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를 영화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뮤지컬로는 해마다 우리나라 무대에도 오르지만, 몇 십만 원을 호가하는 입장료가 비싸서 볼 엄두를 못 냈었다. 가서 본다 해도 뮤지컬은 영어로 가사가 나오면 말을 못 알아듣기 때문에 감동이 떨어진다. 그런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었고 한글 자막까지 넣어서 편안하게 볼 수 있었으니 행운이라고 말 할 수 있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던 청년은 광복을 6개월 앞두고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기억되는 그의 숨결을 찾아갔다.
윤동주는 1941년 24세가 되던 해,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약 4개월간 하숙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에 윤 시인을 기억하게 하는 대표 시 ‘
신중년이라면 성공적인 자식과의 관계가 이런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아들과 같은 패션을 공유하며, 길거리를 활보하고, 집에 와서는 아들의 고민을 상담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는 것. 그리고 내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자식의 미래에 커다란 멘토 역할을 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부모자식 관계가 되기란 ‘하늘의 별
독일에 한 소년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를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아이는 언젠가 신화 속 도시 트로이를 발견해낼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어른이 되어 러시아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손에 쥔 소년은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했고, 그리스로 건너가 고대 유물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터키 히사를르크 언덕에서 꿈에 그리던 고대도시 트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좋았을 때가 생각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아쉽게도 안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 않았어야 할 말들,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행동들, 만나지 말아야 했을 사람들, 겪지 않아도 좋았을 경험들….
무심결에 실수하거나 다분히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과거의 나와 머릿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또는 내게 그렇게 하는 다른 누
여성 명창 박녹주 선생은 를 즐겨 불렀다. 하릴 없이 늙어가는 신세를 해학과 골계로 표현한 조선 후기 가사(歌辭)다. 1969년, 명동극장에서 열린 은퇴공연에서 선생은 이렇게 노래 부르며 울먹였다.
… 있던 조업 도망하고 맑은 총명 간 데 없어 / 묵묵무언 앉았으니 불도하는 노승인가 / 자식 보고 공갈하면 구석구석 웃음이요 / 오른 훈계 말대답이 대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
우리나라 액션 스타의 계보는 곧 홍콩 스타의 계보다. 액션 영화가 ‘다치마와리’ ‘으악새’ 등으로 폄하되던 한국 영화계에서 토종 액션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홍콩 영화계는 달랐다. 그곳 영화인들은 중국 무술을 떠받들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그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은 자국뿐 아니라 우리
충청도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데다 바다와 산 계곡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다. 그중에서 금강자연휴양림은 금강 젖줄에 자리 잡아 탁 트인 풍경과 아기자기한 골짜기가 어우러져 다양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여름의 끝자락 귀여운 손자손녀들과 금강자연휴양림에서 싱그러운 숲체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에서 출발해 경부고속도로에서
명로진(明魯鎭·49). 그의 얼굴을 아는 이라면 배우 명로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명로진의 인생에 있어 그는 배우이기 전에 작가의 길을 먼저 걸어왔다. 지난 15년간 펴낸 책만 40여 권.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저자 명로진’으로 남고자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 책을 쓰고 싶다는 그에게도 오래도록 남게 될 책 한 권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