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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역국과 어머니
- 가을이 온전하게 느끼기도 전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논 물웅덩이에도 얼음이 얼었다. 추수 끝자락 논에 널린 볏짚 위로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강아지 목줄을 잡은 손끝이 시리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다. 찬바람이 대나무 잎을 가르며 쌩쌩 불던 겨울 밤, 어린 필자는 어머니 따뜻한 젖가슴을 만지며 잠들었다. 생일이면 꼭 끓여주시던 따끈한 미역국도 생각난다. 미역국은 아이를 낳은 산모에겐 필수 음식이다. 산후조리에 필요한 영양분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산모의 밥상에 꼭 올라오는 음식이다. 가난한 산골마을에서도 아이를 낳은 산모는 미역국을 꼭 먹었다. 아내가 큰아들 낳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두 손주를 우리 부부에게 안겨준 녀석이다. 80년생이니 꽤나 세월이 흘렀다. 아내는 서울시 망우리의 처가에서 출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의 산통이 잦아져서 청량리 근처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차를 불렀으나 도착이 늦어 처가 근처의 작은 병원에 급히 입원했고 그곳에서 첫아이를 순산했다. 여기서도 아침, 점심, 저녁 산모 밥상에는 미역국이 따라 나왔다. 아내는 매번 미역국을 다 먹지 않고 남겼다. 그나마 필자와 시어머니의 권유로 두세 숟가락 떠먹는 게 고작이었다. 미역국이 산모에게 좋다는 것은 알지만 먹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젓갈을 좋아하는 등 다소 짜게 먹던 아내의 입맛에는 싱거운 병원 음식이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아내는 미역국을 싫어했다. 그래서 아내가 미역국을 남기면 대신 필자가 먹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라고 했으니 남편이 미역국을 먹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을 잘 먹었다. 특히 부드럽게 푹 끓인 미역국을 아주 좋아했다. 필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께서 피난처를 찾아 거창 지역에서 산을 넘고 넘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이주하셨고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짓고 청학동 계곡 주변에서 다랑논을 만들어 논농사도 지으셨다. 어느 가을날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다행히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총질을 하지 않고 소나무 둥치에 묶어두고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밧줄을 간신히 풀고 그 길로 동네를 떠나셨다.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도 팽개치고 빈 몸으로 청학동에서 10리 길이나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마을로 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태어나 소년시절을 보냈다. 옛날 시골생활이 다 그랬듯이 필자의 집도 지지리 못사는 가난한 집이었다. 보리가 익어가는 춘궁기면 뒷산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고들고들 말려둔 것을 솥에 넣어 밥을 해먹는 날이 다반사였다. 고향 마을에선 이것을 ‘송구밥’이라 불렀다. 그렇게 가난했어도 생일이면 어머니는 집 안 구석에 아껴둔 찹쌀과 팥으로 찰밥을 하셨고 미역국도 함께 끓여내 주셨다. 미역은 아버지가 하동읍 장날에 40리 길을 걸어가 사오셨다. 생일 아침이면 새벽녘에 일어나신 어머니가 불을 지펴 큰 가마솥에는 밥을 짓고 작은 가마솥에는 미역국을 끓이셨다. 그런 뒤 안방 윗목에 정화수 한 사발과 팥물이 곱게 물든 찰밥 한 그릇, 미역국 한 대접 그리고 잘 다듬은 짚 서너 줄기를 묶어 벽에 비스듬히 세우고 삼신할머니께 기도를 드렸다. 꿰맨 자국이 있는 치마저고리이지만 깨끗이 손질해 갈아입으시고 다소곳이 앉으셔서 두 손을 비비시며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아들의 무병장수를 비셨다. 그러고 나면 찰밥과 미역국은 필자 차지가 되었다. 그 시절의 미역국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미역국에 고기를 넣을 만큼 형편이 좋은 살림이 아니어서 간장이나 소금으로만 간을 맞췄을 뿐인데도 참 맛있었다. 일 년에 서너 번 먹을까 말까 한 음식이었으니 당연히 꿀맛이었다. 미역 또한 자연산 돌미역이었을 테니 지금보다 그 맛이 풍부하면서도 구수했다. 세월이 흘러 먹거리가 많아진 요즘 세상에도 미역국은 여전히 필자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지금은 거의가 양식 미역이다 보니 예전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가 없지만 그래도 미역국을 즐긴다. 남편들은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기 힘들다. 물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이것저것 다 챙기는 아내들도 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야 더 정성이 담긴다. 서울에서 주로 자라고 생활한 아내의 입맛과 시골 촌놈인 필자의 입맛이 비슷할 리 없다. 두 사람 입맛이 비슷해지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건강을 위한 웰빙 먹거리 바람 덕에 요즘은 아내도 시골 음식을 점점 좋아하고 있다. 필자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비롯해 우거짓국, 된장찌개, 청국장도 밥상에 자주 오른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채소 코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가 즐겨 먹는 머위, 곰취에 아내도 이젠 익숙해졌다. “시골 촌사람 아니랄까봐 티낸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이젠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제는 아예 주변이 논밭인 고양시의 외곽 전원마을에서 살고 있다. 마당 한쪽에서 텃밭도 가꾼다. 나이가 들어가고 미역국을 좋아하는 남편과 오랫동안 살다 보니 아내도 요즘은 입맛을 들여 자주 미역국을 끓인다. 쇠고기와 여러 가지 양념을 넣고 끓여 한 대접 가득 퍼주면 필자는 뚝딱 먹어치운다. 물론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은 아니다. 먹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입맛과 지금의 입맛이 같을 수는 없다. 고기도 안 들어가고 양념도 안 된 미역국이지만 가끔 어린 시절에 먹던 그 담백한 맛을 느끼고 싶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미역국을 먹을 때면 늘 어린아이처럼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새벽에 필자에게 줄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손으로 끓이시던 미역국은 이제 필자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의 젖줄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그 시절이 더 그리워진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필자가 미역국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 2016-11-0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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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 2016-10-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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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행동으로 대답할 차례
- 얼마 전 유치원에 다녀오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훌륭한 아빠·엄마가 사랑해 주시니 좋겠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빠·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줄줄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훌륭하지?”라고 너무 앞서고 말았다.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줄 모르겠어!” 뭔가 궁금한 것이 폭발하였다. 행동으로 대답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하는가 딸 가족이 근무관계로 세종시로 이사한 지 한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내와 교대로 가끔 그곳에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한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여느 때처럼 태권도학원 버스가 앞에 섰다. 손자 녀석이 반갑게 품에 안겼다. “왜 정장 입었어?” 할아버지의 평소와 다른 복장모습이 낯선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세 살이 되던 때 사회를 은퇴하였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간소복이나 운동복 차림을 대부분 기억할 터이다. “오늘은 정장 입고 자원봉사하였어!” 설명을 하였으나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전에 창업 멘토 활동현장에서 정장 차림으로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무엇 하시는지 보여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할아버지도 훌륭한 사람 맞아!” 비로소 손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진을 통한 실체 확인이었다. 아는 것이 무엇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손녀·손자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산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어린이집·유치원 등원을 종종 도왔다. 목마가 되어 무등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었다. 씨름상대가 되어 넘어져 주기에 땀을 흘렸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그것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넉 달 반 차이인 세 녀석이 모이면 어린이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라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아는 것이 궁색해진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질 터이다. 요사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체스를 배우고 있다. 늦기 전에 아이들과 이야기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하라 가까이 사는 쌍둥이의 등교를 돕고, 세종시를 왕복하면서 외손자의 유치원 하교를 돕는 일이 매우 즐겁다. 어릴 적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회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여야할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의 등하교 보살피는 일을 누가 하면 좋을까? 부모가 제일 좋겠지만 현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차선책으로 손주에 대한 사랑이 깊은 조부모가 맡는 것이 좋다. 조부모의 건강, 사는 집과의 거리 등 고려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 하지만 손주 보살핌이 조·손이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조부모의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가족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효과도 크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할아버지·할머니를 보고 배운다. 훈계하지 말고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책 읽으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 조용히 책을 읽으면 된다. 조그만 잘못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칭찬을 자주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더 따뜻한 가슴으로 몸소 실행을 보여라.
- 2016-10-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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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높이에 맞는 표현에 대하여
- 지난 남도 여행에서 민박집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같은 한국 사람끼리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전라도 토종 사투리를 쓰니 더 못 알아들었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 영감이 물려준 초가 집 하나로 먹고 사는 민박인데 내가 “펜션”이냐고 물으니 못 알아들은 것이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가려는데 주소를 불러 달라”고 했더니 역시 못 알아들었다. 내비게이션을 “내비”라고 한데다 자동차 운전에 필요한 내비게이션과는 전혀 관계없는 80대 할머니이니 당연히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이다. 낙안읍성 근처에는 펜션이라고는 없고 대부분 민박집이니 “펜션”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더라도 외래어의 경우 상대방을 봐서 써야 한다. 작년에 케이블 TV 방송국과 휴먼다큐멘터리 작업을 보름 간 한 적이 있다. 내 일상 생활을 따라다니며 찍어서 방송에 내보내는 작업이다. 육중한 카메라를 메고 담당 PD와 여기저기 다니며 촬영을 해야 했다. 가는 것마다 “휴먼다큐 찍는 중인데요” 하며 양해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못 알아듣고 일단 손사래부터 쳤다. 뭔지 모르니까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해준 말이 “인간 극장 찍는다고 해요”였다. 그 다음부터는 일이 술술 풀렸다. 어느 책에 보니 어떤 사람이 라디오 진행자를 맡았는데 게스트를 모시고 대담을 나누는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게스트마다 각계의 전문가라서 그때마다 그 방면의 공부를 해서 겨우 진행을 했지만, 상대는 이미 그 계통의 전문가이고 본인은 이제 와서 대충 겉만 훑어서 방송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것 같고 너무나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하던 중에 마침 일이 생겨 한 주 다른 사람이 그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는 것이다. 역시 전문가가 나왔는데 진행자도 그 방면의 전문가라서 대담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 평은 자기네들끼리는 잘 아는 내용이니까 대화가 잘 된 것 같지만 시청자들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진행자는 일반 시청자들의 눈높이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도 마찬가지이다. 나 혼자 보는 글이라면 내 마음대로 쓰면 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보고 읽는다. 그렇다면 평소 말하는 것처럼 대화체나 구어체가 좋다. 평소 안 쓰던 말을 글에서는 마구 써 놓으면 읽는 사람들이 피곤해 한다. 내가 전국의 유명 댄스 카페에 댄스 칼럼을 쓰면서 호평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댄스 강사들은 몸으로는 잘 하는데 말로는 쉽게 설명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러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쉽게 설명 잘 하는 사람이 명강사이다. 수필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이 있다. 유명 작가일수록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툭툭 튀어 나온다. 한자 세대라도 잘 모르는 한자로 된 단어가 나올 뿐 아니라 순수 우리말이라며 굳이 안 들어가도 되는 풀이름도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할까 하며 의견을 묻는다. 공부하는 우리들은 한결같이 평소 안 쓰던 단어에 대하여 성토한다.
- 2016-10-1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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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 김장철이 다가온다. 배추와 무가 싱그럽게 쑥쑥 키를 키운다. 아침저녁의 손이 시릴듯한 날씨에 서서히 깊은 맛이 들어간다. 이웃 할머니가 가꾸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밭의 무도 땅 기운을 받고 어제와 눈에 띄게 다르다. 지난봄 야외 사진 촬영을 나갔다가 들녘 밭에서 발견했던 또 다른 모습의 무를 사진으로 담았던 기억이 난다. 서두의 사진이 그것이다. 필자는 그 형상에서 인생 2막을 맞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사진의 제목을 “자화상”이라 정했다. 베이비붐 세대와 그 이전 세대들은 자신을 늘 뒷전에 두며 싫은 일도 마다 않고 가족이나 직장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등골이 다 빠졌다. 그 모습을 빈틈없이 닮았다. 사진의 대중화 시대를 살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공유한다.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카메라 장치가 들어가면서 대중화는 급속히 앞당겨졌다. 사용자의 편리를 위하여 놀라울 정도로 기능도 좋아져 더 그렇다. SNS, 즉 소셜 미디어 시대의 삶에 사진은 예술의 한 분야에서 영상언어로 발전하고 있다. 셔터만 누르면 사진은 찍힌다. 침팬지도 사진을 찍는다고 말할 정도다. 대충 찍을 수 있어도 어떻게 찍어야 좋은 영상언어가 될까를 고민함도 바람직하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의도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흔히 말하는 메시지 담기다. 필자는 사진을 찍으려고 준비할 때 먼저 생각하는 일의 하나다. 어떻게 보면 머릿속에 써 내려 가는 촬영 노트인 셈이다. 야외 촬영을 준비하면서 기획한 내용의 하나가 베이비붐 세대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보자는 것이었고 그런 사진 한 장을 밭에 버려진 무에서 찾았다. 앞의 사진이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무엇으로 보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연근”이라 답한다. 사실 그렇게 보인다. 듬성듬성 비워진 모습이 연근을 잘라 놓은 것과 흡사해서다. 농부가 수지가 맞지 않아 밭에 그대로 버려두어 한겨울을 지내면서 바람이 든 무의 중간을 뚝 잘라본 단면이다. 마치 인생 1막을 마감하고 인생 2막을 맞으려는 세대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젊음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해 왔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와 국가, 가족에게 헌신하고 남은 내면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과 같아서다. 자식의 교육이나 결혼자금 또는 자녀 사업자금으로 다 쓰고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등골까지 다 빨린 세대의 모습을 빼닮았다. 필자는 이 한 장의 사진을 대중과 공감하는 영상언어로 활용한다. 인생 2막에서는 비워진 그곳에 생업에 밀려 하지 못하였던 꿈을 이루는 자아실현으로 채워가야 함을 은근 슬쩍 강요하는지 모른다.
- 2016-10-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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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을까?
- 손녀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남들은 손녀 보고 싶어 자주 가는 줄 안다. 그러나 동네도 좀 멀고 자주 가는 것이 아기에게 좋을 것 같지 않아 자제하다 보니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보고 그 다음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가본 것이 전부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기는 대개 비슷하고 아직 소통이 안 되니 그냥 보기만 할 뿐이라 별다른 생각은 안 들었다. 남들은 손주가 태어나면 귀엽다며 손주 자랑에 열을 올리는데 나는 아기에 대한 정이 없는 편이다. 아들딸이 고만할 때 나는 중동에 나가 있는 바람에 아기에 대한 정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아들이 사는 사당동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산행을 하고 뒤풀이로 저녁도 먹었고 술도 거나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무심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까봐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집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주택가라서 그런지 가게가 안 보였다. 제 철 과일이나 사려고 했었다. 편의점은 있는데 마땅히 사들고 갈 것도 없어 또 만만한 화장지 한 뭉치를 사 들고 갔다. 그리고 아들과 마실 막걸리 두 병을 사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녀가 앉아 있었다. 늘 보던 바퀴보행기가 아니고 바퀴 없는 보행기 같이 생겼다.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 대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내내 누워 있다가 오늘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은 색 재킷을 입었으니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주 드나들었으나 남자는 내가 처음 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데 어느 별장에 갔을 때 그 집 개가 나를 문 적이 있다. 개가 임신 중이라 예민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정문이 아닌 계곡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경계심으로 그랬다고 추측해본다. 경험상 개들은 복장을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 우편배달부나 청소하는 사람에게는 짖지만 하얀 드레스셔츠에 정장을 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녀가 느낀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이 들어 무섭게 생긴 남자였던 것이다. 거기에 막걸리를 마셔 술 냄새가 풍풍 나니 그걸 할아버지 냄새로 기억할 것이다. 장차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많겠지만, 일단은 그런 모습으로 상면한 셈이다. 요즘 다행히 전처가 일주일 간격으로 드나든단다. 퇴직 하고 나서 할 일도 없던 차에 귀여운 손주 보러 오기도 하고 육아 경험도 들려준단다. 두 자녀 키울 때 맞벌이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에게 맡겼으나 할머니들은 책임감이 크지 않아 늘 노심초사했다. 출근할 시간은 되었는데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 못 온다고 하면 발만 동동 굴렀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나마 어느 해 겨울인가 유난히 추워서 고령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새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회사 일에 바빠 어떻게 해결했는지 조차 모른다. 그때의 애로를 생각하고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곧 출근하게 되면 손주를 돌봐준단다. 다행이다. 무엇보다 아기가 좋아할 복장부터 표정, 말씨를 어느정도 다듬어야겠다. 할아버지가 되려면 일정한 훈련을 통해 자격을 갖춰야 하지 싶다.
- 2016-10-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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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8-1] 나만의 책, 무엇을 어떻게 담을까?
- 자서전은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자기계발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때론 가슴을 적시는 소설이 되기도 하고, 희로애락이 한껏 버무려진 희곡이 되기도 한다. ‘내 이야기’ 즉, 직접 겪은 일을 자기 감정을 토대로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내가 직접 쓰는 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자서전을 만들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한 이들을 위한 방법을 정리했다. 민경호 세계로미디어 대표· 저자 >>STEP 1 준비 단계 자서전에는 소소한 일상부터 가치관이나 사상, 인생관, 국가적·사회적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 등 나와 관계된 모든 것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일반적으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 목차를 구성한다. 오래전부터 써 온 다이어리 등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억력’과의 싸움이 된다. 과거를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방법을 실행해 가며 토막글을 쓰거나 메모해 두는 것이 좋다. ◇ 과거를 떠올리는 방법 ➊ 연대별 주요 사회 사건과 내 기억을 연관 짓기 10년 단위로 그 시대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다. 각 사건이 일어날 당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일이 생겼는지 떠올려 보자. 큼지막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시간 순서대로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해 나갈 수 있다. ➋ 편지·사진 모으기& 추억의 장소 찾아가기 막연히 떠올리는 것보다 편지·사진을 보거나 고향 집, 학교, 직장 등을 다녀오면 새로운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직접 찾아가기 어렵다면 예전에 살던 동네나 이사 다닌 집, 사무실 등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보는 것도 방법이다. ➌ 질문지 활용하기 인터뷰를 하듯 세세하게 질문지를 만들어 시기별로 나누어 답을 적어 본다. 아동기·청소년기·청년기·결혼생활기·중년기·노년기 등으로 분류하고, 몇 가지 키워드를 활용해 질문을 이어간다. (예: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학창시절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나 선생님은? 첫 직장상사와 관계는? 신혼여행은? 중년기 공휴일에는 무엇을 했는가? 등등) >>STEP 2 글감 만들기&구성하기 기억을 떠올리며 메모를 하거나 토막글을 써두었다면, 소주제를 정하고 여러 개의 토막글을 엮어서 서술해 보자. 소주제를 정하기 어렵다면 유명인의 자서전 몇 권을 읽어 보고 참고하는 것도 좋다. 다른 책의 목차나 구성을 활용해 글감을 마련하고, 얼추 윤곽이 잡히면 원하는 대로 재구성해 보는 것도 괜찮다. ◇ 자서전 내용을 독특하게 구성하는 방법 ➊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 이름을 목차에 활용: 피터 드러커 자서전의 예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자서전 목차를 보면 아주 독특하다. ‘할머니-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우쳐준유쾌한 사람’, ‘엘자와 소피-교육의 길을 제시한 노처녀 자매 선생님’, ‘폴라니 가-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흥미로운 가족’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주변 인물 또는 유명인의 이름을 소주제로 해 자서전을 꾸몄다. ➋ 시간 순서가 아닌 중요한 사건 순으로: 러셀 베이커 자서전의 예 미국 언론인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흥미로운 구성이 눈에 띈다. 어린 시절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일반 자서전과 다르게 그는 맨 처음 ‘제1장 어머니의 타임머신’이라는 소주제로 문을 연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와의 대화를 서두에 넣는 등 기억에 남는 사건을 먼저 이야기하고 당시 관련된 에피소드를 풀어 나가는 형식이다. >>STEP 3 글다듬기&견적 의뢰 그동안 써 놓은 글감을 모아 자서전의 두께나 형태를 가늠해야 한다. 완성도를 높이려면 글쓰기나 스토리텔링 강좌 등을 참고해 글을 세련되게 다듬는다. 가능하다면 간단한 문법을 익혀 틀린 문장이나 단어는 없는지 확인한다. 인터넷으로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을 찾아 활용해 보는 것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자료가 정리됐다면 출판사 등에 자서전의 페이지 수나 크기, 레이아웃에 따른 견적을 의뢰한다.
- 2016-10-13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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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읽기] 10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 전시 덴마크 디자인 전(DENMARK:DESIGN) 일정 11월 20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카레 클린트(Karre Klint), 한스 베그너(Hans J.Wegner) 등 11명의 거장 디자이너 작품을 만날 기회다.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뱅앤올룹슨(BANG&OLUFSEN)을 포함한 11개 브랜드가 참여했다. 덴마크 왕실 도자기, 케네디 대통령이 앉았던 의자, 브릭아트의 대명사 레고(LEGO) 등 덴마크를 대표하는 디자인 작품 200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덴마크 근대 디자인의 황금기라 불리는 20세기 이후의 디자인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한국 추상미술의 역사 전(The History of Korean Abstract Art) 일정 10월 29일까지 장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조사, 발굴, 수집하여 제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아카이브 전시다. 1957년 이후 연대별로 최근 추상미술 전시와 단색화에 대한 관심까지 아우르며, 미술에 대한 관념과 형식을 뛰어넘고자 한 한국 추상미술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다. 추상미술 단행본, 도록, 팸플릿, 주요 전시 기사, 평론, 포스터, 사진, 작품 등 각종 실물자료를 다양하게 마련했다. ◇ 도서 여행자의 하룻밤 (이안수 저·남해의봄날)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촌장인 저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북스테이 ‘모티프원’에서 일어난 10년간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모티프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여행자들이 풀어놓은 진심 어린 이야기가 책에 온기를 더한다. 전 세계 방문객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각자의 삶을 나누는 경험을 ‘글로벌 인생학교’라 부르며 인생의 공감과 영감을 자아낸다. 마르지 않는 붓 (자유칼럼그룹 저·두리반) 지난 10년간 자유칼럼그룹이 발표한 3000여 편의 글 중에서 24명의 필진이 추린 74편을 담은 칼럼집이다. (재)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이 추천사를 썼다. ‘마르지 않는 붓’이라는 제목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붓, 평생 녹슬지 않는 펜을 들고 살아온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이 이사장의 추천사에서 따왔다. ◇ 영화 박카스 아줌마의 인생 딜레마 개봉 10월 6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재용 출연 윤여정, 전무송, 윤계상 등 종로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가난한 노인들 사이에서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로 통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주인공이 사는 게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고객’들을 도와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죄책감으로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 역에 배우 윤여정이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제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20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영화제 등에 초청돼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마음이 먼저 가 있는 곳 개봉 9월 29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이소현 출연 박삼순, 이소현, 장춘옥 등 어린 시절 함께 살던 할머니의 자살 시도 소식을 들은 손녀가 다시 할머니 집에 들어가 동거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감독인 손녀가 담아낸 할머니와의 가슴 따듯한 이야기로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으며 호응을 얻었다. 투박하지만 정겨운 할머니 집을 배경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할머니와 손녀가 서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애틋함이 묻어난다. ◇ 공연 국화꽃 향기처럼 아련한 첫사랑 일정 10월 1~23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연출 이성모 출연 박형준, 장덕수, 서지유, 정서희, 황정윤 등 2000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김하인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4년 이후 1년 8개월 만에 선보이는 이번 공연에서는 여주인공의 입장에서 고민이 극대화됐던 이전 무대와는 다르게 남주인공 ‘승우’의 시선과 심리를 중심으로 극이 전개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왕비의 얼굴 일정 10월 11~23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김선영, 조풍래, 정원영, 박영수, 이창엽 등 명성황후라는 실존 인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한 창작가무극이다. 사진 찍기를 즐겼던 고종과는 달리 명성황후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미스터리한 에피소드와 가상의 인물이 주는 신비감을 더했다.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일정 10월 26일~11월 6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장우재 출연 이호재, 오영수, 윤상화, 최광일, 이명행 등 조선시대 문인 성현(成俔)이 쓴 기행문 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작품으로, ‘기지’와 ‘경숙’이라는 두 대감이 왕의 질문을 갖고 금강산으로 떠나는 여정을 그렸다. 장우재 연출은 “제목처럼 어두운 세상을 뒤집어 밝게 보려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햄릿으로 태어나 줄리엣을 꿈꾸다 일정 9월 30일~10월 16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김광보 출연 강신구, 최나라, 이지연, 윤나무, 황성대 등 셰익스피어의 을 바탕으로 만들었지만, ‘여자 햄릿’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이는 연극이다. 기본적인 가족 구도와 인물 관계는 유지하면서 햄릿의 고독과 남성적인 복수극 뒤에 숨어 있는 섬세한 여성성에 주목했다.
- 2016-10-1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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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학교 전학] (19) 본받아야 할 일
- 담임선생님이 아기를 낳아서 대신 60세 가량의 백발 노선생님(여자)께서 대신 맡았다. 그때가 4학년이었는데 아이들은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면서 학교 전체의 문제로 만들었다. 담임선생님이 워낙 빠릿빠릿하고 단호한 성격이었던지라 아이들은 노선생님을 할머니라고 생각했는지 시쳇말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정확하게 잘 지키던 규율들을 안 지키고 학생들이 똘똘 뭉쳐서 수업도 제대로 안 받았다. 모범반이 순식간에 빗나간 행동을 하는 문제반이 된 것이다. 대부부 형제가 함께 다니는 동네 학교라 어느 반에서 일이 생기면 삽시간에 온 동네에 소문이 돌았다. 모든 학부모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서로 걱정하며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학교에 가서 제발 잘 지도해달라거나, 아니면 다른 선생님으로 바꿔달라고 항의하는 부모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만 하면 손을 잡고 걱정들을 했다. 온통 같은 말이었다. “도오나룬데스까네에~고도모다찌가젠젠오찌쯔까나꾸데다이헨데스네~(어쩌지요? 아이들이 침착성을 잃었어요. 큰일이네요)” 이 말은 온 동네 인사말이 되었다. 똑같은 말로 인사를 건네고는 그동안의 상황을 서로 아는 데까지 교환하고 마무리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해결되겠지요?”였다. 학교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마음으로 그냥 헤어지는 거였다. 어느 엄마 아빠도 학교를 마구 흔들어대는 일은 없었다. 조용히 해결되기를 기다리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무슨 일로 이렇게 된 건지, 오늘은 어떻게 보냈는지를 아이들 입장에서 들어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학생으로서 선생님께 해야 하는 행동을 일러주고 지키라고 타이르는 정도였다. 한 달여를 그렇게 지내자 차차 나아져갔다. 담임선생님이 다시 학교에 나왔지만 어른들의 생각과 권위로 아이들을 혼내는 일은 없었다. 노선생님이 그만둘 때는 학생들 전원이 진심으로 잘못한 점을 무릎 꿇고 빌고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몇 명이 반의 분위기를 흐려놓으면서 동요를 일으켰던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벌을 내리는 일 없이 서로 용서하는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요즘 신문에서 제자와 선생님 그리고 학부형들의 이해 안 되는 행동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있으면 옛날 그 일이 생각나곤 한다. 그들은 “아이들도 다 생각이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라고 믿어주면 기다려줬다. 신뢰하는 마음이 상호 간에 존경심과 믿음을 키운다는 걸 체험했다. 업신여겼던 자기들 행동에 대한 용서를 빌고, 그 답으로 용서를 해주는 너그러움을 주고받으면서 진정한 교육이 이뤄졌던 것이다. 그 뒤로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깨끗하게 끝난 일이었다. 그 뒤 내가 4년을 더 살았지만 이름을 거론하면서 잘못한 아이를 지적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나라 부모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 2016-10-1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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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감소, 무서워요.
-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져온 출산 관련 표어 내용이 재미있다. 전쟁 후 우리나라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국가에서는 “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가난한 나라에 인구가 늘어나니 고민도 컸을 것이다. 필자가 결혼할 당시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있었고 곧이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표어도 등장했다. 그 후부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자녀를 낳지 않았는데도 공무원들이 피임을 계몽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의 저출산이 큰 문제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2750년도에는 인구가 없어 대한민국이 없어진다는 기사를 읽었다. 휴~ 올해가 2016년이니 2750년이라면 700여 년 후의 이야기다. 700여 년 후라면 필자는 당연히 이 세상에 없고 우리 아들 세대와 꽃처럼 예쁜 우리 손녀 세대도 다 떠난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우리나라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봐 두렵고 한숨이 나온다. 물론 문제가 더 심각해지면 좋은 방안들이 나올 것이고 대처 방법도 생겨서 나라가 통째로 쉽게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한 집에 자식이 보통 열 명은 되었다. 충남대학교 교수이셨던 외할아버지도 우리 엄마를 장녀로 삼촌 4명과 이모를 두셨고 어려서 잃은 자식도 있었다 하니 열 명에 가까운 자녀를 낳으신 셈이다. 친할아버지댁도 장남인 우리 아버지를 시작으로 삼촌 세 분과 고모 네 분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양쪽 집이 다 대가족이었다. 식구가 많은 게 부담스러웠는지 우리 부모님은 딸 셋만 낳으셨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장남인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엄마는 시댁으로부터 은근한 핍박을 받으셨던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당신 아들을 우리 집에 양자로 주겠다는 제의까지 있었지만 아버지가 딸 셋으로 충분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아 필자는 딸 셋인 집의 장녀가 되었다. 필자는 아이를 하나만 낳았다. 물론 당시 유행하던 슬로건 때문은 아니다. 그냥 하나만 낳아 잘 키워야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너무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았으므로 자식이 하나라는 게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필자처럼 외동으로 끝난 집은 별로 많지 않다. 거의 두 명 이상의 형제나 자매를 두었다. 그래서 다들 필자에게 자식이 하나여서 얼마나 외롭겠냐, 아이도 쓸쓸할 거라고 걱정들을 했다. 그러나 필자는 아들이 하나인 것에 만족했고 아이도 밝고 명랑하게 자라서 그런 걱정들은 정말 기우에 지나지 않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불만 없이 잘 자랐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들 생각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손녀가 태어났을 때 필자는 하나만 키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들 며느리는 둘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 우리 아들이 형제 없이 혼자 자란 게 그리 좋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졌다. 요즘은 아이 키우기 어려운 세상이니 속으로 하나만 낳아 잘 기르기를 바랐는데 이런 이기적인 생각도 저출산의 원인이어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는 셈이다. 너무나도 귀엽고 예쁜 손녀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동생이 생겼다. 저출산 시대에 너도나도 자녀를 하나씩만 갖겠다고 하는데 우리 며느리는 칭찬해줄 만하다.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많이 낳아 700여 년 후에 우리나라가 통째로 없어지는 재앙은 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2016-10-11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