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진료실을 찾는 환자나 그 가족이 전해주는 사연은 참으로 다양하다. 특히 희귀한 피부 질환을 앓는 환자를 만나면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른 임상 진료 분야와 달리 피부 질환의 특성상 다른 사람 눈에 쉽게 노출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안면에 나타난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고(故) 이강칠(李康七, 1926~2007) 선생이 편찬한 귀중한 화보 <한국명인초상대감(韓國名人肖像大鑑)>(탐구당, 1972)을 살펴보다가 유복명(柳復明, 1685~1760)의 초상화를 만났다. 얼굴색이 좀 어둡게 그려져 있기에 휴대용 단안확대경으로 피사체의 안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얼굴이 온통 털로 뒤덮여 있었다(그림). 즉 초상화 주인공의 코에서는 여드름 자국이 보였고, 안면은 다모증(多毛症, hypertrichosis)이라는 희귀 피부 질환을 앓고 있음이 확인됐다.
남성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다모증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수염이나 눈썹 등에 유난히 많은 털은 고민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미가 부각된다는 점에서 주변으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androgen)이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위에서 체모(體毛)가 두드러지게 많이 난다면 상황은 다르다. 온몸 또는 얼굴이 털로 뒤덮인다면 문제가 달라지는 것이다. 수년 전 해외 가십으로 소개된 ‘원숭이 인간’이 그 한 예다.
초상화 주인공인 유복명의 경우 안면 다모증이 보이지만, 다행히 털의 밀도가 아주 높지는 않다. 눈 밑 부위까지 난 안면 전체 체모의 올이 머리털처럼 굵은 것으로 보아 아마 그의 손등에도 굵은 털이 났으리라 짐작된다. 피사체인 주인공이 유·청소년기에 ‘털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하니 필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초상화를 보면서 한 환자가 떠올랐다. 임상에서 눈썹이 없어 진료실을 찾는 무모증(無毛症, atrichosis) 환자를 만나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지만, 다모증 환자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다. 어느 날 여성 한 분이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필자의 진료실로 들어왔다.
의자에 차분히 앉는 여성의 얼굴 표정을 보며 왜 눈길을 피하며 이야기하는지를 직감할 수 있었다. 환자를 보는 순간, 참으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는 여성에게 나타나는 다모증의 일종인 조모증(粗毛症, hirsutism)으로 병원을 찾은 것이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환자는 중학교 선생이었는데, 입 주변과 윗입술 그리고 턱 부위가 옅은 잔털로 덮여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검게 보였다. 국소 다모증이었다. 사실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임상적으로는 그리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철없는 학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해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임상적 원인 분석을 떠나 미용 차원의 교정이 가능한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오늘날처럼 피부 치료용 레이저광 치료 기기가 없었던 시절이라 환자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은 다양한 레이저 치료 기기가 개발되어 많은 환자가 큰 도움을 받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특히 제모(除毛)용 레이저 기기는 가장 뛰어난 임상 효과를 보인다. 필자는 1980년대에 진료실을 찾아왔던 그 여선생도 레이저 치료를 받고 밝은 얼굴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살았던 유복명 귀인에게 막연하게나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