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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고향-선암
-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선암이란 이름은 마을 앞까지 배가 들어와서 배를 묶는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었다고 내가 어릴 때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난다. 아마도 오래전에 심한 지각 변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바다에서 먼 이곳까지 배가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바라보면서 우리 선조께서 4월의 따스한 기온이 내리쬐는 이곳 선영에 자리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참 편안해짐을 느낀다. 어제 일요일이 시제를 지내는 날이라 오랜만에 시제에 참례하였다.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6시 서울을 출발하여 10시쯤 선영에 도착하였다. 증조부모님부터 조부모님 그리고 백부모님 순서로 인사를 드린 후에 시제를 지내고 나서 옛날 조부모님께서 사시던 고가로 돌아오니 자연스럽게 사촌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시제에 참여하신 집안 당숙과 숙모님, 그리고 형님뻘 되시는 나이든 형님 및 형수님들과 함께 자리하니 객지생활만 하던 나도 고향이란 이런 곳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사촌 큰 형님이 양자로 갔으나 같은 집안이라 여전히 시제 준비를 제수씨들과 함께 형수님께서 주로 하신 것 같다. 마침 바로 밑의 사촌 동생이 시골로 귀향하여 옛날 고가를 수리하여 생활하고 있으니 마치 옛 어른들을 뵙던 과거의 일들에 대한 기억이 봄날 새싹 돋아나듯이 생각났다. 건너 방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던 곳이었다. 기침을 유달리 많이 하시면서도 족보관련 말씀을 즐겨 해주셨던 할아버지, 만석궁의 딸로 시집와서 고생하시면서 지내셨지만 항상 우아한 모습과 여유를 지니셨으나 동네 아시는 분들에게 부족한 손자 자랑은 부끄러움 없이 꽤 많이 하셨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자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그분들의 체취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우리 아버지가 효자이셨기에 나도 가끔 그런 흉내를 내려고 해왔다. 사탕을 드리면서 누워 계실 때 책을 읽어드리거나 안마해드리면 즐겨하시던 모습, 소원을 여쭤보고 해결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던 기억들이 눈물 속에 아롱거렸다. 우리 선영은 월출산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어 산을 좋아하셨던 옛날 선비들의 취향에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공자도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으니 선조께서는 물과 산을 함께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마 그분들은 해마다 이때쯤 산 아래서 실시되는 왕인박사 관련 축제행사도 다 지켜보고 계실 것만 같다. 14대 선조께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시어 계시다가 귀경 후에도 4형제의 막내아들인 우리 직계 선조인 후(後)자 경(庚)자 할아버지께서 영암의 최 씨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시어 계속 사시면서 일가를 다시 일으키신 곳이다. 연전에 14대 조부께서 사시던 생가와 한석봉 등을 제자로 학문을 가르치던, 그리고 조선시대 이이 율곡과 같은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하던 이우당을 방문하였던 생각이 난다. 결과 지금은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지만 지금도 옛 어르신들로부터 이 지역 최고의 가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바로 위 형님이셨던 선(先)자 경(庚)자 할아버지는 지금 서울 오금 공원에 영면해 계시고 그 비석은 시울시 문화제 7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위의 두 분 할아버지 선(先)자 갑(甲)자 와 후(後)자 갑(甲)자 할아버지는 서울 수락산의 선산에 영면해 계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서울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니고 조상님과 함께 하기 위함인 것도 같다. 이름이 비슷하여 족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 분은 쌍둥이셨다. 그래서 어쩌면 약간은 의도적으로 우리 직계 할아버지가 결혼하여 멀리 떨어져 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내 영혼의 고향은 달이 처음 비추는 곳이라는 바로 월출산의 정기가 서린 곳이다.
- 2016-07-2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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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 이민이야기] (11) 리나 할머니의 노래
- 물질문명이 넘치는 미국에도 사람의 정서가 도를 넘어 거리를 활보한다. 부자들이 사는 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는 여기저기 홈 리스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코리아 타운으로 이어지는 다운타운 윌셔 길가에도 마약과 술병을 거머쥔 거지들이 줄을 잇는다. 문명 선진국의 아이러니였다. 세탁소가 시작되는 6시 30분. 필자는 가게 앞을 청소하기 위해 어김없이 빗자루를 들었다. 밤새 스치고 간 사람들의 흔적을 치우기 위해서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깜짝 놀랐다.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엎드려 있다. 그녀는 기도하듯 앞으로 엎드려있고 거무죽죽한 더러운 담요를 덮어쓰고 있었다. 주변에는 뺑 돌아 하얀 가루들이 범벅이 되어 뿌려져 있다. 필자는 무섭지만 궁금해서 살 금살 금 다가갔다.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꿈틀대서 움찔하며 뒷걸음을 쳤다. 다시 큰 숨을 몰아쉬고 가깝게 앞으로 갔다. 일단은 할머니 때문에 청소할 수가 없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담요 속에서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했다. 무슨 노래인지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워 기울였다. 영어로 부르는 영어 노래였다. 필자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 원 어민 노래로 수준급이었다. 영어 발음에 목청까지 엄청 좋아 신기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한 번씩 푹석 거리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더 이상은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남편이 빨리 들어오라고 불러댔다. 할머니는 낮 동안에는 동네 온갖 쓰레기들을 마켓 카트에 가득 모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이것저것 무거워진 쓰레기 더미가 마치 귀중한 살림이라도 되는 듯 품고 다니다가, 저녁노을이 서산에 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세탁소 앞에 화려한 저녁 살림을 펼쳤다. 어느 날 늦게까지 야간 일을 할 때 알게 된 사실이다. 할머니는 아침이 되면 귀신같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더 신기한 것은 밤새 뿌려놓은 하얀 가루들의 정체도 함께 사라졌다.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다. 유난히 산타모니카 길거리에는 홈 리스(거지)가 많았다. 거대한 미국 땅에도 물질이 넘쳐흘러 풍요로움 속, 빈곤 투성이들이 거리를 헤매며 약에 취해 흐느적댔다. 필자는 그 할머니가 궁금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엎드려 있던 할머니가 온데간데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때 머리 위로 헬리콥터 한 대가 윙윙대며 원을 그리고 있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이다. 미국은 조그마한 일이라도 났다 하면 경찰과 헬리콥터가 합동 작전으로 총출동을 하며 난리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병원으로 실려간 것 같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늘 가게 앞을 노래로 흥얼거리며 지켜주었는데 할머니가 없으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해왔다. 필자는 갑자기 한국에 계시는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필자의 어린 시절, 친정 어머니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늘 병원에 계셨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셨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려서 더 아픔이 크셨던 모양이다. 마치 그 할머니가 필자의 어머니와 겹쳐서 연상이 되며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궁금해졌다. 두어 달쯤이나 지났을까. 다시 할머니가 가게 앞 그 자리로 다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하얀 가루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가게들을 다니며 그 할머니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40년이 된 옆집 이란 마켓에서 그 할머니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옛날에 노래하는 가수였다고 했다. 달러도 수중에 많이 갖고 있는 부자라고도 했다. 어느 날부터 정신을 잃고 집을 나와 싼타모니카 거리에서 20년째라고 했다. 세탁소 앞에서 예쁘게 생긴 할머니가 자리를 잡은 것은 필자가 세탁소 주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쳐왔다. 그날 이후부터 아무리 냄새가 나도, 리나 할머니를 미워할 수가 없었고, 10여 년 내내 할머니는 필자의 가게 앞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영문을 모르는 채 소리 소문 없이 또 사라져 버렸다.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가게를 나가 문을 열려고 하니 엄청난 일이 벌어져있다. 가게 전면 두꺼운 유리창이 총탄에 맞아 박살이 나 있었다. 필자 부부도 모르는 밤새 벌어진 대형사건이었다. 밤거리에서 마약에 취한 정신 나간 미국인이 총알을 마구 쏘아대며 스트레스를 뿜어댄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 터졌지만 큰 피해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선진국 미국이었다. 그때, 갑자기 리나 할머니 생각이 또 떠올랐다. 밤마다 가게 앞에서 잠자리를 하며 세탁소를 지켜주었던 그 할머니 덕분에, 무사하게 지내온 지난날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 2016-07-2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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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할아버지 베이비시터
- 베이비시터는 아기를 돌보는 사람이고 민간자격증도 있는 전문직dl다. 요즘 맞벌이가 대세다보니 아이를 내 친자식처럼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쪽지가 아파트 게시판에 붙어있다. 구인광고를 보고 정확히 어떤 베이비시터를 원하는지는 모르지만 ‘아이 돌봐줄 이모 구함’ 이라는 뉘앙스로 보아 40대나 50대 초반의 아줌마를 지칭하는 것 같다. 남자고 게다가 할아버지는 꽝이다. 베이비시터가 되려는 사람은 아이엄마와 면담을 거쳐 고용이 되겠지만 돌도 안 지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직장에 가야 하는 아이엄마들은 불안할 것이다. 처음 약속 대로 아이를 제대로 돌봐 주어야 하는데 때리거나 먹을 것을 제시간에 맞춰 제대로 줄지에 대해 불안해한다. 급기야 CCTV를 거실에 달고 베이비시터의 동작을 살핀다. CCTV가 거실에 설치 된지를 모르고 옷을 갈아입다가 ‘거실에서 옷을 갈아입지 마세요.’ ‘아이에게 집중해 주세요.’라고는 문자 통보를 받으면 감시당한다는 기분이 들어 억울해하기도 하고 결국 그만두기도 한다. 베이비시터는 여자여야 한다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건강한 할아버지에게 적합한 일거리이다. 필자가 며느리를 도와서 손자, 손녀를 돌보면서 얻은 결론이다. 물론 모든 할아버지가 다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평소 아이를 사랑하는 따뜻한 심성에 신체 건강한 할아버지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할아버지 베이비시터 장점은 이렇다. 첫째는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힘이 있어서 덜 지친다. 아이를 좀 더 오랜 시간 안아줄 수 있다. 서너 살 먹은 아이가 갑자기 뛰어와서 ‘할머니!’하고 덤벼들 듯 안기면 할머니가 벌러덩 나자빠지는 경우도 있지만 할아버지는 버티는 힘이 할머니 보다는 강해 넘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둘째로 할아버지는 대부분 운전을 하므로 아이가 아플 때 병원 투어에 제격입니다. 동네병원은 주차시설이 좁고 열악하여 숙달된 운전자가 필요하다. 셋째로 직장에서 조직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할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다. 시간 맞춰 분유를 타주거나 간식을 주는데도 할아버지가 더 잘 할 수가 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들보다 위생관념이 덜하고 아이를 건성건성 볼 것이라는 생각도 선입견이다. 요즘 할아버지들은 외출해서 집에 오면 제일 먼저 손을 씻고 아이를 안아준다. 보건, 위생관념이 예전의 할아버지와는 다르다. 아이의 정서적인 면에서도 베이비시터가 자주 바뀌는 것은 좋지 않다. 젊은 여성베이비시터는 할아버지에 비해 자주 바뀔 가능성이 높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만들기가 쉽지 않은 일다. 할아버지 베이비시터는 큰돈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고용하는 입장에서도 경제적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도 힘에 부치지도 않는 아이 돌봄을 하면서 신체와 머리를 쓰므로 건강해지고 일을 한다는 자존감으로 행복해진다. 국가적으로도 노인의 의료비가 높은데 노인이 일을 함으로써 건강해지면 의료보험재정이 튼튼해진다. 한번 고착된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이돌보는 것은 여성이 제격이라고 믿고 있고 일부 타당성의 근거도 있지만 절대적은 아니다. 평소 아이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고 베이비시터 전문적인교육을 받으면 충분히 할아버지도 훌륭한 베이비시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 2016-07-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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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6] 일본 할아버지·할머니의 ‘똑똑한’ 손주 사랑법
- 지피지기, 즉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하지만 손주는 적이 아니다. 쌍둥이에게도 세대 차가 있다는 유머처럼 아무리 인생의 대선배이지만 손주를 접하는 방법에 자식인 부모와 차이가 있고, 또 그 아이인 손주와도 세대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걸 뛰어넘어 손주랑 멋있게 그리고 알차게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태문 동경통신원 gounsege@gmail.com 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착각 손주가 잘 안 따른다며 고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다. 당연히 귀여운 손주를 보고 싶어서 어루고 달래지만 손주가 좀처럼 익숙해하지 않고 길들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랑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왜 그런지 환경, 조건,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는 없는지 등 먼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2. 며느리의 고민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주를 때리는 걸 보고 정말 기가 찼다. 때린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더 꺼리고 싫어질 텐데… 손녀에게 ‘손’하며 내미는 손을 잡고 웃는 할아버지 얼굴을 봤는데, 강아지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다루다니… 이런 속사정의 며느리가 있는 게 현실이다. 매를 들더라도 그것은 부모의 몫이고, 자칫하다가는 학대로 비칠 수도 있으니 절대로 삼가야 한다. 또한 손주는 절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완동물도, 장난감도 아닌 엄연한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3. 둘만의 원칙을 정하기 놀이를 통해 배우는 건 운동 및 인지,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협력과 문제 해결 과정의 사회성이다. 용돈을 주면서 돈의 가치와 쓰임새, 그리고 활용에 대해 함께 가르쳐 준다면 더 큰 효과가 있듯이 자칫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자라지 않도록 적절한 원칙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놀 경우에도 시간을 정하고, 간식을 주더라도 양을 정하는 식으로 무한 애정과 무한 만족은 구분해야 하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뭐든지 정도껏 원칙 아래에서 행해져야 그 효과도 클 것이다. 4. 좋은 놀이법 공유하기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손주의 시선에 맞춘 돌보기는 결국 손주가 받아들이기 쉽다는 걸 뜻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요즘 유행하는 놀이법도 배워서 서툴지만 함께 즐겼을 때 그 기쁨은 더 클 것이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적극 물어보고, 같은 세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떤지 그 사정도 들어본다면 정보의 폭도 넓어지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 밖에서 뛰어놀지 않고 방에 처박혀 공부만 하다 체력이 약해진 요즘 어린이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것들도 결국 평소의 습관, 그리고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관건인데, 부모와 놀이법에 대해 상의하고 공유한다면 자신에게도 신선한 자극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5. 새 육아법을 받아들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세대간 흔히 문제가 되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 쉬운 게 바로 ‘육아에 대한 생각’, 즉 육아법의 차이다. 예를 들면, 툭하면 안기려는 버릇이 생기니 좋지 않다, 오냐오냐하면 버릇이 나빠진다 등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간섭하게 되면 손주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빠질 수 있다. 새로운 육아법은 받아들이되 선배로서 조언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선에서 참고할 만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아낌없이 전하고 함께 나눈다면 세대의 벽도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손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평소의 모습 그대로 손주와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고, 함께 나누며 지내는 시간은 알찬 삶의 활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6. 기억은 규칙 속에서 추억으로 일회성은 피하자. 뷔페 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은 오히려 질리기 쉽고 식상하기 마련이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 들어주는 게 결국 손주를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일회성보다는 반복, 그리고 규칙적으로 행하자. 집 냉장고에 있는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는 걸 일주일에 한 번씩 해 보든가, 동네 산책을 매번 다른 길로 다녀 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편의점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살 때 재료가 뭔지 성분과 열량 표시에는 뭐가 씌어 있는지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횟수를 거듭할수록 커뮤니케이션도 깊어지고,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아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7. 손주보다 자식에게 사랑을 손주가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손주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고, 먼저 손주를 흐뭇하게 쳐다보기 이전에 자식에게 사랑을 쏟고 있는지, 혹은 손주 앞에서 자식을 혼내지는 않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식사와 대화, 놀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손주에게 이어지고 더 커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과의 신뢰 관계, 그 태도를 보고 손주가 크며, 또한 손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건 바로 자식임을 인정한다면 손주를 대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서 존경 받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손주의 듬직한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도 듬뿍 사랑을 쏟는 게 어쩌면 자식과 손주에게는 지나친 관심이고 간섭일 수도 있다. 8.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을 알자 앞서 말했듯이 귀여운 손주의 재롱과 투정, 그리고 어리광에 그저 오냐오냐 응해주거나 혹은 넘치고 남을 만큼 모든 걸 주는 건 과잉보호일 수 있다. 부모가 보더라도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분에 넘친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도를 넘어선 간섭이 된다. 일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대선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든든한 매력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 날리기, 비눗방울 만들기 등 놀이 방법을 가르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인사법과 식사 예절 등을 가르쳐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손주를 가르친다고 의식하지 말고 평소 말투 그대로 이야기하며 함께한다면, 손주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갈 것이다.
- 2016-07-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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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⓸
- 얘기를 하다 보니 '시니어 연극'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윤택의 작품에서 중요한 중심인물이 바로 어머니다. 와 , 최근작 (오타 쇼고(太田省吾) 작·연출·일본)까지 나이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2014년에는 여든 한 살의 배우 오순택이 열연한 를 연출했다. 노배우가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던 이 연극은 이듬해 제4회 대한민국 셰익스피어어워즈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7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아트홀에서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윤대성이 쓴 희곡으로 치매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다. 지난 6월말 부산 초연 이후 서울에서 처음 하는 공연이다. “내가 연출을 맡았는데 치매 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서로 남남인데 할머니는 기억상실증이고 할아버지는 완전히 치매인데 처음 보는 할머니를 보고 자꾸 첫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할머니는 아니라고 하다 헷갈리다가 아 내가 이 남자의 첫사랑이었구나 그래되는 과정입니다. 웃기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이윤택은 실버세대를 위한 연극이 필요하다면서 내년에는 같은 악극을 공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극을 접해보지 못한 시니어 참여 연극의 가능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미 시도는 해봤다고. “밀양에서 을 할 때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밀양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밀양은 서로 집중 되는 힘이 있거든요. 공연하기 전 저희에게 욕을 하던 할머니도 연극을 하고난 뒤 너무 고마워했어요. 내 인생에 내가 어떻게 배우로서 무대에 설 수 있었겠느냐면서요.” 세계적인 많은 연출가들이 나이가 들면 아동극이나 실버극을 시도하지만 사실 어렵다고 했다.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타 쇼고(太田省吾)가 극단을 해체하고 실버극을 시도했었으나 실패했다. 타데우스 칸토르(1915~1990·폴란드)의 경우 성공했지만 식자층이었던 자신의 친구들를 모아 을 공연한 것은 성공했었다고. 꾸준히 시니어 배우, 공연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윤택이기에 시니어세대를 위한 연극을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시도해주기를 부탁드린다.
- 2016-07-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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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5] 미국 할아버지·할머니의 ‘손주 병법’
- 미국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인구는 6500만 명. 이 가운데 10%가 좀 넘는 700만 명의 조부모가 손주와 함께 산다. 1992년에는 7% 정도였던 것이 경제여건 악화 등으로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절대 다수인 90%의 조부모는 손주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남한)의 거의 100배나 되는 넓은 나라이다 보니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어 손주에 대한 애틋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주 보지 못해 안타깝고 가끔 만나면 손주가 서먹해 하니 더 안타까운 것이 조부모의 마음이다. 이런 조부모들을 위해 미국의 ‘A&E 가족출판사(www.fambooks.com)’가 제시한 ‘떨어져 사는 손주와 가까워지는 기법 20가지’를 소개한다. 손주가 다음 만날 날짜를 되새길 수 있도록 선물을 한다. 약속한 다음 방문 때까지의 일수를 계산해서 그 수만큼의 초콜릿을 예쁜 통에 담아 선물하고 매일 하나씩 꺼내 먹도록 하면 효과가 있다. 손주가 아플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담은 상자를 보낸다. 아플 때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이나 게임 기구, 맛있는 죽 같은 것을 담은 선물 상자를 받은 손주는 조부모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예쁜 종이를 하트 모양으로 오린 후 그 위에 손주에게 고마움을 담은 글을 쓴다. 이 종이를 봉투에 담아 우송을 하면 받아 본 손주는 조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보물찾기 놀이는 재미있고 친근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가 미리 약속한 곳에 보물을 숨기도록 한 후 조부모는 온라인으로 손주에게 숨긴 곳에 대한 힌트를 주는 방식이다. 뽀뽀나 키스를 의미하는 상표가 붙은 과자(또는 초콜릿)를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에게 보내 손주에게 매일 하나씩 주도록 한다. 할머니·할아버지가 그 과자를 통해 손주에게 매일 뽀뽀를 한다는 말도 전달토록 한다. 이메일(또는 편지)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한다. 조부모가 먼저 이야기의 서두를 적어 보내면 손주가 이야기를 뒤이어 가는 방식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함께 완성해 나간다. 손주에게 ‘세계 최고의 손주’라는 문구를 새긴 트로피를 보낸다. 트로피를 보낼 때 세계 최고인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동봉한다. 세상을 살면서 체득한 교훈을 담은 소책자를 만든다. 매주 혹은 매달 몇 가지 교훈을 적어 소책자를 완성한 후 손주에게 보낸다. 인생을 시작하는 손주에게는 의미 있는 인생 안내서가 될 수 있다. 껴안을 수 있는 봉제완구를 보낸다. 이 봉제완구를 통해 조부모가 포옹해 주는 듯한 느낌을 손주가 받도록 해 유대감을 높인다. 부드럽고 얇은 작은 종이에 편지를 써 목걸이 펜던트로도 이용할 수 있는 작고 예쁜 곽에 넣어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편지를 꺼내 재미있게 읽고 그 곽을 몸에 지니면서 조부모를 생각하게 된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자(또는 초콜릿)에 덕담을 적은 메모를 첨부한 후 상자에 듬뿍 담아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과자를 먹을 때마다 조부모의 뜻이 담긴 덕담을 읽게 된다. 손주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손주가 고맙게 한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소상히 적어 편지로 보낸다. 가족사를 함께 만든다. 손주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조상이나 친척에 대한 자료를 같이 수집하고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가족사 만들기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봉사활동 하는 날을 서로 같은 날짜로 정한다. 봉사활동을 한 날 저녁에는 손주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봉사활동을 했는지, 어떤 보람을 느꼈는지 서로 이야기 나눈다. 손주만을 위한 크로스워드 퍼즐을 만든다. 인터넷 크로스워드 퍼즐을 이용하되 함께 한 활동이나 책 읽기 등에서 힌트를 얻어 풀 수 있도록 퍼즐을 재구성한다. 이름 없는 별을 하나 고른 후 손주의 이름을 따 별 이름을 짓고 공식적으로 등록(www.starregistry.com) 한다. 그 별을 볼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영웅을 공유한다. 먼저 조부모가 존경하는 영웅이 누구며, 왜 존경하는지 손주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손주에게 존경하는 영웅과 그 이유를 물어보고 의견을 나눈다. 손주와 만난 후 떠나기 전에 작은 카드를 작성하여 집안 곳곳에 숨겨 둔다. 그러면 조부모가 떠나고 난 뒤에 손주가 그 카드를 찾아보면서 재미도 느끼고 추억도 되새기게 된다. 손주와 함께하고 싶은 신나는 모험을 주제로 한 공상소설을 같이 쓴다. 공상소설을 시리즈로 만들 수 있으면 더 좋다. 인터넷 게임을 함께 한다.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을 통해 골프, 카드, 체스 등 각종 게임을 함께 할 수 있다. 손주에게 스포츠, 미술, 음악 등을 직접 가르쳐 주면 조손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스포츠나 미술, 음악 활동을 하는 조부모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놓으면 손주가 그 비디오를 보면서 배울 수 있어 더욱 좋다.
- 2016-07-1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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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 이민 이야기] (9)백발의 미국 노인들
- 미국은 노인천국이다. 그러나 백인 노인들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외로움이 그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노인들은 대체로 검소하지만 부유하고 고독한 만큼 사랑도 넘쳤다. 미국인들이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자본주의가 넘치는 미국에 살면서 얻을 것과 배울 것은 끝이 없었다. 하얀 은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곱게 단장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뒤뚱 세탁소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소리를 질러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얼른 뛰어나가 할머니를 두 팔로 부축했다. 필자는 아직 외국인 손님이 어색하기만 해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얼굴에 소녀 같은 천진한 미소를 띠며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라고 했다. 언뜻 봐도 80은 넘어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예쁜 미국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두 부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시더니 이것저것 물어왔고, 남편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변을 했다. 그 연세에 운전을 직접 하고 세탁물을 하나 가득 차 트렁크에 담아오셨다. 남편은 밖으로 나가 트렁크를 열고 세탁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천장으로 세어난 빗물이 옷장으로 들어와 옷들이 망가졌다며 대충 50장은 가져온 것 같았다. 달러로 치면 대략 500달러는 될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남편은 친절을 있는 대로 하더니 300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필자는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참아야 했다. 남편은 신이 난 듯 가게를 돌아나가는 할머니 손님을 차에까지 부축하며 정중하게 모셨다. 필자도 그때는 함께 인사를 했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일주일 후, 백인 할머니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왔다. 필자 부부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해서 모셔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소개를 해주겠다며 주름진 환한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후로는 무슨 때마다 초콜릿과 손수 구운 비스킷뿐만 아니라 각종의 선물도 있는 대로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도 5년 정도 단골이 되어 꾸준한 왕래를 했고 주위의 사람들로 매상은 늘어갔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모습이 뚝 끊겨 필자 부부는 무슨 일인가 걱정을 했다. 얼마 후 보스턴에 사는 아들이 할머니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들었다며 그동안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할머니 옷에 대한 거금을 지불하며 모두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날은 필자 부부도 행복했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몹시 슬픈 날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건장하게 생긴 백인 할아버지가 세탁물 한 보따리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개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치매 끼가 있는지 한쪽 손을 심하게 덜덜 떨었다. 남편은 반갑다며 여윈 두 손을 덥석 잡고 친절하게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는 사우스 코리안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6.25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며 필자 부부 만난 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으로 혼자 노인 아파트에 사셨고 아들딸은 타 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미국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어 안타까웠다. 남편은 한국에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몇 배로 친절을 베풀었다. 어느 때는 직접 집에까지 배달을 했다. 할아버지는 올 때마다 고맙다며 고액의 팁을 용돈처럼 건네주었고 매주 월요일 첫 손님으로 기분 좋은 매상도 채워주었다. 와이셔츠 5장과 바지 2벌로 매주 똑같은 옷과 속옷 몇 벌이 전부였지만 금액은 만만치가 않았다. 반복되는 세탁으로 옷들은 너덜너덜해갔지만 할아버지는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라며 변함이 없었다. 필자에게 할아버지 옷은 곧 익숙해졌고 그 할아버지 냄새가 배어있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맘에 드는 것이면 똑같은 옷이 몇 벌씩이나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사치가 아닌 굉장히 검소하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 노인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은 추수감사절 및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각종의 선물을 가져왔다. 시시때때로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면서 마음의 정을 나누었다. 정이 그립고 외로운 이민자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토박이인 그들도 외로움은 가득했지만 정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들은 부가 넘치는 나라에 살았지만 고독을 몸에 품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자식들은 있어도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야 했고 부모는 나이가 들면 외로움 친구도 품어야 하는것이 그들 전통적 문화의 일부였다. 미국에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병원으로 실려가 조용히 혼자 죽어간다.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혼자 또는 부부만이 사는 것에도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노인들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아주 저렴한 노인 아파트에서 지내며 정부 보조금인 웰 페어(기본보장 연금)나 쇼셜 연금(사회보장 연금)으로 살고 있다. 메디칼(병원)은 물론이고 후드(음식) 스탬프까지 어쩌면 부자로 생활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차곡차곡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외로움의 단어는 인간이 풀지 못하는 커다란 공통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필자 부부가 조금 친절과 애정을 베푸니 대가는 그 열 배는 돌아왔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차고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본적인 질서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마음속 깊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의 정서는 누구나 비슷했고 겉의 생김새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진실로 대하니 진실로 통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육체적 고생은 참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참으로 진솔한 생활이었다. 필자 이민생활 초기에 선배 지인이 말했다. ‘미국은 살수록 매력이 있는 곳’이라고. 물론 전혀 다른 문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살면서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와도 같았고, 황무지의 낯선 땅에서 매력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의 나라 미국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름다운 백인 노인들, 부디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오래 살아 주기만을 바라고 싶다.
- 2016-07-11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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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4] 신종플루는 아니었지만 되살아난 내 보물 손녀
- 백외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손녀, 손자 쌍둥이와 외손자가 있다. 그중 태어난 지 10일 된 손녀에게 신종플루 증상이 나타났다. 노약자와 영유아는 별다른 대책 없이 공포에 떨고 있던 때였다. 병원마다 “치료가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한 병원에서 천사 같은 의사가 지극정성으로 치료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세 손주는 건강하게 자랐고 그때부터 행복 시작이었다. 살아 있는 천사를 만나다 2009년 10월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런데 산후조리원에서 조리 중 손녀가 고열과 설사, 식음 전폐로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토요일 오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조리원에서 동네병원으로 데려갔으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오쯤 모 대학병원으로 갔으나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아이는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고, 몸은 불덩이 같았다. 대책 없이 내쫓김을 당하고 보니 자신의 무력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아이가 출생한 ‘제일병원’으로 전화를 하였다. “신종플루 감염 위험이 크다. 빨리 데려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처럼 사람의 목소리에 감격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보통 때면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이렇게 차는 밀리는지 숨이 막혔다. 아내와 며느리는 눈도 뜨지 못한 아기를 안고 초주검 상태다. “내 생명이라도 바치겠소. 손녀를 살려주오” 무언가를 갈구하였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었다. 이때보다 애탔던 기억은 없다. 토요일 오후 제일병원 응급실! 채혈하느라고 주사기를 찌를 때마다 아이는 아파서 자지러졌다. 당직근무 중인 여의사는 아기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대변의 냄새를 맡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3일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경험상 세균 감염으로 보이니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병원 진료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의사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지극정성을 다하는 담당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성어린 치료로 열도 차차 내리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나온 검사결과도 다행이 신종플루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균에 감염되었으나 경과가 좋다”고 했다. 산후조리원에서 세균 감염이 자주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 일을 계기로 다섯 달 후에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산후조리원 대신 필자의 집에서 6주간 딸의 산후조리를 하게 하였다. 한 주일 치료결과 체온도 정상으로 되고 젖도 잘 먹으면서 무사히 퇴원하였다. 퇴원 후 한동안은 손녀의 건강을 항상 걱정하였다. 다행히 별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손녀를 구해준 의사선생님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세 손주 보살피기 쌍둥이가 어렸을 때는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가까이 사는 아들 집으로 갔다. 잠에서 덜 깨 칭얼거리는 아이들 달래려고 목마가 되어 무동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고 씨름상대 되어 주면서 한바탕 즐겁게 논다. 아이들의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지면 얼굴 씻기고, 밥을 먹여서 옷 입히고 등교 준비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조그만 전쟁터다. 아침 이때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제일 어려운 어린이 보살핌이라고 본다. 쌍둥이는 길거리 간판의 글씨를 익히면서 질문하기 바쁘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재미있게 구경한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네, 미끄럼 타고, 술래잡기 놀이까지 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외손자는 오후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애교 떠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아이들 돕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하고 있다. 쌍둥이는 올해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독후감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손녀는 그림을 선물하고 손자는 미니 야구를 하자고 한다. 외손자는 솜씨를 자랑하여 종이접기 작품을 선물로 내민다. 손주, 가슴으로 안아라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다. 손으로만 만지는지 가슴으로 안아주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외가에서 산후조리를 하였던 외손자는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자는 걸 지금도 제일 좋아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면 친해진다. 터닝메카드 놀이를 잘 모른다고 밀어내지 말고 하나씩 배우는 자세로 무릎을 맞대보라! 틀림없이 친구가 된다. 칭찬하라! 장래 귀중한 자산이 손주이다. 수만금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보물이 된다. 사랑을 먼저 주면 행복은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 씩씩하고 명랑한 아이들! 생각만 해도 입이 귀에 붙는다.
- 2016-07-0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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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병법 PART3] 할아버지·할머니 우리 함께 놀아요!
- 만나면 반갑지만 막상 함께 있다 보면 서로 지지고 볶다, 헤어지면 그리워하기를 반복하는 대상이 바로 손자와 손녀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손자 손녀를 책임지고 뭔가 해야 한다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보내야 할까? 그래서 서울 S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 26명에게 물었다. 할아버지·할머니와 어떤 것을 하고 싶고, 좋았는지. 어떨 때 할아버지·할머니가 미운지도 들었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기 전에 한 가지 알아둘 것! 체력은 필수다. (*주관식으로 이루어진 설문으로 중복 대답한 어린이가 다수 있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26명의 아이들은 조부모와의 경험이나 해보고 싶은 것으로 여행이나 놀이공원을 많이 대답했다. 특이한 점은 조부모와 함께 공놀이나 배드민턴 등을 했던 경험을 말한 어린이가 다수였다는 점.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뛰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기타 의견에서 대중목욕탕에 갔던 것, 보드게임 했던 기억 등을 꼽기도 했는데 어린이 자신에게 집중해 주고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풀이된다. 손자 손녀들은 일단 부모 없이 조부모와 있는 동안만큼은 약간의 일탈을 꿈꾸는 것으로 드러났다. 2번 문항의 ‘조부모와 몰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1위가 바로 영화와 TV 보기. 평소 부모 제재가 아이들에게 있다는 의미다. 기타 의견에 ‘숙제 안 하기’나 ‘아이스크림 먹기’ 등도 부모가 들으면 싫어할만 한 행동 아닌가. 적어도 조부모를 부모보다는 편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아이들이 조부모와 하고 싶은 것은 참으로 다양했다. 윷놀이, 오목, 보드게임 등 앉아서 하는 것도 있지만 야외 활동은 기본이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등산이나 캠핑을 가고 싶다는 어린이, 태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 여행을 하고 싶다는 어린이도 있었다. 여름방학을 의식해서인지 바닷가나 수영장에 함께 가고 싶다는 의견도 많다. 손자 손녀와 뭔가를 하고 싶다면 체력 먼저 꼭 길러야 할 것 같다. 조부모가 싫을 때는 단연 화내거나 혼 낼 때였다. 기타 의견에서 ‘공부한다고 칭찬할 때가 싫었다’라고 응답한 어린이도 있었다. 혹시 공부를 막 시작한 손자를 보고 칭찬한 적이 있다면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싫어하는 것을 먹으라고 할 때’, ‘할머니 혼자서 힘들게 어디 갈 때’가 싫다고 답한 어린이도 눈에 띄었다.
- 2016-07-0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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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다. 봄날은 길고 보릿고개는 높았다. 봄에 장리쌀 한 가마니를 빌려오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을 갚아야 했다. 50%의 이자다. 지금의 잣대로 보면 과히 살인적인 이자요, 착취다.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사회 구조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 해만 보릿고개를 넘을 때 장리쌀의 고리에서 벗어나면 되었지만 굶을 수는 없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걸 필자가 해보리라 결심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1년만 포기하기로 했다. 1년 동안 돈을 벌어보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어린 필자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마을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필자 동네도 정부에서 구불구불한 논둑을 똑바로 펴는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지금 말로 하면 공공근로다. 읍사무소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그날 할 일을 지정해주고 저녁 무렵 성과를 측정해서 실적에 따라 밀가루 티켓을 나눠 줬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최저임금에 버금가는 적은 밀가루 지급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사일이 다 끝난 겨울에 하는 일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논둑에 한 뼘 정도 들어 올릴 만큼의 범위를 정하고 곡괭이로 논둑에 구명을 낸다. 거기에 쇠로 된 긴 지렛대를 넣고 논둑을 들어 올리면 논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에 직선화된 새로운 논둑을 만드는 일이다. 공사가 다 되면 바둑판처럼 반듯한 직선화된 논둑과 논이 만들어진다. 경지면적도 커지고 농토가 반듯해서 농사짓기에도 편하게 된다. 요즘 같으면 포크레인 등 기계로 하겠지만 당시는 순전히 사람의 노동에 의한 작업이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다 그렇듯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루 할당된 일의 양도 5~6시간이면 다 마칠 일이었다. 밀가루를 매일 주는 것이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읍사무소에 가서 받아왔다. 이렇게 받은 밀가루가 10포대 정도 되었다. 필자가 벌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도 해먹고 콩가루 넣은 칼국수도 만들어 먹었다. 늙은 호박에 팥을 넣은 호박범벅도 해먹었다. 덕분에 쌀이나 보리를 아낄 수가 있었다. 그해 장리쌀의 고리를 끊고 보릿고개를 넘었다. 이제 빚은 없어졌다. 어머니가 두고두고 필자 공을 인정해주었다. 당시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먹어야 사니까 흉년에는 콩죽 한 그릇 하고 논 서 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방직공장에 취직한 나이 어린 소녀들이 봉급 받은 다음 날 우체국에 줄을 서서 고향으로 돈을 보내는 모습도 봤다. 고향 집에 보내기 위해 손에 쥔 그 돈이 달랑 3000원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돈으로 오빠나 동생들 학교 다니게 하고 살림 밑천인 송아지도 샀다. 이런 돈들이 모여 논, 밭도 사고 고향 집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들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다. 땅값이나 집값이 지금처럼 비싸다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다음 해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진학했다. 적성도 모르고 오직 취업이 잘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공고를 택한 이유라면 이유다. 당시는 공부를 못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빠른 취업을 위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자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취업되어 학교를 떠났다. 필자도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전매청 연초제조창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담배를 만드는 기계는 이태리 제품인데 요즘처럼 완전자동은 아니나 당시로는 획기적인 자동화 기계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동화 설비에 대해 도면 보는 법을 익히고 고장 난 기계들의 점검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군대에서 기술을 더 배워보려고 육군 발전기술병으로 지원했다. 처음에는 대대 참모부에서 군수품을 담당하는 행정병 보직을 받았다. 그런데 전기 일을 하게 될 운명이었는지 부대 목욕탕 관리 병사가 전기 감전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후임으로 전기를 안다는 이유로 필자가 선발됐다. 목욕탕 관리사병은 보일러를 다룰지 알아야 하지만 필자는 보일러에 대해서는 통 몰랐다. 인근 부대를 다니며 독학으로 보일러의 운전법을 배우고 무난히 목욕탕 관리사병의 임무를 마쳤다. 한 번은 목욕탕에 사성장군인 군사령관이 방문했다. 별 4개를 보는 순간 벌벌 떨었다. 35개월을 마치고 제대한 후 한국전기안전공사에 입사하게 됐다. 27세 때었다. 필자 인생에서 전기안전공사를 빼놓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곳에서 결혼도 하고 자식 공부도 시키고 60세 정년퇴직을 했으며 노후생활도 보장받았다. 안전공사 생활 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간부시험에 일찍이 합격한 것이다. 간부는 60세 정년이지만 직원은 58세가 정년이었고 급여에서도 차등이 있어 경쟁이 심했다. 간부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최소 3년의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하는 근속연수 점수와 상급자가 매기는 고과점수를 합한 기본점수가 있다, 여기에 필기시험을 쳐서 학과 점수를 보태어 성적순으로 뽑았다.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필기시험이었다. 필자는 상급자인 주임들을 제치고 간부시험에 입사 3년 만에 합격하였다. 간부로 첫 부임지가 공교롭게도 과거 근무한 적이 있는 사업소였다. 간부로 발령받고 보니 옛날 상사인 주임들이 부하로 바뀌어 있었다. 필자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임들도 필자를 대하기에 곤혹스러웠다. 이런 때일수록 필자의 상급자인 과장이 잘 컨트롤 해 줘야 하는데 상급자인 과장도 주임들과 오래 근무한 정으로 심적으로는 주임들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공식적인 술자리에는 필자가 참석했지만 주임들과 과장 간의 사적인 술자리에는 필자를 고의로 배제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의 힘으로 간부의 위치를 찾아갔다. 두 번째 사건은 고등학교 후배가 많은 지역에 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필자가 졸업한 공고는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동문회 야유회 때는 장난 비슷하게 선배가 후배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기도 했다. 나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매이니까 웃으며 맞았다. 부부동반으로 야유회도 다녔는데 선배들이 후배 벌주는 것을 부인들이 다 보고 있었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고착화된 선후배 간 전통이었다. 그런데 회사 간부인 필자를 때리기는 아무리 선배지만 버거워했다. 필자로 인해 벌씌우거나 매를 드는 것은 차츰 없어졌다. 하지만 선배들을 사적인 장소에서는 더욱 깍듯하게 모셨다. 술을 따를 때도 3년 이상 선배한테는 무릎을 꿇었다. 세 번째 사건은 기술직으로 감사반장이 된 것이다. 감사는 회계감사가 중요한데 기술회사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감사반장을 해야 한다는 사장의 경영방침에 의해서 필자가 선택되었다. 부서별 부장급 감사반원을 이끌고 사업소를 순회하며 실무 감사를 했다. 잘못하는 점보다 잘하는 점을 찾아서 타사업소에 전파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징계도 했지만 표창도 많이 했다. 올바른 비판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다. 네 번째 사건은 전문대학교에서 겸임교수를 맡은 일이다. 기술사 자격을 갖고 있고 현장 경험이 많다는 점을 들어서 대학교에서 섭외가 들어왔는데, 사장이 허락해 교수직을 겸임한 것이다. 전기응용 과목을 맡았는데 전기응용은 조명, 전동력응용, 전기철도, 전기화학 등 폭이 넓은 실무 분야다. 4년간의 겸임교수 시절은 몸은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다. 다섯 번째 사건은 전기안전 부문에서 필자가 노력한 일들을 정리하여 공적조사로 만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고 한국전력공사가 후원하는 에너지대상을 신청한 결과 국민봉사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굵직한 상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부상으로 대만 여행을 보내주고 금 20돈의 황금 열쇠를 받았는데 지금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60세 정년퇴직을 했다. 1남 1녀의 자식도 결혼하여 필자 곁을 떠났다. 비록 나이에 의해 정년퇴직했지만 아직은 신체 건강하여 일자리를 찾았다. 급여는 적지만 필자를 필요로 하는 곳에 다니고 있다. 나이 더 들면 직장에서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취미가 있는 글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쓰기의 자산은 역시 독서이므로 도서관의 ‘책 읽기 마라톤’에 3년간 참가하여 언제나 1등을 하였다. 귀촌을 위해 도시 근교에 땅도 사두었다. 나이 들어서 버티는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연금도 부었다. 체력도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올해 동호인 테니스대회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한 것이 기쁘다. 앞으로 전국테니스대회에 노년부로 참가하려고 한다. 우승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목표가 있어야 한다. 70세가 넘으면 봉사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 건강한 노인이 덜 건강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에 매진할 것이다. 이것도 공부해야 한다. 사회봉사의 이론을 갖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사이버대학을 수강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다. 말로만 하는 봉사가 아니라 육체가 따라가는 봉사를 위해 발마사지와 경락안마도 배우고 민간자격증도 취득했다, 경험을 얻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치매센터에 치매전문 자원 봉사자의 일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을 늘 갖고 있다. 필자의 생애가 아직은 진행 중이지만 돌이켜 보니 준비하며 여기까지 잘 왔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다.
- 2016-07-01 1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