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문 동경 통신원 gounsege@gmail.com
NHK방송문화연구 미디어연구부를 책임지고 있는 하라 유미코(原由美子, 1962년생)의 까무잡잡하고 야무진 얼굴에서 관리직의 연륜과 함께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주위에서 엄격한 상사, 철저한 커리어우먼이라고 부를 만큼 한 마디로 일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일벌레’로 해외 출장도 잦았다. 주로 미국과 유럽 등을 많이 다녔지만, 정년을 앞두고 10년 정도는 한국, 중국, 몽골 등 아시아 지역으로 출장을 많이 갔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양국 방송에 대한 공동 연구, TV 방송 제작 심포지엄 등에 참가하기 위해 대구, 경주, 제주도 등 각지를 돌았다. 미디어연구부의 업무 때문에 한국의 일본 연구자들과 동아시아, 일본 드라마 등을 조사하고 분석하기 위해 자주 한국을 방문했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러다가 쉰 살 무렵 부장을 맡아 현장을 다니는 일보다는 자료 수집과 분석, 조사 등 주로 의자에 앉아 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가끔 서서 일할 때 다리의 힘이 풀려 휘청하는 등 하반신 근육이 많이 약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크게 깨달았다. “사실 20년쯤 전에 수면 부족, 스트레스 등으로 가벼운 안면 마비 증세가 생겼지만 꾸준한 운동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앞으로 더 나이를 먹을 텐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거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는 일이 더 많아질 걸 생각하니 더 심각해지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었죠.”
파도와 호흡하는 서핑에 빠져
그래서 58세 때 도전한 것이 서핑이다. 처음에는 근력을 키우기 위해 노를 젓는 타입의 서핑으로 시작해, 현재는 자신의 다리 힘만으로 파도를 타고 방향을 바꾸는 본격적인 보드를 즐기고 있다.
“건강을 위해 스포츠클럽에서 요가와 스트레칭, 체조 등을 해 왔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도 했는데 사실 말이 파도타기일 뿐 스탠딩 서핑은 노를 젓기 때문에 파도가 좀 있으면 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죠.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어떤 파도든 그 속에서 파도와 호흡하는 본격 서핑으로 바꿨답니다.”
하라 유미코는 줄곧 살던 도쿄(東京)의 집과는 별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서프 포인트이자 수많은 서퍼와 서핑 동호회가 즐겨 찾는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치가사키(茅ヶ崎)시에 별장까지 마련할 정도로 서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다.
“예순 살때 정년 퇴직을 하고 현재는 계약사원으로 일주일에 세 번 출근해 근무 중인데, 도쿄의 집은 화, 수, 목 근무 때 사용하고 치가사키의 집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이용해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있어요.”
서핑을 위해 바닷가 입지를 충분히 살린 세컨드 하우스는 그야말로 그녀의 제2 인생이 꽃을 피우는 곳, 의외로 서핑을 시작하는 중장년들이 많아 서핑 이외에도 그들과의 교류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아울러 스탠딩 서핑은 복근을 사용하고 노를 젓는 근력을 키우지만 본격 서핑의 전신 운동에는 미치지 못하며, 무엇보다 파도를 타면서 자연과 한몸이 됐다는 쾌감은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짜릿해 정말 배우길 잘했다고 덧붙였다.
모전여전, 다시 찾은 건강 만끽
하라 유미코에게는 어머니(1931년생)와 여동생(1959년생)이 있다.
어머니는 일흔 살 때 지금까지 꾸려오던 양품점을 접자 급격하게 체력이 쇠약해지고 각종 노인병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원인도 모른 채 살이 쭉쭉 빠져 체중이 35㎏밖에 되지 않은 적도 있었고,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미코의 극진한 간호와 꾸준한 치료 덕분에 현재는 체중을 55㎏까지 회복했으며, 건강도 되찾아 무엇보다 기쁜 일이라고. 치가사키에서 누리고 있는 제2의 삶에 맞춰 어머니를 노인요양원으로 옮겼으며, 매주 주말 시설을 찾아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건강이 회복된 어머니는 평일에는 노인시설에만 있지 않고, 치가사키에 있는 대학의 공개 강좌를 듣거나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라피까지 배우고 있어 지난 10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유미코는 혀를 내둘렀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살아간다는 점에서 아마도 모전여전일지 싶다. 미술을 전공한 여동생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현지 일본 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친구와 함께 리옹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화가에서 요리사로 변신해 자신이 만든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찾아주는 손님들과 나누는 행복한 시간이 벌써 16년이 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듯이 이렇게 세 모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삶을 놓치지 않고 알뜰하게 만끽하고 있다고 하겠다.
62세 홍일점 바다에 서다
서핑 동호회의 회원은 대개 50대 초반의 중년들이 많은데, 인생의 선배 하라 유미코는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유일한 고령의 여자라는 점에서 홍일점. 평일의 바닷가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문 반면, 의외로 중장년층 서퍼들이 꽤 많다고 한다. 골프처럼 필드에 나갈 때마다 돈이 드는 운동과 달리 서핑은 바다와 파도, 그리고 바람을 느끼고 이용하는 공짜 운동이라는 점도 매력이다. 서핑은 매년 3~4월 봄에 시작해 11월 말까지가 시즌으로, 파도를 타지 않을 때에는 유연성과 근력을 키우기 위해 체조 등으로 몸을 만들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은 바닷가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크린 캠페인에 참가하는 바다 사랑도 실천 중이다. 이어 유미코는 파도의 속성을 알고, 파도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파도에 몸을 맡긴 채 호흡할 수 있게 되면 먼저 일본 바다를 두루 섭렵한 뒤 세계 곳곳의 유명한 서프 포인트를 찾아가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파도를 직접 맛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거렸다.
허벅지는 제2의 심장
끝으로 일에 매진하면서 건강을 잃었다가 어렵게 되찾은 경험이 있기에 유미코는 이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좀 더 빨리 했으면 생각하지만, 절대로 늦은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안 할 뿐이죠. 생각이 있다면 행동에 옮길 것, 이걸 명심했으면 해요. 파도타기를 통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맞춰 산다는 가르침을 배웠는데, 일할 때 몰랐던 근육과 신경 등 여러 문제도 알게 되었고, 몸을 움직이면서 크고 작은 문제도 해소되고 몸도 부드러워지고 훨씬 가벼워졌어요. 친구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몸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특히, 제2의 심장이라는 허벅지를 지금부터라도 단련해 두면 제2의 인생이 든든해질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유혹과 충동 속에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본능과 욕구를 자극하고 부추기는 것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제어하고 다스리면서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느냐가 인생의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혹 곤혹 매혹 미혹 유혹, 이런 말에 들어 있는 惑(혹)은 정신이 헷갈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의미상 헤맨다는 뜻인 迷(미)와 같습니다. 인간은 정신이 헷갈리는 상태인 채 아득한 미망(迷妄)의 바다에서 발전과 구원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괴테의 는 바로 지식과 학문에 절망한 노학자 파우스트의 미망과 구원의 노정을 그린 작품이 아닙니까.
에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Es irrt der Mensch, solange er strebt)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 유혹에 흔들리고, 곤혹을 겪고, 미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선한 인간이 더 나아지기 위해 모색하는 온갖 행동이거나 징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나이 마흔을 일컬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의 불혹(不惑)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열다섯 살에 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고[志于學], 삼십에 일어서고[而立], 그리고 마흔이 되면 불혹이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불혹이란 공자님 말씀처럼 그렇게 학문에 뜻을 세운 뒤 문자와 글에 대해 품었던 여러 가지 의문이나 의심을 치열한 궁구(窮究)를 통해 풀어 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일까? 글이나 책 속에 온갖 유혹이 있고, 그 온갖 유혹을 공부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 과연 불혹의 경지인 것일까? 불혹을 지나면 지천명(知天命), 즉 자신의 천명을 아는 쉰 살이 되고, 또 더 지나면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거슬리지 않는 이순(耳順)의 예순 살이 되고, 좀 더 지나면 자기 마음대로 해도 걸릴 것 없고 거리낄 게 없는 불유구(不踰矩)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고전의 상식’에 동의하기 어렵고, 오래된 가르침을 배반하고 싶은 것이 오늘날 시니어들의 새로운 유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한 편지에 “모든 유혹 중에서 가장 강한 유혹은 본래의 자기와는 아주 딴판인 것이 되고 싶다고 바라고, 자기의 도달할 수 없는, 또 도달해서는 안 되는 모범이나 이상을 좇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유고에도 “가장 위험한 유혹, 그것은 무엇과 닮지 않겠다는 유혹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의 색깔이 약간 다르지만 헤세나 카뮈의 말은 자아 정체성의 확립, 독자적 자율성, 단독자로서의 삶, 이런 것에 관한 언급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스승, 역사적 인물들과 다르게 자신만의 얼굴과 특성을 만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현재의 자기와 다른 모습을 추구합니다. 남들이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 욕구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킬 박사의 다른 얼굴이 하이드입니다. ‘동방의 주자(朱子)’ 또는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말을 들었던 퇴계 이황 선생은 남들에게 알려진 모습과 전혀 다른 면이 있어 ‘낮 퇴계, 밤 퇴계’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신 중에서 야누스의 얼굴은 전쟁과 평화를 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어느 한쪽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2천년 교회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스승이라는 고대 서양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지만 젊어서는 정욕의 노예였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채 15년이나 동거하던 여자에게 아들을 낳게 하고 도둑질도 했던 그는 “눈을 뜨고 있을 때에는 이성에 의하여, 눈앞에 주어지는 정욕의 유혹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지만 잠잘 때에는 거짓된 환상이 나를 유혹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죄에 관한 질문을 통해 자신을 개조하고, 질문 속에서 새로운 삶을 완성해갔습니다. 그는 질문으로 가득 찬 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 태어나기 전에 나는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이었습니까?” “하느님은 선이신데 왜 악이 존재하며 그 악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그는 일생동안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실존적 문제의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유혹은 어떤 내용의 것이든 거역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입니다. 유방의 군사(軍師) 장량이 받았다는 에는 ‘고막고어다원 비막비어정산(苦莫苦於多願 悲莫悲於精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하는 게 많은 것보다 더 괴로운 게 없고 늙는 것보다 더 슬픈 게 없다는 뜻입니다. 다원(多願)을 다욕(多慾)이라고 쓴 자료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잠언에도 “훔친 물이 더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다 하는도다”(9:17)고 하지 않았습니까?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인간에게는 세 가지 유혹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친 육체의 욕망, 제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교만, 졸렬하고 불손한 이기심입니다. 베이컨에 의하면 이 무서운 병에 대해 취해야 할 수단이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하는 수양 이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로는 가장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또 때로는 가장 부패한 상태에 있으니 좋은 상태에 있을 때 조심하고 그 상태를 지탱해 악한 것을 몰아내라는 게 그의 충고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파우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가슴 속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서/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
그러니 아무런 잘못이나 죄도 저지르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남의 모범이 되는 삶을 영위한 사람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온갖 유혹과 정신적 방황을 겪고 인격을 완성해 나간 사람이 더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에서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는 자신이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창조해 내는 힘의 일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악마에 대한 내면의 저항은 선을 지키려는 의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하느님에게 파우스트를 타락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자신하며 내기를 제의하자 하느님은 “착한 인간은 잠시 유혹에 빠질 수 있지만,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글쓰기이든 운동이든 여행이든 인간의 삶 도처에 유혹이 있고, 가지 않은 길일수록, 해보지 않은 일일수록 손짓해 부르는 게 많습니다. 유혹이나 욕망이란 인간을 발전시키고 인격이 완성되도록 돕고 자극하는 삶의 에너지이며 촉매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토대로 지금 자신이 처한 유혹에 정면으로 맞서 잘 이겨나가도록 하십시오.
1987년에 대학을 졸업한 이후 군 시절부터한의사 생활을 했으니 어느덧 30년을 바라본다. 이재동(李栽東·54) 경희대학교 한방병원 침구과 교수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환자를 보면서 인체의 생체리듬과 자연치유력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헛발질을 줄일 수 있는 한방의 철학은 음양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한다. 새해의 시작,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한방의학의 비결을 알아보자.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시니어들의 새해 건강을 위한 한방학적 고찰에 관해 물었더니 의 기본 정신에 대한 설명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한의학 서적이란 게 수천 권이 있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한의학 하는 사람이나 대체의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모두가 에 열광합니다. 에는 몸이 건강하면 병은 스스로 치유된다는 정신이 있어요. 그래서 몸이 건강해지기 위한 양생법을 추구하죠. 양생이라면 도 닦는 사람이나 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저는 이걸 임상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 기본 정신은 사람의 몸이 하나의 소우주라는 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잘 따르고 순응하면 몸이 건강해진다고 설명한다.
“만물이 소생하고 형성되는 이치들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예를 들어 하늘의 태양이 지구를 비추잖아요. 햇빛은 양기죠. 그렇게 양기가 비추면 지구의 음기인 물이 위로 올라가서 비가 되어 내려오잖아요. 태양의 불과 지구의 물의 조화인 겁니다. 이 순환 속에서 생물들이 자라나는 거예요. 그것을 음양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우주, 음양의 조화가 중요
이 교수는 우리 몸을 잘 들여다보면 바로 심장이 태양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반면 비뇨생식기는 물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원리를 알고서 자기 몸이 조화를 이루게끔 노력해야 건강해진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수승(水昇), 물은 올라가고 화강(火降), 화는 내려가는 수승화강(水昇火降)만 잘되면 우리 몸이 스스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데, 현대인들은 삶 자체가 수승화강을 깨뜨리게 되어 있어요.”
이 교수는 어두워지면 자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게 자연에 순응하는 법인데 현대인들은 밤낮이 바뀌어 있다는 걸 지적했다. 현대의학적으로도 호르몬 생성에 중요한 시간이 밤 10시부터 아침 5시라고 한다. 건강하고 싶다면 그 시간을 필수 수면시간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밤 10시에 맞춰서 잠을 자는 현대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호르몬은 물입니다. 밤에 잠을 자야 음의 기운을 몸에 저장할 수가 있어요. 밤에 잠을 안 자면 그 음의 기운을 소모하게 되고 물이 말라서 음양의 균형이 깨져요. 물이 올라와서 불을 꺼줘야 하는데, 불을 못 꺼주니 기운이 위로 뜹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머리에서 생기게 돼요. 현대인들은 분노조절장애가 많이 있죠. 몸이 안정되고 불을 꺼주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데 밤에 잠을 못 자는 상황에서 스마트폰, 컴퓨터, TV에서 나오는 전자파가 우리 몸의 진액을 말리는 거예요. 충혈도 그렇고 뒷골이 당기고 얼굴에 상열감이 있고 고혈압이 발생하는 등의 현상들이 다 거기서부터 오는 겁니다.”
점차 말라가는 우리 몸의 음기를 유지해야
이 교수는 나이가 들어서 만들어지는 체형을 보면 대부분이 가분수라는 점을 지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체는 가늘고 위는 비대한 체형이 된다. 이는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몸에 물이 부족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자꾸 진액을 말렸기 때문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팔은 굵어지고 어깨는 두꺼워지고. 살면서 그런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지혜가 있으니 원리를 알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이 교수는 생활과 노력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지는 걸 보완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는 식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키와 체중에 대해 얘기를 하지, 체지방을 구분해서 얘기를 안 해요. 우리 몸의 지방이라는 것은 일종의 독소죠. 독소가 꽉 차 있으면 기가 위로 올라가지 못해요. 에너지가 올라오는 길이 경락입니다. 지방이 몸에 쌓이게 되면 그 길에 문제가 생겨요. 그러니 음양의 조화를 위해 지방을 빼야 합니다.”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
이 교수는 지방을 돈으로 비유한다. 예를 들어 키와 근육의 양을 봤을 때 필요한 지방을 남겨놓고 넘치는 분량이 12㎏이라면 그 사람은 은행에 12억 원을 넣어놓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평소에 ‘현금’을 많이 보충했기 때문에 그렇게 자산이 쌓였다고 표현하는 이 교수는 그 ‘현금’의 정체가 바로 ‘탄수화물’이라고 밝혔다.
“현금인 탄수화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럼 탄수화물 대신에 뭘 먹어야 할까요. 노후에 하는 대표적인 경제적 대비로 건물을 만드는 게 있죠? 그러한 부동산이 바로 단백질입니다. 나이가 들면 단백질을 주로 먹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나이 쉰 살만 넘어가면 무조건 탄수화물을 줄이고 단백질을 먹으라고 해요. 왜냐하면 쉰 살까지는 현금, 그러니까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공급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은행에 매월 500만 원씩 넣다가 차단하면, 금융적으로 대처하는 데 혼선이 생길 수 있다. 이걸 몸의 관점으로 봤을 때,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 섭취에 전념하면 당장은 현기증, 어지럼증 등의 신호가 올 수 있다. 이 교수는 그러니 우선은 급하지 않게 조금씩 탄수화물을 끊고 단백질을 섭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단백질에도 일정 분량의 탄수화물이 있기 때문에 단백질만 먹어도 몸에 쟁여둔 탄수화물에 비춰보면 필요한 탄수화물의 유지에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지방 분해를 위해 활용하는 약도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그는 약을 심부름꾼이라고 불렀다. 심부름꾼은 은행에서 돈을 효율적으로 찾아오는 역할, 즉 지방대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끔 설계된 것이다.
지방이 만병의 근원이 되어가고 있다
이 교수는 배에 지방이 쌓인다는 것은 종합적인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척추를 받쳐주는 힘이 약해질 수 있다. 지방이 빠져야 근육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생기는데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피가 탁해지고 녹슬어 중풍, 심장병 등의 위험도 높아진다.
우리 몸의 모든 조직은 깨끗한 피가 혈관을 돌면서 영양을 공급해주고 더러운 요소들은 운반해 소변으로 걸러준다. 그런데 지방이 있으면 그 피가 탁해진다. 그렇게 되면 면역 기제들이 자기 피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여겨 공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가면역질환이다.
“건강해지려면 가장 기본적인 것에 대해 변화를 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무조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서 연골을 제거하는 그런 식의 해결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결국 시장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치료라고 봐요.”
과거엔 발암의 첫 번째 원인이 흡연이었다. 최근 그걸 뒤집은 게 비만이라고 한다. 지방이 껴 있으면 순환이 안 되고 순환이 안 되면 혈액이 탁해지는데, 혈액이 탁해지면 의혈이라는 암세포의 식량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음양의 조화를 통한 건강, 생활속에서 만들어야
이 교수는 음양의 기운을 다스려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는 충분한 잠이다.
“현대인들은 밤 10시가 어렵다면 최소한 11시에는 자야 합니다. 그렇게 습관을 바꿔 문제를 예방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해요. 그리고 커피와 녹차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을 심하게 못 자는 사람은 아침 10시 이후에는 아예 커피와 녹차를 마시지 말아야 해요.”
두 번째는 되도록 많은 물을 섭취하는 것이다.
“물은 사라진 음기를 보완할 수 있는 음의 에너지입니다. 물은 하루에 2ℓ를 마시는 게 좋습니다. 물을 마실 때는 입을 적시듯 마셔야 해요. 사람들이 물을 못 먹는 이유가 대부분 흡수가 안 돼서입니다. 입에 적시듯 먹으면 괜찮아요. 우리 몸은 70%가 수분으로 이뤄진 일종의 물통입니다. 물통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은 깨끗한 물을 넣어주는 것이죠.”
세 번째는 음식을 구분해 먹는 것이다.
“예순 살이 넘어가면 탄수화물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과일도 간식으로라도 먹는 게 아닙니다. 과일도 탄수화물 덩어리거든요. 절제해야 해요.”
네 번째는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가면 상체 운동은 손가락 움직이는 것도 안 하는 게 좋아요. 대신 무조건 하체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단 오르기 같은 생활 속의 운동으로 하는 게 좋습니다. 걷기는 하체 운동이 아니라 유산소 운동이에요. 하체 근력 운동을 하면 유산소 운동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래서 저는 계단을 만나면 정말 반갑고 고마워요.”
이 교수는 얼핏 보기에는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는 질환들이 실은 하나의 원인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병에 맞춰 각각 해당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반복적인 시술만 받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치유하자는 이 교수의 제안이 살갑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글. 박종진 만년필동호회장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대한 것은 오랜 시간과 노력 끝에 완성된다는 뜻이다. 만년필도 이와 같다. 1800년대 후반 실용적인 만년필이 만들어졌지만,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며 필요 없는 것은 사라지고 편리한 것은 추가돼 지금의 모습이 됐다. 이것은 재미있게도 발전하고 다듬어지는 우리의 인생(人生)과 비슷하다. 유년기,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발전기가 치열하게 경쟁하던 청년기인 황금기가 있다. 그리고 황금기를 지나면서 만년필은 완성됐다.
발전기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은 1883년 뉴욕에서 보험을 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46세에 발명했다. 실용적이라는 말이 앞에 붙은 것은 이전에도 만년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필은 잉크를 저장 휴대하려는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1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것이 남아 있고 1800년대가 되면 특허가 등록되는 등 갖고 다닐 만큼은 못 돼도 만년필은 있었다. 워터맨은 모세관현상(毛細管現象)을 이용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쓸 수 있고 필기 도중 잉크가 쏟아질 일은 없어졌다.
만년필은 빠르게 발전했다. 휴대가 일반화됐고 체온(體溫)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데워진 공기는 펜촉에 남아 있는 잉크를 밀어 흘러나왔고 쓰려고 하면 손에 묻었다. 화살클립으로 유명한 파커사(社)의 창업자 조지 파커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여러 발명가 중 하나였다.
세기가 바뀌면서 문제는 해결되고 편리하게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채울 수 있게 됐다. 1905년 처음 클립이 만년필에 장착돼 연필 모양이었던 만년필은 클립의 추가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황금기
1920년대 이후 만년필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전이 실용적인 만년필의 아버지인 워터맨사(社)의 독주(獨走)였다면 황금기는 워터맨, 셰퍼, 파커, 월의 4파전이었다. 먼저 치고 나온 것은 셰퍼였다. 바닥에 떨어져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두껍고 튼튼한 펜촉을 장착하고 ‘LIFE TIME’이란 이름으로 첫 구매자의 평생 동안 보증을 해주는 자신감 있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것은 즉시 성공했고 내구성은 업계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해 파커는 빨강과 검정의 두 가지색으로 대비, 눈에 확 들어오는 듀오폴드를 내놓는다.
기능의 추가는 아니었지만 컬러는 황금기 초반에 보증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1위였던 워터맨 역시 컬러의 공격에 움직이기 시작해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1924년 새로운 재질인 플라스틱이 상용화돼 컬러는 다양해지고 무게는 가벼워졌다. 1929년에는 위와 아래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유선형이 등장했다. 만년필의 전형(典型)으로 알고 있는 형태이다.
고무 튜브 안에 잉크를 채우던 방식이 1930년대 들어서자 구식(舊式)이 됐다. 요즘처럼 몸통 뒤의 꼭지를 돌려 잉크를 채우는 것도 이 시기를 전후로 독일과 미국에서 나왔다.
현대
1920년부터 시작해 1940년까지 약 20년간의 황금기는 보증(保證), 컬러, 플라스틱 재질, 유선형,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 등 현대 만년필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대에 남은 것은 이것들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1941년 만년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만년필인 파커51이 출시됐다. 황금기에 나온 모든 것들이 적용됐고 어디 한 군데 허술한 곳이 없었다. 흔들어도 잉크가 튀지 않았고 전쟁터에 군인이 꽂고 나갈 만큼 튼튼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독일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후 두 자루의 파커51로 V를 만든 것은 꽤나 알려진 일화다.
황금기의 유산(遺産)은 파커51에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2년 몽블랑사(社)에서 출시한 몽블랑149 역시 그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유선형의 몸체, 크고 화려한 펜촉, 새로운 잉크 충전 방식은 파커51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만년필은 1883년 실용적인 만년필의 시작이 약 30년의 발전기와 황금기의 20년을 지나 완성된다. 사람으로 치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 살이다.
쉰 살은 쉰 이어(year) 고 시니어다.
수집과 동호회
동전 위에 있는 만년필은 “World’s smallest Pen”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로 알려진 펜이다. 잉크를 넣어 사용할 수 있고 성냥개비보다 작아 길이는 약 41mm다.
때때로 Doll’s Pen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메리 왕비의 인형의 집에 전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왕비는 영국 왕 조지5세의 아내로 당시 세계 최고의 수집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크리스마스에 자국의 군인에게 연필과 담배가 담긴 ‘Princess Mary Tin’을 보내기도 했다.
만약 이와 비슷한 만년필이 있는데 좀 더 알고 싶고 진위(眞僞)를 가려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호회를 찾아야 한다.
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만년필의 동호회는 옛날이야기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비싼 만년필을 자랑한다면 이내 싸늘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 수도 있다.
새로운 만년필을 구하는 것은 탐험과 같다. 낭떠러지가 있고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고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별 아래 둘러 앉아 맹수를 사냥한 전사의 성공담이 있는 것처럼 동호회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서랍 속에 만년필이 있다면 분명 그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 알아봐 들려줄 수도 있고 내가 사냥꾼이 돼 이야기할 수도 있다. 모임은 그런 이야기로 차 한 잔을 두고 10시를 넘어 11시가 다 되도록 채워진다.
사물(事物)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보이지 않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누구나 다 아는 공자님 말씀 한 자락. 공자(孔子)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위정(爲政)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三十而立), 마흔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되었고(四十而不惑), 쉰에는 하늘의 명을 깨달았으며(五十而知天命), 예순에는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고(六十而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무려 2500년이 흐른 지금 적어도 마흔부터 예순까지는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게 필자의 주장이다. 요즘 마흔이라는 나이는 말 그대로 유혹의 시기이고, 나이 쉰이 되었어도 하늘을 알기는커녕 나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예순 줄에 들면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줄 알았더니 더 노여워지기가 십상이다.
공자님 이야기로 길게 시작하는 이유는 패러다임이 바뀌면 그에 따라 우리의 성향과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인생은 춤(Life is a dance)’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것이다. 인생이 춤이라면 우리는 어떤 춤을 추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것이 “음악이 바뀌면 춤도 바뀌어야 한다(When the music changes, so does the dance)”라는 아프리카 속담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속담을 춤에만 적용하고 실생활에서는 적용을 못해서인지 춤은 잘 추는지 모르지만 먹고 살기가 수백 년 동안 힘들다. 반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나라와 기업, 개인들은 바뀌는 음악에 맞춰 춤을 잘 바꿔온 경우가 아닐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1%대의 초저금리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우리는 거기에 맞춰 우리가 가진 자산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과도하게 부동산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낮은 금리에도 손실 위험이 없는 은행 예금에만 돈을 넣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난 기고에서 필자는 2001년 83%로 고점을 기록한 우리나라 가계의 부동산 보유 비중이 2014년 68%로 낮아진 데 이어 2020년대 초반에는 60% 안팎까지 더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소득 1만 ~ 2만 달러 시대의 ‘내 집 마련’에서 소득 3만 달러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은 집을 넘어 ‘늘어나는 소득을 어떤 자산으로 굴릴 것인가, 즉 예금·보험·주식과 같은 금융자산을 어떻게 굴릴 것인가?’로 자산관리의 초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은행 예금이여! 잘 있거라, 나는 간다’이다. 유명한 소설 제목과 유행가 가사를 적절히 조합한 것이다. 그럼 문제는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누가 몰라서 은행에 돈을 예금하겠는가! 막상 집이 싫다고 나와 보면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경우와 같은 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금융자산 중 예금이나 채권, 연금·보험과 같은 안전자산, 즉 수익률은 낮지만 원금 손실의 위험이 거의 없는 안전자산에 80%를 넣어두고 있다. 반면 주식이나 펀드처럼 수익률이 높을 수는 있지만 원금 손실위험을 안고 가는 투자자산에는 20%만을 배분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에서 안전자산으로는 현금 및 예금(결제성+단기저축성+장기저축성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42.0%로 가장 높고, 그 뒤를 보험 및 연금이 31.5%, 채권이 6.4%를 차지하고 있다. 투자자산에서는 주식과 투자펀드가 각각 15.6%, 3.7%에 불과하다.
10년 전인 2004년과 비교하면 큰 변화를 읽을 수 있다. 2004년 말의 경우 현금 및 예금 비중이 50.1%로 압도적으로 높은 가운데, 보험 및 연금 비중이 22.6%, 채권 비중이 9.8%로 총 안전자산 비중이 82.5%였다. 반면 투자자산인 주식 및 투자펀드(2013년 이전 통계의 경우 주식과 투자펀드를 따로 구분치 않고 있음)는 16.4%에 불과했다.
지난 10년 동안 현금 및 예금 비중은 50.1%에서 42.0%로 8%포인트나 줄어들었다. 반면 보험 및 연금 비중은 22.6%에서 31.5%로 늘어나고 주식 및 펀드 비중은 16%대에서 19%대로 늘어나고 있다. 그간에도 저금리를 참지 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은행에서 빠져나와 보험 및 연금, 주식 및 펀드로 대거 돈을 옮기는 머니무브(Money move)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국민연금이 노후생활비의 20~30%에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개인연금과 퇴직연금 가입이 급증하여 보험 및 연금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물론 일본처럼 제로금리인 가운데서도 현금 및 예금 비중이 여전히 56%를 넘는 나라도 있기는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들처럼 제로금리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으로 금융자산을 운용하면서 은행 예금을 선호할 것인가? 일본의 경우 워낙 쌓아놓은 금융자산이 많기도 한 데다 국민성 자체가 매우 보수적이다. 하지만 동적이면서 화끈한 국민성에 한쪽으로 쏠리는 신드롬 현상을 자주 일으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금리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보다 높은 수익률을 찾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필자가 생각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경제규모(GDP)에서 전 세계 경제의 23%의 압도적 1위인 데다 금융 및 외환거래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50% 이상, 무역거래에서는 80% 이상이다. 또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과 유럽의 금융산업이 위축되고 있다는 점에서 금융에서는 점점 더 아메리칸 스탠더드(American standard)가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로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정도와 속도의 문제일 뿐 미국형 포트폴리오를 따라가는 큰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가계의 금융자산 포트폴리오는 현금 및 예금, 보험 및 연금 등 안전자산 비중이 50%, 주식 등 투자자산 비중이 50%로 반반씩을 점유하고 있다. 특히 현금 및 예금 비중은 14.4%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나라 가계들도 현재 80%인 안전자산,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42%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금 및 예금 비중을 더 줄이는 대신 주식과 펀드 등 투자자산으로 돈을 이동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간 즉시연금(보험사 등 금융회사에 목돈을 맡기고 연금으로 받는 상품) 등이 대거 유입되면서 비중이 높아진 보험 및 연금의 경우 추가적 비중 제고보다는 지키는 선에서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원금 손실 위험이 없는 안전자산 위주로 금융자산을 운용하다가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투자자산으로 옮겨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음악이 바뀌고 있다면 그에 맞는 춤을 찾아내고 그 춤을 배우는 게 인생이다. 춤과 투자는 엄청나게 연습을 해야 잘 할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게임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간신히 연락이 닿아 원고를 청탁했더니 “나는 컴퓨터도 안 하고 육필로 쓰잖여. 글씨도 못 알아볼 건데 그냥 됐시유. 내가 보니께 나랑 안 맞는 것 같유. 그 책하고는. 난 부족한 사람인디. 글 못 쓰니께 다른 선상 알아봐유. 난 하루도 술 없이는 못 사는구먼그려.” 구수한 충청도 말씨에 그대로 외로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사양하던 작가 김성동은 고색창연한 200자 원고지(金聖東이라고 인쇄돼 있다)를 노끈으로 묶은 글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문학은 삶과 우주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지”라는 그의 육성을 다시 듣고 싶어졌다. 아카시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막걸리 받아 큰 슬픔을 안고 사는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총소리였다. 총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왔다. 사타구니에 꼬랑지를 말아들인 삽살개가 마룻장 밑으로 숨어들었고, 삼키면서 길게 끄는 동네 개들 울음소리만이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불에 덴 것처럼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아낙이 속적삼을 헤쳐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렸다. 등꼬부리 노파가 두 팔로 일곱 살짜리 계집아이를 끌어안았고 공포에 질린 눈길로 서로 얼굴만 바라보던 식구들 눈길이 사방으로 돌려졌다.
*해설피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1950년 첫 때. 조선 나이로 네 살이었으니, 이 누리에 벌레몸을 받아 태어난 지 꼭 2년 8개월 되던 때였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이 중생에게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은 네 살 적부터인데, 총소리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그림이 총소리라는 것이 얄망궂다. 꼭 무슨 팔자소관인 것만 같아 눈앞이 부우옇게 흐려오니, 운명인가. 전정(前定)된 명운(命運) 말이다. 저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 같은 것. 그것으로부터 이 중생 살매는 비롯되었으니까. 아직 이빨도 다 솟지 않은 네 살짜리 어린 것 넋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던 그 총소리 말이다.
아버지는 원초적 그리움의 대상
총소리를 듣던 때가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중생은 영 입을 열지 않는 것이어서 벙어리인 줄 알고 큰 걱정들을 하시는 판이었는데, 느닷없이 입을 열더라는 것이다. 마당에 깐 멍석에 둘러앉아 식구들이 막 저녁상을 받는데, 멍석 가장자리를 기어 다니던 아이가 한밭[대전]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조선정판사 사건’이라는 미 군정과 그 사냥개들이 쳐놓은 덫에 치여 절망적 ‘피고회의’나 하던 리관술(李觀述)·송언필(宋彦弼) 선생 같은 선배 독립운동가들이며 인민 계관시인 유진오(兪鎭五)선생, 그리고 10월항쟁·여순항쟁·4·3항쟁을 비롯한 지리산·태백산·일월산 같은 재산인민유격대 *싸울아비들과 함께 총하지혼(銃下之魂)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정(而丁)선생[朴憲永]의 비선(秘線)으로 대전·충남 지역 조직장인 아버지가 대전형무소로 끌려가셨던 것은 당신 나이 서른두 살 때인 1948년 늦가을이었다. 리승만이 남조선 단독정부를 세운 뒤였다. 평양행과 지리산 입성을 놓고 손톱여물을 썰던 끝에 얼굴도 못 본 자식놈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들렀던 고향집에서 당신을 맞이한 것은 벌써 몇 달째 그물을 치고 있던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서울시경 특별경찰대였던 것이다.
뒷동산으로 피란 갔던 그때 이야기를 썼던 것이 『그해 여름』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군사깡패들한테 잡지를 폐간당하고 나서 무크지로 박아냈던 에 실렸던 것이니, 꼭 30년 전이다. 그 소설이 어떤 유명한 친왜작가 이름을 딴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올랐으나 심사위원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하니, ‘반미소설’이라는 것이었다. 조치원·대전 방어선이 무너지며 금강방어선으로 뒷걸음질하던 북미합중국 병대가 보령·청양 경계인 화성장터에서 양키병정·토인병정 구경나온 아녀자 여남은 명을 죽였던 참이야기를 바탕삼은 소설이었던 것이다.
딴 이야기인데- 요즈음 이른바 문학상이라는 것이 4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등단해서 십년만 되면 적어도 서너 개씩 문학상을 목에 걸고 흰목 잦히는 작가들이다. 작가를 장삿속으로 써먹으려는 속셈을 보고 어떤 문학상을 거부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물론 소설 됨됨이가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이른바 등단 40년임에도 무슨 창작기금과 절집동네에서 주는 무슨 상 말고는 하나도 받아보지 못한 중생이므로, 더구나 눈에 밟히는 『그해 여름』이다.
아버지를 목 놓아 부른 다음부터 떠오르는 것은 배고픔이다.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면 꼭 아비 없는 손자를 사랑방 명색으로 불러 “이 으른께 절허구 뵙거라.” 그리고 식구들은 쫄쫄 굶는데도 꼭 진지대접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들여놓는 손님 진짓상을 보며 이 중생은 눈을 꼭 감았다.
주칠이 벗기어져 희뜩희뜩한 개다리소반에는 보리가 조금 섞이고 검정콩이 박힌 옥 같은 쌀밥과 췻국 한 대접, 그리고 김치와 호박무침에 간장과 고추장 보시기가 놓여 있었다. 재게 오르내리는 수저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미주알을 눌러 막고 있던 두 발꿈치에 힘을 주어야만 하였으니, 거시침이 흐르면서 그만 힘도 내음도 없는 물방귀가 비어져 나왔던 것이다. 서른 날에 아홉 끼밖에 못 먹는 *애옥살이일망정 손이 오면 꼭 진지대접을 하고 먼 길 온 과객한테는 *사슬돈푼이나마 노잣닢까지 쥐어주는 할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집은 가난도 비단가난이었다.
나의 소설은 어머니를 위로해 주기 위한 수단이었다
*살그미 눈을 떠보니 밥주발은 반 넘어 주욱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목예반에 숭늉대접을 받쳐든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아흐. 저이가 숙냉이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남겨진 밥은 내 차지가 되는 겨. 그만 상을 내가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떨어지기만을 목젖이 녹아들게 기다리고 있는데, 얼라? 숭늉 한 모금을 마시고 난 그 늙은 과객사람은 숭늉을 밥그릇에 부어버리는 것이었고, 으아앙! 꼴깍 소리가 나게 생침만 삼키고 있던 이 중생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써보았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업(業)이었던가. 배고픔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외로움이었고, 외로움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백지에 먹물이 찍힌 것이라면 콩나물을 싸온 신문지 쪼가리까지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백자 원고지로 쉰 장쯤 될 소설을 써보았던 것은 온전히 끔찍한 고문후유증의 우울증으로 괴로워하시는 어머니를 위로해주기 위해서였다.
“슬프구먼그려. 겁나게 슬프다니께.”
“온 삭신 사대육신 팔만사천마디가 죄 자귀루 죅여놓은 조긧대갈 같다”고 네 방구석을 맴돌면서도 자식이 지었다는 소설을 낭독으로 들으며 엷은 살푸슴(미소)을 보여주시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데, 주인공이 서울로 가는 장면에서 그 소설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그려볼 재주가 없었던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말하는바 리얼리즘이 뭐고 모더니즘이 뭔지 알 리 없는 때였으나, 그렇게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이 아니고는 땅띔도 못 하는 것은 그때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다.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은 상상 곧 *수꿈 꾸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의 변증법을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에 어머니한테 들었던 말이다.
“얘기든 노래든 그저 모름지기 슬퍼야 혀. 그게 진짠 겨.”
칠순 다 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그림
망팔(望八)이 다 되어가는 오늘까지 잊히지 않는 그림이 있다. 이 많이 모자라는 하늘 밑에 벌레를 소설가로 만들어준 말이기도 하니, 운명인가. 할아버지 손에 잡혀 쫓기듯 고향을 떠나온 날 열두 살짜리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시 갇혀 있었다는 경찰서 구경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던 끝에 이사 간 집으로 갔는데, 철 이른 가죽잠바를 걸치고 완강한 어깨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가 할아버지를 잡고 일장 훈시를 하던 것이었다.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느냐고 꼬치꼬치 캐묻다가 누가 찾아오는지 한 달에 한 번씩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송판쪼가리로 해 단 대문명색 앞까지 배웅 나간 어린아이를 훑어보며 사내는 말하였다.
“붉은 씨앗이로군.”
두 손을 모아 앞으로 잡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소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안녕히 가셔유우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축댓돌 밑 아랫집에서는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황덕불빛을 뚫고 무당 사설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허어이이. 리로 리런나. 로리런나. 라리런나. 로런나. 리런나. 어허어이이. 두 발 가진 즘생에 살생부정이로구나. 총 맞은 원혼이요 칼 맞은 원혼이요. 몽둥이 맞은 원혼이요. 포탄 맞은 원혼이요. 신실히 적적히 물리쳐 줍소사. 시위들 하소사. 원통히 죽고 서럽게 죽은 중음신들아. 어서 속히 이승으로 나가서 만인적선하고 돌아오너라.”
다음은 4월 17일 뼈잿골에서 읽을 님들을 기리는 글이다.
뼈잿골의 제망혼문(祭亡魂文)
조선공산당 창건 90주년인 단제개천(檀帝開天) 환기(桓紀) 9285년 4월 17일을 맞아 불초(不肖) 김 아무개와 그 동무(同務)들은 삼가 쓴술 한 잔과 몇 점 보잘 것 없는 제물(祭物)로 눈물의 골짜기에 누워 계신 님들 혼령(魂靈) 앞에 엎드려 슬피 고하나이다.
아, 님들이시어. 님들 떠나신 지 어즈버 65년이 되었으나 못난 뒷자손들은 여태도 그 체백(體魄)조차 건져드리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야말로 비단할아버지에 거적자손이올습니다.
아, 님들은 아주 돌아가시렵니까. 저희들은 상기도 님들이 돌아가셨다고 믿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슬픔이 지나쳐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을 떠올리면 어찌 차마 말을 다하겠나이까.
아, 님들을 생각하니 가슴은 떨리고 손끝은 흔들려서 차마 붓을 놀릴 수 없어 1950년 7월 27일치 기사를 읽어보겠나이다.
(......)
大田市에서도 7月 三,四일 경부터 련 五일간 尾軍의 지휘아래 人民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大田刑務所에는 濟州道麗水順天太白山事件 등의 우수한 祖國 아들딸들이 收監되어 있었다. 이들을 비롯한 七천여명의 人民들을 野獸들은 뒤로 결박하여 명태같이 트럭에 눞혀놓고 최고 一日 八十臺까지 동원하여 대덕군 사(산)내면 랑울(월)리로 운반하여 가소린을 퍼붓고 불질러 방공호로 몰아넣어 참살하였다.
(......)
(*인용된 신문기사는 맞춤법, 띄어쓰기, 종지부 없는 것, 한자 노출 등 그때대로임)
아, 서럽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무들과 힘을 모아 님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다할 것이오니, 너무 걱정을 마옵소서. 이 중생이 사바에 있는 만큼 님들은 너무 슬퍼하지 마옵소서.
아, 인생이 상수(上壽)를 누리는 이는 백년을 살 수 있다지만 그 나머지는 흔히 팔구십세를 넘지 못하는데 이 중생 나이 망팔이 다 되었으니, 인간에 있을 세월이 또 얼마나 되오리까. 아, *고루살이 세상을 위하여 짓는 밥이 채 뜸도 들지 않았는데 한 세상은 살같이 가고, 천지(天地)도 그 끝이 있다는데 산천은 말이 없습니다.
가마귀는 끊어진 솔언덕에 울고 묵은 풀은 우거졌는데, 쓸쓸한 산자락에 엎드려 한소리 통곡을 하니, *푸나무도 함께 슬퍼합니다. 와서 흠향(歆饗)하소서.
*해설피: 해가 질 때 빛이 약해진 꼴, *싸울아비: 전사(戰士)
*애옥살이: 가난한 살림살이
*사슬돈푼: 싸거나 꿰지 않은 흩어진 엽전, 얼마 안 되는 작은 돈
*살그미: ‘살그머니’의 준말로 그루박을 때 쓰던 말. 살그니, 살그래
*수꿈: 낮에 깨어서 꾸는 꿈이라는 죄수들의 은어로 상상을 이르는 말
*고루살이: 고조선 이전부터 우리 겨레가 추구했던 ‘평등세상’. ‘공동체’는 기독교 세상에서 나온 서구 개념임.
*푸나무: 초목(草木)
김성동(金聖東) 소설가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1965~1976년 승려생활. 1975년부터 창작생활. 창작집 『彼岸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붉은 단추』, 장편소설 『길』 『만다라』 『길』 『국수(國手)』 『꿈』, 산문집 『염불처럼 서러워서』 『외로워야 한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등.
글 영화평론가 윤성은
나이가 들수록 행복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건강임을 깨닫게 된다. 본인이 아플 때 느끼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 구성원이 큰 병에 걸렸을 때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스트레스의 강도 또한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억세다.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줄리안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는 쉰이라는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한 여인과 그녀의 가족에 관한 영화다. 찰나에 더러워질 수도, 깨질 수도 있는 투명한 유리 같은 행복을 지키기 위한 앨리스와 가족들의 노력이 펼쳐진다.
앨리스는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로서 많은 업적을 쌓아온 학자이자 사랑받는 아내였고, 세 아이를 둔 훌륭한 어머니였다. 몇몇 단어들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시작된 그녀의 증세는 청천벽력처럼 희귀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으로 이어진다. 급속도로 악화되는 이 병의 증세는 그녀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두려움과 서글픔 그 자체다. 언어와 인지 능력을 잃어가고, 행동 장애를 보이면서 샛별처럼 빛나던 앨리스의 눈빛도 흐릿해져 간다.
그러나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고통을 감당하고 겪어내는 앨리스가 여전히 ‘그녀’라고 말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8mm 필름처럼 빛이 바랬어도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는 유년 시절의 기억들이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자신을 끝까지 돌봐주는 가족들이 있다. 그것은 앨리스의 인생의 일부였고 여전히 그녀를 그녀로 남아 있도록 만들어주는 실체들이다. 루게릭 병을 앓고 있었던 故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이처럼 비극 속에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영화를 남기고 영면했다. 그 진정성으로부터 나온 긴 감동의 여운이 오랫동안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정 4월 30일 개봉
장르 드라마
감독 리처드 글랫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출연 줄리안 무어, 알렉 볼드윈, 크리스틴 스튜어트, 케이트 보스워스 등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근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시킨은 운문소설 에서 젊은 시절에 젊었던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늙은 시절에 늙은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젊은 나이에 젊은 것이며 늙은 나이에 늙은 것인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이와 삶의 단계에 대해서는 공자의 말이 유명합니다. 공자는 40이 불혹(不惑), 50이 지천명(知天命), 60이 이순(耳順), 70이 종심(從心)이라고 했습니다. 마흔이 되면 판단이 흐려지는 일이 없게 되고, 쉰이 되면 천명을 알며, 예순이 되면 생각하는 게 원만해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일흔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사람들도 과연 그럴까요? 불혹이 아니라 다혹(多惑)이라고 해야 할 만큼 요즘의 마흔은 분별이 모자라고, 천명을 알기는커녕 천명의 존재 자체를 우습게 볼 만큼 요즘의 쉰은 여전히 역동적입니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옛사람들은 “마흔이 되면 매지근하고 쉰이 되면 쉬지근하다”는 말을 해왔습니다. 예순 일흔에 대해서는 그런 말도 없을 정도였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듯이 일흔을 넘기는 것은 대단한 장수로 치부돼왔습니다.
지금은 생활환경이 나아지고 의료와 복지의 발달로 인해 평균수명이 늘어나 원래 나이에서 20%를 깎은 게 실제 나이라는 말도 합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 50세는 노년의 청춘이라고 말하는 장수시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50이 불혹, 60이 지천명이라고 해야 할 판입니다. 나이의 Norm(표준)과 틀이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칠순을 넘기면 신선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더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서른은 가정과 사회에 모든 기반을 닦는다는 이립(而立)의 나이이지만 요즘 서른에 결혼하거나 취직해 삶의 기반을 닦는 젊은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전통적인 나이의 규범에 따라 삶과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루소는 에서 10세에는 과자, 20세엔 연인, 30세엔 쾌락, 40세엔 야심, 50세엔 탐욕을 좇는 게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60세 이후엔 뭘 추구하나요? 벤저민 프랭클린은 에서 20세에 중요한 것은 의지, 30세에 중요한 것은 기지, 40세에 중요한 것은 판단이라고 했는데, 50세 이후에는 뭐가 중요할까요?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1683~1765)은 “나이 마흔에도 바보인 사람은 정말 바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40, 50이 되도록 이름이 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20세에 용모 수려하지 않고 30세에 건장하지 않고 40세에 부자가 안 되고 50세에 현명하지 않으면 평생 수려 건장 부자 현자가 될 수 없다”고 한 사람(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 )도 있습니다. 83세까지 장수하면서 다방면으로 큰 업적을 남긴 괴테는 “무언가 큰일을 성취하려 한다면 나이를 먹어도 청년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자꾸 초조해집니다. 귀한 생을 받아 이 세상에 왔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떠나고 싶은데 세월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오래 살아야만 이름을 남기는 건 아닐 것입니다.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는 겨우 24세로 죽었지만 그의 작품은 탄생 2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천재들 중 요절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삶을 완성하고 갔습니다. 44세로 사망한 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는 ‘20세에 취했고, 30세에 파멸했고, 40세에 죽었다.’고 노트에 썼습니다.
천재들은 예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릴케의 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은 일생을 두고 가능하면 아주 오래오래 살아서 우선 꿀벌처럼 꿀과 의미를 모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후에 가서는 아마 10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은 경험인 것이다’,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해지고 진보하는 존재일까요? 판단력이 여물면 상상력은 시들어갑니다. 외적 아름다움과 내적 충실을 뜻하는 춘화추실(春華秋實)이라는 말이 있지만 봄의 꽃과 가을의 열매를 동시에 즐길 수는 없습니다. 영화 에서는 라라의 약혼자이자 러시아혁명 주체인 스트렐리니코프가 악덕 변호사 코마로프스키에게 “인간은 연령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코라로프스키가 나이가 들면 관대해진다고 대답하자 스트렐리니코프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는 것”이라고 면박을 줍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해지고 꽉 막힌 외고집 벽창호가 된다면 그런 나이와 삶은 많고 길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대개 좋은 것,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 합니다. 969세까지 살았다는 성경 속 인물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므두셀라 증후군’은 지나간 일 중 좋았던 기억들만 남겨 청춘을 ‘좋았던 시절’로 치부해 버리는 성향을 뜻합니다. 아마추어 골퍼들은 자신의 가장 좋은 샷만 기억하거나 가장 좋았던 점수를 평소 실력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 착각과 교만을 경계하면서 겸손과 배려의 나이를 쌓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92세로 타계한 핀란드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는 83세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최근에야 지상에서 내가 존재하는 시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정원의 나무는 아주 작았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제 나무는 내 머리 위에서 나부끼면서 ‘당신은 곧 떠나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수백 년을 더 머물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기 때에는 앞으로 넘어지지만 철이 들면 뒤로 넘어진다고 합니다. 앞으로 넘어졌다가 똑바로 섰다가 뒤로 넘어지는 게 사람의 일생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이는 남이 알려줘야 자기 나이를 알지만 노년에 이른 사람은 힘겹도록 스스로 자기 나이를 압니다. 설날이 들어 있는 2월은 나이와 늙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되도록이면 똑바로 서서 의미 있는 삶을 완성해 가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여성 시인 메이 스웬슨(May Swenson 1913~1989)의 ‘어떻게 늙을까’(How to be old)라는 시 일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젊기는 쉽지. 모두 젊어, 처음엔. 늙기는 쉽지 않아. 세월이 걸리지. 젊음은 주어지는 것, 늙음은 이루어지는 것, 늙기 위해선 세월에 섞을 마법을 만들어 내야 돼.’
그 마법을 찾아야 합니다.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이사장
세상이 메마를수록 순수한 감성에 목이 마른다. 가슴을 적시는 애잔한 사랑이야기에 울컥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나의 지난 사랑도 짠하게 아름답기만 하다. 가 생각나는 까닭도 그러하다. 김하인의 감성멜로에 추억을 떠올리는 이가 있듯, 그에게도 순수하던 그 시절의 책갈피 같은 책 한 권이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다.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부터
20대 중후반 쯤 만나던 여자에게서 를 선물 받았다. 문학을 정말 좋아하던 아이였다. 술도 같이 많이 마셨고, 담배도 그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혼자 담배를 필 적이면 가끔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를 만나던 시절, 그는 한창 시를 썼다.
“오늘 같은 가을날, 술자리에서 그 애가 ‘오늘 날씨가 쌀쌀해’, ‘단풍잎이 예쁘다’라고 운을 띄우면 나는 술을 먹다가도 즉석에서 시를 썼다. 목소리가 좋았던 그 여자는 내가 쓴 시를 바로 낭송해주곤 했다. 그 아이의 시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 술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신춘문예 3관왕을 거머쥔 그였지만 막상 문학인의 길은 맹렬한 정글과도 같았다. 사범대를 나온 그의 동기들은 이미 교사가 되어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인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꾸준히 글을 썼지만 이렇다 할 수입이 없던 그 시절. 가난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와는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비장하고 멋있기는 하다. 나는 그때 내가 마흔까지 살면 잘 살리라 생각했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건장한 형들이 많으니 나 하나쯤은 내가 꽂히는 것(문학)에 의해 멸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독기였고, 형들 표현으로는 ‘너는 병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걸 수 있는 것이라곤 달랑 목숨 하나뿐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그는 어느 시점엔가 선회를 했다. 더 이상 문학지상주의에 취하지 않고 ‘문학도 직업이고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 사랑 이야기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나도 나름 풍부한 연애를 했다. 내가 보낸 여자들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애틋함이 살아나고, 그런 감정과 이미지를 하나씩 가져와 멜로소설을 썼다. 그랬기 때문에 글을 쓰며 인위적으로 짜 맞추려 하지 않아도 감정의 흐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이별 없는 세대로부터
그는 를 처음 읽고 ‘문체가 굉장히 좋고 미려하다’ 느꼈다. 책의 저자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느낀 단상들을 회화적으로 풀어낸다. 존재에 대한 성찰, 외압적인 폭력과 전쟁 등에서 오는 무위와 슬픔에 대해 구어적 표현보다는 미세한 느낌만을 담았다. 그는 글을 읽노라면 ‘금속적인 전쟁의 차가움’, ‘북유럽 날씨의 칙칙함’, ‘담배연기’ 등이 떠오른다 했다.
“저자는 굉장히 서정적인 사람인데 전쟁을 경험한 뒤 상처를 입고 ‘사는 게 뭘까’라는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요즘 사람들도 출근전쟁, 취업전쟁 등 일상에 전쟁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며 숨 가쁘게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작은 전쟁들 속에서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그 본질, 자아와 타인의 관계 특히 자기 내면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간이 통찰력이 있으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의 연속을 보듬고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당시에도 현대에도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통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성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가 왜 사는가’, ‘국가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야망과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구조적 성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책에서 답을 주지 않지만, 한 번쯤 고개를 숙여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시작이다. 여기에 자신의 지식의 총량을 동원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나에 대해 측은히 생각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주변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측은지심이 발동하면 그게 인문학으로 가는 본질이다.”
그는 를 ‘아주 순수하고 맑은 청년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라 표현했다. 처음 읽었을 때와 자신의 상황은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존재의 무의미성, 자기성찰 등에 있어서 주는 메시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내 나이가 쉰을 넘었지만 내 생각의 70~80%는 여전히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다. 그때의 사고와 정신의 힘으로 평생을 산다. 나이가 들어 외향이 변하고 강개함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늘 20대다. 우리 아버지가 ‘사람 마음은 늘 안 늙는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당시는 이해를 못했다. 어른이 되면 풍채도 우람해지고 빌딩도 짓고 생각도 점점 거대해지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김하인으로부터
그는 최근 ‘김하인 아트홀’을 운영하고 있는 강원도 고성에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강원도에는 민간협동조합이 262개나 있다는데 고성에서는 ‘국화꽃향기’가 첫 번째 민간 협동조합이다. ‘첫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만큼 자연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지역인데 침체되고 움직임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찾아 삶을 재미나고 즐겁게, 또 가능하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갔으면 한다.”
그에게는 또 다른 바람이 있다. 올해 말 를 시작으로 그동안 사랑받았던 그의 소설들을 다시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초창기 때 내가 쓴 글들을 보면 문장력도 어설프고, 치기어린 모습도 보이지만 옹달샘을 발견하듯 아주 깨끗하고 순수한 맛이 살아 있다. 때문에 나는 당시 내 글들에 대해 별로 고칠 생각이 없다. 세상이 흉흉하고 악이 판을 칠수록 그 반대 끄트머리에 있는 이들은 순수로의 회귀를 원한다. 그들에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맑은 수채화 같은 내 초창기 작품들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직장인 임모(30세, 남)씨는 지난 해 추석 고향집을 찾았다가 아버지(61세) 목소리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쇳소리가 심하고 말하는 중간에 자주 한숨을 쉬었던 것.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말할 때 유독 목소리가 잠기고 떨려 마치 '할아버지 목소리'처럼 들렸다. 평소 성격이 급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목소리 때문인지 말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노인성 후두는 근육이나 피부의 노화와 같은 현상이다. 성대의 근육이 위축되고 탄력이 떨어져 생기는 성대 노화 증상이다. 대체로 70대 접어들면서 72% 정도에서 나타나지만 발성습관에 따라 50대부터 나타날 수도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서서히 변해 쉬거나 갈라지고 발음이 부정확해지고 식사 중 사레걸림이 잦아진다면 노인성 후두를 의심할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근육으로 이뤄진 성대는 콜라겐 등의 탄성 섬유가 소실되고 탄력이 감소하면서 주름이 생긴다. 주름이 생긴 성대는 말을 할 때 성대의 양쪽 면이 제대로 맞닿지 못해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거칠고 바람 새는 듯한 쉰 목소리가 나게 되고, 성대에 불필요한 힘을 주면서 말하게 된다. 성대 노화와 함께 윤활유의 분비도 줄어들면서 진동이 고르지 못해 바람 새는 듯한 쉰 목소리 증상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다.
◇ 노인성 후두 방치하면 폐기능 저하 일으킬 수 있어
노인성 후두는 50~60세 이후 몸의 전반적인 노화 현상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원인의 절반은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생기기도 한다. 평소 싸우는 듯이 소리를 내지르며 자주 말한다거나 성대를 자극하는 술, 담배, 커피, 탄산음료 등을 자주 마시는 경우에도 심해질 수 있다.
목소리 노화가 심해지면 쉰 목소리와 부정확한 발음 때문에 일상적인 대화가 어려워질 수 있으며, 성대의 개폐(開閇)기능이 떨어지면서 음식물을 삼킬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 김형태 원장은 “정상적인 후두는 음식을 삼킬 때 성대가 완전히 닫혀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지만 성대 근육의 약화로 성대가 완전히 닫히지 못하게 되면 음식물이 폐로 들어가 사레가 잘 일어난다”며 “약해진 성대근육은 폐 기능 저하나 폐렴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났을 때 초기에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 듣기 싫은 쇳소리, 후두 마사지가 도움
노인성후두는 50대까지는 목이 조금 불편하고 가끔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정도였다면 60대에 접어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인 목소리로 순식간에 변한다. 70대 이후 10명 중 7명 이상이 성대 근육 및 점막 위축으로 바람 새는 듯한 쉰 소리나 쇳소리를 갖고 있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느껴지는 40대부터 목소리 노화를 막는 생활습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노인성 후두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평소 목이 아프거나 뻣뻣할 때 후두를 자주 마사지 해주는 것이 좋다. 갑상연골에서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기준으로 엄지와 검지로 양쪽 목 부분을 따라 2~3cm 위로 올라가면 움푹 파인 듯한 관절 부위를 찾을 수 있다. 목소리를 많이 사용하면 이곳이 수축해 통증이 생기는 데 위, 아래로 쓸어 내리거나 원을 그리듯 마사지해주면 효과적이다. 또한 물을 수시로 마셔 성대를 촉촉하게 유지해주고 목소리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30분 정도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입으로 내뱉는 복식호흡을 하며 걷기 운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만약 노인성 후두가 진행된 상태라면 간단한 시술로 다시 젊게 만들 수 있다. 김형태 원장은 “위축되거나 주름진 성대에 주사로 생체보형물질을 주입하면 성대의 볼륨이 살아나고 쳐진 성대근육이 팽팽해지면서 접촉 면이 제대로 맞닿게 되어 예전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다”며, “시술시간은 30분 내외로 짧으며 전신마취가 필요하지 않아 노년층에서 부담 없이 시술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시술 후 다음날 바로 음식 섭취와 일상복귀가 용이하며, 정상에 가까운 음성개선 효과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