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 보송보송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 한 떨기 수선화처럼 여리여리한 배우 예수정(芮秀貞·60). 수줍은 소녀 같았던 그녀와 대화를 할수록 소녀가 아닌 소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속에 석유통을 지니고 있다며 야무지게 쥐는 두 주먹. 연극을 이야기할 때 빛나는 눈동자. ‘5월은 역시 어린이달’이라며 개구지게 웃음 짓는 모습까지. 건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엄마,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 2015년 홍수환이 어머니 황농선씨를 기억하며 부르는 호칭은 40여년 전 그대로 ‘엄마’다. 왜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는 호칭을 쓰냐는 질문에 “그냥 엄마는 엄마가 좋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그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어머니는 따뜻하고 인자한 그런 ‘엄마’로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수환아,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외쳤지
고건 전 총리께서 명지대 총장을 맡고 계시던 1996년 5월 어느 날 총장실에서 당시 공과대학장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다음 날 12시까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가보니 Y사범 등 바둑계 인사 몇 분과 처음 보는 정부 고위관료 몇 분 등이 모여 대학에 바둑학과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나온 분들
한 중년 남성의 상경은 슬펐다. 40년 가까이 한곳만 바라보며 달려온 인생이다. 가난했지만 불꽃같은 열정과 투혼이 있어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 꽃은 많은 사람에 꿈과 희망과 용기를 줬다. 중년 남성의 얼굴 곳곳에 깊게 파인 주름은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대변한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 속 온갖 사연을 담은 그의 눈은 슬퍼 보였다. 2000년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한국사람 치고 경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특별한 도시다. 신라 천년고도의 숨결을 오롯이 머금은 역사의 땅. 언제 가도 반갑고, 가고 또 가도 새롭다. 경주는 그런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유적지구’
말 그대로 찬란하다. 하지만 제대로 알까. 그토록 찬란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잘 안
명함은 역사다. 현재의 명함을 갖기까지, 많은 명함이 내 호주머니를 떠나갔다. 여기 누구보다 깊이 있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절도로 소년원도 갔다왔다. 지금 하는 일은 노무사.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 인생, 롤러코스터다. 소년원에서 나와 ‘여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역전’으로 바꾼 사나이. 노무사라는 명함을 가진
음반을 모으면서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은 물론 분야별로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게 되자 이제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것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전에 소개했던, 중학교 때 본 라는 영화의 OST(Original Sound Track)로 음반가게에만 가면 한 번씩은 꼭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1997년쯤 미국에 갔을 때, 그때도 예외는
1)“내가 물어볼 테니 알아맞혀 봐. ‘뚝에치’가 뭐어게? ‘깐에짝’은?”
2)한 신입 사원에게 부장이 “우리 어머니 수연에 와 달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망신을 당한 그는 무식을 만회하려고 에티켓 사전을 뒤진 끝에 ‘망구’라는 말을 찾아냈다. 그가 “자당 어른께서 망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라고 하자 부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