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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 일본은 우리나라 보다 국토가 넓다. 그러나 개인 사람이 필요한 넓이가 3평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사는 거 같다. 4식구가 사는데 13평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넓을 필요가 없다는 아주 당연한 생각들이어서 아담하고 작은 공간을 가지고 살면서 아무 불평이 없다. 가구들도 집에 알맞게 오밀조밀하게 정돈하고 산다.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은 작은 베란다가 없으면 길가로 난 창이나 현관 주위에 꽃들을 장식한다. 작은 공간에 알맞은 화분 배치와 옹기종기 귀여운 그러나 갖가지 색깔이 곱게 피는 식물들을 골라 정성껏 잘 키운다. 동네를 돌다보면 그 집마다의 개성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하는 화분들의 앙증맞음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흐른다. 하나같이 잎사귀들은 햇빛을 받아 빤짝거리고 싱싱하게 보인다. 그 주인을 닮은 인사를 하는 듯 꽃들이 반기며 웃는다. 지나가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처음 만나는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게도 되고, 가끔은 물 주기나 손질해 주는 주인과 처음 만나지만 일상의 대화를 옛 친구를 만난 듯 주고받기도 한다. 꽃을 가꾸는 사람들이라 그럴까? 온화한 세상의 맛을 듬뿍 안겨 주는 성품들이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날씨 얘기도 꽃 얘기도 정말 기분 좋게 대화나누기가 되니 얼마나 좋은가? 그들은 정성들여서 꽃에게도 생활얘기를 나누면서 키운단다. 어느 혼자 사는 할머니는 시집간 딸이 너무 멀리서 살아 자주 만나 수가 없어서 딸처럼 인사를 하며, 보고 싶은 딸에게 하고픈 말들을 해 주면서 딸 같이 키운다고도 했다. 식구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꽃들이 식구처럼 되었다고. 혼자 사는 내게 외로움도 모르고 늘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있다는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할머니였다. 어느 집은 가지나 오이, 토마토를 정성들여서 키운다. 꽃이 피고 지면 열매가 맺으니 얼마나 예쁘냐며 환하게 웃는다. 이웃들과 나눠 먹으면서 사는 게 즐겁다고 했다. 나름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꽃 기르는 마음들이 순수해 보였다. 아주 작은 공간에도 소중하게 몇 송이가 안 되어도 기르는 마음이 곱다. 갈고리를 만들어서 담 너머로 방긋 웃어 보이는 걸이 화분들도 귀엽다. 가끔 담 위에 긴 상자를 만들어서 키 작은 화초들을 심어 놓은 것도 지나가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인사 같아서 좋아 보였다. 아열대성 기후로 변해 가는 우리나라에도 요즘엔 여러 가지 꽃들이 거리 곳곳에 심겨져 있다. 일본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주인들의 마음보기와는 전연 다른 맛이지만 사시사철 화려해 보이고 거리가 밝게 보인다. 우리 아파트에 일층 어느 주민이 자기 앞 뜰을 주워온 돌로 장식해가며 예쁘게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 가지가지 꽃들도 예쁘게 가꿨다. 난 반갑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 팻말이 꽂혀 있었다. 거기엔 어머니와 나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들어왔다. 내겐 오고 가던 산보 길에서 한가지의 즐거움을 빼앗겨 버린 아주 슬픈 기분이었다. 어머님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정서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슬펐다. 말없이 피어서 사람 가슴에 아름다움을 심어 주고 가꿔주는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작은 꽃가꾸기가 온 동네를 만들어 가고 나라를 만들던 일본 사람들이 좋아 보인다. 시골에도 도회지에도 일본 어느 곳을 가도 그렇게 꽃을 가꾸는 손길이 있어서 정답다고 느꼈다.
- 2016-08-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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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매란 없다
- 심리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 앨리스 밀러가 쓴 "사랑의 매는 없다"라는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 아이가 억누를 수밖에 없던 흥분과 분노, 고통을 어른들은 모른다. 아이는 미움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그것을 받아드리는 복종의 길을 택한다. 시간이 지나 어렸을 때 왜 맞았냐고 물어보면 "제가 잘못 했을 거예요 어릴 때 제가 장난이 심했거든요" 왜? 이렇게 되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애정 어린 관심 대신 학대와 무시를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의 고통을 당연히 자기 잘못의 결과라고 받아드리는 데만 익숙해지고 자신의 감정이입 능력을 잃어버린다. 즉 자기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겪는 비극의 본질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중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알게 된지가 30년이 훌쩍 넘은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다. 이상한 것은 그 집의 남편이 고위 공무원을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8살 아래 아내한테는 우리가 옆에서 듣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욕을 얻어먹는다. 반말은 당연하고 아내가 기분이 나쁘면 남편에게 " 너, 임마" 이런 수준이다. 우리 앞에서도 공공연히 남편을 구박하여 듣기가 민망할 정도다. 별로 잘못 하는 것도 없는데 남편이 말만하면 우리 앞에서도 말꼬리 잡고 행패 수준의 말을 한다. 남편이 어떻게 참고 사는지 의아했지만 젊은 아내와 사니까 사랑스러워 저런 욕도 애교로 듣나 보다 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남편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지독히 매를 맞았다 했다. 스스로 죽으려고 목에 낫을 갖다 댄 적도 있었다. 강한 사람에게는 비굴하게 죽어지내는 것이 몸에 밴 습성이 된 것이다. 아내도 첨엔 시집 와서 박봉의 남편에 시동생 여럿 건사하느라 투정을 부렸단다. 점차 투정의 강도가 높아져도 욕설과 매에 길들어진 남편은 이걸 사랑으로 믿어 왔다. 이 책에서 "코란에 여성의 할례라는 잔인한 관습을 인정하는 구절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그 의식이 계속되는 것은 할례를 당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과거에 경험했으나 인정받지 못했던 고통을 딸과 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 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10살 무렵에 클리토리스를 제거당한 여성이 무수히 많으며 또 그들 중 다수는 이러한 관습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재혼한 남자가 의붓딸을 상습 성폭행했다. 아니 어머니가 왜 막아서지 못했는가? 어머니의 말에 맥이 빠졌다. "나도 그 남자가 무서웠어요.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 폭력에 길들여지면 저항력을 상실해버린다. 이 책에서 히틀러, 스탈린도 어린 시절 폭력으로 자라 이중인격자가 되었다고 했다. 스탈린은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의 외동아들이었는데 매일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았다고 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아버지 손에 죽을지 모르는 목숨이었다. 그가 억눌렸던 극단적인 공포는 어른이 된 후 편집증, 곧 모든 사람이 자기 목숨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망상으로 나타나 1930년 수백 만 명이 강제 수용소로 추방되거나 처형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이들을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동남아 등 고통 받는 아이들을 보면 답답하다. 때리고 학대하는 것이 너무 상습화 되어 있어 때리는 자도 맞는 아이도 길들여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아직 매 맞는 아이가 많다. 매 맞은 아이가 자라서 또 매를 든다. 아무런 죄책감을 못 느끼는 게 문제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자랄 때 우리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술만 먹고 오면 우릴 때렸다. 난 자식을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정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다. 당대에 매의 뿌리를 끊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위대하다고 느꼈다.
- 2016-08-1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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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리수납 컨설팅 업체 ‘덤인’ 정경자 대표- “물건에 애정 그만 쏟고 좀 버리세요!”
- “오늘만 해도 태안군 안면도, 양평·가평을 갔다가 내일은 대구로 갑니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질문을 건네자 덤인 정경자(鄭京子·50) 대표의 카랑카랑 애교 섞였던 목소리가 풀이 죽으며 답한다. 바빠서 달리 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집안일로만 여겼던 ‘정리하고 수납하는 일’을 전문 분야로 끌어올린 주인공 정경자 대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스며들 듯 부드러운 방법으로 시장을 넓혀갔다. 쇄도하는 강의 요청과 방송 출연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취재가 있던 날에는 한 아파트의 광고 모델로 발탁돼 촬영을 마쳤다. 그렇다 쳐도 여전히 생소한 정리수납 컨설팅.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왜 필요한지 들어봤다. “저를 납득시켜 주세요, 정리수납에 왜 돈을 쓰죠?” 정경자 대표가 정리수납 컨설턴트를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캐나다 주재 한국 물류회사의 법인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저는 캐나다에서 정리수납 전문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미 캐나다나 유럽에는 20~30년 전부터 있던 직업이더라고요. 자기 물건을 자기가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리해주기도 하는구나. 막연하게 나중에 한국에 가면 이걸 꼭 직업으로 만들어야지 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만 해보겠다는 것도 잠시. 회사에서 캐나다 법인의 철수 결정이 갑작스럽게 났고 2002년 한 달 만에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정경자 대표는 회사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물어보는 사람마다 직업으로는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어요. 어찌됐건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인식이 안 돼 있어 사업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바로 정리수납으로 시작하지 않았어요.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를 교육하고 양성해서 파견하는 일을 했어요.” 당시 맞벌이 부부가 많아져 아이를 자기가 키우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던 때였다. 사업을 하면서도 정리수납에 관한 준비를 꾸준히 했다. “5년 정도 준비 끝에 정리수납 교재와 매뉴얼을 만들고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을 할 때 가르쳤어요. 1대 1서비스를 잘 하기 위해서 정리수납교육을 한 거죠. 그런데 베이비시터가 아이 옷을 잘 정리하니까 고객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가정관리사도 옷을 세탁하고 개는 것을 달리해주니까 고객 만족도도 좋고 일 하는 사람들 또한 좋아했습니다.” 2010년부터 방송 프로그램에도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다 보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저런 거 배웠으면’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드디어 2011년 11월, 한국정리수납협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정리수납 컨설팅 활동을 시작했다. “협회를 만들고 3개월 정도 됐을 때 여성능력개발원에서 여성유망직종으로 정리수납 관리사를 선정했더라고요. 아이템 자체를 보고 한 것 같아요. 경력단절 여성 일자리 창출에서부터, 2015년에는 신직업지원 육성정책에도 정리수납이 들어갔습니다. 여성가족부, 노동부 등 정부기관이 육성한다고 하니 이와 관련한 일자리가 많이 늘어났어요. 사람들 관심도 높아졌고요. 저희만 봐도 정리수납 컨설팅을 교육받고 있는 회원이 전국에 3만9000명 정도입니다.” 정리수납, 한국 사람에게 절실하다 정리수납에 있어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심어지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베이비시터와 가정관리사 교육에 정리수납을 접목해 이용자들에게 미래 사업을 노출시켰다. “저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외국에서 이것을 매우 당연하다고 봤고, 우리나라에서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사람은 어렵게 살아온 시절이 있기 때문에 돈만 생기면 집이랑 차 넓히고 물건 사고 그래요. 자신이 어렸을 때 옷을 잘 사 입지 못해서 아이한테만큼은 옷을 잘 입혀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과 장난감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제 한계가 왔고, 물건을 버릴 때도 돈을 지불하는 사회가 된 거죠.” 시니어, 정리습관을 기르자 정경자 대표의 말에 의하면 시니어들의 정리 습관은 참으로 심각하다. “지금 제가 잘 버리는지 엄마가 잘 버리는지를 비교하면 우리 엄마가 더 잘 못 버려요. 나이가 들수록 더 못 버리게 돼요.” 시니어 세대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경자 대표는 ‘애정결핍’의 문제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관심 가질 것도, 행동할 것도 많아서 물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이거는 어디서 산 거고, 누가 준 선물이며, 의미를 사람이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물건에서 찾으려 한다고. “나이가 들면 자식이 분가하거나 배우자가 죽을 수도 있죠. 결국 자기 혼자 남기도 해요. 자식들과 자주 만나 생활한다면 선물해준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데 요즘은 혹시 온다 해도 아주 잠깐만 있다 가죠. 그러니 이거는 큰아이가 사준 거였고, 이건 누가 사준 거고 말입니다.” 버리는 습관과 정리하는 습관은 젊었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 “80세에 갑자기 잘 버릴 수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가 85세신데 제가 뭘 버리라고 말하지 않아요. 어머니 집에 가서 저는 정리 안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있기 때문에 제가 하루아침에 바꿔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상처가 될 수 있어서 삶을 이해하려 하지 바꾸려고 들지는 않아요.” 시니어 고객에게 하는 조언은? “제가 시니어를 만났을 때 하는 얘기가 딱 그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죽는 순간 가지고 있던 물건들은 다 버려지게 된다. 돈 혹은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면 다 버려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물건을 정리하는 자식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왜 엄마는 아직까지 이걸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냐고 합니다. 좋은 얘기 안 하죠. 물건을 보며 엄마를 추억하지 않아요. 내가 살아 있을 때 쓰레기들을 남에게 버리게 하는 수고로움은 덜어주고 가야죠. 그게 시니어가 돼가는 것이고 내 삶을 정리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정경자 대표는 시니어에게 정리수납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주방 싱크대 상부장 맨 위에 의자를 받치고 올라갔다가 떨어져 허리 다치고 병원에 입원하면 기력이 쇠하고 점점 더 빨리 늙는 것을 봐왔다는 것. “왜 거길 올라가는 거죠? 10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하면서요. 본인이 그렇게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여성 CEO, 일하는 여성을 말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이제 5년째. 여성 CEO로서의 고충을 물어보자 고충보다는 이 분야 선구자로서 할 일이 태산이라고 했다. 벤치마킹할 곳도 없고, 슬로건 교재도 만들어야 해서 바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라고. “그리고 좋은 건 정리수납은 여자들의 섬세함이 필요하잖아요. 남자들이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라고나 할까요(웃음)?” 경력단절 여성들과 작업에 대해서도 흥미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전업주부들이 사회적응을 잘 못한다고들 하죠. 그런데 정리수납을 가르치고 기본 원칙을 알려줬더니 이만큼의 전문가가 없는 거예요. 생소한 분야가 아닌 거죠. 자기 삶의 가치가 바뀌었죠. 정리를 못하는 사람에서 정리 전문가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도 내고요.” 바쁘게 사는 그녀, 복지관 예쁜이 할머니 꿈꾸다 올해 딱 50세가 된 정경자 대표. 그런데 누가 봐도 50대로 볼 수 없는 그녀는 지금 일이 아니면 뭘 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일이 우선 많아요. 결혼도 연애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거든요. 20대 때부터 세계여행도 하고 뭐든 다해봐서 혹시 시간이 좀 생긴다면 운동을 해야겠어요. 얼마 전에 면역력 저하로 세균이 번식을 해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반성을 많이 했죠. 그런데 퇴원하는 날 방송사 가서 10시간 촬영했어요. 책 읽는 것도 좋아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나요.” 그리고 그녀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있다. 복지관에서 인기 있는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회가 되면 지금 우리 직원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직원 전용 실버타운을 짓고 싶어요. 이분들이 나이 들어서 정리수납 강의도 하셔서 강사료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100만원 정도의 수입만 있으면 시니어가 되어서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여기서 나이 먹었을 때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90세가 됐을 때 목표는 제가 다니는 복지관에서 가장 예쁜 할머니가 돼 있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내가 가장 인기 있는 할머니가 된다면 무척 바쁠 것 같아요. 밥 사준다는 할아버지들도 많을 거 같고요. 내가 아파 복지관 못 나가면 우리 가족이 나한테 전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복지관에 있는 분들이 어디 아프냐고 죽이라도 사가겠다고 하겠죠? 늘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거죠.”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 꿈꾸는 정경자 대표의 멋진 미래가 궁금해진다. 무엇보다 복지관 퀸카 할머니가 꼭 되길 바란다.
- 2016-08-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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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 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영어가 뭐길래
- 영어는 전 세계 공용어이기도 하다. 미국에 살려면 당연히 영어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정작 영어를 한마디 못해도 살수 있는 곳, 그곳은 LA 코리아타운이었다. 필자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시간 동안 영어라는 것에 마음고생을 하며 시간을 투자했다. 그러나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그놈 앞에서만 서면 주눅이 들고 만다. 늘 마음속에서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꿈이 가득했건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 그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쩌면 필수적인 일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 씨름해오며 만인의 공통 과제인 영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놈의 영어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위 대학 강단에까지 섰던 사람이었지만 막상 미국인을 대하니 겁부터 났다. 물론 기본적인 영어야 가능했지만 세탁소에서 낯선 각 나라 손님을 맞이하는 일에는 선뜻 나설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용기를 내어 손님들과 눈인사를 시작으로 그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대강 눈치로 때려잡으면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애쓰기보다는 어느 정도 감을 잡으면, 먼저 기선을 잡아 할 말을 유도해나가기 시작했다. 말이 막힐 때에는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고, 아직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하면 그들도 이해를 했다. 필자는 오히려 되묻기를 했다. ‘혹시, 너 한국말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그들도 당황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NO'라고 대답한다. 차라리 당당한 마음으로 손님을 대하기로 마음을 먹으면서부터는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손님이 일단 들어오면 큰소리로 반갑게 맞이하고, 'HI!' 하면서 손을 들어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손님들은 아주 좋아한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세탁소 영어는 상황이 뻔하니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가끔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인들이 수다 떨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함께 대응해서 대화를 풀어주지 못하니 들어주는 척, 웃기만 하는 것도 힘이 들었다. 적당히 함께하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으면 남편을 불러댔다. 필자보다 훨씬 실력이 나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편은 얘기하기를 좋아하니 신나게 달려온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3년이나 먼저 왔으니 당연한 일이라 위안을 삼았다. 언젠가, 그놈의 영어 때문에 배꼽을 움켜쥐고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필자가 완전히 미국 이민으로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남편은 혼자 방 하나를 얻어서 살고 있었다. 집은 궁궐같이 넓고 방이 5개나 있는 큰집이었다. 혼자 사는 집주인은 외출을 했고, 방문으로 잠시 놀러 온 친척 할머니 한 분이 그 집을 지키고 계셨다. 넓고 커다란 거실에서 작은딸과 필자가 그 할머니와 이런저런 정겨운 한국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당연히 그 할머니는 그 전화를 받으셨다. 연세가 족히 80은 훨씬 넘어 보여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고 씩씩하게 전화기를 잡았다. 한동안을 가만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노바디!’하면서 전화를 꽝 끊으셨다. 필자는 멍하니 할머니를 쳐다보며 무슨 소린가 싶어 했다. 그 순간 할머니는 ‘아무 두 업는 디 전화질들이야!’라고 했다. 필자는 놀라서 또 물었다. ‘왜 그래요? 할머니, 누가 뭐라 구 해요?’ ‘몰러 내가 아남, 뭐로 구 지껄여대는지, 그래 없다 구 했지!’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웃어댔다. 잠시 후 작은딸과 필자는 갑자기 배꼽을 끌어안고 대굴대굴 굴렀다. 얼마나 웃었는지 배가 땅길 만큼 웃어대고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할머니의 여전히 당당한 모습에 또다시 한바탕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영어를 얼마나 쉽게, 단적으로 표현했는지 그 순발력에 기가 막혔다. 할머니는 미국에서 오래 사시다 보니 굳이 영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의사소통하는 지혜는 갖고 계셨던 것이다. 밑도 끝도 없었지만 '노바디(NOBODY)'란 한마디로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고, 적어도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 연세에 순간적 대처능력이 엄청 세련되고 감각이 있어 보여 할머니가 매우 존경스럽게 보였다. 처음 미국에 가서는 전화받는 것도 대단히 신기하고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잘 들리지 않아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당황하면서 주춤거리다가 말 한마디 못하고 끊어버리기가 일쑤다. 말을 못한다는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이민 가정마다 대체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통역관이 되곤 한다. 학생들이 영어를 제일 빨리 배우고 잘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영어 잘하는 아이들이 어쩌면 집안 대장이었다. 물론 내 나라말이 아니니, 대화의 소통만 되도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20년 전, 그리고 지금도 그놈의 ‘영어가 뭐길래’ 언어 정복의 자존심은 여전히 영원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전 세계 공용되는 영어가 뭔지, 그들도 한국어 때문에 고민하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 2016-08-0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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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 졸리면 잔다
- “졸리면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이것이 필자만의 잠 잘 자기 위한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잠자는 시간대를 따지지 않는다. 졸리지 않으면 새벽 2시여도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 밤이기에 잠을 자야 한다는 고정 틀에서 벗어난다. 규칙적인 수면도 필요하겠지만, 잠이 오지 않는 상태에서 일부러 잠들기 위하여 안간힘을 쓸 경우 오히려 잠들기 힘든 경험을 대부분 하였지 싶다. 그래서 필자는 졸리면 잔다. 대부분 시니어들의 일상이 그러하듯 필자도 남는 게 자유밖에 없어서 그런 행동이 가능할지 모른다. 장수 노인으로 노익장을 과시했던 서구의 한 할머니는 건강비결을 묻는 기자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걸을 수 있을 때 뛰지 않는다. 앉아 있을 수 있을 때 서 있지 않는다. 누울 수 있을 때 앉아 있지 않는다.” 편하게 쉴 수 있을 때 쉰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평범함엔 비범이 내재해 있는 것 아닌가. 아마 그 할머니에게 잠을 잘 자는 비법을 물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지 않았을까? “졸리면 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의 건강을 나타내는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잠을 잘 자는 사람들은 대체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잠드는 경우도 있고, 당체 숙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왜 생기는 걸까. 그건 바로 스트레스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고민거리와 스트레스는 건강을 가로막는 요인들이다. ◇잠자는 시간대 중요하지 않아 필자는 컴퓨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다. 강의를 위한 강의 프레젠테이션 작성과 글쓰기가 그 대표적 작업이다.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컴퓨터 작업 중의 하나가 사진 보정 작업이다. 포토스토리텔러(사진으로 이야기를 쓰는 사람), 즉 사진작가이기에 사진도 남다르게 많이 촬영하지만, 사용하는 화질이 “RAW”여서 일일이 촬영한 사진을 별도의 후 보정 작업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 작업을 하다 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지만, 작업 중에 졸리면 곧 잠자리에 든다. 그러기 위하여 컴퓨터 옆에 침대를 설치했다. 의자를 돌리면 침대에 드러누울 수 있다. 잠을 자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그 순간 잠이 달아날 수 있다. 잠을 자다가도 눈이 떠지면 시간대에 상관하지 않고 일어난다. 간혹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때 오히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 경험이 많아서다.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 필자는 현재 강사, 기자, 수필가, 사진작가, 방송, 자원봉사자 등 25시로 산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일분일초가 늘 아깝다. “시간 겹쳐 쓰기”라는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강의장을 가기 위하여 나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이동시간 내내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다. 전철을 이용하게 되면 강의 교안을 살펴보는 일 등 시간을 겹쳐 쓸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나는 “시간 겹쳐 쓰기”라 이른다. 잠자는 시간도 줄이려 애쓴다. 숙면을 통하여 그 시간을 줄이는 방법으로 졸리면 잠자고 눈이 떠지면 일어난다. “졸리면 잠잔다.”가 나의 잠 잘 자기 위한 나만의 비법이다
- 2016-08-0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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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혼이 인구 감소 원인
- 우리 시니어들이 결혼 하던 시절인 1970년대 말에는 남자 27세, 여자 25세 정도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가족계획 시대였으므로 보통 여자 30세 이전에 자녀 둘을 가진 가정이 많았다. 그러므로 여자가 30세를 넘으면 ‘노처녀’라며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요즘은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다. 여자 30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많다. 30세 정도는 노처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결혼도 40% 정도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갓 결혼했을 때는 가족계획이 따로 없었다. 결혼했으니 아이가 생기면 낳고 둘째까지는 그렇게 유지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맞벌이는 흔치 않았으나 맞벌이를 하게 되면 사람을 두고 애를 보게 했다. 처음에는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이나 직장에서 받는 봉급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직장은 승진이 있으니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을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애 봐주는 할머니를 더 이상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 맡길 시설이 많이 생겨 사정은 나아졌다. 요즘 30대 여성들은 20대에 결혼한 사람과 30대에 결혼 사람의 예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20대에 결혼한 사람은 20대에 아이가 생기면 곧바로 퇴직하고 집에 눌러 앉아 경단녀가 된다. 직장 봉급이 아직 초급 사원 때이기 때문에 많지 않아서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대에 아이를 갖게 되면 이미 직장에서 과장 급 정도의 관리자가 되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직급도 높아져 그동안 쌓아 온 경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생겨도 육아 휴직을 일찍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도 버겁다. 둘째는 아예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결합하여 둘을 낳아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하나만 낳으니 인구가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양육비용도 만만치 않다. 우리 때처럼 학교만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각종 과외 수업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시대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안 할 수도 없다.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에 첫 아이를 낳으면 그 아니가 제 밥벌이를 하려면 25년 이상이 필요하다. 퇴직연령이 점점 빨라지는 세태를 보면 아이에게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인구 감소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많이 낳으라는 구호뿐이다. 여건이 많이 나을 형편이 아닌데 말로만 많이 낳으라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실효성도 떨어지는 것이다.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 모든 여건이 바뀌어야 한다. 머리가 더 커지면 배우자를 고르는 눈높이도 높아져 점점 더 결혼이 어려워진다. 굳이 대학교를 나와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지금의 교육제도도 고등학교나 전문대학 만 졸업하면 취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교를 나와도 취업이 안 되니 대학원에 가다 보니 결혼이 점점 늦어지는 것이다. 청년 취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 2016-08-0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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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 입추의 절기가 지났는데 폭염은 식을 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짜증스러워진다. 군중을 향한 집단테러를 비롯하여 상상을 초월한 일련의 사건들이 혼돈에 빠뜨리게 한다. 간혹 조물주는 느슨해지는 인간에게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는지 모른다. 현세는 각박한 삶의 연속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다. 얼핏 보기에 그런가 싶지만, 눈을 지긋이 감으며 다시 바라본 세상은 아름답다. 폭염 아래에서 여름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다. 자연과 사람이 아름답다. 백사장 모래톱에 두 발을 나란히 담그고 바라보는 자정이 넘나드는 밤하늘의 별은 신비하기조차 하다. 서산에 걸린 상현달은 그림이다. 볶고 지지며 사는 세상이라 하여도 요모조모 살펴보면 정겹다. 살맛이 나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현자(賢者)들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 설파했다. 마음먹기에 달렸고 보기 나름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나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를 좋아한다. 일상의 분주한 생활에서 카메라를 들면 세상이 네모 상자 안에 아름답게 자리한다.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모두 정겹고 기쁨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번잡함을 잊는다. 요즘 철에는 숲 속 부엽토를 비집고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버섯이 눈길을 끈다. 먹을 수 있는 버섯과 먹을 수 없는 독버섯이 제철을 맞는다. 대부분의 버섯이 독을 지녔지만, 나는 그 색감과 자태에 매료된다. 좋은 피사체다. 망태버섯이 그 대표격이다. 노란 색깔과 벌집 모양의 패턴 구조가 신비스럽다. 지고 피는 시간도 짧아 행운의 수간과 만나야 담을 수 있다. 산속에서 만나는 버섯의 아름다움에 아침마다 빠져든다. 저녁노을에 붉게 반짝이는 모래사장의 눈부신 빛깔이 있다. 해변가를 거니는 아가씨의 농익은 각선미가 시선을 사로잡지만, 땀방울이 맺힌 농부의 구릿빛도 얼굴도 좋다. 초봄의 여린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짙게 바뀌는 산야의 녹음방초가 그렇다.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었던 흐드러지게 핀 철쭉이 그랬고 한두 송이 피어나는 오뉴월의 여왕 장미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일반인이 눈여겨 보지 않는 들녘에 피어난 이름 모를 작은 들꽃에 더 정감을 갖는다. 살지 못할 것만 같은 바위 틈새에서 생명력을 보여주는 한 떨기 갓난아기 손톱만 한 꽃송이에도 매료된다.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쇠뜨기 군락도 장관으로 보이고 메마른 돌부리 많은 언덕에 안쓰럽게 피어난 하얀, 분홍, 샛노란 씀바귀도 주변에 자라는 가느다란 줄기와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카메라 화면에 들어 앉는 이러한 모습은 환상이다. 고색창연한 돌담 곁에 작지만, 고고하게 꽃대를 올리는 개망초는 여지없는 동양화다. 봄철엔 산과 들의 습한 구석에 떼지어 노랗게 핀 애기똥풀도 있었다. 이름 자체가 귀엽고 이른 아침 해가 나무 사이로 비추면 군락으로 핀 그 모습은 더욱 환상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구석이 있음을 발견한다. 개미를 위하여 꿀샘을 줄기에 뿜어내어 놓는 애기똥풀의 나눔 정신도 배워 볼만한 교훈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가슴을 활짝 열면 여유롭게 흔들리며 바람 부는 대로 살아가는 자연의 섭리가 다가온다. 산새들과 풀벌레의 노래도 배경음악이 되어 어울린다. 참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고 정겨운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보잘것없는 그들에게도 놀랄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초대받은 귀한 손님이 되어 어우러져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런 모습을 발견한 나는 큰 기쁨을 얻는다. 감동이다. 작은 관심으로 얻는 기쁨이다. 그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 하는 이유다. 유명한 사진 촬영지 여행보다 주변의 돌담길이나 들판, 산언저리, 강가나 실개천 가를 거닐기를 좋아하는 이유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동네의 사람 냄새가 나는 이웃들의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를 좋아한다. 공원 나무 그늘의 벤치에 줄지어 앉아 세상살이를 이웃처럼 얘기하는 동네 할머니들의 모습도 즐겨본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모습도 즐겨 찍는 사진 소재다. 수양 버드나무가 휘늘어진 둑길을 드물게 지나가는 허리 굽은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다. 사진은 기다림이라고 했지 않은가? 세상의 모든 잡다한 일들을 렌즈에 담아 고운 모습으로 승화하려 한다. 곱게 보면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생활의 진리다. 카메라로 담아내는 행복한 세상의 이야기다. 글도 글이지만 한 장의 사진으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사진으로 써 내려가는 무언의 글이다. 이웃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가까운 사람들과 공유하기도 즐겨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좋아한다. 렌즈로 본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을 말이다. 아름답게 보니 아름답다.
- 2016-08-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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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타-자신만의 코디법] 외국처럼 우리 시니어도 화끈한 코디를
- 어렸을 적 한땀 한땀 바느질해 곱디고운 옷을 지어 인형에게 입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종이옷 만들어 입힐 때는 예쁜 무늬를 그려 넣고 색칠해가며 한껏 재주를 피워댔다, 특히 헝겊으로 인형 옷을 지을 때는 어머니가 모아 놓은 일본 잡지들을 꺼내 신식 스타일의 원피스를 만드느라 고심했었다. 길에 다니다가 바람에 굴러다니는 잡지 쪼가리가 패션에 관한 거라면 무조건 집으로 가져와 깨끗하게 걸레로 닦아서 모았다. 그 지저분한 것들을 결혼해서도 이사할 적마다 가지고 다니면서 고이 모셔 뒀는데 잡지 모델같이 변신하는 건 단지 꿈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60세 되었을 때 죄다 태워버렸다. 이 잡지 태우면서 얼마나 아까웠던지 모른다. 마음 비우기는 그리 어려운 것이다. 결혼하고서도 눈은 묘한 것들을 찾으려 반짝였다. 외국에라도 나가면 발발거리며 여자들의 차림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런데 1970년대에 영국에 갔다가 알아낸 것은 호호 할머니가 돼도 매니큐어 짙게 칠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다이애나비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에 예쁜 꽃 모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시니어가 됐을 때 차림을 그려가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 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아무리 나이 먹어도 긴 머리를 늘어뜨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런 시니어의 모습을 교훈 삼아 발목 걸이까지 자신 있게 걸고 다녔다. 요즘 가끔 젊은 여성들이 하고 다니는 발목걸이를 무척 오래전부터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199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를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는 할랑대는 원피스를 입은 시니어들에게 꽂혔다. 이어 1996년엔 스페인에서 한 달 보름을 지냈는데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모피를 걸친 채 앞을 트고 다니는 멋쟁이 시니어들에 반했다. 그리고 획기적인 쫄바지에 푹 빠져 귀여운 판다 곰 무늬가 들어간 쫄과 검은색 쫄을 두 개나 사게 되었고 지금까지 즐겨 입는다. 한국에는 언젠가 대유행했지만 그 당시엔 쫄 바지가 없었다. 필자가 쫄바지의 원조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1년간 일할 기회가 있었던 어느 아줌마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큰 소리로 “일본 여성은 늙어도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모른다. 보는 내 눈이 황홀해질 정도다”라고 했다. 필자는 동의의 의미로 깔깔 웃었다. 그가 일본 시니어 여성이 예쁘다고 한 것은 진짜 겉모습이 예뻐서가 아니다. 그들의 패션이 그들을 눈부시게 만든 것이다. 필자도 이 아줌마처럼 일본에서 시니어 여성들의 패션에 눈이 갔다. 시니어가 되면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순진하고 귀여워진다니까 차림새도 밝고 깔끔하게 챙겨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아주 눈에 나지 않는 한 인형처럼 곱상하게 차려입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한국 아줌마의 전형처럼 돼버린 뽀글파마는 거부하는 대신 긴 생머리를 한다. 너무나도 파마를 안 해서 길이 안 든 탓에 이젠 파마도 안 나온다. 다만 긴 생머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흩어져 산발이 돼 버리니 모자도 꼭 가지고 다니며 쓴다. 프랑스 파리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바게트 한 봉지를 끼고도 끼리낌 없게 걷는 자신만만함을 시니어들도 배워야 한다.
- 2016-08-08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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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피서
- 올 여름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장마는 사라지고 연일 태양이 작열한다. 열대야로 잠을 재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가 이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뒤척일 수 있어 그런대로 길고 더운 여름밤을 버텨낼 수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지만 집에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거실 구석에 하나 서 있고 안방 벽에 하나 걸려있지만 몇 년 째 가동한 적이 없다. 전기세가 문제가 아니라 여름엔 땀을 흘려야 된다는 논리로 가동을 못하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의 원성이 자자하지만 워낙 필자의 고집이 강경하므로 다들 선풍기로 버티고 있다. 이제 입추도 지났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 모두 어이없어 한다. 어제 부모님 댁에 들어서는데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저층 연립주택에 사시는데 앞뒤 동 간격이 좁고 저층이라 집안에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다.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긴 했지만 엄청 더웠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두 분이 더위로 고생하시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더니 전혀 문제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침 드시고 나서 근처 중랑천 변 그늘로 가신다고 했다. 그곳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오전시간을 보내신 후 오후에는 복지관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저녁까지 지내시다가 들어오신다고 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특별한 피서를 하고 계셨다. 그것은 ‘무료 전철피서’ 아주 긴 노선을 택해서 하루 종일 시원한 전철 여행을 하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 혼자 하는 여행은 다음과 같다.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랑역에서 전철을 타고 왕십리 역에서 신분당선으로 갈아탄다. 한 시간 이상 걸려서 수원에 도착하면 인천 행으로 갈아타고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소래포구 시장 구경을 하고 인근 다리 밑 그늘에서 쉬고 도시락을 드신다. 다리 밑에는 의자를 많이 설치 해 두어서 편하고 노인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가실 때는 전철 1호선을 타고 온양까지 가신다고 했다. 온양 온천에는 전국에서 모여 든 노인들이 점령했다고 한다. 온천 후 점심 드시고 시장 구경도 하시고 느긋하게 전철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저녁. 하루 여행으로는 제격이고 가고 오는 동안 시원한 전철에서 피서할 수 있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가끔 복지관 친구 두 분과 전철여행을 하신다고 했다. 일산에 사시는 분이 계셔서 일단 종로3가에서 모인다. 오전 열시쯤 만나서 서울 역으로 이동한다. 서울 역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인천 계양까지 가서 인천 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탄다. 원인재 역에서 오이도행 열차를 갈아타고 가다가 소래포구에서 내린다. 시장에서 우럭 두 마리를 구입해서 식당에 가져가면 매운탕을 끓여준다. 막걸리 한 병 놓고 식사하신 후 시장 구경하고 노선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1인당 회비는 이만 원인데 몇 천원이 남는다고 한다. 전철피서의 하이라이트는 춘천 행 열차를 타는 것. 춘천 역에 내리면 인근에 닭갈비집에 가서 점심식사를 하신다. 식사 후에는 닭갈비집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승합차를 타고 박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유명한 박사동네, 소양강 처녀동상, 소양호를 두루 구경한다. 구경 후에는 춘천 역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서비스가 공짜란다. 단, 일행이 여섯 명 이상이라야 받을 수 있는 서비스라고 한다. 그래서 춘천에 가실 때는 여러 명이 모여서 간다고 하셨다. 65세 이상에게 제공되는 전철 무료서비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교통비 부담 없이 시원한 피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노인들의 정신과 육체건강에 상당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 2016-08-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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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 '불량공주 모모코 (下妻物語)'. 일f본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원제는 ‘가마가제 소녀’인데 가미가제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고려해서 ‘불량공주’로 바꾼 것 같다. 감독은 나카시마 테츠야, 주연은 모모코 역에 후카다 쿄코, 폭주족 이치코 역에 츠치야 안나가 나온다. 네티즌 평점이 8.3으로 꽤 높다. 이 영화를 보면 일본은 과연 만화 공화국이고 사람들도 만화에 취해 사는 것 같다.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비슷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보고 성인들도 만화를 많이 보는 일본은 만화처럼 사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만화 같은 삶을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코미디 물이므로 가볍게 보면 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베르사체 짝퉁 의류를 만들어 팔면서 재미를 좀 보았으나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시모츠마라는 시골로 잠수 차 이사 간다. 이 동네 사람들은 촌이라 편한 추리닝을 선호하여 늘 추리닝 바람이다. 어지간한 옷도 동네에 유일한 마트인 자스코에서 사 입는다. 그러나 모모코는 다르다.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유럽 중세 로코코 풍의 드레스를 좋아해서 언제나 양산을 쓰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 옷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거짓말도 해가며 용돈을 타내고 동경까지 가서 그런 옷을 구입해 입는다. 아버지가 짝퉁 판매하다가 재고로 남은 옷들을 모모코가 인터넷에 내 놓는다.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 온 여인은 여자 스쿠터 폭주족의 일원인 이치코이다. 거친 말투와 외모까지 모모코와는 정 반대의 여자이다. 불량배들처럼 침을 칙칙 내 뱉고, 박치기 공격을 하지 않나, 자수를 곁들인 특공복 패션을 하고 다닌다. 이치코는 폭주족의 리더가 결혼한다며 송별폭주 행사에 참가하려는데 리더를 위해 특공복에 전설의 자수명인 자수를 놓겠다며 자수 명인을 찾아다닌다. 돈이 필요하니 빠찡코에 갔는데 엉뚱하게도 모모코가 대박을 터뜨린다. 주인이 속임수를 썼을 거라며 트집을 잡자 앞머리를 길게 한 이상한 모습의 남자가 나타나 모모코 편을 들어준다. 이치코는 이 남자를 첫사랑의 대상자로 찜한다. 모모코는 동경에 간 김에 수제 로코코 드레스 점에 자주 간다. 한번은 벌레 먹어 모자에 구멍이 여러 군데 생겨 손수 자수로 구멍을 활용했다. 그걸 본 점원이 사장에게 얘기하고 사장은 모모코의 재주를 알아본다. 그래서 샘플로 제작한 하얀 드레스에 장미 자수를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전설의 자수 명인을 찾아 다니던 모모코와 이치코는 전설의 명인은 가상 인물일 거라며 찾기를 포기한다. 그 대신 어릴 때부터 자수에 소질을 보인 모모코에게 특공복 자수를 부탁한다. 로코코 드레스의 장미 자수가 다 되어갈 무렵, 이치코에게 위기가 생겼다. 빠찡코에서 자기네들 편을 들어준 앞 머리 긴 남자가 폭주족 두목의 남자로 결혼한다고 발표하자 좌절하며 탈퇴를 선언한다. 동료 폭주족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려는 순간에 모모코가 스쿠터를 몰고 나타난다. 야구배트를 하나씩 든 집단 폭행의 살벌한 분위기에서 모모코는 자신이 전설의 자수 명인 딸로서 기법을 전수 받아 이치코의 특공복에 자수를 놓아준 것이라며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 덕분에 이치코와 모모코는 스쿠터로 그 현장을 빠져 나온다. 이치코는 그 후 모델로 성공하고 모모코는 로코코 드레스 회사와 손잡고 일한다. 모모코의 아버지는 짝퉁 옷을 만들어 팔다가 낭패를 본 사람이다. 술집 골목에서 좌절하여 신세타령을 할 때 술집에서 튀어나와 토하던 모모코의 어머니가 눈이 맞아 바로 결혼한다. 모모코를 임신하여 출산 후 얼마 안 가 가출하고 이혼장을 보낸다. 미모가 출중하여 미인대회에도 나간다. 모모코는 치매 초기의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란다. 학교에서도 왕따이고 동네에서도 별난 드레스 때문에 손가락질 당한다. 이 영화는 만화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들이 보기에 유치하지 않고 재미가 있다. 일본의 정서를 읽는 것 같다. 폭주족 문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우리나라 폭주족들도 그런 인식에서 보면 이해할만 하다. 모모코는 별난 드레스 때문에 왕따이지만 자기 세계를 고집한다. 그런 점이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타는 자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 2016-08-04 1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