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봄에, 언니와 함께 경주의 보문단지로 ‘왕벚꽃’구경을 갔다. 왕벚꽃 구경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날로 골라 관광여행사에 예약을 했다.
필자는 버스만 타면 차멀미를 심하게 해서 관광버스로 갈 수 있는 것도 늘 기차로 간다. 이번에도 KTX를 타고 신경주역에 내리니 우리에게 문화 유적을 설명해 줄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12인승 봉고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차 안에서 어린아이 처럼 마냥 신바람이 났다. 가이드는 운전하고 가는 내내 보문단지의 왕벚꽃을 은근히 걱정했다. 바로 전날에도 비가왔기 때문에 벚꽃이 다 떨어져 버렸으면 어쩌나 해서다. 잦은 비바람으로 인해 꽃이 피는대로 모두 떨어져 버렸다. 가이드가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바람에 꽃이 떨어져서 꽃구경이 힘들겠어요 매우 아쉽게 됐네요”하고 말했더니, 그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 40대의 여자 관광객이 큰소리로 “괜찮아요, 꽃구경은 집에 가서, 동네에서 하고, 여기서는 경주 구경만 할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런 멋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이 60살이 넘어도 아직까지 저런 아름다운 마음, 저런 밝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그녀는 스스럼없이 나온다.
관광 목적이 ‘왕벚꽃 구경’인데, 꽃구경은 집에가서, 동네에서 한단다. 그 말이 재미있고, 재치있다. 참으로 긍정적이고 밝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녀가 여름날의 이슬을 머금은 청포도처럼 싱그럽게 보인다. 나도 왕벚꽃 구경은 못해도 괜찮다.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벌써 관광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이번 경주여행은 큰 수확을 거둔 기분이다.
다른 사람들은 꽃을 보려고 왔는데, 꽃을 볼 수 없다고 투덜대고 불평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들도 보통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저 여인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아! 나는 오늘 젊은이에게 한 수 배웠다.
사흘 전에 여고시절의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다음 주 목요일 11시 30분에 예전에 잘 다니던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하자는 내용이다. 필자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하고, 즉시 휴대폰 일정표에 친구와의 약속을 메모, 입력한다.
내일은 보고픈 친구를 만나는 날이다. 내일 날씨가 어떤지 휴대폰 인터넷을 열어 날씨를 점검한다. 오후에 비가 오락가락 할 것이라는 예보를 확인하고, 작은 우산을 꼭 챙겨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다음 날 ---,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오늘 아침은 무척 바쁘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작은 우산 하나를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휴대폰에서 실시간 버스 노선 안내 서비스 앱을 이용하여 내가 탈 버스 번호를 검색하니, 7분 후에 이용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예정이란다. 와우~, 빨리 나가자. 휴~, 정확하게 예정된 시간에 도착한 버스에 승차한다. 친구에게 카톡으로 출발하였음을 알린 후, 버스 이동 시간을 이용하여 은행업무 한 건을 폰뱅킹으로 신속하게 처리한다.
조금 후에 있을 친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차창 밖을 보니, 스쳐지나는 풍경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행복하게 시작하는 하루, "오늘~"
위의 내용은 필자의 어느 날 하루의 시작을 적어 보았습니다. 휴대폰에 설치한 여러 가지 앱 덕분에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오후에 흩뿌리는 비를 맞지 않을 수 있었으며, 길거리에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또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중요한 일도 처리하였지요. 이것은 모두 IT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현대인들은 정보의 생산과 응용, 관리에 관련된 모든 정보통신 기술과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초고속인터넷, 이동통신, 홈네트워크 등의 기술이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 발전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정보 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을 약자로 'IT'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대인으로서 시대에 걸맞게 IT를 잘 익혀 풍성하고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니어들의 심리적 특성 중 하나는 과거 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오랫동안 사용하던 사물이나 공간이 아닌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현재에 살고 있으면서 현재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예전을 그리워하고, 옛날 이야기를 즐겨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흔히 새로운 것과 관련하여 호기심을 갖거나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갈수록 변화의 주기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 잘 적응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세대간의 소통 단절과 열등감으로 자존감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 '고물'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곧 인생의 낙이 없고, 따라서 행복을 맛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100세 시대를 맞이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풍성한 삶,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이 시대 곳곳에 산재해 있는 IT를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우리 모두는 'IT도사'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IT와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 발전은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새로움의 연속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배움을 포기한다면 이미 그 인생은 발전은 커녕 정지된 인생을 사는 무의미한 시간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복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할 때 자신감이 회복되며, 목표가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나'가 될 때 IT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내게 재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는 가족, 친구, 지인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공유하며, 타인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척이나 분주한 생활을 하고 있어 예전에 비해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절대 부족한 실태입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의 대안으로 IT는 온라인상에서 대화의 장(메신저, SNS 등)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 장을 적극 활용하여 타인들과 소통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때 실력있는 'IT도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IT강국입니다. 이 시대에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IT강국 국민으로서 IT를 맘껏 활용할 수 있는 실력있는 'IT도사'가 되어 풍성하고도 멋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IT도사'가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의 팁 한 가지를 덧붙여 본다면, IT를 익혀 나갈 때 단말기 터치(클릭)를 함에 고장이 날까 조심스럽게 주저하기보다는 미지의 모든 탭들에게 처음 인사하는 마음으로 터치하여 열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IT는 우리들을 다정한 미소와 함께 유익한 친구로 맞이해 줄 것입니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휘슬이다. 그래서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가재산 2060클럽 회장은 노후를 위한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그가 이끄는 2060클럽은 트레킹 모임이다. 1년여 만에 350명이라는 회원을 모으면서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2060클럽의 의미와 트레킹의 끝없는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성공적인 노후를 누리는 많은 시니어들은 흔히 나이가 들어서 건강을 유지하는 최고의 비결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사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HR전문가 기업 피플스그룹의 대표이며 2060클럽의 회장이기도 한 가재산 회장은 ‘2060’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는 2060은 ‘경제수명(經濟壽命) 2060시대’라며 20세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해야 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 고령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노테크(老TECH)’는 오랫동안 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2060은 경제수명을 60년 가져가기 위해서 ‘20대부터 60년 일할 준비를 시작하고, 60대도 20년 더 늘려 80까지 일하자’는 의미입니다.”
노후 준비는 바로 지금
가 회장은 노후 준비는 퇴직 직전에 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강조한다. 노후 준비의 골든타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나이와 관계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는 그가 참고 사례로 주목하고 있는 나라는 장수국가로 유명한 일본이다. 일본은 65세 이상 노인들이 이미 국민의 23%를 넘었고, 100세 이상의 고령자가 6만 명을 넘는 세계 최고령국가다. 그래서 일본에는 100세 이상 일하는 현역들도 많다.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100세에 낸 라는 시집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건강법’의 저자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 박사는 올해 105세(1911생)지만 현역 병원장입니다. 그는 100세가 되던 해에 강의를 하러 우리나라 대학교를 다녀갔는데, ‘어떤 일이든생각하기 나름이며 늙는다는 것은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늙음과 젊음은 마음에 있다’는 의미인 겁니다.”
트레킹 모임 2060클럽이 추구하는 3무(無)
그가 회장으로서 운영하고 있는 이색 모임 ‘2060클럽’에도 그대로 붙여져 있다. 2060클럽은 80까지 건강하게 일하며 100세 시대를 살아가자는 트레킹 모임이다.
“3년 전 우연히 네 명이서 여행사 광고를 보고 전남 여수에 있는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을 가게 되었지요. 동백꽃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섬이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절벽과 비경이 펼쳐지는 바닷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트레킹이라는 걸 하면서 시쳇말로 ‘뿅’가버렸습니다. 이후 트레킹에 매료되어 서울 둘레길 157km를 완주하고 태안 국립공원 등을 다니면서 무척 좋아 그 멤버들이 나이가 들더라도 승합차 한 대 정도의 인원으로 계속 다녀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우연히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2060클럽은 올해 5월을 기점으로 회원 수 350명을 넘어서며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다. 2060클럽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60클럽은 남을 위해서라기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기 건강을 위해서 걷는 매력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런 분들과 걸으며 대화하는 사이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배우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다 주말에 트레킹을 통해 충전도 하니 주말을 기다리게 되지요.”
모임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드러내듯, 2060클럽은 회비도 나이도 직업도 따지지 않는 3무(無)를 추구한다. 부담을 갖지 않고 즐기길 바라는 의도에서다. 누구나 가입이 가능하다.
“단지 조건이라면 2060에서는 세 가지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니다. 첫째는 일, 건강, 그리고 사랑 즉 3유(有)입니다. 여기서 당장은 일이 없더라도 좋지만 80까지 일하겠다는 생각을 갖는의지와 열정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하기 위해 건강해야합니다. 문제는 자신과 주위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새로운 에너지 얻어
가 회장은 자신이 젊었을 때는 20여 년간 계단 오르기, 테니스, 등산 등 무릎에 안 좋은 운동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다 보니 40대 후반부터는 운전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관절이 망가져 수술을 계획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트레킹을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멀쩡해졌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 집안에는 당뇨가 유전적으로 있어서 저한테도 경고장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트레킹을 시작하고 지난 연말에 체크해보니 당뇨 수치가 90대로 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을 얻은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과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는 게 제일 즐거운 일이지요.”
2060클럽이 주로 걷는 길은 전국에 대략 1600여 개가 형성되어 있는 트레킹 코스다. 또한 트레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각 지자체에서도 훌륭한 코스들을 개발해 놓고 있다.
“2060클럽에서는 매주 트레킹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서울 둘레길이나 북한산 같은 근교에서 걷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사들이 전국에 개척한 코스를 버스를 타고 다녀옵니다. 특히 분기에 한 번은 1박 2일 코스로 멀리까지 다녀오는데 그 활동이 회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기쁨
최근 은퇴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만들어지는 모종의 공백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금껏 일만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 막상 은퇴를 하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면서 우울해 하거나 부질없는 곳에 돈을 쓰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을 위한 대안의 솔루션으로서 최근 다양한 시니어 모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대로 운영을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가 회장에게 클럽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면서 무엇이 중요했는지에 대해 물어보니 ‘열심히 일하며 트레킹으로 건강을 지키자’며 차별화를 추구했다고 밝혔다. 2060클럽이 일하는 시니어에게 필요한 건강 조건으로서의 트레킹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구성원의 성격도 정의해주고 있다. 일하는 일상을 지탱하기 위한 모임이라면, 구성원들 또한 의욕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 회장은 앞으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외의 멋진 트레킹코스를 가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커뮤니티들이 많아진다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고령화로 인해 국가 전체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세수도 줄고 노인 환자들은 늘어나 건강보험까지도 부족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광철 시인
“2060클럽은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
걷는다는 것은 인생의 은유 같기도 하고, 직유 같기도 하다. 사람 안에는 길이 하나 들어 있어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 사람은 걷는 일로 인생길을 만들어 낸다. 마음에서 뽑아낸 길이 인생길이 된다.
2060클럽 가입을 권유받고 망설였다. 할 일은 없지만 늘 머릿속에는 글이 왔다 갔다 해서 하루 일상이 생각으로 일출이 오고, 생각으로 일몰이 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함께 걷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었다. 평생을 여행, 취재, 일로 돌아다니며 살아 걷기 모임이란 말에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깔끔하고 안정된 사고의 소유자인 가재산 회장의 권유이기도 하고, 직접 만든 모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걷는 것은 평생의 내 일이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을 길에다 깔고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혼자 하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산길을 택해 걸으면 하루 종일 걸어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명산에는 사람이 넘쳐도 이름 없는 야산을 걸으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한적하고 조용하다.
나는 산과 들을 걷고, 쉬고, 숲이나 간이역이나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자기를 많이 했다. 풀 위에 누워 자면 세상은 내 것 같았다. 더구나 비가 오는 날에 숲이나 들판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은 울림을 주었다. 비는 결이 있었다. 눈도 결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람도 결이 있었다. 자연은 거대한 흐름이 있었다. 비나 눈이 올 때 물이 흐르는 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면 비와 눈의 흐름이 보였다. 가슴 벅차게 하는 광경이었다. 새들의 군무 같고, 보리밭의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의 군무 같은 걸 느꼈다. 감동이 온다. 더구나 태풍이 오는 날 숲으로 들어가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며 부러지고 폭우와 바람이 거칠게 지나가는 현장에서 흠뻑 젖어서 하늘을 보고 누워보라. 젖고 나서는 더 젖지 않는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졌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2060클럽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세상을 선물했다. 아름다움과 상쾌한 궤적을 만들어내는 곳을 찾아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구릉을 오르내리고, 산허리와 강을 휘어 돌며 대화를 나누는 기쁨은 또 다른 세계였다. 혼자 걸을 때의 쓸쓸함과는 다른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몰라보게 달라진 것은 사람이 좋아서 걷는 날이 기다려진다는 점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만큼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나는 감히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리움이란 별이 떠야 하는 거라고. 그리움이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가 존재할까 싶다.
걷기를 하면서 등산이나 혼자 걷는 것과는 다른 인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선하면 선한 사람이 찾아오고, 거칠면 거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2060클럽의 매력은 가재산 회장의 성격처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 또 주는(Give And Give)’ 관계의 설정에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 걷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것으로 족한 모임이어서 부담 없는 모임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끌린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면서 꽃을 피우지만 소리치지 않고 지나가듯이 2060클럽이 그렇다. 무엇보다 같이 걷는 분들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한결같은 말에 덩달아 즐겁고 나 또한 걷는 것의 즐거움과 더불어 얻은 건강이 고맙다.
몇 년 전부터 휴가철이 되면 아내는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매년 해외여행을 떠났다. 그때마다 거의 일방적으로 필자에게 통보하곤 했다. ‘가도 되느냐?’가 아니라 ‘간다!’라고 했다. ‘가지 말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약을 다 마쳐 놓은 상태에서 그냥 참고로 알고 있으라는 식이었다.
은근히 부화가 나 필자도 아내처럼 결행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으나 불가능했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 중에 같이 휴가를 떠날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찾아낸 방법이 혼자 휴가를 떠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한 휴가는 ‘아내와 같이 가지 않는 나만의 휴가’라고 으스대기도 한다. 이런 필자에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내의 일방적 여행 통보를 걸고 넘어져서 몇 년 전부터 ‘나 홀로 휴가여행’을 즐기고 있다.
작년 휴가는 늦가을에 제주로 갔다. 서귀포시 어느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명상과 걷기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매일 주는 대로 먹고 데려다 주는 곳에 내려서 하루 종일 걷고 다시 숙소에 오면 아무생각 없이 자면 되는 일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아주 수동적이며 생각이 필요 없는, 그래서 일상을 보내면서 머리를 텅 비울 수 있는 며칠 동안의 시간이 기다려졌다.
필자와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이 40여 명 정도 됐다. 부부가 같이 온 팀도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온 나이 지긋한 여성 시니어가 많았다. 혼자 온 사람은 필자가 유일한 것 같았다. 자녀와 엄마가 같이 온 세 팀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두 팀은 초등학교 6학년 딸과 엄마 커플이었고, 한 팀은 10대 후반의 심신 장애가 있는 아들과 엄마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들은 같은 학교 친구라고 했다. 아주 활발하고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대체로 어른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얘기했는데도 오고 싶다고 해서 양쪽 집 엄마들이 따라나선 여행이라고 했다. 어른들도 힘든 걷기코스를 날아다니듯이 뛰기도 하면서 잘 걸었다. 문제는 그 중 한 엄마였다. 사사건건 딸아이의 행동을 참견하고 잔소리를 했다. 심지어 밥 먹을 때 반찬 가리는 것까지 나무라곤 했다. 같은 상에서 밥을 먹던 필자가 불편함을 느낄 정도였다. 몇 번은 외진 곳에 데려가서 심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반면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는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용눈이 오름을 오르는 내내 아들 뒤를 따라가면서 멋진 경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곶자왈 원시림의 어둡고 미끄러운 돌길을 걸을 때는 아들이 위태위태하게 걷는 모습을 뒤에서 가슴 졸이며 조용히 따랐다. 김대건순례길에서는 뜨거운 가을 햇살에 땀 벅벅이 된 아들과 제주의 쪽빛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웃음꽃을 피웠다. 떨리는 손으로 밥과 반찬을 식판에 떠서 엄마가 기다리는 식탁으로 불안하게 걸어오는 아들을 그는 미소 띤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날 수도원 마당에선 모두 기념사진을 찍기 바빴다. 며칠 간 사이가 좋지 않던 그 모녀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딸에게 사진을 부탁한 엄마가 뒷걸음치다가 그만 벽돌에 걸려서 쿵 소리를 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얼굴이 벌겋게 돼서 일어선 엄마는 관객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돌이 뒤에 있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딸을 심하게 나무랐다. 그때 딸아이의 말이 걸작이었다. “엄마는 내가 뒤로 넘어졌을 때 너는 눈도 없냐고 그랬잖아!”
아주 수동적이고 게으른 일상을 즐기려고 혼자 떠난 늦가을 휴가는 필자에게 자연과 타인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선물로 주었다. 몇 개월이 흘렀지만 대나무 지팡이를 들고 곶자왈 어두운 원시림 미끄러운 돌길을 위태롭게 걷는 아들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그 어머니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비우려고 떠난 필자에게 진정 비우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아름다운 미소였다.
문창재 내일신문 논설고문
집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백화점 두 곳을 지나게 된다. 하나는 주로 중소기업 제품을 취급하는 곳이고, 하나는 굴지의 재벌기업 소유다. 통행인이 많은 길옆 점포들은 고객을 유혹하려고 바리바리 물건을 쌓아놓고 늘 ‘세일’을 외친다.
60층이 넘는 주상복합 아파트 세 동의 하부를 이루는 재벌 백화점 지하에는, 지하철역과 통하는 무빙 워크가 있어 편리하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젊은 날 나를 괴롭힌 결핍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 많은 의류와 잡화들이 그런 회억의 실마리다.
‘그때 저렇게 값싸고 질 좋은 방한복이 있었으면 그날 그렇게 떨지 않았을 텐데….’ 눈에 띄는 제품마다, 후각을 파고드는 음식과 향신료 냄새마다 지나간 결핍의 시대 영상을 내 기억의 창고에서 끌어낸다. 저런 신발이 있었으면 시린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저렇게 강렬하게 후각을 유혹하는 음식이 그 시절에 있었던가!
4·19 학생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제야에 나는 처음 서울에 왔다. 다음 해 3월의 고등학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해서였다. 그날 아침 나는 지독한 추위에 떨었다. 아마도 영하 20도는 되었을 혹한의 미명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신작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얼마나 제자리 뛰기를 했던지, 눈썹에 먼지가 허옇더라 하였다.
그 새벽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장터에 올라가 보았다. 운전사가 버스 밑에 엎드려 장작불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기관을 녹인다는 것이었다. 밤에 읍에서 올라와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그 버스밖에는 교통편이 없었다. 도리 없이 서울행이 하루 늦어졌다. 구불구불 느릿느릿 달리는 그 버스 편으로 250리 밖 중앙선 철도역에 닿아, 귀성객으로 꽉 찬 열차에 결사적으로 올라탔다. 짐짝처럼 흔들리고 구겨진 열다섯 시간의 여행 끝에 청량리역에 도착한 그날 밤부터 나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앓아 누웠다.
그때 나의 입성은 초라하였다. 마직 검정색 교복 안에 목내의를 겹쳐 입었을 뿐이었다. 외투도 털목도리도 없이 얇은 명주 수건을 목에 두르고 세 시간 넘게 한데서 떨었으니, 얼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신발도 그랬다.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조잡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한겨울 백두대간 종주산행 때나 한라산 눈밭에서도 그렇게 발이 시려본 적이 없는 근래의 기억과 비교하면, 참 어이없는 시대였다.
우리는 ‘해방둥이’로 불린 축복의 세대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광복조국에 태어났으니 어른들 보기에 얼마나 복 받은 세대겠는가. 그렇지만 우리의 유소년 시대는 그 반대였다. 6·25 전쟁의 격류 속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전쟁 중에 입학한 학교생활의 하나부터 열까지가 없거나 모자랐다. 그러나 큰 불편을 몰랐다. 당연한 줄 알았다.
산골짜기여서 6·25 때는 피란을 가지 않았다. 광산 갱도 안에서 급박했던 며칠을 피하고, 인민군과 국군에게 번갈아 지배당한 몇 달이 지나간 1·4후퇴 때는 피란을 갔다. 모두 피란을 가라는 소개명령이 떨어졌다 하였다. 태백준령 눈밭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 땅에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국공 양측 군대의 본부로 쓰였던 교사는 불타고 없었다. 컴컴한 군용천막 안이 교실이었다.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책상도 없는 바닥에 앉아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가마니 바닥에 책과 공책을 펴놓고 ‘가갸거겨’를 배웠다. 칠판을 보고 글씨를 쓰려면 궁둥이를 높이 쳐들고 어깨를 낮추어야 하였다. 궁둥이 때문에 칠판이 안 보인다고 툭하면 싸움이 났다. 교과서가 부족하여 두 사람이 한 권을 같이 보았다.
그러다가 한두 아이가 작은 책상을 들고 와서 교과서와 공책을 올려놓았다. 그게 부러워 너도나도 그런 책상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줄지어 들고 와서 하학 때 들고 나가는 모습이 교문 앞 풍경으로 굳어졌다.
날씨가 풀려 야외수업을 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특히 벚꽃 그늘에서 공부할 때가 좋았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 새로 지은 판잣집 교사에 들어갔을 때는 행복하였다. 소나무 판자의 향기가 그윽한 널따란 교실 벽을 트고 학예회를 할 때는 세상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사라호’로 불린 태풍에 학교 함석지붕이 날아가고, 벽면이 위태롭게 기울었을 때는 왜 우리 학교만 그런 신세가 되었는지 의아스러웠다.
그때는 너나없이 돈이 없었다. 돈을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따라 화전민 마을에 갔다가, 자두 한 되를 5환에 사먹은 일이 있다. 돈 구경을 못 해보았는지, 촌 아주머니는 선생님이 꺼내든 10환짜리와 5환짜리 돈 가운데 빨간색 5환짜리가 탐났던 모양이다. 10환짜리를 주려 하니 빨간 돈을 달라 하였다.
태풍 피해자 돕기 의연금 같은 돈 걷는 일에 현금을 낼 수 있는 아이는 드물었다. 새 학기가 되어 갈려 가는 선생님에게 주어야 한다고 전별금을 걷을 때도 그랬다. 돈을 낼 수 없는 아이들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을 한 됫박씩 가져왔다. 팔아서 돈으로 주었던 모양이다.
6학년 수학여행 때도 쌀을 지고 갔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셨다는 정암사까지 80리 길을 쌀 두 되를 지고 종일 걸어서 갔다. 밤중에 도착하여 지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먹고, 다음 날 수마노석으로 쌓았다는 돌탑을 보고, 또 종일 걸어서 돌아왔다.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학생들 하숙비도 쌀로 내던 시절이다.
식량의 결핍은 너무 슬퍼 되돌아보기 싫다. 그 시대 어느 고장 어느 마을이고 넉넉히 먹고 산 데가 없으니 특별한 이야기는 못 되리라. 그러나 미국에서 왔다는 우유가루 배급 이야기만은 빼놓을 수 없다. 쌀자루에 그걸 배급받는 날, 손으로 집어먹어 얼굴에 허연 가루를 묻히고 장난치던 일이 결핍의 시대 화제에서 빠질 수는 없다. 사료용이었다는 그 가루를 쪄서 과자처럼 만들어 먹은 날에는 어김없이 배탈이 났다. 그런 날 온종일 학교 변소가 붐비던 일은 비탄의 감정 없이는 돌아볼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있어야 할 것 가운데 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을 파는 곳이 없어 낙망하였던 일은 나의 소년기에 큰 상처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지 못하여 기가 죽어서 지낸 몇 달 동안, 나는 어린이 도벌꾼이었다. 중학교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하리라는 장한 꿈으로 산에 올라 소나무를 베어 젖혔다. 그걸로 장작을 만들어 장에 지고 가면 “어린 것이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나무꾼이 되었구나!” 하고 측은해 하며 사주었다.
그렇게 참고서 값은 마련되었으나 책을 살 길이 없었다. 빨간 딱지 이야기책이나 취급하는 잡화점에 부탁하여 ‘간추린 영어’ ‘간추린 수학’ 같은 참고서를 주문하여 책을 손에 넣고 나니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알파벳을 배워 본 일이 없는 영어 까막눈에게 영문법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수학도 그랬다. 1학년 2학기에 편입한 첫 수학시간부터 나는 그 과목과 멀어져야만 하였다. 그때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도 질문을 싫어하셨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집안에도 이웃에도, 그 목마름을 풀어줄 사람이 없어 나의 영어와 수학은 점점 ‘불구’가 되어 갔다.
읽을거리에도 목말랐다. 교과서 말고는 책도, 신문도, 잡지도 없었다. 유일하게 책을 가진 동네 형 집에서 찾아낸 책들은 소용에 닿지 않았다. 서울에서 신문을 배달하며 야간대학에 다니던 그의 책꽂이에서 어느 날 눈에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였다. 그 전 해였던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빌려다 읽어 보았으나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말로 된 책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웠던 까닭을 이제는 알만하다. 노벨상 대목을 노려 급하게 이중삼중 번역판으로 내놓았을 책의 내용이 오죽하였으랴! 그나마도 얇은 축약판으로 나온 책이니 물어볼 나위도 없는 일 아닌가.
책에 대한 허기를 채우려고 나는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도서반에 들어갔다. 방과 후 교내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책을 찾아주고 반납 받은 책을 정리하는 서비스의 대가로 도서반원에게는 관외대출 특전이 주어졌다. 그 혜택 덕분에 책과 가까이 하게 된 것이 내 인생행로의 나침반이 되었다.
서울생활에서는 겨우 책에 대한 갈증을 풀었을 뿐, 다른 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머니는 텅 비어, 갖고픈 게 있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 욕망을 채울 수 없는 고통이 더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3년간 통학로였던 서울역 염천교 길은 오사리 잡탕. 백화점이었다. 갖가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에서부터 입을 것, 신을 것, 지닐 것, 야바위판 등등 없는 게 없었다. 어떤 루트로 흘러나온 것인지, 시장골목보다 값싸고 멋진 물건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 달 치 전차회수권 60장이 유일한 유가증권이었던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것은 멋진 학생 단화였다.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진 그것을 나는 못 가졌다. 입학 때 내게 떨어진 것은 3년 넘게 신을 수 있다는 군화였다. 무게를 줄이려고 목을 잘라낸 그 신발을 꼬빡 3년을 신었다. 졸업 무렵에는 발등 부위에 두 군데씩 구멍이 뚫려 우리 반 아이들이 “박물관으로 가져가자”고 한 유명한 신발이다.
유소년 시절과 학생시절 나를 괴롭힌 유형무형의 결핍은 대학에 가서도 풀리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욕망은 커지는데 여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늘 욕구불만이 자꾸 쌓여갔다. 내 욕구를 눌러 꼼짝 못 하게 할, 쓰고 또 써도 넘쳐날 풍요를 찾아 헤맨 4년이었다.
그 허기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일하면 채워질 날이 있을 것 같았다.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끝없는 일구더기를 벗어나, 세상의 주역이 될 나이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이런 기대에 속아 허겁지겁 달려왔다. 퇴직을 하고 인생의 종점이 보이는 곳에 당도하여서도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행한가? 난 요즈음 이런 자문을 할 때가 있다.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원히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가득 채워본들 무엇 하리! 저 세상 갈 때 무얼 가져갈 수 있겠는가. 유형무형의 결핍 속에서 모자라고 빈 데를 채워보려고 허덕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불유구(不踰矩)의 언덕에 올라서야 알았다. 아 아, 이 미욱함이여!
컴퓨터가 필기구를 대신해 책상 위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주인인 인간은 이를 익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컴맹이었던 필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엑셀 도사’로 거듭나 ‘알파 고’를 잡으러 나섰다.
은퇴 전 회사에서는 경영분석, 회계처리, 재고관리 등 필요에 따라 엑셀을 주로 사용했다. 체계적인 교육은 받을 여유가 없었다. 젊은 직원들 어깨너머로 배우고 아침 일찍 출근해 연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꾸준히 반복적으로 숙달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권고를 귀에 담았다.
사실 필자는 엑셀은커녕 컴퓨터 켜기, 끄기부터 단축 키 작동 등 생기초도 잘 몰랐다. 하지만 이것에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매일 매일 연습했다.
이렇게 컴퓨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그 기능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가·감·승·제’ 기능을 이용해 많은 연산식을 생성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를 검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신천지를 발견한 듯 팔짝팔짝 뛰었다. 지금까지 숫자 하나에 연연했던 지난 일을 생각하니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느낌이었다.
이 대단한 기능을 활용해 필자는 재무, 회계, 영업, 관리 등 회사 전반의 연산식 작업을 시작하였다. 회계부의 합계잔액시산표, 영업부의 매출장, 관리부의 재고수불을 총괄ㆍ분석하고 오류를 시정한 것이다. 금융거래는 회계일보와 연계했다.
이런 식으로 SHEET 수십 면을 개발해 재고자산평가과 세무조정 등과 연산, 즉시 손익계산, 법인세 납부세액 파악이 가능하도록 했다. 영업부 판매활동에 원가자료 제공이 즉시 가능해졌다. 일일결산과 월차 손익계산이 빨라졌다. 최고 경영 의사결정도 신속하게 이뤄졌다.
무엇보다 각 부서가 정보를 공유해 오류와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다. 그 통합조정의 정점에는 엑셀의 연산식이 자리했다.
은퇴 후에는 시장분석에 엑셀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매일의 시장 데이터만 업데이트하면 개발한 연산식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 최고 목표가, 손절가 등 보도만 의존하지 않고 ‘필자만의 양어장’을 구축하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세기의 바둑대결이 장안의 화제였다. 많은 국민이 축구를 잘 모르고도 월드컵에 열광했듯 이번에는 흑백 돌도 잘 모르면서 ‘이세돌’을 연호했다. “저 이세돌이 졌지, 인간이 진 것이 아난가” 라고 패자이면서도 어느 승자보다 더 멋진 말로 오히려 감동을 주었다.
“인공지능이 모든 면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무거운 숙제가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인공지능을 만들지 인공지능이 스스로 ‘탄생’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명령자이고 인공지능은 충실한 복종자일 뿐이다.
엑셀은 우리 생활을 매우 편리하게 하였다. 꾸준한 노력으로 더 알찬 엑셀 도사가 되고 싶다. "알파고 게 서거라.“
2000년대 초반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다. 주제를 보고 필자는 대단원에 나이 들어 얼굴에 잔주름 가득한 미국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두건을 한 채 뼈만 앙상한 흑인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진을 넣기로 했다. 이 사진만큼 ‘아름다움의 지속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필자는 완전 컴맹이었고 강의용 파워포인트 교재는 디자인팀 여직원이 만들어 주곤 했다. 필자는 그날도 평소대로 강의 콘티를 손으로 스케치한 후 디자인팀 여직원에게 파워포인트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뒷부분에는 헵번이 머리에 보자기를 두른 멋진 사진을 넣어서.
필자의 요청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필자가 “네이버에서 헵번을 치면 그의 사진이 죽 나오는데 몇 번째 페이지를 열고 거기서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쓴 헵번의 사진을 파워포인트에 넣어줘요”라고 여직원에게 설명하자 그 여직원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안티를 던진 것이다. 그가 날린 한마디는 바로 “사진을 캡처해서 저한테 이메일을 보내 주시면 간단하잖아요!” “….” 그의 말 중에 ‘이메일’이라는 단어는 알아듣겠는데 ‘캡처’는 도대체 알아듣지 못할 ‘외계어’였다.
그 여직원이 도도한 자세로 자리로 돌아간 후 필자는 생각에 잠겼다.
필자는 무거운 환등기와 슬라이드 트레이를 양손에 들고 강의 다녔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의 USB라는 신기한 물건만 호주머니에 넣고 가면 되는 세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로 천지개벽했는데 필자는 아직도 아날로그 세상에 머물러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직원의 도움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되면 그야말로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로 ‘기분 잡치지만 컴퓨터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50세 넘어서 젊은 사람들과 컴퓨터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장면을 떠올리니 이것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필자 아이들이 어릴 때 집으로 모셔서 배우던 컴퓨터 선생님. 그렇게 해서 필자는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 개인교습을 받게 됐다. 수개월에 걸쳐 인터넷 검색 방법, 한글 워드 작성법, 이메일 주고받는 법, 엑셀, 파워포인트, 포토샵을 두루 배웠다. 블로그 만드는 법을 배워 블로그도 개설했다. 필요한 사진을 ‘캡처’해서 파워포인트를 만드는 것 역시 공부했다. 아날로그에 익숙한 필자가 컴퓨터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에 좀 어려운 면도 있었으나 반복 연습으로 극복했다.
어느 날 회사 디자인 회의 시간에 필자는 호주머니에서 USB를 턱 하니 꺼내 노트북에 장착하고 슬라이드를 실행했다. 그날 깜짝 강의에 사용된 파워포인트 교안을 필자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직원들은 눈이 동그래져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컴퓨터는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나면 그 외의 다양한 기능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파워포인트로 몇 년 동안 강의 교안을 만들다 보니 이제 손에 익게 된 것이다. 요즘에는 글씨체와 크기, 사진의 배열, 배경 색상 등 슬라이드 디자인에도 신경 쓰고 있다.
몇 년 전 보자기를 쓴 헵번의 사진을 ‘캡처’해서 이메일로 보내라던 그 여직원의 당돌한 한마디가 발단돼 필자 앞에 찬란한 IT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엊그제 활짝 피어났던 벚꽃들의 축제도 어느덧 사람들의 카메라 추억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계절, 봄날의 여왕 5월이 찾아왔다.
거리에는 온통 얼굴을 둘러싼 사람들이 둘레 길을 향한 묵묵한 발걸음으로 건강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여왕이 다녀간 자리, 세상은 황사와 꽃가루 온갖 미세 먼지들이 춤추며 날아들어 사람의 건강과 피부를 위협한다. 이제 누구나 소망하는 건강한 아름다움, 맑고 밝은 피부 만들기는 내 손 놀림으로 내가 책임 지어보는 것은 어떨까.
첫째. 가치 있는 세안 제와 정성 세안 법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돌아와 지친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시간 3분도 길다. 1~2분 정도 가치 있는 세안 제 또는 딥 크린싱으로 맛사지 하듯 1~2차에 걸쳐 정성껏 내 얼굴을 닦아 내어준다. (참고로 자기가 쓰는 화장품 중에 가장 크게 투자한다.) 이때 중요포인트는 거울 속에 나를 보며 칭찬과 반성으로 마음에 일기를 쓰듯 하루를 돌아보는 것이다. 천천히 오늘 하루를 생각하며 내 손놀림이 춤을 추면 어느새 시간은 흘러가고 지친 피부는 말끔 해져 있을 것이다.
둘째, 충분한 사랑으로 보습을 준다.
깨끗이 닦여진 얼굴에 아이크림 엣센스 또는 앰플등으로 온갖 업무에 지친 내 얼굴에 수고한 만큼이나 사랑을 듬뿍 얹어준다.(자기가 쓰는 화장품 중에 두 번째로 비싸게 투자한다.) 아끼지 말고 촉촉해 질 때까지 로션 영양 크림 등으로 보습과 사랑을 하루의 마지막 정성으로 수 차례 내 얼굴에 골고루 덧발라준다. 사랑을 한껏 받은 얼굴이 되어 평온한 마음으로 아늑하게 내 보금자리에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면 분명 깨어난 아침에 피부는 환하게 빛나는 햇살과 함께 뽀송뽀송 맑게 피어나 있을 것이다.
셋째, 아침 화장은 하루를 버틸 무기이다.
누구나 아침시간은 바쁘지만 또 짊어진 짐들을 버텨내야 하기에 그에 충분할 만큼 단단히 얼굴을 무장해야 한다. 사람을 포장 해주는 멋진 옷들도 중요하지만 공을 들인 만큼이나 내 마음의 창인 얼굴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기를 대변해 주기도 하고 살아온 그들의 삶을 말해줄 수도 있다. 아침에 화장을 한다는 것은, 쫓기는 시간 속에서도 꼼꼼하게 자기 만의 메이컵으로 자기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예의이기도 하다. 아침화장을 마음의 무기로 갖추고 험난한 세상에 당당하게 하루를 맞이한다면 또 한번 삶의 가치는 충분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태양을 방어하는 크림, 일명 자외선 차단제를 잊지 말자.
피부관리의 하이라이트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화장 마지막 단계에서 꼭 자외선크림을 발라 주어야 한다. 화장을 왜 하는가 고민해보자. 요즘은 남자들도 화장을 하는 세상이다. 보여지기 위해서 또는 가려지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싶다. 특히 태양을 향한 방어는 어쩌면 가장 피부를 보호하는 것에 핵심이 된다. 물론 외출에서 돌아와 깨끗이 닦아내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자외선 크림은 구석구석 빈틈 없이 충분한 양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잊지 말고 발라주어야 한다. 우리의 피부가 노화되는 가장주범인 자외선 그리고 기타 미세 먼지에 대응 하기 위해서는 듬뿍 언제고 무기를 그 갖추어야 한다.
다섯째, 내면의미용 즉 마음의 평화이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게 태어났어도 마음이 불편하면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한다. 내면의 아름다움, 가능하다면 내 마음이 편안하게 되려고 무조건 노력하자. 그것은 나도 모르게 마음의 창인 얼굴로 들어나기 때문이다. 언제나 긍정의 생각은 피부를 즐겁게 하고 표정을 미소 짖게 하고 행복한 피부로 만들어 준다.
이 모든 것들이 쉽지는 않다. 세상사 어디에도 쉬운 것은 없는 것 같다. 단지 반복적인 학습효과로 내 몸에 익숙해질 때 자연스럽게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기에 피부도 함께 노화가 온다. 세월에 의한 자연스러운 주름은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삶 속에 꾸준한 정성으로 아름다운 피부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투자한 노력의 결과 일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하고 맑은 피부로 나이를 맞이한다는 것은 분명, 보다 멋진 노후의 한부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늘 깨어 있어 노력하는 삶은 아름답기만 할 것이다.
이 봄날의 끝자락 5월에는 나에게 사랑을 투자하는 시간, 내가 나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포장, 나의 피부 나의 얼굴을 관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아빠)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아빠, 배낭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했는데, 옆에서 들은 아내가 “인도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같이 갔다 오지”라고 해서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딸의 보호자로 다녀오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딸) 방학 마다 홀로 장기 여행을 다녔다. 인도로 여행지가 선정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고, 은퇴 후의 아빠가 조금은 심심해 보여서 아빠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점
(아빠) 멋모르고 따라나선 여행이라 특별히 준비단계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인도는 여행초보가 감당하기에는 처음 며칠간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또한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는 등 잔소리로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섧기도 했다. 그때만큼 한국에 있는 아내가 보고픈 적은 없었다. 처음엔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복수(?)를 단단히 하리라 하고 그냥 참았는데 나중에는 방어 차원에서 가끔 대들기도 했다.
(딸) 배낭여행을 처음 떠나는 아빠를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 비행기표 구입 30분, 배낭 꾸리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책 한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냈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을 싸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믿을 사람은 그 넓은 곳에 아빠와 나뿐이었다.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느라 자연스럽게 동지애로 똘똘 뭉쳐졌다.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싸우면서 친해졌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서 발견한 점
(아빠) 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본 딸의 모습은 거의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저런 강단도 있었네, 나의 유전자에 저런 면도 있다니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훌쩍 커 버린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딸)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규선’은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멋진 남자이자, 내가 아끼는 한 사람이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아빠) 인도다. 처음은 늘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가된다. 그땐 너무 몰랐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간다면,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피하지 않고 정말 즐기고 싶다. 물론 그때도 딸이 옆에 있다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슬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딸) 아빠와 함께 한 처음 여행지, 인도다. 아빠와 늘 이야기 한다. 다음에 가면 카메라 하나만 메고 가보자고. 바닥에 깔린 똥도 신나게 즈려 밟아보자고.
여행 후 서로에게 생긴 변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빠) 여행을 갔다 온 후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젠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었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이 무엇을 하던 “자신의 의지대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보다 확실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딸)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딸/아빠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분신인 자식과의 여행은 부모를 행복한 추억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다. 가능하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곳으로 떠나자. 우리에겐 인도의 열차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산장이 그런 곳이었다.
부녀가 함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빠) 첫 번째 책은 딸아이의 생일에 맞춰서 냈는데, 두 번째는 나의 생일이 있는 올해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슬기의 “아빠 여행 같이 갈래?”라는 말이 떨어지면 “내 새끼에게 여행이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고 단박 눈치채고 “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딸) 6월에는 엄마와 배낭여행을 떠난다. 가능하다면 그다음 여행은 엄마·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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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퇴직 후,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딸 바보’.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는 ‘추억 부자’.
정열과 환희가 넘치는 섬 필리핀 보라카이 섬을 다녀왔다. 눈부신 햇살, 블루레몬에이드 같은 바다, 먹어도 먹어 도 물리지 않는 망고쥬스. 우리가 꿈꾸는 홀리데이 그 이상을 채워줄 보라카이를 소개해 본다.
필리핀은 총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다도해 국가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섬을 자랑한다. 그 중에 800여 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가졌다. 특히에메랄드 빛 바다는 필리핀 바다의 상징이다.
필리핀은 크게 3지역으로 나눈다. 북부지방인 루손에는 수도 마닐라가 있어 경제의 중심지고, 남부지방인 민다나오는 불안한 정치로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며, 중부지방인 비사야스는 휴양의 중심지인 보라카이와 세부 팔라완이 있는 곳이다. 필리핀은 지방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다. 보라카이에서는 아클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라카이 섬! 말로만 듣던 환상의 섬을 가기 위해 현지 공항에서 내리던 순간 필자는 혼란스러워졌다. 공항이 국의 조그만 기차역만큼이나 협소하고 정리돼 있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입국 차도 허술하면서도 무척이나 까다로왔다. 더구나 면세품에 대한 절차가 쓸데없이 엄격해 걸리기만 하면 폭탄 요금을 맞게 된다. 단단히 한몫 챙기려는 술수가 나의 환상여행 첫인상을 장식하고 말았다.
지저분한 공항을 나서자 숨이 막히도록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를 따라 승용차를 타고 섬으로 향한 1시간 20분 동안 편도 1차선으로 이어지는 시가지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빌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양쪽 길가로 늘어서 있는 주민들의 옷은 볼품 없었다.
질서 없이 오가는 오토바이 삼륜차가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굉음소리도 전율을 느끼기 충분했다. 정신없이 15분 가량을 혼란 속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제3의 세상 여행객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곳은 바로 옆 블록 이었다. 호텔 앞에 다 달았을 때는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진입로에 펼쳐진 원주민의 고된 삶과 이방인들의 부로 형성된 환상의 세계는 그야 말로 묘한 힐링을 선사해주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끝이 없이 이어진 백사장, 길게 늘어서 있는 키가 큰 야자수, 문만 열면 쏟아지는 에어콘의 시원함, 설탕가루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화이트 비치…. 천국이 따로 없었다.아침에는 멋진 부페조식과 숙소 바로 앞에 펼쳐진 수영장에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낮에는 맛사지 천국의 각종의 서비스로, 초저녁엔 붉게 물드는 석양과 함께 하는 신나는 뱃놀이와 스쿠버 다이빙이 이어진다. 하늘과 바다를 모두 내것 처럼 맘껏 소유한다. 그리고 육지의 밤에 펼쳐지는 불타는 젊음의 마당에 앉아 그 유명한 산미구엘 맥주 한 모금은 반복되는 일상을 탈출하기에 아주 충분했다.
길게 이어지는 화이트 비치 해변가 주변에는 각종의 현지 식 먹거리들이 즐비해 있고 감동으로 버글 대는 사람들이 미어 터진다. 지상낙원의 섬에서 맛보는 다양한 요리들, 더구나 우리나라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다. 밤의 시작부터 깊어질수록 쿵쿵대는 음악소리, 젊음과 낭만이 출렁대는 심장의 소리들이 특별한 추억으로 낮과 밤의 두 얼굴 되어 총천연색으로 해변을 수놓는다.
특히 맛사지를 좋아하는 필자는 전 일정 내내 각종의 스파 서비스를 받았다. 천차만별의 스파가 화려하게 또는 고풍스럽게 전세계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열심히 달려온 우리 시니어 들에게는 환상의 보답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여행은 선호한다. 모든 게 만사 귀찮을 때는 여행의 참 맛을 느끼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일 것이다. 다 안정된 다음에 라고 하지만 우리 삶에는 안정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다리 떨리지 않을 때 그저 심장이 떨릴 때 그때, 떠나라고 한다. 더 늦기 전 어느 날에 훌쩍 떠나 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까? 이글거리는 자연 아래 조금 타면 어떠랴. 젊음이 들끓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잠시라도 동행 하는 것, 어차피 삶의 주어진 시간 속에 무거웠던 몸을 맡기고 맛사지 받으며 둥둥 떠보는 것도 시니어 들의 멋진 일상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모든 일정을 끝내었다.
다시 검은 얼굴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현지인들의 빈곤함을 거쳐 공항으로 향했다. 세상에는 빈부가 함께 공존한다는 진리를 깨달으며 그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거부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을 느끼며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새삼 느끼는 천국의 행복 대한민국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 옛날에 초가집이 아닌 고급스러운 저택 같은 곳, 세계 1위인 우리나라 공항이었다. 새삼 깊은 감사와 안도를 느꼈다.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