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1990년대 중반 CF 스타였던 CEO가 있었다. 바로 신홍순 컬처마케팅그룹(CMG) 고문이 그 사람이다. 당시 LG패션 사장이었던 신 고문은 멜빵에 컬러풀한 셔츠를 입고 “패션으로 기억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20여 년 동안 패션 업계에 몸담았던 경력, 재즈와 클래식 마니아이자 전문 공연 기획자, 미술 컬렉터, 패션 경영 교육자, 전 예술의전당 사장 등등 신 고문의 삶은 문화와 예술로 채워진 드문 경영인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신홍순(申弘淳) CMG 고문은 1941년생, 올해로 74세다. 그러나 처음 봤을 때 그 젊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직업인 동시에 유희의 영역에서 살아 왔기 때문일까. 그는 음악과 미술은 기업에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말했다.
“한국 클래식 음악을 이끄셨던 고(故) 임원식의 친구였던 선친께서 미술과 음악을 좋아해서 컬렉션도 갖고 계셨지. 선친께서 나이 6~7세부터 연주회나 전시회 등을 자주 데리고 다니셨고, 이후 대학에 와 재즈와 팝 등으로 영역을 넓혔어요. 아내를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 얻게 된 것도 그렇고.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보다 보는 게 좋아서 전시회를 많이 다녀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도움이 돼요.”
신 고문의 선친은 동일방직의 중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을 기업에서 구매하여 청와대로 보내곤 했다. 그의 선친도 그런 일을 했었고, 그 덕분에 화단에서도 그의 선친이 꽤 알려진 이름이어서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런 환경이 신 고문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LG패션 대표이사 시절 갤러리 운영, 미술작품 전시, 재즈 콘서트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기업이미지를 높이는 ‘패션마케팅’을 펼쳐왔다. “패션 자체가 색상과 디자인 등 예술적인 감각과 마인드가 필요한 분야인 데다 크게 보면 같은 문화산업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패션과 예술은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감성’을 바탕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창작기회를 부여받기 때문이죠.”
재즈파크, 한국 재즈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재즈마니아인 신 고문은 제 162회를 맞은 ‘재즈파크’ 콘서트를 1세대 정통재즈에서부터 라틴, 퓨전 재즈 등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신구를 아우르며 매회 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유명공연으로 만들어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는 2002년 3월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입장료 1000원의 재즈파크 콘서트를 꾸준히 열어온 ‘공연기획자’다. 또한 ‘재즈파크빅밴드’라는 18인조 재즈 빅밴드를 구성, 활동하고 있는 예술단체 매니저이기도 하다. 유열의 재즈파크빅밴드 활동으로 재즈파크빅밴드가 국내 최고의 재즈빅밴드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며 재즈공연을 후원해준 신 고문의 감회는 남다르다.
“재즈 불모지였던 한국에 재즈의 토대를 마련한 재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재즈 1세대들이 설 변변찮은 무대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무대다운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듣고 재즈 1세대들에게 좋은 무대를 만들어주겠다고 생각했어요.”
척박한 한국 재즈 환경 속에서 재즈의 대중화와 저변확대를 이끌어온 ‘재즈파크’가 13살이 됐다. 이는 재즈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재즈 공연을 진행해온 신 고문의 재즈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결실이다.
“수익을 남기는 공연이 아니라 재즈파크를 통해 재즈인들은 공연할 수 있는 무대가 생겼고, 대중에게는 재즈와 소통할 수 있는 가교가 마련됐다는 것이 의미였죠. 또한 재즈파크를 통해 선·후배 재즈 아티스트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팀이 결성되기도 하는 등 침체된 재즈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어요.”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며 얻은 삶의 즐거움
신 고문이 최근에 공들이고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그의 조상, 그의 가계에 대한 연구였다.
“선친이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셔서, 그 나머지 일의 뒷정리를 하는 게 있어요. 아마 한국처럼 족벌이라는 걸 각 성씨들이 갖고 있는 나라가 없을 거예요. 바로 그 조상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이죠.”
신 고문은 자신의 가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라는 문인을 꼽았다. 영·정조 시절을 살았던 신광수(1712~1775)는 ‘동방의 백낙천’이라는 평을 받았던 분이다. 신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을 쓴 춘원 이광수의 본명은 이보경으로, 그가 필명을 이광수로 쓰게 된 계기가 바로 신광수의 작품들을 알게 되면서라고 할 정도로 대가의 경지에 도달했던 문인이었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온 극단이 하는 악극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이 석북 선생의 한시 창을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조상을 연구하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다
신광수라는 걸출한 조상의 발견은 조상의 활동을 시대별로 자료를 취합하여 평전을 만들고 번역을 싣는 작업의 결과였다. 신 고문은 조상의 업적을 정리하는 그 과정에서 조상에 대한 애착을 굉장히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분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면 작품 하나하나가 남들과는 다르게 다가오죠. 그리고 자기 조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다 보니 그들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모여서 일 년에 세 번 정도 서로 집안 행사 때 가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또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고. 어느 집에서 자료를 가져 와서 ‘1450년대 자료를 보라. 너희 조상하고 우리 조상하고 모여서 회의하고 시도 읊고 쌀도 나누고 했다. 1500년대 이후의 교류는 이미 나왔는데 그 이전 건 처음이다’ 하는 내용이 나오면 그쪽과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새로운 게 창조되는 기분을 느끼니 자꾸 빠지게 되더군요.”
그런 인연과 인연들이 모여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이벤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석북 신광수 선생의 시로 공연을 열다
“조상의 역사를 되짚어 가면서, 한문을 배우긴 배웠지만 깊이 있게 배운 적은 없어 한학자들이 부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한학자가 250여 명 되는데 그들과 교류를 하면서 학술대회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신광수 선생의 작품들로 음악회를 하자고. 그 말을 들으니 그런 공연은 어떻게 하는지 내가 다 알거든? 어? 그거 얘기가 되네. 돈만 있으면 그 다음 방법은 내가 갈 길을 아니까.”
신광수는 정치적으로 남인이었다. 고향에서 한양에 오긴 했지만 집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에게 집을 마련해줬는데 그게 하필 노론이 주로 거주하던 계동이었다. 자신과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에서 살다 보니 심심하기도 했던 그는 청계천을 넘어서 명동, 당시에는 저동이라고 불렸던 곳을 다니곤 했다. 지금의 평화방송 빌딩에서부터 한옥마을 쪽으로 하여 회현동을 누비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던 조상의 기록들을 신 고문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누비고 다녔던 동네가 그쪽이니, 공연 장소는 한국의 집 전통예술극장에서 하자고 했죠. 거기가 국악 공연을 하는 곳인데 200여 명 정도 들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 중요무형문화재인 가곡 예능보유자 김영기 선생을 만났어요. 이런 것 좀 하려는데, 당신이 제일 적임자니 해주십사 부탁을 했죠. ‘당연히 해야죠’라며 얘기가 척척 돌아가더라고. 그래서 하게 됐지.”
자신의 조상의 업적을 발굴하여 그걸 현대에 살아 있는 현상으로 만들어낸다. 신 고문이 말한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는 말을 납득하게 하는 부분이다. 이야말로 시니어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가 젊었을 시절이라면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 아니던가.
“나도 젊었을 때는 조상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니 그 윗대에서 알아봐야 할 분들이 새로 생기고, 다른 집안과의 연관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집안의 기록들도 연구하게 됐어요.”
고향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시간
신 고문은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에 활기가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향과 가까워지더라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모시와 소곡주로 유명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이다.
“우리 자식들은 고향에 관하여 기억하는 게 없어요. 가서는 수세식 변소가 없다고 난리를 치고 서울로 올라와선 다신 안 가더군(웃음). 조상을 연구하다 보니 고향 현지의 문화원과 교류하게 되고, 마침 문화원장 중에서 우리 집안에 굉장히 관심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문화원에서 책을 발간하는 데 도움도 주시고 날 초청도 하고. 그렇게 가까워지니 군수도 알게 됐어요. 2013년이 서천군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지 600주년이 되는 해였죠. 그래서 600주년 기념행사를 하려는데 제게 총 준비위원장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회의 진행하면서 아이디어를 넣고 그랬죠. 그중 금난새씨와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초청하는 게 있었는데,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300명의 청소년이 모이다 보니 행사하던 날 그 300명의 부모들이 모두 서천에 오더군요.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신 고문은 사람들이 두루 도우며 더불어 사는 그런 모습을 좀 보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점점 심해지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계를 그 또한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고향과 더욱 가까워진 신 고문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이 하는 사업 중에서 싹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라고, 발레나 연극 같은 공연을 영상화하여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 클로스업해서 테크닉까지 보여주고 아주 기가 막히더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걸 문화적 소외계층에 제공하는 거죠. 알아보니까 큰돈이 안 들어도 되겠더라고. 그래서 고향 문화원장에게 가서 내가 후원할 테니 해보고자 했어요. 회관 사용 허가가 떨어졌고 ‘호두까기 인형’을 가져갔죠. 군부대 사병들, 학생, 일반인들이 일과 끝나고 구경하도록 했습니다. 문화원장이 사람이 올까 해서 걱정했는데. 그 영상이 한 시간 반 동안 하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더군요. 다들 집중해서 보는 거지. 그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 보람이 깊었고.”
인생 후반전의 밝은 본보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멋지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신 고문이 보여주는 모습에는 자신이 꾸준히 쌓아왔던 커리어에서부터 비롯된 것 외의 다른 이유에서 시작되는 부분도 있어 보였다.
“우선 호기심이 많아야 해요. 자신이 일을 좀 만들려고 할 때 일을 찾는 기본은 호기심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리고 열정이죠. 그런데 혼자서는 다 할 수 없으니까 그 열정을 원하는 대로 행사하려면 같이 일할 사람을 찾아서 유도해야 해요. 제 친구 중에 대학을 안 다녔는데 한문을 배운 친구가 있어요. 자신의 아버지도 서예를 잘했고. 그 친구가 한문학에 자질이 있다는 걸 알았죠. 성격도 괜찮아서, 나하고 같이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가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하나씩 목표가 주어지면서 달라지더군요. 요즘은 그리 말해요. ‘형 아니었으면 내가 요즘 뭔 보람으로 살았을까.’”
신 고문에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세상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각자의 능력과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신 고문은 그들을 알아보고 모아서 도화선으로서, 불을 붙여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같이 있을 때 득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람을 느껴야 일이 돼요. 나이를 먹으니 그런 쪽으로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게 좋더라고요(웃음).”
호기심, 열정 그리고 친구 많은 것이 그가 웰에이징 하며 사는 비결이었다.
라는 유명한 희곡을 쓴 테네시 윌리엄스는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 전반부에 부지런히 돈을 모은다.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돈에는 힘이 있다. 다름 아닌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 받을 권리를 갖는다. 말하자면 돈은 상대방의 행동을 일으킨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 쪽에 주도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돈이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가져가지는 못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어떻게 해야 돈을 잘 쓰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열심히 번 돈을 고스란히 자식에게 물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돈 잘 쓰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하고 돈을 잘 쓰기 위해서는 가슴이 필요하다고 했다.나이가 든 뒤에야말로 바로 그 가슴이 필요하다.
때는 이때, 집집마다 증여 붐
자산은 남겨도 되고 남기지 않아도 된다. 장·단점이 각각 있어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식과 손주에게 자신의 의사를 일찌감치 밝혀 제대로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왕에 상속한 재산이라면 후손들이 자산을 불려주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자녀 모두가 사업 수완이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 최근 20년 사이 국내 재계 서열 30위 내 그룹들의 부침은 컸다. 30위 안에 이름을 올렸던 그룹의 절반 이상이 경영 승계 후 법정관리 등으로 순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최근에는 세법을 비롯해 다양한 규제법이 강화돼 부와 경영권 모두를 온전히 대물림하기는 힘들어졌다. 가업 상속의 측면에서 “소유와 경영 모두를 지배하기는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이상건 상무도 “향후 기업의 지배구조는 유럽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방식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KB 2015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의 경우 ‘보유 자산을 누구에게 상속 또는 증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녀’라고 응답한 비율이 98.4%로 가장 높았다. 이어 배우자 72.7%, 손자녀 15.5%, 형제자매 2.6% 순이었다. 주목할 점은 손자녀의 비중이 지난해 조사의 29.4%에서 크게 하락했다는 사실.
상속 및 증여 방법에 대해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부자 중 71.4%가 ‘자산 일부는 사전 증여하고 일부는 사후 상속하겠다’고 응답해 대다수가 상속과 증여를 함께 고려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전부 사후 상속하겠다’(20.7%)와 ‘전부 사전 증여하겠다’(6.9%)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2014년과 비교해서는 ‘전부 사후 상속’의 비율이 8.1%포인트 감소한 반면 ‘자산의 일부 증여, 일부 상속’ 비중은 10.9%포인트 증가하여, 사후가 아닌 자녀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일정 부분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는 인식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더 현명하게 자식과 손주들에게 돈을 남기는 방법’에 관한 고민 역시 최근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빗뱅커(PB)가 상속·증여와 관련해 상담해주는 ‘노블 아카데미’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방에서도 상담 요청이 크게 늘었다. 4대 시중은행에만 상속·증여 관련 상담 문의가 올 들어 5월까지 2000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민·우리·신한은행 등은 증여 상담 등을 제공하는 이른바 ‘가문 관리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증여와 상속에 대해 고민하는 자산가들의 공통 질문은 ‘어떤 재산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물려줘야 할까’다. 정답은 무엇일까?
역삼동에 사는 박영희(가명·63·여) 씨의 지론은 그 문제에 관한 정답의 하나가 될 듯하다. 펀드와 주식과 임대업이 주 수입원으로 50억 원대 자산가인 박씨는 스물세 살 된 외동아들에게 어차피 물려줄 거면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파트와 건물을 증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증여세를 줄이는 기본 원칙은 ‘현재 평가액이 가장 낮은 재산’이나 ‘향후 가치 상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산’부터 증여하는 것”이라며 “현금 증여보다 부동산을 직접 증여하는 것이 절세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생전에 돈을 쓴다
“돈 아니면 물려줄 게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다.”
“65세까지는 모으고 그 후에는 다 쓸 생각이다.”
“내일이 아닌 ‘지금’을 위해 쓰고 싶다.”
“자산의 50%는 자녀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남은 인생 좀 즐기겠다는데 자식 눈치 볼 필요 있나?”
“기부하고 싶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다. 사회 환원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자식 결혼할 때 집 문제까지는 해결해주고 싶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 해외 봉사 활동을 가장 하고 싶다.”
“필요한 곳에 쓰도록 살아 있을 때 물려주고 싶다.”
돈을 남기느냐, 다 쓸 것이냐 하는 질문에 자산가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에 비해 ‘살아생전에 모은 돈을 다 쓰겠다’는 생각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쓰죽회’라는 모임이 있다. 70대 이상 부자 어르신들이 ‘재산을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다 쓰고 죽자!’라는 취지로 만들었다. 그 모임이 최근에 해체했다고 한다. 지갑을 여는 사람만 여는 모임의 관행 때문에 서로 불편해지자 하나 둘 모임에서 빠지기 시작해 결국 해체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유형적 재산뿐 아니라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라는 무형적 재산까지 남김없이 쓰고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모들은 자신만의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취미나 문화 활동 등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노후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노후를 자식에게 기대는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도 상대적으로 적다. 자산가들도 장수위험(Longevity Risk)이나 연금 고갈 등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갑을 잘 열지 않는 추세다.
3대째 서울 영등포 로터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장수원(69·가명) 원장은 그런 현상을 대변하는 좋은 예. 장 원장은 “자식들이 재산 상속을 바라지 않고 가진 돈으로 즐겁게 살라고 한다”며 “쓰다가 남으면 아들 형제에게 상속하겠다”고 말한다. 더불어 “금쪽같은 손주 네 명에게 적금이나 보험을 들어주고 있다”고 자식보다 손주 사랑에 더 각별하다.
유산기부자 늘어… 상속보다 기부를 선택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기부를 선택하는 자산가도 없지 않다. 모 건설업체의 A 대표는 얼마 전 두 명의 자식에게 “재산의 20%만 상속하겠다”고 천명했다. 스스로 돈 버는 재미를 느끼고 성공을 체험하는 데 일정 금액 이상의 유산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려준 재산이 오히려 자식을 망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나눔국민운동본부 정경희 사무국장은 “2011년부터 시스템이 갖추지 않은 상태에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회원이 1000여 명 이상”이라며 “재산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2013년부터 시작한 ‘참행복나눔운동’이라는 사단법인에는 유산기부 서약식을 쓰거나 이미 기부하신 분들만이 커뮤니티가 이뤄지고 있어 유산기부자의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보니까 돈은 탐내면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거든요. 연금제도가 생기면서 재산을 좀 더 가치 있게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유산기부자가 늘게 된 요인인 듯 합니다. 전직 장관 출신, 종교인, 교수, 고위 공직자, 과학기술 분야에 계신 박사들도 있고 대기업 회장을 지낸 분들이 있습니다.”
기부는 돈이 많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유산기부의 모범적 행동이 기부문화와 사회발전에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적 유산이 되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전 재산 약 36조 원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지구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는 세계 34위의 부자로 30여 년 전부터 자선사업을 해왔으며 이미 3조9000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에 관하여는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세계적 갑부가 된 그는 55세 때 불치병으로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투병 중에 록펠러는 선행의 길로 들어서며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장학사업과 자선사업에 정열을 쏟으면서 98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 43년은 참된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록펠러 이후에도 카네기, 헨리 포드,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가 이어지면서 자선과 기부는 미국 사회의 전통이 되고 있다. 카네기는 베푸는 삶의 기쁨을 알고부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재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빌 게이츠 역시 재단을 만들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어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남겨주는 데 자신의 돈을 활용하기도 한다.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은 개인의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좋은 예다. 프릭 컬렉션은 실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의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맨해튼 주택가 속의 저택이 그대로 미술관이 돼 있다.
유태인들은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다.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진리를 속담을 통해 남기고 있다. 어떻게 써야 바르게 쓰는 것일까?
인생의 끝자락이 아름다운 사람이 최후의 승자다. 일출보다 일몰이 더 멋있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일몰이 더 멋있어지려면, 자신의 자산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잘 쓰며, 잘 늙어가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작은 힌트가 아닐는지 열대야 잠 못이루는 한 여름 밤 문득 깨닫게 된다.
*돈을 남긴 사람들
마이클 잭슨 2221억 6080만 원
로빈 윌리엄스 55억 5000만 원
파블로 피카소 6조 8499억 5800만 원
야나세 다카시(柳?嵩) 3702억 6800만 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2조 2696억 650만 원
*돈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앤드루 카네기가 도서관 건립에 쓴 금액 3872억 2266만 원
알프레드 노벨이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해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금액 46억 3185만 원
성룡이 자선기관에 기부한 금액 3566억 5245만 원.
사후에 아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기부하겠다고 선언.
“춥고 예쁜 여자가 많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간다고 했을때 지인들이 던진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는 비슷했다. 어떤 이는 “유튜브를 보니 러시아 남자들이 총 들고 설치더라”며 치안을 조심하라고도 했다. 예쁜 여자가 많은 것은 맞는 말이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 12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온은 영하 1도 정도. 당시 서울이 영하 7도~영하10도 사이였으니 서울보다 오히려 덜 춥다. 치안에 대해서도 몸 사릴 정도는 아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10년 정도 이곳에 머물면서 외국인이 치안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10시간 가까운 비행 끝에 만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의 총평은 ‘아주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 206년간 러시아의 수도였던 도시
1701년 표트르 대제는 유럽 순방을 끝내자마자 핀란드 만과 네바 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암스테르담은 작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하고 열악한 환경을 거꾸로 이용해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크게 발달한 도시였다.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암스테르담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유럽에서 오랫동안 러시아에 대적했던 스웨덴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척박한 오지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왕족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네바 강에 떠 있는 42개의 섬에 도시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새로운 도시건설은 성공적이었다.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기기 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고, 위대한 문학가와 예술가를 탄생시킨 문화의 도시로 성장했다. 흔히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으로 향하는 러시아의 창이라고도 한다.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고전주의·바로크·모던 등 온갖 양식의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 자체가 박물관과 같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300년의 역사 그대로, 넵스키 대로와 겨울궁전
공항 도착 후 20분 정도를 달리면 넵스키 대로다. 황제의 거처였던 에르미타주 겨울궁전을 시작으로 40년의 공사 기간에 10만명이 죽어간 도시의 랜드마크 성 이삭 성당,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자리에 세워진 그리스도부활성당(피의 사원),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반원형의 회랑에 늘어선 카잔성당까지 대로를 따라 이어져 있다. 놀라운 것은 가이드의 설명대로라면 넵스키 대로의 꽤 큰 건물들은 대부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48년에 문을 연 백화점 파사쉬, 1873년에 영업을 시작한 유럽 호텔, 엘리세예프스키 형제의 고급 상점, 카페, 고급 레스토랑들과 과자점, 수많은 고서점과 골동품점, 한때 50여 개에 다다랐던 은행들, 극장, 도서관과 궁전, 대학 등이 이곳에 있다. 1915년에 세워진 건물이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것으로, 현재의 넵스키 대로는 제정 러시아 시절 모습 그대로다. 여름이면 넵스키 대로에선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관광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연일 확성기를 들고 광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일부 관광객들이 이곳을 보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기도 한다는 곳이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제정러시아 황궁이며 황제의 평소 집무실이 되었던 ‘겨울궁전’(冬宮)을 포함해 4개의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다.
현재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이곳은 38점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렘브란트 컬렉션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수집한 예술작품 270만점이 5개의 건물에 보관돼 있다.
수 세기에 걸쳐 러시아 왕가에서 수집한 그림과 조각, 보석 등이 전시되고 있는데 바티칸, 루브르, 대영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 높은 작품이 가득하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된 작품을 다 감상하자는 욕심은 금물이다.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겨울궁전은 건물의 둘레만도 2km나 되고, 실내는 1050개에 달하는 방과 120개나 되는 계단, 그리고 1100개에 이르는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그림 중에는 배경이 어두운 초상화가 많다. 오늘날의 사진이 사실적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폴레옹과 맞서 승리를 거둔 국가적 자부심이 묻어나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 종교적 색채가 짙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한 번은 꼭 여행지로 와야 할 사람은 종교인이다. 특히, 크리스천이 이 도시에 오면 미술품, 혹은 건축물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을 듯하다. 피의 사원에 있는 4개의 모자이크를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형’, ‘십자가를 벗는 예수’, ‘성림강하’ 등 예수부활의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우뚝 서 있는 상트 이사크 성당도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1818년 공사를 시작한 지 40년 만에 완성된 상트 이사크 성당은 112종의 돌로 지어졌고 1만 4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올릴 수 있다. 이 성당에서 반드시 가 보아야 할 장소는 전망대다. 전망대에 서면 황금으로 도금된 돔과 거대한 조각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돔은 금으로 도금되어 있는데, 자그마치 3만 3000kg의 금이 쓰였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이사크 성당 전망대 오르기에 지친 몸이 쉴 곳은 오페라 극장이 제격이다. 저녁시간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이 ‘지젤’로 데뷔했다. 마린스키 극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제일의 발레, 오페라 극장으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젤’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유명 연예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다. 평일 저녁도 만원 관객이다. 관객들은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짓에 탄성과 박수가 연이어 나온다. 조그만 몸짓, 숨소리도 함께하는 공연문화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배우고 익혀왔기 때문이다. 겨울, 하루 해 뜨는 시간이 6시간일 정도로 해를 볼 시간이 거의 없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거의 무표정하지만 공연을 볼 때만큼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기 위해서는 최소 9시간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한다. 러시아 화폐인 루블 가치가 떨어져 한국 돈 1만원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기가 힘들어 음식이 예민한 사람은 장아찌나 고추장 챙기기는 필수다. 여행 동행자들은 비슷한 말을 했다. 긴 비행시간과 음식문제만 아니라면 꼭 다시 오고 싶은 도시라고.
K옥션이 큰 그림 경매 ‘100+ Auction’을 개최한다.
29일 오후 5시 신사동 K옥션에서 열리는 이번 경매는 100호 이상 대형작품 58점이 출품된다. 이번 큰 그림 경매는 지난해 고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마련됐다.
이런 대형작품의 경우 한자리에 모으기가 힘든 만큼, 큰 그림이 필요한 개인과 기관, 기업에는 작품을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김창렬·한묵·김종학·정상화·오치균·김홍주 등 한국 근현대 작가의 작품과 마티아스 바이셔·베르나르 브네·토마스 루프 등 해외 작가의 작품까지 만나 볼 수 있다.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의 150호 크기 작품이 시작가 2억2000만원, 추정가 3억∼4억원에 출품된다. 오치균의 '고향'은 시작가 6500만원, 추정가 1억2000만∼1억5000만원으로, 한묵의 '공간'은 시작가 5500만원, 추정가 1억5000만∼2억원으로 나올 예정이다.
국내 큰 작품들은 해외보다 아직 낮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어 경쟁력이 있다. 특히 이번 경매 작품들은 고객들이 만족할만한 좋은 가격에 출품돼 공공미술과 기업의 소장품을 염두에 뒀던 이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K옥션은 “국민소득만으로 국가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문화예술을 통해 그 나라의 국격을 평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아쉽게도 국내 미술시장의 주거래 작품은 대부분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위한 컬렉션에 머물러 있다”며,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이번 경매를 계기로 좀 더 큰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개인의 만족뿐 아니라 사회의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컬렉션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이번 경매 출품작들은 25~28일 신사동 K옥션 경매장에서 미리 확인할 수 있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압류한 미술품의 경매가 12일 열린 미술품 경매사 K옥션의 경매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낙찰 총액은 72억원에 달하며 이중 경매 수수료를 제외하고 전부 국고로 환수된다.
K옥션은 12일 오후 신사동 사옥에서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 4차 경매를 열고 최근 검찰이 장남 재국씨에게 추가로 확보한 김홍주 화백의 작품 25점을 비롯해 출품된 97점을 모두 팔았다. 이날 경매의 낙찰 총액은 13억6천445만원.
K옥션은 앞서 온·오프라인으로 세 차례 경매를 진행했으며 김환기의 1965년 뉴욕 시대 유화 ‘24-Ⅷ-65 South East’(낙찰가 5억5천만원)를 비롯해 출품작 379점(애프터세일 3점 포함)을 모두 팔았다.
K옥션이 4번의 경매에서 거둔 금액은 41억9천535만원에 달한다.
K옥션과 함께 검찰로부터 미술품 판매를 위탁받은 서울옥션은 1차 오프라인 경매에서 121점(낙찰률 100%)을, 2차 온·오프라인 경매에서 140점(낙찰률 86%)을 각각 팔았다. 낙찰 총액은 30억8천659만원.
경매 최고가는 전 전 대통령의 자택에 걸려 있던 이대원 화백의 1987년작 ‘농원’이 기록한 6억6천만원이다.
이로써 전두환 일가의 압류 미술품 경매는 모두 마무리가 됐으며, 총 640점의 미술품이 새 주인을 찾았다.
K옥션 이상규 대표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처음에는 ‘전 컬렉션’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이 있었지만 미술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입장에서 미술품이 제 가치를 평가받게끔 하고 많은 금액이 국고로 환수되도록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어 “여러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공개되면서 새로운 손님도 많이 왔고 미술 시장의 대중화에도 기여한 것 같다”며 “이번 경매가 미술과의 거리감을 좁히는데도 역할을 한 만큼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 미술 시장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술품 경매사 K옥션은 다음 달 12일 오후 4시 신사동 사옥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한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 마지막 경매를 연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경매에는 회화의 본질적인 문제를 탐구해 온 작가로 평가받는 중견작가 김홍주의 작품 25점을 비롯해 모두 97점이 출품된다.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을 제작한 조각가 김영원의 작품과 높이 2m가 넘는목제불상, 전 전 대통령의 글씨 등도 포함됐다.
그동안 K옥션이 3번에 걸쳐 온·오프라인으로 진행한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 경매의 총 낙찰액은 28억1천782만원이다.
K옥션과 함께 미술품 판매를 위탁받은 서울옥션은 온·오프라인 경매를 통해 30억8천600여만원의 미술품을 팔았다.
이날 K옥션 경매를 끝으로 전씨 일가의 압류 미술품 경매는 마무리되며, 경매 수익금은 국고로 환수된다.
한편 K옥션은 이날 ‘전재국 미술품 컬렉션’에 이어 봄 경매를 열고 로버트 인디애나의 ‘아모르’(Amor·경매 추정가 1억9천만∼3억원), 복암 이기양 초상, 오치균·김환기·이우환·천경자·이대원의 작품 등 185점을 경매한다. 예금보험공사가 주관하는 토마토2저축은행과 영남저축은행의 매각 미술품 8점도 함께 경매에 부친다.
경매 출품작은 다음 달 1∼11일 신사동 K옥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보석과 오브제 아트의 세계 최고의 디자인·제조 업체로 널리 알려진 까르띠에는 167년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다. 파리의 한 보석상의 숙련공이었던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1847년, 그의 주인이었던 아돌프 피카르로부터 파리 몽토르겨이가 29번지, 보석 아뜰리에를 인수 받으면서 시작된 까르띠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그의 이니셜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을 그의 장인 마크로 등록한다. 바로 이것이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 기나긴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 1899년 까르띠에는 보금자리를 옮겨 뤼드라뻬 13번지에 작업장을 연다. 이때부터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 하우스의 해외 경영을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루이 조제프(1875~1942)는 파리를 맡고, 자끄 떼오뒬(1884~1942)은 런던, 삐에르 까미유(1878~1964)는 뉴욕에 각각 터를 마련해 사업 영역을 넓혀간다.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s)’이라는 칭송을 받은 까르띠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에드워드 7세는 1902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27개 티아라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이후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 받은 이후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명작 ‘트리니티’의 탄생= 오늘날 까르띠에를 있게 한 최고의 작품 ‘트리니티’는 창업자의 손자 루이 까르띠에가 1924년 친구인 시인 장 꼭도를 위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한 순간 시작됐다. 이 반지는 까르띠에의 심볼이자 뮤즈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 걸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화이트골드, 옐로우 골드, 핑크 골드 3가지 색 골드의 환상적인 하모니, 우아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반지 ‘트리니티’는 세 개의 밴드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우아함을 표현하는 까르띠에의 명작으로 꼽힌다.
손목 위에 핀 불멸의 사랑, 까르띠에의 또 다른 명작 ‘LOVE(러브)’ 팔찌는 1969년 탄생했다. 뉴욕 작업장에서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는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남녀공용 팔찌를 제작했다. 팔에 일단 이 팔찌를 끼운 다음 특수 제작된 스크류 드라이버를 이용해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중세의 기사가 아내에게 매단 정조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디자인은 주얼리를 몸에 걸치는 방식에 혁명을 불러왔다. 팔찌는 더 이상 옷이나 그 날의 활동에 맞춰 선택하는 액세서리가 아니게 됐다.
까르띠에 ‘러브 브레이슬릿’은 전용 드라이버가 있어야만 착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착용할 수 없다. 러브 콜렉션의 상징인 스크류 모티브 부분에 다이아몬드가 총 4개 세팅돼 있다. 팔찌의 인기에 힘입어 반지 ‘러브 반지(LOVE Ring)’도 탄생했다. 이들은 이제 전 세계 까르띠에 소비자들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러브 반지 역시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문양인 스크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핑크골드 컬러로 다이아몬드가 3개 세팅돼 있다.
◇세계 최고의 보석상 까르띠에의 장인정신= 보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예술적 영감으로 만들어낸 까르띠에 하우스의 장인정신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수많은 매력적인 제품들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하나의 보석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까르띠에 하우스는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까르띠에의 예술적 영감을 통해 생성되는 모티브의 콘셉트는 처음에는 단어로만 존재한다. 무수한 스케치와 회의, 수정의 반복 과정을 통해 레이아웃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제작 단계에 들어간다.
여러 색의 왁스로 테스트용의 기초적인 형태를 제작해 아이디어를 더욱 구체화한다. 석회 주물, 연마과정, 광택과정, 양각세공과정, 비늘 세공, 브러싱 공정, 보석의 세팅 과정 등을 거치게 되며, 각 과정마다 또 다시 수많은 검사와 수정이 이루어진다. 까르띠에의 모든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한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
◇액세서리에서 ‘시계의 명가’로도 부상= 보석으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사실 창립 초창기부터 손목시계 제조사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시계를 선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산토스(Santos)’와 ‘탱크(Tank)’는 까르띠에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 컬렉션이다.
까르띠에가 시계를 생산하게 된 것은 알프레드 까르띠에의 아들, 루이 까르띠에에 의해서였다. 시계 디자인과 제조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루이는 까르띠에만의 보석 디자인, 세공을 응용해 벽시계, 탁상시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에 최고의 예술미와 기술이 조화를 이룬 ‘포르티끄 미스터리 클락(Portico mystery clock)’을 제작, 특허권을 따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시계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을 더해오던 까르띠에는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코우와 함께 미스터리 클락의 성능을 개발, 향상시켰다.
1907년에 에드몬드 예거와의 공동작업으로 특허권을 딴 손목시계 버클은 시계 제조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까르띠에의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는 대부분 왕실, 귀족, 대부호를 위한 것이였다. 때문에 최고의 디자이너, 시계 기술자, 감정사, 세공 전문가, 광택 전문가들의 손과 최상의 소재가 사용됐다. 이러한 엄격한 소재 선택과 완벽한 세공, 제조 기술은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에 접어 들면서 까르띠에는 여러 라인의 시계를 개발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외국인들이 한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며 각종 행사(파티, 결혼식, 재혼식, 음악회, 공연)에 멋들어지게 입고 간다. 해외 수출 시 부가비용 탓에 한복 가격이 한국보다 3배가량 비싼데도 인기가 좋다.” 질경이 우리옷 이기연 대표가 약 10년간 해외 패션쇼와 컬렉션, 수출을 진행하면서 직접 보고 느낀 경험담 중 일부다.
우리 고유의 전통 의상 한복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외국인이 더 높게 평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인은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격식을 차려야 하는 각종 행사에서 자랑스럽게 한복 자태를 뽐내는 반면 우리는 양복, 드레스 등 서양식 옷을 입고 마치 신데렐라나 귀공자라도 되는 것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우스운 꼴을 보인다. 한복의 구성과 입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양장에 커프스버튼(와이셔츠의 소맷부리를 여미는 장식단추)이나 행거치프(양복 가슴 포켓에 장식하는 작은 천)까지 갖춰 입는 사람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한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마음가짐도 궁색하기 짝이 없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수입옷을 구매할 때는 거침없이 지갑을 열지만, 30만~50만원의 한복은 ‘돈 아깝다’며 빌려입고 마는 문화가 만연됐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민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20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한복은 홀대당하는 비참한 현실이다.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설빔으로 한복을 지어 입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과연 한복을 보고 감탄해 눈물 흘릴 한국인이 있을까. 전통문화를 계승시키고 바꾸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문화는 자국에서부터 꽃피어 확장돼왔다. 한류의 주역인 K-팝과 K-드라마가 그랬다. K-패션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 것을 잃어버린 채 외국 문화를 좇고 그 세계에 젖어든다면 진정한 세계화는 없다. 겉과 속이 다른 한류는 무의미할 뿐이다. 전 세계인이 한류에 주목하고 있다. 문화를 확장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첫 번째의 몫은 우리에게 있다. 이는 불변의 이치다.
◇GMT-마스터 II= 904L 스틸 소재의 오이스터 퍼페츄얼 GMT-마스터 II 모델은 두 가지 색상이 동시에 사용된 획기적인 세라크롬(CERACHROM) 베젤이 장착됐다. 세라크롬 베젤은 롤렉스가 자체 개발해 2005년 특허를 획득한 세라믹 소재다. 24시간을 담은 세라크롬 베젤은 낮과 밤 시간을 구분하기 쉽도록 반은 블루, 반은 블랙으로 표시돼 1955년 오리지널 GMT-마스터 베젤의 전통을 잇는다.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 ‘자동차 경주 레이서들을 위한 시계’로 태어났다. 올해 출시 50주년을 맞은 데이토나는 2013년부터 F1의 글로벌 파트너이자 공식 타임키퍼로 선정됐다. 올해 신제품은 데이토나 컬렉션 최초로 플래티넘으로 제작돼, 플래티넘 모델에만 사용되는 아이스 블루 다이얼과 세라믹 소재의 체스트넛 브라운 컬러의 세라크롬 베젤을 장착했다.
◇데이-데이트= 롤렉스는 2013 바젤월드에서 컬러풀한 가죽 스트랩이 장착된 18캐럿 옐로우, 화이트, 에버로즈 골드 소재의 새로운 데이-데이트를 선보였다. 1956년 첫 등장 때 날짜와 함께 요일을 약자가 아닌 전체 단어로 표시한 최초의 손목시계였던 데이-데이트는 명성과 품격의 상징으로, 골드나 플래티넘으로만 제작된다. 신제품은 데이-데이트만의 우아함을 보다 편안하게 표현했다.
◇레이디 데이트저스트 펄마스터= 2013 바젤웰드에서 새롭게 소개된 레이디 데이트저스트 펄마스터는 롤렉스가 자체 주조한 18캐럿 에버로즈 골드 소재 케이스와 브레슬릿, 최고급 다이아몬스가 세팅된 링크, 진주 자개 다이얼, 핑크골드톤 연꽃 모티브로 주목받았다. 특히 롤렉스는 솔리드 링크의 부드러운 라인으로 최고의 여성미와 개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착용감을 높였다.