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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 어렵든 젊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이가 들면 눈물샘이 쪼그라들고 말라버리는지 알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슬픈 일을 당해도 스쳐가는 바람 대하듯 무덤덤해 지는 방관자가 될 것으로 믿었다. 아니다. 조금만 소외되어도 잘 삐지게 되고 서러움의 눈물이 이슬처럼 맺힌 후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감성적으로 그냥 슬프고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아내가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식구들 데리고 제주도 놀러갔단다. 우리보고 같이 가자고 했어도 같이 갈 형편도 못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자기들끼리만 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생각과 소외되었다는 느낌이 확 오면서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따로 살고 있으니 부모에게 말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며칠 다녀오는 것은 당연하다. 머릿속 이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가슴속에서는 이유 모를 황량한 찬바람이 분다. 어머니는 저녁 할 때쯤이면 할머니의 의사를 꼭 물었다. ‘어머님 오늘저녁 뭘 할까요?’하고 묻는다. 농촌의 저녁메뉴는 언제나 특별한 것이 없으니 뻔하다. 밥, 국수, 죽이다. 할머니의 대답은 늘 한결같다.‘ 네가 알아서 해라!’이다 매일저녁 되풀이되는 이 질문과 대답을 왜 하는지 어려서는 몰랐다. 필자가 나이를 들어보니 이런 몇 마디 말에 부모는 자신의 권위가 살아 있다는 위안을 받는다. 영화를 보러갔다. 슬픈 장면이 있다. 눈물이 핑 돈다. 주위의 반응이 너무 무덤덤하여 눈물 닦기가 조심스럽다, 나이든 사람이 눈물 찔끔거린다고 주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눈을 비비는 척 하면서 슬쩍 눈물을 훔친다. 양쪽 눈을 다 닦으면 저사람 울고 있네 하는 모습이 들킬까봐 한쪽 눈만 닦고 시차를 두고 다른 쪽 눈을 닦는다. 남들을 의식하면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나이든 남자다. 집에서 TV를 보는데 다른 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잘도 보고 있는데 혼자 눈물이 흐를 때 참 민망하다. 슬그머니 일어나 세수를 하고 들어온다. 남자는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 K는 대학의 시간강사다.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려고 머슴 같은 노력을 계속하지만 점점 더 절벽을 느낀다.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의미를 통 모르는 시골의 아버지는 대학교수인 아들 자랑이 대단하다.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은 맞지만 수입도 형편없는 시간강사라는 말을 차마하지 못한다. 더구나 대학교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버지에게 쪼들리는 경제사정은 더더욱 말 못한다. 강의가 없는 날에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한다. 밤에는 대리운전도 해보지만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지하 동굴이 있다면 몰래 찾아 가서 목이 터져라 ‘이 더러운 세상아!’하고 외쳐 보고 싶다. 그러나 통곡할 장소가 없다. 어디를 가도 인파의 행렬에 허우대 멀쩡한 남자가 마음 편히 울어볼 곳조차 없다. 화장실에 가면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이 눈물하고 이것이라고 적혀있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되는가! 남자는 농경사회에서는 근육질의 몸만 필요했지만 지금은 감성이 필요한 시대고 생존경쟁의 다양한 변수가 많은 세상이다. 한마디로 울 일이 많은 세상이다. 남자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때가 있고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고 싶을 때가 있다.
- 2017-11-1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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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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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의 힘
- 며느리가 어쩌다 다리를 다쳤다. 유아원에 다니는 4살 손자, 6살 손녀 둘을 할아버지가 자동차로 등하교 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며느리 입장에서야 시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출퇴근 식으로 들락날락 아이들 돌보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 SOS를 보내는 것은 마땅히 도움 청할 곳도 없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시아버지에게 부탁할까 싶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아들네 집은 멀다. 우리 집에서 전철로 한 시간 반을 가야 한다. 전철에서 내려도 집까지 십 여분은 걸리는 거리이니 편도시간만 두 시간이 훌쩍 걸리는 길이다. 왕복 네 시간은 길에서 보내야 한다. 게다가 유아원은 10시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9시 반까지는 아들네 집에 도착해야 한다. 아이들 있는 집이 다 그렇지만 아침은 집안이 온통 전쟁터다.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는 행동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깨워야 하고 씻겨야하고 아침밥을 먹여야 하고 옷을 입혀야 한다. 며느리가 아픈 발을 동동거리며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는데도 아이들은 도무지 남의 일처럼 생각은 딴대 있고 행동은 굼뜨다. 그 바쁜 틈에도 뽀로로 같은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고 보챈다. 할아버지도 옆에서 눈치껏 며느리를 도와주는데 아이들 하는 행동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다. 등짝이라도 한 대 후려 패 버리고 싶다. 며느리는 인내심 있게 계속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어르고 달랜다. 필자가 자식들을 키울 때는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하지만 틀림없이 이런 경우라면 달래기보다는 야단치고 매를 들었을 것이다. 전통적 육아교육에다 주먹구구식의 상식을 더해 아이를 우리가 키워 왔다면 현대의 젊은이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육아기법을 배운다. 책꽃이를 둘러보아도 육아에 관한 책들이 많다. 젊은 세대가 우리세대보다는 아이들 키우는 방식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짬을 내어 냉장고를 보니 ‘어머니의 기도’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어머니의 기도 - 찰스 마이어 『 아이를 이해하고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묻는 말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도록 도와주소서. 면박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이가 우리에게 공손하길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아이에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웃거나 창피를 주거나 놀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비열함을 없애주시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며느리도 사람인데 울컥 화가 치밀 때는 매를 들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같은 글을 자주 읽으며 마음 수양을 하는구나! 역시 내가 며느리는 잘 얻었구나! 하고 감탄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시집간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너도 아이를 때려서 훈육하려고 하지 마라. 하고 며느리 자랑을 하였다. 딸을 통해 이 이야기는 아들에게 전해졌다. 아들이 폭소를 터트리며 한바탕 웃은 후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시아버지 앞에서 아이를 어떻게 때리느냐! 우리끼리 있을 때는 훈육의 매를 들기도 하지’ 하더라는 것이다. 아! 그래 맞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힘이다. 우리도 어른들 앞에서는 아이들을 때리지 못하게 교육받았다. 화가 난 아버지를 피해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가면 상황 끝이었다. 할머니 품속 치마 속은 엄마도 건드리지 못하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부모한테 매를 맞아 죽은 아이가 있다는 방송을 보면서 할아버지가 있는 집의 아이였다면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할아버지가 아비나 어미보다는 한발 뒤에 물러서 있지만 매의 눈으로 손자, 손녀를 지켜보고 있다. 감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넓은 보호막을 치고 있다. 정신이 온전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한 친부모라 하더라도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정교육이요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위력이다.
- 2017-08-1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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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부장관’을 꿈꾸는 개그우먼 반전 매력의 프리티우먼 이성미
- 그녀는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었다. 내일모레가 환갑인데 이토록 귀엽다니,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희한한 여인이다. “일단 오늘 하루만 남편을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 평생의 꿈이었던 현모양처가 저절로 되었다고 말하는 개그우먼 이성미. 한여름 오후의 데이트는 분명 귀여운 여인과 시작했는데 끝날 무렵에 보니 작은 거인과 앉아 있었다. 그 나이에 몸무게가 40kg도 안 나간다. 뭇 여인들에게 몰매 맞기 싫은지 실토했다. “안 먹어서 이래요~ 일할 때 많이 먹으면 졸리고 느긋해져서 집중력이 떨어져 할 수 없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다”고 자백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성미 또래의 여인들을 할머니로 생각했다. 지금은 필자 이봉규도 60이 되고 보니 이 또래의 보통 여인들이 할머니까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섹시한 향기가 나는 여인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성미는 여름철 농익은 살구처럼 귀엽고 섹시하다. 날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다. 한량 이봉규가 잠깐 정신줄을 놓았다. 프로의식을 되찾아 몰아치듯 인터뷰를 시작했다. “100세 시대에 사랑의 이모작을 위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해본 적이 있나?” 이봉규의 다짜고짜 도발에 그녀는 “기운이 있어야 그런 모험이나 상상도 하죠!”라고 말한다. 한숨도 살짝 묻어나온다. 희극인답게 개그처럼 위장했지만 그 속내를 살짝 들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때는 션과 정혜영 커플이 부러웠다. 왜 나는 션 같은 남자를 못 만났을까?” 스스로 푸념도 해봤지만 결국 “내가 정혜영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고 지금의 남편에게 충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성미 남편은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연예기획사 웰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면서 국제대학교 조교수다.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은 이성미의 열애설을 취재하러 왔다가 그녀에게 푹 빠져버렸다. 인터뷰하고 얼마 후 남편은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으며 적극적으로 대시했다. 그녀의 반응을 엿본 남편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저랑 결혼할 생각 없으세요?” 하며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나름 차분한 이성미는 “연하이고 게다가 기자는 싫다”고 잘라 말했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일각의 여지는 남겼다. “부모님께 허락을 먼저 받아와라!” 하며 돌려보냈다. 몸이 후끈 달아오른 남편은 이틀 뒤 찾아와서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았다”며 “6개월과 1년 뒤 언제 결혼하고 싶냐?”고 이성미를 다그쳤다. 남편의 불도저식 박력에 이성미는 항복했고 4개월 뒤 결혼에 골인했다. 우리는 ‘묵은지 부부’ 한 이불을 덮고 산 지가 어느덧 25년이 넘었다. 한때 결혼생활이 살짝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고 지금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는다. 권태기 시절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남편과 거리를 두기 위해 캐나다에서 7년을 살기도 했다. 두 살 연하인 남편을 약간 무시하는 교만함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생각을 바꿔 자신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맞추기로 마음먹었더니 부부관계가 확 달라졌다. 남편한테 전화가 오면 이성미 휴대폰에 ‘존경하는 남편’이라는 글자가 뜬다. “일단 오늘 하루만 존경하자!” 그렇게 각오하고 사니까 술술 풀리더라는 것.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구질 것 같은데 의외다. “아직도 방귀를 안 텄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성미의 꿈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현모양처다. ‘묵은지 부부’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냄새도 나고 매력은 없지만 깊은 맛이 있는 부부관계”라고 ‘묵은지 부부’에 관해 설명한다. 그녀의 현모양처 꿈이 이뤄진 것은 자식들의 평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 같니?”라는 이성미의 질문에 아이들이 “하나님, 집, 가족”이라고 대답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술회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평생 꿈인 ‘현모양처’가 됐구나 하며 가슴이 벅찼다고 한다. 이성미는 어린 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기에 현모양처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떠나 새엄마 밑에서 컸다. 새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또 다른 새엄마와도 살았다. “엄마가 네 명이나 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삶이 여유로워졌지만 어릴 적 자신이 겪은 불행을 남편과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은 각오가 그녀의 가족을 행복하게 이끌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 너무 여유로워진 걸까? 가끔 자식들이 말을 안 들을 때는 개그맨답게 “이것들이 새엄마랑 안 살아봐서 이래!” 하며 다그칠 때도 있단다. 그래도 아이들이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맙다.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고2 딸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다. 이성미는 “도둑질 아니면 뭐든지 자식들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며 은근히 지원사격이다. 그러면서 선배 입장에서 “딸의 성격이 대범해 연예인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다(악성 댓글에도 견딜 수 있는 성품이라야 연예계에서 버틸 수 있다). 이성미가 자식들에게 무턱대고 관대한 것만은 아니다. 큰딸이 대학 1학년 때 입학을 보류시키고 1년간 알바를 시켰다고 한다. 자립심을 키워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등 이런저런 알바를 하던 중 시간당 3만원 이상을 주겠다는 고액 알바광고 전화가 걸려왔다. 자세히 물으니 “아저씨들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된다”는 꼬임이었다. 세칭 룸살롱, 단란주점 같은 유흥업소로부터의 유혹이었다. 엄마와 모든 것을 숨김없이 상의하는 딸이었다. 그때도 엄마와 상의했기에 딸이 어둠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100% 아이들을 믿는다. 믿는 만큼 아이들도 다 얘기한다”며 딸 자랑을 하는 이성미에게 이봉규가 태클을 걸었다. “글쎄~ 진짜 다 얘기할까? 그 나이 때는 엄마에게 숨기고 싶은 일도 발생하고 상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도발했더니 그녀는 “우리 가족은 각자 결정하는 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다. 걱정은 지들이 하는 거지 엄마는 상관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한다. “여태껏 아이들의 성적표를 본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말도 한다. “흙에서 자란 아이는 용기로 크고, 아스팔트에서 자란 아이는 오기로 자란다”는 말을 20세 때 어디선가에서 듣고는 가슴에 새기고 아이들을 키울 때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성미의 집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돈 항아리’가 있다. 항상 5만원 정도 비치해놓는데 아이들이 알아서 꺼내간다. 그녀의 ‘믿음 가정교육’에 상당한 공감을 느꼈다. 귀여운 여인 그리고 작은 거인 아름다운 얘기만 하고 인터뷰를 끝낼 한량 이봉규가 아니라서 전매특허 질문을 훅~ 던졌다. “만약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면? 용서할 수 있나?”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것으로 이해해줄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금방 “그런데 아이들 때문에 바람은 피우지 않을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로 맹세했거든” 하며 마무리 짓는다. 그녀의 표정에 강한 자신감이 묻어나온다. 이대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다. “아내로서 부족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나?”라고 묻자 의외의 답변을 한다.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애교도 없고 사랑 표현도 못한다.” TV 화면에 비치는 그녀의 평소 이미지와는 정반대다. 그렇다면 이성미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백조처럼 귀엽게 보이려고 엄청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들어서일까? 인터뷰하는 동안 그녀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현모양처 이외의 앞으로의 꿈을 물으니, 교통부장관을 하고 싶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밝힌다. 뉴스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운전이 제일 무섭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살리고 싶다고 부연 설명한다. 교통부장관이 어려우면 사복경찰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체구는 작지만 사회봉사에 대한 포부는 무척 크다. 지금은 ‘CH 114’라는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교회를 찾아주는 사이트인데 올 9월에 오픈할 예정이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한 달에 1만 명 정도나 된다니 믿기 힘들다. 이성미는 이들이 안타까워 이 같은 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어릴 시절과 젊은 시절 한때의 불행을 슬기롭게 승화시킨 이성미는 현모양처의 평생 꿈을 이룬 것을 넘어 지금은 남 도울 생각에 골몰하며 살고 있다. 인터뷰 시작 때는 귀여운 여인이었는데 끝날 무렵에는 그녀가 작은 거인으로 오버랩된다.
- 2017-08-03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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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도나우 강변의 예술인 도시, 센텐드레
-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약 45km)을 묶어 도나우 벤트(Danube Bend)라 부른다. 도나우 벤트 중 ‘센텐드레’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1000년의 역사가 흐르는 고도로 사적과 문화유산이 많고 17~18세기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도시를 빛낸다. 특히 도시 전체에는 예술미가 넘쳐난다. 1920년대,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시골 마을로 숨어 들어온 예술가들이 만든 도시답게 말이다. 신성로마제국 때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센텐드레(북쪽으로 약 20km)까지는 대중교통(지하철, 버스 혹은 배)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카노노크(kanonok)’ 거리를 따라가면 시 청사를 만나고 곧 메인 광장에 이른다. 메인 광장으로 다가설수록 골목길의 운치는 깊어진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자갈돌 박힌 골목의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시는 약 1000년 전, 고대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다. 로마제국의 통치 시절에는 ‘늑대성’으로 불리며 군사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9세기에 마자르족이 장악했고 16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1541~1686)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원주민들은 대거 이 도시를 떠났다. 17세기 말, 16년간의 질긴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1683~1699)을 끝내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 도시를 점령한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등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바로크 스타일의 주택과 지중해풍의 교회 등을 건축한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던 센텐드레는 1872년에 도시로 승격됐고 2010년에는 인구가 2만5000명이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독립을 선언한 예술인들 모여들다 센텐드레의 메인 광장은 오래전부터 부다, 비셰그라드, 필리스의 시골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1763년에 만들어진 ‘페스트 십자가’가 서 있다. 세르비아 상인들은 페스트에서 구제된 것에 감사해하며 바로크 양식의 그리스 정교 십자가를 도시에 헌정했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 밑에는 세르비아 남자가 거꾸로 묻혀 있다는 전설이 흐른다. 옛날 세르비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위로 올라온다고 믿는 관습이 있어 시체가 나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밑으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으로는 합스부르크 지배 시절에 만들어진 17~18세기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752년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을 가진 블라고베스텐슈카(Blagovesztenszka, 성 수태고지) 세르비아 정교회가 눈길을 끈다. 베이지색 건물에 청록 뾰족 지붕이 돋보인다. 그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작은 개인 갤러리, 다양한 기념품 숍, 부티크, 액세서리 가게, 레스토랑 등이다. 특히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숍에 진열된 전시품들. 예사롭지 않은 ‘예술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가 있다. 헝가리 공산주의 정권 시절인 1929년부터 예술가(화가, 음악가, 시인, 문학가)들은 이 도시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독립이 필요했던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집단으로 대거 이주한 것이다. 이후부터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는 ‘예술과 예술인’이 됐다. 헝가리의 대표 도예 작가인 코바치 머르기트(Kovacs margit, 1902~1977)의 도자기 박물관이 유명하다. 18세기의 건축물인 ‘소금 상인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1개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300개 이상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온 도시에 퍼져 있는 예술적인 제품들은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도시 가장 높은 곳의 플레바니아 교회 센텐드레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플레바니아(성 요한) 교회로 향한다. 약간 경사진 언덕의 좁은 골목에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물이 많다. 이 교회 자리는 원래 성채였다. 중세 때는 성 안드레(Saint-Andre´)를 위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성 안드레는 ‘센텐드레’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됐다가 1241~1280년 사이에 재건됐고 14~15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석조 성당이 최초로 건축됐다. 16세기에 터키 침공으로 파괴됐고 지금 건물은 18세기의 것이다. 교회는 작고 소박하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결혼식이 한창이다. 실내를 기웃거리는 여행객을 위해 성당 안을 보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헝가리인의 마음씨가 살갑다. 교회에서 구시가를 내려다보면 매력적인 지붕들이 돋보인다. 숍이 된 주택 안쪽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이라서 도나우 강을 훤하게 조망하지는 못한다. 교회 입구에는 헝가리의 전위 예술가인 초벨 벨라(1883~1976)의 박물관이 있다. 초벨 벨라가 죽기 한 해 전인 1975년에 개관했다. 내부에는 초벨과 그의 부인 마리아 모독(1896~1971)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또 일로스바이 바르가 이스트반(Ilosvai Varga Istva´n, 1895~1978)의 작품도 상설 전시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성공한 초벨 벨라는 1930년대 중반부터 센텐드레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옛 향기가 물씬한 토록(Torok)식 좁은 골목을 헤집으면서 18세기에 건축된 베오그라드 교회로 간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48m)을 가진 베오그라드 교회는 성 요한 교회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1756~1764년에 체코의 둥근 천장이 있는 본당으로 확장했고 탑을 기점으로 중간은 ‘남성 교회’, 그 아래를 ‘여성 교회’로 나누었다. 주교들의 묘소는 본당 지하에 있다. 도나우 강변과 보그다니 골목 언덕을 내려와 도나우 강변으로 향하면 먼저 ‘보그다니(Bogda´nyi)’ 거리에 이른다. 도나우 강변과 가장 가까운 이 골목엔 해묵은 분위기가 켜켜이 배어 있다. 선착장이 인접한, 내륙의 첫 골목이니 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18~19세기의 낡은 건물들은 숍으로 이용되고 있다. 오래된 유적들은 긴 역사를 증명해준다. 로마 때 이용되던 공중목욕탕도 발견됐다. 현재의 와인 박물관도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도시의 와인 만들기는 수세기 동안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오스만투르크 침략 이후 이주민(세르비아인, 달마시아인, 그리스인)들은 적포도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의 펌프는 아직 남아 있고 당시 집집마다 갖고 있던 코챠뇨(kacsa´rnya, 포도주 저장실)도 많이 발견됐다. 코챠뇨 1호집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 재위 1765~1790)가 치안 판사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조사관에게 준 집이다. 이 집에서는 헝가리의 유명한 작가 모르 요커이(Mo´r Jo´kai, 1825~1904)가 러브 러비(Rab Raby)라는 작품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보그다니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도나우 강에서는 옛 로마시대의 돌다리 흔적, 센텐드레의 섬, 포도원의 아름다운 언덕 등을 볼 수 있다. 토요일마다 예술 시장이 열리는 예뉴 둠챠 거리 보그다니 거리를 거슬러 올라오면 다시 메인 광장을 만나고 곧추 직진하면 예뉴 둠챠(Jeno″ Dumtsa) 거리다. 1897년, 시 승격 25주년을 기념해 당시 시장인 예뉴 둠챠(1838~1917)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 예뉴 둠챠는 부모를 따라 20세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79세까지 거주했다. 대법원장을 지냈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도시 최초의 시장이었다. 그는 부다와 센텐드레를 연결하는 ‘통근열차’를 만든 것 외에도 도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 거리의 특별한 재미는 주말에 열리는 장터다. 마치 잔칫날을 만난 듯 흥겨워진다. 생선, 소시지는 물론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들이 등장한다. 할머니는 전통 빵 리테쉬(Retes, 얇게 편 반죽에 과일을 말아 넣어 구워낸 빵)를 구워 내온다. 체리, 스트로우베리 등 다양한 잼이 들어간 ‘리테쉬’는 달달한 게 맛이 좋고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전통 방식으로 굽는 키르토쉬칼라취(일명 굴뚝빵)도 좋은 간식거리다. 또 이 거리에는 예뉴 바르차이(Jeno″ Barcsay, 1900~1988) 화가의 컬렉션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센텐드레를 방문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살았다. “나는 센텐드레에서 살았고 센텐드레에서 회화의 길을 창조했다. 센텐드레에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삶과 예술이 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센텐드레에서 가장 큰 정교회인 바로크 양식의 1753년에 건축된 성 피터 앤 폴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 등을 볼 수 있다. 또 19세기의 유명한 세르비아 작가이면서 산문 작가인 야코프 이그냐토빅스(Jakov Ignjatovic´, 1822~1889)의 생가(No. 5)도 근처에 있다. 러시아의 ‘고골’과 자주 비교되는 그는 고향 센텐드레를 많이 언급한다. 작가는 책 속에서 묻는다. “당신은 아는가? 센텐드레가 어디 있는지?”라고. Travel Data 현지 교통 부다페스트 바티아니(Battiany) 역이나 테르(ter) 역에서 센텐드레행 초록색 교외 열차(www.bkv.hu)가 수시로 운행한다. 30~40분 소요된다. 버스(www.volanbusz.hu)나 유람선(www.silver-line.hu)을 이용해도 된다. 대형 유람선은 7~8월 주말에는 매일 운항한다. 비수기나 물 수위가 낮을 때는 작은 배가 정기적으로 운항된다. 센텐드레 관광 사이트 www.iranyszentendre.hu/en 기타 센텐드레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민속촌이 있다. 약 100년 전 헝가리 각 지방의 가옥과 생활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한국의 민속촌'과 비슷하다. 60ha의 면적에 여덟 개 지방의 312채 건물들이 있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복잡한 부다페스트보다는 센텐드레에 숙소를 정하고 여행을 다니면 좋다. 현지 주민처럼 살아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을 묶어 도나우 벤트라 부르는데 센텐드레 외에도 비셰그라드, 에스테르곰이 있다. 모두 센텐드레와 인접해 있는 소읍들이다. 특히 에스테르곰은 볼거리가 많고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바로 인접해 있다. 날짜를 잘 나눠서 살면 제법 유용한 여행이 될 것이다. 꼭 한 번은 경험해보고 싶은 한 달 여행 방식에 잘 어울린다.
- 2017-06-0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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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위에 오뚜기
- 그때도 지금처럼 아직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습니다. 필자는 엄마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엄마 손은 따뜻했고 필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영등포구에 자리 잡고 있는 우신초등학교. 당시엔 우신국민학교라 했죠. 그때 이미 5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은 100년이 훌쩍 넘은 서울에서 몇 안 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필자의 작은 눈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었지만 학생 수도 엄청나게 많아 그 큰 운동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신입생만 한 반에 70명 정도씩 20개 반 정도나 됐으니 대략 1400명은 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입생 아이들은 모두 엄마나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왔으니 그야말로 학교운동장은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었고요. 선생님이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외쳐도 운동장은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등에 새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가방 안에는 스케치북과 색연필 또는 색색의 크레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벼운 비닐가방이었지만 체구가 작은 아이들에겐 그나마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가방은 크고 덜렁거렸습니다. 학생들의 오른쪽 가슴엔 명찰이 그리고 왼쪽 가슴엔 손수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손수건은 멋진 장식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코를 닦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의 아이들은 잘 먹지 못하고 영양이 부족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코를 흘렸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푸른색을 띤 콧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영양도 영양이지만 잘 입지 못하고 밖에서만 뛰어놀아 늘 감기에 걸려 있었고 그래서 콧물을 그리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한 여 선생님을 따라 우리는 노래와 춤을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춤동작과 노래를 모두 잘 따라했습니다. 이때 배운 노래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군요. 지금도 초등학교 신입생들이 이 노래를 배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검은 눈을 쏙 내어 뒤뚱거리며 배만 불쑥 내민 꼴 우습구나야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노래가 끝나도 우린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요. 우린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 사열 종대로 길게 늘어서서 담임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일은 몇 시까지 이제는 엄마 손 잡지 말고 혼자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학한 후 한 2주일 정도를 계속 아침 10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매일 춤과 노래를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춤과 노래를 배우는 일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턱없이 부족했던 교실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전반, 오후반도 부족해서 오후 늦은 시간에도 반을 편성했거든요. 그리고 어떤 학급은 80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이 우글거리기도 했습니다. 책상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세대를 일컬어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합니다. 아마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은퇴를 걱정하는 것도 이처럼 엄청난 수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부잣집 아이들은 중국집으로 가서 자장면을 먹기도 했는데 필자는 가난해서 그냥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자장면을 못 사줘 서운했는지 필자 눈치를 보더니 밖에서 꽁치 한 마리를 사다가 구어 점심을 차려주셨습니다. 나는 꽁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고기나 생선이 귀한 시절이었으니 꽁치 한 마리 구우면 가시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필자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마치 필자가 막내인 양 어리광과 떼를 써서라도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하는 아주 이기적인 꼬마였습니다. 형들이나 동생이 보면 얼마나 미웠을까요. 지금도 생각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면서도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왜 가방을 벗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아마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멋있고 자랑스러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 살 많은 형들이 필자를 보더니 놀렸습니다. 1학년 꼴뚜기 말라빠진 꼴뚜기… 흔히 1학년 신입생들에게 놀리는 노래이지요. 괜스레 화가 났습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이름을 부르고 뛰어놀던 사이였는데 이제 그들은 2학년 선배가 되고 필자는 1학년 꼴뚜기가 되었으니 은근히 부아가 났던 것이지요. 놀리지 말라며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어울려 놀았으니까요. 봄이 올 때마다 아름다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봄 햇살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입학식 날,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서 불렀던 노래가 지금도 아련히 들려오는 듯합니다.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 2017-05-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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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 노부부에게 받은 밥상
- 널리 알려졌다시피 도시는 대체로 각박하다. 매력도 편익도 많지만 경쟁과 계산이 불가피한, 일종의 정글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남모를 고독을 안고 도시를 살아가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서울의 어떤 화가는 작업실에 쥐를 기른다. 외로워서 쥐를 기른다. 그는 아마 쥐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너도 외롭니? 나만큼 외롭니?” 쥐를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그가 처량하게 늘어놓는 대사는 대강 그렇다.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심한 세월을 관조한 끝에 그가 신중하게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늙을수록 외롭다! 도시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결례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도시는 그리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 물질은 풍부할망정 인정이 메마른 탓이다. 물론 도시에도 인정스런 사람들이 왜 없으랴. 그러나 인정을 쓰기보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거리의 행인에게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어, 마침내 죄 없는 사람을 먼지 나도록 늘씬하게 두들겨 패는 변괴마저 벌어지는 게 도시이지 않던가. 남의 흉을 볼 것도 없다. 나 자신부터가 그렇다. 나도 때로 거리에서 마주친 애먼 눈길에 까닭 모를 적의(敵意)를 느끼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이 타락한 영혼을 무슨 약으로 고쳐야 하나. 내가 나의 몰인정한 치부를 들여다볼 때면 부끄러워진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여차하면 옹색한 마음이 도드라진다. 운동장 사이즈의 넉넉한 마음그릇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항복! 대번에 주눅이 든다. 이럴 땐 헛살았다는 회의가 밀려든다. 쥐를 기르는 화가처럼, 다독이기 난처한, 먹먹한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수록 따뜻한 생각을 위주로 하고 싶고, 너그러운 가슴으로 만고의 불한당마저 살포시 감싸며 살고 싶지만, 웬걸, 심사가 뒤틀리면 간장 종지처럼 비좁아진다. 그러고 보면 이미 엉터리 인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쥐를 기르거나 쥐약을 마실 수는 없는 일. 궁지에 몰린 기분일 때, 나는 가급적 햇살 쪽으로 마음을 옮겨둔다. 따뜻한 추억을, 따뜻한 사람을, 따뜻한 정경을 떠올려 시린 가슴에 온기를 부여한다. 남도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만난 노부부의 얘기를 해볼까. 전라도의 외진 산촌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도시의 소음과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후미진 산골.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야산들의 품에 안긴 마을은 하염없이 낙후했으나 포근했다. 돌담을 두르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농가들은 하나같이 허름했으나 정겨운 풍색이었다. 나뭇가지로 엮은 사립이 곱살한 어느 집 텃밭. 할머니 한 분이 동그랗게 웅크려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호미질에 몰입된 그 얌전하고 바지런한 모습은 아무런 결함이 없이 수려했다. 시골 노인들과 나누는 담소는 늘 즐겁다. 그들의 입에서 순후하게 흘러나오는 인생사와 세사란 범상해서 공감이 쉬우며, 혹간 의표를 찌르는 얘기가 튀어나와 슬며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할머니 앞에 앉아 이모저모 소식을 물었다.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사셨느냐, 읍내 오일장엔 자주 나가시느냐, 건강은 괜찮으시냐, 면사무소 복지계에서 출장 나온 김 주사처럼 시시콜콜 캐물었다. 별안간 쓱 출현해 눈앞에 앉은 인간이 돌팔이 약장수이거나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야박한 의심 따위는 눈곱만치도 하질 않는 게 분명해 보이는 할머니는 오직 선선히 응답했다. 마치 무슨 횡재라도 한 사람처럼 상냥한 대꾸로 일관했다. 사람의 입이란 친절을 베푸는 데 오직 그 용도가 있다는 양 자상한 언사들이 흘러나왔다. 얼마 뒤, 부디 건강하시라, 덕담을 건네고 일어서 나오려던 때였다. 할머니가 호미를 놓고 일어서더니 나를 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워매, 그냥 가실라고라? 쪼께 기다려보쇼잉!”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밥상을 차려 내올 테니까 잠깐 기다렸다가 먹고 가라는 채근이었다. 읍내 식당에서 점심을 이미 먹었던 나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자못 합리적인 고사(固辭)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찬은 변변치 않지만 한술이라도 뜨고 가야 한다며 거듭 성화였다. 나는 사양에 사양을 반복했다. “아따! 그러지 말고 잡숫고 가시랑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뱃속엔 이미 빈자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정을 재차 주르룩 설명했다. 그때였다. 토방 빈지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서방님이 마루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낮잠을 주무시다가 지상의 한낮에 벌어진 묘한 분쟁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이 영감님은 단숨에 소란한 사태를 평정하겠다는 양 큰 소리로 탕탕 외쳤다. “하이고, 한술 뜨고 가랑게 시방 어째 그러는 거시여? 엔간하면 자시고 가셔!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잖여? 든든히 먹어둬야 한당게!” 이런! 남들이 이 희귀한 경치를 바라보았다면 셋이서 쌈박질을 하는 것으로 비쳤으렷다. 내가 노부부의 호의를 사양한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밥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노부부가 나를 붙잡은 이유에 비하면 실상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다음처럼 나직이 중얼거려 마침내 나를 꺾어버렸다. “이날 이때까장 때 돼서 내 집에 들어온 사람, 밥 안 멕여 보낸 적이 없었는디 워째 그런당가?” 결국 나는 밥상을 받았다. 산골 노부부의 삶에 감도는 인간애, 육화된 인정에 탄복하며 밥을 먹었다. 내 부모 외에 그 누가 나에게 밥 한술 먹이고자 그토록 안간힘을 다했던가. 그리워라, 할머니가 차려준 조촐한 밥상이여! 정갈한 인정이여! 아무런 계산이나 속셈이 없는 그 도타운 인정을 그들은 어디서 얻어왔을까. 평소 이렇다 할 선행을 한 적이 없는 채, 그저 쌀벌레의 일종으로 살아온 나는 뭔가 켕겨 괴로웠으며, 또 심히 행복했다. 오늘날까지 지구의 인간 생태계가 그나마 무사한 것은 오직 그 노부부 덕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 2017-03-3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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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 다루는 법
- 며칠 전 세 명의 60대 남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막걸리를 곁들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100세 시대로 화제가 넘어갔다. “지겨운 배우자와 100세를 함께 사는 것은 고통이야.” “100세까지 살려면 세 번은 배우자를 바꿔야 살 만하지.” “그것도 모자란다.” “난 먹을 것 충분히 주고 혼자 떠나고 싶어. 나를 찾아서.” “그래서 졸혼(卒婚)이 유행이야.” 첫사랑, 첫 키스, 첫 남자. 처음처럼 신선하고 설레는 말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 첫이 낡아서 헌것이 되어도 쓸모없어진 물건처럼 버릴 수 없는 게 문제다. 사람들은 싫증을 빨리도 낸다. 그래서 유행이 생기고 그 유행은 떠돌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유행이 유행을 싫증내는 것이다. 사랑도 싫어졌다가 핑계 대며 탕아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부부가 의견이 안 맞고 화가 나도 선뜻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 순수했던 첫사랑의 감정을 아직도 가슴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절절히 그리며 보고 싶어 했던 마음과 그 황홀했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녀는 처음 만났던 시기의 모습을 호호백발이 되어서도 연상시키며 현재의 모습과 같이 *오버랩시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십 먹은 할아버지에게 팔십 먹은 할머니는 처음 만났던 20세 처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단다. 남자들은 대부분 결혼 3년 차가 되면 신선함이 사라지면서 여성이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무렵은 출산과 육아로 여자가 자신을 가꾸는 것을 놓아버리기 쉬운 시기다. 김태희 같은 아내를 두고도 3년이 지나면 전원주 같은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는 항간의 농담 같은 얘기도 있다. 신선함 뒤엔 편안함도 있고, 세련됨도 있고 느긋함도 따라오는데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고 성적 신선도에만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자유를 꿈꾸기는 마찬가지다. 따스한 사랑을 꿈꾸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외롭게 살 가능성이 많다.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가슴을 열고 상대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 경험자의 충고다. 요즘 졸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졸혼이란 서류상의 결혼은 유지한 채 실제의 결혼생활은 졸업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졸혼을 꿈꾸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잔소리 듣고 싶지 않다.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남자들의 반란일 수도 있다. 집안의 기둥이며 중심이었고 최고 경배의 대상에서 제외된 소외감일 수도 있다.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나 대접에서는 배제된 가장은 서열이 강아지 다음이라는 서글픈 풍자도 있다. 그래서 허무감과 급속한 추락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러 피터팬처럼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찾아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졸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서글픈 것 같다. 그러니 일탈을 계획하는 남자들에게는 미리 줘버리자. 먹고 싶어 할 때 먹인다. 재운다. 자유를 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일정한 거리 이상의 접근을 삼가자. 왜 나와 틀리냐고 잔소리하고 묻지 말자. 다른 색깔도 함께 어울리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가.
- 2017-03-0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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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도식 화투치기
- 화투라 하면 그리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진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음습한 곳에서 후줄근한 사내들이 모여앉아 화투패를 잡고 서로의 눈치를 보거나 슬쩍 사기 치다가 들켜 싸움이 일어나는 등 부정적인 모습이 대부분이다. 도박의 성격을 띤 화투는 그렇겠지만, 경로당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앉아 재미로 화투를 치는 모습은 소소한 즐거움일 것 같고 명절이나 가족이 모였을 때 놀이로 하는 화투는 또 다른 느낌으로 화기애애하고 풍성한 즐거움이 연상되기도 한다. 들은 풍월로 화투의 종류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데 필자가 알고 있는 건 민화투라는 것이다. 아버지 계실 때부터 엄마와 우리 딸, 사위가 모이면 화투를 쳤다. 아버지는 같이 어울리지는 않으시고 항상 시끌벅적 노는 우리 옆에서 온화하게 웃고 계셨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도박처럼 화투를 한 것은 아니다. 점당 100원으로 많이 잃거나 따도 5.000원을 넘지 않았다. 화투가 치매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우리 가족은 엄마와 화투를 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했던 건 민화투이다. 화투방법으로 민화투와 고스톱 두 가지를 알고 있는데 머리를 무척 잘 굴려야 하는 고스톱은 우리 초짜 화투 꾼에겐 너무 어려운 종류였다. 껍질이라 불리는 피가 많아야 좋은 거고 뒤집어서 같은 패가 나오면 못 가져오는 등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는 민화투만 쳤다. 피가 많아야 좋은 고스톱과 달리 끗수가 높은 광이나 알맹이를 먹어야 좋고 홍단, 청단, 초단은 30포인트를 주어야 하며 비약 풍약 초약은 20씩 주어야 한다. 똥 네 장을 다 가져오면 40씩을 받을 수 있어 가장 인기가 있다. 광을 4장 따면 40을 받고 광 5장 모두를 획득하면 50을 받는다. 운이 좋으면 광 다섯 장이 모두 필자 수중에 들어와 엄청 크게 이기는 날도 있었고 엄마나 동생, 제부가 광을 획득해 포인트를 주고 나면 필자는 빈털터리가 되는 운 나쁜 날도 있었다. 기본 점수가 두 명이 칠 땐 120이 본이고 세 명이 치면 80이 본이 된다. 자기의 본 보다 넘은 끗수를 세어 점당 100원을 받을 수 있다. 비교적 간단한 룰이므로 즐겁게 칠 수 있는 화투방법이다. 그래도 화투를 하는 동안 각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상대의 의중이 무엇인지 간파하는 등 고도의 머리 굴리기를 해야 하니 아마 치매에 좋은 놀이라는 게 맞는 말일 듯하다. 참 이상한 점은 친선으로 시작했지만, 화투를 치다가 너무 안 맞고 점수를 잃게 되면 화가 끓어오른다는 것이다. 화투를 쳐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필자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닌지 필자가 먹을 패를 상대편에서 채 가거나 계속 몇 판을 내리 지다 보면 화가 났다. 그걸 감추지 못하고 신경질도 부렸으니 참 수양이 부족하다는 걸 끝나고야 느끼게 되어 머쓱하고 부끄러웠다. 그까짓 거 많이 잃어봐야 5.000원 미만인데 왜 그리 화가 나는지 돈 문제가 아니라 경쟁에서 졌다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이상하게 패가 잘 붙어 좀 크게 이길 때도 있었다. 그러면 엄마는 정말 기분 나빠하셨다. 그 후로 필자는 엄마의 기분전환을 위해 화투를 치는 것이니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일부러 좋은 패가 있어도 적당히 다른 것을 내서 점수를 줄였다. 그래서 엄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 그게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한때 졌다고 화를 냈던 일이 무척 창피하고 무안하다.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가신 이후로 우리 가족은 화투에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엄마가 우리 집 옆으로 이사 오신 얼마 전부터 다시 화투를 하게 되었다. 화투 하는 동안 정신을 쏟으니 잡생각이 없어져 좋다는 엄마를 위해 하루 한 번씩 찾아가 화투패를 돌리고 있다. 필자가 잘 되는 날은 대부분 눈치채지 못하게 져주는 방법을 쓰고 있고 그런 걸 알지 못하는 엄마는 오늘은 화투가 잘된다며 기분 좋아해서 소기의 목적 달성이다. 필자만 보면 화투 치자며 붙잡으니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상대해 드린다. 이렇게 쉬운 효도방법도 있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에 오늘도 담요를 깔고 화투판을 벌인다.
- 2017-02-1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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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잡히고 해외여행을 떠나라니요
- 가슴 떨릴 때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늙어서 다리 떨릴 때 여행 가면 사서 개고생이라고 어느 장년모임에서 젊은 강사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세계여행을 다녀올 텐데 무슨 돈으로 여행을 가라는 말이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강사는 답변을 준비한 듯 꼭 집어서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 주택 역모기지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강사는 신바람이 나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는 지나갔다, 집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신나게 폼 나게 다 쓰고 한 푼도 자식에게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셀프부양 시대라며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자식이 나를 부양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어느 스님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 자식 간의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식이 20세가 지나면 부모 자식 간 정을 끊고 서로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봐도 다 큰 자식을 끼고 사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세태에 이런 달콤한 강의는 자식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부모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변화된 시대를 탓하고 자식들을 억지 이해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우리 세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에게는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자학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모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0%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열심히 세금을 납부했으니 늙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식을 열심히 키워준 것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자가 다 큰 자식 사자를 돌보는 일은 없다, 젊은 자식 개가 늙은 어미 개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일도 없다는 등 짐승의 행태를 사람에게 비유해 부모 자식 간에도 남남처럼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서글픔을 느낀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남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재롱떨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짐승이 자식에게 먹이를 주는 본능과는 또 다른 이성이 사람에게는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옛날부터 세상에서 보기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부모의 즐거움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수천 년 동안 해온 인류역사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과 다른 점이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쫓아낸 후 나 몰라라 하고 해외여행 다니면 부모 마음이 편할까. 부모는 개천에서 뒹구는데 자식인 나만 잘살면 행복할까. 부모 자식 간은 한 몸과 같다. 오른팔이 아픈데 왼팔이 희희낙락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동물에 빗대어 억지로 떼어놓고 행복 운운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 행복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가족을 모아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지 않고 함께 살게 하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핵가족화가 고착화되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희미해져간다. 초등학생이 함께 사는 강아지는 가족이라 하고 따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죽는다고 신나게 쓰다가 돈이 떨어지는 날 죽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점쟁이도 아닌데 죽는 날을 어찌 안단 말인가. 나는 해외여행보다 일하며 돈 버는 것이 좋다. 누군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일하다 죽는 것이 해외여행하다 죽는 것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은 절대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겠지만 집을 저당 잡혀서까지 해외여행 갈 마음은 없다. 내 입에 고기반찬 들어가는 즐거움보다 손자 입에 사탕 하나 물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기쁨이다. 이제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직장 때문에 핵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핵가족을 찬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가족 단위로 함께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임은 자명하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식하지도 않고 위생관념도 투철하기 때문에 손주들의 양육 면에서도 함께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요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 돌보는 양육자가 바뀌고 있다. 미안한 부모는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생일파티라며 4만원짜리 뷔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니까 혹 나쁜 길로 빠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을 못하게 여러 학원을 투어하도록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아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형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부는 대가족제도의 장점을 홍보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선생, 수학선생을 하면 일거양득이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정책으로 반영 보급하도록 정부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 2017-02-01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