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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과 인생까지 가꿔주는 직업 정원사를 아시나요?
- 사실 정원사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직업은 아니다. 좁은 주거 지역에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국내 대도시의 특성상 대다수의 한국인은 정원이 없는 주거 형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저 사다리에 올라 큰 나무의 모양을 전정가위로 다듬는 영화 속 등장인물이 떠오르는 정도다. 그러나 이제는 아파트에서도 작은 정원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고, 공원이나 화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원사는 최근 주목받는 직업이 되고 있다. 콘크리트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도심 속에 언제부턴가 공원이 들어서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실제 숫자로도 확인된다. 올 3월 서울시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서울 시내에 새로 조성된 공원·녹지는 197개로 나타났다. 총 면적은 188만㎡로 여의도공원의 8배와 비슷한 수준이다. 도시 내의 녹지를 넓히려는 목적은 다양하다. 가장 먼저 지역 주민의 심리적 안정이 가장 크다. 실제로 녹지 공간의 유무는 노령층의 뇌 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해외의 연구사례도 있고, 올 초 서울대학교 연구진은 녹지가 적은 지역에 살면 고지혈증에 걸릴 가능성이 1.5배 높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도심의 폭염이나 열대야와 관련이 있는 열섬현상을 막기 위해서도 녹지를 계속 늘려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녹지 공간의 확대는 결국 관리 인력의 수요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 직업이 바로 정원사다. 각 지자체에서 앞다퉈 양성 정원사에 대한 개념이 최근 들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개인 정원이나 공공기관의 녹지공간을 관리해주는 개념이 컸다. 조경은 건설과 함께 이뤄지고 정원사는 관리만 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원사의 업무 범위가 넓어졌다. 경기도와 함께 시민정원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신구대학교 식물원 박종수 과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에는 정원사의 개념이 확대돼 정원 조성을 위한 디자인과 식물의 구성을 기획하고, 식수(植樹)와 관리 능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을 말하고 있어요. 정원의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엔 정원사가 모든 과정에 관여하고 있어요.” 도시의 녹지가 늘어나면서 각 지자체에는 시민정원사 혹은 시민가드너 양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역 주민에게 화초 등 식물의 생육에 대한 정보와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대신, 일정시간 이상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를 통해 이들을 지역주민을 위한 녹지 공간 형성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자격증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국가기술자격으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조경기능사, 원예기능사, 화훼장식기능사가 있다. 최근 함께 각광을 받고 있는 도시농업과는 개념이 다소 다르다. 도시농업이 ‘생산’에 초점을 맞춰 건물 옥상 등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유휴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라면, 정원사는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녹지를 구성하는 일을 한다. 이러한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지자체는 경기도다. 경기도는 2013년 제1기 시민정원사 84명의 인증을 시작으로 경기도 시민정원사 인증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경기도는 오는 2023년까지 3000명의 시민정원사를 배출할 계획이다. 경기도에서 시민정원사가 되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기본 교육과정인 조경가든대학을 이수하거나 대학에서 관련학과를 졸업해야 지원이 가능하다. 대신 경기도민에게는 75만원의 교육비 중 50만원을 지자체에서 지원한다. 시민정원사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년간 96시간의 자원봉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들은 수료 후 지자체에서 관리가 필요한 녹지로 파견돼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일부 교육기관에 조성된 ‘학교숲’이나 마을의 공한지나 자투리땅의 공원화 등에 참여한다. 땅의 공원화는 범죄율을 낮추는데도 도움이 돼 각 지자체에서는 공원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식물의 식생에 관한 교육이 청소년의 교화에도 긍정적 역할을 해서, 전북경찰청 등 일부 기관에선 지역 교육기관과 함께 원예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시민정원사 혹은 시민가드너 교육과정은 지자체별로 조금씩 다르다. 각 지자체별로 호칭도 다르고 교육시간이나 운영방식도 지역 현실에 맞추다 보니 제각각이다. 그러나 지역에 자원봉사 형태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대부분 비슷하다. 교육 후 소득 기대는 아직 ‘흐림’ 화초의 재배나 관리 등은 시니어의 주된 관심 분야이다 보니 실제 교육과정에서도 수강생들이 대부분 은퇴자들이다. 한 지자체 교육 담당자는 “정원을 가지고 있는 참가자가 많다 보니 독특한 교육문화가 형성되고, 커뮤니티의 결속력도 상당합니다”라고 말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경쟁률이 높은 곳도 있다. 일부 지자체는 경쟁률이 2대 1에서 3대 1가량이나 되어 교육생보다 대기자 수가 더 많다. 재수, 삼수가 기본인 곳도 있다. 박종수 과장은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정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1년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이기 때문이죠. 또 아름다운 정원을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꽃의 크기, 키, 화색(花色)까지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원에 흔하게 심는 팬지만 해도 50종이 넘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교육 효과는 상당하다. 정원사 교육은 생활 속에서 활용이 쉽기 때문에 개인 정원에서 화초부터 실습해볼 수 있다. 또 심리적 변화는 덤이라고 귀띔한다. 앞으로 정원사의 수요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기본적으로 녹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다양한 활용 방안이 개발되고 있기 때문. 각 지자체에서 도시정원사 자격을 앞다퉈 도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는 대구시의회에서도 시민정원사 인증제 도입이 발의된 상태다. 문제는 시민정원사를 바라보는 지자체의 시선이다. 늘어나는 녹지나 공원에 비해 관리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한정된 예산으로 ‘열정페이’만을 강요하는 구조로 정책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대부분의 작업을 자원봉사에만 의존하는 구조는 결과적으로 직업으로서 정원사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현장의 교육 관계자들도 아직까지 취업이나 창업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부기관이나 기업의 수목관리자로 일부 취업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일자리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소수이지만 화초 판매와 생육 방법 교육을 함께하는 플라워카페를 창업하는 사례도 있다.
- 2017-08-0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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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와 함께한 성수동 카페거리 데이트
- 지금까지 문화공간 취재를 다니면서 한 번쯤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8월호의 문화공간을 성수동 카페거리로 선정하면서 이곳과 인연이 깊다는 분과 함께했다. 최근에 등단한 신인 수필가이자 전 아쿠아리움 부사장 손웅익 동년기자다. 화학냄새 진동하던 공장지대에서 카페거리로 탈바꿈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카페거리. 멋진 남자와 함께한 커피 향 가득한 거리 데이트에는 옛 추억도 함께 있었다. 성수동 거리를 걷다 성수동이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수제화 장인들의 구두를 판매하는 성수수제화타운(SSST)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다. 지하철과 버스 등 광고판을 통해 성수동이 어떤 곳인가를 인식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제화산업은 1950~1960년대 서울역 근처 염천교(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에서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일명 ‘싸롱화’ 전성기였던 명동시대를 거쳐 1990년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싸롱화 수요가 줄면서 서울 안에서 비교적 땅값이 낮았던 성수동으로 구두 관련 공장들이 이동했다. 그리고 버려졌던 옛 공장과 창고가 새로운 문화 공간과 카페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향기를 나누는, 문화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서울의 두물머리, 성수동 옛이야기 한양대 건축과 77학번 출신인 손웅익씨에게 성수동은 각별하다. 한양대 시절 화양동과 성수동을 지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발전상을 보며 살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줄곧 공장지대였던 성수동. 이곳에는 건축과 시절 학내 모임인 공간연구회가 있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 “바로 위 선배 학번에 부자가 많아서 아파트에 전세 얻어서 작업실로 썼어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건축작업보다는 선배들이 카드게임하시면 라면 끓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그리고 성수동이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쳐지는 양주의 두물머리 같은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성수동은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지역과 건대, 세종대, 한양대 지역을 감싸고 있다. 한강 개발 이전에는 장마철 이 지역의 둑이 범람하느냐 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둑이 터지기 직전에 비가 그치곤 했지만 거기 문제가 뭐냐면 중랑천 변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거기서 살았어요. 집들이 마치 해변에다가 지어놓은 것 같았어요. 비가 오면 집들이 해변에 있는 것처럼 잠겼었죠. 집이 떠내려가면 하룻밤에 집을 한 채씩 지었어요. 블록을 쌓고 서까래는 허접한 나무를 쓰고 기름종이를 붙이고 말이죠. 조세희의 에 나오는 집이 바로 그런 집들입니다. 제가 당시 산 증인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온 만큼 집이 떠내려갔다. 그러면 전기도 없던 시절 횃불을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중랑천 상류인 의정부 지역에서 돼지, 닭과 함께 오물이 쓸려 내려오기도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방에 누워서 밖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여요. 블록 사이사이 구멍이 뚫려 있었거든요. 그러면 겨울에는 얼마나 또 추웠겠어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모두의 거리’란 이름의 성수동 수제화 거리 인터넷 사이트는 구두거리와 관련한 정보를 비롯해 맛집과 카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seongsushoes.modoo.at ■청계천과 피맛골에 대한 추억이 있으신 독자여러분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습니다. 이메일로 신청 부탁드립니다. bravo@etoday.co.kr
- 2017-07-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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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다방, 진화하다” 8월의 핫플레이스, LA 스타벅스 리저브
- “언제 LA에 오면 스타벅스 리저브에 꼭 한번 들러봐!” 은퇴 후 목말랐던 문화생활을 원없이 즐기고 있는 한 선배가 커피 맛 좋다며 야단스럽게 추천하던 곳이었다. 안 그래도 비싼 커피를 ‘리저브’라는 이름을 붙여 더 비싸게 팔아먹는다며 삐딱선을 탔었지만, 사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손에 쥐고 하루를 시작하는 처지라 내심 궁금하던 차였다. 날이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5번 고속도로의 교통 체증을 뚫고 2시간 여 만에 LA에 입성한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선배의 권유대로 스타벅스 리저브에 들러보기로 했다. 또 언제 올지 모를 일이었고 지친 심신을 달래는 데는 에스프레소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스타벅스 리저브(Starbucks Reserve)는 2014년 시애틀 1호점을 시작으로 선을 보인 스타벅스 프리미엄 브랜드다. 이곳에서는 단일 원산지에서 극소량만 재배되는 스페셜티 커피를 맛볼 수 있는데 한정된 양이다 보니 일반 스타벅스 매장에는 공급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리저브 매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커피다. 현재 미 전역에 21개의 매장이 있고 그중 캘리포니아에는 LA를 비롯해 세 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는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60여 개나 된다고 하니, 오히려 본토에서 리저브 커피 마시기가 어려운 셈이다. 코리아 타운을 벗어나 라 브레아 길에 들어서자 위풍당당 LA 스타벅스 리저브가 한눈에 들어온다. 별 모양과 함께 그려진 이니셜 ‘R’은 초록색 인어 아가씨보다는 확실히 고급스럽다. 스타벅스 리저브는 클래식하면서도 감각적인 인테리어로 유명한데 LA점 역시 소문대로였다. 문을 열자마자 직사각형의 매장이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웅장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뿜어내고 진한 오크나무와 구리가 조화를 이룬 벽면은 멋스럽기가 그지 없다. LA 메트로 지역에는 이미 900여 개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지만 리저브 매장은 남가주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다. 한국의 ‘스벅덕후’(스타벅스 마니아)들은 미국을 여행할 때 시애틀과 LA 리저브에는 꼭 들려 인증샷을 남긴다고 한다. 한국에 더 많은 리저브 매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성지순례와 같다고나 할까. 사실 스타벅스 리저브를 이야기하는 데 시애틀이 빠질 수는 없다. 1971년 수산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 탄생한 스타벅스 1호점과 함께, 2014년 탄생한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 테이스팅 룸(Starbucks Reserve Roastery and Tasting Room)’은 시애틀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약 1400㎡ 규모의 시애틀 점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매장이다. 이 매장은 CEO 하워드 슐츠가 구상하는 데만 10년, 공사비용으로 약 220만 달러를 투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슐츠 회장은 “스타벅스 리저브가 스타벅스의 미래”라고 선언한 바 있다. 시애틀처럼 으리으리한 규모는 아니지만 LA에서도 리저브의 맛과 멋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타벅스 리저브의 매력은 희귀한 스페셜티 원두와 리저브만의 독특한 추출 방법이다. 원두는 그때그때 확보하는 양과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날 LA 매장에서는 ‘르완다 아바쿤다카와’, ‘페루 산이그나치오’, ‘말라위 사블 팜’, ‘파푸아뉴기니 루트 넘버원’ 등의 원두를 선보였다. 원두뿐 아니라 추출 방식도 선택할 수 있는데, 스타벅스 리저브에서만 사용하는 클로버 압착기(진공압착)를 비롯해 사이폰(진공여과), 케멕스(여과지추출) 등이 있다. 비주얼 면에서는 단연 사이폰이 돋보인다. 실험실 비커 모양의 진공관에 커피를 담아 끓여내는 모습은 마치 바리스타의 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맛은 클로버와 케멕스가 좋다는 평이다. 고민 끝에 원두는 블랙티의 향을 느낄 수 있다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아바쿤다카와로 결정하고 클로버 머신으로 뽑아낸 더블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원두를 선택하면 담당 바리스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바리스타는 고객이 주문한 커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고 고객은 원두를 갈아 추출하는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뒤로 물러나 커피를 기다려도 무방하지만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이 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하다. 매장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동안 주문한 커피가 완성됐다. 일회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근사한 컵 또한 만족스럽다. 진한 더블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평소보다 무려 3배의 값을 치렀기 때문일까. 과연 목을 타고 넘어가는 깊은 에스프레소 향은 특별했다. 35℃를 육박하는 날씨와 교통 체증에 지친 심신에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는 온전히 커피만을 즐기기 위해 테이블을 찾아 앉았다. 영화배우처럼 생긴 백인 노신사가 다가와 테이블을 나눠 써도 되겠냐고 정중하게 묻는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할리우드가 지척이고 LA에서 가장 물 좋다는 베벌리힐스가 가까이 있는 곳, 운 좋으면 유명인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위를 살폈다. 휴대용 컴퓨터를 펴놓고 열공 중인 젊은이들 틈에는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도 있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니어들도 제법 많았다. 미국에 살면서 참으로 익숙해진 것 중 하나가 인종 불문, 남녀노소 모두가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곳 리저브에서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밖은 폭염의 날씨에 차가 막혀 짜증이 나든 말든, 이곳은 뮤지컬 영화 의 한 장면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과정, 추출하는 과정, 마시는 과정 모두를 즐기고 있다. 앞에 앉은 노신사도 휴대용 컴퓨터에 뭔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다. 스타벅스 리저브를 강추하던 선배도 아마 저런 모습으로 이곳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일상의 소소함을 즐기면서 말이다. 마시고 있는 커피 사진과 함께 선배에게 좋은 곳을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카톡을 보냈다. 곧 답이 날아왔다. “10달러로 즐기는 최고의 사치… 마음껏 즐기시오. 곧 다시 퇴근길의 고속도로를 타야 할 테니….”
- 2017-07-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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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바꾼 도시,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 2017-07-1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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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상희 헤어팝’ 이상희 원장
- 그녀는 뽀얗고 하아얀 뭉게구름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색다르고 기발한 발상이 피어오른다. 집중해서 듣자니 성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이상희 헤어팝’의 이상희(李相熙·56) 원장. 직업은 미용사인데 그녀 인생에서 봉사를 뺀다면 삶이 심심할 것만 같다. 손에 익은 기술을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니 말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란 말에 백만 개의 하트풍선이 ‘뿅뿅’ 터지는 그녀의 환한 얼굴과 마주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하루가 감사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감사해요. 저는 되게 감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감사’라는 단어를 꺼낸다. 열 손가락이 성한 가운데 기술을 배운 것도, 그 기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감사하단다. “미용기술을 배울 때 돈만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한 달에 네 번 봉사를 간다면 나머지 시간은 봉사를 가기 위해 미용실에서 일하는 시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제 이름이 서로 ‘상’에 빛날 ‘희’거든요. 말 그대로 상희답게 사는 거죠.” 어려운 이들을 만나면 뭔가 해줄 수 있어 좋고 자신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후배들이 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것도 참 좋은 일이라고. 이상희 원장을 만난 것은 5월 말. 본인 스스로가 정한 인생의 안식년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미용실을 계속하면 쉴 수 없겠더라고요. 원래 하던 넓은 미용실을 4월 30일까지만 하고 5월 1일 철거했어요. 저와 오래 일했던 디자이너들이 일할 곳을 마련해 지금의 아파트 상가로 옮겼어요. 이성적으로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철거하던 날 잠이 안 오더라고요. 안식년이라 해도 두 손 다 노는 게 아니라 그런지 다음 날부터는 잠이 너무 잘 왔어요.” 그런데 그 안식년이란 것 말이다. 대부분 휴식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한다. 이상희 원장은 그 하고 싶다던 일(?)에 더 빠져보려 미용실 운영 대부분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벌여놓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 당장 앞두고 있었던 새터민 결혼식에 피부 관련 사업, 매달 있는 봉사, 새로운 봉사, 미용인의 처우 개선 등 쌓이고 쌓인 일을 보니 이게 안식년인가 싶다. 봉사와 업(業)이 하나인 인생을 구상하다 전라북도 정읍 출신인 이상희 원장은 성공하려고 미용계에 입문했다. 미용실에 갔더니 기술을 배우면 서울도 갈 수 있고 해외도 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솔깃한 말에 응시한 미용 자격증 필기시험에 떡하니 붙었고 곧바로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학원 안 다니고 미용실에서 연습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 데리고 가서 머리 잘라주면서 두세 달 정도 훈련했고 합격 1년 정도 후에 상경했죠.” 서울에 오자마자 당시 유명했던 미용실에 취업한 이상희 원장은 일주일을 못 다니고 그만뒀다. 줄지어 서 있는 거울에 헤어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닌 번호가 붙어 있었다. “큰 미용실 가야 성공한다기에 들어갔는데 거기선 사람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제가 시골 애였지만 자존감은 있었거든요.” 서울살이 초반 20대의 이상희는 걷기도 많이 걸었다. 집이 있던 상도동을 지나고 한강다리 건너, 숙대, 남대문시장.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했다. “신호등 앞에 있는데 파마가 막 말아지는 거예요. 다시 미용을 해? 돈 많은 남자 만나서 미용실을 열어? 가난해서 걷고 고민하면서도 걷고. 그렇게 내린 결론이 나를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성공하겠다는 거였어요.” 머리 자르는 미용기술 외에도 머리를 올리는 ‘업스타일’에 ‘메이크업’ 기술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니던 미용실 원장과 선배, 동료에게 양해를 구해 시간을 마련했고, 잘살던 친구에게 학원비를 부탁해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했다.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이고 딱딱하던 시대였지만 업무시간을 배려받고 학비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더욱 완벽한 미용사로서 비상을 꿈꿨다. “후배들에게 돈과 시간이 없어서란 변명을 하지 말기를 당부해요. 꼭 해야 할 일이고 열정이 있으면 누구든 도울 테니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해요.” 20대는 미용사 이상희로서 삶을 채우는 시간이었다면 30대는 그것을 바탕으로 존중하고 돕고 깨치며 살아갔다. ‘높임말’과 ‘봉사’는 철칙 서른 살의 나이, 자신의 이름을 단 미용실을 열었다. 개업과 함께 이상희 원장이 철칙으로 삼았던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직원들 사이에 높임말 사용이었다. 당시는 손님이고 미용사들이고 서로에게 함부로 하던 시절이었다. “저희 때는 디자이너와 스태프가 같이 앉아 밥도 안 먹었어요. 솔직히 미용기술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 차이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픈할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어요. 혹여 함부로 하는 손님이 있으면 더 예의를 갖춰 말했어요. 구두며 유니폼도 갖춰 입었습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바꿨어요.” 두 번째는 바로 봉사다. 한 달에 한 번은 전 직원이 봉사하기로 했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좋은 일에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역 그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 어려운 이웃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찾아서 봉사했던 곳이 가난한 마음의 집이라는 곳이었어요. 1990년대에는 메이크업이 아주 강할 때였어요. 장애우들이 저희를 보고 놀라서 숨는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번 가니까 친해졌어요. 봉사하다 보니 새터민과도 연결이 됐어요.” 어렵던 시절 동료들과 친구의 도움으로 메이크업을 배운 것이 두고두고 고맙다는 이상희 원장. 좋은 마음이 모여 얻은 기술이기에 봉사를 할 때 더없이 기분이 좋다. “미용실 열고 1년쯤 돼서 어떤 손님이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러시아 여자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민이 결혼식을 하는데 메이크업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요. 제가 메이크업을 한다는 걸 몰랐던 손님인데 말입니다. 당연히 좋다고 했죠.” 봉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놀이처럼 재미있고 기획력 있는 봉사가 이어졌다. 정부 지원이 어려운 틈새 청소년들을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산골 아이들을 위해 자전거도 사주고 고아원에 세탁기도 기증했다. “손님들에게 이건 꼭 약속했어요. 우리 미용실에 와서 머리를 하면 그 일부는 다른 사람들 위해 쓰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면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복을 받는 거잖아요.” ‘K뷰티’와 ‘뷰티엔젤’ 봉사의 중심에 서다 2000년대 중반에는 한·일 미용인 간의 세미나가 자주 있어서 일본에 갈 기회가 많았다. 그때 일본의 성년의 날과 우리나라의 성년의 날에 대한 의문과 고민이 일었다. “일본에 갔는데 일본 젊은이들이 기모노를 많이 입더라고요. 예쁘기도 하지만 그 나라 문화잖아요. 그런데 일본의 ‘성인식’은 공휴일인데다가 자치단체에서 큰 잔치를 열어요. 기모노 입고 화장과 머리를 하고. 이 모든 게 다 미용실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함께 일본에 방문하고 온 미용실 원장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위한 성년의 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메이크업과 머리손질은 미용실에서 도움을 주고, 한복은 당시 이상희 원장이 다니던 우석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미르’에서 만난 지인이 공급해주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다니는 손님한테 학교 대동제 때 성년식을 열어주겠다고 제안했어요. 단, 스마트폰으로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2011년 5월에 이틀 동안 저희가 준비한 성년식에 300여 명이 참여했어요.” 이 행사를 계기로 K뷰티디자인협회의 시초가 된 한국업스타일협회를 창설했다. “일본에 같이 다녔던 미용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좋은 일도 하고 미용실 손님도 우리 손으로 오게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한국업스타일협회는 이후 좀 더 의미를 넓혀 지금의 K(Korea)뷰티디자인협회가 됐습니다.” 이상희 원장의 또 다른 활동 영역은 뷰티엔젤이다. 미용실 개업 초기 직원들과 다니던 봉사가 주위 미용인들과 함께하는 한국미용봉사회로 이어지다가 누구든 함께 참여하는 연합봉사 형태의 ‘뷰티엔젤’로 탄생했다. 한국 봉사는 물론 캄보디아 미용기술 지원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미르’의 박문희 원장님이 의료진하고 캄보디아 봉사를 간다고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제가 ‘의사들은 너무 좋겠다, 다른 나라 가서 봉사도 하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봉사를 하게 된다면 저는 미용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진행이 됐어요. 그쪽 아이들 미용기술 가르칠 생각을 시작하니까 잠이 안 왔어요.” 캄보디아 봉사는 이상희 원장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됐다. 20년 넘게 많은 사람을 도우며 살아왔지만 처음의 그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봉사를 앞두고 느꼈어요. 왜 잊고 있었지? 친구 한 명의 도움으로 내가 20대를 살았는데 지금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해도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자식교육 시킬 수 있고 생활고에서 나아지니까 공부는 늦게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두 번의 캄보디아 미용기술학습프로그램을 통해 20명을 지원했다. 학비뿐만 아니라 숙식과 생활보조금까지 지원하는 사업이라 매년 할 수 없다고 한다. “캄보디아 아이들과도 약속한 것이 있어요. ‘너희가 성공을 하면 한 사람을 가르쳐라.’ 그게 약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캄보디아에 미용실 오픈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곳 아이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거죠.” ‘미용복지사’라는 직업 멋지지 않나요? 안식년이라는 본인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매달 13일 레드엔젤(청년응원단체)과 함께 K-컬처 콘서트를 개최한다. 2~3개월에 한 번씩은 다른 봉사단체와 연합활동도 한다. 캄보디아는 물론 올가을 새터민 합동결혼식도 계획 중이다. 미용인으로서의 고민도 남다르다. “미용은 보건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 사회에서는 복지의 개념입니다. 형편은 되는데 거동이 힘들어서 미용실에 못 오시는 경우가 있잖아요. 현재 미용은 이동 미용이 안 됩니다. 환자 외에는요. 미용복지사가 필요한 세상입니다.” 미용사의 새로운 직업에 대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고령화 사회 시니어들의 복지에 대한 깊은 배려가 담겨 있다. 이외에도 한류로 인해 유입되는 외국 여행객에게 보다 친근하게 한국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뷰티존’을 만들어 세계에 한국 문화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단다. 미용실을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손아당(蓀雅堂)’이라는 공간도 만들었다. 뜻 맞는 사람들이 모여 봉사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허브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근데 저는 생각하는 게 예쁜 거 같아요. 끊임없이 꿈을 꾸는 거 같아요. 내가 만일 미용 일에서 손을 뗀다면 내 직함을 뭘로 하지?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 이상희로 불리면 어떨까 하는데 되겠죠?” 뷰티풀 라이프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녀의 입에서는 이쁘다(예쁘다)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흘러나온다. 자주 쓰는 단어에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의 이쁜 마음이 영원하길 지지하고 응원한다.
- 2017-07-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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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파정’산책 코스 걸어보셨나요?
- 하루해가 참 길다. 새벽 4시 반 무렵이면 훤해져 저녁 8시가 지나야 어두워진다. 하루해가 가장 길다는 절기 하지가 6월 21일이었다. 특별한 취미활동이나 소일거리가 없는 시니어는 잠을 깨는 순간부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를 걱정하기도 한다. 특히 날씨마저 흐리면 더 그런 생각을 한다. 이런 날이면 움츠리고 앉아 있기보다 바깥나들이를 하면 한결 기분이 상쾌해진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함께 챙길 수 있는 나들이를 하면 금상첨화지 싶다. 나이 든 사람에게 많이 권하는 운동이 걷기다. 둘레길이 여러 지역에서 만들어져 많이 활용된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삭막한 도심의 길을 걷기보다 바람과 속삭이는 숲과 물과 산새 소리 들으며 걷는 자연 속의 걸음은 한결 가볍고 여유로운 시간이 될 터이다. 아울러 문화산책도 곁들이면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이룰 수 있어 좋지 싶다. 두 가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곳으로 석파정 산책 코스를 권하고 싶다. 석파정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다. 전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청와대 옆길을 돌아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좌측 언덕배기에 보인다. 석파정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보존이 잘 되어 현재 서울특별시 문화재 26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립 미술관인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석파정이 있는 지대가 미술관에 달린 사유지이기에 그렇다. 그 미술관도 여느 미술관과 다른 점이 있어 전시되거나 소장된 그림을 감상하는 문화 나들이도 되지만, 전시관 곳곳에 이벤트성 볼거리, 쉼터가 있어 관람을 여유롭게 재미를 더해준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예쁘게 만들어 놓았다. 영상과 함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음악감상실, 영화를 볼 수 있는 영상 상영 코너도 마련해두어 재미를 더해준다. 현재 “신사임당, 그녀의 화원”이 관람객의 관심 속에 9월 3일까지 특별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3층 옥탑을 거쳐서 외부로 나가 만나는 석파정 일원은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쉼터와 힐링의 장소로 등장한다. 옥상 잔디정원에서 조각품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북한산의 모습도 새롭다. 선이 아름다운 대원군의 별장 기와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둘러 서 있는 산책로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한다. 듬성듬성 만들어 둔 벤치에 앉아 중간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배경 음악 삼고 새소리 들으면 그곳이 낙원 같다. 가파르지 않은 산책길을 따라 느리게 느리게 걸으면 자연의 소리에 취할 수 있다. “물을 품은 길”이라 이름 붙여진 좁은 산책로 또한 정겹고 주변 곳곳에 세워진 아름다운 문구의 팻말이 인생을 배우게 한다. 그 문구 중의 하나인 기욤 뮈소의 에 나오는 구절이 가슴에 와닿았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우리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미술관 관람과 힐링의 산책을 하며 하루를 너끈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곳이지 싶다. 돌아오는 길에 경복궁 옆에 있는 사람 냄새 나는 통인시장에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면 행복한 하루가 되지 싶다. 필자는 올봄에 고등학교 후배인 대학교수이자 화가인 고등학교 후배의 안내로 처음 이곳을 다녀왔다.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어 안사람과 함께 친구와 가기도 했다. 며칠 전에는 필자에게 사진촬영법과 활용기술을 배우는 남녀 어르신 11분과 다녀왔다. 모두 즐거워하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하루가 되었다고 했다.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아우를 수 있는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산책 코스를 걸어보면 어떨까?
- 2017-07-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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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오래된 이발소 이야기
-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 근처 좁은 골목 끝, 작은 이발소 하나가 있다. 이발소 딱 하나 말고는 그저 사람 사는 오래된 집들이다. 간판도 떼버리고 없는 이 안은 늘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후미지고 주위에 상점 하나 없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들 찾아갈까. 전철이 오가는 바로 옆, 노래 후렴구마냥 ‘달그락, 철컥’ 전철 지나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들린다. 이발소에 들어선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아빠 따라 들어갔던 옛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10년 단골은 기본 요즘 동네 이발소를 본 적이 있던가. 대형 미용실이 생겨나더니 상남자의 성지와도 같던 이발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젠 필요가 없어 간판도 떼버렸다는 이곳은 ‘역전이용소’. 굳이 간판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봐도 ‘역전 이발소’이니 말이다. 앉아 있는 손님마다 물어보면 이발소와 10년 넘는 우정을 과시한다. 이 동네 남자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다. 손님들이 사는 곳도 다양하다. 멀리서는 충남 예산에서도 오는 손님이 있다. 37년 단골손님을 자처하는 정우석(89)씨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왔다. “여기에 다닌 지 30년이 넘었어요. 공화당이 망할 때부터 오기 시작했지. 내가 공화당에 있었거든. 오늘은 을지로에서 설렁탕 먹고 소주 한잔 하고 와서 힘들어 죽겠어. 여기 오면 반드시 이거(믹스커피) 한 잔 먹어. 이게 딱 낙이여.” 정우석씨는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처음 이곳을 방문했다. 친구들과 모여 이발소를 이용했는데 지금 혼자 남아 백발 머리를 다듬는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죽은 지가 오래됐어. 아마 7~8년은 된 것 같아. 친구가 여기를 다니더라고. 그래서 한번 와봤는데 잘해주데. 한 번 두 번 왔는데 언제든 잘해줘. 그러니 30년 넘게 올 수밖에. 염색 안 한 지는 10년 됐어. 내가 한 40년 가까이 염색을 했어. 3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눈도 좀 안 좋아서 안 했어. 젊어 보이는 거 말짱 헛거예요.” 이발소를 나가는 정우석씨에게 “예뻐지셨다”고 말을 건넸더니 “나이 90까지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면서 웃는다. “이발하고 나면 여기 사장이 모자는 들고 가라고 하는데, 난 모자 쓰는 게 좋아요.” 15년째 그때 그 가격 권오복(81)씨는 한 달에 한 번 꼭 이곳에 와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한다. 친절하고 무엇보다 머리를 잘자른다. 가격도 저렴해서 다닌 지 10년 됐다. “머리 자르고 염색하면 9000원입니다. 머리를 잘하시고 가격도 싸고 손님이 많아. 여기 오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이정학(62)씨도 역시 10년 넘은 단골. 아내가 말하길 지금까지 머리를 자르면서 최고로 잘 자르는 곳이라고 말해준다고. “마지막 마무리가 정말 깔끔해요. 한번 맛 들리면 다른 곳에 못 가요. 올 때마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려요. 전화 예약하고 오면 순번이 조금 빠르기는 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요. 사실 세면기도 완전 옛날 거였는데 몇 년 전에 새로 바꿨어요.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요.” 죽음,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다 “이 자리에서 처음 이발 기술을 익혔습니다.” 50년 된 이 역전이용소의 주인인 임근묵(59)씨. 25년 전 원래 이곳 주인이었던 고모부로부터 이발소를 인수했다.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 고등학교 떨어지고 충남 공주 집에서 빈둥거릴 때였어요. 야간학교에라도 들어가라며 고모부가 저를 서울로 불렀어요. 제가 공부 머리는 아니라서 시골집으로 도망갔죠. 그런데 또 잡으러 오시고요.” 처음에는 이발기술을 안 배우고 2년 동안 공장에 다녔다. 잠은 지금 이발소 바닥에서 직원들과 같이 자며 생활했다. “공장은 일요일에 놀지만 이발소는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일요일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손님 머리 감겨주는 방법을 배운 거예요. 몇 년 뒤 공장이 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명절에 이발소가 바쁘다면서 고모부가 자꾸 저를 서울로 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나 스무 살 때.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발을 배웠어요. 5년 머리 감기고, 면도 배우고 정말 하나씩 밟아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제가 일한 지도 40년이나 됐네요.” 이곳에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유인즉은 손님 대부분이 70을 훌쩍 넘은 시니어이기 때문이다. 1년이면 단골손님 스무 명은 세상과 인연을 다해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늘 오전에 의왕에서 아흔두 살 된 단골손님이 왔어요. 대방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하시더라고요. 젊은 사람 걸음으로 5분이면 되는 거리죠. 다리가 무겁다고, 이제 그만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거동 못하는 손님들을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러 집으로 병원으로 간다는 임근묵씨. 취재 당일도 못 오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러 여의도에 가야 한다며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아파서 못 오시는 분이 계셔요. 제가 가요. 병원에도 가고요. 연세들이 많으시니까 매년 달라요. 몸이 힘들어 못 나가니 집에 좀 와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그래요.” 혹시 이 지역이 재개발된다면 이발소를 그만둘 생각이라면서도 불편해진 분들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이발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손님들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상황. 그래서 임근묵씨는 옛날 방식의 정통 이발을 해온 대한민국 마지막 이발사를 꿈꾼다. “저를 찾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제가 없으면 불편해할 분들이 있으니까요.”
- 2017-07-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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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도 더운데, 뭘 하지?” 오늘 ‘북캉스’ 떠나볼까요?!
- 지독하게 더웠던 2016년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올해도 그 끔찍한 시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무더위를 피해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무더위의 고통에서 벗어나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은 의외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책과 함께 지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들이, 알고 보면 근처 한 시간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북캉스’로 하루 보낼 곳을 기웃거려볼까. *북캉스: 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북’에 ‘바캉스’를 결합시켜 만든 신조어 책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TV, 영화 등 화려한 영상 문화와 게임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조류에 밀려 문화의 중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책이었다. 우리들에게 지금 책은 영상과 말의 과잉으로 넘쳐나는 일상을 힐링하는 촉매로서 그 역할을 되찾고 있다. 선진국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의 도서관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일상을 힐링하는 책의 공공기능적 역할을 간파한 기업들은 너도나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문화 공간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덕분에 이제 젊은 시절처럼 산으로 바다로 가지 않아도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는 기회들이 늘어났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대신 도서관이나 동주민센터, 백화점 북카페, 서점 등에서 책을 읽으며 더위를 식히는 이른바 ‘북캉스’ 문화가 시니어들에게도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에 위치한 책 향기 그윽한 서점과 강연과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복합공간의 도서관은 무더위를 식히는 도심 속 정자마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순화동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길사 ‘순화동천’ 책 좀 읽었다는 시니어들에게 인문학 중심 도서들을 주로 펴낸 한길사라는 출판사가 만들어내는 무게감은 각별하다. 그 한길사가 오랜 준비 끝에 지난 4월 말에 인문예술공간 ‘순화동천’의 문을 열었다. 한길사가 창업 초기 자리했던 서울 중구 순화동에 만들어진 순화동천은 3만여 권의 책이 즐비한 550평 규모의 공간이며 책 박물관, 갤러리, 강의실, 회의실, 서점으로 구성됐다. 한길사는 오래전부터 독자가 중심이 된 ‘책 놀이터’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순화동의 ‘순화’와 노장사상에 나오는 이상향인 ‘동천’을 더해 ‘순화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문·예술적 삶을 지향하는 이들의 ‘평화를 순례하는 유토피아’가 되겠다는 의미다. 책 박물관은 근·현대출판문화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고서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또한 작은 음악회를 열 수 있어 음악과 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강의실과 회의실로 사용할 수 있는 4개의 공간은 각각 ‘퍼스트아트’, ‘한나 아렌트 방’, ‘윌리엄 모리스 방’, ‘플라톤 방’으로 불린다. 전시회나 출판기념회, 8~15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 50~70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강연을 진행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접수를 받는다. 아트갤러리와 한길책방은 60m에 이르는 긴 복도로 이뤄져 있다. 복도의 한쪽 벽은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이 걸린 아트갤러리로, 다른 쪽 벽은 한길사가 지난 40년 동안 펴낸 고품격 인문·예술도서가 들어찬 한길책방이다. 복도 중간에는 ‘카페뮤지엄’이 있어 커피와 함께 잠시 쉬며 책과 미술 작품을 즐길 수 있다. ◇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시원한 자유, 신세계 ‘별마당 도서관’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코엑스 안에 초대형 도서관이 있다? 사실이다. 신세계가 지난 5월 말에 문을 연 ‘별마당 도서관’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이다. 회원카드도 따로 없다. 오래 머물러도 된다. 음료를 가지고 와도 괜찮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책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별마당 도서관은 총면적 2800㎡에 2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도서관 내부에는 13m 높이의 대형 서가 3개를 중심으로 소파형·계단형 등 총 200석의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또 은은한 간접조명을 설치해 개인 서재 분위기를 냈고, 곳곳에 콘센트와 USB 단자를 구비해 노트북과 휴대전화 충전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5만여 권의 장서와 600여 권의 잡지가 준비되어 있는데, 잡지 코너만 보면 국내 최대 규모다. 고객들의 도서 기증도 받고 있기에 집에 보관해둔 책을 기증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별마당 도서관은 대출은 불가능하며 열람만 가능하다. 또한 도난방지 장치가 없다. 도서관과 쇼핑몰 사이에 출입구가 따로 없이 사방으로 열려 있는 구조이지만, 도난경보기 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믿는 구조다. 별마당 도서관은 문화와 휴식을 갖춘 열린 도서관을 찾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어 도서관이 지역 상권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시설이라고 판단해 만들어졌다. 별마당 도서관의 모델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인 일본 다케오 시의 ‘다케오 시립 도서관’이다. 다케오 시립 도서관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열린 도서관 콘셉트로 2013년에 리뉴얼한 이후 연간 1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 키덜트 겨냥한 예스24 ‘홍대던전’ 인터넷 서점들의 오프라인 서점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그동안 인터넷 서점들이 오프라인 거점을 주로 중고서점 중심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예스24는 콘셉트 서점을 기획해 서울 홍대입구역 인근에 서브컬처(하위문화) 복합문화공간인 ‘홍대던전’을 열었다. 홍대던전은 청소년에서 키덜트까지를 주 고객으로 하는 라이트노벨(가벼운 느낌의 장르소설)·애니메이션·게임 등 ‘서브컬처’ 맞춤문화공간을 지향한다. 5월에 문을 연 예스24 중고서점 홍대점과 아래위층으로 연결돼 있다. ‘홍대던전’에는 누구나 무료로 라이트노벨을 읽을 수 있는 열람공간, 피규어와 퍼즐 등 캐릭터 상품과 코스프레 전문용품을 모아둔 판매공간, 애니메이션과 게임 속 메뉴를 모티브로 한 음식을 판매하는 매점 등이 마련되어 있다. ◇ 지적 세계로의 여행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현대카드는 ‘혁신’을 기업 이미지로 삼으면서 아날로그와의 적극적인 결합을 꾸준히 지향했다. 서울 도심의 네 곳에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세워진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콘텐츠인 책에 주목한 현대카드의 또 다른 실험이다. 공연과 문화공간 등을 통해 컬처 브랜딩의 선두주자로 각인된 현대카드에서 책을 통해 지적 브랜딩의 출발점을 잡은 것이다. 가회동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는 디자인 서적들이, 이태원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음악 관련 서적들이 있다. 뮤직 라이브러리에는 책과 함께 1950년대 이후에 나온 1만여 장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LP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LP를 통한 음악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업데이트하는 중이다. 신사동 ‘쿠킹 라이브러리’는 음식 관련 서적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어 있다. 재료 카드를 사면 현장에서 요리도 가능하다고 한다. 청담동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독서를 여행과 동일하다고 여기고 1만50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관련 서적들뿐만 아니라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여행을 ‘일상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하는 ‘네이버 라이브러리’ 분당구 정자동의 네이버 사옥 로비에 자리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도서관, 서점, 북카페를 결합시켜 책이 있는 공간의 장점들을 모두 경험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뒀다. 디자인과 IT에 특화된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디자인 장서 1만7000여 권, IT 장서 7000여 권, 전 세계의 전문 백과사전 1300여 권, 국내외 잡지 250여 종이 준비되어 있다. IT 기업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라는 특색을 살리면서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비싼 디자인과 IT 분야의 책들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책을 고르기 쉽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인 도서관들과는 달리 ‘절대 정숙’ 문화가 아닌 대화하고 토론하는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네이버 라이브러리는 네이버의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사회취약 계층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사서는 시니어들이 맡고 있으며 안에 위치한 카페는 발달장애인의 일터를 만드는 회사 베어베터와 함께 운영되며 지적장애나 자폐를 가진 청년들이 커피를 만든다. ◇ 도심 속 한옥 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문학도서관은 종로구에서 16번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자 최초로 한옥으로 만들어진 공공 도서관이다. 지붕은 전통 방식의 수제 기와를 사용했고 담 위에 얹은 기와는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의 기와 3000여 장을 가져와 사용했다. 그야말로 전통 한옥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건물이다. 청운문학도서관 1층은 한옥이며 지하는 반지하식 양옥 건물이다. 1층에서는 시, 문학 창작교실, 문화예술교육, 인문학 콘서트 등이 열린다. 지하층은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만날 수 있는 자료실과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이 있다. 또한 온돌식 독서공간도 마련되어 한옥 도서관이라는 콘셉트를 충실하게 살리고 있다. 물론 여름에는 에어컨을 통해시원하게 유지된다고 하니 냉방은 합리적인 현대기술을 이용했겠다. 도서관 같은 서점 인터파크 ‘북파크’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2, 3층 총 2000㎡ 공간에 자리 잡은 ‘북파크’는 북카페나 도서관처럼 이용할 수 있는 서점이다. 50여 개의 테이블과 200여 개의 의자, 앉아서 책 읽기가 가능한 계단 등이 마련돼 있다. 독서공간의 분위기도 다락방 스타일, 테라스 스타일, 응접실 스타일 등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또 계단 밑이나 서가 뒤 숨은 공간에서 아늑한 분위기를 즐기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어린이책 코너 부근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일곱 곳이나 있다. ‘보신 책은 북박스에 넣어주시면 직원이 정리한다’는 안내문구까지 있으니, 책의 구매 여부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서점이다. 북파크는 인터파크의 과학재단인 카오스재단이 2016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카오스재단의 설립 목적인 ‘과학의 대중화와 과학지식의 공유’ 취지에 맞춰 총 10만여 권의 보유 서적 중 절반 정도가 과학 관련 책이다. 서점 안에는 35석 규모의 다윈룸과 8석 규모의 뉴턴룸 등 모임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북파크는 이태원이나 경리단길 유명 맛집과 가깝고 공연장이 같은 건물에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다. 여름방학이 되면 손주 손을 잡고 다녀와도 좋겠다. 이밖에도 CJ CGV와 쉐라톤워커힐 호텔도 도서관을 만들었다. 금융계에서도 KEB 하나은행 본점인 을지로 사옥에도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고 대신증권도 명동 사옥에 도서관을 열었다. 기업들이 앞다퉈 사회공헌 차원에서 도서관을 개장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과거에는 한 노인의 죽음을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에 비유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식의 총량이 매일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막대하게 늘어나고 있다. 때문에 인생 경륜을 어설프게 드러내는 것은 자칫 뭘 모르면서 꼰대 노릇하는 걸로 비치기 십상인 세상이 됐다. 나이 듦에 따라 정신과 지식의 세계도 변모하기에 품위 있게 늙는 일은 중요하다. 문화지성인으로서의 비움과 채움이 필요한 시니어에게 도서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공간이자 여행지다. 다시 찾아온 무더운 여름, 어디를 갈까 고민 말고 가까운 도서관에 놀러 가보자.
- 2017-07-0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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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방생활사 전문가 허운홍’ 낭만주부 나방 엄마로 허물 벗고 빛을 보다
- 나방을 고운 시선으로 본 적 있던가? 여름밤, 밝은 조명 주위로 크고 작은 나방이 몰려들면 무서웠다. 누군가는 살충제를 들고 나와 연신 뿌려대기도 했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의 사오정 입에서 나오는 나방은 그저 웃음거리. 더럽고 지저분하고 방해되는 날개 달린 벌레. 인간사 속 ‘나방’이란 정체의 위치가 그러했다. 허운홍(許沄弘·64)씨가 나방의 생활사에 대해 관찰하고 알리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차갑던 시선에 조금씩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부 허운홍, 나방에 빠지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지만 ‘나비’가 아닌 ‘나방’을 연구하고 그 매력에 푹 빠진 사람이 있다니! 대학 교수라면 이해가 갈 것 같다. 자연계열과는 거리가 멀던 주부가 ‘나방생활사 전문가’로 불린다. 바로 허운홍씨 얘기다. 우선 허운홍씨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10여 년 동안 직접 채집해 길러낸 나방이 2000여 마리 900여 종에 이른다. 이렇게 채집한 나방은 손수 표본으로 만들었고 올해 초 광릉수목원에 기증했다. 나방뿐만 아니라 파리와 벌들의 표본도 함께 기증해 시민에게 내줬다. 서강대학교 사학과 출신, 곤충과는 멀던 삶. 나이 오십 넘어 그 작고 날라 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돌볼 것 많은 주부생활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자식도 남편도 아닌 나방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녀는 왜! 수많은 곤충들 중 나방에 빠지게 된 걸까? “전업주부로만 살아왔어요. 대학 졸업하고 친구 소개로 만난 남편과 곧바로 결혼했거든요. 뭐든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잘 안 풀렸어요. 그런데 뭘 하고 살 것인가는 늘 고민했죠. 그러다 1997년에 남편이 교환교수 자격으로 영국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생태학과 만났어요.” 영국에서 생태학에 눈뜨다 가족과 함께 간 영국 케임브리지. 그곳이 나방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도화선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는 지식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는 대학교와 도서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배울 것이 널려 있었다. 학업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이 많았던 허운홍씨는 케임브리지 개방대학에서 관심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 찾아서 수강신청을 했다. 천문학에 미술사, 영국사 강의도 들었다. 그중에 생태학도 있었다. “생소했어요. 식물에 관한 걸 배울 수 있다기에 수업을 들어보기로 했어요. 그때까지 에콜로지(Ecology·생태학)란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교였지만 수준은 남달랐다. 생물학, 곤충학, 천문학 전문가가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숙제도 내주었다. 무엇보다 허운홍씨가 놀란 것은 학문을 대하는 영국인의 자세였다. “천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은하계를 볼 수 있는 필름과 슬라이드 장비를 가지고 있었어요. 옷은 정말 허름하고 냄새가 날 정도였는데 슬라이드는 다들 가지고 있더군요(웃음). 생태학 수업을 같이 듣는 분과 영국의 유명한 습지에 간 적이 있는데 차 트렁크에 장화며 쌍안경, 돋보기 등 없는 게 없더라고요. 저는 운동화 신고 뒤따라갔거든요. 문화수준인 거 같았어요. 그게 제가 느낀 차이였어요. 특히 연세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너무나 열심히 공부하셨어요.” 지식이 넘쳐나는 영국에서 소녀처럼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은 잠시였다. 1998년 한국에 IMF 위기가 와서 1년도 채 못 되어 돌아와야만 했다. 조금 더 영국에 빨리 가서 공부를 시작했거나 더 오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늘 아쉬움이 남는다. 벌 대신 나방을 선택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왔는데 1999년에 길동생태공원이 문을 열었어요. 2008년까지 생태안내 자원봉사를 하면서 곤충 생태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다 보니까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영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소개해준 책도 해석해서 보고 말이죠. 사실 벌을 더 연구하고 싶었어요. 벌이 선구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사람들이 배워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정자은행의 시초였을 것 같은 여왕벌의 저정낭, 말벌의 독특한 아파트 생활 등 벌들의 사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과 말벌을 제외한 대부분의 벌이 나무줄기 속, 집 틈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생활을 해 포기했다. “그래서 나방으로 돌아섰습니다. 처음에는 이쪽 분야 전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다 연구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구가 전혀 안 돼 있었어요. 도감 대부분이 일본 책을 베낀 거였어요. 영국에 있을 때도 생태학 교수가 일본 책만 소개시켜줬죠. 그때까지 한국 책은 없다고 했어요.” 2007년부터 중부지방을 기점으로 발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방 애벌레를 채집하고 인공으로 키워냈다. 수백 회 반복한 끝에 2012년과 2016년에 1권과 2권을 발표했다. 나방의 탄생과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국내 최초의 도감이다. 새로운 나방 찾아 순천으로 남하(南下)하다 현재 허운홍씨는 남편과 순천에서 살고 있다. 서울 생활을 접은 이유는 나방 때문이다. “중부지역 쪽에서만 주로 채집했어요. 친정이 밀양이라 그곳에서도 좀 했고요. 그렇게 900종을 채집했으니 새로운 곳에서 채집을 해보려고 순천에 왔어요. 이곳에 친척 한 명 없는데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웃음). 남쪽은 사는 식물이 달라요. 그래서 나방도 다른 종이 나와요. 예덕나무, 푸조나무 이런 것들은 서울에 없어요. 제주도에서도 살아볼까 생각했는데 여기랑 식물이 비슷하고 섬이라 한계가 좀 있죠. 이곳에 훨씬 생물이 더 다양하게 있어요. 지리산도 가깝고. 내려와서 70~80여 종을 찾았습니다. 백운산, 제석산, 조계산, 봉화산 등 순천 쪽 산은 거의 다 다니고 있어요.” 지금도 매일 주위 산을 오르고 반가운 마음에 애벌레를 채집하고 관찰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 박사, 교수 같은 명함은 없지만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다. “교수 몇 분이 와서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하면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채집을 못하지 않냐 물으니까 채집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채집하러 나가면 새벽 6시에 나가서 왕복 6시간, 6시간 채집해서 한두 종 추가해요. 어떻게 공부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안 해본 사람들 생각이죠. 벌레들이 생각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아요.” 허운홍씨는 78세까지 2000종의 애벌레를 채집해 나방 성충으로 키워낼 꿈을 가지고 있다.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 “채집 생활을 모두 끝마치고 나면 나방을 생활사별로 정리하고 싶어요. DNA 검사를 비롯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싶은데 눈이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시력이 너무 떨어져서 의사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원시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지만 하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단다. “제가 78세까지 2000종을 채집하겠다고 허풍을 쳐놔서요(웃음).” 경조사는 못 다녀요 나방 애벌레 채집에 집중하는 기간은 4월 말부터 9월 말까지. 10월에도 밖을 나선다. 비가 오는 날은 사진을 정리하고 그 외 모든 시간은 산 이곳저곳을 다닌다. 나방 엄마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특히 표본작업을 할 때는 강의나 다른 일들은 하지 않아요. 6월에도 성남에서 토크쇼에 와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일단 채집이 시작되면 사람도 안 만나요. 친인척 결혼식도 안 가요. 장례식에는 꼭 가죠. 그 외에는 아무 곳도 안 가요.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말 집중이 필요하거든요.” 사람들은 올해 채집을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지 않느냐고묻는다. 애벌레를 집으로 들여와 길러보니 매년 나는 종들이 다른 것을 알게 됐다. 한 해 거르면 영원히 못 보는 개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름 여행도 포기했다. 이런 허운홍씨. 가족들과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 가족은 서로 관여 안 해요. 예전에 아들들은 ‘엄마 나방이 날라 다녀요, 번지수를 잘못 찾았나봐요’ 그러기도 했어요. 손자들은 벌레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죠. 친구들은, 제가 경기여고를 나와서 수준이 있거든요(웃음). 동기 모임도 미술관, 박물관 이런 곳에서 하니까 제 생활을 이해해요. 가끔은 제 남편 대단하다고 해요. 벌레 키우는 여자랑 이혼 안 해주고 산다고요.” 그래도 주부로서 최소한의 원칙은 있다. 새벽에 나갔다 저녁이 돼서 집에 오면 남편 먹을 반찬은 꼭 만들어놓는단다. 남편이 반찬투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자연을 만나다 채집할 때 가방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 열어봤다. “물, 카메라, 우산, 비닐, 샬레(실험도구인 납작한 원통형 용기), 가위는 3개 정도 꼭 넣고 다녀요. 작업하다 가위를 떨어뜨려서 찾으려고 보면 뱀이 있다거나 보이지 않은 곳에 떨어져 못찾을 때가 있거든요.” 가위를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것은 ‘식물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잎사귀나 가지를 깨끗하게 잘라주지 않으면 병이 들 수도 있고 끝이 갈라져 보기에도 좋지 않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본은 가위를 이용해 가지를 잘라주는 것이란다. “사람 좋을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식물 입장도 생각해봐야죠.” 올해 허운홍씨의 나이는 64세. 적지 않은 나이에 매일 새벽 나방이 될 애벌레 채집을 위해 길을 나선다. 집안일하다 생긴 손가락 관절염에 점점 나빠지는 눈, 매일 걸어 다녀 굳은살 박인 발은 물론이고 어깨 통증도 달고 산 지 오래다. ‘가지에 손만 닿으면 되지’ 싶어 병원에는 가지 않는다. 어디서 오는 사명감일까. “여섯 시간을 찾아 헤매야 한두 종을 찾는다고 했잖아요? 10년을 이렇게 찾은 것입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방생활사 연구를 한다면 제가 지금까지 했던 것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잖아요. 누가 하겠어요. 제가 할 수밖에 없죠. 결과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하고 싶다면 가르쳐주고 싶지만 돈도 안 되는 것을 누가 하겠어요.” 보물찾기, 퍼즐게임 그리고 컬렉션(?) 요즘도 매일 나방 애벌레를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는 허운홍씨는 이를 두고 ‘보물찾기’라고 표현한다. 숲속을 헤매다 눈앞에 새로운 종의 애벌레가 보이면 날아갈 듯 좋단다. 그 시기가 지나 겨울이 되면 또 다른 재미, ‘퍼즐게임’에 돌입한다. “겨울에는 동정(생물의 분류학상 소속이나 명칭을 바르게 정하는 일)을 해요. 표본한 것을 쫙 펼쳐놓고 종류를 구분해요. 애벌레 사진 찍어놓은 것과 성충 표본을 보면서 일본 책을 가지고 이름을 찾아요. 밖에 나가는 건 보물찾기, 동정은 퍼즐게임 그리고 모으면 컬렉션이에요. 재밌는 일이 아주 많은 저만의 취미입니다.” 78세가 되면 소속된 학교도 단체도 없지만 나방 아줌마의 멋진 퇴임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말에 “2000종 채우면요!” 한마디 외치며 산속으로 걸어갔다.
- 2017-07-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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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송시월과 나누다] 정동골2
-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입구쯤에서 내 중년의 한 시절을 보낸 탓에 정동은 길 하나 사이의 낯익은 동네다. 하지만 살기에 바빠 막상 정동을 문화적 역사적으로 접근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화여고와는 인연이 깊다. 이화여고를 다닌 큰 딸이 전체 1등을 해서 조회시간에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운동화가 구멍이 나서 친구 신발과 바꿔 신고 나갔다는 에피소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 시절 남편의 사업이 잘못되는 바람에 과외는 커녕 워크맨 하나도 못 사주다가 고 3이 되어서야 청계천에서 중고를 사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와중에서도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건전하게 자라 주었다. 어느덧 자라 중년이 된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보살피는 착한 딸이어서 고마울 뿐이다. 정동 맞은편 신문로는 80-90 년대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대로 자주 교통이 통제되곤 했다. 큰 아이는 늘 교정을 울리는 시위행렬의 “군부독재 물러가라”는 외침이 익숙해서인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학년부터 시위에 참여한 일이 비일 비재했다. 때로는 경찰의 곤봉을 피해 같은 과 동료 선배들이 우르르 우리 집으로 숨어드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고 그 아이가 벌써 중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오늘, 나는 다른 지역에 살지만 때마침 유관순 기념관 탐방 기회를 얻어 이화의 교정에 첫발을 딛는다. 물오른 바람이 마중 나와 초여름의 풋풋함을 한 아름 안겨준 유월의 오후였다. 유관순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복잡하게 얽인 생각의 밑바닥에서 정체가 불분명한 울렁거림이 고개를 들었다. 사진 속 16세의 어린 유관순이 왜 그렇게 아픈 역사를 잊고 살았냐고 질책 한 것 같아 발걸음이 주춤, 온 몸에 열이 오름을 느끼기도 했다. 삼일 운동의 시위대가 고종의 시신이 있는 덕수궁 주변으로 몰려가며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교정을 울릴 때 고등과 1학년이었던 유관순은 여섯 명으로 조직한 시위결사대와 함께 담장을 넘기로 했단다. 교장 프라이는 자신을 밟고 가라며 애원하듯 말렸지만 그들의 의지는 너무 확고해서 기어이 담을 넘고 말았다. 그 후부터 3.1운동 진원지의 핵이 되어 고종의 장례식을 마치고 대거 참여한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자신의 온 몸을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사촌 언니 유예도와 같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아우내(병천)로 내려간다.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은 일찍 감리교 신자가 되어 향리에 홍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유관순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아버지와 같이 시위를 주도하다가 헌병들의 총검에 아버지 어머니를 한꺼번에 잃고 오빠도 투옥되었다. 그리고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화학당의 담장을 넘은 후 토막 난 시신으로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어느 제국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면 나도 담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해본다. 실은 지금도 문화식민지의 그물을 보이지 않게 펴 놓고 걷어 올릴 기회만을 기다리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것인가를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화여고 교정의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유관순이 빨래하던 빨래터가 남아 있었다. 어린 그녀가 식민지란 오욕을 두드려 빨아 헹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아래와 같은 박두진의 시를 음미해 본다. 유관순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 피 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터져 솟아나는 ,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짖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를레앙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는 , 순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 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3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 관순 우리 누나, 보고 싶은 우리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3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펄럭임을 알았다. -박두진의 “3월 1일 하늘” 전문 *의사와 열사의 구분 총이나 칼등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안중근 같은 분을 의사라 하고 맨손으로 싸웠던 유관순을 열사라 한다. 시인 송시월은 전남 고흥 출생, 1997년 월간 으로 등단, 계간 편집 위원 저서로는 시집 이 있다.
- 2017-06-29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