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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 사] “은퇴 후 추락한 기분… 다시 일하며 감사할 줄 알게 됐죠”
- 30년 회사생활 후 찾아온 은퇴는 원호남(元鎬男·54) 팀장에게 ‘추락’의 기억이었다. “삶에서 튕겨져 나온 심정이었다”고 했다. 보험설계사에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할 곳’이 필요했다. 현재 원 팀장은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50대 남성 보험설계사 조직) 간판 컨설턴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설계사 경험을 통해 인간관계에 감사하게 된 점이 가장 보람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교보생명의 시니어클래스 사무실을 찾았다. 빌딩이며 책상이며 회의실과 커피머신까지, 도시의 흔한 사무실 풍경이었다. 다른 점은 업무를 보는 남성들이 모두 여느 회사의 임원급도 넘어 보이는 50~60대라는 점이다. 이곳에서 원 팀장을 만났다. 머리모양과 옷차림이 단정했다. 말투와 몸가짐에서 오랜 기간 회사생활의 내공이 느껴졌다. “30년간, 뭐, 나쁘지 않은 직장생활 했죠.” 다소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작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라마 의 무대였던 ㈜대우(현재의 대우인터내셔널)가 그의 첫 직장이었다. 1985년부터 10년간 일했다. 이후 내셔널호주은행과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에서 20년간 근무했고 통합 SC제일은행에서 본부장을 지냈다. 누군가를 만나 명함으로 자신을 설명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번듯한 직장이었다. 30년 회사원에게 은퇴란…“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 은행을 나온 것은 2013년 3월, 교보생명에서 설계사를 시작한 것은 같은 해 12월이었다. 7개월간 ‘자연인 원호남’으로 지냈다. 당시 심경을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문제를 하나 냈다. “가장의 실직을 가족 외에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정답은 세탁소 아저씨입니다. 양복을 맡기지 않으니까요.” 은퇴 남성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시선이 먼저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대낮에 밖에 나가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다녀오는 동년배 남성들을 관찰자로서 바라봤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아! 이제 보니 내가 저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 그룹에 속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명함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낯설었다”거나 “휴대폰이 울리지 않더라” 등으로 돌려 말했다. 어둡지 않은 말투였지만 대화 중간에 “은퇴는 추락이잖아요”라든지 “반복적인 일상에서 튕겨나간 느낌인 거죠” 등의 표현을 섞었다. 30년 동안 잘 나가던 회사원으로 갖고 있던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표현했다. 가장으로서, 남성으로서 그가 느꼈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보내준 ‘노란 화살표’…새 길 앞에서 짐을 비우다 교보생명에서 직장경력 20년 이상인 50대 은퇴자를 보험설계사로 모집한다는 광고를 접했다. 은퇴 전의 그였다면 눈길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세일즈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고정관념때문에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은퇴시점과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출범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현업에서의 지식과 경험을 살리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마음을 담금질하게 된 계기는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에 담아뒀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 도보여행이었다. 원 팀장은 짐을 줄이기 위해 생필품인 비누조차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말 필요한 생필품만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그걸 또 줄이고 있더군요. 인생도 새로운 길을 떠나기 전에 비우는 게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했다. ‘잘나가던 현업시절’의 기억이 무거운 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려놓을 용기를 갖게 됐다. 여행의 백미는 유명한 ‘노란 화살표’였다. 갈림길마다 순례객들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안내하는 산티아고의 명물이다. 그는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 인생에도 이런 화살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도보순례가 힘든 여정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인생에 비하면 힘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라고 말했다. 결심을 굳히지 못했던 보험설계사 위촉식 전 날 딸 다은(26)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아빠, 나 (회사에) 합격했어’. 원씨는 ‘이게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아내의 문자도 그의 결심에 큰 응원이 됐다. ‘다은이 아빠가 생각하는 대로 하세요. 뜻대로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은 충분히 살 수 있어요.’ “지난 삶 건방졌다는 반성…인간관계에 감사하는 법 배워” 종합상사와 은행에서의 경험이 상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판이한 업무방식은 바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목적을 갖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인을 만나서 보험의 ‘ㅂ’자도 꺼내지 못하고 헤어진 적이 많았죠. 실제로 교보생명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하면 얼굴표정이 확 달라지는 지인도 있었고요.” 그 후 2년간 원 팀장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시니어클래스 내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설계사 중 한 명이다. 올해의 경우 여러 실적부문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설계사로서 안정적인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이 추세라면 내년에는 보험설계사들의 명예의 전당 격인 MDRT(백만달러 원탁회의) 자격을 얻게 된다. 초창기 느꼈던 두려움은 극복한 걸까. 원 팀장은 “목적을 가진 마음이야 변함없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대답했다. “지난 삶이 굉장히 건방졌던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에만 머물렀던 거죠.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고 그의 걱정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보험계약이 이뤄진다면 감사한 일인 거죠.” 덧붙여 원 팀장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어려움을 메모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고 했다. 금전적인 문제, 가정문제, 건강문제 등 지인의 어려움을 적은 메모는 그날 그날의 기도문이 된다. 그에게 지금의 일을 시작한 뒤 가장 보람있는 부분을 물었다. 원 팀장은 “인간관계에 감사할 줄 알게 된 점이 보람있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고, 그런 변화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 원호남 시니어클래스 팀장 1961년생, 광성고, 고려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 MBA, 1985~1995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1990~1994 대우 홍콩법인, 1995~2002 내쇼날 호주은행(NAB) , 2000~2002 NAB 뉴욕지점 근무, 2002~3013 스탠다드차타드(SG) 은행, 2013~현재 교보생명 시니어클래스 팀장
- 2015-11-1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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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 그 순간] 러일전쟁의 앞과 뒤 “일본에는 외무성도 없느냐?”
- 러일전쟁이라면 국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이 먼저 떠올라 우리에게는 결코 유쾌한 사건이 아니다. 전쟁의 쟁점도 한반도라고 믿고 싶겠지만 서양 학계에서는 러-일 양국이 다툰 것은 만주라고 평가해 왔다. 지난 20~30년 전부터 ‘한반도’도 이에 포함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지난 호에서 청일전쟁을 ‘일본과 이홍장 간의 전쟁’이라고 평한 바 있는데 러일전쟁도 비슷하다. 양국의 임전태세를 ‘일본은 사활을 걸고 싸우며 러시아는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 싸운다.’고 비유했다. 일본은 이 전쟁에 국가의 운명이 걸렸다는 각오 아래 정부와 국민이 단결하여 총력전 태세로 임하지만 러시아는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가 있는 ‘중앙’ 러시아에서 1만km나 떨어진 ‘극동’지역의 국경 밖에서 뭔지 아리송한 목표를 위해 싸운 것이다. (물론 패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정치에 불똥이 튄다.) 일본도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완벽한 승리를 얻지 못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전선은 러시아 영토 밖에 있었다. 전쟁 초기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대한 포격과 종전 무렵 일본군이 사할린에 진주한 것이 ‘러시아 영토’에 가한 유일한 타격(?)이었다. 종전 때의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1차 대전이 끝났을 때 전선은 독일영토 밖에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독일은 4년 여의 전쟁에서 모든 자원이 고갈되어 기진맥진한 끝에 항복한 데 비해 러시아는 아직 힘이 싱싱하게 남은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당연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왜 종전이 이루어졌을까? 국제정치적으로 미국은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서 경제적 문호개방을 거부한 데 반발하여 일본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영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당연히 일본을 지원했다고 믿고 있다.(한국에서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독일의 팽창에 대항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인 영국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어 이해관계가 약한 ‘극동’에서 러시아와 분쟁을 조장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전쟁을 빨리 끝내 러시아가 유럽에 관심을 집중하기를 희망했다. 전쟁 중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던 일본사회에서는 전쟁 후 “영국이 동맹국이라면서 무슨 도움을 주었느냐?”면서 반영 감정이 고조되기도 했다. 일본군이 주요 전투에서 연승하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내고 ‘제2의 러시아’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양국이 만주에서 ‘균형 잡힌 적대관계’를 이루는 상태에서 이 거대한 시장이 서양 열강에게 개방되기를 바란 것이다. 이후의 역사는 일본이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서양 열강의 권익을 몰아내지만. 기이하게도 종전을 서두른 쪽이 연전연승한 일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일본 군부가 있었다. 군부가 항상 과격한 정책을 선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러일전쟁이다. 일제 군부라면 우리는 끝을 모르는 욕망으로 대륙 팽창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패배한 쇼와(昭和)군부를 연상할 것이다. 메이지(明治) 군부는 그렇지 않았다. 메이지 군부도 러시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은 인적·물적 자원이 러시아보다 빨리 고갈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실제로 만주의 첫 주요 전투인 1904년 10월 사하(沙河, 사카)에서부터 일본군은 보급품 부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하는 심양에서 여순 방향으로 흐르며 요양(遼陽) 북쪽에 있는 강이다. 다음해 3월 만주의 운명을 가르는 요양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하지만 인적·물적 자원이 한계에 도달한다.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패주하는 러시아군을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러시아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승리하면서도 손실이 러시아를 능가했다. 1905년 정월 초하룻날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일본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여순 전투에서 러시아 사상자는 2만8200명인 데 비해 일본은 5만7789명이었다. 메이지 천황조차 “이긴 것은 좋지만 일본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서야...”라며 탄식했다. 반면 러시아는 새로이 건설한 시베리아와 만주의 철도를 통해 보급품을 수송함으로써 요양전투 패배한 후에도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계속된다고 해도 러시아가 일본을 패퇴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일본 군부는 전선의 상황이 일본에게 유리할 때 종전 협상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다. 이를 ‘전략과 정략의 일치’라고 불렀다.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大山?) 원수는 1904년 7월경 만주전선으로 떠나기 전 친구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해군상에게 “만주 전투는 내가 알아서 하겠지만 언제 끝내야 할지는 (동경에 있는) 자네가 결정하게.”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만주군 수뇌부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신중히 고려하여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국정부에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한다. 다음 해 3월 28일 오야마의 참모총장인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만주전역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동경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주 임무는 정부에 평화회담 개최를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경 역에 마중 나온 부참모장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에게 소리쳤다. “나가오카, 바보짓 그만해라. 총을 쏘았으면 멈출 줄 알아야지. 그것도 몰라?” 그 다음, 외무성을 향해 또 한 번 고함친다. “일본에는 외무성도 없느냐?” 원래 평화협상은 전투와는 달리 단시간에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3월부터 테오도르 루즈벨트(Ted Roosevelt) 미국 대통령과 접촉하여 이해 9월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면서 승리의 열매를 챙긴다. 그중에는 한국을 삼키기 전 단계인 보호권도 포함된다. 군부가 현명한 판단을 내릴 때 국운이 융성해진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11-0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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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만사]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 고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열정
-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 2015-10-2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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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샹송을 알게 해주었던 아버지
-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음악 중에는 미국 팝송같이 많지는 않았지만 샹송이나 칸초네, 그리고 라틴음악도 있었다. 필자가 샹송을 처음 접한 것은 1962년 9월쯤이었나, 당시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로 근무하시던 선친과 명동 국립극장(현 예술극장)에서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의 공연을 본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그녀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시인의 혼’, ‘미라보 다리’ 등을 불렀다. 특히 ‘포르투갈의 빨래하는 여인’이라는 노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노래가 상당히 감미로웠다는 느낌 외에 샹송에 대한 별다른 매력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샹송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6·25 전에 집에 있던 유성기 판 중 일본 여가수가 일본말로 불렀던 노래가 사실은 다미아라는 샹송가수가 부른 ‘그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Tu Ne Sais Pas Aimer)’라는 샹송이었던 것이다. 다미아는 ‘우울한 일요일(Sombre Dimanche)’로도 유명한데, 10여 년 전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이 노래는 본래 헝가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이 노래 때문에 자살자가 많아 헝가리에서는 금지한 것을 다미아가 프랑스어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미국의 재즈가수 빌리 할리데이가 영어로도 불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 노래를 듣고 도쿄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자살했다고 한다. 1963년, 해외에 다녀오신 선친이 LP를 몇 장 사오셨다. 당시는 외화가 무척 귀할 때라 한번에 10장 이상은 반입이 불가능했고, 그것도 시중에 판매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표지에 일일이 서명을 하도록 했었다. 그 대부분은 클래식이었으나 그중 한 장이 Holiday in France라는 판이었다. 이 판에 있는 파리의 하늘밑, 고엽, 파리의 아가씨, 아이 러브 파리, 파리의 다리 밑, 매혹의 왈츠, 바다 등은 나중에는 자주 듣다보니 많이 익숙해졌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하고 황홀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샹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국내에는 샹송 판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이것이 샹송이다’라는 판을 구했고, 거기서 앞에 소개한 이베트 지로, 질베르 베코 등의 노래와 특히 이브 몽땅의 고엽(Les Feuilles Mortes/Autumn Leaves)을 들을 수 있었다. 이 판은 고교 동창인 박명도 군이 특히 좋아해서 그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거의 이 판을 들었다. 그리고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이진섭씨가 쓴 샹송을 주제로 한 라디오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서 당대 최고의 샹송가수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 비참했던 어린 시절과 6년 연하의 이브 몽땅을 발굴해서 일류가수, 배우로 성장시켰으나 시몬 시뇨레에게 빼앗긴 사연, 그녀의 노래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과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 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대의상은 물론, 당시 파리에서 유행하던 스카프와 스타킹조차 살 수 없었고 세탁도 자주 할 형편이 못 되어 목이 긴 검정 스웨터와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던 줄리엣 그레꼬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가수로 크게 성공하자 그녀의 의상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노래, 고엽과 빨간 풍차(Moulin Rouge)도 이 드라마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샹송과 친해지면서 파리를 여행할 때면 어떻게 하든 틈을 내어 몽마르뜨르 언덕에 올라가 거리 화가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집사람이 기념품가게를 구경 다니는 동안 그 옆에 있는 카페에서 옛 샹송들을 들으며 생맥주를 몇 잔 마신다. 그 후 날이 어둑해지면 언덕 아래에 있는 물랭 루즈에 입장하여 아직도 복도에 걸려 있는 로트렉의 포스터들을 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식전(食前) 연주를 들으며 기분이 나면 춤도 몇 곡 춘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프렌치 캉캉으로 끝나는 유명한 물랭 루즈쇼를 보면서 저녁을 먹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절차가 되었다. 일제 때 선친은 제1고보, 이진섭씨는 제2고보로 학교는 달랐으나 같은 학년으로서 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댁에서 5년간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해, 친형제 이상 친했다고 한다. 그리고 옆방에는 얼마간인지 모르지만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하숙을 했다고 한다. 이진섭씨는 작가이자 기자, 아나운서, PD를 겸직하셨고 샹송에도 정통하셨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가 이진섭씨의 번역으로 중학교인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였다. 그분은 술에 취해서 명동파출소 앞을 지나갈 때면 순경을 향해 소변을 보셨다고 한다. 순경이 미워서가 아니라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한 힘없는 문화인의 상징적인 항거였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자주 오셔서 술을 드셨고 필자도 혜화동인가에 있던 그분 댁에 심부름을 자주 가서 친아저씨처럼 지냈다. 선친은 워낙 예술과 친구, 그리고 술을 좋아해 환도 후 명동에서 조그만 무역상을 할 때 돈이 좀 생기면 집보다는 친구들 뒷바라지가 우선이었다. 당시 어울리던 분들로는 이진섭씨 외에 박용구씨, 박인환씨, 송지영씨, 심연섭씨, 이봉구씨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이 가운데 올해 101세인 박용구씨 외에는 이미 모두 고인이 되셨다. 1956년 3월, 선친은 당신의 중학교 후배가 되어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는 장남이 자랑스러워 명동에 있던 은성주점에 필자를 데리고 가셔서 친구들에게 마냥 자랑을 하셨다. 그곳에서 술을 마시던 박인환씨가 냅킨에 시를 쓰셨고 그 옆에 계시던 이진섭씨가 역시 냅킨에 작곡을 하셨는데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그 자리에 나애심씨가 있어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만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박인희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 2015-10-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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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대열의 역사의 그 순간] 탄넨베르크 전투 - 정보 수집과 해석
-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작업과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정보 수집행위와 분석/판단능력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외우고 계산하는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천재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암산능력은 컴퓨터를 이기지 못하고 암기할 것도 컴퓨터에 다 저장되어 있다. 오늘날 천재는 정보를 분석/판단하며 실천 의지를 가진 인물일 것이다. 분석과 판단, 실천능력은 ‘국가 대사’인 전쟁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번 이야기는 1904~1905년 러일전쟁 중 만주전역(戰役)을 관찰한 한 독일 장교가 이때 들은 이야기 수준의 정보를 10년이 지난 1914년 1차 세계대전에서 활용하여 탄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라는 역사적 대승리를 거둔 사건에 관한 것이다. 독일(통일 이전 프로이센) 군부, 특히 총참모부의 전쟁에 관한 연구와 작전수립 능력이 탁월한 것은 알려져 있다. 독일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러시아라는 강대국들에게 포위당해 있어 이들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쟁개념이나 작전 계획 수립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련하여, 근대 한일 관계에서 ‘한반도가 일본열도의 심장을 겨눈 비수’라는 개념도 1885년 일본의 육군대학에서 강의한 클레멘스 메켈(Klemens Meckel) 대령이 언급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핵심적 안보관이다. 독일 참모부가 낳은 천재적 장교 중 하나가 막스 호프만(Max Hoffmann, 1869~1927) 중령으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1914년 당시 45세였으며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그의 경력 중 눈에 띄는 것은 러일전쟁 중 무관 참관인(observer)으로 일본의 만주군 주력인 제1군을 따라 러일전쟁을 직접 관찰했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전개를 돕기 위해 1차 대전 초기 독일의 작전계획에 대해 약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독일이 프랑스-러시아와의 양면 전쟁에 대비해 마련한 슐리펜(Schlieffen) 계획은 잘 알려져 있다. 그 핵심은 ‘우익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고 교통망이 미비하므로 동원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독일군을 7 대 1의 비율로 서부전선에 집중하여 6주일 내에 프랑스군을 격파한 후 동쪽(러시아)으로 예봉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예상을 깨고 2주 만에 동원을 완료, 주력군을 신속히 동프로이센으로 진격시키자 독일 8군이 이를 저지하지 못하고 사령관은 전선을 폴란드 중부 비스툴라 강까지 후퇴시키려 한다. 이에 베를린 사령부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rburg) 장군과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장군을 사령관과 참모장으로 임명한다. 이 두 장군은 1차 대전이 낳은 독일의 영웅이다.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정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한 인물이며 루덴도르프는 전쟁 말기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총공세를 지휘했다. 전쟁 개시 3주째인 8월 말 새 사령탑이 도착하기 전 절체절명의 시기 동프로이센 독일군을 지휘한 인물이 부참모장인 호프만 중령이다. 동프로이센을 공격한 러시아 1군 사령관은 렌넨캄프(Paul von Rennenkampf) 장군이며 2군 사령관은 삼소노프(Alexander Samsonov) 장군이다. 렌넨캄프 장군은 러일전쟁에서 여러 전투를 지휘했으나 특히 만주의 운명을 결정 지은 선양(瀋陽)전투(1905년 2~3월)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여 지휘권을 잃는다. 삼소노프 장군은 선양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측면을 보호하여 명성을 얻는다. 9년 뒤 이 두 장군은 공교롭게도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는 소임을 맞게 된다. 렌넨캄프의 1군은 북동 방면에서, 삼소노프의 2군은 서남방향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진격하여 독일 8군을 포위하는 작전이었다. 당연히 전투의 승패는 양군이 서로 긴밀히 연락을 취하는 협동작전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렌넨캄프가 적절한 시기에 지원하지 않았다면서 선양전투의 실패 책임을 두고 선양역 플랫폼에서 서로 따귀를 때리면서 싸웠다는 것이다. 호프만 중령은 만주에 있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 힌덴부르크가 신임 사령관으로 임지에 도착했을 때 독일 8군은 호프만 중령의 지휘 아래 전투에 돌입하고 있었다. 호프만은 암호화되지 않은 러시아군의 교신을 쉽게 도청하여 1군과 2군이 상호 지원이 쉽지 않은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걸 파악한다. 게다가 선양역 사건으로 두 사령관이 협력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독일군은 각개격파에 들어가 8월 말 먼저 수적으로 우세한 삼소노프 2군을 섬멸한다. 삼소노프는 고군분투하면서 1군에게 다급한 전문으로 구원을 요청하지만 렌넨캄프의 1군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15만 러시아 군 중 1만이 겨우 탈출했으며 삼소노프는 도주과정에서 권총으로 자살한다. 렌넨캄프 장군도 패전으로 지휘권을 박탈당한다. 그는 1918년 볼셰비키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이것이 1차 대전 초기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거둔 유명한 탄넨베르크 전투이다.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 상대방을 격파한 한니발의 칸나에(이탈리아)나 나폴레옹의 오스텔리츠(현재 슬로바키아의 슬라프코프)에 비교될 수 있는 지휘관의 천재성이 발휘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전투에 늦게 참여한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라는 두 전쟁 영웅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전략적 측면에서 탄넨베르크는 독일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승리였다. 러시아군의 신속한 동원을 우려한 베를린 총참모부가 서부전선의 정예부대를 동부로 이동시켰는데, 이 부대가 철길에서 한창 달리고 있을 때 전투가 끝나 버린 것이다. 반면 주 무대인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파리를 눈앞에 두고 투입할 예비 병력이 모자라 마르느 전선에서 진격이 저지당했다. 이후 전쟁은 지루한 참호전으로 변하며 자원이 부족한 독일의 패배로 연결된다. 종전 후 호프만은 회고록에서 탄넨베르크 전투의 공을 가로챈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장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관생들을 전장에 안내하면서 “봐라, 이곳은 힌덴부르크가 전투 전에 잠잔 곳이고, 이곳은 전투가 끝난 뒤 잔 곳이며, 이곳은 전투 중 잠잤던 곳이다”라고 말했다. 정보의 수집만이 아니라 그 해석/판단과 실천의지의 중요성을 보여준 역사의 한 사례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 2015-08-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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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세상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인간의 굴레 <탈바꿈의 동양고전>
- 2500년 전 공자의 말씀이 현대인들에게도 공감을 사는 이유는 뭘까? “그거야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으니까 그렇지.” 오종남(吳鍾南·63)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세상에서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을 권한다. 왜냐, 기원전에 살았던 공자도, 21세기를 사는 우리도 인생이 고달픈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이 책이 언제 그의 손에 들렸는지는 모른다. 그건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최근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그의 마음에 드는 책이다. 논어, 맹자, 대학 등 다양한 고전을 읽어봤지만 이토록 쉽고 명쾌하게 고전을 요약해놓은 책은 없었다. “책의 저자가 나보다 한 10년쯤은 젊은 사람인데, ‘이야, 참 멋있는 책을 썼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도 여러 번 읽고 주변에도 많이 선물해줬죠. 제가 IMF 상임이사 시절에 IMF 총재가 제주에서 열리는 연차총회에 가는 길에 잠시 서울을 들른 적이 있어요. 그때 서울을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남산을 모시고 올라갔죠. 서울의 역사와 한강의 기적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니까요. 이 책도 그런 책이에요. 논어, 맹자, 손자병법, 도덕경, 중용, 대학이 한 권에, 그것도 쉽게 읽어볼 수 있게 돼 있잖아요. 고전을 읽어본 사람이든 아니든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이죠.” 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成器), 인불학 부지도(人不學 不知道)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길을 모른다’는 뜻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오 고문은 이 말을 곱씹어 본다. “대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가 없어요. 사람들이 지식이 많은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죠. 배운다[學]는 것도 지식을 학습하라는 게 아녜요. 지식은 요즘 스마트폰에 다 있잖아요. 그렇다고 운전면허 따듯 기술을 배우라는 뜻도 아니죠.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길[道)]을 깨치라는 거예요. 사람이 지혜를 배우려 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몰라요. 나는 그런 의미로 ‘인불학 부지도’를 해석하고 있어요.” 성공하는 사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그는 중년이 되고 나서 성공이라는 게 참 간단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령 장사를 하더라도 손님이 다시 찾아와야 성공하는 것이고, 잡지를 보고도 다음 달에 또 보고 싶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아주 간단해요. 예를 들어, 부탁이 있을 때만 연락이 오는 친구를 A라 하고, 내가 필요할 때 전화를 걸어 수다 떨고 싶은 친구를 B라 합시다. 본인 입장에서 어떤 친구가 더 좋겠어요? 당연히 B겠죠. 그렇다면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B가 되는 거죠. 자기가 B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거예요.” 그는 또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적자생존(赤字生存)’이다. 적자를 보는 게 성공하는 사람으로 생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엔 타임 스팬(time span), 즉 기간을 얼마로 보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친구들은 주로 더치페이를 하죠. 만약 친구와 밥을 먹는데 오늘 내가 밥을 샀어요. 당장 오늘은 마이너스겠죠. 그럼 그 다음번에 그 친구가 ‘저번에는 네가 샀으니 이번에는 내가 사마’라고 할 거 아녜요. 그게 인간의 염치라는 거니까요. 그러면 다시 플러스가 돼서 결국 0이 되겠죠. 돈은 똑같이 들겠지만 더치페이를 할 때는 없던 정이라는 것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오늘 적자라 해서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얼마나 멀리 내다보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그래도 염치없는 인간을 만나 나에게 마이너스가 되면 안 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럴 때는 그냥 손해 보는 거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게 긍정적 사고라고 착각해요. 되긴 뭐가 되겠어요.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 뭐가 안 되더라도 ‘그래 그런 거지 뭐’ 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가짐, 그게 긍정적인 거예요. 그러니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그거에 집착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유니세프 사무총장 오종남의 2년 급여 ‘1원’ 2013년 2월부터 2015년 3월까지 2년 여를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직을 수행한 그가 받은 총 급여는 단돈 1원이다. 그는 보람으로 일구어낸 1원을 급여통장이 아닌 1원이 박혀 있는 기념패로 대신 받았다. “내 본업은 김앤장 고문이에요. 그 외의 일들도 많이 겸하고 있지만 본업 외에는 원칙적으로 다 봉사라고 생각해요. 근데 규정상 유니세프 사무총장은 보수를 받게 돼 있다지 뭐예요? 나는 받고 싶지 않았는데 꼭 받아야 한다고 하니 ‘그럼 나 1원만 줘라’ 그런 거죠.” 연봉 1억원을 받는 사람은 수없이 많겠지만, 그처럼 연봉 1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까? 1원을 받고도 이토록 행복한 사람은 또 있을까? 그는 급여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보람되고 행복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커다란 드럼통에 옥수수 전분 같은 것을 잔뜩 넣고 죽처럼 끓여 먹곤 했거든요. 나중에야 깨달았는데 그때 그 죽이며, 공책, 연필 등이 다 유니세프에서 온 것이더라고요. 그 죽을 먹고 자란 내가 사무총장이 돼서 아프리카나 라오스에 있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돕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아세요? 돕는다는 것은 말이죠, 도움을 받는 사람 이전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행복해야 해요. 다들 그런 감정을 느끼며 행복을 나누고 실천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요?”
- 2015-08-2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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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상속 가이드] 외국에서의 상속포기 효력
-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J씨는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2012년 3월 말경에 사망하였다. 상속인으로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 장녀 B씨, 차남 C씨가 있었다. J씨는 일본에서 재산을 모으지 못했고 오히려 빚만 있는 상태였다. 장녀 B씨는 2012년 6월 5일,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는 상속포기기간을 3개월 연장 받은 후 2012년 8월 27일 도쿄 가정법원에 상속포기 신청을 하였다. B씨의 상속포기 신청은 2012년 8월 8일 수리되었고,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의 상속포기신청은 그 해 9월 13일 수리되었다. 이에 반해 차남 C씨는 상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J씨는 대구 동구와 경북 영천시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차남 C씨는 이 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쳤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는 “차남이 자신만 상속받기 위해 대한민국 부동산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일본에서 상속포기를 하게 한 다음 이전등기를 했다”며 자신들의 상속분에 해당하는 지분에 대해 C씨를 상대로 소유권이전 말소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K씨와 A씨의 청구는 인정될 수 있을까. 위 사례에서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가 일본 법에 따라서 상속포기를 하였는데 그 상속포기가 유효하여 배우자 K씨와 장남 A씨가 상속인이 될 수 없는지, 아니면 대한민국 민법에 따라 3개월 내에 상속포기 신청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J씨 사망 3개월이 지난 후에도 대한민국에서 상속포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상속인의 지위가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J씨가 일본에서 사망한 후 그 배우자와 장남, 장녀가 상속포기신청을 하였으므로, 상속포기 절차에 대한 관할 법원 및 상속포기에 관해 어느 나라의 법률을 적용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즉 K씨와 A씨가 대한민국에 있는 상속재산에 대하여 대한민국 법원에 별도의 상속포기 신청을 하여야만 하는지가 문제되고,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3개월 내에 상속포기를 하여야 하는지가 쟁점이 된다. K씨와 A씨는 “도쿄 가정법원에 한 상속포기신청은 국제사법 제17조 제5항이 행위지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있는 ‘물권 그 밖에 등기해야 하는 권리를 정하거나 처분하는 법률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J씨가 소유한 대한민국의 부동산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즉 K씨와 A씨의 상속포기는 일본에 있는 재산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고, 대한민국에 있는 재산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구고등법원은 “국제사법상 상속에 관한 준거법은 사망한 J씨의 본국 법인 대한민국 민법이 원칙이지만, 법률행위 방식인 행위지법은 일본의 법에 의한 것도 유효하기 때문에 원고들(K씨와 A씨)이 일본 법원에 신청한 상속포기도 유효하다”고 밝히고 “따라서 원고들은 모두 상속포기 기간 내에 상속포기 신청을 했으므로 상속포기 기간인 3개월이 지난 뒤에 상속포기를 했다는 주장은 이유 없다”고 덧붙였다. 위 사례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 일본(타국)에 살다가 사망한 경우 상속인들이 일본 법원(타국 법원)에 상속포기를 신청했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부동산 등 재산에도 상속포기의 효력이 미친다는 점을 밝힌 판결이다. 따라서 위 사례의 경우 K씨와 A씨가 일본에서 한 상속포기 신청의 효력은 유효하다. 이에 따라 C씨가 유일한 상속자로서 대구 동구와 영천시에 있는 부동산을 상속받았으므로, K씨와 A씨가 C씨를 상대로 한 소유권이전등기 말소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2015-08-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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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철의 스포츠 인물 열전] 우리나라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김기수'
-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 2015-08-0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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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되기]아내의 헌신과 의료진의 노력이 빚어낸 사랑
-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라뽀(rapport)라고 말한다.당신의 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내 신정아(申貞娥·44) 씨의 간을 이식받아 새 삶을 얻은 이경훈(李敬薰·48) 씨와 그를 살린 분당서울대병원 한호성(韓虎聲·56), 최영록(崔榮綠·40) 교수가 그들만의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감사합니다. 저는 너무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서, 그리고 여기 좋은 교수님들과 함께해서 전 복 받았죠. 제가 새 삶을 얻은 것은 모두의 사랑 덕분입니다.” 이경훈씨에게서는 남다른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씨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은 따뜻했고, 부부를 바라보는 교수들은 흐뭇한 미소로 화답했다. 아내의 간을 이식받은 남편, 이 부부의 새로운 삶에 동행하는 의료진은 한가족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통증, 그리고… 이경훈씨는 2011년 11월 신정아씨와 화촉을 올렸다. 마흔 넘어 결혼했지만, 그렇기에 남들보다 즐겁고 소중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이씨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든 다 해주고 싶은 남편이었다. 결혼 후에는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과로가 쌓이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다. 결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위가 쓰린 날이 많아졌다. 동네 병원에서 위궤양을 판정받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선선하게 가을바람이 불던 일요일로 기억됩니다. 말로 못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어요. 결국 119를 불렀고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위궤양은 약 처방을 받으며 조금씩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평소 앓던 B형 간염 증세가 악화되면서 간성혼수(肝性昏睡)가 생겼더라고요. 그때부터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날이 많아졌어요.” 병원을 오가는 동안 그는 점점 지쳐갔다. 지난해 7월에는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가야 했다. 그 이후, 다니는 병원을 포천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의정부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정밀검사결과는 간암이었다. 다행히 색전술은 받았으나 간기능 저하로 인해 간이식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 대학병원에서는 간이식 수술을 할 만한 의료진이 없었다. “처음에는 위궤양 판정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간암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간이식을 받아야 한다니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위해서 간이식을 받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때만 해도 아내의 간을 받을지는 몰랐었죠.” 이씨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해 간이식 명의로 알려진 한호성 교수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한 교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를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생각하고 2014년 가을 한 교수를 처음 만난다. 지난 3월 드디어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내의 사랑과 의료진의 헌신에 힘입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현재 이씨는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통상 간이식 환자들은 면역억제제를 장기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부작용 등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열심히 극복하고 있다. 의료진의 말을 잠시 빌리면, 수술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이지만 관리가 되고 있어 약도 줄이고 있고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검사결과도 없다. 아마도 아내와 의료진에게 받은 사랑 덕택이 아닐까? 다만,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하는 과정동안 직장을 잃게 돼 경제적인 부분이 어려운 상태다. 그런데도 그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제를 뛰어넘으리라 다짐한다. 그에게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는 기간이면서도, 가장으로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다. 엄마에게 신장, 남편에게 간을 준 여자 신정아씨는 가족을 위해 두 번 장기 기증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신장을, 남편에게는 간을 떼어준 특별한 사람이다. 신씨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고혈압과 갑상선 질환을 앓다가 유행성출혈열의 합병증으로 신장 기능부전이 생겨 신장이식 수술이 필요하게 됐다. 신씨는 어머니를 위해 신장을 기증키로 했다. 이식 수술 후 어머니와 신씨 모두 건강하게 지냈다. 이씨와 결혼도 하고 행복이 무르익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께 신장을 떼어준 지 8년이 지났을 때, 남편이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가 남들과 다른 건지, 이상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간을 떼어주는 일, 그걸로 고민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신장이식을 했기 때문에 간이식도 가능할지 궁금했어요. 결국 적합판정을 받게 됐고,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주는 일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신씨는 남편도, 의료진도 만류했지만 간을 떼어주고 싶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있다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다시 깨 볶는 소리가 들리는 가정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현재 신씨는 퇴원 후 건강관리를 받으며 음식 조절과 가벼운 운동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 두 번이나 장기기증을 했지만, 남편의 사랑에 기운을 내고 있다. 그녀에게 장기기증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두 번의 장기 이식 수술을 경험하며 확고한 신념이 자리 잡게 되었어요. 장기이식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니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가졌으면 한다는 겁니다.” 참 따뜻하고 믿음직한 의료진 부부는 한목소리로 말했다. “참 따뜻한 선생님들이에요. 친절하다는 부분이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진짜로 생각을 해주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이 선생님들은 ‘환자를 진심으로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우린 많은 병원을 다녀봤기 때문에 잘 알아요.(웃음)” 특히 이씨는 수술 전후 상황이 아주 편했다고 회상한다. “자상하게 대해주시고 잘 될 거라고, 아내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긴장되고 떨리기도 할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수술 후에도 그냥 숙면한 것처럼 일어났죠. 중환자실에 있어도 되는 건지 미안할 정도였다니까요. 수술도 수술이지만 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시니까. 두려움도 사라졌죠.” 전문의 3명의 긴박한 협동작전 2015년 3월, 부부의 간이식 수술은 분당서울대병원 암센터 간이식팀 한호성 교수(암·뇌신경진료부원장)와 조재영, 최영록 교수가 맡았다. 이들 3명은 팀을 이뤄 수술을 진행했다. 보다 신속하고 정교하게 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기증자 수술팀, 수혜자 수술팀으로 나눠 각각 진행하고 다시 협력하는 방식이다.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최영록 교수에게 당시 가장 고민했던 부분과 남은 과제가 뭔지 물어봤다. “이식 수술에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기증자의 안전입니다. 이미 신씨는 어머니께 신장이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죠. 부부는 우리들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수월하게 수술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부부 모두 빠르게 회복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 흔치 않은 상황인 만큼 특별한 수술이었어요. 앞으로도 부부가 더욱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게 남은 과제입니다.” 의사는 항상 환자 중심으로 산다 또 다른 이야기지만, 메르스 공포가 한창이던 6월 20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는 잠정 의심환자에 대한 간이식 수술이 진행됐다. 사실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했던 환자였다. 그런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을 집도한 한호성 교수는 이른바 ‘노력하는 명의’로 통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한 교수의 삶은 환자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신념을 듣고 싶었다. “학생들에게 항상 책보다 환자를 먼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의사로서 살고 있는 중요한 가치이기도 합니다. ‘어느 책에 제시된 것처럼 이 정도면 포기하는 게 옳다’라는 판단 대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환자의 안녕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가 잘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에게 좋은 환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봤다. “본인의 의사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외과의로서 말씀드리자면, 작은 수술이나 큰 수술이나 합병증을 조심하셔야 되는데요. 합병증으로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만큼 수술 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의사와의 관계가 깊을수록 그 관리가 더 수월해집니다.”
- 2015-08-0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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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부부는 이심전심 아닌 동상이몽
- 부부 생활에서 배우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항상 같다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매우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돈독하고 행복한 부부생활, 가정을 꾸리기 위한 현명한 기술이 중요하다. 여기 사회생활 ‘만점’, 가정생활 ‘빵점’이었던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현재 가정 행복코치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부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한 현명한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됐다. 짚라인 코리아의 대표이자, 부부 토크쇼 ‘둘이 하나데이’의 진행자. 이제는 그를 수식하는 단어도 많다. 이수경 씨다. 그가 이렇게 변한 사연은 무엇일까? 1993년, 22년 전 어느 날을 이수경 대표는 잊지 못한다. 당시 직장인이었던 이씨가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할 때였다. 5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하고, 3년에 한 번씩 자동차를 바꿔야만 훌륭한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물었다. “여보, 당신은 행복해요? 난 지금 하나도 안 행복해.” 이런 말을 하는 아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며 콧방귀를 뀌던 찰나에 아내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한다. “여보, 우리 가족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부세미나에 한번 참석해 봅시다.” 특별히 부부생활에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이씨는 아내의 이런 제안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부부 세미나는 문제가 있는 부부만 참석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꺼려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이씨의 대답은 ‘No!’. 그가 생각하기엔 그곳에 참석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내도 포기할 줄 몰랐다. 이씨를 설득해 부부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3일 밤낮을 애원했다. 회사 생활에 빠져 집에 들어오면 침대에 눕기 바빴던 이씨와의 부부생활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내의 정성에 이씨도 백기를 들었다.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부부세미나에 참석하기로 한 것. 내키지 않은 동행이었지만 그것이 이수경의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가정 ‘권위자’에서 가정 ‘경영자’로 2박 3일 일정의 부부세미나. 이씨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 부부세미나의 첫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미나 참석 자체가 불만이었던 이씨는 강의가 시작하자 의자에서 엉덩이를 쭉 빼고 눕다시피 앉았다. 일종의 불만 표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도 강의가 시작되자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구부정했던 허리는 이미 꼿꼿해졌고, 강의를 듣는 눈빛은 초롱초롱해졌다. 강의에서의 그 무엇인가가 이씨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이다. “그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거만했죠.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니 집에서 잠만 자도 다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강의를 듣고 나니 그것이 아니더라고요. 가정에서 권위만 가지려 했지 가장으로서 가정 경영은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뒤통수가 시원해지더라고요.” 강의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 교육을 이전에 들었던 참가자가 그들의 부부생활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이씨 부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편은 가족이 모두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정 경영을 도외시하고 있는 모습. 그것은 이씨 부부 생활을 실상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 수업이 이수경 가정생활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아내에게 “가정을 경영하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선언한 후, 꼬박 2년 동안 국내에서 열리는 수많은 부부세미나에 참석했다. 부부관계나 가족관계에 대한 책도 30권 이상 탐독했다. 그렇게 다년간 부부와 가정생활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남편이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남편이 가정 문화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변하니까 가족이 변하더라고요. 주말에 잠만 자는 게 일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없더라고요. 그때부터 하나 둘씩 변하기로 다짐했어요. 그때부터 아이들과 포옹했는데 서른이 넘어서도 하고 있어요. 부부 생활도 바뀌었죠. 이른바 *텐텐 대화법으로 부부 사이가 더 돈독해졌습니다.” ◇ 매달 21일, 둘이 하나데이 “대한민국의 행복지수가 높지 않잖아요? 행복해지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가정 행복에 대해 연구를 하면서 가정이 행복해야 대한민국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의 오프라인 부부쇼를 기획하게 됐죠.” 이씨는 그 열정에 보람을 얹혀 개그맨 겸 소통테이너인 오종철과 손을 잡았다. 1년 동안 부부쇼 ‘둘이 하나데이’를 기획한 것. 지난 3월 21일 첫 선을 보인 ‘둘이 하나데이’는 매달 21일에 열리는데, 이는 ‘2(둘)이서 1(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부부의 날’인 5월 21일에서 착안한 것이다. 2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 부부쇼에서는 강연, 참가자 그룹회의, 가족 선서, 편지쓰기 등 유익한 프로그램들이 부부들을 맞이한다. 거기에서 이씨는 오종철과 함께 MC로 활약 중이다. 그래서인지 이수경에게서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진다. 기업인, 강사, 작가, 토크쇼 진행자, 가정행복코치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에너지를 뿜으며 이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가슴 깊은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열정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예요. 여러 가지 역할을 모두 놓치기 싫거든요. 물론 가정 경영자로서의 역할도요. 이 많은 역할 중에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은 바로 가정행복코치예요. 제가 20여년 전 느꼈던 것처럼 타인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넣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부부에게도 기술이 필요하다 “마음에서 마음을 전한다고요? 말을 안 하는데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은 부부 사이에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부부는 동상이몽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해서 서로의 이해를 얻어야 해요.” 가정행복코치가 된 후 그에게 부부 생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씨가 가장 크게 보람을 느낄 때도 그가 낸 책 나 강연을 보고 부부생활에 다시 활력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다. 그래서인지 그가 부부 생활 노하우를 담은 책 는 출판 이후 149주 연속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씨의 부부관계 노하우는 책, 둘이 하나데이, 개인 상담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이씨는 상담을 해보면 대부분의 부부 문제가 대화 부족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대화로 뛰어들었다간 위험할 수 있다. 감정이 격해져 비수가 꽂히는 말로 자칫 부부간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경우도 허다한 탓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현명한 대화의 기술이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어요. 라디오 방송을 마치고 비방송용으로 게스트들과 이야기하는데 한 분이 ‘청계천에서 손잡고 다니는 중년 커플은 다 거짓말이죠?’라고 하더라고요. 내막을 몰라서 참으로 당황스러웠는데 그분이 일종의 권태기였나 봐요.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가 꼴 보기 싫어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단점보다는 남편의 좋은 점을 하루 한 가지씩 노트에 써보라고 얘기를 했어요. 얼마 있다가 연락이 왔습니다. 남편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것이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둘이 하나데이에 나와 커플 스쿼트도 하며 부부 금실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부부생활 코칭과 ‘둘이 하나데이’의 긍정적인 성과가 쌓여가자, 이씨의 몸값도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가 1년 동안 기획한 ‘둘이 하나데이’는 한 기업에서 사내 복지의 일환으로 포맷을 그대로 따갈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이씨가 꿈꾸는 미래는 이제 더 큰 울타리를 향한다. “가화만사성이 사화만사성(社和萬事成)이라고 생각해요. 건강한 가정이 모여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거죠. 그 작은 것을 만들어 가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나중에는 대한민국의 많은 부부가 손잡고 ‘둘이 하나데이’에 오는 것을 상상합니다.” *텐텐 대화법이란 부부끼리 대화할 것에 대해 10분을 노트에 써 보고, 10분을 대화 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
- 2015-08-07 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