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어 (The Core) - 기발한 상상의 과학 영화
- 돈 아미엘 감독 작품으로, 주연에 아론 에크하트(죠시 역), 힐러리 스웽크(레베카 소령 역)가 나온다. 필자는 과학은 잘 모르지만, 이 영화는 과학을 쉽게 이해시키고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만든다. 이 영화는 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도움도 주지만,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 현상까지 바꿀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냉전 시대에 소련이 인공지진을 일으켜 상대국을 공격하는 무기 체계를 갖추자 미국도 이에 대응하여 ‘데스티니’라는 인공지진 체계를 갖춘다. 그러나 이 때문에 지구를 구성하는 핵(The Core)에 이상이 발생한다. 내핵을 둘러 싼 외핵이 액체 형태로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자기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도 막고 지구 자기의 균형을 맞춰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데스티니 때문에 외핵의 흐름이 정지되고 지구곳곳에서 자기장 이상을 일으킨다. 우주선이 에러로 엉뚱한 궤도를 타게 되고 로마의 콜롯세움 등 세계 도시가 파괴된다. 그대로 두면 과도한 정전기 발생으로 모든 전자제품이 파괴되고 건물 등 도시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방사선을 막아주지 못하니 생물체도 3개월 안에 모두 죽게 된다. NASA는 비밀리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한 팀을 구성하고 탐사선으로 지구 내부로 들어가 멈춰버린 외핵을 다시 회전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한다. 인간은 우주로 진출한 과학의 진보를 가져 왔으나 우주는 빈 공간이어서 가능했지, 지구의 핵까지의 도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럴싸한 과학적 이론으로 지구 밖뿐 아니라 지구 내부로 갈 수 있는 탐사선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탐사선은 지구 핵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해저 면을 택한다. 그리고 맹렬하게 중심을 향해 돌진한다. 우리 상상은 지구는 단단하게 다져져 있을 것 같지만, 수정 동굴 층, 다이아몬드 동굴, 용암 층 등 공간이나 액체 상태인 구간도 있다. 중간에 탐사선이 고장 나거나 걸려 있을 때 탐사선 밖으로 나가서 수리해야 하는데 수천도의 고열이므로 액화 질소를 분사하며 열을 이겨 낸다는 발상도 기발하다. 지구 외핵을 회전시키기 위해 핵폭탄을 탑재했지만, 외핵의 밀도를 다시 계산해 보니 가지고 간 핵폭탄으로는 부족하다는 난관에 부딪힌다. 그러나 다시 파장의 원리를 이용하여 파장이 이어지는 곳에 정확하게 연쇄적으로 다시 파장을 일으키면 파장이 이어진다는 과학적 이론이 등장한다. NASA본부에서는 탐사선의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해서 최종적으로 데스티니를 가동할 준비를 한다. 그러면 탐사선 사람들은 돌아 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는 것이다. 지휘본부의 지휘하는 사람의 친딸이 탐사선의 조종사이다. 그러나 탐사선에서는 탁월한 전문가들이 탑승하고 있으므로 파장의 원리를 이용하여 외핵의 회전에 성공한다. 임무는 완수했으나 탐사선은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다시 돌아갈 방법이 없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짜낸 결과 핵의 열을 이용하여 에너지를 얻는다는 과학의 힘을 이용하여 일단 멘틀 층을 지나 해저 면까지 나간다. 그런 해저에 나오자 열이 없어 탐사선은 에너지를 잃어 다시 연락 불통 상태에 빠진다. 그대로 아무도 모른 채 죽어갈 찰나에 남은 희미한 주파수를 분사 시킨 것이 해군 수색대의 음파 탐지기에 잡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들에 초점을 맞춘다. 탐사선의 탐사원은 원래 6명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원해서 희생양이 되어 임무를 완성한다. 살아남은 두 사람, 조쉬와 레베카가 영웅이 되었지만, 이름 없는 영웅들도 잊지 말자며 대대적인 축하를 해준다
- 2017-03-14 17:00
-
- [이성낙의 그림 이야기]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모셰 다얀’을 만나다
- 검은 안대(眼帶)를 한 조선시대 인물 낙서 장만(洛西 張晩, 1566~1629)의 초상화(사진 1)를 보는 순간, 생생한 현대사의 한 장면이 영상처럼 겹쳐졌다. 바로 검은 안대를 한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 모셰 다얀(Moshe Dayan, 1915~1981)의 이야기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그림 속 인물이 실명(失明) 상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지금까지 네 점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눈가리개’인 안대를 한 초상화는 단 한 작품이다. 장만은 조선시대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때 문신으로서보다는 무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국토의 북녘 지역에서 나라를 지켰다. 특히 병자호란 때 북방 수비에 큰 공을 세웠다. 1624년(인조 2년)에는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해 공신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만은 왼쪽 눈에 큰 부상을 입고 실명하고 말았다. 그 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공신상(功臣像)이라는 초상화를 하사받게 되었는데, 바로 이 공신상에서 검은색 안대가 훈장처럼 크게 눈에 띈다. 1956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중동 지역에 전운(戰雲)이 휘몰아쳤다. 각각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1956년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 대통령이 그동안 영국, 프랑스, 미국이 주도하던 수에즈 운하의 관리 경영권을 박탈해 국유화하자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시나이 반도를 넘어 수에즈 운하의 서편 제방(Bank)까지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 또한 공군력을 앞세워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7년 이번엔 아랍 연합과 이스라엘 간에 이른바 6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른바 ‘번개전쟁(Blitz Krieg)’이라는 작전으로 자국 국토보다 두 배나 넓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시를 포함한 웨스트뱅크(West Bank) 지역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 고원(Golan Heights)을 점령했다. 6박 7일간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끝난 전쟁이었다(주: 훗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웨스트뱅크와 골란 고원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 남아 있다). 이 두 번의 전쟁에서 1956년에는 총사령관으로, 1967년에는 국방장관으로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바로 모셰 다얀이다. 나중에 외무장관직(1977~1979)에 오르기도 한 그는 전쟁 영웅으로서 세계 정치·외교 무대에서 활약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모셰 다얀은 1941년, 그러니까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이웃 아랍국들과 벌어진 크고 작은 무력 분쟁 때 왼쪽 눈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그의 이름과 더불어 검은색 안대가 마치 ‘훈장’처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되었다(사진 2). 검은색 안대를 한 조선시대 인물의 초상화를 보며 현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셰 다얀이라는 전쟁 영웅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검은색 안대 없는 모셰 다얀과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인 낙서 장만을 생각하며 ‘아이콘’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7-02-20 11:17
-
- [CULTURE Interview] 뮤지컬 <영웅> 윤호진 연출가 '영웅이 그리운 시대, 진정한 영웅을 노래하다'
-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담은 작품으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까지 극찬을 받아온 뮤지컬 . 이번 무대의 수장을 맡은 윤호진 연출가가 조명하는 우리 시대 진정한 영웅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안중근 의사의 어떤 점을 가장 부각하고자 했는가? 여러 해 거듭한 작품이지만, 새로 올릴 때마다 간과했던 부분을 찾곤 한다. 안중근 의사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붓을 놓지 못하고 집필했던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동양평화론’은 미처 완성되지 못하고 서론에 그치긴 했지만 젊은 청년이 한 나라의 평화를 넘어 동양의 평화를 걱정하며 집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 ‘동양평화’라는 사상을 만든 것은 안중근 의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훌륭함을 부각시켜 널리 알리고 싶다. 작품의 연출을 맡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2009년 안중근 의사 100주기를 앞두고 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그 청년은 내게 뮤지컬 의 후속작으로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뮤지컬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그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15가지 이유 중 첫 번째 이유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라고 말했다. 이는 나에게 를 시작으로 한 일본과 관련한 우리 역사 뮤지컬 3부작의 시발점이 되어 또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초연을 앞두고 작품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우연히 어느 행사에서 그 청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안중근기념사업회’ 문화국장이었는데 2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지금 떠올려보면 돌아가신 안중근 선생님께서 그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번 시즌에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는가? 이번 시즌은 안중근이 4명이나 된다. 네 명의 캐릭터로 4인 4색 매력의 각기 다른 안중근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영웅으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내면을 끄집어내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안중근 역의 네 배우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면? 네 배우 모두 각기 다른 모습이 있다. 그중 가장 연장자인 배우 안재욱이 선배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배우들을 하나로 모아 선의의 경쟁을 해가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든든하다.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사회적 메시지는 뭔가? 정의가 무뎌진 사회다. 우리의 역사도 간과하고 있다. 을 통해 100년 전 그들이 왜 이렇게 처절하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생각해보고 후세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윤호진 연출가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 겸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원장. 대표작 뮤지컬 , , , 연극 , 외 다수. 일정 2월 26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윤호진 출연 안재욱, 정성화, 이지훈, 양준모, 김도형 등
- 2017-02-08 18:31
-
- [하태형의 한문 산책]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 가을을 대표하는 중국의 명문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글이 바로 ‘적벽부’이다. 이 문장을 두고 역대로 수많은 사람이 칭송을 끊이지 않았다. 그중 가장 이 문장을 잘 논평한 글로 평가받는 글은 소동파 이후 약 200년 뒤의 사람인 송나라 사첩산(謝疊山)이 쓴 인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 능려(凌)하고도 표일(飄逸)한 말들은 한마디라도 불 피워서 밥해 먹고 사는 사람의 말과 같지 않다. 이 문장을 읽노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낭풍(風)을 타고 올라 바다를 건너 봉래산(蓬萊山)으로 가는 기상을 깨닫게 하여 참으로 조물주와 노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니, 절대로 붓을 잡아 글을 배워서는 이와 같은 문장을 지을 수는 없다.” 또한 북송시대 문장가인 당경(唐庚)은 그의 에서 이 글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생각건대 전(前)적벽부와 후(後)적벽부, 이 두 편의 글은 일세만고(一洗萬古)의 명문장으로, 이 글 중 한 구절과 비슷한 것도 온 세상을 뒤져 구할 수가 없다[欲髣髴其一語 擧世不可得也]” 뒷날 송의 효종(孝宗)이 소동파의 문집 서문에서 그를 ‘문장지종(文章之宗)’으로 칭송하게 만들었으며 그를 대표하는 이 명문 중의 명문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가장 힘들었던 유배시절 지어졌다. 1080년 이른바 오대시안(烏臺詩案) 사건에 연루되어 겨우 목숨을 건진 그는 45세 되던 나이로 황주(黃州)에 유배된다. 평생 고생이라고는 해보지 않던 그가 먹을 게 없는 곤경에 처하자 마몽득(馬夢得)이란 친구가 땅 몇 고랑을 주면서 경작해 보라고 권한다. 46세 나이로 난생처음 땅을 경작하는 고초가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때 자신이 경작하던 동쪽 언덕의 땅을 따서 자신의 호를 ‘동파(東坡)’라 짓고, 이 역경을 이겨내는 자신의 위대한 작품, 를 짓기 시작한다. 흔히들 이 가 지어진 곳이 옛날 삼국시대의 대전인 ‘적벽대전’이 일어난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삼국지의 영웅인 오(吳)나라 주유(周瑜)가 위(魏)나라 80만 대군을 맞아 화공(火攻)으로 물리친 장소는 호북성(湖北省) 가어현(嘉魚縣) 북동 양자강(陽子江) 남안이다. 그러나 소동파가 를 지은 곳은 이와는 상관없는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崗縣) 성 바깥, 자신이 유배되어 있던 황주(黃州)에 있는 ‘적벽기(赤壁磯)’라는 조그만 붉은색 언덕이었다. 그 아래로 흐르는 개천은 작은 어선 하나 정도 가까스로 띄울 수 있는 정도의 작은 개천이었는데 그마저도 최근엔 인근 지역의 댐 공사로 수몰돼 사라지고 없어졌다. 이 궁벽한 시골의 작은 개천에 배를 띄우고는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객이 말하길, ‘달은 밝고 별빛은 드문데, 까막까치 남쪽으로 날아간다(月明星稀 烏鵲南飛)’, 이는 조조(曹操)의 시가 아닌가요?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은 서로 엉겨, 울창하고 푸르니, 이곳은 바로 조조가 주유에게 곤욕을 치른 적벽 아니던지요?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순풍을 타고 동으로 흘러가니, 늘어선 뱃전은 천리요, 깃발은 하늘을 가렸다지요.” 궁벽한 시골의 개천에서 삼국시대 위대한 전투를 상상하며 지은 , 이것은 어쩌면 당시 자신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였던지도 모르겠다.
- 2016-10-06 08:51
-
- 며느리 시집보낸 퇴계에서 인간애를 느끼다
- 어느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수업 첫시간에 학생들에게 아는 철학자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외국의 철학자를 들먹이고 아주 드물게 퇴계 이황선생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선조보다 외국의 누구를 알아야 지식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합니다. 퇴계는 조선시대 성라학의 대가입니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너무 깊고 높아 배우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문보다도 그의 인간미에 반하여 그를 존경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계의 손자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는데 년년 생이라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고향집 하녀 학덕이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손자며느리가 듣고는 유모로 보내달라고 퇴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엄하게 나무랍니다. “남의 자식을 죽이면서 제 자식을 살리는 것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그리고는 증손자를 위해 약을 지어 보내고 또 증손자가 병이 있음을 듣고 괴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손자에게 보냈습니다. 왕자도 유모의 젖을 먹고 양반이 유모를 들이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 젖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증손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취한 행동은 위대합니다. 결국 이 아기는 증조부인 퇴계를 보지 못하고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 둘째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아들의 죽음도 슬픈 일이지만 자식도 없이 한평생 과부로 살아야할 며느리가 큰 걱정입니다. 여필종부, 부창부수, 삼종지도 의 봉건적인 조선시대에 여인의 재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이렇게 재혼금지라는 제도가 강하게 된 이유가 과부가 재혼하면서 배속에든 아이가 전 남편의 자식인지 지금 남편의 자식인지가 아리송한 일이 생기자 1477년에 ‘과부제가급지법’(1896년 감오경장 때 폐지) 이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사대부 출신이라 해도 과부로서 재가하여 낳은 아들이라면 관직이 철저히 봉쇄되었습니다. 반면 과부로서 평생 수절하고 정절을 지키면 국가유공자에게 포상하듯 기념비를 하사하고 수절한 과부의 희생을 그 가문과 후손에게 혜택으로 보상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퇴계는 며느리의 인간다운 삶을 고려하여 사돈을 불러서 둘째며느리를 데려가도록 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통념을 깬 것입니다. 며느리의 재가는 가문의 큰 수치이지만 퇴계는 가문보다는 며느리의 삶을 걱정하고 결행 했습니다. 사돈도 퇴계의 뜻을 이해하고 은밀하게 그녀를 재혼시켰다고 합니다. 퇴계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어느 기와집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퇴계는 주인집에서 차려준 밥상이 고기보다 채식을 좋아하는 자신의 식성에 맞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아침 식사 후 주인이 예법대로 버선을 선물하였는데 버선의 크기가 자신의 발 치수에 정확함을 알고 이 집의 안주인이 자신의 며느리였었음을 눈치를 챘지만 서로의 체면을 생각하여 모른척했다고 합니다. 주인집을 멀리 떠나와 퇴계가 뒤돌아보니 자신의 둘째며느리가 담 모퉁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배웅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재가 사실이 알려지면 퇴계 선생과 그 가문이 받아야 할 치욕은 이만저만 한 게 아닙니다. 지금 까지도 퇴계 후손들은 며느리의 재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는 목숨도 버리지 않는 유교문화의 조선사회에서 그가 어렵게 택한 결행은 인간 사랑이고 가족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너무 신과 같아서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를 가까이 닮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내가 한발만 더 내 디디면 손에 잡힐 듯한 우리의 영웅이 필요합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퇴계의 삶에서 나는 따뜻한 사람의 정을 느끼고 그를 존경합니다.
- 2016-10-04 10:59
-
- 47 로닌 - 일본 정신의 사무라이 영화
-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영화라서 봤다. 이 영화에서는 혼혈 사무라이로 나오는데 원작보다는 흥행의 목적으로 시나리오를 수정해서 출연시킨 것 같다. 미국의 칼린 쉬 감독이 만들었고 사무라이 대장 역에 사나다 히로유키, 영주의 딸 역에 시바사키 코우가 나온다. 여우에 홀려 재판관으로 방문한 사람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영주는 쇼군으로부터 할복을 강요당해 죽는다. 영주를 모시던 사무라이들은 즉각 반격을 자제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숨어 지낸다. 드디어 반격의 준비가 갖춰지고 기습 공격으로 적들을 물리친다. 쇼군은 이들의 행위를 용서하면서 할복의 기회를 준다. 47인의 사무라이들은 사무라이 대장의 아들을 제이하고 장렬하게 자결한다. 여우가 둔갑하고 칼 싸움이 볼만한 영화로 타임 킬링 용이지만, 일본에서는 이 일화가 영웅담으로 남아 일본 정신을 심는데 좋은 작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주군을 향한 충성심, 그리고 자결행위가 당연한 영광으로 치는 것이다. 실화인지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매년 12월에 이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카이로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와 영주의 딸의 사랑 이야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칙칙한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보다는 여자도 출연시켜 사랑 이야기를 넣어야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카이도 47인의 사무라이 일원으로 영광스러운 자결에 참여한다. 할복자살을 영광이라고 대우하는 일본의 정신이 섬뜩하다. 일본의 정서는 문(文)의 정서인 우리와 비교할 때 무(武)의 정서이다. 사무라이를 영웅으로 치는 정서 속에 일본은 일찍부터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싸웠고 미국까지 건드렸다가 패망한 나라이다. 일본의 우익은 아직도 그 향수를 못 잊어 재무장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가미가제 정신도 충성심을 강요하며 애꿎은 젊은 군인들을 자살 공격으로 내몬 정신적 기초가 되어 있으며 지금도 이들을 우상화하고 있다. 왕이 있던 우리 역사에서도 충신은 있었지만, 무관으로 그만한 충성심을 보인 예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무관이 득세했던 고려시대에도 이렇다 할 스토리가 없다. 무관들의 집권투쟁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무관인 이순신 장군의 예를 봐도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과는 다르다. 우리 역사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관리는 많지만, 할복자살을 한 역사는 없다. 할복자살이란 얼마나 끔찍한 행위인가. 그런 정서가 우리 독립군들을 처형할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호시탐탐 남의 나라를 침략할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라이다.
- 2016-09-19 10:21
-
- [BML 칼럼] 짧고 깊게,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는 잠
- 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 2016-08-24 11:30
-
- [동년기자 칼럼] 6월에 생각하는 어느 소녀의 기억 1. 2. 3
-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 2016-06-15 14:48
-
- [해외투어]중세 모습 그대로, 루마니아 브란성
- 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고 여행객들로 북적댄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는 고성을 만난다. 계단 초입에 감시탑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관람하게 되어 있다. 뾰족한 성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멋진 성이다. 건물은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실내는 좁은 계단을 따라 층별로 전시관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쇠창살, 철도끼 등 중세시대 고문기구 등도 있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그렇다면 이 성은 실제로 드라큘라와 연관이 있을까? 브란성은 독일 기사단의 요새(1212년)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그 무렵 드라큘라가 이 성에 잠시 머문 것(1450년대)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이 성은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드 여왕에게 헌정(1920년)되었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성 소유권을 박탈(1948년) 당했다. 그 이후 브란성은 방치돼 파손됐다. 루마니아 정부가 1956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 개보수를 거침에 따라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 후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후손들은 흡혈귀 성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흡혈귀가 된 속사정 그렇다면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이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영웅이었던 드라큘라가 왜 흡혈귀가 되었을까? 드라큘라가 흡혈귀가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소설 때문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괴기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우리는 역사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큘라의 일대기를 들여다보자. 드라큘라(1431~1476)의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2세다. 아버지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기에 사용된 문장(紋章)이 ‘드라큘’이다. 루마니아어인 드라쿨(Drakulić)은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 크네아지아다.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시기쇼아라(Sighişo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곳에는 생가가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는 그 당시 루마니아인이 아닌 게르만족 후손인 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상권을 장악했다. 루마니아 현지민들은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당시 드라큘라의 아버지는 이들과 무역 협정을 맺고 도시 내부에 살 수 있었다. 형제는 형(미르체아), 본인(블라드), 남동생(라두) 3남이었다. 드라큘라는 어릴적(11살 경) 오스만 제국에 동생(4살)과 함께 볼모로 보내졌다. 드라큘라는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른 종족에 의해 암살(1447년, 드라큘라 16살 경)되었고 형은 뜨거운 인두에 눈을 잃고 생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드라큘라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가 된다.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왈라키아 타르고비스테(Targoviste)를 수도로 삼는다.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여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고 영주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툭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을 죽여 버리는 하극상은 끊이질 않았다. 드라큘라는 왕궁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나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정적인 보야르(boyar, 당시 최상층의 귀족) 계급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활절 날(1457년), 그들을 왕궁으로 초대, “지난 50년간 몇 명의 군주를 모셨냐‘고 질문했지만 너무 많이 갈아치워 그들의 답변을 못하자 전부 다 죽였다. 대략 500명 정도가 말뚝에 박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방법이 하도 잔혹해 체페시(Ţepeş,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다. 브란성 근처 산정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할 때 보야르 계급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을 인부로 이용했다. 이 포에나리 요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어 드라큘라는 색슨족에게 전면전을 통보한다. 이 길을 상업로로 이용하려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한다. 하지만 색슨족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블라드의 정적들을 지원했다. 드라큘라는 군대를 이끌고 색슨족의 거점도시였던 브라쇼브(Brasov)로 진격했다.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포로들을 다 꼬챙이에 꽂아 죽였고 그대로 방치했다. 드라큘라가 그곳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숫자였다. 드라큘라의 피의 장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시탐탐 서방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결심한다. 오스만제국의 사절단이 왔을 때, 터번을 벗지 않자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터번 쓴 머리에 못을 박아 죽였다. 1461년, 오스만과 왈라카이는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이듬해(1462년)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들 전부 코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3배 이상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드라큘라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는 몰리기 시작한다. 포에나리 성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부인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수많은 수하 장군들을 잃었다. 드라큘라는 편자(말발굽형의 쇠붙이)를 역 방향으로 이용해 겨우 탈출한다. 하지만 오스만 군과 맞서 싸우다 술탄의 친위부대 예니체리들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목이 잘렸다. 향년 45세. 서기 1476년의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요한 여행지들 유럽 발칸 반도에서도 동유럽 쪽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선 여행지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반대하는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는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라 칭하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진 국회의사당(1984년) 등 공산당 정권이 만든 유명 건축물들. 그것 말고도 도심 속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은 여행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킨다. 또 ‘시나이아(Sinaia)’, 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를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Carpathian)의 진주’라 불린다. 왕가의 여름 별궁인 펠레쉬(Peles, 루마니아 국보 1호), 펠리쇼르 성이 인기다. 또 시기쇼아라에는 드라큘라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 등, 올드 타운은 마치 중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좀더 사실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직항은 아직 없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경유해 가는 방법이 있다. 그 외에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를 거쳐 부쿠레슈티로 갈 수 있다. 도하까지 약 10시간, 부쿠레슈티까지 약 5시간 걸린다. 현지교통 수도 부큐레슈티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 외 시외 이동은 열차, 버스 등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브란성을 가려면 부큐레슈티에서 열차를 이용해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브라쇼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2, 16번 버스를 타고 Stadionul Tineretului에서 하차 후 브란성 가는 버스(4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에서 버스나 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음식정보 음식이 제법 맛이 좋다.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 있다. 그 외 옥수수를 재료로 이용한 음식,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 등이 있다. 루마니아 전통 도넛인 파파나스(Papanas)도 있다. 특히 부큐레슈티에서는 전통 깊은 건축물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구시가지 왕궁 옆에 있는 마눅 여인숙(hanul lui manuc, 1808년)은 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또 1879년에 오픈한 카루 쿠 베레(Caru cu Bere)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이다. 원래는 왕족의 만찬장소였던 이곳은 차우셰스쿠의 큰아들이 자주 파티를 열던 곳이란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다. 루마니아 문화 루마니아 민속 예술, 전통음악과 춤, 목공예, 도자기 공예, 건축, 뜨개질, 자수, 보석가공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스포츠 중에서는 체조를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가해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아직도 유명하다. 루마니아가 체조에 강한 이유는 신 식초 성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그들의 식생활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미인들이 아주 많다. 화폐정보 레이(LEI)를 쓴다. 1유로가 4.4레이 정도다. 환전할 필요 없이 ATM기를 이용하면 된다. 주류 정보 포도주(VIN), 추이카(TUICA)라는 특유의 과실 증류주가 유명한데 자두가 좋다. 포도주는 아주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이미 서구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다. 루마니아 포도주 박람회(VIN-EXPO)가 열린다. 그 외 보드카, 위스키, 럼, 다양한 맥주 등이 생산되고 있다. 포도주는 겨울철에는 데워 먹는 특징이 있다. ‘뜨거운 포도주(Vin fiert)’는 겨울 추위나 감기 등을 이기기 위한 민간요법이다. 숙박 정보 가격이 비싸지 않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유명한 숙박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포인트 수도는 걸어서 다니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 간 이동은 시설이 열악한 편이다. 서두르지 말고, 관광도시마다 1~2일 정도 지내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이 키 포인트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원하는 음식과 술은 멋진 레스토랑을 골라 먹도록 하자. 싼값에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방법이다. 관광지는 생각보다 눈요기를 할 곳들이 아주 많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6-09 14:38
-
- [하태형의 한문산책] 이제 지음(知音)을 잃었으니
- 우리는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친구를 일컬어 ‘지음(知音)’이라 부른다. 중국 춘추시대 금(琴)의 명인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죽고 나자 ‘파금절현(破琴絶絃)’, 즉 자신의 음악을 더는 이해해줄 마음의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므로 금을 부수고 줄을 끊어버린 뒤 다시는 금을 잡지 않았다는 고사이다. 이 고사에서 비롯된 지음이라는 단어는, 곧 자신을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잘 이해해 주는 세상의 하나뿐인 친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지의 영웅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신하이자 친구였던 건안칠자(建安七子)를 전염병으로 잃자, ‘통지음지난우(痛知音之難遇: 지음을 다시 만날 수 없음에 애통하고...)’라 읊었고, 두보(杜甫)는 ‘이 사람 다시 볼 수 없으니, 장차 늙어 지음을 잃어 어찌할꼬(斯人不重見 將老失知音)’라 노래하였다.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추풍유고음(秋風惟苦吟) 세로소지음(世路少知音)’, 즉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워 노래하노니, 이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지음이 없구나’라고 독백하였던 것이다. 중국 위진시대 서진(西晉)에 손초(孫楚)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에게는 왕제(王濟)라는 절친이 있었다. 재주는 있었으나 성격이 나빴던 손초를 유일하게 알아주었던 왕제는 당시 황제의 사위인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손초는 내심 세상에 나가 출세를 하고 싶었으나 당시 유행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예를 따라 은거하겠다고 마음먹고 왕제에게 “이제 은거하여 자연에서 침석수류(枕石漱流: 흐르는 물로 이를 닦고 돌로 베개를 삼다)나 해야겠네”라고 말하려는 것을 잘못하여, ‘수석침류(漱石枕流: 돌로 이를 닦고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제가 “흐르는 물로 베개를 삼고 돌로 이를 닦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고 하자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손초는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허유(許由)처럼)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연마하기 위함이라네”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후 왕제가 대중정(大中正)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 그의 하급관리가 관리를 추천하는데, 손초를 평가할 때에 이르자 왕제가 “이 사람은 그대가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하겠노라”며 직접 기록하길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어 특별히 발군의 인재[天才英博 亮拔不群]”라고 써 주었다. 이 덕분에 손초는 후일 풍익태수(馮翊太守)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성격이 오만하고 고집이 세었던 손초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으나 오직 왕제에게만은 진심으로 감복하고 존경하였는데, 아내가 죽어 상복을 벗을 때 즈음 자신의 마음을 적은 시를 왕제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본 왕제는 ‘시문이 정에서 생겨나는지, 아니면 정이 시문에서 생겨나는지 모르겠구나![未知文生於情 情生於文]’라며 감탄했다고 전한다. 위의 고사에서 전하는 ‘수석침류(漱石枕流)’는 이후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이기도 한다.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1906년 이름이 바뀌기 전 본래 이름이 수옥헌(漱玉軒)인데, 이 ‘수옥(漱玉)’이라는 단어의 원래 출전이 바로 수석침류로, 수석(漱石)을 수옥(漱玉)으로 바꾼 것이다.
- 2016-06-07 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