생겨요. 이루면 ‘이게 아니야, 허전해’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찾게 되고. 그래서 저는 목적 자체를 버리고 체험 그 자체로만 살아요. 그렇다 보니 기대가 없기 때문에 실망할 일도 없죠. 그때그때 살기 때문에 현재에 더 충실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커질 수 있어요. 오히려 순조롭게 살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편안하다’는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자신이 해당되지 않으면 괴로워해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지 상황은 변하지 않아요.”
“기대하면 실망하게 되는데 왜 기대를 해요?”
문숙은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면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다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 자체에 대해서, 체험자로선 적극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적극적이진 않다는 그녀의 말을 충족시키는 확신이었다. 그토록 확신 있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부러웠다. 그래서 그녀가 보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졌다.
“불행도 우리가 만들어낸 거예요. 불행과 행복은 중요한 게 아녜요. 그건 그 사람들 자신이 만들어낸 거죠. 컵에 물이 반 컵 차 있을 때, 그걸 반 컵밖에 없다고 보느냐 반 컵이나 있다고 좋아하느냐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행복에 너무 집중하면 불행도 커져요. 그래서 쉬이 행복하다고 떠드는 사람은 그만큼 그림자가 큰 거죠.”
행복도 애쓰면 불행이 된다. 그녀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자연 그대로의 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할 때,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직시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보는 삶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문득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답이 나와 있는데 왜 기대를 하느냐고 반문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지금은 애써서 하는 일이 없어요. 그리고 애써서 하면 잘 안 돼요. 자신이 잘될 일은 애쓰지 않아야 나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반면 자신이 잘하는 일은 오히려 에너지가 생겨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그게 확연해져요.”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해져요
문숙은 이시형 박사의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요가와 요리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라는 책도 낸 자연식 전문가로서의 그녀만큼 지금까지 접한 그녀와 어울리는 일도 없을 듯했다.
“안 먹고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남의 생명을 섭취하고 살아야 하는 거예요. 시금치가 나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났겠어요? 그러니 먹어야 할 게 있고 안 먹어야 할 게 있는 거죠. 이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고 저만큼만 먹어야 할 게 있죠. 자연식이라고 좋다고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하면 그게 또 스트레스가 돼요. 내가 진짜 필요한 게 뭔가가 중요해요. 우리는 오관(五官)의 노예가 되어 있잖아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을 더 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 자연히 생겨요. 그리고 몸이 먼저 알게 돼요.”
문숙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를 물어봤다. 그녀답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와 지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연애해야지, 남자 보면 두근거리지, 아이 낳아야지, 아이 먹여줘야지…. 복잡했어요. 인류 종족을 위한 역할을 하느라고 나도 모르게 아주 힘들었어요(웃음). 이젠 나만 행복하면 돼요. 내가 우울하면, 내 옆에서 우울해할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내가 행복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끔 해주는 게 아니라. 이젠 그게 가능하잖아요?”
그녀는 그동안 남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걸 남을 위해 살 필요가 없었던 어린 나이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복잡한 삶이 내 몸을 떠난 거예요. 그때 기억나시죠? 모든 게 아름다웠잖아요. 모든 게 가능했고.”
“난 지금 덤으로 사는 거예요.”
살아있으니 하루하루가 괜찮다고 말하는 문숙의 맑은 눈은 흡사 10대 소녀처럼 보였다. 삶의 막바지에 도달했음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사람의 눈이 저토록 맑고 생명력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역설적인 느낌이었다.
“60살 넘었잖아. 난 덤으로 사는 거예요. 오행에서 육십이면 다 산 거니까.”
‘다 살았으니 덤으로 살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에너지를 보면 던질 수밖에 없는 다소 짓궂은, 아직도 이만희 감독의 얼굴이 기억나냐는 질문이었다.
“이만희 감독님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해요. 60평생 그 분 처럼 멋진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웃음).”
SHE IS…
영화배우 문숙씨는 고교 재학 중 연기자로 데뷔해, 스무 살에 영화 ‘삼포 가는 길’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대종상 신인상을 받은 그는 23세 연상인 고 이만희 감독과 결혼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결혼 1년 만에 병으로 숨졌고, 그는 미국으로 갔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고, 병원에서는 치료할 방법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으로 묵언명상 수련을 떠났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산속에서 매일 열네 시간씩 요가와 명상 수련을 했다. 수행을 하며 건강을 되찾은 그는 음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연치유식 요리연구원에서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2015년 자연식 치유가로 검정색 고무신, 탐스러운 은회색 머리카락, 짙고 바른 눈썹, 자연 색깔의 쇼울을 걸치고 우리 곁으로 왔다.”
>>글 박찬일 로칸다 몽로(夢路) 셰프
텔레비전을 틀면 요리사가 나오고, 백종원이 요리를 한다.
요리사를 넘어 ‘셰프테이너’라는 말이 나오고, 광고까지 점령했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백종원이 나오는 여러 프로그램이 요리사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요리사가 대중 매체의 총아가 된 셈이다(심지어 글 쓰고 작은 식당하는 내게도 출연 섭외가 빗발쳐서, 거절하느라 진땀을 뺀다). 백종원은 이른바 전문 셰프들과 다른 길을 걸어서 오히려 가치가 더 높아지고 있다. 전문 요리사들이 엔터테이너로서의 재질을 뽐내면서 ‘특별한’ 요리들로 눈 호강을 시켜주는 반면, 백씨는 누구나 먹는 평범한 요리들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가 나오는 프로그램 이름이 ‘집밥 백선생’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는 갑자기 뜬 스타가 아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요리 책을 내고 자신의 브랜드를 여럿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가 뜨고나서 그동안 펴냈던 책도 같이 뜨고 있다. 여담이지만, 별 어려움 없이 몇 해 전에 그의 책을 펴낸 출판사들이 대박을 맞았다. 그가 이렇게 뜰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남자 요리 시대 개막
원래 대중매체의 요리는 여자들의 몫이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 선생과 그 딸들인 한복려, 한복선 등은 물론이고 왕준련, 한정혜, 나중에는 이종애선생 등이 텔레비전과 여성지 요리 면을 담당했다.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성잡지들이 창간되고, 텔레비전에서도 ‘오늘의 요리’ 같은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요리는 현모양처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고,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낸 후, 저녁이 되기 전에 여자들의 요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이후 이 프로그램들은 아침 시간으로 옮겨 더욱 번창했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아내들도 집에서 요리로 국가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주부클럽이니 대한부인회의 입김이 커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마이카 시대가 개막되고,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요리 선생보다 맛있는 식당을 소개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그 맛집의 요리를 담당하는 ‘셰프’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른바 ‘글로벌시대’를 맞아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셰프들이 대중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바로 에드워드 권 등이 그 시대의 인물이다.
요리 선생 중에 남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독특한 목소리의 이정섭, 쉬운 한식 요리로 인기를 끌었던 김하진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남자 요리 시대’의 개막을 알린다기보다는 성적 역할이 배제된, 그저 여자 요리 시대의 보조였다. 이정섭 선생의 ‘여성적인 캐릭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제 진짜 남자들의 요리 시대가 개막되었다고 한다. 남자들이 집에서 요리를 한다. 백종원 등이 그 희망(?)을 북돋웠다. 주 5일 근무, 핵가족의 심화가 이를 부추겼다. 쉬는 날이 늘어나니 남자들이 집에서 무언가를 하게 되었고, 요리도 그 선택지의 하나가 되었다. 서양남자들처럼 작업실을 갖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잔디를 깎으며 주말에 아이들과 야구를 할 수 없는 한국 남자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아파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이들 유모차를 끌거나 마트에 가거나 요리를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가족의 심화도 영향을 끼쳤다. 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남자들은 부담없이 부엌에서 앞치마를 둘렀다. 요리 잘하는 남자들을 조망하는 여러 담론도 생성되었다. 요리가 단순히 먹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소통의 도구로 등장했다. 요리 잘하는 남자들이 섹시하다는 그 지긋지긋한 섹시 수사도 등장했다.
이제 남자들은 멋지게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동차를 운전해서 성적 매력을 풍겨야 하고, 집에 가서는 오븐부터 켜서 특별요리를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블로그는 제대로 된 맛집 리뷰를 실어야 하며, 요리사 친구도 하나 사귀어야 하며(프랑스식, 한식, 일식 등 장르별로 하나씩 있으면 더 좋고), 영양사처럼 칼로리 계산도 해야 한다. 사실, 요섹남(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은 결국 남자들이나 여자들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서 소비하는 걸 좋아하는 대중매체가 먼저 떠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이제 무엇이든 다 잘하면서 요리도 잘하기를 바라는 대상이 된 것이라면 무리한 주장일까.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담론이 생성되면서 남자들도 요리를 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부담이 노출되었다. 그런데 요리 자체의 흥미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도 만들어지고 있다. 누군가 내게 “요리의 장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지체없이 대꾸한다. “한 시간 안에 어떤 일의 결말이 생기고,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재료를 준비하고, 그것을 요리해서 어떤 놀라운 결과가 나오는 데 한 시간밖에 안 걸리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나. 게다가 그 비용도 싸며, 결과물에 대한 반응도 뜨겁다. 바로 먹어서 미각을 충족시키며 혈당도 올려주기 때문이다. 역사 이전에 원래 남자들은 사냥을 했고, 여자들이 요리했다. 그 후에는 직업적인 선택으로 남자들이 요리를 했으며, 요리를 베푸는 것도 남자들의 권력에 봉사했다(여전히 오래된 가문의 제사에서 제수 장만은 반드시 남자들이 하는 것은 확실한 그 증거다). 이제는 남자들이 흥미와 스스로의 요구로 요리를 한다. 예를 들어, 가루로 된 어떤 물질(밀가루)이 물리(부푸는 것). 화학(겉이 익어서 구수해지는 것), 생물(이스트의 작용)의 통합적인 반응으로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남자들의 놀이로서 엄청난 반응을 얻어낸다. 바로 빵 만들기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특히 중년 남자들이 요리에 빠지는 것은 더욱 주목할 현상이다. 가부장적인 세대인 그들이 접시를 만지고 불을 다루는 것은 신기할 정도다. 아마도, 이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인 듯도 하다. 100세 시대 중년 남자들은 이제 놀이를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길고, 사회적 활동기는 짧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삶의 질을 바꾸는 중년 남자들의 열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 박찬일 필자는 서교동 ‘로칸다 몽로(夢路)’ 셰프이면서 문학과지성사 편집장이다.
‘글 쓰는 셰프’ 박찬일 편집장은 요리사이자 음식에 관한 칼럼을 쓴다. 훤칠한 외모를 하고도, 그는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쓴다. 저자로 이름을 올린 책도 20여 권에 달한다. 그의 글에는 항상 음식과 문화, 역사, 정치 이야기가 버무려져 있다. 등의 책을 썼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