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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인터넷 1인 방송
- #1.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비 오는데 전화도 안 받네. 워런 도사님 거기는 어디야?” BJ(Broadcasting Jockey) 오작교가 노래를 부르다 말고 혼잣말을 하다가 채팅창을 보며 대화를 한다. 아프리카TV 최고령 BJ 진영수(74)씨의 최근 인터넷 1인 방송이다. #2. BJ 슈기(최슬기·21)가 떡볶이 네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는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쩝쩝 소리를 낸다. 이어 치즈 스틱을 먹는다. 끊임없이 “후루룩 쩝쩝”소리를 내며 게걸스럽게 먹는다. 인터넷 1인 방송 ‘슈기 잘 먹는 먹방’이다. #3. 유튜브나 아프리카TV 등을 통해 온라인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중계방송하는 양띵(양지영·25)은 1인 방송 구독자 및 애청자가 201만 명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온라인 게임에 관심 있는 10~20대에게는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있다. 진영수씨는 인터넷 1인 방송을 통해 인생 상담도 하고 자신의 힘든 상황을 전달하며 네티즌으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1인 방송을 하면서 우울증도 극복하고 삶이 활기차다고 말한다. 최슬기씨는 먹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만으로 대기업 임원 월급 수준인 월 15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 양지영씨는 게임방송으로 연예인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얻으며 KBS 진행자로 진출했다. 인터넷 1인 방송 열풍이 상상을 초월한다. 아프리카TV에서 1인 방송을 하는 사람만 22만 명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1인 방송을 하는 사람이 수십만 명에 달하고 1인 방송 시청 인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 1인 방송자(BJ), 시니어층까지 다양 인터넷 1인 방송은 특별한 기술 없이 카메라와 마이크 등 간단한 장비로 PC와 스마트폰 혹은 태블릿PC 등을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실시간 방송을 할 수 있는 대표적인 1인 미디어다. 웹이나 모바일을 통해 실시간 스트리밍 혹은 주문형(VOD) 방식으로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1인 방송자(BJ)들은 아프리카TV나 유튜브, 다음-카카오, 네이버, SNS(Social Network Service) 등을 통해 자신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다. 1인 방송은 대화창이 떠 실시간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쌍방향 방송을 할 수 있다. 먹방, 쿡방, 게임방송, 증권방송, 인생상담, 스포츠 중계, 공부방송, 뷰티방송 등 방송 콘텐츠는 제한이 없다. 방송하는 사람 역시 일반인부터 연예인 등 유명인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물론 젊은 10대나 20대가 1인 방송을 많이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진영수씨처럼 중·장년과 시니어에서도 1인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 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이 지난 10월 14일 발표한 19~50세 성인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인터넷 개인방송 관련 인식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4.4%가 1인 가구 증가와 함께 1인 방송이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64.3%는 1인 방송을 시청자의 다양한 욕망을 표출해주는 창구로 인식하고 있다. 1인 방송을 시청하는 이유(중복응답)로는 50.2%가 ‘콘텐츠가 재미있어서’라고 답해 1위를 차지했고 다음은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37.2%), 실시간 참여가 가능해서(24.8%), 전문가들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21.3%), 누군가와 소통하는 느낌이라서(18.3), 함께 댓글을 달면서 참여하는 재미가 있어서(14.5%) 누군가와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서(11.7%), 대리만족하려고(1.7%) 순이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와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진이 2016년 내년 트렌드를 전망한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꼽은 소비 트렌드 10가지 중 하나가 바로 1인 방송을 비롯한 1인 미디어 전성시대다. 1인 방송을 하는 BJ 중 양띵, 악어, 대도서관, 허팝, 최군, 슈기, 김이브, 영국 남자, 소프, 쿠쿠크루 등 유명 BJ들은 연간 2억~4억 원의 엄청난 수입을 올린다. 독창적이고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네티즌의 눈길을 끌면 누구나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BJ가 될 수 있다. ◇ MCN 사업자들 국내의 콘텐츠 내보내 1인 방송 BJ의 수입 창출원은 크게 두 가지다. 아프리카TV의 1인 방송처럼 방송을 본 네티즌이 100원짜리 별 풍선을 구입해 마음에 드는 1인 방송자에게 주면 이것이 수입으로 직결된다. 또 하나의 이윤 창구는 유튜브 등 1인 방송에 붙는 광고를 통한 수입이다. 외국의 경우는 1인 방송으로 연간 135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도 등장했다. 미국 경제잡지 10월 14일자에 게재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유튜브 스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유튜브 1인 방송 스타 중 게임방송을 하는 퓨디파이(방송자 펠릭스 셀버그) 채널은 구독자가 4000만 명에 이르고 수입이 1200만 달러(135억원)에 달한다. 코미디 패러디를 전문으로 하는 스모시(방송자 이언 해콕스, 앤서니 파딜라) 채널은 구독자 2136만 명, 수입 858만 달러이다. 1인 방송의 잠재적 사업성과 문화적 파급력에 주목한 기업과 방송사들이 앞다퉈 1인 방송자를 양성하고 관리해 이윤을 창출하는 MCN(Multi Channel Networks)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선두주자는 CJ E&M에서 운영하는 ‘다이아TV’다. 다이아TV는 현재 417개 1인 개인 방송을 운영, 관리하고 있으며 구독자 수가 2701만 명에 달한다. CJ E&M의 다이아TV 다음 규모의 MCN 사업자는 ‘트레저 헌터’다. 양띵, 악어, 김이브 등 유명 BJ가 속한 트레저 헌터는 채널 수 38개에 구독자 수가 850만 명에 이른다. 이밖에 최근 아프리카TV와 연예기획사 미스틱 엔터테인먼트가 설립한 조인트 벤처 ‘프릭’역시 인터넷 1인 방송을 관리하는 MCN 사업을 펼치고 있다. 다이아TV 등 국내 MCN 사업자들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 MCN사업자와 제휴해 1인 방송 콘텐츠를 해외에도 내보내기 시작했다. ◇ 1인 방송이 대중문화 판도를 바꾸다 급부상하고 있는 1인 방송은 미디어 산업 지형도를 바꿀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판도를 바꿔놓고 있다. 독창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콘텐츠로 무장했을 뿐만 아니라 네티즌의 참여로 방송이 이뤄지는 특성 때문에 이용과 인기가 급증하면서 1인 방송은 미디어와 대중문화에 다양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우선 MBC, KBS 등 지상파 TV와 1인 방송의 결합이 눈에 띄는 변화다. 요즘 인기가 높은 MBC 프로그램 은 바로 1인 방송과 TV 방송을 결합한 포맷이다. KBS도 최근 1인 방송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KBS가 8월부터 방송하고 있는 는 1인 방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1인 방송 콘텐츠는 방송을 비롯한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문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연구센터장 김영주 박사는 “MBC, KBS 등 지상파 TV에 유입되기 시작한 1인 인터넷 방송이 언젠가는 전통적인 방송 프로그램과 방송 사업자들을 능가하는 빅파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1인 방송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구글은 2020년이면 전통적 방송사 스튜디오들은 25%에 그치고 75%를 1000여 개의 1인 채널과 MCN 사업자들이 차지할 것으로 관측했다. 미디어와 IT 전문가들은 “1인 방송은 수익 창출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방송, 대중문화의 흐름도 선도하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엄청나다”고 진단한다. 최근 들어 정부도 1인 방송 지원에 나섰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최근 한국전파진흥협회와 함께 1인 방송 제작자 양성에 나섰다. 신중년도 이제 주류 미디어로 부상하며 수입과 보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1인 방송과 함께 인생 2막을 시작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진영수씨를 비롯한 신중년 1인 방송자들은 “신중년이 1인 방송을 하면 생활에 활력이 생길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를 포함한 다양한 세대와의 교류와 새로운 트렌드와 문화의 접촉 기회가 많아져 삶의 스펙트럼도 확장되는 긍정적인 효과도 높다”고 입을 모은다.
- 2015-12-0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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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비틀스가 살려낸 영국 리버풀, 올드 팝 광팬들 줄 이어
- 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30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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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투어] 용문산 용문사, 만추 여정 느끼기 제격
- 용문사 가는 도로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로 양 편으로 길게도 이어진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져 만추의 여정이 가득한, 휘어진 길. 그 뒤로 아스라이 옛 추억 한 자락이 떨어지는 낙엽 위로 오버랩된다. 형형색색으로 변한 산야 속에 유난히 노란 단풍잎이 눈을 시리게 한다. 이렇게 도로변에 은행나무를 심어 놓은 것은 용문사에 노거수 은행나무가 성성하게 버티고 있음을 알려주려 함이었으리라. ◇ 단풍 든 한적한 산길에서 만난 정지국사부도 용문사의 가을은 화려하다. 해마다 이곳의 아름다운 가을을 만나기 위해 많은 행락객들이 찾아든다. 주차비(소형 3000원)와 입장료(성인 2000원)를 내고부터는 누구나 걸어야 한다. 입구 쪽에 단풍 든 공원 앞으로 2007년에 개관한 양평 친환경 농업박물관(용문면 신점리 508-10, 070-7715-3796, http://sam.go.kr)이 있다. 옛 성루를 연상케 하는 한옥 모양의 박물관 앞으로 분수가 솟구친다. 유치원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아이들 눈 속에는 감성이 많이도 묻어 있는 듯하다. 실내에는 양평역사실과 친환경농업실이 있고 사찰요리를 만들어보는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주변의 공원에는 아이들 취향인, 귀여운 조형물과 시비 등이 많이 눈에 띈다. 사자상 양 귀 쪽으로 수도꼭지를 달아 놓은 모습도 해학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일주문이지만 이번 여행길에는 곧추 정지(正智)국사부도 팻말(0.5㎞)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산길은 큰 도로와는 달리 한적하다. 아직 걸음이 서투른 유치원생들과의 눈높이 대화가 싱그럽다. 부도까지 올라가야 하는 길목은 붉은 단풍이 에워싸고 있다. 우선 정지국사탑비를 만난다. 비문은 권근이 지은 것이라지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버렸다. 80m 정도 오르면 정지국사부도(보물 제531호)가 홀로 있다. 정지국사(1324∼1395)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고려 충숙왕 복위 1년(1332), 8세 때 장수산 현암사로 동진출가(童眞出家)했다. 바로 선을 닦다가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민왕 2년(1353)에는 무학과 함께 원나라로 가서 지공을 스승으로 한 나옹의 제자가 되었다. 1356년, 귀국해서는 은둔하면서 수행에만 힘썼다고 한다. 천마산 적멸암에서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법랍 54세로 입적했다. 제자 조안이 이곳에 부도와 비를 세웠고, 나라에서는 ‘정지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생전에 개풍 영천사의 대장경을 용문사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사찰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는 무수한 돌탑이 있다. 넓은 터에는 ‘산사무공(山寺武功)’이라는 손 글씨가 쓰여 있다. 무공 템플스테이가 펼쳐지는 곳이며 108탑을 조성하는 듯하다. ◇ 국내에서 가장 큰 용문사 은행나무는 단풍 들기도 더뎌 조금 더 내려오면 용문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경내의 건축물과 함께 단풍 든 용문산(1,157m)이 한눈에 조망되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50m, 둘레 12.3m)에 눈길이 머문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 전해오는 국내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다. 수령이 대략 1100여 년에서 1500여 년으로 추정된다. 정미의병 때 톱을 댔더니 피가 났고, 불을 질렀을 때도 이 은행나무만 타지 않았던 신목(神木). 노익장을 과시하듯 잎이 무성하고 주변 나무들보다 단풍도 더디 든다. 경내 약수에 목을 축이고 잠시 둘러본다. 이 사찰은 진덕여왕 3년(64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진성여왕 6년(892)에는 도선국사가,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세종 29년(1447)에는 수양대군이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원찰로 삼으면서 대대적으로 중건했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그 후 왜군이 전소시켰고 6·25 때도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을 비켜날 즈음, 찻집 솔내음, 다래향에서 맛있는 대추약차의 그윽한 향내에 취해보거나 용문산 정상까지 산행을 해도 된다. ◇ 상원사에 오르면 속세의 번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듯 굳이 산행을 안 해도 된다. 찻길이 잘 나 있기 때문. 상원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불부터는 민가가 사라진다. 울창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갈 수 있는 임도 운전이 아슬아슬하지만 잠시 차를 멈출 수 있는 공간이 반갑다. 시원한 물줄기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그곳에도 아름답게 단풍이 들었다. 물소리, 새소리, 단풍 숲까지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길이다. ‘무릉도원’이 여기구나 싶을 생각이 절로 드는 곳. 찻길이 끊어지는 곳에서 누군가 정성스레 가꿔 놓은 텃밭, 작은 연못,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 잘 쌓은 돌담이 해사한 웃음으로 반긴다. 돌계단을 따라 경내에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3층석탑을 에둘러 대웅전, 선방으로 이용되는 청운당, 요사채인 제월당이 있다. 대웅전 뒤쪽으로는 삼성각이다. 절 마당, 트인 공간 저 멀리 용문산 능선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상원사는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보우선사(1301∼1382)가 여기 머물며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조안선사가 중창했으며 무학대사(1327~1405)가 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수행했다. 또 효령대군(1396~1486)은 원찰로 삼았다. 세조 8년(1462)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러 찾아왔다가 중창불사를 했다고 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순종 원년(1907)에 왜병이 이 지역에 집결해 있던 의병을 소탕하기 위해 불을 질러 법당만 남겨놓고 모두 타 버렸다가 1918년에 복원했으나 6·25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후 1969년이 되어서야 주지 덕송이 초막삼간을 짓고 복원에 착수, 1970년에 주지 경한니가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원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사자석상을 닮았지만, 정확한 형태가 아닌, 예사롭지 않은 조형물이다. 땅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한데 조합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또 사찰 내에는 철조 여래좌상(경기문화재자료 제119호)이 있다. 상원사 가까이 있는 윤필암은 고려 중엽 모덕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 보릿고개 연수리 정보화 체험마을의 돌담 따라 걷기 상원사에서 내려오면 ‘연수리 보릿고개 정보화 체험마을’을 만난다. 연수리는 연안마을과 장수마을을 합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수골’이라고 불렸다. 현재 보릿고개마을은 성공한 정보화마을이다. 다양한 체험거리는 계절에 맞추어진다. 봄에는 산나물 채취, 냉이 캐기를 하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가을에는 밤 줍기와 등산을, 겨울에는 청국장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한다.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돌담장에 형형색색으로 색칠해 볼거리를 준다. 사계절 체험객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슬로푸드 음식체험이 인기다. 보리떡 직접 만들어보기, 지천에 난 쑥을 직접 뜯어 쑥떡 만들기, 농민들이 재배한 국산 콩으로 두부 만들기, 잘 익은 호박으로 호박밥 지어 먹기 등. 체험객들이 늘 찾는, 성공한 체험마을이다. 마을을 비켜 용문으로 오는 동안에도 눈이 시리다. 곳곳에 멋지게 지은 전원주택들이 구슬처럼 박혀 이국적인 모습을 자아낸다. 그리고 경기도 영어마을 양평캠프도 있다. 실제 미국 버지니아의 마을을 재현한 이국적인 캠퍼스다. 그래서 와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용되었다. 학습 목적이 아닌 관광객들은 6000원이라는 입장료를 감수해야 한다. 용문면에도 할 거리가 있다.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용문면 삼성리∼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또 용문장날(5일, 10일)도 볼만하다. 국철이 생기면서 장날은 제법 구색을 갖춰가고 있다. 지역에서 나오는 가을 특산물을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Travel Tip - 주소 용문사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5, 문의 : 031-773-3797, http://www.yongmunsa.org 상원사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220-5, 문의 : 031-773-4634 보리울체험마을 문의 031-774-7786, http://borigoge.invil.org 기타 문의 양평군청 문화관광과 : 031-773-5101 - 찾아가는 방법 자가용 서울 → 6번국도 이용 → 마룡교차로에서 341지방도로로 좌회전 → 덕촌삼거리에서 직진 → 용문산 관광단지 주차장 대중교통 수도권전철 중앙선이 용문까지 운행(2009년 12월 개통)되고 있다. 용산역~용문역(05:20~22:58) 약 1시간 30분 소요. 용문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용문사, 연수리행 등 각 방향 농어촌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 용문시외버스터미널 : 031-773-3100, 용문역 : 031-773-7788 - 추천 맛집 용문산 입구에 중앙식당(031-773-3422), 한마당식당(031-773-5678), 용문산식당(031-773-3434) 등 산채요리 음식점이 있다. 그외 용문에서 다소 떨어져 있지만 무쇠솥에 오랫동안 달여 낸, 국물 진하고 고기 넉넉한 고바우집(031-771-0702, 설렁탕)을 비롯하여, 이북식 만두가 맛있는 회령만두국(031-775-2955)이 괜찮다. 용문읍에 있는 강원식당(031-773-4459, 막국수, 묵채밥 등)도 괜찮다. - 주변 볼거리 용문산에는 용계, 조계골(신점1리)이 있다. 또 용문면에서는 레일바이크(031-775-9911, http://www.yprailbike.com)를 탈 수 있다. 2010년 5월 3일 개장되었고 용문면 삼성리에서 양평읍 원덕리까지 왕복 6.4㎞ 구간이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5-11-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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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준의 스토리 텔링] 운동선수들의 은퇴 시기는?
- 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접하여 망령이라 / 어이 아니 한심하랴 청천백일(靑天白日) 빨리 가니 / 일거월석 지날수록 늙을 밖에 할 일 없다 … ◇운동선수, 은퇴시기가 빠른 직업 그렇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늙게 마련이고, 희대의 명창도 때가 되면 은퇴한다. 소설가 김유정이 ‘잠자는 나의 가슴에 장미 한 송이가 꽂힐 줄이야’라는 명문을 바쳤으며 정부까지 나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했어도,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러서는 가창을 멈춰야 했다. 1979년 6월, 선생이 영면에 들었을 때도 여지없이 식장에서는 같은 노래가 은은히 흘렀다. 음악이 존재하는 한 음악가에게 은퇴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 말은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꼭 쥔 주먹에서 힘을 풀고 가진 것을 놓아야 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 스포츠 선수에게 은퇴는 특히 더 중요하다. 운동선수는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직업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언제 필드를 떠나야 할지 현명하게 판단하고 남은 세월 동안의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한다. 문제는 언제가 그때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알아서 멈추는 것일 터. 일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를 은퇴 시기로 꼽는다. 움직이는 것에 민감해야 할 종목에서 동체시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생각만큼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야말로 은퇴 시기라고 말하는 선수도 많다. 눈은 필드를 향해 있지만 종종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젊었을 때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면 은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은퇴를 운동선수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할 수 있을 법한 사치스러운 고민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프로스포츠인 야구. 이 종목에서 우리 선수들은 여간해서 은퇴를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한때 리그를 호령했던 스타 선수들도 나이가 들고 성적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들이 가라앉는다 싶으면 여지없이 구단으로부터 방출 선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종범 선수는 그라운드를 떠나는 모양새가 가장 안쓰러웠던 경우. 그는 불세출의 스타였다. 부채꼴 그라운드에서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절정의 활약을 펼쳤다. 아쉽다면 일본 프로야구에까지 진출한 뒤의 성적이 부상 탓에 그다지 좋지 못했다는 점. ◇자의반 타의반 떠나야 하는 이유 다행히 국내로 유턴해서는 다시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2003년에는 해태에서 기아로 모기업을 옮긴 타이거즈에서 ‘20-20클럽’ 가입 선수가 되었다. 홈런 스무 개 이상, 도루 스무 개 이상의 다양한 활약을 서른셋의 나이로 기록한 것이다. 나중에 양준혁이 경신하기는 했지만 당시로서는 최고령 기록이었다. 2006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주장을 맡아 WBC 클래식 국제야구대회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은퇴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WBC 클래식 이후. 2006년 시즌 2할4푼2리, 2007년 1할7푼2리를 기록하며 “이종범도 끝났다”는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 했다. 두 시즌 모두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100게임에 미치지 못해 안타까움은 더 컸다. 놀랍게도 이종범은 기적처럼 부활했다. 2008년과 2009년 시즌에 100경기 이상 출장해 3할에 근접한 성적을 남긴 것이다. 소속팀은 2009년 시즌 대망의 포스트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이 쾌거에 이종범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점을 모르는 야구팬은 많지 않았다.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후 구단의 행보.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뛰며 미증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공공연히 은퇴 압력을 행사했다. 2011년 시즌 이종범의 성적은 97경기 출장, 타율 2할7푼7리, 출루율 3할3푼7리였다. 그 정도면 어떤 팀에서든 2번이나 6, 7번 정도 타순의 선수에게 기대할 만한 지표. 따라서 구단의 은퇴 압박을 단지 성적 문제로만 보기는 쉽지 않았다. 2012년, 끝내 이종범은 유니폼을 벗었다.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결정”임을 강조했지만,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한국을 떠나며 말한 것처럼 ‘자의 반 타의 반’의 등 떠밀린 듯한 은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이종범의 은퇴를 바라보는 뒷맛은 더할 수 없이 씁쓸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베테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이 궁지에 몰렸을 때 더그아웃에 이종범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형님’이 ‘예전에도 이런 위기 많이 이겨내봤다’는 눈치로 떡 버티고 있으면, 그것이 젊은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칼자루 쥔 사람들은 모른다. 그저 연봉 축내는 뒷방 늙은이로 취급할 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는 좀 다르다. 프로야구에 관한 한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는 리그인 만큼 이종범과 비교될 만한 에피소드가 종종 벌어진다. 올해에도 여지없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선수들 마이애미 말린스 구단은 올해 마흔 한 살인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 선수와 내년도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치로는 2016년 시즌을 보장받았고, 2017년 시즌에 계약하지 않으면 50만 달러(약 5억8000만 원)를 추가로 지급받게 된다. 다음 시즌 이치로의 연봉은 200만 달러(23억2300만 원). 여기에 각종 조건이 달려 있다. 250타석과 300타석에 도달하면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씩 추가 지불, 이후 50타석 추가 시마다 40만 달러(4억6000만 원)가 더 지급된다. 최대 600타석인 옵션을 모두 채우면 연봉은 300만 달러(약 34억8000만 원)까지 치솟는다. 이치로가 올해 거둔 성적을 놓고 보면 말린스 구단의 이런 계약은, 우리나라 구단들의 시각에서는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타율 2할2푼9리에 출루율 또한 3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자동 아웃’이라고 불릴 만큼의 성적으로 이종범의 은퇴 무렵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말린스 구단의 데이비드 샘슨 단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치로는 팀의 소중한 전력”이라고. 그러므로 “팀이 제대로 구성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그와 함께 플레이한다는 것은 음악으로 치면 “비틀스와 함께 공연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는 베테랑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어떠한 팀 구성이 바람직한지 잘 알고 있다. 영화 에는 일흔 살의 벤(로버트 드니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사’ 자도 모르면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저 “삶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싶다”던 한 노인이 첨단 업종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나아가 회사 전체를 바꾼다는 설정.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베테랑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발휘되는 법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구단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긍정적이다. 지난 8월 6일.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 진갑용(41)이 19년 동안의 프로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백업 포수로서 1, 2년 정도는 더 뛸 수 있을 법했지만 진갑용은 단호하게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결정에 구단의 압력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적으로 선수 본인의 결정이다. 오히려 구단에서는 아쉬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강팀인 만큼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게 분명하고, 그처럼 큰 경기에서 진갑용 같은 베테랑은 요긴한 힘이 될 테니까. 이후 진갑용은 전력 분석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야구 지도자로 성장하겠다고 꿈을 밝혔다. 본인이 결정하고 본인이 준비한 만큼 선수 경력 못지않게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반면 역시 삼성 소속인 이승엽은 “은퇴 시기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뜻이다. 성적도 놀라울 만큼 빼어나다. 마흔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중요한 장면에서 탁월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최초의 400홈런 기록은 그 부산물. 구단에서도 “은퇴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수 본인의 판단에 맡겨두겠다는 것이다. 만약 이승엽 선수가 올해 성적이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삼성 구단이 그동안 보여 온 여러 가지 행적으로 미뤄볼 때 ‘그럼에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 점에서, 지금의 삼성 라이온즈는 이종범 시절의 기아 타이거즈보다 한 수 위다. 한국 시간으로 지난 9월 13일. 33세인 이탈리아의 여자 테니스 선수 플라비아 페네타가 US오픈 테니스 대회 여자단식 결승에서 같은 나라의 로베르타 빈치를 2대 0으로 물리치고 프로 전향 16년 만에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마흔아홉 번째 메이저대회 출전 만에 처음으로 차지한 정상이었다. 페네타는 우승 확정 뒤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은퇴하기를 꿈꿔왔다. 매우 행복하다.” 모든 선수가 페네타처럼 은퇴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최선의 상황이 항상 벌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베테랑들은 해가 갈수록 성적 지표가 떨어지며 알게 모르게 은퇴 압박에 시달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페네타나 이승엽 같은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 이치로처럼 부진에 시달리는 베테랑 선수일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그가 품고 있는 전력은 숫자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회는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무관심해왔다. 지나칠 정도였다. 이제 사회의 눈도 제법 날카로워지고 현명해진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지금보다 더 멀리 보는 시선이 곳곳에서 갖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길이 좀 더 정확해지기를, 좀 더 두루두루 살피기를, 나이를 먹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김유준(金裕俊)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1-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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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 사] “은퇴 후 추락한 기분… 다시 일하며 감사할 줄 알게 됐죠”
- 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 2015-11-1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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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더하기]한국·중국·일본의 영웅 비교
-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 2015-10-2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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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라이프]연예인들 책 쓰다! 왜?
- 글 배국남 논설위원 겸 대중문화 전문기자 knbae@etoday.co.kr “제가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해 주위에서 책 쓰는 것을 권했지만, 저술은 작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해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시간이 흘러 제 살아온 날들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써봤는데 제 삶을 더 열심히 살게 됐어요. 책 쓰는 것이 저의 삶을 더 알차게 살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고요.” , , 등 에세이, 소설, 요리책 등 8권의 책을 쓴 중견 연기자 김수미(64)가 밝힌 책 쓴 배경과 책 쓰기의 긍정적 영향이다. 요즘 김수미처럼 책을 쓰는 연예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책을 쓰는 연예인들은 빅뱅, 구하라 등 젊은 아이돌가수부터 최불암, 김혜자를 비롯한 원로 연예인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쓰는 책도 요리를 비롯한 좋아하는 취미나 사회 활동과 관련한 에세이, 연예인 삶과 생활을 담은 수필집, 연예인과 밀접한 뷰티와 패션 정보서, 그리고 소설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과거에는 대필 작가에게 의뢰해 책을 쓰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제는 원고 쓰는 일부터 사진, 삽화 등 직접 작업하는 연예인까지 생겨나고 있다. 최불암, 김수미, 김혜자 등 중장년 연예인에서부터 김병만, 하정우, 유준상, 빅뱅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책은 연예인의 삶과 생활, 일상에 대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다. 연예인들은 에세이를 통해 연예인의 삶과 생활, 연예인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뿐만 아니라 인생의 교훈이나 삶의 지혜를 전달하고 있다. 최불암의 에는 배우 입문에서 연기자로 살아오면서 겪었던 어려움, 연기자로 활동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30만 부가 넘게 팔린 김혜자의 는 전 세계 기아 현장과 빈민 지역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에 대한 느낌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해 이 책을 읽은 수많은 사람이 사랑 나눔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역할도 했다. 김수미의 는 급증하는 청소년 자살 문제를 다루면서 이를 극복할 방법을 자신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제시했다. 드라마, 뮤지컬, 영화를 넘나들며 맹활약을 펼치는 유준상은 최근 펴낸 에세이집 을 통해 20년차 배우로서의 소소한 삶을 그렸고 사회적 활동을 많이 하는 연기자 김여진은 에세이집 에 사회운동을 했던 대학 시절부터 2011년 홍익대와 한진중공업 노동자 해고사태 등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기록, 배우로서 겪었던 일과 사랑을 담았다. 스타 하정우는 연기에 대한 단상과 연기자의 길을 먼저 걸었던 아버지 김용건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를 펴냈다. 개그맨 김병만은 자전적 에세이집 를 통해 어려운 집안 형편과 기나긴 무명생활을 딛고 달인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요즘 10~30대에게 인기가 높은 아이돌그룹 빅뱅의 는 부제, ‘꿈으로의 질주, 빅뱅 13,140일의 도전’이 알려주듯 연습생 시절부터 데뷔해 스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멤버별로 진솔하게 담아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미자, 장미희, 김미화, 서갑숙, 패티김, 조영남 등도 자신의 일상과 연예 활동과 관련한 수필집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병만은 “제가 힘들게 살았고 어렵게 연예인이 됐지만 꿈을 잃지 않고 살았기에 지금의 제가 있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과 용기를 주고 싶어 책을 썼어요”라고 책 쓴 이유를 말한다. 연예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인 패션, 뷰티, 다이어트에 대한 연예인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고현정이 쓴 은 연기자로서의 삶과 생활, 그리고 여성들이 가장 관심이 많은 피부 관리에 대한 다양한 요령 등이 담겨 있다. 뷰티 프로그램을 진행한 바 있는 연기자 유진의 과 연기자 박수진의 , 연기자 이혜영의 , 가수 옥주현의 등이 대표적이다. 카라 멤버 구하라의 네일북 , 소녀시대 효연의 패션 스타일에 관련된 등도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연예인 뷰티, 패션 관련 서적이다. 연예인들이 많이 쓰는 책은 바로 자신이 하는 취미 생활이나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에 대한 것들이다. 취미를 넘어 그림 그리기가 직업이 된 가수 조영남은 미술 관련 책을 연달아내고 있다. 조영남은 , 등을 통해 미술과 그림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탤런트 김호진은 을 출간해 화제가 됐으며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하희라, 진미령, 류시원 등도 요리책을 냈다. 가구 만들기가 전문가 수준인 탤런트 이천희는 최근 출간한 에 가구 만드는 법부터 가구 만들기가 삶에 활력소를 주는 이유 등을 담았다. 유기견 보호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이효리는 최근 반려동물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를 펴냈는데 이 책에는 이효리의 사진과 함께 그가 키우는 동물들과 유기견 보호소의 현실, 모피 동물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재테크를 잘하기로 유명한 방송인 현영은 를 출간했는데 15만 부가 팔리는 열기를 연출했다. 또한, 연예인들이 만나 진행한 인터뷰를 담은 인터뷰집도 속속 책으로 출간되고 있다. 여성과 주부의 삶에 관심이 많은 박경림은 여성으로, 그리고 엄마와 아내로 성공한 여성들의 인터뷰집 을 펴냈고 방송인 김제동은 시인 김용택, 소설가 조정래, 홍명보 전 축구대표 감독 등 25명을 만나 진행한 인터뷰 에세이집 를 출간했다. 최근 들어 연예인들이 쓰는 책 중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문성과 높은 글쓰기의 수준이 요구돼 진입장벽이 높은 소설이다. 가수 이적의 , 타블로의 , 차인표의 , , 구혜선의 등은 바로 연예인들이 쓴 대표적인 소설들이다. 이들 연예인이 쓴 소설들은 차이가 있지만 3만~10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패션으로서의 문학’이라는 글을 통해 “연예인이 쓴 소설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제공하는 글쓰기다. 상품으로서의 문학, 연예인 소설의 동시대적 의미는 상품성이 출판의 중요한 잣대가 된 현실, 그리고 팬시한 상품으로서 소설을 선택하는 독자의 경향이 만들어 낸 시대적 산물이다”고 분석했지만 연예인이 쓴 소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다. 직장인 정다정씨(43)는 “차인표씨가 쓴 를 봤는데 ‘자살은 삶의 목록에 없다’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소설을 통해 잘 전달해줬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이 내는 책에 대해 유명성과 인지도만을 내세운 마케팅용으로 내용이 부실하다는 평가 등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하지만 진솔한 이야기이고 접해보기 힘든 내용인 데다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주류여서 좋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많다. 책을 내는 연예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책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에 삶을 열심히 살게 된다.” 최불암, 김수미, 조영남 등 책을 3~20권을 낸 중장년 연예인들은 사람들, 특히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신중년 세대에게 책 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책을 쓰게 되면 지나온 인생 1막을 정리하게 되고 앞으로 살 인생 2막에선 오류를 줄이면서 가치 있게 사는 길을 찾게 된다”고 말하면서. 조영남은 책을 쓰게 되면 여생이 훨씬 가치 있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또한, 취미와 사회활동에 대한 책을 쓴 젊은 연예인들은 “자신이 하는 취미생활과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책을 쓰게 되면 직장에서 얻지 못한 생활의 활력을 얻게 되고 직업 이외의 다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어 삶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고 책 쓰기를 권한다.
- 2015-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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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텔링]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액션 스타의 계보
- 우리나라 액션 스타의 계보는 곧 홍콩 스타의 계보다. 액션 영화가 ‘다치마와리’ ‘으악새’ 등으로 폄하되던 한국 영화계에서 토종 액션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홍콩 영화계는 달랐다. 그곳 영화인들은 중국 무술을 떠받들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그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은 자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글 김유준 ◇ 호금전과 장철, 그리고 왕우 1960년대, 아시아 화교 문화권에서 무협극이 빠르게 인기를 얻어가고 그에 발맞춰 쇼브러더스를 비롯한 홍콩의 영화 스튜디오들이 새로운 무협 영상을 만들려던 시기. 그때 홍콩 영화계에 두 명의 거장이 있었다. 호금전과 장철. 두 감독은 홍콩을 무협 액션의 본거지로 만드는 데 거대한 몫을 담당했다. 호금전은 무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칼춤과 경공이 난무하는 스토리를 다루면서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경극과 무용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움직임과 꽉 짜인 미장센이었다. “무협 세계는 대부분 상상임에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하다. 내 관심은 액션과 풍경의 관계에 있다.” 이안 감독의 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를 비롯해 같은 호금전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 그 자체였다. 결투 장면을 액션인 듯 아닌 듯 그려내는 연출 스타일 아래에서 스타가 탄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정패패 같은 여성 배우가 더 돋보인 것은 그런 연출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장철 감독은 정반대였다. 세련된 화법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움직임이 속출했고, 카메라는 그에 유치하다 싶을 만큼 급격히 줌인했다. 그런 영상 속에서 무술에 능한 배우가 주목 끌 것은 당연한 일. 장철은 그렇게 왕우(王羽)를 스타로 만들었다. 1967년 으로 합을 맞춰본 장철과 왕우 콤비는 이듬해 를 발표해 홍콩 영화 역사상 최초로 100만 홍콩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흥행을 바탕으로 등으로 외팔이 무사(독비도: 獨臂刀) 시리즈가 이어졌고 그 인기는 바다를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 호금전과 달리 작품을 빨리, 많이 만드는 장철의 연출 스타일에 힘입어 왕우 외에 강대위(깡따위 또는 장다웨이), 적룡 등도 스타덤에 올랐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장철식 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홍콩 무협 액션의 기조까지 뒤바뀌었다. 허황된 칼춤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고 스크린에서는 팔과 다리가 부러질 듯 맞부딪쳤다. ‘챙챙’ 하는 금속성 음향이 베개를 몽둥이로 두드리는 듯한 효과음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시대배경이 점점 더 현대에 가까워지는 경향도 짙어졌다. 이런 현상은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출현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 작은 용의 등장과 죽음 이소룡은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영화화되기도 한 엽문, 태권도 고수인 이준구 사범 등은 이소룡의 무술 스승. 이소룡은 그밖에 유도, 가라테, 권투 등 세상의 모든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아역배우로 활동한 홍콩에서의 유년기 이후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낼 즈음에는 무술 연마에만 힘을 쏟아 나중에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실력에 비해 영화계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1966년 미국 무술가의 도움으로 TV시리즈 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이소룡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부터. 1971년 액션 영화의 거장 나유(로웨이) 감독의 에서 주연을 맡아 놀라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가 홍콩과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소룡의 트레이드마크는 일그러진 표정과 단순하면서도 폭발적인 움직임. 무도가들은 그 기괴한 기합 소리와 표정을 연기가 아닌 ‘발경(發勁)’의 결과로 이해한다. 무술에서 발경이란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타격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그런 필살기를 펼치는 순간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소룡의 시대는 화려했으나 길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 3년 동안 온 세상을 흥분시켰다가 1973년 7월, 마지막 주연작 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후 홍콩 영화계에는 액션 배우의 예명에 용(龍) 자를 붙이는 유행이 생겨나 순식간에 별의별 용들이 군웅할거하며 이소룡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나섰다. 성룡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 성룡 액션의 시작 이소룡이 사라지며 액션 영화는 주춤했다. 이소룡의 엄청난 주먹질과 발차기에 맛들인 관객들은 후계자를 자처하는 잡룡(?)들의 몸부림에 좀처럼 열광하지 못했다. 1976년부터 등 소림사 관련 영화들이 히트했고 그와 함께 황가달, 류가휘 같은 스타가 탄생했지만 이소룡이 남겨준 흥분을 잠재울 만큼은 아니었다.짧은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이소룡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어느 제작자의 감정싸움이었다. 오사원은 뛰어난 프로듀서였지만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상층부와 다툼이 잦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프로덕션을 세우리라 결심한 것이 1970년대 후반. 오사원은 평소 눈여겨봤던 무술감독 원화평을 연출자로 키우려 했다(원화평은 나중에 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이 첫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한 배우는 성룡. 성룡은 존재감 없는 외모(쌍꺼풀 수술로 그나마 또렷해졌다)로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그저 그런 영화에 출연하던 2류급 배우. 그러나 재빠른 몸동작만큼은 최고였다. 1978년, 초일류 제작자와 초일류 무술감독과 초일류 스턴트 배우라는 삼각 조합은 라는 독특한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의 액션은 춤도 아니고 무술도 아니었다. 흡사 우스꽝스러운 광대짓 같았다. 그러나 성룡의 앳된 외모와 걸출한 움직임에 힘입어 장난 같은 동작은 도리어 관객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겨줬다. 이어 성룡은 까지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한다(우리나라에서는 이 먼저 개봉했다). 이른바 코믹 액션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 거듭된 성공에도 성룡은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영화의 성격마저 액션 중심에서 코미디 중심으로 뒤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홍금보 감독의 (1983년). 성룡은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친한 동료의 영화적 실험에 동참했고, 흥행 성공으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어 성룡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은 를 세계적으로 히트시켰다. …. 성룡의 성공가도는 끝이 없었고 급기야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 영웅, 본색을 드러내다 성룡의 액션은 거의 독과점 상태였다. 구르고 때리고 피하는 액션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장철의 조감독 출신인 오우삼은 ‘주먹 아닌 총’으로 블루오션 개척에 나섰다. 은 그 찬란한 결과물이었다. 현대판 협객전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홍콩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상영 시간이 끝났음에도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밤새도록 영사기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후 액션 영화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협객들은 칼집 대신 홀스터를 찼고, 도복 대신 레인코트를 입었다. 기합과 초식은 자취를 감췄고 방아쇠를 당기는 무심한 표정만이 스크린을 아로새겼다. 권총을 속사포처럼 내갈긴 후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 가장 멋졌던 배우 주윤발은 그런 영화의 홍수 속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다.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이수현 등이 그 뒤를 따랐고, 적룡을 비롯한 옛 스타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었다. 성룡 액션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은 이른바 ‘홍콩 누아르’만이 아니었다. 서극은 일찍이 에서 특수 촬영 기법으로 고대 무협의 세계를 재현하려 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가 1987년 무술감독 출신인 정소동에게 연출을 맡긴 에 이르러 기어이 성공했다. ‘SFX 무협영화’로 불린 이런 흐름 또한 아류작들을 양산하며 오랫동안 유행을 이끌었다. 중국 본토의 무술대회 선수권자인 이연걸을 내세워 정통 권법 영화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했다. 이연걸은 1979년까지 중국 무술대회를 5연패한 달인. 시리즈로 얼굴을 알린 뒤 서극 감독에게 발탁돼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일약 초일류 액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액션의 숱한 유행은 21세기가 시작되며 잦아들고 있다. 성룡도, 주윤발도, 이연걸도 예전 같지 않다. 더불어 세계 무술 영화의 거점이던 홍콩 영화계는 힘을 잃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다음 날 곧바로 ‘표절작’이 뿌려진다는 후안무치한 골육상쟁의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스러져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액션 스타의 계보 역시 지금에 이르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 개인기 대신 규모로 몰아붙이는 대형 액션만 횡행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제 육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액션의 일대 위기다. 에서 에단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 “절박한 순간이라면 필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 액션 영화계는 절박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적 영화인의 ‘필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의미의 액션 스타는 공룡처럼 멸종할지도 모른다. ◇ 우리나라의 액션 스타 으악새 영화. 한때 우리 관객들은 우리나라 액션 영화를 그렇게 불렀다. 허공을 내지른 주먹에 악당들이 “으악” 하고 제풀에 몸을 날리며 쓰러진다고 해서 붙은, 실로 치욕적인 별명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액션 스타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등이 이른바 ‘다치마와리 영화(몸싸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으나 영화계의 본류는 아니었다. 정창화 감독 같은 액션 전문 연출자, 황정리처럼 액션만 고집한 배우는 척박한 우리나라 영화계 대신 홍콩에서의 활약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정창화 감독은 등을 히트시키며 일급 감독 반열에 올랐고, 황정리는 성룡의 등에서 악역으로 활약했다. 한용철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활약한 거의 유일무이한 액션 스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재미교포 출신(미국식 이름은 ‘챠리 셀’)으로, 무술의 달인은 아니었으나 발차기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1973년 새로운 액션 스타를 찾고 있던 이두용 감독에게 발탁됐다. 결과는 대성공. 다리를 쭉 뻗어 순식간에 상대 뺨을 연타하는 광경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고, 그와 함께 을 비롯해 2년 동안 여섯 편의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지나친 다작 탓인지 인기는 곧 가라앉고 말았다. 챠리 셀 외에 바비 킴이라는 또 한 명의 재미교포 배우가 반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비행기 안에서 소동을 피운 가수와는 다른 사람이다). 연예계 슈퍼스타 겸 액션 영화 애호가 겸 무술인이던 전영록이 이두용 감독과 함께 ‘돌아이’ 시리즈를 선보이며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등을 번역했다.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 2015-10-0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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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 그 순간] 청일전쟁을 보며
- 광복 70년을 맞아 우리의 근세사를 회고하면서 교훈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방송사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KBS는 7월 말 1894~1895년 청일전쟁에 관한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전쟁은 조선에서 중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툰 전쟁이다. 아산만에서 시작된 전쟁이 황해해전으로,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후 만주, 요동반도, 그리고 중국본토로 들어가는 산해관(山海關)까지 확대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보장됐다.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이 중국의 승리를 예견했다. 중국은 아편전쟁 후 50여 년간 서양 열강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는 연전연패했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흔히들 명치유신으로 개화에 성공한 일본이 보수-반동정권이 지배한 중국에 이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패배를 설명하는 편린일 뿐이다. 당시 중국은 근대 이전 유럽의 상황과 유사했다. 유럽의 전제군주들은 엄청난 개인 비용으로 (사실은 국민 세금이지만) 양성한 ‘국왕 개인의 군대’가 전쟁으로 약화되면 국내정치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고 보았다. 전쟁이 장기화돼 병력이 소진되면 승리한다 해도 국내의 반대세력들이 이 틈을 이용해 반기를 들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단기전으로 끝났다. 상대방과 한번 부딪쳐 서로의 힘을 시험해 본 뒤 곧 협상으로 들어가 주고받기를 하면서 병력 손실은 최소화하려 했다. 전쟁이 정치·외교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시기 중국은 이보다 더 심했다. 명목상으로는 모두 조정의 지휘 아래 있으나 워낙 땅덩이가 커서 통합된 단일 명령체계를 갖춘 ‘국군’이란 개념의 군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청 제국 군대의 모태인 8기군 외에 몽골, 회(무슬림), 한족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다시 지역 단위로 나누어져 분리·통치됐다. 그러나 8기군은 나태해져 과거의 용맹성을 잃었고 태평천국의 난/운동(1851~1964)은 임진왜란 때 ‘의병’과 같은 집단들이 진압한다. 당시 중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하던 인물은 이홍장(李鴻章)이었다. 그는 태평군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증국번(曾國藩)의 회군((淮軍-안휘성 일대에서 조직한 의용군) 출신이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후계자로 회군을 배경으로 수도 북경이 아닌 천진(天津)에 거주하면서 중국 북부의 해군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북양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중국의 외교, 군사, 경제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조선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조선왕’이라고 호언할 정도였다. 그러나 눈길을 국내정치로 돌려보면 북경의 만주조정과 이를 둘러싼 보수-반동 집단들의 끊임없는 견제는 물론, 다른 지역 군부의 질시와 경쟁에 싸여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정통 왕조에서 황제가 거주하는 ‘경성·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관리의 지위는 항상 불안했다. 중국 해군은 겉보기에는 당당했다. 서양식으로 북양, 남양, 복건, 광동함대 등 4개 함대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중 북중국(황해) 일대를 담당한 북양함대는 ‘극동’ 최강의 함대, 세계 8위의 함대이며 함선 78척, 총 배수량 8만3900톤으로 일본해군 전체를 능가하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북양함대 기함(旗艦) 정원(定遠)과 동급인 진원(?遠)은 독일에서 건조돼 배수량이 7670톤으로 일본의 기함 마쓰시마(松島, 4217톤 영국에서 건조)의 두 배에 가까운 덩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과 싸우기 싫었다. 20년 넘게 키운 북양함대와 육군이 여전히 문제점이 많았으며 전쟁에서 타격을 입으면 북경에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로 넘칠 것이고 간신히 버텨오던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 다른 함대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 전쟁에 전력투구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눈은 국내정치에 둔 채 떠오르는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또 피해를 줄여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의 승패가 무기와 병력의 수로 결정되던가? 총지휘관은 정치적 이유로 전쟁을 망설이고, 병사들은 훈련과 정신무장이 안 되어 있고, 부대 간 유기적인 상호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겠는가? 북양함대 예산은 위에서는 서태후가 공공연히 빼돌려 별장 이화원(?和園)에 연못을 만들고 그 흙으로 산을 쌓는데, 전선들은 전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개조를 못하고 정비 불량으로 규정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탄약의 비축도 불충분해 해전 중 부족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포에 장전한 포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구경이 다르며 오랫동안 내부 부식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국의 실화소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홍장은 정원과 진원을 점검하자 사용 가능한 주포 포탄이 세 발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합쳐 단지 여섯 발뿐이라는 말인가….’ ‘아닙니다. 정원에 한 발, 진원에 두 발, 모두 합쳐서 세 발입니다.’ 정원과 진원에는 주포가 각각 4문씩 있었다. 또 포의 구경 15인치에 쓸 수 없는, 예를 들어 10인치짜리 포탄이 준비됐다면 어떻게 포를 발사할 수 있겠는가. 육전의 승패를 가른 평양전투(1894) 직후 일어난 황해해전에서 중국은 10척의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고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한다. 다음 해 일본군이 위해위(威海?)를 공격하자 중국 해군은 정원의 배 밑에 구멍을 뚫어 침몰시켰다. 진원은 전리품으로 빼앗긴다. 이후 진원은 러일전쟁 때 고물 취급을 받지만 발트함대를 섬멸한 대한해협 전투에서 러시아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적국’을 위해 봉사했다. 중국을 대표하며 위용을 과시하던 전함의 기이한 운명이었다고 하겠다. 이 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이홍장과 일본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청일전쟁의 역사를 읽으면 통영함 비리사건이 떠오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9-17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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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에 혼자 떠나는 여행- 당진시의 유일한 섬 '난지도'
- 충남 당진시에도 섬이 있다. 난지도(蘭芝島)다. 당진군 석문반도와 서산시 대산반도 사이, 당진만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소난지도, 대난지도를 합쳐 부르고 그 주변에는 대조도, 소조도, 우무도, 비경도, 먹어섬, 풍도, 육도 등 7개의 작은 섬들이 있다. 난초와 지초가 많이 자생해서 붙여진 섬 이름. 과연 그 섬엔 무엇이 있을까? 도비도 선착장에서도 눈가늠이 되는 소난지도가 해맑게 웃으면서 어서 오라 손짓한다. 글·사진 이신화 의 저자 www.sinhwada.com 작지만 조용하고 아름다운 소난지도, 의병들의 함성이 들리는 그곳, 언제 다시 가나? 오전 7시경. 도비도 선착장 주변엔 활기가 넘쳐난다.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 낚시객들을 태우느라 바삐 움직이는 작은 배들 사이로 하루에 세 번 운항하는 철부선(쇠로 만든 짐배)을 타려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하나둘 모여든다. 자전거를 타고 온 여학생이 눈에 띈다. 선장의 딸이라는 여학생은 대난지도 섬의 분교로 6년간 통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7시50분, 배가 출항한다. 소난지도가 나의 첫 목적지다. 당진군내에서는 대난지도 다음으로 큰, 두 번째 섬으로 선착장에서는 10분 거리다. 눈 깜짝할 새 갑진마을에 도착한다. 낯선 곳에 대한 설렘이 앞선다. 이 섬에서 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이 하선한 몇 사람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선착장 주변을 혼자 배회한다. 식당 두어 곳과 가게, 교회, 경로회관과 민가 몇 채가 있다. 마을에서 만난 할머니 두 명이 눈에 띈다. 말을 걸어볼 요량이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소난지도의 청아한 공기만큼이나 얼굴이 곱고 정정하다. 뭍에서 시집와 평생 이 섬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 애써 캐물어야 아는 것은 아니리. 선착장 좌측으로 가본다. 길은 바다를 끝으로 끊어진 듯 보이지만 더 가보면 옛 학교터다. 1960년대에 삼봉초 소난지 분교장이었다. 점차로 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1992년 폐교됐다. 1500평 규모의 폐교엔 제법 넓은 운동장이 있고 새로 지은 듯한 마을 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때 이 섬에도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슬슬 마을 안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찻길이 끝나는 도독어미 바닷가에 발길을 멈춘다. 소난지도는 과거 조운경로에 들었을 때 조운선이 정박하던 곳이다. 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경창(서울 마포)으로 수송하면서 잠시 쉬어 가던 곳이다. 조선 말에는 이 세곡선을 털기 위해 도둑들이 살기도 해서 붙여진 지명인 듯하다. 펜션동, 식당이 한 채 있고 낚싯배 한 척이 있다. 바다로 나가, 눈을 들어보니 지척으로 대난지도다. 400m 지점이니 수영을 잘한다면 도착할 수 있을까? 해변엔 인적이라고는 나 혼자다. 옅은 파도소리가 귓전으로 쓸려 간다. 배가 들어온 흔적인 선착장은 부서져 있다. 왼쪽은 바닷물이 차 더 이상 갈 수 없다. 야트막한 산길도 올라보고 해변도 배회한다. 새소리, 풀 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사위는 고요하다. 문득 책을 펼쳐들고 싶다. 돗자리를 펴고 원 없이 못다 읽은 책을 읽고 싶다. 바닷길을 따라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다로 튀어나온 기암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과 조우한다. 바위 끝에 서서 낚싯대를 드리우다가 아주 작은 노래미 한 마리를 잡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초보 낚시객들에게서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우측 둠배마을 펜션단지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의병총을 만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전국 의병들의 반발은 거셌다. 1907년, 당진지역 최구현의 의병부대, 경기남부지역에서 싸웠던 홍일초 부대, 서산의병 김태순 부대, 홍주의병 차상길 부대원들이 합류해 소난지도로 왔다. 소난지도를 택한 이유는 전라도 일대에서 세곡을 싣고 한양으로 가는 세곡선들이 정박한다는 점이다. 세곡을 탈취해 군량미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육지와 떨어져 있으니 비교적 안전하다는 점도 들 수 있다. 하지만 홍주경찰서에서 눈치를 채고 1908년 3월 15일 이곳을 기습 공격한다. 9시간의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실탄이 떨어진 150여 명 의병 전원은 이곳에서 몰살당했다. 아프다. 가슴이 저려온다. 절로 눈시울이 젖는다. 그것을 추모하기 위해 1974년 6월, 봉분을 봉축(封築)했고 1980년 6월 의병총비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1982년 8월 5일 의병총비를 제막한 것이다. 의병총 앞, 둠배마을은 펜션 단지다. 그 앞에 폐가 몇 채가 있다. ‘소난지도의 영웅들’이란 다큐드라마를 찍겠다고 만들어진 세트장이다. 하지만 제작사 관계자들은 산지 전용허가를 받지 않은 채 소나무 5000여 그루를 무단 벌채했다가 문제를 일으켰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보전산지인 이곳에 남아 있는 폐가만큼이나 창피를 당했다. 어쨌든 이 작은 섬 안에는 제법 볼거리, 할 거리, 느낄 거리가 쏠쏠함에 재미가 많다. 겨우 5~6시간 남짓한 섬과의 만남이지만 오랫동안 알던 곳처럼 친근하다.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나 언제 또 이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고운 모래사장이 자랑거리인 대난지도 해수욕장 오후 1시 30분에 선착장에 도착한 배를 타고 대난지도로 향한다. 대난지도에 사람이 살아온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소난지도, 대조도와 함께 근접형 군도를 형성하고 있다. 대난지도는 행정자치부가 선정한 ‘국내 명품 섬 베스트 10’ 중 하나로 꼽혔다. 그 섬에 내가 있다. 선착장 바닷가에서는 독특하게 생긴 바위가 눈길을 끈다. 엄지손가락이 올라간 듯한 작은 기암은 이 마을에서는 ‘선녀바위’라 불린다. 선착장에서 난지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간다. 약 3㎞ 정도의 거리라서 걷기에도 어렵지 않다. 민가와 횟집을 지나고 나니 대난지도에서는 가장 큰 마을인 양짓말을 만난다. 바다와 조금 떨어진 데다 산기슭에 민가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 바닷가 마을이라기보다는 산중 마을처럼 느껴진다. 마을을 비켜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에 삼봉초등학교 난지분교가 있다. 체육시간인 듯 아이들은 땡볕에서 열심히 줄넘기를 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전교생인 듯, 나이차이가 많아 보인다. 학교 건물은 마치 전원주택 같은 모습이다. 슬쩍 교실을 엿본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현대적이다. 교실이라기보다는 개인 방처럼 아늑하다. 그곳에 최신 컴퓨터, 빔프로젝터, 스캐너, 프로젝션TV, 전자오르간 등 한눈에도 도심 시설보다 나아 보인다. 이 분교는 2000년엔 학생수가 2명으로 감소, 폐교 위기에 몰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분교로 발령받은 교사들이 육지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전학시켜 오는 등 ‘학교 지키기’에 나서 폐교를 막았다. 요즘엔 ‘아름다운 학교’라는 입소문을 타면서 매년 아이들이 한두 명씩 늘고 있다. 최신식 시설들은 모두 대기업들로부터 기증받았단다. 분교를 비켜 고갯길을 넘어서니 드디어 난지도 해수욕장이다. 당진시의 유일한 해수욕장으로 당진 3경으로 꼽힌다. 폭 500m, 길이 2.5㎞의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이 인상적이다. 100m 이상 완만하게 연결되는 모래가 깔려 있다. 물때에 따라 물고기도 잡고 조개도 잡는 곳. 특히 수심이 완만해 해양레포츠 장소로 인기라는데 마침 청소년 수련관에서 여중생들이 래프팅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바다로 이동 중이다. 한참이나 그들의 극기훈련을 지켜본다. 멋진 추억을 만들고 있는 소녀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바다 주변으로 퍼져간다. 해수욕장 주변으로는 넓은 소나무 숲이 있다. 북서쪽에는 바다낚시터도 있다. 팔각정 망치봉(118m) 정상에 서면 해수욕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수련원 뒤쪽으로는 등산로가 만들어져 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팻말이 마땅치 않지만 산을 좋아한다면 올라가 봐도 좋을 곳이다. 난 이제 섬 밖으로 나가려 한다. 육지 도비도에서 오후 5시 30분에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을 배회한다. 낚시객들도 보고, 배를 타기 위해 모여든 관광객들도 만난다. 아침에 탔던 그 배에 다시 오른다. 내 살갗은 하루 만에 벌겋게 익어 버렸다. 땡볕이 내리쬐는 섬의 하루, 난 소난지도, 대난지도를 훑듯이 스쳐왔다. 그곳을 평생 지키고 사는 할머니들도 여럿 만났고 그들의 섧디 서러운 인생사도 들었다.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 “소난지도가 좋아? 대난지도가 좋아?” 답은 하지 않으련다. 각자의 느낌이 다를 테니 말이다.
- 2015-07-07 1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